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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시놉시스
짝 패
작가 김운경
기획의도
1.환타지 또는 퓨전사극이 난무하는 요즈음 본 드라마는 전통 민중 사극을 표방한다.
2.. 궁궐 중심의 드라마에서 탈피하여 그 동안 잘 다루지 않았던 조선조 말엽, 가난하지만 선량하게 살아왔던 노비와 거지, 갖바치, 백정, 도적, 왈자패등 소외된 인간들의 삶과 사랑을 보여준다.
3. 부패한 탐관오리들을 척결하려는 정의로운 포도부장과 의적의 모습을 통하여 오늘의 현실을 되돌아본다.
등장인물
천둥(16세,26세) 거지움막에서 자라나 의적이 된 주인공.
귀동(16세,26세) 본명은 대길이다. 김진사 집에서 자라나 포도부장이 된 주인공.
동녀(16세,26세) 여주인공. 서당훈장 성초시의 딸. 학문이 깊고 영리하다.
금옥(10세, 20세)귀동의 여동생. 나중에 커서 천둥을 사랑한다.
막순(27세,38세,48세)거지움막에서 아이를 낳은 노비출신의 여인. 남달리 모성애가 강하고 운명을 개척하려는 의지 또한 강열하며 탐욕스럽다.
쇠돌(35,46세,56세)막순과 함께 같은 집 노비로 있다가 막순을 살리려고 같이 도망 나온 사내. 막순을 평생 사랑하며 천둥을 마치 자신의 아들처럼 여 긴다. 지극히 선한 심성의 소유자.
장꼭지(40세,,51세,61세)거칠고 무식한 거지왕초.
큰년(35세,46세,56세)장꼭지의 아내였으나 자근년에게 밀려난 후, 세월이 흐른뒤 팥 죽장사를 하며 쇠돌과 함께 산다. 나름대로 경우가 있고 인정 많다.
자근년(28세,39세,49세)장꼭지의 첩실로 들어와 아들 도갑을 낳는다. 탐욕스럽고, 이 기적이다.
도갑(14세,24세)장꼭지와 자근년 사이에 태어난 아들. 거지움막에서 왕자처럼 자 라며 천둥을 친형처럼 따른다. 그러나 어린시절 부터 키워온 도벽으 로 인하여 장성하여 좀도둑이 된다.
진득(16세,26세)거지움막에서 유일한 천둥의 친구. 나중에 커서 장안을 주름잡는 왈 자패 왕두령의 수하가 된다.
달이(15세,25세)갖바치의 딸로 태어나 조실부모하고 갖바치 할아버지 밑에서 말괄 량이로 자란다. 어릴 때부터 양반집 도련님인 귀동을 사랑한다. 커 서는 기생이 된다. 가무에 능하고 특히 소리를 잘한다.
김진사(38세,49세,59세)김재익. 탐관오리의 전형인 귀동의 아버지. 이기적이고 인 색하다.
성초시(35세) 성수창. 마을 서당 훈장. 청렴하고 곧은 엄청난 학문의 소유자.
권씨(33세,43세)재취로 들어온 김진사의 부인이자 귀동의 계모이며 금옥의 어머니. 자신의 친정 집안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고 사치를 즐기며 자기 과시적이다. 어릴때부터 항상 귀동을 못 마땅해 한다.
박서방(38세,49세,59세)김진사집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집사. 윗사람에게는 꼼짝 못하고 아랫사람은 함부로 대하는 전형적인 아전이다. 교활하고 권모 술수에 능하다.
방울네(35세,46세,56세)김진사집 여종.
삼득(33세,43세)김진사집의 속칭 잘생긴 머슴. 연상의 막순을 은근히 좋아하는 난봉 꾼. 나중에 한양에 올라가서 막순이 주막을 차리자 함께 동거한다.
장노인(53세)달이의 할아버지인 갖바치.
월향(25세,35세)달이가 어릴 때 갖바치 집에 꽃신을 맞추러 왔다가 달이를 알게 된 기생. 나중에 행수 기생이 되어 기방을 차린 뒤 달이와 함께 생활한다.
껄떡(28세,38세)밥과 여자만 보면 껄떡거리는 장꼭지의 부하거지. 자근년도 어떻게 한번 해 볼까 하다가 장꼭지에게 맞아 죽을 뻔 한다. 나중엔 장꼭 지를 밀어내고 왕초가 된다.
붓들(17세,27세)소잡는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소년시절에는 힘이 세기로 소문난 악동 으로 달이를 좋아하기도 했다. 나중에 성장하여 천둥의 천거로 포도 청에 말단 포졸로 들어가 귀동을 보필한다.
붓들네(40세,50세)대가 세고 극성스러운 붓들의 엄마. 백정마을 초입의 달이네 옆집 에 살다가 붓들이 장성한 뒤로는 막순의 주막 주방에서 허드렛 일을 한다.
그 외, 왕두령(40세),이참봉(45세),춘보(35세),금부도사등 다수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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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제1부
조선조 말엽, 1840년..
안동 김씨의 핵인 순원왕후의 수렴청정하에 8살의 어린나이에 보위에 오른 헌종은 아직도 철모르는 15세의 나이에 불과 하였다.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양대 외척의 세력다툼은 풍양 조씨의 수장인 조만영의 죽음으로 정권은 완전히 안동 김씨의 수중으로 들어가 안동 김씨의 세도는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그들의 세도정치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1840년을 전후로 계속된 가믐과 기근이 전국을 덮쳤다.
민심은 흉흉했고, 역병과 괴질이 마을을 휩쓸고 지나갔다.
도처에 유리걸식하는 무리들이 생겼으며, 죽산에서는 관청을 때려 부수는 민란이 일어나 죽산부사가 처형당했다는 소문이 들려오기도 했다.
정치는 어지러웠고, 민생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역사를 배경으로 이야기는 가상의 마을 충청도 용천고을에서 시작된다.
원래 마을 이름은 용마골.
이 마을에는 오래전부터 장수아기의 전설이 전해 내려왔다.
내용인 즉슨 용마가 우는 밤에 이 마을에서 태어난 아기는 이다음에 훌륭한 장수가 되어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 죽는다는 전설이었다.
어느 날 밤, 장대비가 쏟아지고 뇌성벽력이 치는 가운데 두 아이가 같은 마을, 같은 날 밤, 같은 시각에 태어났다.
마을을 떠도는 걸인 중에 하나가 그 날 밤 용마가 우는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는 사람이 있었으나, 아무도 그 말을 믿으려 하진 않았다.
두 아이가 태어난 곳은 각각 다른 곳이었다.
한 아이는 만석지기 부자이며 안동김씨인 김진사(38세)댁의 장손으로, 다른 아이는 거지 움막에서 아비조차 알 수 없는 거지 여인의 아들로.
그러나 불행이도 김진사 부인 최씨(35세)는 난산 끝에 아이의 얼굴도 제대로 못 본채 다음날 아침 세상을 뜨고 만다.
아들을 얻은 기쁨도 잠시, 아내를 잃은 슬픔에 넋이 나간 김진사.
그는 비통해 하며 아내의 장례를 치루는 한편, 급히 유모를 구하려고 수소문 해 보았으나, 근동에서는 딱히 마땅한 유모를 구할 수가 없었다.
아쉬운 대로 젖을 뗀지 얼마 안 되는 인근 마을의 새댁을 데려와 젖을 물려보았으나 젖은 잘 나오지 않고 아이의 보채는 울음소리만 높아갈 뿐 이었다.
이때 초상집에 문상을 빌미로 술과 떡을 얻어먹으러 온 마을 밖 거지들에게서 귀가 번쩍 뜨이는 소문이 들려왔다.
김진사의 아들이 태어나던 날 밤, 거지 움막 안에서 어떤 여자도 아기를 낳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산모도 건강하고 아이도 건강하니 그 여자를 불러서 젖을 한번 물려보라고 권유했다.
김진사는 즉시 집사인 박서방(중인, 35세)을 불러 거지들을 따라가 확인해 보고 오라 일렀다. 박서방이 힘께나 쓰는 머슴 삼득(22세)을 데리고 움막을 가보니 과연 소문대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기 엄마의 이름은 막순이.
막순(27세)은 원래 한양 은담골 이참봉집 안방마님의 몸종이었다.
어느 날, 이참봉(35세)은 아내 몰래 막순을 건드려 임신하게 만들었고, 그 사실을 안 안방마님은 하인들을 시켜 막순을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막순이 안방마님의 몸종으로 들어올 때부터 내심 막순을 사랑하고 있었던 쇠돌(35세)은 막순을 살리기 위해 그녀를 데리고 야반도주를 감행하였다.
뒤 쫒아 오는 추쇄꾼들을 따돌리며 두 사람은 필사적으로 달아났다.
쇠돌은 갖은 역경과 고초를 겪으면서도 단 한 순간도 막순을 원망하지 않았다.
막순의 배는 점점 더 불러오고...
세상 어디에도 도망친 노비들을 받아주는 데는 없었다.
그러다 굶주림에 지쳐 쓰러진 곳이 거지 움막에서 멀지않은 인근 마을의 상여막이었다. 쇠돌은 상여막에 막순을 숨겨두고, 구걸을 하여 막순의 배를 채워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구역을 함부로 범접했다는 이유로 죽도록 매를 맞고 끌려 들어간 곳이 장꼭지(40세)라는 거지 두목의 움막안.
두목은 윗마을을 포함하여 거지 30여명을 거느린 근동에서는 알아주는 거지소굴의 맹주였다. 그는 움막 두채를 소유하고 있었고, 웃막에는 큰년(35)이라는 정실을 두고, 아랫막에는 자근년(28)이라는 첩실까지 두고 있었다.
사연이야 어찌 되었건 거지굴에 들어온 이상, 함부로 나갈 수는 없었다.
쇠돌과 막순은 끌려 들어온 그 날부터 꼼짝달싹 할 수 없는 장꼭지의 소유였다.
그런 장꼭지 앞에 김진사의 집사 일을 보는 박서방(40세)이 나타난 것이다.
박서방은 암소를 사 들이듯 막순의 건강 상태를 일일이 확인하곤 흡족해 했다.
장꼭지는 나름대로 한 몫 보자는 심산으로 터무니없는 거액의 몸값을 요구했고, 밀고 당기는 흥정 끝에 막순은 김진사댁 유모로 팔려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막순은 어차피 아무데고 팔려 가더라도 이 거지 움막보다는 낫겠다는 심정에 묵묵부답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막상 움막을 떠나야 할 시각이 되자 아기는 떼어놓고 혼자 가야한다는 박서방의 말에 아연 실색했다.
그녀는 울부짖으며 아기와 떨어질 수 없다며 발버둥 쳤다..
허나 제 아무리 발버둥 쳐도 무지막지한 장꼭지의 완력 앞에선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막순은 자신이 낳은 아기를 움막에 남겨 놓은 채, 김진사집 하인들에게 이끌려 김진사 집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김진사는 거지아이에게 물리던 젖을 자신의 아들에게 물리는 것이 내심 꺼림칙 했으나, 당장 배고파 우는 아이 앞에서 체면이고 뭐고 따질 경황이 아니었다.
김진사는 일단 막순을 목욕제계 시키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힌 다음 행랑채에 머물게 했다.
그리고 집안 식솔들에게 특별히 명을 내려 모유가 잘 나올 수 있도록 영양가 있고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라고 일렀다.
자신의 아기와는 생이별을 하고 팔자에도 없는 남의 집 유모가 되어버린 막순..
김진사집에서는 매일 막순의 눈앞에 진수성찬을 차려 주었으나 막순은 목이 메어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어떤 맛있는 음식이 들어와도 사랑스런 내 아기를 품은 채 움막 안에서 먹던 찬밥 덩이만도 못했다.
막순은 김진사집 아기에게 젖을 물리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내 살가운 내 새끼에 대한 그리움뿐 이었다.
막순은 밤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단장이 끊어지는 듯한 피울음을 토해냈다.
김진사는 아들의 이름을 대길이라고 지었다. 아명은 귀동이. 그야말로 사십이 넘은 나이에 아내를 죽이고 얻은 귀한 아들이었다.
한편, 거지 움막에 홀로 남겨진 막순의 아기는 천둥이라고 불리워졌다.
천둥치는 날 거지움막에서 비천하게 태어났다는 뜻이리라.
막순이 떠나고 난 뒤, 아기의 운명은 쇠돌이가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쇠돌은 20리 길이 넘는 고리백정 마을을 오가며 갓난 천둥이에게 눈물겨운 동냥젖을 먹여 키웠다.
그러던 어느 날, 막순은 밥을 얻으러온 거지 아이를 시켜 쇠돌을 김진사집 후원 뜰로 은밀하게 불러내었다. 그리고 쇠돌을 엄청난 음모에 끌어 들였다.
왕후장상의 씨가 어디 따로 있겠소? 나야 이왕지사 팔자가 사나워 이렇게 된 몸, 누구를 원망하지도 않겠소. 허나 내속으로 나온 내 아들 만큼은 팔자를 바꿔 한 평생 양반 집 자손으로 대대손손 잘 살게 해 주고 싶소. 부디 거절하지 말고 눈 딱 감고 날 한 번만 도와주시오.
말인즉슨 아기를 몰래 바꿔치기 하자는 것이었다.
쇠돌은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것은 두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이었다.
망설이는 쇠돌에게 은혜를 잊지 않겠다며 눈물로 하소연하는 막순.
막순의 처지를 이해하고 깊이 사랑하고 있는 쇠돌은 그녀의 부탁을 감히 거절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아기를 바꿈질 하는 거사 날을 정하고 실행에 옮겼다.
두 아이가 태어 난지 보름이 되던 날 밤.
비밀을 무덤까지 가지고 갈 것을 굳게 약속한 두 사람은 김진사의 후원 뒤뜰에서 강보에 싸인 아기를 깜쪽같이 맞바꾸었다.
다음 날 막순은 아기가 신열이 있다는 핑계로 의원이 다녀가게 했다.
그런 다음 집안사람들의 출입을 금하고 아기를 아랫목에 꽁꽁 싸서 한 동안 아기의 얼굴을 못 보게 감추었다.
사흘이 지난 후, 유모의 방에 들어온 김진사는 아기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아기가 몰라보게 야위었고, 자신을 닮아 목덜미에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던 붉은 반점 마져 사라지고 만 것이다. 막순은 목덜미의 반점은 아마도 열꽃이 피었다 잦아들 때 함께 사라진 것 같다고 잡아떼었다.
김진사를 비롯한 집안사람들은 아기가 심하게 앓다보면 그럴 수도 있겠거니 막순의 말에 속아 넘어 갔지만, 단 한사람 박서방의 처 방울네(35세)만은 의혹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그야말로 어디다 대놓고 말 할 수도 없고, 참으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로부터 14년 후.
유모였던 막순은 김진사댁 여종으로 눌러 앉았다.
뒤바뀐 운명의 비밀은 쇠돌과 막순만이 알뿐, 그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 채 세월은 그렇게 흘러갔다.
15살의 귀동은 누가 봐도 어엿한 김진사댁 장손이었다.
11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버지 김진사는 이미 재취하여, 권씨(32세)를 맞아 들였고, 새어머니가 낳은 여동생 금옥(10세)이 귀동과 더불어 성장했다.
김진사가 장남 귀동에 대해 가지는 애정은 각별했다.
그것은 생모의 얼굴도 모른 채 안쓰럽게 자란 귀동에 대한 연민의 정이 더해진 까닭이었다.
그러나 정작 귀동은 자신을 불행하게 여기는 아버지와 일가친척들의 시선을 이해 할 수 없었다. 생모니, 계모니 그런 구지레한 명분을 따져서 무엇하랴.
자신에게는 오직 유모 한 사람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귀동은 무슨 일이 생기면 계모 권씨를 찾기에 앞서 유모부터 찾았고 막순은 그러한 귀동의 행동을 내심 흐뭇해하며 귀동의 수발을 기꺼이 들어 주었다.
계모 권씨 역시 귀동이 자신보다 유모를 더 좋아 한다는 것을 모르는바 아니었다.
그렇다고 유모에게 질투심을 느끼거나 굳이 그 둘 사이를 떼어내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말썽꾸러기 귀동이 자신에게 붙어서 귀찮게 하지 않고 유모쪽에 가서 붙는 것을 다행이라고 여겼다.
막순은 이미 유모의 역할이 끝난 터 였다,
하지만 집안 식솔들 중 그 누구도 막순을 내 보낼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김진사 역시 막순이 입에서 혹여 나간다는 말이 나올까 두려워 짐짓 막순에게만은 다른 식솔들과는 달리 함부로 대하질 못 했다.
막순 또한 김진사의 집을 자진해서 나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가능하면 오래도록 김진사의 집에 머물며, 귀동이 커 가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이 그녀의 유일한 낙이었고 행복이었다.
막순은 그렇게 자신만의 비밀을 간직한 채 김진사 집에서 눌러 앉아 있었다.
김진사는 인근 마을에서도 소문난 부자였다.
숙부가 호조참판에 부임한지 얼마 안되는 세도가의 집안인데다가 거느리고 있는 소작인들의 호수만 해도 20여호에 달하는 만석꾼 집안의 지주였다.
허나 그는 가지고 있는 엄청난 재산에 비해 지독하게 인색했다.
거대한 농토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을 사람들을 상대로 장리변을 놓아서 기한내에 갚지 않으면 인정사정없이 가산을 몰수하고 내 쫒았다.
귀동은 돈을 갚지 못해 아버지 앞에 끌려와 매를 맞는 소작인의 모습을 심심찮게 보면서 자라온 터였다.
오직 돈 밖에 모르고 피도 눈물도 없는 아버지.
세상을 의롭게 하는 것이 학문의 대의일 진대, 아들에게는 책을 읽어 벼슬길에 나갈 것을 강권하고, 정작 아버지 자신의 행동은 이율배반적이었다.
귀동은 그런 아버지가 싫었다.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으로 그는 책상머리에 붙어 있기보다는 항상 바깥으로 쏘다니며 온갖 잡기에 몰두했다.
김진사는 귀동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나름대로 안간 힘을 써 보았으나, 이미 마음이 엉뚱한 곳에 가있는 귀동을 붙들어 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귀동은 마을에서도 소문난 말썽꾸러기 악동으로 커 가고 있었다.
한편, 천둥은 거지 움막 속에서 거지들과 함께 갖은 고초를 다 겪으며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천둥이 비록 거지들 틈에 섞여 비럭질을 하고 다닐망정 그는 웬지 보통거지들 하고는 확연히 달랐다.
귀 잘생긴 거지는 있어도 코 잘생긴 거지는 없다는 말은 천둥에게는 맞지 않는 말이었다. 그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외모에 마치 비단벌레가 먼지 밭에서 굴러도 때가 묻지 않듯 항상 단정하고 깔끔해 보였다.
행동 또한 거지들 사이에서는 유별난 존재였다.
그는 비럭질을 하고 다닐망정, 남의 집 물건에는 손대는 일이 없었고, 걸인생활에 걸맞지 않게 품행이 단정하고 정직했다.
지난 14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거지 움막안 사람들도 많이 변해 있었다.
장꼭지는 정실부인인 큰년을 버리고 자근년이 낳은 아들 도갑(14세)과 함께 아랫마을에 따로 작은 초막을 짓고 살림을 차린지 오래였다.
그는 딴에는 부지런하게 아침마다 움막에 출청하여 수하 거지들을 호령하고 부려 먹었다. 그 중 머리 나쁘고 힘이 센 껄떡이(28세)가 거지들의 군율을 잡는 사령역을 맡아서 거지들을 괴롭혔고, 문자 속이 훤한 쇠돌은 동냥젖을 먹여 키운 천둥을 자식처럼 여기며 움막을 떠나지 못했다.
철이 들수록 천둥은 엄마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하루종일 비럭질을 다녀도 찬 밥 한덩이 얻지 못한 채 힘없이 저녁노을을 바라볼 때나, 혹은 마을 굴뚝에서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를 때.
뛰노는 아이들 틈에 내 아들을 찾는 동네 아낙의 목소리가 정겹게 들려 올 때면 천둥은 자신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아, 나도 저렇게 나를 불러주는 엄마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늘만큼 땅 만큼 보고 싶은 우리 엄마.
우리엄마는 정녕 어디에 있단 말인가? 어딜 가야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천둥은 설움에 복바치며 흐느껴 울었다.
어느 날, 움막에 돌아온 천둥은 쇠돌에게 엄마의 행방에 대해 다시 한 번 따져 물었으나 돌아온 쇠돌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널 낳은 엄마는 이름도 성도 출신도 알 수 없는 거지여자라는 것. 우연히 내가 상여막을 지나다가 만삭이 된 네 엄마를 만나 이곳 거지 움막까지 데리고 왔다는 것.
그리고 너를 낳고 보름 만에 어디론가 도망갔다는 것. 그러니 애시당초 엄마는 찾을 생각 말라는 것.
장꼭지의 대답도 쇠돌 아저씨와 입을 맞춘 듯 똑 같았다.
그들은 결코 천둥에게 막순의 존재에 대해 사실대로 말 해 줄 수 없었다.
이유는 뻔 했다.
장꼭지는 막순을 김진사집에 유모로 팔아먹은 뒤끝이 꺼림칙했고, 쇠돌은 쇠돌대로 이제와 천둥이 막순을 찾아간들 마음에 상처만 남을 뿐, 아무소용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진사집 외동아들을 바꿈질 하여 거지로 만들어버린 막순.
그녀는 천둥에게 씻을수 없는 죄를 지은 셈이었다.
막순은 간혹 동네 어귀에서 구걸을 나온 천둥의 모습이 눈에 띄면 서둘러 몸을 피해 숨거나 달아나기 바빴다.
그것은 천둥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막순은 세상 어느 누구 보다도 천둥이 두려웠고, 간혹 쇠돌의 입에서 천둥의 이야기가 나오면 얼굴색이 변하며 서둘러 쇠돌의 입을 막았다.
물론 큰년을 비롯하여 몇몇 오래된 거지들은 막순이 천둥의 엄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장꼭지의 무서운 함구령에 의해 아무도 감히 막순의 존재에 대해서 말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이 알고 있는 사실은 사실의 일부였을 뿐이었다.
모든 비밀은 당사자인 막순과 쇠돌 만이 간직하고 있을 뿐,
장꼭지 역시 뒤바뀐 두 아이의 비밀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천둥은 장꼭지와 쇠돌 아저씨가 자신의 과거에 대해 무엇인가 숨기는 게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설령 쇠돌 아저씨의 말대로 엄마가 날 버리고 간 것이 사실이라 쳐도, 이는 필시 어떤 말 못할 곡절이 있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갓난 둥이 어린 나를 버리고 갔을까.
나는 그 곡절을 기필코 밝혀내고 말리라.
그리고 조선 팔도를 다 뒤져서라도 보고 싶은 울 엄마를 꼭 찾아내고 말리라.
엄마를 찾으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돈만 있으면 양반도 살수 있다고 쇠돌 아저씨께서 말씀하지 않았는가.
그렇다. 시전 장사꾼이 되어서라도 돈을 벌어야 한다. 그리고 큰 상인이 되려면 글을 배워야 한다. 글을 배우고, 셈을 익히고, 힘을 기르자.
어린 천둥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악물었다.
장꼭지의 본처인 큰 년은 허구헌날 술타령에 주책스러우나 인정은 많았다.
그러나 이제 늙은 퇴물이 되어 장꼭지에게 버림 받은 채, 움막 한 구석에서 퇴주잔이나 밝히는 한심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모함해서 쫒아내듯, 자근년은 나이 먹어 퇴물이 된 큰 년을 중전의 자리에서 밀어내고 거지소굴의 빈궁마마를 자처했다.
아이를 낳지 못해서 구박 받고 밀려난 큰 년이.
슬하에 한 점 혈육도 없는 큰 년은 자근년의 아들인 도갑(14세)을 미워하는 한편, 천둥을 마치 자신의 친 자식이라도 되는냥 정을 쏟고 살갑게 대해 주었다.
쇠돌은 그러한 큰년을 누이처럼 고맙게 여겼고, 천둥을 자신의 아들이나 진배없이 생각했다.
천둥은 쇠돌 아저씨가 자신에게 아무리 잘 해 주어도 밉고 원망스러웠다.
분명 쇠돌 아저씨는 엄마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도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가증스러웠다. 뼈속 깊이 새겨 있는 의문은 날이 갈수록 고개를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천둥은 쇠돌이 없는 사이를 틈 타 몰래 감춰 두었던 얻어 온 술을 큰 년에게 바치며 권했다.
그리고 그녀가 얼큰하게 취하길 기다린 뒤, 자신의 생모가 누군지 넌지시 물어 보았다. 처음엔 모른다고 잡아떼던 큰 년은 술잔이 서너 순배 더 돌아가자, 그 동안 말 못하고 가슴에 담고 있던 출생의 비밀을 넋두리처럼 늘어놓았다.
니 에미 년은 에미도 아니다. 찾을 필요 없다. 아무리 남의 집 유모로 팔려 갔을망정, 천하에 한 점 혈육인 너를 한 번쯤은 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오늘 날까지 단 한 번도 너를 보려고 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니가 찾아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천하에 몹쓸 년이 네 에미 년이다. 더 이상 알려고 하지마라.
천둥은 큰년이 아줌마가 욕하는 여자는 김진사댁 유모 막순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천둥은 알고 싶었다. 왜 날 버리고 대갓집 유모로 갔는지.
그날 밤, 천둥은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이튿날 김진사의 집 앞으로 간 천둥은 감히 김진사집 대문을 두드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집 근처를 배회하다가 용기를 내어 하인 흥만(28세)에게 유모에게 긴히 할 말이 있음을 알렸다.
거지 아이가 찾는다는 말을 전해들은 막순은 대문 사이로 천둥을 내다보다가 정신이 아득해 지며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쇠돌이에게 익히 들어온 천둥이였다.
누가 봐도 김진사를 빼어 닮은 외모임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그녀는 천둥을 더 이상 눈 뜨고 볼 엄두가 나질 않았다.
막순은 흥만에게 다시는 거지들이 집 앞에 얼씬하지 못 하도록 단단히 혼을 내서 쫒아 버리라고 일렀다.
유모를 꼭 만나야겠다고 떼를 쓰는 천둥에게 흥만은 욕설과 함께 구정물을 퍼 부었다.
천둥은 억울하고 서러웠다. 그래도 선뜻 대문 앞을 떠나지 못하고 젖은 몸을 떨면서 서성이는데, 대문이 빠꼼히 열리며 하얀 무명 수건이 천둥의 앞에 떨어졌다.
이어서 어린 소녀가 불쌍한 듯 천둥을 보면서 이렇게 내 뱉았다.
얘야! 또 구정물 벼락이 쏟아지기 전에 얼른 닦고 가거라!
소녀는 귀동의 배다른 동생 금옥(10세)이었다.
천둥은 무명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멀어져 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내 엄마가 아니라면 아니라고 말만 해 주면 그만 일 것을!
어찌 이렇게 문전 박대를 할 수 있을까.
술에 취한 큰년이 아줌마가 엉뚱한 소리를 내 뱉은건 아닐까?
천둥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어차피 뽑아든 칼이고 당겨진 활 시위였다.
이튿날, 또 다시 김진사집 근처로 찾아간 천둥은 막순이 대문을 열고 나오기만을 끈질기게 기다렸다. 드디어 오랜 기다림 끝에 막순이 빨래 감을 머리에 이고 금옥과 함께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천둥은 은밀하게 그 들의 뒤를 쫒았다.
막순과 금옥은 앞서거니 뒷 서거니 사이좋게 빨래터로 향했다.
이윽고 빨래터에 나타난 천둥은 막순에게 내가 누구며 왜 막순을 따라 왔는가를 당당하게 밝혔다. 금옥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막순과 천둥을 번갈아 바라보았고, 막순은 순간 당황해 하는 빛이 역역했다.
그러나 곧 표정을 바꾸어 단호하게 천둥을 호통치기 시작했다.
네 이놈! 어린 아씨 앞에서 별 소릴 다하는 구나! 어떤 놈이 그 따위 헛소릴 한단 말이냐? 당치도 않은 말이다. 내가 어찌 너 같은 거지아이의 어미가 될 수가 있겠느냐? 나는 평생 자식을 둔 적 없으니 쓸데없는 수작 말고 냉큼 물러 가거라!
천둥은 한 걸음 더 다가서며 그렇다면 그 옛날 김진사댁 유모로 팔려가며 핏덩이 갓난아기를 버리고 간 여인네는 누구냐고 재차 따져 물었다.
막순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말했다.
나는 네 어미가 아니라는 것만 알뿐 다른 것은 모른다!
할 말이 없어진 천둥은 허탈해하며 등을 돌렸다.
그동안 아무도 모르게 간직했던 실낱같은 꿈과 희망. 내 엄마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그 황홀한 설레임마져도 무참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움막으로 돌아오는 고갯마루 턱에는 천둥의 가슴에 맺혀있는 피멍 같은 노을이 서럽게 걸려 있었다. 천둥은 울음을 삼키며 지금 막 산을 넘어 작별을 고하려는 태양을 향해 마음속으로 맹세하듯 소리쳤다.
엄마! 울 엄마는 세상에 없다! 다시는 찾지 않겠다!
천둥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쇠돌이.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착한 거지였다.
단 한사람의 여인네도 품어보지 못 한 채 평생 막순이라는 한 여자만을 사랑했다.
그는 사십 중반의 사내였지만, 항상 머리를 땋고 총각머리를 하고 다녔다.
누군가 놀리듯 장가갈 생각이 없냐고 묻기라도 하면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내 생김새가 반듯해야 여자를 읃을 생각을 합죠. 개울가에서 돌을 골라도 누가 나같이 못난 돌을 고르겠습니까? 사내든 여인네든 이쁜게 좋은건 매일반입니다.. 내가 날 봐도 정떨어지도록 못 났는데 날 좋아할 여인네가 어디 있겠습니까. 물동이 속에 들어 있는 날 봐도 참 박복하고 도무지 봐 줄 수가 없게 생겼는걸 어떡합니까? 여인네들 원망할 생각은 읎습니다. 그저 난 애시당초 여인네들하고는 상극입니다..
그는 항상 눈에 눈물이 짐짐하게 고여 있었고, 사람은 물론, 개나 소, 삼라만상 모든 것을 연민으로 바라보는 듯 했다.
마을 돌담길을 걷다가도 담장 밖에 호박 덩쿨이라도 떨어져 있으면 생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넝쿨이 잘 뻗어 나가도록 슬그머니 담장위에 올려놓고 가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 보다는 항상 남을 생각했고, 보리흉년에 얻어 온 밥이 모자랄 때면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 자신부터 굶었다.
김진사댁 난봉꾼 하인 삼득이(33세) 막순과 그렇고 그런 관계란 말이 들려 왔을때도 그저 속으로만 섭섭한 마음을 삭힐 뿐 대놓고 따지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나보다 인물 좋고 풍채 좋은 삼득이.
자신을 팔삭둥이 바보 취급을 하며 우습게 봐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저 그는 묵묵히 막순이라는 변덕스럽고 탐욕어린 한 여자만을 사랑할 뿐이었다.
그는 결코 자신을 드러내는 법도 없었다.
그러나 천둥의 눈에 쇠돌 아저씨는 거지패들 중 가장 드러나 보였다.
쇠돌은 거지패들 중에서 글을 읽을 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포악하기 이를데 없는 장꼭지도 쇠돌에게만은 손찌검하기를 꺼려했다.
장꼭지는 쇠돌에게 도갑의 글을 가르치라는 명을 내리고, 나름대로 독선생의 대우를 해 주었다. 그러나 천자문을 가르친지 석삼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도갑은 글 한줄 제대로 쓰고 읽지를 못했다.
이른바 도갑은 자근년의 말마따나 전생에 책하고는 지독하게도 인연이 없는 아이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도갑이 그다지 심성이 나쁜 아이는 아니었다.
천성이 외로움을 타는 탓에 천둥을 형처럼 믿고 따랐으나, 천둥은 도갑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정신이 산란하고, 변덕스러웠으며, 무엇보다 도벽이 심했다.
도갑은 도둑질을 할때면 꼭 천둥 몰래 천둥의 친구인 진득(15세)과 같이 했다.
작게는 콩서리, 닭서리에서부터 시작해서 장바닥을 누비며 탐나는 물건은 무엇이든 훔쳤다. 아버지 장꼭지가 아무리 혼을내고 잔소리를 해도 듣는 둥 마는 둥이었다.
장꼭지는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만큼은 거지소굴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싶었다.
인삼장사든 비단장사든 장사꾼을 만들어 돈도 벌고 출세도 시키고 싶었는데, 될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고 이거야 원, 글도 깜깜하고 셈도 흐리고 도무지 장사꾼이 될 싹수가 보이지 않았다.
아들이 그러면 에미라도 달려들어 말려야 할 것인데 자근년이 하는짓 보면 더욱 더 가관이었다.
자근년은 도갑이가 동네 아이들 것을 뺏아 오든, 훔쳐 오든 상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도갑이가 천성이 살림꾼처럼 야물어서 항시 무엇이든 챙겨들고 들어오고, 빈 손으로 드나드는 법이 없다며 자랑 하기 바빴다.
언젠가 장터에서 도갑이 박물장수에 잡혀 개망신을 당 했을 때도, 자근년이 함께 있었다. 에미는 바람을 잡고 아들은 참빗을 훔쳤던 것이다.
큰년은 천둥이 막순을 만나러 가서 타박만 맞고 돌아 왔다는 말에 천둥을 상대로 막순에 대한 욕설을 퍼 부었다.
모진년, 짐승도 제 새끼는 알아 본다고 했다! 어찌 인두껍을 쓰고 그럴수가 있을까! 자근년 보다 더하면 더했지 들하지 않은 년! 천벌을 받을 년!
천둥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은 듯 움막 밖으로 나왔다.
막순은 정녕 천둥이 꿈에 그리던 엄마의 모습이 아니었다.
설령 막순이 자신의 생모라 한들 두 번 다시 찾아가고 싶지 않았다.
핏덩이의 날 버리고 간 몹쓸 엄마. 내가 무엇이 아쉬워 다시 찾을소냐.
천둥은 막순이 사는 김진사집 쪽이라면 아예 쳐다보기도 싫었다.
쇠돌이 천둥에게 글을 가르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는 천자문이나 겨우 떼었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천둥은 또래의 글방 아이들처럼 동몽선습도 배우고 소학도 배우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의 처지로서는 도저히 이룰수 없는 불가항력의 꿈.
천둥은 배움을 향한 알음앓이에 괴로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천둥은 이웃마을 성초시(38세)의 서당 옆을 지나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공자 왈, 맹자 왈, 낭낭하게 읇어대는 학동들의 글 읽는 소리.
천둥은 자신도 모르게 글방 들창 아래로 다가갔다.
글방 훈장님의 가르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한 글 귀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훈장님의 가르침을 가슴속으로 읎조리며 되새겼다.
다음날부터 틈나는 대로 서당으로 달려가는 천둥.
아무도 모르게 몰래 서당 들창에 쪼그리고 앉아 땅 바닥에다 나뭇가지로 글을 쓰며 배움의 욕구를 불태웠다.
이른바 천둥의 도둑공부는 그렇게 시작 된 것이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도둑고양이 같은 천둥의 모습을 제일 처음 발견한 것은 성초시의 딸 동녀(15세)였다.
천둥이 황급히 달아난 뒤, 땅에 남아있는 글귀를 본 동녀는 천둥이 보통 거지아이가 아님을 깨닳았다.
동녀는 성초시의 무남독녀 외딸로 또래에 비해 영특하고 조숙한 편이었다.
성초시라 불리우는 성수창.
그는 한때 종부시(종실의 허물과 잘못을 규찰하는 관청)의 직장(종7품)으로 한때 어전에 입시하여 임금으로부터 그의 박학다식함을 인정받기도 하였으나, 그를 시기하는 관리들의 모함으로 관직을 삭탈 당하고 낙향해 와 있는 가난한 선비에 불과하였다.
그 보다 실력이 못한 선비들도 다 출륙(6품직에 나아감)해 나가는데 그는 오히려 한직을 맴돌았다.
그의 학문을 아끼는 향리의 친구들은 안동 김씨의 실세인 김진사라도 자주 찾아가 아들 귀동의 독선생을 자청해 볼 것을 여러 번 권유했으나, 그때마다 되돌아오는 것은 추상같은 불호령이었다.
귀동은 독선생을 가질만한 학문적 재능을 가진 아이도 아니고, 자신 또한 그럴만한 시간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는 애써 향리의 세도가들을 외면하고 오직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을 썼다.
김진사 역시 성초시에게 아쉬운 소리 할 일은 없었다.
워낙 공부를 싫어하는 귀동인지라 독선생이라는 말만 나와도 진저리를 쳐 댔다.
성초시를 귀동이의 독선생으로 모셔다 놔 봐야 공부는커녕 십리 밖으로 내뺄 것이 뻔했다.
귀동이 그나마 서당에 열심히 나가는 이유는 전혀 다른데 있었다.
오매불망 짝사랑의 대상인 성초시의 딸 동녀의 모습을 마음 놓고 보는 것 이었다. 동녀로부터 도둑공부를 하고 있는 거지아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성초시는 천둥에게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어느 날, 천둥과 마주친 성초시는 달아나려는 그를 잡아끌고 자신의 서재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에게 간단한 글귀의 시험을 보게 했다.
머뭇거리면서 써내려간 천둥의 글 솜씨는 놀라웠다.
필체는 갓 배운 어린애처럼 투박했으나, 그야말로 문자 속은 훤했다.
성초시는 천둥에게 물어 보았다.
거렁뱅이 주제에 글을 배워서 무엇에 쓰려고 하느냐?
글을 배워야 세상을 잘 안다고 들었습니다. 이 담에 커서 세상물정을 아는 장사꾼이 되고 싶습니다.
글을 배워 장사꾼이 되고 싶다고?
예. 돈을 많이 벌어서 그저 제 자신만 잘 먹고 잘 사는 장사꾼이 아니라, 굶주린 사람들의 배를 채워주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그런 장사꾼이 되고 싶습니다.
성초시는 천둥이 범상한 아이가 아님을 느끼고 그 날로 천둥의 수준에 맞는 책을 건네 주었다.
내 오늘부터 네게 글 동냥을 해 주마.
책을 보다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내게 오너라.
천둥과 성초시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성초시는 천둥에게 동녀가 쓰던 벼루와 먹, 붓, 문방도구들도 덤으로 적선해주었다.
신바람이 난 천둥은 마치 선비로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천둥은 그 날 밤, 도저히 잠을 이룰 수 가 없었다.
남들은 무섭다고 피해가는 상여막 안으로 몰래 기어 들어가 촛불을 켜 놓고
처음 느끼는 묵향에 취해가며 먼동이 틀 때까지 개발세발 쓰고 또 썼다.
날이 갈수록 천둥의 학식은 깊어갔고, 처음에는 별반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성초시의 놀라움도 커져갔다. 천둥은 그야말로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수재요, 준재였던 것이다.
성초시가 출타 중이거나 바쁠때는 동녀가 천둥의 글 선생을 대신 하기도 했다.
언제 보아도 곱고, 맑고, 아름다운 동녀.
그러나 언감생심 이루어질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은 천둥 자신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천둥은 어느새 동녀에 대한 사랑에 가슴앓이를 하고 있었다.
천둥이 다 쓰러져 가는 상여막에 터를 잡고 글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 마을에서는 이상한 이야기가 들려오기 시작 했다.
상여막 안에서 밤마다 도깨비 불빛이 새어나오며 귀신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는 소문이었다. 서당 학동들과 마을의 힘께나 쓰는 장정들 조차도, 밤은 물론 낮에도 선뜻 상여막 앞으로 지나가길 꺼려했다.
물론 그것은 천둥이 켜 놓는 불빛이고 천둥의 글을 읽는 소리였다.
귀신의 정체를 아는 이는 단 세 사람.
쇠돌 아저씨와 동녀와 천둥 자신이었다..
밤마다 불빛이 새어나오는 상여막 안의 귀신 이야기는 서당 학동들의 공포심을 자극했고, 자칭 서당 왈짜를 자칭하는 귀동의 귀에도 들려왔다.
서당 학동들은 두 패로 나뉘었다.
귀신이다!
아니다, 사람이다!
귀동은 학동들 앞에서 자신이 직접 야심한 밤에 상여막에 들어가 확인해 보겠노라 큰 소리를 쳤다.
동녀는 천둥이 공부하는 상여막에도 가 보았던 적이 있었으나, 차마 귀신의 정체가 천둥이라는 소리는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귀동이 상여막에 간다는 것을 가만 내 버려 둘 수도 없었다.
내버려 뒀다가는 천둥은 공부방을 잃고 무슨 해괴한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동녀는 자신도 비 오는 날 밤, 상여막 앞에서 하얀 소복입은 처녀 귀신을 본 적이 있다며 겁을 주었지만, 귀동의 결심은 단호했다.
글 공부를 못 한다고 항상 자신을 무시하는 동녀.
귀동은 이번 기회에 자신이 얼마나 용감한 사내대장부인가 보여 주고 싶었다.
쇠뿔도 단김에 뽑는다고 귀동은 그 날 밤 서당 학동 둘을 대동한채 등불을 들고 상여막으로 향했다.
상여막 앞에 도착한 귀동은 두려움에 질려있는 두사람을 지켜보게 한 후, 호기있게 상여막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갑자기 안 쪽에서 거센 바람이 확 불어오며 귀동이 들고 있던 등불을 꺼트렸다. 이어서 소름끼치는 여인의 꺅! 하는 비명소리!
귀동은 혼비백산 뒤로 물러나며 어둠속을 바라보았다.
분명 머리를 풀어헤친 소복을 한 여인이었다.
귀... 귀신이다!
귀동은 비명을 지르며 학동들과 함께 걸음아 나살려라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은 동녀가 잰걸음에 천둥을 찾아와 천둥과 함께 꾸민 영특한 연극이었다.
귀동은 이틀을 꼬박 앓아누웠다.
무엇보다 상여막 앞에까지 같이 갔던 친구들 앞에서 바지를 흠뻑 적시도록 오줌을 싸고 달아났던 자신이 한 없이 초라하고 부끄러웠다.
귀동이 풀이 죽어 있을 그 무렵,
천둥은 진득과 함께 평소처럼 밥을 얻으러 나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개울 한 가운데 징검다리에서 계집아이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서둘러 뛰어가 보니 다리를 다친 아이는 김진사댁 귀동의 동생 금옥이었다.
금옥은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닭 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천둥이 가까이 가서 금옥의 다리를 살펴보니, 징검다리를 건너다 발을 잘못 디딘 듯 발목이 크게 부어올라 있었다.
천둥은 급히 진득과 함께 근처에 나뒹구는 나뭇가지를 주워서 부목을 만들었다.
그리고, 금옥의 발목을 부목에 고정시킨뒤, 자신의 옷을 찢어 끈을 만들어 묶었다.
진득은 금옥의 다친 사실을 알리기 위해 먼저 김진사댁으로 뛰었다.
천둥은 우는 금옥을 달래서 업고 진득의 뒤를 따랐다.
김진사 집이 보이는 언덕을 올라 갈 때 쯤, 천둥은 힘에 부친 듯 숨을 헐떡였다.
금옥은 그러한 천둥이 안쓰러운 듯 쉬었다 갈 것을 권했다.
천둥은 어린 금옥이 자신을 배려해 주는 것이 기특하고 귀엽게 여겨졌다.
천둥은 조심스레 금옥을 내려놓고 목덜미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이때 천둥의 목 뒷덜미를 무심코 바라보던 금옥은 반가운 듯 말을 걸었다.
얘!
예, 아씨.
네 목덜미 뒤에 빨갛게 보이는 것이 부르튼 거니? 점이니?
붉은 점입니다.
세상에! 나도 너랑 똑 같은 점이 있단다! 한번 보련?
금옥이 앙증맞은 손으로 뒷머리를 감아올리자, 목덜미의 붉은 반점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금옥은 이 점은 집안에서 아버지와 자신만 있는 점이라고 말했다.
천둥도 동패 중에 이런 점을 가진 사람은 자신 뿐 이라고 미소 지었다.
천둥은 금옥을 업고 언덕을 내려가며 언젠가 쇠돌 아저씨에게서 들었던 붉은 점에 얽힌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 주었다.
점에도 길흉화복이 있다는 것. 그런데 다행히도 아기씨와 나는 아주 좋은 길잡이 점을 가졌다는 것. 만일 세상천지가 빛을 잃고 깜깜해 지면 우리 뒷덜미에 있는 붉은 점이 등불처럼 훤히 불을 밝힌다는 것. 그리하여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은 우리 뒤 꼭지를 보고 뒤 따라 온다는 것. 그러니까 아기씨와 나같은 사람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든지 언젠가 세상에서 꼭 쓰임새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
천둥은 다정하게 금옥을 업고 김진사집 근처에 도착하였다.
이때 진득과 함께 급히 대문 밖으로 뛰어 나오는 박서방과 흥만의 모습이 보였다.
흥만이 천둥의 등에서 금옥을 떼어내며 수고했다는 말 대신 엉뚱한 말을 내뱉었다.
너 이놈아, 이 없냐?
없습니다.
나중에 우리 애기아씨 몸에 이만 옮았단봐라!
천둥은 땀에 젖은 얼굴로 대문 안으로 들어가는 금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금옥이 돌아보면서 천둥을 향해 배시시 웃으며 작은 손을 앙증맞게 흔들었다.
천둥은 금옥의 천진한 미소를 보자, 흥만이 무뚝뚝하게 내 뱉았던 섭섭한 말도 눈 녹듯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웬지 모르게 귀엽고 정이 가는 금옥이.
천둥의 주변에는 또 한명의 아릿따운 소녀가 있었다.
소녀의 이름은 달이.
달이(15세)는 갖바치 장노인(53세)의 손녀딸이었다.
첫 돌을 지날 무렵 마을을 휩쓸고 간 호열자(콜레라)에 고리백정이었던 양친부모를 다 잃고 할아버지 밑에서 갖바치 일을 도우며 자랐다.
태사혜, 흑혜, 운혜, 당혜에 진신, 미투리....
평생 신 짓는 일에 몸 바쳐온 장노인의 갖신 짓는 솜씨는 양반댁 마님들과 기생들이 앞 다투어 찾을 정도로 소문이 자자했다.
달이는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한편, 갖신 짓는 일도 능숙하게 거들었다.
예쁘고 일 잘하는 달이.
그러나 생김새와는 달리 소문난 동네 말괄량이였다.
달이의 집은 백정마을 초입에 있었다.
백정마을은 외지 사람들에게 배타적이고 거칠기로 유명했다.
양반이건 상민이건 멋모르고 들어와 거들먹거렸다간 어느 구석에서 수모를 당하고 동티가 날지 모를 일이었다. 허나 그들에 비해 약해 보이는 사당패나, 거지들에겐 백정마을 보다 인심이 후한데도 없었다.
주먹께나 쓰는 그 마을 개구쟁이들도 달이에게 함부로 대 들지 못할 정도로 달이는 대가 쎘고 선머슴 마냥 거칠었다.
달이네 집에 단골로 신을 맞추러 다니는 기생 월향(25세)은 진작부터 달이를 눈독 들이고 있었다.
춘향가 한 대목을 장난 삼아 가르쳐 줬는데 외워 부르는 청이 보통이 아니었던 것이다. 월향은 마치 달이를 친동생처럼 여기며 귀여워했다.
그러나 장노인은 달이를 기생으로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 달이가 오늘은 장터 떡 장사 옆에서 울고 있었다.
무심코 그 옆을 지나던 천둥이 가엾은 생각이 들어 팥죽 할미에게 물어 보니, 팥죽을 사 먹고 있는 사이에 김진사댁 마님에게 전해 줄 꽃신(운혜)을 누군가 훔쳐 달아났다는 것이었다.
오는 길에 도갑이 패들이 지나가는 것을 목격한 바 있었던 천둥은 짚히는 바가 있어 달이를 데리고 도갑을 찾아 나섰다.
도갑이 단골로 거래하는 장물아비 엿 장사에게 갖신을 팔아먹으려는 순간, 나타난 천둥은 다짜고짜 도갑의 멱살을 쥐고 패대기를 쳐서 넘어트렸다.
욕설을 퍼 부으며 반사적으로 일어나 덤벼드는 도갑.
그러나 천둥이 손 쓸 사이도 없이 도갑의 얼굴에 보기 좋게 주먹을 날린 것은 뜻밖에도 달이였다. 달이는 도갑을 머리로 받고 발로 차더니 급기야 비명을 지르는 도갑을 깔고 앉아 흠씬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이러다간 애 하나 잡겠구나 싶어서 간신히 뜯어말린 천둥.
꽃신을 찾은 달이는 천둥에게 고맙다는 인사만 짤막하게 남긴 후, 바쁘게 김진사댁으로 향했다.
김진사댁 안방마님 권씨는 달이가 가져온 꽃신을 신어보며 흡족해 했다.
곁에서 지켜보던 금옥이도 이런 꽃신을 자기도 한 켤레 지어달라고 칭얼거렸다.
꽃신 값을 받아 가려고 사랑채 툇마루에 앉아서 기다리던 달이의 눈에 귀동의 모습이 들어 왔다. 지금 막 서당에 다녀오는 차림이었다.
귀동의 모습은 단아하고 늠름해 보였다.
도갑과의 일전 끝에 떨어져 나간 옷고름과 흙 묻은 치마가 새삼 부끄러워지는 달이.
귀동이 막순에게 저 계집아이는 누구냐고 물어보자, 달이의 얼굴은 홍시처럼 달아 올랐다. 이윽고 달이가 꽃신 값을 받아서 대문 밖을 나서자, 귀동은 계모 권씨에게 자신도 갖신(흑혜)을 하나 사 달라고 졸랐다.
귀동의 성품으로 보아 평소에는 없던 신에 대한 욕심이었다.
천둥은 도갑을 때린 적이 없고, 도갑을 두들겨 팬 것은 달이라고 장꼭지에게 아무리 설명을 해도 장꼭지는 무조건 분풀이를 천둥에게 해 댔다.
장꼭지에게 마구잡이로 몽둥이 찜질을 당한 천둥은 꼬박 하루 반나절을 끙끙 앓았다.
쇠돌은 천둥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었고, 큰 년은 죽을 쑤어 주었다.
자근년은 갖바치 집에까지 쳐들어가 달이 년의 다리몽둥이를 부러 트리겠다고 악다구니를 쓰다 오히려 옆집 떡장사 붓들네 한테 머리채를 잡히는 욕을 보고 쫒겨 났다. 그녀는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은 듯 다시 움막으로 쳐 들어와 천둥에게 욕설을 퍼 부었다. 참다 못한 큰년이 작은년 앞에 튀어 나왔다.
에이 경우 없는 도적년!
큰년은 몽둥이를 휘둘러 자근년을 쫒아 내고 천둥을 아랫목 쪽에 눕혔다.
이날 저녁 꽃신을 찾아 줘서 고맙다는 인사로 장노인은 움막에 찾아와서 떡을 돌렸다. 그리고 앓아누워 있는 천둥을 보더니 천둥의 어혈을 풀어 줘야 한다며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장노인은 천둥의 상처를 치료해 주며 천둥이 범상치 않은 거지 아이임을 느낄수가 있었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비럭질하는 주제에 글을 읽고 쓰는데다 문자속도 훤하고, 인물도 어디에 내 놔도 빠지지 않는 인물이었다.
행색은 남루하나 실로 오랜만에 맘에 드는 사내아이였다.
장노인은 천둥이 마치 데릴사위라도 되는냥 끔찍하게 위해 주었다.
덕분에 천둥은 달이가 지어주는 밥을 먹으며 오랜만에 배부르고 등 따듯한 꿈같은 사흘 밤낮을 보냈다.
그 후, 천둥은 친척집에 들리듯 오며가며 틈 나는대로 장노인의 집에 들렸다.
물도 길어주고, 나무 짐도 해다 주고, 장작도 패 주었다.
눈썰미 있고, 일 잘하고 부지런한 천둥은 날이 갈수록 장노인의 마음에 들었다.
장꼭지 역시 장노인의 집을 들락이는 천둥을 궂이 나무라진 않았다.
천둥이 비럭질 해 오는 찬밥 덩이 보다 장노인이 가끔 천둥의 품 삯 쪼로 내미는 됫박 쌀이 나름대로 쏠쏠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장노인은 천둥에게 갖바치 일을 배울 것을 제의했고 천둥은 장꼭지의 허락을 받아 갖바치 일을 도우러 장노인 집을 들락 거렸다.
천둥은 자연스레 비럭질 하던 무리에서 빠져나가 잠도 장노인의 문간방에서 자는 횟수가 더 많아졌다.
천둥의 행색이 깔끔해지고 나름대로 거지테를 벗을 무렵,
백정마을에서는 천둥이 장노인의 데릴사위가 되려 한다는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달이에게 끔찍하기 이를데 없는 소문이었다.
내가 아무리 비천한 갖바치의 손녀 딸이기로 거지 출신의 신랑감이라니!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일이다!
달이는 마치 천둥을 친자식처럼 여기며 대견해 하는 할아버지가 미워서 견딜수가 없었다.
눈에 가시같은 천둥.
이놈아 네 속을 내 모를줄 아느냐?
달이는 천둥을 사사건건 괴롭히며 내 쫒을 궁리만을 하고 있었다. .
달이는 백정마을에서 태어나 갖바치의 아내로 평생을 마감하긴 싫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 마을을 벗어나 인생을 바꾸고 싶었다.
붓들이나 천둥같은 허접스러운 비천한 인간들에게는 애시당초 관심조차도 없었다.
김진사댁 귀동 도련님...
달이의 가슴속에는 이미 며칠 전 갖신을 맞추러 온 귀동 도련님의 모습이 자리 잡고 있었다.
두고 보렴! 나는 누가 뭐라해도 내 스스로 백정마을을 벗어 날 것이다! 시집을 가더라도 내 마음에 드는 양반집 자제에게 꽃가마 타고 갈 것이다!
달이는 할아버지가 귀동의 갖신을 서둘러 마감하기를 몸이 달아 기다렸다.
갖신을 들고 김진사 집으로 달려가 귀동을 다시 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꼭 맞는 갖신을 신으며 자신을 올려다 볼 것만 같은 귀동이.
달이는 귀동의 갖신을 갈무리 하며 잔뜩 몸이 달아 있었다.
천둥은 달이의 그런 마음을 내심 꿰뚫고 있었다.
그러나 귀동을 향한 달이의 어리석고 순진한 사랑을 나무라고 싶진 않았다.
내 자신 품고 있는 동녀에 대한 연정 역시 너와 같은 어리석은 것이 아니겠느냐.
누군들 평생 종으로, 거지로, 갖바치로 살고 싶으랴!
천둥이 서당에 책을 빌리러 간다는 말을 듣자, 달이가 따라 오겠다고 했다.
이유는 귀동 도련님의 발을 다시 재야겠다는 것이었다.
천둥은 달이의 본심을 알면서도 모르는척, 오히려 달이가 따라오는 것이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번 기회에 성초시의 당혜와 동녀의 꽃신을 재어가서 내 손으로 직접 지어 드리리라.
서당 학동들의 글 읽는 소리를 뒤로하고 안채로 들어간 천둥은 동녀를 찾았다.
반가운 듯 서재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던 동녀.
뜰안에 서 있는 달이의 모습을 보더니 표정이 굳어졌다.
달이는 동녀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마음은 글방안의 귀동에게 가 있었다.
서재에 들어간 천둥은 동녀에게 그 동안 자주 들리지 못했던 사정을 얘기했다.
거지 움막에서 나와 갖신 짓는 일을 배우며 내 밥벌이는 하고 있다는 말에 이르자, 기뻐할 줄 알았던 동녀의 입술이 사뭇 일그러지고 있었다.
천둥은 내친김에 그 동안의 은혜도 갚을 겸, 훈장님의 당혜와 동녀의 꽃신도 직접 지어 올리고 싶다는 말을 하였다.
그러자 동녀는 천둥을 쏘아보며 떨리는 음성으로 내뱉었다.
그래서 지금 나에게 갓바치가 됐다는 것을 자랑하러 온게냐? 그렇게 일찍 갓바치가 될 요량이었으면 글 공부는 왜 했느냐? 상여막에서 귀신놀음을 한것도 갓바치 벼슬을 얻기 위함이었더냐? 아버님과 나는 너를 잘 못 보았다. 아버님 당해와 내 꽃신 다 필요없다! 나가거라! 가서 평생 신이나 지으면서 살거라!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동녀의 반응이었다.
책도 빌리지 못하고 동녀의 집에서 쫒겨난 천둥은 그날 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날 잘 못 보았다니...
동녀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내가 장노인의 데릴사위가 되려고 한다는 헛 소문을 들어서 일까...
아니면 내가 갖바치보다는 훌륭한 장부가 되길 진심으로 바래서 일까...
날 연모하고 있는 것일까...
아아... 그건 있을 수도 없는 일. 선비의 딸이 어찌 나 같은 걸인을 연모할수 있으랴...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말.
동녀는 내가 갖바치로 머물러선 안 된다는 말을 한 것이다.
더 큰 세상, 더 큰 희망을 가지라는 말을 한 것이리라.
그렇다! 내 지금 비록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거렁뱅이지만 갖바치로 평생을 보내기엔 세상이 너무 아깝고 넓다.
다음 날, 천둥은 미련없이 장노인의 집을 나와 움막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장노인은 천둥을 움막으로 찾아와 앞으로 데릴사위란 말은 꺼내지도 않고, 품삯도 올려 줄테니 제발 돌아와 달라 애원했다.
천둥은 고집스레 장노인의 청을 거절하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큰년을 비롯한 움막안 사람들은 굴러들어 온 복을 걷어찬 천둥을 비웃었다.
아직 철이 없어서 세상을 모른다고도 했다.
천둥은 그들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참새들이 어찌 봉황의 뜻을 알겠는가.
남 몰래 학문을 닦으며 때를 기다리자.
그 날 밤 천둥은 다시 상여막으로 향했다.
동짓달 긴긴 밤.
얼어붙는 손가락과 붓을 입김으로 녹여가며 천둥은 난생처음 내 마음을 털어놓는 긴 편지를 썼다.
동녀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그러나 편지를 다 써놓고도 감히 보낼수는 없었다.
연모한다는 글귀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괄량이 달이는 귀동의 앞에만 서면 순한 양이 되곤했다.
그러나 귀동은 달이에게 마음을 줄 겨를이 없었다.
귀동의 마음 또한 오직 한 사람 동녀에게 가 있었다.
허나 동녀는 항상 귀동을 멀리했고, 무엇보다 귀동의 아버지 김진사를 미워했다.
동녀 집안의 몰락은 호조참의로 있는 김진사 숙부 김대감의 농간에서 비롯됐다.
당시 사간원 정원이셨던 큰 아버지 성시창은 국정을 농단하는 안동김씨 세력에 대해 분연히 맞서다가 오히려 터무니없는 모함의 역풍을 맞았던 것이다.
정의는 실종되고 모함과 음모가 난무하는 시절.
결국 큰아버지는 의금부의 모진 국문을 당하다 돌아가셨다. 홍문관 교리였던 동녀의 외삼촌은 흑산도로 유배 길을 떠나고, 아버지는 삭탈관직.
어머니는 당시의 충격으로 이름도 알 수 없는 병에 시달리다 한 달을 못 넘기고 돌아가셨다.
동녀에게 있어서 귀동의 집안은 원수의 집안이었다.
동녀는 아버지 성초시가 귀동을 받아들여 학문을 가르치는 것도 못 마땅했다.
그러나 아버지 성초시는 귀동에게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다.
언젠가 동녀가 귀동을 험담했을 때 성초시는 오히려 귀동의 편을 들었다.
배움에 뜻이 없고, 글을 못한다고 무시하고 미워하지 말아라.
귀동이는 심성은 착한아이다.
글 잘하고 영특하면서 심성이 나쁜아이 보다는 백번 낫다.
성초시의 말처럼 귀동은 공부는 못하지만 심성은 착했다.
귀동은 서당에서나 마을에서 말썽꾸러기 주먹대장으로 통했다.
인근마을에 주먹 쎈 아이가 있으면 중간에 사람을 놓아 맞서기를 할 정도로 힘이나 주먹에서 누구에게든 지기 싫어했다.
당연히 계모 권씨와 아버지 김진사의 무던히도 썩혔다.
귀동은 아버지 김진사와 훈장 성초시의 불편한 관계에 대해서 어느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편을 들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성초시의 인품을 흠모하고 그를 내심 누구보다 존경했다.
언젠가 아버지가 성초시의 내당을 들락이는 인물에 대해 넌지시 물었을 때, 그는 누가 드나드는지 알면서도 애써 모르는 척 입을 다물었다.
청렴하고 검소한 선비의 전형인 성초시.
그에 비해 아버지 김진사는 매관매직의 거간꾼 노릇을 하고 있었다.
학문으로 보나 품성으로 보나 아버지 김진사는 성초시의 발끝에도 못 미쳤다.
어울리는 사람들도 차원이 달랐다.
집안을 드나드는 선비들과 아전의 무리들은 천박했고, 성초시의 내당을 드나드는 선비들은 외양은 초라했으나 몸가짐이나 말투에 선비의 기품이 우러났다.
타락한 세상.
학문이 높고 인품이 고매하고 강직할수록 출세의 길에서는 멀어졌다.
공부는 해서 무엇하랴...
든든한 가문의 배경과 세도가의 입김만 있으면 출세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귀동은 이미 16세의 나이에 이 모든 것을 터득하고 있었다.
권력과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는 세상...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어도 사람의 마음은 가질 수가 없다는 것을 귀동은 요즈음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이 세상을 다 주고도 바꾸고 싶은 사람.
귀동에게 있어서 동녀는 그런 존재였다.
그런 동녀가 요즘 가끔 눈에 띄는 거지소년 천둥에게 보내는 친절과 배려가 예사롭지 않은 것이다.
귀동은 동녀에게 섭섭했고, 서당주변을 얼쩡이는 천둥이 미워서 견딜수가 없었다.
한편, 천둥은 갖은 핑계를 대며 서당 근처를 서성이는 달이를 보며 내심 안타깝게 생각 했다. 천둥은 달이가 귀동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달이가 귀동에게 주려고 만드는 비단쌈지를 보고 천둥은 코웃음을 쳤다.
네가 아무리 김진사댁 도련님을 좋아해도 너는 그 댁 도련님의 노리개 밖에는 될 수 없는 팔자다. 제발 속 차리고 네 분수를 알아라.
달이는 발끈 화를 내며 천둥에게 달려들어 거렁뱅이 주제인 니가 무슨 상관이냐고 욕설을 퍼 부으며 길길이 뛰었다.
달이는 천둥에게 마음을 들켜버린 것이 창피하고 천둥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천둥에게 앙심을 품은 달이.
달이는 귀동을 통해 천둥을 혼내 주리라 다짐하곤 자신이 알고 있는 상여막 귀신의 비밀을 귀동에게 털어 놓았다.
천둥은 그날 밤도 여느때와 다름없이 상여막에 나가 등잔불을 켜 놓고 글을 읽고 있었다. 마음이 풀어진 동녀에게서 빌려온 책이었다.
이때 갑자기 세명의 악동들이 상여막 문을 열고 들이 닥쳤다.
귀동의 일행이었다.
누구시오?
우리는 귀신을 잡으러 왔다! 거지귀신 말고, 소복입은 계집 귀신은 어디 있느냐?
어리둥절해 하는 천둥의 가슴팍을 귀동이 걷어찼다.
동시에 몰매를 맞고 나 뒹구는 천둥.
이윽고 천둥이 정신을 차렸을 때, 천둥의 주변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깨진벼루와 부서진 붓통...
책과 동녀에게서 받은 편지는 사라지고 없었다.
다음날, 고개마루에서 천둥은 귀동을 기다렸다.
서당에 다녀오는 차림의 귀동이 나타나자, 그는 귀동에게 다가갔다.
귀동이 오냐 너 잘 만났다는 표정으로 쏘아보자, 천둥은지지 않고 귀동을 노려보았다.
귀동이 먼저 호통치듯 말했다.
네 이놈! 건방지게 누굴 쏘아 보는게냐?
어제 도적질해간 내 서책을 주시오!
뭐? 내가 도적질을 해 가? 이 놈 봐라...
책을 돌려 주시요!
내가 못 주겠다면 어쩔 것이냐?
그냥 지나갈 수는 없을겝니다!
어디 그럼 내 길을 한 번 막아봐라!
귀동이 묵살하듯 천동의 옆을 지나려하자, 천동은 귀동의 앞길을 막아섰다.
그러자 천둥의 안면을 강타하는 귀동.
천둥은 휘청하며 와락 달려들어 귀둥의 멱살을 잡았다.
멱살잡은 손을 비틀며 천둥에게 다시 주먹을 날리는 귀동.
천둥 역시 질세라 귀동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두 소년은 잠시 치고 받으며 엎치락 뒷치락 엉겨 붙었다.
그러나 천둥은 귀동의 싸움상대가 되지 못하는 듯 귀동의 주먹에 얻어맞은 채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무릎을 꿇고 빌면 용서해 주겠다는 귀동의 말에 피투성이의 천둥은 이렇게 대꾸했다.
내가 아무리 비럭질을 해서 먹고 사는 동냥아치라도 나는 사내대장부외다! 도령과 같은 책도둑에게 무릎을 꿇을 바에는 차라리 혀를 물고 이 자리에서 죽고 말겠소! 그리고 내가 오늘 도령을 당해내지 못한 것은 도령이 나보다 힘이 세어서가 아니요! 나는 오늘 종일토록 먹은게 없어 힘을 쓰지 못했소. 도령처럼 고기국에 이밥을 먹었으면 결코 지지 않았을 것이요.. 그러니 날 쓰러트렸다고 뽐낼 것 없소! 어서 내 소중한 서책이나 돌려 주시요!
비록 귀동의 발밑에 쓰러져 있을지언정, 천둥의 목소리는 범접할 수 없는 기백으로 넘쳐흘렀다. 귀동은 보기와는 달리 천둥이 보통 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기가 생긴 귀동은 천둥의 멱살을 고쳐 잡으며 다짐을 받듯 되물었다.
네 이 놈! 입만 살아 달싹이는구나! 만일 내가 오늘 너에게 고기 국에 이밥을 멕여주면 다시 한 번 나와 맞서기를 해 볼 자신이 있느냐?
물론이요!
천둥은 피 묻은 얼굴을 닦으며 자신 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즉시 귀동은 천둥을 일으켜 세운 뒤 두 소년은 장터거리로 향했다.
귀동은 천둥을 장터 국밥집에 데리고 가 국밥을 사 주었고, 천둥은 국밥을 게 눈 감추듯 비웠다. 두 소년은 다시 고개 마루로 올라갔다.
힘이 솟구친 천둥은 귀동의 면상에 주먹을 날렸고, 두 소년의 싸움은 한동안 이어졌다. 막상막하의 싸움이 이어지다가 이번엔 천둥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귀동은 자신의 패배를 솔직하게 인정하며 내일의 맞서기를 기약하며 헤어졌다.
이튿날, 귀동은 천둥보다 먼저 나와 고개 마루에서 기다렸다.
그리고 천둥을 만나자마자, 집에서 가져온 주먹밥부터 내밀었다.
배를 채우고 정정당당하게 붙어보자는 의미였다.
천둥은 거절하지 않고, 주먹밥을 먹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약속한대로 서로에게 주먹을 날리며 엉겨 붙었다.
우열을 가늠할 수 없는 싸움 끝에 이번엔 귀동의 승리로 귀착되었다.
약이 오른 천둥은 내일 다시 붙어 보자는 약속을 하고 헤어지고....
하루걸러 상대에게 주먹밥을 멕이며 싸우는 이 해괴한 맞서기는 여러 날 계속 되었다. 매일 피멍이 들어서 들어오는 천둥을 보며 걸인들은 동요했다.
장꼭지 밑에서 힘께나 쓴다는 껄떡이가 직접 싸움기술을 전수해 주겠다며 나섰고, 귀동의 집안에서도 소위 택껸을 했다고 거들먹거리는 난봉꾼 하인 삼득이 후원에서 싸움기술을 남몰래 가르쳤다.
두 소년은 하루는 이기고 하루는 지면서 서로의 신분을 떠나, 자신들 만이 느끼는 야릇한 우정이 싹트고 있었다.
싸움에 지쳐가던 어느 날, 둘은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탈진한 채 풀섶에 나뒹굴었다.
그리고 푸른 하늘 떠가는 흰 구름을 보며 귀동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우리 나이도 동년배니 친구로 지냄이 어떠냐?
좋소!
짝패라 생각하고 내게 말을 놓아도 좋다!
나야 손해 볼거 없지! 그러세!
두 소년은 굳게 손을 잡고 어깨동무를 하였다.
그 후, 귀동은 글을 배우고 싶어 하는 천둥을 물신양면으로 도왔다.
달이의 옆집에 살면서 달이를 좋아하는 또 한 소년 붓들이(17세)가 있었다.
그는 소 잡는 칼을 지니고 다니며 백정마을을 오가는 모든 소년들을 괴롭혔다.
귀동과 천둥은 합심하여 붓들이를 단숨에 때려눕힌 후 다시는 자신들을 괴롭히지 않겠다는 항복을 받아 내기도 하였다.
두 소년의 우정은 깊어만 갔고, 귀동은 천둥의 배가 고프면 주린 배를 채워 주었고, 쓰던 붓과 벼루는 물론, 책을 원하면 자신의 책을 선뜻 건네 주었다.
서로의 신분이 극단으로 치닫는 두 소년의 우정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쇠돌의 심사는 편할 날이 없었다. 게다가 날이 갈수록 김진사의 용모를 닮아가는 천둥의 얼굴은 쇠돌과 막순을 불안에 떨게하고 그들의 양심을 괴롭혔다.
한동안 낯선 선비들이 동녀 아버지 성초시를 찾고, 성초시 또한 서당을 비우고 어디론가 출타하는 일이 잦아지더니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발단은 충청현감의 학정에서 비롯되었다.
돈으로 관직을 산 충청 현감은 본전을 찾기 위해 무자비한 수탈에 나섰다.
풍속을 규찰한다는 명목으로 별에별 죄목을 다 만들어 내어 양곡으로 갚게 했다.
불효, 불목(가족간에 화목하지 않은죄), 음행, 잡기등 그야말로 귀에걸면 귀거리,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죄였다. 걸려고 들면 안 걸리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현감의 오늘 날이 있기 까지는 김진사의 배경이 크게 작용했다.
이대로 그냥 내버려 두었다간 민란이 일어날 지도 몰랐다.
성초시와 몇몇 뜻있는 선비들은 현감의 학정을 임금께 상소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들은 비밀리에 통문을 돌려 상소를 주도할 소임을 결정하고, 글 잘쓰고 말 잘하는 소두(상소를 주관하여 올리는 우두머리)를 뽑았다.
소두에는 만장일치로 성초시가 결정되고 성초시를 은밀히 대궐까지 보필하고 갈 배소유생까지 선발했다.
그러나 이들의 은밀한 움직임은 김진사에 의해 간파 되었다.
김진사는 집사인 박서방을 보내 성초시에게 소두를 맡지 말아달라고 압박했다.
그러나 그럴수는 없었다. 일은 이미 벌어진 일, 일단 자신은 소두를 맡지 않았다고 잡아 떼었다.
김진사는 집요하게 성초시를 괴롭혔다.
충청감영에서는 배소유생들을 하나씩 불러내어 죄를 뒤집어씌운 후, 감영에 가두었다. 상소는 무산될 위기에 처 하였다.
이판사판, 성초시는 혈혈단신 상소문을 지닌 채 대궐을 향해 소행 길을 떠났다.
목숨을 담보로 한 일이었다.
그는 떠나기 전, 동녀를 불러 만일 자신이 한 달 안에 돌아오지 않으면 동녀의 외조부 집으로 가서 외조부가 시키는대로 할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달도 없는 그믐 밤, 상여막으로 향했다.
상여막에는 천둥이 피어놓은 등잔 불빛이 새 나오고 있었다.
성초시는 상여막 안으로 들어갔다.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천둥에게 성초시는 나직하게 물었다.
너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 세상에서 단 한 분뿐이신 스승님이십니다.
나 또한 네가 가장 믿을 수 있고, 영민했던 제자로 생각한다.
천둥은 뭉클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어서 성초시는 봉함된 서찰을 천둥에게 건넸다.
나는 더 이상 너의 스승이 되 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행여 내가 이번 한양 길에 나섰다가 돌아오지 못하거든 너는 꼭 이 서찰에 적힌 사람을 찾아 가거라. 기꺼이 너의 스승이 되어 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너를 만나고 갔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된다.
성초시는 천둥에게 스승을 소개해 주는 서찰을 남기고 떠났다.
그 뒤로 성초시의 모습을 보았다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성초시의 모습은 한양에도 나타나지 않았고, 그의 모습은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성초시가 마을을 떠난지 이미 백일이 지났건만, 성초시가 돌아 올 것을 굳게 믿는 사람은 동녀밖에 없었다.
동녀는 정한수 떠 놓고 아버지가 무사히 돌아오시기만을 빌고 또 빌었다.
마을 민심은 흉흉했고, 사람들 대부분은 누구의 짓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어느 누구 한 사람, 진실을 따지고 말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귀동은 그 누구보다 괴로웠다.
동녀의 아픔을 지켜보며 아버지 김진사를 원망했다.
그렇다고 동녀에게 아버지를 대신하여 차마 용서를 구할 수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터거리를 지나는데 어디선가 쇠돌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뒤 돌아 보니 소금지게를 진 털 복숭이의 소금장수였다.
쇠돌은 놀란 눈으로 소금장수를 훓어 보았다.
14년전 한양 은담골 이참봉 집에서 같이 종살이 하던 춘보(35세)였다.
형님 행색이 왜 이리 됐냐며 춘보는 다짜고짜 덥썩 손을 잡았다.
쇠돌은 춘보가 결코 반가운 상대가 아니었다.
임신한 막순을 데리고 이참봉 집을 도망 나왔을 때, 자신을 잡겠다며 뒤쫒아 왔었던 춘보가 아니었던가. 쇠돌이 춘보를 겁내하는 눈빛이 역력하자 춘보는 쇠돌을 달래며 일단 근처 주막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쇠돌을 안심 시킨 뒤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자신은 삼년 전에 면천되어 지금은 소금장수를 하는 양민이 되었다는 것. 표독하기 그지없었던 이참봉댁 안방마님이 세상을 뜬지 벌써 석삼년이 지났다는 것. 이 참봉은 아직도 막순을 잊지 못 한 채 재취도 들이지 않고 오직 막순을 애타게 찾고 있다는 것. 그리고 참봉께서는 막순을 찾아서 데리고 오는 사람이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논 열 마지기를 내 놓겠다는 약조를 하셨다는 것.
춘보가 막순의 거처를 알아내기 위해 온갖 감언이설로 쇠돌을 구슬렸지만 쇠돌은 요지부동이었다. 14년 전 같이 도망쳐 나왔으나 그 날로 헤어져 막순의 생사와 행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잡아떼었다.
이윽고 쇠돌의 고집을 꺽을 수 없다고 판단한 춘보는 그의 말을 믿어 주는 척, 아쉬운 얼굴로 쇠돌을 순순히 보내 주었다.
쇠돌은 만감이 교차했다.
막순을 겁탈하여 임신까지 시켰던 이참봉.
그가 지금 와서 논 열 마지기의 포상을 걸고 막순을 찾아 데려 가겠다니 그럴 수는 없다, 안 될 말이었다. 제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 준다고 해 보아라. 그 원수 같은 이참봉 집에 다시 들어간다는 것은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일!
쇠돌은 춘보를 만난 사실을 막순에게 알리기 위해 김진사의 집쪽으로 향했다.
멀리 빨래터에서 막순의 모습이 드러나며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막순은 삼득의 등에 등욕을 해 주고 있었다.
순간 쇠돌은 발걸음을 멈추며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지금 막순에게 다가 갔다간 삼득에게 봉변을 당할 것은 불 보듯 뻔 한 일이었다.
쇠돌은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돌아섰다.
한편 춘보는 장터를 떠나지 않고 쇠돌의 뒤를 은밀하게 캐기 시작했다.
수소문 끝에 그는 쇠돌 몰래 장꼭지를 만났다.
장꼭지에게 얼마간의 돈을 쥐어 준 춘보는 장꼭지를 통하여 막순이 거지 움막에서 사내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고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는 한 걸음에 한양으로 내 달려 이 사실을 이참봉에게 알렸다.
막중한 사명을 띄고 다시 내려온 춘보.
춘보는 소금장수의 행색으로 김진사댁에 들어가 막순을 만났다.
놀람과 두려움에 떠는 막순을 진정시킨 뒤 춘보는 이참봉의 말을 전해 주었다.
말인즉슨 이참봉은 아직도 막순을 못 잊고 있으니, 이곳에서 고생 말고 이참봉 댁으로 들어와 지난 일을 잊고 함께 편안한 여생을 보내는 것이 어떠냐는 것이었다.
아들 천둥이도 데려오라는 분부를 내린 것으로 보아 이참봉도 천둥을 자신과 막순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 굳게 믿고 있는 듯 했다.
막순은 자신은 못 가겠노라 일언지하에 춘보의 청을 거절했다.
그러자 춘보는 막순을 노려보며 사뭇 언성을 높였다.
참봉 으르신 댁에는 누이의 명부가 적혀있는 종문서가 아직도 남아 있소. 도망 나
온 종년 주제에 못 가겠다는 말이 어찌 그리 함부로 나올수가 있소? 험한 꼴 당하기 전에 순순히 가자고 할 때 따라 갑시다! 사흘간의 말미를 줄 터이니 마음을 정하고 올라갈 준비나 하고 있으쇼!
막순에게는 날벼락과도 같은 소리였다.
막순은 아무리 양반이 좋다 해도 짐승 같은 이참봉에게 다시 돌아가 욕을 보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그러나 아직도 이참봉의 노비문서에 이름 석 자가 올라가 있는 몸.
거절할 수도 달아 날 수도 없었다.
막순은 쇠돌을 만나 하소연 해 보았으나, 쇠돌 역시 뾰쪽한 수가 없었다.
뜬 눈으로 밤을 세우며 고민하던 막순은 이틀째 밤이 되던 날, 귀동의 이부자리를 펴 주다말고 주체 할 수 없는 서러움에 무너지듯 주저앉아 흐느꼈다.
놀란 귀동이 웬일이냐고 묻자,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도련님과 헤어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대답하는 막순.
다음날 아침 막순은 김진사 앞에 불려가 앉았다.
막순은 14년전, 이참봉 집에서 종살이하다가 죽음을 면하려고 임신한 채 도망 나온 사실과 이참봉이 아랫 사람을 시켜 다시 자신을 잡아 가려고 한다는 것을 이실직고 하였다.
김진사는 그 동안 자신의 정체를 깜쪽같이 숨겼다가 이제와 털어놓는 막순이 괘씸한 생각이 들었으나, 그녀를 생모처럼 의지하고 있는 귀동을 생각하니 그냥 이대로 내 버려 둘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어쨌든 14년이 지났어도 이참봉의 노비문서 속에 막순이 들어가 있으면 막순은 이참봉의 것이었고, 데려가겠다면 내 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김진사는 막순의 곁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귀동을 바라보았다.
귀동은 누가 당장에라도 막순을 데려가기라도 하는냥 풀이 죽어 훌쩍 거리고 있었다. 김진사는 박서방에게 춘보를 불러 오라고 일렀다.
잰걸음으로 달려온 춘보에게 김진사는 막순의 속량할 몸값은 자신이 알아서 넉넉히 셈을 해 줄 터이니 몸값만 받고 물러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의향을 떠 보았다.
그러나 춘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막순의 문제는 돈으로 해결 될 문제가 아니며 자신은 이참봉의 지엄한 명을 받은 이상, 막순을 무조건 한양으로 데려가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었다.
한편 천둥은 이것이 꿈인지 생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한양 은담골에서 자신을 찾는다는 아버지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한양에서 내려 왔다는 소금장수 춘보가 자신을 도련님이라 말을 높이는 것은 물론이요, 장터 여각으로 데려가 비단 저고리에 바지, 두루마기까지 새것으로 사 입혔다.
움막에 모인 거지들도 모두 덕담을 던지고 축하해 주었다.
그야말로 용마골 개천에서 용이 나온 것이다.
큰년이가 제일 기뻐했고, 자근년도 도갑을 대동하고 천둥에게 찾아와 앞으로 벼슬길에 오르더라도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노잣돈에 보태라며 엽전 닷냥을 건넸다.
장노인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며 천둥의 발에 꼭 맞는 태사화를 선물해 주었다.
달이가 천둥을 보는 눈빛도 달라져 있었다.
사뭇 부끄러워 하는 눈빛으로 한양 가서도 자신을 잊으면 안 된다는 말을 당부했다.
내 어찌 달이 너를 잊을소냐!
천둥은 마치 구름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거지 움막에서는 거지들의 잔치가 벌어졌다.
장꼭지는 천둥에게 이별주를 따뤄주며 자신에게 남길 말이 없냐고 물었다.
천둥은 할 말 다하고 가고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따끔하게 말해주었다.
두목께서는 오늘만 날인줄 아시는데 오늘만 날이 아닙니다. 내일도 날이니 부디 내일을 생각하면서 오늘을 사십시오.
다른 날 같았으면 말이 끝나는 즉시 천둥이 맞아 죽을 법한 말이었으나, 장꼭지는 떨떠름한 얼굴로 명심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쇠돌은 천둥이 이참봉의 아들로 들어가는 것이 기쁘면서도, 만에 하나 이참봉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것이 탄로 나면 어쩌나 내심 두렵기도 했다.
거지움막의 잔치가 파하고 여각으로 돌아가는 길.
천둥은 쇠돌과 나란히 걸으며 가슴에 맺혀 있던 의문을 털어놓았다.
한양에서 온 춘보 아저씨는 김진사댁 유모가 제 엄마임이 틀림없다고 합니다. 그러데 왜 엄마는 저를 싫어하고 자식이 아니라고 합니까?
쇠돌은 천둥이 출생하기 이전에 이참봉이 막순에게 저질렀던 패악과, 이참봉의 부인이 임신한 막순을 죽이려고 했던 일을 소상하게 말해 주었다.
그러나 아기를 바꿈질한 사실만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천둥은 그제서야 엄마인 막순이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아, 그래서 엄마는 아버지 이참봉이 미운만큼 나를 아들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까닭없이 내가 미웠던 게로구나.
천둥은 그런 엄마가 원망스러웠지만 나름대로 조금은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허나 비록 지금은 나를 자식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언젠가 엄마의 마음은 내게로 돌아오리라.
천둥은 눈물을 글썽이며 동녀가 가 있다는 동녀의 외조부 집을 찾아갔다.
동녀는 천둥을 보더니 서럽게 흐느꼈다.
이미 동녀의 외조부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씨 문중의 도령과 정혼을 해 놓았다는 것이다. 천둥은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다.
바꿀수만 있다면 자신에게 닥친 이 행복과 동녀의 불행을 바꾸고 싶었다.
천둥은 그 즉시 동녀를 데리고 튀었다.
그리고 쇠돌에게 은밀하게 동녀를 맡기며 한양에 올라가 자리가 잡히는대로 동녀를 데리러 오겠노라 굳게 약속했다.
한편, 한양에 올라간 김진사는 이참봉을 만났다.
김진사는 당시 세도가인 호조참판의 조카였고, 이참봉은 호조의 녹을 먹고 있는 관리임을 알아낸 김진사는 이미 사람을 보내 막순을 포기하라 설득을 한 뒤였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 망설이는 이참봉을 직접 대면한 김진사는 단판을 지었다.
먼저 막순이 이참봉과 다시 만나기를 죽기 보다 더 싫어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대로 막순을 이참봉 집에 올려 보내는 결정이 내려지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비록 과거의 일이지만, 아내의 몸종을 건드려 아이를 임신케 한 뒤 내 쫒고, 아내가 죽자 다시 재취로 맞아들인다는 것은 사대부의 집안으로서 차마 못 할 짓이라는 것. 소문이라도 나면 늘그막에 망신살이 뻗치고, 호조에서도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는 것.
막순이 기왕에 내 집과 인연이 닿아 이렇게 내 집 유모가 되어 버린 이상, 사람하나 살리는 셈 치고, 한번만 못 본 척 해 달라는 것.
속량해 주면 그 값을 후하게 치루어 주고 은혜는 잊지 않겠다는 것.
말이 담판이지 협박이었다.
이참봉은 김진사의 말에 굴복 하며 막순을 포기 할 수밖에 없었다.
막순의 노비문서는 불태워졌고 그녀는 이제 어느 누구의 종도 아닌 자유의 몸이었다.
그리고 천둥이가 거지생활을 청산하고 아버지 이참봉 집으로 들어간다는 소식을 쇠돌로부터 들었을 때 막순은 만감이 교차했다.
평생 지워지지 않을 천둥이에 대한 마음의 빚이 조금은 덜해지는 기분이었다.
동녀의 일로 상심하던 귀동은 천둥의 친 아버지가 나타났다는 말에 자신의 일인냥 기뻐했다. 금옥 역시 마치 자신이 출세하여 한양에 올라가기라도 한 듯 들떠 있었다.
기실 귀동은 유모인 막순과 천둥의 관계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단지 그 동안 모른척 하고 있었던 것은 생모나 다름없는 유모의 사랑을 천둥에게 빼앗길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귀동은 천둥과 아무리 친할지언정 유모의 사랑을 둘로 나누어 가지고 싶진 않았다.
천둥이가 유모의 친아들이란 소문이 들려온들 무슨 상관이랴.
귀동은 이 세상 에서 자신을 가장 사랑해 주는 것은 유모뿐 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천둥이 한양으로 떠나기 전날 밤.
천둥은 귀동을 고갯마루에서 만나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천둥은 말했다.
우리 10년 후 오늘! 똑 같은 시각에 호패를 찬 사나이가 되어 이 고갯마루에서 다시 만나자!
두 소년은 굳은 악수를 나누었다.
2부
그로부터 10년 후
호패를 찬 사나이가 된 천둥은 지난 시절을 생각하며 10년전의 약속장소에서 귀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인 줄 알고 춘보를 따라 들어갔었던 한양 이참봉의 집.
그러나 천둥은 열흘 만에 내 쫒기고 말았다.
천둥을 본 이참봉은 천둥이 워낙 자신과 외모가 달라 보이자 더럭 의심이 갔다.
그는 매일 아침 천둥을 불러 자신과 닮은 구석을 찾아보려 애를 써 보았다.
성품이나 행동, 목소리, 걸음걸이에 이르기까지 천둥이 이참봉을 닮은 구석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천둥은 누가 봐도 이참봉의 아들이 아니었다.
천둥은 쫓겨나고 말았다.
아는 사람이라곤 단 한 사람도 없는 한양거리.
쫓겨난 천둥은 갈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다시 거지가 되어 용마골로 되 돌아 갈수는 없었다. 그때 천둥은 성초시가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건넸던 서찰이 생각났다. 천둥은 서찰에 적힌 주소를 들고 성초시의 친구에게로 향했다.
그것이 천둥이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진 마지막 모습이었다.
어느 고승을 따라 승려가 되기 위해 산속으로 들어갔다는 소문도 있었고, 인삼장사를 따라 청국으로 건너갔다는 말도 있었다.
그렇게 사라졌던 천둥이 장부가 되어 용마골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는 누가 봐도 늠름한 대장부의 모습이었다.
이때 어둠 속에서 말을 탄 사내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말에서 내리는 사내는 다름아닌 귀동이였다.
두 사나이는 반갑게 서로를 얼싸안았다.
그 동안 귀동은 무과에 급제하여 승승장구 포도청의 포도부장이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장터거리에 있는 주막으로 향했다.
그리고 밤 늦도록 쌓인 회포를 풀며 술잔을 기울였다.
귀동의 아버지 김진사는 그동안 호조 참의라는 관직에 중용되어 일가는 모두 한양에 올라와 있었다. 매관매직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는 호조판서로 있는 숙부의 입김 덕이었다. 귀동 역시 포도부장이라는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세도가인 아버지의 힘이 없었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귀동이 실력 없는 백면서생은 아니었다.
그의 무예는 좌, 우포청에서 따를자가 없이 뛰어났고, 장안의 무뢰배들이나 도적들은 김대길이란 이름만 들어도 오금을 저리는 속칭 왈자들의 염라대왕이나 다름없었다.
뇌물과 불법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그는 항상 청렴하고 강직했다.
그러나 귀동의 가정사는 편치 않았다.
아버지는 당시 실세인 형조 정랑 홍언신과 사돈을 맺고 귀동을 그 가문의 딸과 강압적으로 혼인을 시키려 했으나 귀동은 식음을 전폐하며 거부했다.
그는 흉폭한 강도와 도적들을 토포한다는 빌미로 집을 멀리하고 밖으로만 내 돌았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으랴.
결국은 아버지 김진사도 어쩔수가 없었다.
귀동에게 있어서 단 하나의 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동녀뿐이었다.
동녀...
동녀는 귀동과 천둥 두 사람의 아픈 상처였다.
그토록 오랜만에 만났건만 두 사람 중 누구도 동녀에 대해서는 먼저 말을 꺼내지 못했다.
천둥은 달이에 대해 물어 보았다.
어린 시절 귀동을 연모했던 갖바치의 손녀 딸 달이.
그녀는 장안에서 이름난 기생이 되어 있다고 했다.
천둥은 귀동의 입에서 달이의 이야기가 나오자 가슴이 뭉클했다.
자신을 무시하고 천대했던 말괄량이 달이.
그러나 순진하고 착한 속내도 많았던 달이...
귀동과 천둥은 달이를 떠올리며 서로를 놀려대며 옛 추억을 되새겼다.
밤이 이슥하도록 술잔을 나눈 그들은 며칠 후 달이가 있는 기방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천둥의 말에 의하면 천둥은 그 동안 개성상인을 따라 청국을 오가며 인삼장사를
배웠다. 아직은 큰돈을 못 모았으나 열심히 노력해서 시전에서 남부럽지 않는 점포를 하나 소유하는 것이 꿈이고, 지금은 진대인이란 청국의 거상과 함께 청국에서 비단을 사들여 팔도에 비단을 팔고 그 고장 특산물을 사들이는 장사를 한다고 했다.
귀동이 얼핏 보기에도 천둥은 나름대로 돈냥께나 만지는 듯이 보였다.
행색 또한 예사 상인들 같지 않게 단아하고 기품이 있었다.
한양 집으로 돌아 온 귀동은 동생 금옥에게 용마골에 들려 천둥을 만났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금옥은 놀라워하며 천둥에 대해 꼬치꼬치 물었다.
그리고 옛날 개울을 건너다가 다리를 다쳤을 때, 천둥이 업어 주었던 일을 추억하며 자신의 목덜미에 있는 반점과 천둥의 반점이 똑 같았던 일을 떠 올렸다.
귀동은 내심 신비하고 묘한 일이라 생각했다.
금옥은 혼담이 여러곳에서 들어오고 있으나 혼처를 정하지 못하고 있는 터였다.
어머니 권씨는 가문 좋고 잘나가는 세도가의 도련님을 배필로 구하기 위해 중매쟁이를 앞세워 동분서주 마음이 바빴다.
허나 정작 금옥의 반응은 냉담했다.
귀동은 은근히 금옥의 마음을 떠 보았다. 금옥은 아직도 천둥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천둥이 업고 건네주었던 시냇가.
천둥의 땀에 젖은 등짝에서 베어나와 자신의 옷고름을 적셨던 감물 자욱.
빨아도 지워지지 않았던 그 옷고름을 금옥은 아직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 그럼 동녀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동녀는 막순과 함께 있었다.
막순은 성균관 근처에서 여각을 겸한 주막을 하고 있었다.
5년 전 귀동이 무과에 급제하자, 그 동안 잘 키워 준 것에 대한 배려로 김진사는 논마지기를 보상으로 주었다.
그러나 귀동과 떨어져서는 살 수 없는 막순.
귀동의 집안이 한양으로 올라오자, 그 땅을 팔아 귀동을 가끔이라도 볼 수 있는 곳에 여각을 사들여 눌러 앉았던 것이다.
귀동에 대한 막순의 애정은 변함이 없었다. 혹여 귀동이 포도청에서 입직이라도 하는 날이면 사람을 시켜 밤참을 차려 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고, 때마다 온갖 좋은 보약을 해다 먹이는 것도 막순이었다.
동녀는 막순의 여각에서 방을 하나 얻어 기생들에게 시를 짓고 난을 치는 글선생을 하고 있었다. 동녀는 또래의 어느 여인네보다 학문이 깊었다.
비록 기생들의 글선생에 불과 했으나 그가 치는 사군자는 어떤 선비의 붓끝에서 나온 그림보다 기품이 있었다.
서화를 조금 안다고 하는 장안의 한량들은 동녀의 글씨나 화폭을 한 점 지니고 있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겼다. 그녀는 그것으로 큰 돈을 모으고 있었다.
물론 동녀를 연모하는 선비들도 많았다.
그러나 동녀는 요지부동, 뭇 사내들에게는 눈길한번 주지 않았다.
여각의 부엌 살림은 붓들네가 맡아서 했고, 싸움꾼이었던 붓들은 막순이 귀동에게 잘 부탁한 덕분에 포도청 포군으로 들어가 귀동을 호위하고 다니며 거들먹거렸다.
막순은 자신보다 서너 살 아래인 난봉꾼 삼득과 정분이 나서 함께 살았다.
그것을 지켜보는 쇠돌은 괴로웠다.
그러나 쇠돌의 마음쯤은 안중에도 없는 막순.
막순은 삼득을 서방으로 삼아 같은 방을 썼고 쇠돌을 마치 하인처럼 부려 먹었다.
쇠돌은 마음의 상처가 컸으나 쫓겨 날 것이 두려워 드러내 놓고 싫은 표정을 지을수도 없었다. 삼득은 틈만 나면 투전판과 기방을 쏘다니며 막순의 속을 썩였다.
쇠돌은 막순이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밖에 없었다.
야밤삼경에 삼득을 찾아오라면 찾으러 나가고, 노름 뒷돈을 갖다 주고 오라면 노름 뒷돈을 갖다 주고 왔다.
삼득이 들어오지 않는 밤이면 막순은 동녀를 잡아 놓고 밤 새 삼득을 원망하는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쇠돌은 그래도 막순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붓들네는 그런 쇠돌을 지켜보며 하늘에서 살아야 할 사람이 땅에 내려와 생고생을 한다고 혀를 찼다.
천둥이 귀동에게서 쇠돌의 소식을 듣고 그를 만나기 위해 주막을 찾아 갔을 때, 쇠돌은 병약한 몸으로 나무 짐을 해 지고 들어오고 있었다.
천둥을 이토록 반가워 해 주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쇠돌은 천둥의 손을 꼭 잡고, 보고 또 보고 재회의 기쁨에 눈물을 글썽거렸다.
천둥은 돌아온 탕아가 아버지께 큰 절을 올리듯 마당에서 선걸음에 절을 올렸다.
동녀의 가슴 또한 터질 것 같았다.
꿈에도 그리워했던 천둥이. 쇠돌 아저씨에게 자신을 맡긴 이후로 10년동안 소식한번 없었던 천둥이가 살아 돌아올 줄이야!
이렇게 훤칠한 대장부가 되어 자신의 앞에 돌아온 줄이야!
동녀는 꿈만 같았다.
그날 밤, 쇠돌을 상석에 앉힌채 동녀와 천둥은 뜨거운 술잔을 나누었다.
쇠돌은 천둥이 궁금해 하는 주변 인물들에 대하여 말 해 주었다.
먼저 장꼭지는 5년 전, 팔도 거지들을 수중에 넣겠다는 웅대한 포부를 지닌 채 한양 입성을 시도했다. 그러나 한양에 들어오려면 과천에서부터 기어야 한다는 말이 그저 생긴 말이 아니었다.
때마침 과천 길목을 지키는 거지 패들과 일전을 벌렸는데 패거리들의 규모로 보나 머리수로 보나, 애당초 용마골 거지들은 과천거지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죽도록 얻어맞고 똘마니들까지 다 뺏긴 장꼭지는 겨우 목숨만을 부지한태 한양을 기어서 입성하였다.
그 뒤 장꼭지는 자신보다 먼저 상경해서 자하문 밖에 자리 잡은 껄떡이의 움막에 얹혀 지내는 신세가 되었다.
고삐 떨어진 소 신세가 된 장꼭지.
엎친데 덮친다는 격으로 몇 달 전에는 풍을 맞아 몸 한 쪽을 못 쓰는 신세가 되었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한때 무쇠같은 힘과 하늘을 찌르던 거지 두령의 자존심!
그러나 지금의 장꼭지는 옛날의 장꼭지가 아니었다.
껄떡이의 온갖 구박을 받으며 죽지 못해 살고 있는 늙고 힘없는 거지에 불과했다.
그나마 껄떡에게 쫓겨나지 않는 것은 아들 도갑이의 존재 때문이었다.
나름대로 효성이 지극한 도갑이가 간간히 물건을 도적질 해다 주면, 껄떡이는 그것을 쌀이나 보리쌀로 바꾸어 장꼭지의 입에 풀칠은 시켜 주었다.
그러나 요즘 들어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더 많아진 장꼭지.
그 이유는 근래에 도갑이 동패들과 어울려 유기전을 털다 잡혀 전옥서에 들어가 옥살이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근년은 전옥서 근처에서 풍찬노숙을 하며 도갑의 옥바라지를 눈물겹게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옥에 갇힌 도갑은 외롭지 않았다.
어머니 자근년이 구걸해다 먹여주는 두끼 주먹밥이 눈물겨운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든든한 것은 며칠 전에 들어온 진득이 형의 존재감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동네 닭을 함께 서리해 먹던 진득이형을 이곳에서 만날 줄이야.
진득은 일찍이 왈자패에 들어가 그 바닥에서 악명을 날리고 있었다.
장안을 주름잡고 있는 왕두령(40)패는 시전 상인들에게 있어서 저승사자와 같이 두려운 존재였다. 진득은 그 왕두령패의 수장급으로 다른 왈짜패들과의 일전을 벌리다가 패두의 다리뼈를 부러트리고 이곳 전옥에 갇히게 되었다.
상인들은 왕두령이란 이름만 들어도 몸서리를 치는 터였다.
자릿세, 거간세, 마방세....
그들은 제멋대로 세목을 정하여 선량한 상인들을 괴롭히고 갈취했다.
조정에서는 백성을 괴롭히는 왈자패들을 일망타진하여 엄단에 처하라는 토포령이 이미 수차례 하달되었으나 이들의 기세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것은 이들이 조정의 탐관오리들과 뇌물을 주고받으며 서로 결탁했기 때문이었다.
왕두령은 형조의 관원들과 포도청의 군관, 금위영의 종사관들과 서로 호형호제를 할 정도로 관리들을 다루는 수완이 뛰어났다.
귀동은 포도부장으로 부임하면서 왕두령을 기필코 내 손으로 잡아 오겠다며 마음으로 다짐 했지만, 우포청 포도대장 집에서 왕두령이 교자를 타고 나왔다는 소리를 듣고는 아연실색 하였다. 도무지 어디까지 썩어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세상 모두가 썩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왕두령의 집사격인 진득이가 입옥되어 들어오는 것을 본 순간 도갑은 이제 고생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진득은 들어오자마자 죄수들의 우두머리로 등극 하였고, 옥문 밖의 나졸들을 마치 자신의 하인인냥 부려 먹었다. 날마다 진수성찬이 차입되어 들어왔고, 도갑은 진득의 덕택에 밖에서도 못 먹어 보던 진귀한 음식을 옥안에서 배가 터지도록 먹을 수가 있었다.
원래 죄수들은 부모형제가 아니면 면회가 불가했으나 진득은 예외였다.
왕두령(45세)이 친히 다녀갔음은 물론 진득이 좋아하는 기생 산홍이까지 남장을 하고 찾아와 주었다.
도갑이 곧 태형을 받고 방면 될 것이라는 계호사령의 언질이 있던 날 오후.
천둥은 자근년이를 따라 도갑을 면회 갔다가 함께 있는 진득을 발견하곤 반가워했다. 진득은 천둥이 장사길에 나서서 돈을 많이 벌어 왔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그리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서 언제든지 자신에게 찾아오라고 큰소리 펑펑 쳤다.
진득을 만나고 온 날 저녁, 천둥은 귀동을 만나기 위해 달이의 기방으로 갔다.
귀동은 아랫사람을 시켜 격무에 바빠 늦는 다는 전갈을 전해 왔다.
달이는 천둥에게 요즘 장안에 출몰하는 아래적이라는 강도 때문에 귀동이 눈코 뜰 수 없을 정도로 바쁘다고 했다.
아래적(我來賊)!
요즘 장안의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입만 열면 아래적이라는 의적의 이야기를 입에 떠올렸다. 조정의 고관대작들 중 벌써 다섯 사람이나 아래적에게 깜쪽같이 재물을 털리고 쉬쉬 말도 못하고 있었다.
그는 털어도 꼭 탐관오리의 집만 털었고, 상대를 묶고 입에 자갈을 채우고는 항상 작은 쪽지를 붙혀놓고 사라졌다.
我來!
정의의 사자인 내가 왔다 간다는 단순한 뜻 이었다.
포도청에서는 기찰을 강화하고 아래적을 잡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밤이 이슥해져서야 귀동이 나타났다.
귀동은 달이를 내 보낸 뒤 술잔을 나누며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귀동은 마음은 아프지만 천둥에게 동녀를 양보하고 싶었다.
어차피 동녀와 나는 원수의 집안으로 맺어진 몸.
그러나 동녀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다. 천둥이 너라면 세상 그 누구보다 동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 내가 중매를 맡을 터이니 청혼을 하거라.
천둥은 귀동의 간곡한 말에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동녀를 글동무로 알 뿐이지 연모하는 정은 없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자신은 동녀가 귀동이 자네와 맺어지길 바란다면서 자신을 의식하지 말고 동녀의 마음을 잡으라는 충고를 덧 붙였다.
귀동의 입장에선 의외의 반응이었다.
허나 천둥이 자신에게 동녀를 양보 한다고 해서 동녀의 마음이 돌아 올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귀동.
과연 사랑은 그 토록 쉽게 변하는 것인가.
동녀에게 있어서 돌아온 천둥은 그 옛날 자신을 사랑하던 그 천둥이 아니었다.
자신의 애타는 마음도 몰라주는 천둥.
우정을 나누는 옛 친구로 만족하기엔 동녀의 사랑의 상처가 너무 컸다.
차라리 돌아오지나 말 것을.
동녀의 애타는 가슴은 까맣게 타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천둥의 진심이 아니었다.
동녀가 자신과 혼인을 하면 불행해 질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천둥.
그는 동녀의 마음을 귀동에게 돌리기 위해 동녀를 속이고 있었다.
천둥의 입에서 이미 오래전에 귀동의 동생 금옥을 연모하고 있었다는 말이 나오자 동녀는 사랑의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동녀는 괴로워했다.
아래적은 한양 도처에 빈번하게 나타나 탐관오리를 응징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그것은 묘하게도 천둥이 한양에 나타났던 시점과 거의 일치했다.
그러나 천둥이 아래적과 동일인일 것이라는 생각은 그 누구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래적과 무관하게 귀동이 왈짜패들에게 죽을 뻔한 사건은 달이의 기방에서 두람이 술을 마시고 나오던 날 밤이었다.
달이의 기방에서 나온 두 사람은 그곳 골목 앞에서 헤어졌다.
천둥이 큰 길 쪽으로 향하는데 장정 두 사람이 자신을 힐끗 노려보며 지나쳤다.
이어서 다시 세 사나이가 두 사람을 연이어 쫒아 가는데 웬지 살기가 느껴졌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천둥은 황급히 이들의 뒤를 쫒았다.
아니나 다를까 다섯 사나이들은 귀동에게 칼을 뽑아 들고 달려들었다.
귀동이 홀로 맞서려 했으나 중과부적으로 밀리고 있을 때, 천둥이 뛰어들어 귀동과 함께 이들과 일전을 벌였다.
나름대로 검술에 능한 자 들이었다. 그러나 천둥이 가세함으로서 이들은 두 사람의 상대가 되지 못한 채 달아나고 말았다. 그 와중에 어깨에 칼을 맞은 천둥.
천둥은 귀동의 집에 따라가 그날 밤 어깨의 상처를 치료했다.
뜻하지 않게 금옥과 재회한 천둥.
금옥은 천둥의 상처를 치료해 주며 천둥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불타올랐다.
한편 귀동은 천둥의 검술에 대해 내심 놀라고 있었다.
귀동이 보기에도 보통 고수가 아니었던 것이다.
천둥의 말에 의하면 천둥은 한때 청국을 오가는 뱃길에 수적을 만나 가지고 있던 물건을 몽땅 강탈당했던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 뒤로 진대인이라 불리우는 청국인에게 무술을 배워 이젠 어지간한 도적들을 만나도 대적할 정도는 된다고 했다.
또 하나, 그를 의문의 수렁에 빠지게 한 것은 어깨의 상처를 치료하면서 본 목덜미의 붉은 반점이었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아버지와 금옥에게 찍혀 있는 붉은 반점과 거의 흡사했다. 그리고 자신보다도 더 아버지의 용모를 빼다박은 천둥.
게다가 한 때 유모 막순을 어머니라 부르며 찾아왔었던 천둥.
귀동의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이었다.
며칠 후, 귀동을 죽이려했던 자객들의 정체가 밝혀졌다.
그 들은 왕두령이 보낸 수하들이었다.
그들 중 한명을 잡아 문초해 봤으나, 자신은 그런적이 없다며 끝까지 귀동을 비웃으며 입을 열지 않았다. 이른바 뒷 배경이 든든했던 것이다.
그를 포도청의 사옥에 가두어 두고 다음날 출청한 귀동은 어이없는 현실에 직면하고 만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놈이 밤사이 풀려난 것이다.
분노에 차 있는 귀동을 급히 들어오라고 전갈을 띄운 사람은 포도대장이었다.
그는 귀동의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오히려 무고한 양민을 억울하게 잡아 왔다며 귀동을 나무랬다..
낙담하여 괴로워하는 귀동에게 아버지 김진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무슨 일이든 보고도 못 본 척 하는 것이 좋다. 모난 돌은 정 맞기 마련이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키느니라.
귀동은 포도대장의 말보다 아버지의 말이 더 가슴 아팠다.
천둥은 그러한 귀동을 위로하며 그의 마음을 달래 주었다.
한편 아래적은 신출귀몰 도처에 출몰하고 있었다.
거리에는 아래적을 잡는 자에게는 3천냥을 포상하겠다는 벽서가 나붙고, 의금부와 어영청의 군졸들까지 합세하여 눈에 불을 켜고 아래적을 잡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아무리 물샐틈없는 순찰을 돌아도 열흘이 멀다하고 탐관오리의 집들이 아래적에게 털리고 있었다.
게다가 아래적은 헐벗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빼앗은 재물을 나누어 준다는 소문이 돌았다.
백성들은 환호를 했고, 뒤가 켕기는 탐관오리들은 겁에 질려 있었다.
아래적에게 털린 사람들 중에는 오금이 저려 아래적이 다녀갔다는 말조차 못하는 자들도 있었다. 귀동은 아래적에게 털린 관리들을 탐문하면서 그에 대한 묘한 경외감이 일어났다. 마치 자신이 할 일을 대신 해 주는 것 같은 아래적.
그러나 꼭 자신의 손으로 아래적을 잡고 싶었다.
천둥은 막순의 주막을 출입하면서 막순에게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막순이 자신의 생모 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따위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오히려 나는 너를 낳은 적이 없다고 잡아떼는 것이 천만다행으로 여겨졌다.
평생 막순에게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온 쇠돌아저씨.
그런 착한 사람을 주막집 종처럼 부려먹는 것도 안 될 일이지만, 감히 아저씨의 면전에서 난봉꾼 삼득과 살림을 차리고 살다니!
사람의 탈을 쓰고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
천둥은 쇠돌 아저씨를 막순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해 드려야 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내침김에 자신이 사들여 기거하고 있는 자하문 밖의 거처로 쇠돌을 맞아드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혼자 산다는 큰년이 아주머니도 함께 모시리라 작정한 연후에 큰 년이 아주머니를 찾아 나섰다. 어렵게 살기로는 큰 년도 마찬가지였다.
큰 년은 창기들이 모여 있는 사창굴에서 과객들을 소개해 넣어주고 구전을 먹는 속칭 골목에미 일을 자청하고 있었다.
천둥이 알음알음 그 곳을 찾아가자 큰 년은 반가움에 눈물까지 흘렸다.
그리고 천둥이 무슨 일로 왔는지 전후사정은 물어보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천둥의 옷소매부터 잡아끌었다.
아무소리 말고 날 따라 오너라. 어제 막 들어온 어린년이 하나 있는데 이목구비가 수려한 것이 일패 기생 못지않다. 내 오늘 밤 그 아이를 구전 안 받고 붙혀 줄테니 나만 따라 들어오너라.
천둥은 질겁하며 큰 년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큰 년을 모시고 가야할 사람은 정작 자신임을 밝혔다.
천둥은 어리둥절해 하는 큰 년을 대동하고 막순의 주막으로 향했다.
그리고 쇠돌을 불러 두 사람을 나란히 앉힌 후 속에 있는 말을 다 털어 놓았다.
살아오면서 오늘 날 까지 내 마음속의 아버지는 쇠돌 아저씨고, 내 마음속의 어머니는 큰 년이 아주머니뿐이었다. 그러므로 두 분은 내 부모님과 진배없는 분들이시다.
나는 지난 세월동안 청국을 오가는 장사 길에 나서서 운 좋게도 내게는 과분할 정도의 큰돈을 벌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객지로 나다니지 않고 한양을 근거지로 삼아 본격적인 장사를 할 예정이다. 마침 내가 거처 하고 있는 삼간누옥이 자하문 밖에 있는데 두 분을 그 곳에 편히 모시고 싶으니 부디 거절하지 말고 허락해 달라.
청루의 골방에서 창기들의 온갖 잡심부름을 다해오던 큰 년에게는 너무나 고마운 희소식이었다. 쇠돌 또한 거절할 명분은 없었다.
천둥과 함께 가서 천둥의 집을 보자 두 사람은 입이 떡 벌어졌다.
말이 삼간누옥이지 큰 년과 쇠돌에게는 고대광실 고래등짝과도 같았다.
천둥은 큰 년에게 팥죽장수를 할 수 있도록 저자거리에 작은 팥죽집 터를 얻어 주었고, 쇠돌은 팥죽을 끓여 큰 년을 도와주는 한 편, 집 앞에 터 밭을 일구었다.
살림을 합친 두 사람은 자연히 가까워졌고, 처음엔 뻘쭘하게 각 방을 쓰던 두 사람은 한 달도 못가서 사랑이 뭐 별건가 한 이불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한편 사랑에 빠진 동녀는 사흘이 멀다 하고 쓰게 치마로 얼굴을 가린 채 천둥의 집을 찾아 나섰다. 명목상 병든 쇠돌 노인의 병구완을 왔다지만, 천둥의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고 가고픈 마음이 더 컸다.
쇠돌은 동녀를 멀리하는 천둥의 마음을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었다.
딱히 가슴에 품고 있는 다른 여인네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동녀의 무엇이 부족해서 그러느냐, 수차례 따지고 설득해 보았으나 천둥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말씀 드릴수가 없습니다. 이제 곧 두고 보면 으르신 께서도 아실 것입니다.
답답한 쇠돌은 더 이상 묻지 못하고 한 숨을 쉴 뿐이었다.
동녀를 볼 때마다 흔들리는 천둥.
천둥 또한 괴로웠다.
그러던 어느 날.
뜻하지 않게 귀동의 동생 금옥이 천둥을 찾아왔다.
전에도 한 번 찾아 왔을 때, 쇠돌이 천둥은 이곳에 없다며 문전박대하여 쫒아 낸 터였다. 천둥과 금옥이 친 남매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쇠돌.
금옥이 천둥을 좋아하고, 또 귀동이 금옥과 천둥을 맺어주려 한다는 소문은 듣기에도 끔찍한 일이었다. 쇠돌은 노골적으로 금옥을 문전박대하며 금옥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리고 천둥에게 금옥과의 혼인은 절대 안 된다며 불같이 화를 내었다.
천둥은 쇠돌이 왜 그렇게 유독 금옥을 싫어하고 화를 내는지 이해 할 수 없었다.
금옥은 쇠돌이 자신을 박대하는 이유가 동녀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우같은 계집!
쇠돌노인을 시켜 자신을 천둥에게서 떼어내려고 한 짓이리라!
금옥은 동녀에 대한 질투심에 불타올랐다.
속절없는 눈물을 흘리며 금옥은 천둥의 앞에 자신이 간직하고 있던 감물 든 옷고름을 내밀었다.
금옥의 하소연은 이러했다.
요즘 들어서 오빠 귀동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
천둥이 처음에 금옥의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귀동은 동생 금옥이 천둥과 가까워지는 것을 오히려 반기는 눈치였다. 그런데 마음이 변했는지 금옥의 입에서 천둥에 대한 말만 나와도 질겁하며 너와는 인연이 안 닿는 사람이니 입에도 담지 말라고 윽박질렀다. 게다가 귀동이 앞장서서 금옥의 혼사를 채근 하였고, 집안에서는 목하 금옥의 혼담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금옥은 천둥이 아닌 다른 사람과 혼인을 하느니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차라리 자신을 데리고 청국으로 도망가 달라고 눈물로 애원하는 금옥.
천둥은 그럴수 없다며 깊은 한 숨 만을 내쉴 뿐이었다.
또 다시 포도청은 발칵 뒤집어 졌다.
개성감영에서 내려 보낸 인삼이 내수사의 곳간으로 운송되던 와중에 도적들의 습격을 받은 것이다. 포도청에서 현장에 달려 왔을 때, 운송 군관 한사람은 도적들의 칼에 맞아 죽고, 등짐 진 관노들 다섯과 군졸 둘은 눈이 가려진채 포박되어 신음하고 있었다.
현장에는 <我來>라는 글귀의 쪽지가 죽은 군관의 이마에 붙어 있었다.
왕실로 가는 재물을 탈취한 사건이라 의금부에서 금부도사(45)를 파출하여 직접 진상파악에 나섰다. 현장에서 살아남은 나졸들을 문초해 본 결과 복면을 쓴 도적들은 다섯이었고, 검술이 출중하여 대적하기가 불가했다고 전했다.
금부도사는 아래적이 이제 적당을 만들어 왕실의 재산까지 넘본다며 좌우포청의 군사들과 금부의 나장들을 풀어 아래적 생포에 혈안이 돼서 나섰다.
아래적이 떼도둑을 만들어 임금의 진상품에 손을 댔다는 소문에 민심은 아래적에 등을 돌리고, 시전 상인들도 실망하며 적의를 드러내었다.
의적은 무슨 놈의 의적. 한 낱 간 큰 도적놈에 불과 한게지!
그러나 아래적에게 당했다는 개성 감영의 나졸 둘을 은밀히 불러 문초해 본 귀동은 아래적의 소행이라고 단정하기엔 의문스러운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첫째, 운송군관을 죽인 수법이 아래적 답지 않게 잔인했고.
둘째, 지금까지 아래적은 단독범이었는데 적당들을 넷이나 거느린 것이 그 답지 않았다.
셋째 <我來>라는 필체가 언뜻 보기에는 동일한 필체처럼 보이나 꼼꼼히 살펴보면 이전의 필체와는 다르다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귀동은 의혹을 품고 진범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 하다가 살아남은 나졸 중 한 사람이 왕두령과 내통하고 있었다는 심증을 굳히고 나졸을 잡아 문초했다.
과연 아래적을 위장한 왕두령의 짓이었다.
그는 사실대로 왕두령의 짓임을 입증하는 장계를 포도대장께 올렸지만, 대장으로부터 오히려 문책을 받게 된다.
치솟는 분노를 견디지 못한 귀동은 아버지 김참의를 찾아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해 보지만, 아버지로부터 황당한 말만 들을 뿐이었다.
이미 주상전하께는 아래적의 소행으로 상소가 올라갔다. 행여 아래적 소행이 아닐지라도 포도대장께서 아래적 소행으로 장계를 올리라면 그렇게 올리는 것이 부하된 도리다. 공연히 나서서 화를 부르지 말고 아래적의 소행으로 알고 덮어 두거라.
귀동은 어이가 없었다.
귀동은 오히려 전 보다 집요하게 왕두령을 탐문하고 추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귀동은 왕두령의 뒤를 쫒다가 그 것을 눈치 챈 왕두령의 졸개로부터 독이 묻은 표창을 맞고 동녀의 내실로 뛰어든다.
포도청 관속들도 믿지 못하고, 집안에도 자신의 부상을 알릴 수 없는 몸.
사경을 헤메던 귀동은 동녀의 극진한 간병으로 구사일생 깨어난다.
동녀에게 소식을 듣고 귀동을 찾아간 천둥.
어찌된 영문이냐고 묻는 천둥에게 귀동은 왕두령이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것을 밝히며 천둥에게 은밀한 도움을 청한다.
자신이 탐문해 본 바로는 아래적은 이번 살옥 사건과 관계가 없다는 것.
이번 진상품은 개성의 인삼이 아니라, 은성 금광에서 나온 500만냥 값어치의 황금이라는 것. 또한 황금에 대해서는 내수사 관료들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것.
이는 필시 의금부에 있는 누군가가 포도청과 짜고 왕두령을 수하로 삼아 저질은 일이 분명하다는 것.
귀동의 말을 들은 천둥은 귀동을 도와 왕두령의 뒤를 캐 낼 것을 굳게 약속하였다.
그로부터 며칠 후, 금부도사의 집에서 나오는 왕두령과 두 명의 왈자들을 숨어서 지켜보는 한 사나이가 있었다.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아래적이었다.
왕두령과 왈자들이 한적한 곳을 지나려 할 때, 아래적이 나타나 왕두령을 향해 칼을 겨누었다. 호위 왈자 중 한 사람은 진득이었다.
왕두령까지 합세하여 아래적에 대항했으나 세사람은 아래적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호위 왈자 중 만복이란 자가 먼저 칼에 맞아 나뒹굴었고, 이어서 왕두령도 아래적에 대항하다 칼을 맞고 쓰러졌다.
그러나 쓰러지면서 아래적의 두건을 벗긴 왕두령.
칼을 쥔채 곁에서 지켜보던 진득은 온 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아래적의 정체는 다름아닌 천둥이었던 것이다.
천둥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왕두령을 가차없이 베어 버렸다.
그리고 황망히 자신을 바라보는 진득에게 칼끝을 겨누며 비감하게 내 뱉았다.
네 이놈 나를 친구라 부르지도 마라. 네 어찌 이런 무뢰배의 수하가 되어 양민들을 괴롭히고 그 들의 눈에 피눈물이 흐르게 하느냐! 나는 네가 알고있는 천둥이가 아니고 아래적이다! 지금까지 내 얼굴을 본 사람은 단 한사람도 살려 두지 않았다! 허나 옛정을 생각해서 이번 한 번만은 목숨을 살려 줄터이니 그리 알아라! 다시 또 이런 더러운 왈자패의 행색으로 내 눈앞에 나타나면 용서치 않으리라!
천둥은 자신의 신표인 <我來>쪽지를 꺼내어 칼 끝에 꿰었다. 그리고 그것을 쓰러져 있는 왕두령의 얼굴에 던져 버리고 몸을 날려 사라졌다.
다음날 왕두령이 아래적에게 당했다는 소문은 온 장안을 술렁이게 했다.
내수사로 향하던 황금 탈취도 아래적의 소행이 아니라 왕두령의 짓임도 밝혀졌다.
왕두령패의 잔당들은 기가 죽어 있었고 시전상인들은 이제 숨통이 트이게 되었다며 아래적의 영웅담을 입에 떠올리며 그를 대장군처럼 받들었다.
거리에는 왕두령패의 잔당들을 포척한다는 포고문이 나붙고 왈자들은 줄줄이 포도청에 엮여 들어가고 있었다.
왕두령과 짜고 비리를 저질렀던 탐관오리들은 모든 비리의 책임을 죽은 왕두령에게 뒤집어 씌우고 사건을 마무리 하려고 하였다.
천둥의 칼에 맞아 부상당한 왕두령의 부하 만복은 의금부로 끌려갔다.
왕두령과 짜고 사건을 저질렀던 금부도사 일행은 자신의 비리를 잘 알고 있는 진득을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귀동이 만복을 문초하기 위해 의금부에 갔을 때, 만복은 의금부 나장들에게 묶인채 난타당해 처참하게 죽어 있었다.
부패관료들과 왕두령의 관계를 밝힐수 있는 죄수를 이렇게 장살하여 죽이다니, 귀동은 어이가 없었다.
이제 왕두령과 연계된 부패관리들을 밝혀 낼 수 있는 증인은 단 한사람, 진득이 밖에 없었다. 귀동은 금부도사에 앞서 진득을 잡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양쪽에서 쫓기게 된 진득은 천둥의 집을 찾아 뛰어 들었다.
진득은 천둥의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앞으로 자신도 천둥을 도와서 의로운 일에 나설 것을 맹세 하며 왕두령과 연계된 벼슬아치들의 이름을 낱낱이 털어 놓았다.
천둥은 진득을 용서하고 숨겨 주었다.
한편 귀동은 아래적의 옥사가 기록된 장책을 뒤져보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장안에 아래적이 나타나 사건을 일으키는 날에는 공교롭게도 항상 천둥이 장사길에 나서고 없었을 때 였던 것이다.
그러고보니 의심스러운 점이 한 둘이 아니었다.
자신보다 몸이 날래고 무예가 출중했던 천둥.
천둥이라면 능히 왕두령을 제압하고 살해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귀동은 은밀히 천둥의 뒤를 캐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둥이 집을 잠시 비우고 나간 사이 천둥의 집에 몰래 잠입해 들어갔다..
이때 다행히도 진득은 측간에 앉아 일을 보다가 귀동이 천둥의 방에 몰래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슬아슬하게 달아난 진득.
귀동은 천둥의 방을 낱낱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별다른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귀동은 천둥이 물품의 출납을 기록한 서책을 펼쳐보고 아래적의 필적과 같은 것인지 대조해 보기도 했다. 서체를 꼼꼼히 살펴보던 중, 서책 아래에서 누군가가 천둥에게 보낸 서찰이 눈에 띄었다.
문득 펼쳐보니 금옥이 천둥에게 보낸 연서였다.
서둘러 읽어보니 구구절절 천둥을 사모하는 금옥의 마음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이때 밖에서 누군가 들어오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문틈으로 내다보니 나뭇짐을 해서 들어오는 쇠돌 노인이었다. 귀동은 쇠돌 노인이 부엌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본 후, 몰래 천둥의 집을 빠져 나왔다.
한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천둥은 누군가 자신을 미행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으나 모른 척 하였다. 그날 밤 진득은 천둥에게 귀동이 집안으로 몰래 들어와 염탐하고 갔음을 알렸다.
그렇다면 오늘 종일토록 자신을 미행했던 사내 역시 귀동이 보낸 사람이리라.
귀동이 자신을 아래적으로 의심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천둥은 귀동을 따돌릴 묘책을 생각해 내었다.
며칠 후, 천둥은 청국에서 들어오는 비단을 수령하기 위해 제물포로 향했다.
귀동은 포졸 하나를 장꾼으로 위장시켜 천둥을 미행케 했다.
그런데 그 날 밤, 어이없게도 금부도사의 집에 아래적이 나타난 것이다.
기생첩과 함께 잠들어 있는 금부도사의 방에 나타난 아래적은 오라 줄을 던져 기생첩으로 하여금 그를 묶게 한 뒤, 목에 칼을 겨누었다.
그리곤 그녀에게 이불을 뒤집어씌운 후, 금부도사에게 이실직고 하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왕두령이 강탈했던 황금은 어디에 숨겨 두었으며 호조의 관원중에 너와 내통하고 있는 놈이 누구냐고 캐어물었다.
금부도사는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완강하게 버텼다.
그러자 아래적은 복면을 벗었다.
그 동안 금부도사와 왕두령 사이를 오가며 심부름을 했던 진득이었다.
금부도사는 놀라며 입을 열었다.
황금은 이미 일본 상인에게 다 팔았고 그 배분은 호조참의와 함께 했다고 털어놓았다. 이때 밖에서 금부도사 집 하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진득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금부도사는 베게 밑에 숨겨 놓았던 단검을 꼬나들고 비호같이 진득에게 몸을 던졌다.
복부에 칼을 맞은 진득은 휘청이며 금부도사의 목을 베고 문을 박차고 뛰어 나갔다.
놀란 하인이 호적을 불자 입직 나장 두 사람이 달려왔다.
진득은 복부에 박힌 단검을 뽑아 던지며 담을 넘었다.
부상한 상태로 뒤 쫓아 오는 나장들과 일전을 벌여 그 들을 쓰러트린 후 그는 어둠속으로 비틀거리며 사라졌다.
다음 날, 의금부 관원들과 함께 살옥의 현장을 둘러 본 귀동은 아래적의 소행임을 확신했다. 그리고 아래적이 피를 쏟으며 달아났다는 사실을 알고 혹시 천둥이 부상을 입은 것은 아닐까 걱정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천둥을 제물포까지 미행하여 하루 밤을 유숙하고 온 포졸은 수상한 점은 전혀 발견하지 못했음을 알려 왔다.
아래적이 나타났을 시각에 천둥은 제물포에 있었던 것이다.
다행이로다. 천둥은 아래적이 아니다!
귀동은 남몰래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한편, 제물포에서 돌아 온 천둥의 집에는 도갑이 사색이 된 채 와 있었다.
도갑은 진득이 자신의 움막에서 죽어가고 있음을 알렸다.
도갑의 움막으로 간 천둥.
진득은 천둥에게 금부도사와 결탁한 인물 중에 호조좌랑 이근형와 그 위에 호조참의 김재익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렸다.
김재익.
그것은 귀동 아버지의 이름이었다.
진득은 천둥의 눈물 속에 다음 생에서의 만남을 기약하며 평화롭게 숨을 거두었다.
다음 날 천둥을 만난 귀동은 그 동안 자신이 천둥을 아래적으로 오해하고 있었던 것을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그리고 또 하나 부탁이 있다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금옥이 혼사를 앞에 두고 있으니 행여 금옥에게 마음을 두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귀동은 어렴풋이 자신과 천둥의 비밀을 알아내고 있었다.
그것은 억장이 무너지는 출생의 비밀.
기실 아버지 김참의와 천둥은 너무 닮아 있었다.
생김생김과 걸음걸이, 목소리, 웃는 모습마저도.
그러나 천둥은 아직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짐짓 내 출신의 비천함 때문이냐고 묻자 그것은 결코 아니며 조만간 자신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니 그때 가서 말 해 주겠노라며 귀동은 입을 닫았다.
요즘 귀동은 심사가 편치 않았다.
포도대장이 귀동을 포도청의 한직인 겸록부장으로 내 보낸 것이다.
귀동은 그것이 아버지 호조참의의 입김인 것을 알고 아버지께 따졌지만, 아버지는 파직되지 않은 것만 해도 황송한 줄 알라며 화를 버럭 내었다.
아버지 김재익은 탐관오리들을 응징하는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는 귀동을 항상 못 마땅하게 여겼다.
귀동은 아버지에게 세상은 시류에 맞춰 살아야 한다는 것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왔다. 허나 귀동이 가는 길은 아버지와는 정반대의 길이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정직하고 정의로운 귀동의 행동이 아버지의 눈에는 교만하고 안하무인의 성격으로 보였다.
도무지 자신과 닮은 구석이라곤 없는 아들 귀동이.
아버지 김참의는 귀동을 버린 자식 취급했고, 그 들 사이에는 돌이킬 수 없는 간극이 벌어져 있었다.
귀동은 이대로 덮어 둘 수 없는 자신의 출생의 비밀에 캐어 나가기 시작했다.
같은 날 밤, 같은 마을, 비슷한 시각에 태어 난 두 사람.
그런데 왜 천둥은 아버지의 용모를 닮아 있을까.
왜 금옥과 아버지의 목덜미에 있는 붉은 점이 자신에게는 없고 천둥에게 찍혀 있을까. 귀동은 갓난둥이 자신을 산파와 함께 받아 냈다는 방울네를 찾았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듣지 못했던 놀라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분명 태어날 당시에는 목덜미에 반점이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사흘을 앓고 나서부터는 붉은 반점이 없어 졌기에 자신도 괴이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는 것이다.
귀동은 이번엔 천둥을 받아 냈었다는 큰 년을 찾아가서 천둥이가 막순의 아들임이 분명하냐고 물어 보았다.
큰 년은 막순의 얘기가 나오자 독한 년이라고 팔을 내 둘렀다.
지가 낳은 아들을 지가 낳지 않았다는 년은 처음 봤다는 것이다.
천둥이 태어나면서 목덜미에 붉은 반점 같은 것은 없었냐고 묻자, 처음엔 없었는데 쇠돌이 동냥젖을 멕이고 온 어느 날부터, 목덜미가 빨갛기에 처음엔 물것이 물어서 부르튼 것인 줄 알고 대수롭게 생각하진 않았다고 했다.
귀동의 몸은 떨리고 있었다.
그렇다.
유모 막순은 누군가와 짜고 아기를 바꿔치기 한 것이다.
자신에게 그 동안 어떤 엄마보다 더 엄마같은 모정을 쏟아 주었던 막순.
그녀는 내 어머니임에 틀림없다.
귀동은 단 걸음에 막순의 주막으로 향했다.
그리고 막순을 보자마자 방울네를 만난 사실과 큰 년을 만나서 들은 얘기를 한 후, 막순을 다그쳤다.
제발 감추지 말고 진실을 말해 달라고 졸랐다.
처음엔 잡아떼던 막순은 귀동의 계속되는 추궁에 울먹이며 눈물을 쏟았다.
마침내 막순은 쇠돌과 함께 후원에서 아기를 바꾸었노라 고백하고 말았다.
귀동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허나 지금에 와서 이 사실을 알아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다시 인생을 바꾸어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차라리 천둥이 이 사실을 모르는 편이 천둥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쇠돌과 함께 진득의 시신을 묻고 돌아온 도갑.
진득이 칼에 맞고 나타나던 날, 금부도사가 아래적의 손에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포도청 쪽에서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아래적은 칼을 맞고 상처를 입은 채 달아났다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진득이 그 동안 장안을 떠들썩하게 만든 아래적 이었단 말인가.
허나 그럴리는 없다. 죽은 진득은 왕두령의 심복이었고 의금부와 포도청, 양쪽에서 쫓기고 있다는 것을 도갑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헌데 왜 진득은 죽어가면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천둥을 불러 달라고 애원했을까. 천둥의 행동 또한 수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도갑은 천둥의 주위를 은밀히 배회하며 천둥의 정체를 알고자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번엔 호조좌랑 이근형이 자신의 집안에서 아래적의 칼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이 소식을 들은 호조참의 김재익은 오금이 저려왔다.
다음은 자신의 차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집안에 사졸들을 불러 번을 세워 철통같은 방비를 하게했다.
한편 장안 곳곳에는 아래적이 숨어 있는 곳을 알려주거나 포척하는 사람에게는 상금 일만냥을 준다는 벽서가 새로 붙었다.
일만냥!
도갑으로서는 평생 만질 수 없는 돈이었다.
도갑은 천둥이 아래적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천둥은 자신의 형제와도 같은 존재.
도갑은 며칠을 망설이며 천둥의 집 근처를 맴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천둥이 밤늦게 책을 읽고 있는데 붓들이 집안으로 뛰어들며 천둥을 급박하게 불렀다.
붓들은 귀동을 호위하고 다니다 귀동이 한직으로 밀려나자 자신도 포도청 문지기로 밀려나 있었다. 그 동안 붓들은 귀동도 모르게 은밀히 천둥을 돕고 있는 터였다.
무슨 일인가 나가 보았더니 조금 전에 포도청 안으로 들어가는 도갑을 만났는데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서 번을 바꾸고 달려왔다며 천둥에게 급히 피할 것을 권했다.
이때 연이어 쇠돌이 뛰어들며 소리를 질렀다.
수를 알 수 없는 포도군사들이 도갑을 앞세운 채 집 쪽으로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붓들과 천둥은 재빨리 무장을 하고 뒷담을 넘어 달아났다.
그러나 이미 군사들은 집 뒤쪽도 포위 한 채 포위망을 좁혀 들어 왔다.
이때였다. 포도군사들이 소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래적이 나타났다! 이쪽이다!
천둥의 앞길을 막아섰던 군사들은 소리나는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천둥과 붓들은 이 틈을 타서 포위망을 뚫고 달아났다.
두건을 쓴 아래적은 사뭇 늠름한 자세로 장검을 꼬나 쥔 채 자신을 향해 숨 죽인채 다가오는 포도군사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윽고 군사들이 장창을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허나 아래적의 칼날은 힘없이 허공을 갈랐을 뿐, 군사들의 장창에 가슴을 찔리며 쓰러지고 말았다.
아래적을 잡았다는 환호도 잠깐이었다.
군사들이 횃불을 들고 아래적의 얼굴을 벗겨내었다.
그러나 그 두건 속에는 늙은 쇠돌의 얼굴이 들어 있었다.
쇠돌은 피를 쏟으며 말했다.
내가 아래적이다 날 잡아 가거라.
쇠돌은 숨을 거두었다.
쇠돌이 자신을 대신하여 죽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천둥은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에 통곡을 하며 울었다. 쇠돌은 천둥의 진정한 어버이였다.
어버이를 잃은 천둥은 이제 두려울 것이 없었다.
아무리 귀동이 자신과 의형제나 다름없는 친구라 한들 백성의 고혈을 짜먹는 귀동의 아버지 김재익을 용서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사랑하는 동녀의 원수가 아닌가.
몇날 며칠을 걸려 붓들을 통해 김재익의 동선을 알아낸 천둥은 마지막 정의의 철퇴를 내리기 위해 그의 길목을 노리고 있었다.
늦은 밤, 대궐을 퇴청하여 돌아오는 그는 장정 넷이 매는 사인교를 타고 호위군사 둘을 앞뒤에 거느리고 집 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는 먼저 장정의 허벅지에 표창을 던져 사인교가 휘청이게 한 다음, 교자가 멎자
어둠 속에서 비호같이 뛰어들어 호위군사 두 사람을 쓰러 트렸다.
이 사이 달아나는 김재익에게 오랏줄을 던져 그를 넘어트렸다.
이때 아버님이 위험하다는 교자꾼의 급박한 전갈을 받은 귀동이 호위 군사들과 함께 대문을 열고 뛰어나왔다.
천둥은 말없이 김재익의 목에 칼을 겨누었다. 귀동의 날카로운 음성이 천둥의 귀에 비수처럼 꽃혔다.
천둥! 칼을 거두어라! 네가 죽이려하는 그 분은 내 아버님이 아니고 너의 아버님이시니라!
머뭇거리는 천둥에게 귀동은 초롱을 들고 아버지 김참의에게 다가갔다.
귀동은 떨리는 음성으로 김참의의 목덜미에 초롱을 비추었다.
자! 아버님의 이 붉은 반점을 보고도 모르겠느냐!
천둥은 말없이 김참의의 목덜미를 바라보았다.
울컥 서러움이 북바쳐 올랐다.
김참의가 고개를 들려고 하자 버럭 힘주어 목을 겨누며 귀동에게 소리쳤다.
당장 물렀거라! 내 앞에는 탐관오리의 목이 있을 뿐! 아버님의 목은 없다!
천둥의 위세에 귀동이 움찔하며 물러서는 순간 천둥의 칼날이 전광석화와도 같이 김참의의 목을 향해 선회했다.
쓰러지는 김참의.
그러나 떨어져 나간 것은 그의 목이 아니라 그의 상투였다.
잠시 천둥의 눈에서 이슬이 번쩍이는 것이 보였다.
천둥은 말없이 돌아섰다.
호위군사들이 천둥을 잡으려고 움직이는 순간, 김참의의 떨리는 음성이 이어졌다.
다 들 물렀거라!
호위군사들이 물러나고 있었다. 이어서 김참의는 탄식하듯 내 뱉았다.
그가 가도록 길을 열어 주어라!
천둥은 어둠속을 그렇게 사라져 갔다.
며칠 후, 청국으로 가는 상선의 갑판에는 다정한 두 남녀가 타고 있었다.
천둥과 동녀였다. 배는 부두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두 남녀가 손을 흔들었다.
그 곳에는 떠나는 배를 쓸쓸하게 바라보는 귀동의 모습이 있었다.
물론 그 이후에 아래적은 조선팔도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끝
첫댓글 잘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