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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문화(2024)
송은석(수성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위원)
e-mail: 3169179@hanmail.net
상동·중동·하동 ‘여섯 숨은 이야기’, 세상 밖 끄집어내기
프롤로그
대구광역시 수성구 상동, 중동, 하동(지금의 수성동)은 본격적인 도시개발이 시작된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동시에 상·중·하동은 대구에서 가장 넓은 들, 수성들(한들)을 끼고 있었다. 당시 수성들은 동서로 범어천과 신천, 남북으로 수성못에서 지금의 청구네거리에 이르는 광대한 들이었다. 수성들은 들만 넓은 것이 아니었다. 수성못, 신천, 범어천을 끼고 있어 물이 풍부했다. 한마디로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시절 농업의 필요충분조건을 모두 갖췄던 복지(福地)였다. 하지만 복지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복지는 상·중·하동 사람들의 오랜 역사와 문화의 소산이었다.
상·중·하동의 역사와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유적·유물이 있다. 바로 상동 ‘이공제비’, ‘은행나무’, 중동 ‘두꺼비 바위’, ‘이득심 송덕비’, ‘수창군 치소 유적’, 하동 ‘느티나무’ 등이다. 이것들에는 과거 상·중·하동 사람들의 오랜 애환과 희망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옛사람들은 하나, 둘 세상을 떠났고, 자연부락은 도시가 됐다. 이 과정에서 여섯 유적·유물은 땅속에 묻히거나, 깨어지고, 불타고, 옮겨지는 등 수난을 겪었고, 사람들의 관심에서도 멀어졌다. 그럼에도 여섯 유적·유물은 사라지지 않았고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여섯 유적·유물에는 과연 어떤 역사와 문화가 담겨 있는 것일까? 지금부터 상·중·하동의 ‘여섯 숨은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 본다.
상동(上洞), ‘이공제비(李公隄碑)’과 ‘은행나무’
수성들 위쪽에 있어 ‘상동(上洞)’
행정동이자 법정동인 상동은 조선시대 때 대구부 수현내면(守縣內面)에 속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달성군 수성면에 속했다가, 1937년 다시 대구부에 편입됐고, 1963년 동구에 속했다가, 1980년 수성구 상동이 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상동은 신천을 사이에 두고 남구 봉덕동과 인접하고 있다. 약 500년 전만 해도 상동은 신천변 수성들에 형성된 농막촌이었다. 마을 개척 당시 진씨(秦氏)와 손씨(孫氏)가 많이 살았다고 한다. 1954년 항공사진을 보면 지금의 수성로(대구은행 네거리-중동네거리-상동네거리)를 기준으로 신천 쪽에만 마을이 있고 동쪽은 집 한 채 없이 오직 수성들만 펼쳐져 있다. 1970-80년대 이르러 비로소 수성로 동쪽 수성들이 주거지로 개발됐으며, 서쪽은 한동안 예전 전통마을을 유지했다.
상동이란 지명은 수성들 위쪽에 있어 붙은 이름이다. 다른 말로 ‘웃골’, ‘위동’, 한자로는 ‘상촌(上村)’, ‘상동’이라 불렀다. 옛날이야기지만 과거 이 지역에는 “상동은 양반, 중동은 것들(별 볼일 없는 것들), 하동은 상놈들이 살았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1954년 항공사진에는 들안길과 신천 사이에 약 130호 민가가 모여 있는 옛 상동이 보이며, 마을 북쪽에 옛 수성초등학교도 보인다. 조선지지자료(1910년대 초)에 용두진(龍頭津·용두나루)이란 지명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과거엔 신천을 통해 상동까지 배가 다녔던 모양이다.
대구 판관 이서가 쌓은 신천 제방과 ‘이공제비(李公隄碑)’
이공제비는 수성구 상동교 북동쪽 신천변 이서공원에 있다. 이서(李漵·1728-1794)는 조선 후기 정조 때 대구 판관(대구시장)을 지낸 인물로, 1778년(정조 2) 신천에 제방을 쌓아 수해로부터 대구 도심을 지켜낸 명판관이다. 당시 대구부민들은 이서가 쌓은 제방을 중국 송나라 소식(蘇軾)이 축조한 ‘소공제’에 빗대 ‘이공제(李公隄)’라 부르고, 순차적으로 이서의 공을 칭송하는 3기의 ‘이공제비’를 세웠다. 1778년(정조 2) 처음 세운 비는 사라졌고, 지금은 1797년(정조 21), 1808년(순조 8)에 세운 2기만 남아 있다. 현재 이공제비각(李公隄碑閣)에는 이공제비 2기와 대구 군수 이범선 불망비 1기가 있다. 정면에서 마주 보았을 때 왼쪽 2기가 이공제비, 오른쪽 비가 이범선 비다. 이 중 이공제비 2기는 둘 다 한 때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등 기이한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1797년 이공제비와 조태조 여사
2기의 이공제비를 정면에서 봤을 때 왼쪽에 있는 비가 1797년(정조 21)에 세운 비다. 이 비는 오랜 세월 옛 대봉동사무소 뒤 하수구에 두 동강 난 상태로 버려져 있다가, 1972년경 수성동 주민 조태조 여사(당시 37세로 추정, 수성2가 273-5번지 거주)에 의해 세상에 다시 나타날 수 있었다. 그런데 조 여사가 비를 찾아낸 과정이 참으로 묘하다. ‘세상에 이런 일이’에나 나올 법한 일이었다. 당시 조 여사는 불심(佛心)이 남달랐다고 한다. 하루는 조 여사 기도에 ‘비석 어른(이서)이 나타나 이런저런 계시를 했다. 조 여사 친필 기록 중 전반부 일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72년경 나는(조태조)는 기도를 통해 비석 어른(이서)으로부터 “내가 동사무소 뒤 하수구에 묻혀있으니 나를 찾아 다시 제사를 모셔라”는 말을 들었다. 이후 실제로 동사무소 뒤에서 조각난 비석을 찾아냈고, 철끈으로 엮어 보수한 후 예전처럼 다시 제사를 모셨다. 이전에는 배병만 씨가 제사를 모셨고, 비석을 되찾은 이후부터는 우호영 씨가 맡았다. 우호영 씨가 죽은 이후에는 나 혼자 매년 곡차를 올리고 있다...
이공제비(1797)를 보면 조 여사의 기록처럼 비 가운데에 가로로 두 동강 난 부분을 붙여 놓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어지는 조 여사 친필 기록에는 더욱 놀라운 이야기가 쓰여 있다.
신천숲(新川藪)과 언홍정(堰虹亭)
비석 어른이 말하기를 “대구가 잘 살려면 신천변에 다섯 당산나무를 심어 기준을 삼고, 당산나무에 제사를 올려라. 그리하면, 방천둑이 터지지 않고, 대구도 부강할 것이요, 제사를 지내는 사람도 잘살게 될 것이다. 내(이서)가 죽으면 이 당산에서 제사를 받을 것이고, 내 이름은 후세에 천년만년 남을 것이며, 대구를 지킬 것이다”
위는 조 여사의 친필 기록 후반부를 요약한 것이다. 내용인즉슨 이렇다. 비석 어른이 조 여사에게 “신천 제방에 다섯 당산나무를 심고 제사를 모시면 모든 것이 잘될 것이고, 나 역시 천년만년 대구를 지킬 것”이라 계시했다는 것.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신기할 정도로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 다음은 지금으로부터 125년 전인 1899년(광무 3) 간행된 대구부읍지 기록 중 해당 부분을 찾아 요약한 것이다.
○ 신천숲(新川藪) : 대구부 동쪽 5리 하수서면과 동상면에 있다. 길이는 10여 리다. 1778년에 판관 이서가 제방을 쌓고 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했다. 1808년 고을 사람들이 비를 세우고 이공제라 했다.
○ 신천언(新川堰) : 대구부 남쪽 10리에 있다. 1778년 판관 이서가 제방을 쌓았다. 제방 위에 언홍정(堰虹亭)을 만들었다. 언홍정은 1781년 바람에 쓰러져 버렸다. 1808년 고을 사람들이 비석을 세우고 이공제라 했다.
요약하면, 대구 판관 이서가 자신이 축조한 신천 제방에 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하고, ‘언홍정’이란 정자를 세웠다는 내용이다. 제방에 숲을 조성한 것은 미관상 목적보다는 제방을 튼튼하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조 여사 친필 기록과 대구부읍지 내용이 상당 부분 일치한다. 2010년 당시 74세였던 조 여사가 1899년 간행된 대구부읍지 내용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면 모르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 같은 기록을 남길 수 있었을까? 그것도 한문으로 된 대한제국 시기의 대구부읍지를 말이다. 신기할 따름이다. 이 이야기는 이쯤에서 정리하고 이와 관련해 몇 가지 첨언을 하고 싶다.
첫째는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제공하는 1954년 항공사진을 보면 신천 당산나무와 신천숲 일부가 확인된다. 신천숲은 이천동·대봉동에 접해 있는 제방에서 확인되고, 당산나무는 봉덕동·이천동·대봉동 쪽 제방에서 몇 그루 확인된다. 수성문화원 자료(2010 이서공 향사 서류철)에 의하면 신천숲은 1930년대까지 유지됐다고 한다.
둘째는 이서가 제방축조를 할 때 오르내리며 감독했다는 정자 ‘언홍정(堰虹亭)’의 위치가 어디쯤이었을까 하는 의문이다. 이서의 근무지였던 경상감영에서 가까운 곳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이공제 전체를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조망권이 좋은 곳일 수도 있다. 경상감영에서 가까운 곳이라면 당연 지금의 수성교 인근이 된다. 하지만 조망권이 우수한 곳이라면 지금의 봉덕동 래미안 웰리스트 APT(봉덕동1631, 1632)가 위치한 구릉이다. 1954년 항공사진을 보면 지금의 상동교에서 동신교까지 이어지는 신천 좌우는 모두 평지다. 다만 래미안 APT가 자리한 곳만 독산(獨山) 형태로 작은 구릉(고도 약 72m)이 형성되어 있다. 따라서 이곳이 지금의 ‘래미안 APT-수성교-동신교’까지 이어졌던 옛 이공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최적의 위치라 할 수 있다.
한편 과거 신천 범람이 일어났던 구간 역시 이 지점에서 수성교에 이르는 구간이었다. 옛 자료에 나타나는 신천을 보면 이 구간에서 대구 도심 방향으로 여러 갈래 물길이 터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구간에 제방을 축조해 지금과 같은 신천 물줄기를 만들어 냈다. 추정컨대 이서는 이 구릉 위에 언홍정을 세워 신천 전체를 조망하며, 도심 방향으로 흘렀던 여러 갈래 물길을 살피지 않았을까? 또한 옛사람들은 정자를 세울 때 반드시 경치 좋은 곳에 세웠다. 대구도심권 신천 최상류인 이곳에는 두 개의 용두바위(1용두바위·2용두바위), 용두방천, 용두진(龍頭津) 등이 있었다. 주변 경치까지 아름다웠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무래도 이곳이 언홍정이 있었을 최적의 위치였을 것 같다. 동시에 대구부읍지의 “신천언(新川堰)은 대구부 남쪽 10리에 있다”는 기록과도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
1808년 이공제비와 12살 어린이 이학철
1808년(순조 8) 조성된 이공제비 역시 1797년 이공제비 못지않게 특별한 사연이 있다. 먼저 이 비는 두 번이나 땅속 깊이 묻혔다가 세상 밖으로 나온 이력이 있다. 첫 번째 지상 출현은 지금으로부터 126년 전인 1898년 8월이었다. 1898년 무술년 여름, 우리나라에 대홍수가 있었다. 이때 신천 하류 제방이 유실됐고, 제방 보수공사 때 유실된 제방 속에서 이공제비(1808)가 나왔다. 연유는 알 수 없지만 이후 어느 때인가 비석은 또 사라졌다. 두 번째 출현은 1986년 10월 10일 신천대로 공사 때였다. 발견 당시 상황을 보면 수성교 서편 지하도 공사 굴착작업 도중, 지하 10m 지점에서 발견됐다고 한다. 비가 두 번이나 땅속에 묻힌 연유는 알 수 없다. 다만 먼저는 순조에서 고종으로 이어지는 조선 말기-대한제국 시기였고, 뒤는 일제강점기-6·25 한국전쟁-근대기로 이어지는 시기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일면 이해되는 부분이 있다. 제방도 비석도 관리하지 않으면 허물어지고 넘어지기 마련이다. 국가와 백성이 모두 힘들었던 격동의 시기. 과연 어느 누가 넘어지고 물에 떠내려간 비석을 찾아 다시 세울 여유가 있었을까?
또 다른 사연은 비 앞면에 큰 글자로 새겨진 ‘李公隄’ 세 글자에 얽힌 사연이다. 놀랍게도 이 글자는 당시 ‘12살짜리 어린이 이학철(李鶴喆)’이 썼다. 이는 비 뒷면에 새겨진 비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 문장은 모두 11글자인데 다음과 같다. ‘前面大字十二歲李鶴喆書(전면대자12세이학철서)’. 당시에는 고을의 이름난 누정(樓亭) 편액을 나이 어린 어린이가 쓴 예가 종종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밀양 영남루에 걸려있는 두 개의 대형 편액이다.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 편액은 1884년 밀양 부사 이인재의 장남 이증석이 11세 때 쓴 것이고, ‘영남루(嶺南樓)’ 편액은 같은 해 차남인 이현석이 7세 때 쓴 것이다. 대구에도 비슷한 예가 있는데 동구 평광동 소재 단양 우씨 재실인 첨백당에 걸린 첨백헌(瞻柏軒) 편액이다. 이 편액은 우제구(禹濟九)가 9세에 쓴 편액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공제비(1808) 글자 주인공 ‘12세 이학철’이 누구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명판관 이서와 그가 축조한 이공제를 기리는 공덕비인 만큼 ‘12세 이학철’은 분명 비범한 어린이였을 것인데...
이서공(李漵公) 격양가(擊壤歌)
격양가는 발로 땅(壤)을 구르며(擊) 부르는 노래다. 고대 중국 요임금 시절 백성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대평성대를 상징하는 노래다. 이서공 격양가는 이공제를 쌓아 수해로부터 대구 도심을 구한 대구 판관 이서의 업적을 격양가에 빗댄 노래다. 지금도 매년 이서공 향사 때마다 퍼포먼스 형식으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이서공 격양가를 누가, 언제 처음 만들어 부르기 시작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일부 전하는 기록과 구술 자료 등을 통해 대략적인 내력은 확인이 된다. 이서공 격양가 관련해 현재까지 알려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서공 격양가는 매년 정월대보름 새벽, 이서공 향사를 마친 후 농악과 함께 불렀던 ‘쾌지나 칭칭 나네’ 류 가사다. 1980-90년대 이공제비를 관리하고 제사를 받들었던 우호영 씨가 이서공 향사 때 불렀던 노래로, 이 판관의 후손인 덕수 이씨 문중에서 가사 일부를 각색했다.
이서공 격양가 가사는 지금으로부터 250년 전 대구와 신천의 인문지리적 상관관계를 주요 텍스트로 하고, 현존하는 2기의 이공제 비문을 참고해 작사한 것으로 보인다. 총 603자로 구성된 짧은 가사지만 가창에서 발원해 대구를 관통하는 신천 물줄기 흐름, 대구 읍성 구조, 신천 범람 피해, 제방축조 과정, 공사관계자 명단 등이 놀라울 정도로 간단명료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 다음은 이서공 격양가 원문이다.
정월이라 보름날에 쾌지나 칭칭나네 판관이후 신위전에 격양가를 불러주세
대구젖줄 신천물이 가창정대 발원하야 용계동에 모여들어 용두방천 감아돌아
건들바위 굽이굽이 남문앞을 돌아흘러 동산앞에 부디쳐서 달성성곽 옆을따라
달서천에 달라더니 사대문안 낮은지대 비만오면 물바다라 사대문은 어디멘고
남문이층 낙서루요 동편에는 동-진문 서편에는 달-서문 북쪽에는 공-북문
성의둘레 2144보 스물네측 높은성곽 경상감영 공자사당 물에잠겨 가옥침수
물에잠겨 전답수몰 백성들에 애환속에 수천년을 지냈구나
판관이후 도임하여 백성고충 살필적에 치수공사 해야하나 관아창고 비었으니
경비염출 어이할꼬 노심초사 판관이후 손출천금 내어놓고 경시방제 설계하니
고을백성 모여들어 어기영차 가래질로 흙을파서 도랑내고 방구구불러 뚝을쌓고
물길도려 신천내니 장하고도 장하도다 장하고도 장하도다 무지개같이 굽은내를
한일자로 곧게하여 새로내어 신천이라 백성들이 감읍하야 방천이름 이공제라
항주자사 소동파가 서호에다 뚝을쌓아 소공제라 하였더니 판관이후 쌓은뚝을
이공제라 하였구나 이공제비 높이세워 자손만대 기리고자 비석돌을 세울적에
도감역에 라성휘요 도유사에 오-명복 공임에는 김치황등 도목수는 김성옥이요
석수는 김-석추 각수는 김복수라 허유면이 글을쓰고 열두살난 김학철이
전면대사 크게쓰서 무진오월 세웠구나 군수이후 치적있어 이공제비 옆에다가
영세불망 비를세워 두분같이 모셔두고 정월이라 대보름날 제를올려 칭송하네
우리대구 무궁발전 국태민안 하여주소 쾌지나- -칭- - 칭 나 - - 네- - - - -
범어동(상동) 은행나무
범어동 은행나무는 범어네거리 그랜드호텔 쪽 교통섬 내에 있다. 이 은행나무는 1468년(세조 14), 지금의 상동 268번지(상동시장 동쪽)에 처음 심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도시개발로 인해 두 차례 이전 끝에 현 위치에 자리 잡게 됐다. 첫 이전은 1981년 9월 30일, 지금의 상동 상화로 확장 때 주민들의 노력으로 옛 정화여중고(현 정화우방팔레스) 교정으로 옮겨졌다. 두 번째 이전은 2001년 4월 1일, 정화여중고에 APT가 들어서게 되자 지금 위치로 옮긴 것이다. 현재 나무줄기 중앙은 완전히 고사 상태며, 가운데 부분에서 새 움이 나와 새 가지를 뻗고 있다. 높이 15m, 둘레 3m, 수령은 약 560년으로 추정되며(800-1,000년으로 보기도 한다)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본래 있었던 곳을 따라 ‘상동 은행나무’라고도 한다.
범어동 은행나무에도 전설이 하나 전한다. 은행나무가 상동에 있었던 시절, 여름이면 마을 노인들이 나무 그늘에 멍석을 펴고 윷놀이를 즐겼다. 하루는 지나가던 한 소년이 멍석에 물을 뿌리고 멍석을 위로 던지니, 멍석이 마치 연처럼 나무 위로 훨훨 날아갔다고 한다. 이때부터 은행나무에 물을 뿌려 주는 사람에게 힘이 생긴다는 전설이 생겨났다.
중동(中洞), ‘두꺼비 바위’, ‘이득심 송덕비’, ‘수창군 치소유적’
수성들 가운데 있어 ‘중동(中洞)’
법정동이자 행정동인 중동은 조선시대에 신천을 따라 수성들에 형성된 마을이다. 중동은 조선시대 때 대구부 수현내면(守縣內面)에 속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달성군 수성면에 속했다가, 1937년 대구부에 편입됐고, 1963년 동구에 속했다가, 1980년 수성구 중동이 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중동은 신천을 사이에 두고 남구 봉덕동·이천동과 인접하고 있다. 중동은 약 5백 년 전, 수성들을 배경으로 형성된 마을로 경주 이씨, 추계 추씨, 경주 최씨, 초계 변씨가 부락을 이뤄 거주했다. 1910년대 마을 규모는 경주 이씨 160호, 추계 추씨 140호, 경주 최씨 53호, 초계 변씨 50호 등 성씨별로 집성촌을 이뤘으며 인구는 2,400명 정도로 전 가구가 농업에 종사했다.
중동이란 지명은 수성못에서 신천을 따라 대구 도심으로 이어지는 수성들을 중심으로 상동과 하동 사이에 있어 얻은 동명이다. 1975년 토지구획정리사업 때 수성로(대구은행 네거리-중동네거리-상동네거리 구간)를 기준으로 동쪽은 신주택지로 개발됐고, 신천변에 접한 서쪽은 기존 전통마을을 한동안 유지했다. 1954년 항공사진에는 130-150호(중부리 포함) 규모 옛 중동마을이 보인다. 조선지지자료(1910년대 초)에는 ‘중동진(中洞津)·중동나루’란 나루 이름도 등재되어 있다. 중동과 하동 사이에 있었던 중부리는 신천에서 빨래를 많이 해 빨래터라 부르기도 했다.
흉을 물리치고, 물을 다스렸던 ‘두꺼비 바위’
1980년대 초까지 지금의 중동시장 인근 동제단(洞祭壇·마을제사 제단)에 있었던 돌두꺼비다. 형태는 계란형인데 길이 80cm, 높이 50cm쯤 된다. 언제 누가 무슨 목적으로 처음 설치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수성구청에서 발간한 수성구 역사적 장소 발굴 용역(2020)자료집에 의하면, 두꺼비 바위는 오래전부터 중동시장 삼거리 당산나무 아래에 있었다고 한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사진이 남아 있는데 1966년 당시 경북대 윤용진 교수가 촬영한 것이다. 사진에는 흙돌담을 배경으로 시멘트로 마감한 제단 위에 당산나무, 이득심 송덕비, 두꺼비 바위가 한자리에 모여 있다.
위 자료집에 소개된 주민 구술에 의하면 두꺼비 바위가 있던 곳은 정월대보름 마을 제사를 지내던 동제단이었다고 한다. 이곳에 두꺼비 바위를 모신 것은 두꺼비가 흉을 물리치고 길을 불러온다거나, 수해를 막는다는 민간신앙, 풍수신앙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중동은 신천변에 자리한 마을로 지금처럼 제방이 있기 전에는 수해가 제일 큰 걱정이었다. 그래서 마을에 당산나무, 두꺼비 바위, 송덕비를 모신 동제단을 만들어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했던 것 같다. 오랜 세월 중동 주민의 기도 대상이었던 두꺼비 바위와 이득심 송덕비는 1980년대 도로 확장 때 각각 수성구청과 옛 중동동사무소(현 중동경로당)로 옮겨졌지만, 아쉽게도 당산나무는 사라지고 없다. 수성구청으로 옮겨진 두꺼비 바위는 한동안 본관 뒤뜰 화단에 놓여 있다가, 2021년 수성구청 정문 옆으로 옮겨 지금은 작은 분수시설 중앙에 놓여 있다.
제주도엔 여인 김만덕, 중동엔 여인 이득심, ‘이득심(李得心) 송덕비(頌德碑)’
“제주도에 여인 김만덕이 있었다면 대구에는 여인 이득심이 있었다”
이득심 송덕비는 과거 지금의 중동시장 인근 동제단에 있었던 비다. 구한말 고종 때 상궁을 지낸 이득심의 선행을 기리는 송덕비다. 이득심은 인천 이씨로 헌종, 철종 시대인 1850년경 대구 중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현풍 현감을 지낸 이재연(李在淵)이다. 어린 나이에 궁궐로 들어가 궁녀 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내명부 정5품 상궁까지 올랐다. 상궁은 왕의 후궁인 내관을 제외한 궁녀로서는 내명부에서 가장 높은 지위다.
조선 말 고종 때 국운이 쇠퇴하고 조정의 조직과 기능이 축소되자, 그녀는 상궁을 사직하고 고향인 중동으로 돌아왔다. 당시 그녀의 눈에 비친 중동 주민들 모습은 비참했다. 흉년과 조세 때문이었다. 그녀는 사재를 털어 주민들의 조세를 덜어주고, 가난과 기아에 허덕이던 주민들을 구휼했다. 중동 주민들은 이러한 그녀의 선행을 기리기 위해 1923년 마을 당산나무 아래에 이득심 송덕비를 세웠다. 이후 송덕비는 중동 경로당(옛 중동동사무소) 앞으로 옮겨졌다가 2016년 지금의 중동행정복지센터 앞에 자리 잡았다.
이득심 송덕비는 중동경로당 시절 1기가 추가돼 2기가 됐다. 하나는 1923년 처음 세운 옛 비이며, 다른 하나는 옛 비 글자가 닳아 보이지 않아 1980년 조성한 새 비다. 비 앞면 중앙에 세로로 ‘전정경부인이득심지송덕비(前貞敬夫人李得心之頌德碑)’, 그 좌우로 그녀의 덕을 칭송하는 글이 새겨져 있으며, 옆면에는 계해년(1923) 1월 중동에 세웠다고 새겨져 있다.
그녀는 상궁으로 있을 때 아버지와 함께 잃어버린 시조 묘를 비롯한 선조 묘와 서울 강남 일대 약 6만 평에 이르는 광대한 옛 문중 토지를 되찾은 일이 있었다. 2017년 인천 이씨 공도공파 문중에서 그녀의 이러한 공로를 기리기 위해 충남 천안 시조 묘 인근에 그녀의 추모제단을 설치했다. 하지만 이 같은 큰 족적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대구 중동에서의 삶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안타까울 따름이다.
통일신라시대 대구시청 소재지, 중동 ‘수창군 관아 유적’
2019년 수성구 중동 356-7번지 일원에서 복합주거시설 공사와 함께 문화재 발굴 조사가 실시됐다. 이때 출토된 몇몇 유물에 지역사회가 놀랐다. 출토된 유물 중 일부가 매우 특별한 유물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수성구는 신라시대에는 위화군(喟火郡) 또는 수창(壽昌)이라 불렸고, 고려시대 때 수성이 됐다. 통일신라 이전 대구에는 달구벌(대구 도심), 수창(수성), 팔리(칠곡), 하빈, 화원이 있었다. 이 중 중심 세력은 달구벌이었다. 하지만 통일신라시대 신문왕(재위 681~692) 이후 대구 중심은 달구벌이 아닌 ‘수창’으로 바꿨다. 신문왕이 신라 수도를 경주에서 달구벌로 천도하려다 무산된 이후였다. 이 일로 경주 기득권 세력은 위상이 높아진 달구벌을 경계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기존 달구벌 아래에 있던 수창을 ‘수창군’으로 승격시키고, 대구현을 비롯한 팔리현, 하빈현, 화원현을 수창군의 속현으로 만들어 수창군이 거느리게 했다.
이러한 사실은 문헌자료를 통해서는 확인이 됐지만,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고고학 유물은 그동안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2019년 수성구 중동시장 북쪽 아파트 신축공사 현장(골드클래스 더 센텀 APT)에서 의미 있는 유물이 발견됐다. 공사와 함께 진행된 발굴 조사에서 삼국-조선시대에 이르는 여러 유물이 출토됐다. 그중에는 연화문 수막새, 당초문 암막새, 귀면와, 치미편 등이 있었다. 이는 아무 곳에서나 출토되는 유물이 아니었다. 신라 수도 경주의 궁궐, 관아, 큰 사찰 터에서나 출토되는 매우 특별한 유물이었다. 이를 토대로 전문가들은 지금의 수성구 중동 일원이 옛 수창군의 중심이었고, 이 유물이 출토된 지역에 수창군 관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출토된 유물 연대가 8세기 중엽인 것도 문헌자료에 나타나는 수창군 승격과 거의 일치한다. 현재 수성구 중동 골드클래스 APT 서편 출입구 옆에 이런 내용을 상세히 담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하동(下洞)(수성동), 당산나무
수성들 아래쪽에 있어 ‘하동(下洞)’
수성동은 본래 대구부 수현내면(守縣內面)으로 수성들 아래에 있어 하동이라 불렀다. 이후 하동(대봉교 남쪽) 북쪽에 새로운 마을인 ‘신하동(新下洞·수성교-대봉교 사이)’과 ‘신동(新洞·수성교 주변)’이 생겼다. 수성동은 본래 하동과 배일촌(동구 신천동) 사이 들판으로 전부 논밭이었으나, 1950년대 초 이미 큰 마을을 형성했다. 과거 하동은 북쪽으로 지금의 수성교 인근, 남쪽으로 희망교, 동쪽으로 대구은행 네거리, 서쪽으로 신천이 경계였다.
수성동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신동(新洞)을 병합해 하동(下洞)으로 하고 달성군에 편입됐다가 1938년 다시 대구부에 편입됐다. 1966년 수성동을 수성1가, 2가, 3가동으로 개칭했고, 1975년 수성1가동, 수성2·3가동으로 분동했다. 1979년 신천동 일부를 편입해 수성4가동을 신설하고, 1980년 동구에서 수성구로 편입됐다. 1954년 항공사진에는 지금의 수성교 동쪽에 약 270호 규모의 마을과 희망교 북쪽에 약 140호 규모의 마을이 보인다. 현재 수성동은 신천을 사이에 두고 남구 이천동·대봉동·삼덕동과 인접하고 있다.
당촌(堂村)과 당산나무
당촌은 과거 수성1가동에 있었던 자연부락이다. 현 신세계 APT(옛 대륜고)남쪽 세 그루 느티나무 노거수가 자리한 마을이다. 당촌이란 이름은 마을에 있었던 당산나무에서 유래됐다. 당촌에는 500년 된 당산나무 전설이 전한다. 옛날 이곳에는 사형장이 있었다고 한다. 한 사형수의 아버지가 사형장에서 죽은 아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자신이 짚고 있던 지팡이를 꽂고 위안제를 지냈는데, 이 지팡이가 살아나 당산나무가 됐다는 전설이다.
‘수성1가 느티나무’로 알려진 수성동 당산나무는 옛 당촌에 남아 있는 세 그루 느티나무로 수령은 250-400년이다.(1954년 항공사진에서도 확인이 된다) 본래 네 그루가 있었는데 20여 년 전 동네 아이들 불장난으로 한 그루가 죽었다. 수성동 당산나무는 옛날부터 당산목(堂山木)으로 모셔졌다. 주민들은 정월대보름이면 이곳에서 마을의 풍년과 평안을 기원하는 당제를 지내왔으며 지금도 지내고 있다. 세 그루 당산나무 중 남쪽에 있는 것이 가장 굵은데 가슴높이 둘레 5m, 전체 나무높이 15m로 세 그루 모두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아주 오래전에는 이곳 당산에 일곱 그루 당산나무가 있었다고도 한다.
수성동 당산나무에는 또 다른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전한다. 일제강점기 때 대구에 주둔한 일본 보병 80연대 일부 병력이 한여름 훈련을 하다가 이 나무 그늘에서 땀을 식히고 있었다. 그런데 일부 몰지각한 일본 군인들이 나무둥치를 발로 차기도 하고, 나무 위에 걸터앉아 가지를 꺾기도 했다. 당산목에 대한 이들의 행패를 보다 못한 한 노인이 “이 나무는 마을 수호신이니 무례한 행동을 삼갈 것”을 청했다. 이 말을 들은 일본 군인은 “그따위 미신이 어디 있느냐”며 비웃으며 나무 아래 쌓인 보리 짚 더미에 불을 질렀다. 동민들은 겁에 질려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들의 만행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보리 짚 더미를 다 태운 불은 신기하게도 느티나무로는 번지지 않았고, 불을 지른 일본 군인은 그 자리에서 게거품을 물고 사지를 뒤틀며 급사했다고 한다.
에필로그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전설)가 된다”
앞서 살펴본 상·중·하동의 여섯 이야기는 오랜 세월 지역민들 사이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물론 이공제비, 두꺼비 바위, 이득심 송덕비, 수창군 관아 유적, 은행나무, 당산나무처럼 구전의 사실성을 뒷받침하는 실체도 분명 존재한다. 이 실체들은 살펴본 것처럼 땅속에 묻히기도 하고, 두 동강도 나고, 여러 번 옮겨지는 등 갖은 수난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까지 살아남아 우리 곁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력이 기록이 아닌 주로 구전으로 전해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런 게 바로 ‘달빛에 물들면 전설’이 된다는 것이 아닐까?
민초들 사이에서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상·중·하동 여섯 이야기. 이제는 달빛이 아닌 밝은 세상 밖으로 나와 ‘햇빛에 바랜 역사’로도 알려질 때가 된 것 같다. 더 늦기 전에 흥미로운 ‘전설’에다 분명한 ‘역사’가 더해지면 좋겠다. 지역 사랑은 캠페인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 지역 사랑이다.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이야기가 풍성해질수록 지역민의 지역사랑은 높아지는 법이다.
부록
조태조 여사 친필 기록
1962년 제 나이 28세 때 방천시장에서 노상 상자(장사)를 하면서 보았는 일인데, 노상에서 장사하는 사람들한테 혹독하게 장세를 거두기에 이 돈은 누가 어디에 쓸려고 이렇게 알뜰히 거두나 했었는데, 배병만 씨가 관리하고 정월 14일 저녁에 비석 어른께 제사를 올리고, 보름날 큰 잔치를 하고 마음껏 먹고 풍악을 울리고 시장 사람 아주 즐겁게 노는 것을 보았지요. 그 사람이 40-50명 거느리고 아주 주먹도 센 사람이라, 그때는 아무도 말을 못하고 그 사람이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권력을 가진 사람이 배병만이었어요.
그러는 중 나는 병이 나서 3년을 장에 한 번도 못 나왔지요. 그 후 시장에 나와 보니 그 큰 당나무도 없고 비석 어른도 없고 길은 크게 넓어져서 시장 사람이 길에 나와 장사하고, 몇 년이 지났는지 나는 영화사 절에 가서 수행 중이고 수행하면서 “이런 것을 좀 고쳐 줄 수 없나”하고 묻기에 “기도하세요” 했더니, 기도하는 중에 이 사람이 까물어져서 원인을 알고 기도도 해야 되는구나 하면서 제가 그 원인을 알려고 할 때, 이 비석에 영이 나타나서 “열심히 섬겼으면 끝까지 섬기지 너 힘도 주고 권력도 주고 돈도 많이 벌게 해 주었는데, 이 비석이 하수구에 빠져 있어도 모르고 저 힘이 어디에서 주어서 그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는 권력이 생겼는줄 모르는 놈은 죽어 마땅하며, 다른 사람을 잡겠다” 하시며 사라졌어요.
그래서 제가 다니던 절에 가서 스님께 이야기했었지요. 나는 그때 파동 물가 언덕 밑에서 기도하는 중이었어요. 그 당시 우호영 씨도 몸이 아파 내가 기도하는 언덕 밑에 찾아왔고, 또 몇 사람이 찾아왔었지요. 스님이 하시는 말씀이 “너가 나서면 찾을 수는 있지만 이 비석을 개인이 찾아서 되지 않고 시청이나 관할 관청에서 찾아야 될 것이다”. 그래서 스님이 시청에 가서 시장님을 만나서 이야기 한번 해 보겠다고 하셨어요. 시장님을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더니 시장님 하시는 말씀이 “아직 아무 계획이 없고 길도 완성되지 않았으며 어디에 비석을 모시는 것도 정해지지 않았고 시 재정에 계획도 없으니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스님이 하시는 말씀이 “여러 사람이 아프고 가난에 시달리니 시장님께서 허락하시면 우선 개인이 찾아서 모셔 놓고 섬길 사람을 구하는 것을 허락해 주시면 좋겠다”고 했더니 마음대로 하시지요.
그래서 스님이 하시는 말씀이 “자네가 나서면 자네가 기도 시키는 사람만 조금씩 모아서 이 비석을 찾고, 큰 잔치를 열고 제만을 올리고 정월 14일 저녁에 제사는 우호영 씨가 앞장서고 돈은 조금씩 내서 하면 될 것이다” 하시기에 우호영 씨가 하던 장사를 치우고 장례사를(장의사) 차리고 아는 소리를 하면서 빠른 속도로 부자가 될 것이다. 그래서 기도를 시작했는 것이 이 비석을 찾는데 도움이 되었지요. 기도를 하는데 동사무소 뒤 하수구에서 찾을 수 있다기에 그곳에 가보니 비석이 조각이 나 있어서, 철끈으로 조각을 묶어서 수성교 다리 옆에 모셔 놓고 점안식도 하고 큰 잔치도 열고 제사도 크게 올렸지요.
몇 년 후에 길도 포장하고 대구백화점(대백프라자) 도 완공되고 나니 시청에서 당집을 잘 세워서 비석을 모신 것을 보았지요. 그 후에 스님은 돌아가시고 우호영 씨가 몇 년 동안 제사를 모시다가 나이가 많아서 돌아가시고, 그때 기도에 참석한 사람은 저하고 다른 한 사람이 있으니 지금 2명이 남았는 셈이지요. 우호영 씨가 돌아가시고 다른 몇 사람이 제사를 지내면 부자가 된다는 소리에 제사를 지낼려고 나섰지만 별 효과가 없어 그만 중단했는데 저는 계속 (해마다) 곡차를 올렸지요.
이 비석 어른이 판관 시절에 하시는 말씀이 “우리 대구가 잘 살려면 가창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이 비만 오면 대구 시내가 물바다가 되니, 물길을 만들 때 다섯 개 당나무를 심어서 기준을 삼고 신천을 만들어 그 나무에 제사를 올리면, 방천뚝이 터지지 않고 대구시도 부강할 것이고 제사를 지내는 사람도 잘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비석 어른이 돌아가시면서 후계자에게 “후세에 내가 죽으면 이 당산에서 제사를 받을 것이고 네(내) 이름은 후세에 천년만년 남기고 대구시를 지킬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정월 14일 저녁에 제사를 지내고 정월대보름에 풍악을 울리고 잔치를 했다는 말을 들었지요.
제가 이 비석을 찾은 세월이 벌써 38년이 되었습니다. 올해도 제가 정월 14일 곡차를 바치러 갔더니 ‘이제(이공제) 선생님 추모제’를 한다는 현수막을 보게 되어서 참석을 하였더니, 김춘영 사무국장님을 만나게 되고 이상규 교수님을 만나서 이런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대구시 수성구 수성2가 273-5. 전화 : 763-1314. 조태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