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제24대 왕. 순조의 손자이자, 효명세자(익종)의 외아들이다.
효명세자가 요절하고 순조마저 건강 악화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왕세손의 신분으로 8살 나이에 왕이 되었다. 조선 왕으로서는 최연소로 단종보다도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비슷한 경우로 충목왕이 있다.
어머니는 풍양 조씨다. 아내는 안동 김씨로 김조근의 딸인 효현왕후, 결혼 2년만에 16세의 나이로 일찍 사망했다. 어머니와 아내의 가문에서 보듯이 헌종의 치세는 실로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로 조선이 파탄 직전까지 가고 있던 시절이었다.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실시했다.
순원왕후의 수렴청정기에는 '척사윤음'을 반포하며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대대적 체포령이 내려졌고(기유박해),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하기 위해서 다섯 집을 하나의 통으로 묶어 서로의 집안을 감시하도록 한 오가작통법을 활용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한국 최초의 신부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순교하기도 했다.(병오박해)
더욱이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들의 민생은 파탄의 직전으로 내몰리고 있었지만 이에 대한 대책은 딱히 세우지도 못했고, 외부에선 서양선박들이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는 이양선 출몰사건이 잇달아 일어나 민심은 동요했다. 실로 안습의 세월이라 할 만하다.(…)
기존의 견해로는 헌종조 전반을 풍양조씨와 안동김씨와의 세력 다툼이 치열한 시기로 알려졌고, 그래서 야사에서는 조병구가 권세를 휘두르자 "외삼촌의 목에는 칼이 안들어 가는가?"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째 김좌근의 일화로도 알려져 있다. 이야기의 출처는 김택영의 <한사경>인데, 헌종 앞에서 애체(안경)을 썼다고 한소리 들은 것. 한소리만 듣고 끝난 게 다행인 게, 당대 예법에서 분명 어긋나는 것이었다! 안경을 쓸 정도로 공부를 많이 했으니 웃어른 앞에서 자신의 학식을 뽐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3] 헌종의 이 말에 조병구는 이 말을 듣고 놀라서 황급히 물러나와 퇴궐하다가 가마가 뒤집혀서 머리가 깨져 죽었다고(…)도 하고, 이게 신정왕후 앞이었는데도 헌종의 책망을 듣자 음독 자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는 죽기 전 해까지도 한성판윤, 예조, 이조, 공조판서를 한창 지내다가 대간들의 탄핵에 몰려 쫓겨나 그해 1845년 졸. 이는 어디까지나 안동 김씨의 편인 대간들의 견제에 따른 것으로, 사망 시기 자체가 헌종이 친정을 시작한 시기보다 이르다. 무엇보다도 조병구가 헌종이 그렇게 말할 정도로 권세를 휘둘렀다면 졸기에 좋은 내용이 실릴리 없다.[4]
실상은 안동 김씨의 세력이 큰 견제 없이 커가는 시기였고 헌종은 친정이 시작된 이후 20세가 될 무렵부터 척신들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수렴청정이 15세 때 끝나고, 아내인 효현왕후가 죽으면서 순원왕후의 의중에 따라 홍재룡(洪在龍)의 딸인 효정왕후 홍씨(1903년 졸)를 계비로 맞은 것. 이 때 주부(主簿) 김재청(金在淸)의 딸을 후궁 경빈(慶嬪) 김씨로 삼기도 했다. 그래서 안동 김씨의 세도는 다시 조금이나마 흔들리기 시작했다.
헌종은 안동 김씨의 수장인 김좌근 등을 압박하여 유배를 보내는 등 반 안동 김씨 행보를 밟았고, 대구 서씨 서희순을 이조판서 겸 총위대장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5영의 훈련대장을 외척이 아닌 사람들로 채워넣고 병조판서를 독자적으로 임명한 건 대표적. 이렇게 군권을 장악하고 정조의 장용영처럼 친위대인 총위영(총융청)까지 구성하는 등 아주 활발한 왕권 강화 정책을 펼쳤다.
수령의 장죄(뇌물) 문제를 전면으로 들고 나와서 법률 개정을 주도한 적도 있었는데, 수령의 뇌물이 어디로 가는가를 생각해보면 세도 가문들을 타깃으로 노린 것이 100%다. 하지만 비변사의 비협조로 법 개정은 무산되었다. 그런가하면 암행어사도 활발하게 전국으로 파견했고 안동 김씨의 조병헌 사사 요구를 매우 강력하게 거부하면서 삼사를 모조리 파직하기도 했다. 조병헌은 결국 귀양을 갔다가 헌종 말에 풀려나지만 철종 초에 사사된다. 대사간 서상교를 통해 안동 김씨의 실세 중의 실세인 김흥근을 탐오하고 대왕대비의 비위를 맞추어('궁위를 엿보아') 정치를 했다고 탄핵하고 귀양 보내기도 했다. 안동 김씨에게 밉보인 김정희, 조병헌도 헌종 14년에 유배에서 풀렸고 영상 정원용은 안동 김씨에게 아부하다가 파직 당한다. 그러나 그 직후 향년 23세로 사망(…) 증조할아버지 정조처럼 헌종 역시 스스로 약을 조제하고 의원을 불렀으나 결국 병을 다스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앓다가 갑자기 차도 없이 사망했다는 것과 안동 김씨의 세력을 한창 조지던 와중에 급사하는 바람에 미약하게나마 독살설이 나올 정도다. 특히 순원왕후의 어필 봉서[5]를 근거로 한 독살설은 증거는 없으나, 헌종과 순원왕후가 의외로 할아버지 정조와 고조할머니 정순왕후 김씨 급, 어쩌면 그 이상의 갈등을 벌였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6].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독살설에 대해서는 실록에 이렇다할 근거가 없는 만큼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왕성한 20대 초반의 나이, 호색과 죽음 사이에 그토록 밀접한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다" "안동 김씨 일문에게 헌종의 때 이른 죽음과 순헌왕후의 2차 수렴은 행복한 사태 반전이었다." 등을 언급하며 헌종의 이른 죽음에 뭔가 다른 게 있지 않을까 하는 늬앙스를 살짝 띄우고 있다.
나름대로 '국조보감'의 증수를 위해 정조·순조·익종에 대한 '삼조보감(三朝寶鑑)'을 찬집했고, '열성지장', '동국사략', '문원보불', '동국문헌비고' 등을 편찬하고, 각 도의 제방과 저수지를 정비하는 등의 치적을 세우기도 했지만 그런 정도의 치적으론 조선을 바로잡을 수가 없었다는게 문제. 안동김씨를 비롯한 척신을 척결하고자 하였지만 돌연 죽음으로 왕권을 바로 세우지 못했다.
아들은 없었으며 궁녀 출신 숙의 김씨와 효정왕후 홍씨 사이에서 각각 딸 하나 씩을 두었는데 모두 요절했다. 헌종이 후사 없이 23살이란 젊은 나이에 사망함에 따라 결국 효종 때부터 이어진 직계 왕통은 단절되었다. 동시에 정조의 혈통도 끊겼으며 결국 안동 김씨가 강화도를 뒤져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의 손자인 철종을 옹립하게 된 요인이 되었다.
야사에 따르면 계비 효정왕후 간택 때 참여한 경빈 김씨를 무척 마음에 들어했는데, 자신의 의사와 달리 할머니 순원왕후와 어머니 신정왕후가 효정왕후를 간택하자 몇 년 뒤에 기어이 경빈 김씨를 간택했다고 한다. 경빈 김씨를 위해 석복헌과 낙선재를 지었을 정도라고. 이는 왕비와 금슬이 좋았던 할아버지 순조나 아버지 효명세자보다는 증조부 정조와 유사한 면모. 정조도 의빈 성씨를 15년이나 기다렸을 정도로 사랑꾼이었기 때문이다.
애초 얼굴이 꽤나 잘 생겨 당대에 꽃미남 취급을 받았다고 하며, 궁녀들과 지나치게 호색하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만 그가 궁녀들을 가까이 한 것은 욕구 이전에 안동 김씨 출신의 자손을 더는 낳지 않겠다. 어떻게든 후궁을 통해 대를 잇겠다라는 의지였다는 해석도 있다.
또한 헌종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인 효명세자를 잃었으므로 늘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마음 아프게 여겨 한 신하에게 늘 물었는데, '진전에 모신 수용[7]이 오히려 매우 닮으신 전하의 용안에 미치지 못합니다' 하니 헌종이 거울을 보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고 한다.
헌종의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의 경릉(景陵). 왕비인 효현왕후 김씨, 효정왕후 홍씨와 나란히 묻힌 삼연릉으로 삼연릉 형식은 조선 왕릉 중 유일하다. '우왕좌비[8]'의 원칙에 따라 맨 오른쪽에 헌종 능이 있고 가운데에 효현왕후 김씨, 오른쪽에 효정왕후 홍씨가 묻혀 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의 작가 박시백은 이 능에 대해 안동 김씨인 효현왕후를 헌종과 효정왕후가 모시는 듯한 인상을 준다고 촌평하기도 했다. #
순원왕후는 "남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지 않고 뭐든지 두번 생각하고 움직이며 눈치가 빠르다"는 평을 내렸다. 이를 안동 김씨가 장악한 조정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행보를 밟은 것이라 보는 해석도 있다.
서예에 능했으며 특히 예서에 능했다고 한다.
덤으로 한국 사극에서 조선시대 왕 중 유일하게 한번도 등장하지 못한 왕이다. 하다 못해 '죽는 장면'으로라도 나온 적이 없다.[9] 물론 이는 아버지인 효명세자도 마찬가지였으나 마침내 2016년 하반기 KBS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 에서 등장한다. 배우는 박보검. 존재감 없는 임금 중 하나였던 현종도 드라마에 출연하는 판인데 안습. 조상님들이나 후임 왕들은 실컷 출연료 받아 먹고 있는데 난 이게 뭐야 징징
사실, 주목을 별로 받지 않는 것에 비해서 포장을 하자면 의외로 드라마로 만들 만한 소재가 될 법 하기는 한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젊은 왕"이라는 점도 그렇고, 세도 정치를 개혁하는 개혁 군주의 모습도 어느 정도 넣을 수 있기는 하고, 게다가 젊어서 죽었기 때문에 비교적 화수를 적게 잡아도 된다.(…) 막말로 대중매체에 유통되었던 정조와 정순왕후의 갈등을 다룬 작품들은 사실 헌종과 순원왕후의 대립으로 바꿔야 역사적으로 딱 맞아떨어진다
다만 사극에 등장할 가능성은 있었다. 효명세자를 주인공으로 한 웹소설 '구르미 그린 달빛'(작가 윤이수, 삽화 kk)이 드라마화 되었기 때문. 그러나 소설 원작과 드라마의 결말이 다르게 났기 때문에 결국 헌종은 등장하지 않았다...
광해의 연인을 쓴 유오디아의 차기작인 (현재 시점으로는 완결된) <반월의 나라>의 메인남주가 바로 헌종이다! 연재 당시에는 휘가 연으로 쓰였지만 후에 종이책으로 발간되면 본래 휘인 환으로 수정된다는 듯. 전체적인 내용은 천주교 박해로 인해 부모님을 잃고 청으로 건너가 공주가 된 여주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조선으로 건너가 남주를 만나게 되는 이야기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조선의 제24대 국왕 | |
본명 | 이환(李烉) |
---|---|
재위 | 1834년 ~ 1849년 |
종교 | 유교(성리학) |
출생일 | 1827년 9월 8일(1827-09-08)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창경궁 경춘전 |
사망일 | 1849년 7월 25일 (21세) (음력 6월 6일)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창덕궁 중희당 |
매장지 | 경릉 (대한민국 경기도 구리 동구릉) |
왕비 | 효현왕후 효정왕후 |
부왕 | 문조 (효명세자) |
모후 | 신정왕후 |
이전 왕 | 순조 |
다음 왕 | 철종 |
헌종(憲宗, 1827년 9월 8일(음력 7월 18일) ~ 1849년 7월 25일(음력 6월 6일))은 조선의 제24대 왕(재위 : 1834년 ~ 1849년)이며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이다. 성은 이(李), 휘는 환(烉),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문응(文應), 호는 원헌(元軒)이다.
아버지 효명세자가 일찍 요절하여 동궁에 책봉되고 1834년 8세의 나이에 즉위하였으나[1] 실권은 할머니인 순원왕후 김씨와 안동 김씨에게 있었으니, 1841년까지 순원왕후 김씨가 섭정을 하였고 1841년부터 1849년 훙서할 때까지 친정을 하였다.
재위기간 중 천주교의 발호에 반하여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를 승인하였다.
시호는 헌종경문위무명인철효대왕(憲宗經文緯武明仁哲孝大王)이며, 대한제국 때 성황제(成皇帝)로 추존하고 존호를 더하여 정식 시호는 헌종체건계극중정광대지성광덕홍운장화경문위무명인철효성황제(憲宗體健繼極中正光大至聖廣德弘運章化經文緯武明仁哲孝成皇帝)이다.
헌종은 1827년 음력 7월 18일 창경궁의 경춘전(景春殿)에서 효명세자(익종)과 세자빈 조씨의 아들로 태어나 왕세손에 책봉되었다. 그가 태어날 때 어머니 조씨는 익종이 옥을 아로새긴 나무를 담은 갑(匣)을 주는 꿈을 꾸고 나서 잉태하였고, 태어난 날에는 한 무리의 학이 전상(殿上)에서 날아 오래 돌다가 갔으므로, 궁중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2] 한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권돈인(權敦仁)이 지은 행장에 의하면 어려서부터 외모가 준수하고 명랑하며 큰 목소리가 마치 금석(金石)에서 나오는 것 같으며 백일이 되기 전에 능히 일어섰다 한다. 유아기 때에 주흥사(周興嗣)의 《천자문》 중에서 1백여 자를 통하였는데, 아버지 효명세자는 여러번 봐서 눈에 익혀진 것이리라고 생각하여 다른 글에서 시험하자 문득 그 전부터 알던 것을 가리키며 이것은 아무자입니다 하니, 효명세자가 이를 매우 기특히 여겨 ‘학문을 좋아하는 것이 앞으로 나보다 낫겠다.’ 하였다.
1830년(순조 30년)에 효명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동궁에 책봉되어 왕위계승자가 되었고, 순조가 승하하자(1834년 12월 13일 (음력 11월 13일)) [3] 8살의 나이로 즉위하였다.(12월 18일(음력 11월 18일))[4] 나이가 어려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가 7년 동안 수렴청정을 했으나 15살이 되던 해에 직접 정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권은 할머니인 순원왕후에게 있었고, 순원왕후의 친정인 안동 김씨와 그의 외가인 풍양 조씨간에 암투가 벌어졌다고 알려져 있지만,그랬다면 풍양 조씨들이 철종때 큰 화를 입었어야 할것이다.
헌종이 나라를 다스리던 시기는 조선 사회를 지탱해 왔던 신분 질서와 봉건 제도의 붕괴가 여기저기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때였다. 또 수해와 전염병 때문에 삶이 점차 어려워져 집을 버리고 떠돌아다니는 유민들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이처럼 사회가 불안하다 보니 임금을 배반하여 군사를 일으킨 모반 사건이 2번에 걸쳐 일어났다. 1836년에는 충청도에 있던 남응중이 정조의 동생인 은언군의 손자를 임금으로 추대하고자 했으며 1844년에는 노론이었으나 몰락하여 중인이 된 민진용이 이원덕 등과 역시 은언군의 손자를 임금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2번의 모반 사건 모두 별다른 정치적 세력도 없는 중인과 몰락한 양반이 일으킨 것으로 이 시기에는 누구나 왕권에 도전할 수 있었을 만큼 임금이 우습게 여겨지고 있었다. 하지만 안동김씨의 세도를 막으려고 안동김씨를 군권과 주요판서자리에서 배제하고,김흥근을 유배보냈다.그렇지만 요절하여 효력은 없었다. 특기할 만한일로 수령의 장죄에 대한 개선을 요구했고,과장의 폐단에 대해서 지적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재위 1831~46년)가 천주교 조선대목구를 설정한 뒤(1831년), 헌종 대에 들어서자,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피에르 모방 신부가 입국했다.(1836년) 이어서, 조선교구장으로서 파리 외방전교회의 로랑마리조제프 앵베르 주교가 입국(1836년 4월)하였고, 또한 파리 외방전교회의 자크 샤스탕가 입국(1836년 말)하였다. 이들 파리 외방전교회 출신의 선교사들은 조선인 성직자가 필요하겠다고 생각했고, 김대건·최양업·최방제를 마카오 신학교에 보내서 공부하도록 하였다.(1836년 12월)[5] 이들 신부들로 인하여 천주교의 교세가 회복되고 신도는 증가되어 갔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천주교에 우호적인 안동 김씨에 대항해 보수적인 풍양 조씨가 집권하자 다시 박해 의논이 일어났다. 성리학적 가르침을 받고 자라난 헌종도 천주교에 대한 배격 논리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아직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던 1839년(헌종 5년), 로랑조제프마리위스 앵베르 주교·피에르 모방 신부·자크 샤스탕 신부를 비롯한 119명의 천주교인이 투옥·처형되었다.(기해박해)[6] 기해박해가 있고나서 5년 뒤, 한국교회사 최초의 한국인 천주교 사제가 된 김대건 신부가 앵베르 주교의 순교로 공석이 된 조선대목구에 새로 임명받은 장조제프 페레올 주교, 마리니콜라앙투안 다블뤼 신부 및 다른 신자들이 라파엘 호를 타고 상하이 항을 떠나 조선으로 입국하였다. 입국 후 김대건 신부는 선교를 펼치다가, 비밀 항로를 그린 지도를 중국으로 가는 중국 어선에 넘겨주려다가 연평도 부근에서 순찰하던 관헌들에게 체포되어(1846년 6월 15일) 새남터에서 처형(9월 16일)되었다.(병오박해)
9년 동안의 친정 기간 동안 안동김씨의 세도를 꺾으려 했으며 민생 개선에도 나름대로 쓴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헌종은 국내는 물론, 조선 주변의 상황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으며 다가오는 열강 세력에 대한 대응책도 마련하지 못하였고, 여기에 날이 갈수록 강해지는 안동김씨 세력으로 인하여 정치를 제대로 할 수 없자, 자연히 주색을 가까이 하게 되었다. 가뜩이나 몸이 약해진 헌종은 병세가 더욱 악화하여 자리에 눕게 되었다. 결국 1849년 7월 25일 (음력 6월 6일) 오시 (오전 11시~오후 1시) 에 23세를 일기로 창덕궁의 중희당(重熙堂)에서 승하하였다.
현종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일찍 승하하였고, 더군다나 헌종의 6촌 이내에 드는 왕족이 없었기 때문에 항렬로 따져 헌종의 7촌 아저씨뻘인, 그러니까 정조의 이복동생임과 동시에 사도세자의 증손자이자 은언군의 손자가 되는 철종이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음력 10월 28일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건원릉(健元陵)의 서쪽 구릉의 유좌(酉坐)인 언덕 효현왕후 묘소 옆 경릉(景陵)에 안장되었다.
묘호는 헌종(憲宗)[7]으로, 《헌종실록》에 따르면 널리 듣고 다능함(博聞多能)을 의미한다. 시호는 경문위무명인철효대왕(經文緯武明仁哲孝大王) 이다. 청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장숙왕(莊肅王)이나, 청나라와의 외교 이외에는 사용치 않았다.
대한제국 수립 후 고종 때 장조, 정조, 순조, 익종이 각각 황제(皇帝)로 추존됨에 따라 그에 대한 추존 여론이 나타나면서[8][9] 순종에 의해 1908년 성황제(成皇帝)로 추존하고 존호를 더하여 정식 시호는 '체건계극중정광대지성광덕홍운장화경문위무명인철효성황제'(體健繼極中正光大至聖廣德弘運章化經文緯武明仁哲孝成皇帝)가 되었다.
조선 제23대 국왕 순조의 세자. 24대 왕인 헌종의 아버지. 헌종이 익종(翼宗)으로 추존했고 고종은 1899년 문조 익황제(文祖 翼皇帝)로 다시 추존했다. 문조로 추존했음에도 보통 익종 내지 효명세자로 부르는 경우가 더 많다.
위의 초상화에서 20대 초반에 죽은 사람이 왜 저렇게 삭았느냐에 대해서는 넘어가자. 효명세자와 헌종은 상당히 닮은 용모였다고 한다. 그래서 어릴 적 아버지를 잃은 탓에 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헌종이 '초상화 보다도 돌아가신 부친과 얼굴이 닮았다'는 말을 듣고 거울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그런데 선원보감의 초상화는 익선관 대신 신하가 쓰는 사모를 쓴 점 등 그냥 대충 그린 그림이라는 의심이 짙다.
1812년 왕세자에 책봉 되었다. 참으로 정말 오랜만에 정식 왕비 소생 원자가 세자가 되었다. 정식 왕비 소생 세자는 숙종 이후 처음. 경종은 희빈 장씨가 왕비가 되기 전에 태어났으니 일단은 서자였고, 영조와 사도세자는 후궁 소생이다. 정조는 정실 소생이긴 하지만 부모를 왕과 왕비로 추존하지 못했고, 순조는 후궁 소생이다. 1819년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하여 헌종을 낳았다. 그의 아내가 후에 고종때 잠시 섭정을 맡는 신정왕후 조 대비다.
외모가 출중했고 대단히 영특하고 재능이 있었던 인물(한마디로 엄친아)로 안동 김씨의 세도에 눌려있던 아버지 순조도 많은 기대를 걸었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의 제작에 관여한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학자들은 효명세자가 동궐도를 그리게 한 데에는 왕권 강화책과 연관이 있지 않나라는 해석을 한다.
순조의 건강이 좋지 않게 되자, 1827년 순조는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했고 이후 4년간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게 되었다. 왕이 대리청정의 명을 내리자 신하들은 크게 환영하였을 정도로 기대를 받았다.[2][3]
효명세자는 아직 어린 나이(이때 아직 20살도 채 안되었다)에도 불구하고 단호한 일처리로 조정의 기강을 잡았으며 어느 수령이 백성들을 괴롭혔다는 소리가 들리자 엄한 벌을 내리며 단속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정승도 마음대로 제수하는 등 대리청정에 걸맞는 활동을 보여주었다. 이때 기용된 인물중 대표적 인물이 바로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이자 개화파의 시조로 불리는 박규수다.
다른 한편으로 부모님에 대한 지극한 효심을 표현하고 아버지 순조의 권위를 높이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방책으로 순조의 탄신 진연등의 주요 연회들을 성대하게 개최했다. 이 연회들의 핵심에는 '정재'라고 불리는 궁중 무용이 있었는데 효명세자는 직접 정재의 대부분을 수정하거나 다듬는 등 예술에도 재능을 드러냈다. 그래서 효명세자를 태양왕으로 부르며 직접 발레 공연에까지도 나섰던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견주기도 한다. 칼춤에 쓰이는 칼날과 손잡이가 따로 노는 독특한 구조의 칼을 도입한 사람도 이사람.
그러나 효명세자는 갑자기 병에 걸렸고 불과 22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덕일을 필두로 한 일각에서는 안동 김씨들의 독살설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확실치는 않다. 사실 가문간 싸움을 회피했던 김조순(1832년 졸)이 아직 살아있던 시점이나, 각혈 후 어의들이 갖은 방도를 썼으며 재야에 있던 정약용까지 부르려고 했던 점을 보면 딱히 독살이라고 보기엔 힘들다. 그 때문인지 과로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순조는 효명세자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다. 순조가 직접 쓴 제문을 보면 자식 잃은 부모의 한이 절절히 느껴진다. 안 그래도 몸에 병이 깊어지는데 효명세자의 뒤를 따라가듯 순조의 두 딸 명온공주와 복온공주까지 세상을 떠나면서 받은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쓰러져 두 해 뒤인 1834년 세상을 뜨게 된다.
아들 헌종까지 요절하면서 효종으로부터 이어진 왕통은 사실상 단절되고 만다. 그나마 영조의 방계 자손인 철종이 뒤를 이었지만 그마저 죽으면서 완전히 단절되고 그의 양자로 지정된 고종이 뒤를 이었지만 고종이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자손이라 안습.
추존 문조, 즉 효명세자의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있는 수릉(綏陵). 본래 효명세자는 죽고 나서 서울 성북구 석관동에 있는 경종의 의릉 왼쪽 언덕에 장사지냈었지만 풍수에 관한 논의가 있어서 철종 때인 1855년에 오늘날의 자리로 이장했다. 1890년 대왕대비였던 아내 신정왕후 조씨가 승하하자 함께 합장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동구릉을 방문하면 팸플릿을 하나 주는데 이 팸플릿에 적혀 있는 추천관람코스대로 동구릉을 관람하게 되면 가장 먼저 보게 되는 능이 바로 수릉이다. 사실 동구릉은 팸플릿의 추천코스대로 수릉부터 관람하는게 편하다.
세자의 대리청정 기간 동안 세자가 안동 김씨들을 견제하는 모습은 보인 적이 없다. 김조순의 아내(다시 말해 외할머니)가 죽자 직접 찾아가 문상하는 등 최고의 존중을 보여주었고 김조순의 장남 김유근이 부임지에 첩을 데려가다가 난리난 적이 있었는데[4] 신하들이 김유근을 탄핵하자 오히려 버럭 화를 내며 탄핵한 신하들을 유배보내 버렸다.[5] 안동김씨를 견제할 맘이 있었을지는 몰라도 행하진 않았다. 그리고 집권 기간 동안 풍양 조씨에 러브콜을 보낸 흔적도 없다. 효명세자는 순조 27년 2월 9일부터 대리청정에 들어가서 30년 5월 6일에 죽는데 그동안 김유근, 김이교, 김이재 등 안동 김씨들은 고위 관직 다 해먹었다.
고종이 그의 양자가 된 뒤(입승대통)로 재추존했는데, 조선은 물론 세계를 통틀어 가장 긴 시호로, 아래와 같다. "황제"라는 칭호를 제외하고 자그마치 113자.
원래는 체원찬화석극정명성헌영철예성연경융덕순공독휴홍경돈문현무인의효명대왕의 34자였다. 그러나 1863년(즉위년), 1868년(요순우탕), 1875년과 1876년, 1878년, 1883년 음력 1월(임오군란 직후/신정왕후 왕대비 즉위 50주년), 1886년 11월, 1890년 10월, 1892년 1월(조선 건국 500주년), 1902년(고종 즉위 40주년) 10차례에 각각 8자씩 80자가 추가 된 것이다.
체원찬화석극정명성헌영철예성연경융덕순공독휴홍경/홍운성렬선광준상/요흠순공우근탕정/계천건통신훈숙모/건대곤후광업영조/장의창륜행건배녕/기태수유희범창희/입경형도성헌소장/치중달화계력협기/강수경목준혜연지/굉유신휘수서우복/돈문현무인의효명익황제(體元贊化錫極定命聖憲英哲睿誠淵敬隆德純功篤休弘慶/洪運盛烈宣光濬祥/堯欽舜恭禹勤湯正/啓天建通神勳肅謨/乾大坤厚廣業永祚/莊義彰倫行健配寧/基泰垂裕熙範昌禧/立經亨道成獻昭章/致中達和繼曆協紀/剛粹景穆峻惠衍祉/宏猷愼徽綏緖佑福/敦文顯武仁懿孝明翼皇帝)
현재 남아 있는 어진은 면복본(冕服本)으로, 왕세자의 면류관과 곤복인 8류면 7장복 차림으로 되어 있다. 복식연구에서 있어서 매우 귀중한 자료지만 하늘은 그의 초상화까지 불운하게 만들었는지, 한국전쟁이후 대화재로 초상화가 불에 탔는데, 하필이면 세로로 불탄 것이 얼굴을 포함해 타버리고 나머지만 남아서 복구가 불가능하게 돼버렸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운 없는 건 아버지와 판박이라서, 순조의 초상화는 원유관에 강사포를 착용한 것이라 이 또한 효명세자의 초상화 못지 않게 중요한 자료이지만 이 그림도 얼굴 부분이 불타는 통에 역시 복구가 불가능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위 그림인 선원보감의 초상화가 남아 있다는 것인데 문제는 보다시피 아들 헌종처럼 사망한 연령에 비해 상당히 노안인 얼굴이라는 것. 아무튼 그래서인지 선원보감의 얼굴을 배경으로 저 탄 초상화를 복원하자는 의견이 있다. 그런데 실은 이미 복원한 초상화가 있다!!!
복원된 문조(효명세자)의 어진 |
권오창 화백이 불에 탄 부분에 얼굴부분을 그려넣었는데, 얼굴을 상상한 상상화인 관계로 문화재나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진 않고 개인 소장하고 있다. 그리고 복원본과 선원보감의 초상화 눈의 위치가 비슷한데 선원보감의 그림을 보고 복원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선원보감의 그려진 문조는 노안으로 그려진 반면 이 초상화는 그런대로 연령에 맞는 외모로 그려져 있다.
사극에서 잘 다뤄지지 않는 시기를 살았기 때문에 미디어에서 다뤄진 일은 드물다.
네이버 웹소설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는 가상의 여자주인공 홍라온과 궁중 로맨스를 이루는 왕세자 이영으로 등장한다.
드라마판에서는 박보검이 캐스팅됐다. 여기서는 죽지 않고 살아서 아들 헌종 대신 순조 다음 왕이 된다. 아아, 실제 역사가 이랬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제24대 조선 왕 | ||
전 임 순조 |
1834년 ~ 1849년 | 후 임 철종 |
조선과 대한제국의 왕자/황자 목록 | |||||
---|---|---|---|---|---|
추존왕 목조 소생 | |||||
추존왕 익조 소생 | |||||
추존왕 도조 소생 | |||||
추존왕 환조 소생 | |||||
태조 소생 | |||||
정종 소생 | |||||
태종 소생 | |||||
세종 소생 | |||||
문종 소생 |
| ||||
단종 소생 |
| ||||
세조 소생 | |||||
추존왕 덕종 소생 | |||||
예종 소생 | |||||
성종 소생 | |||||
연산군 소생 | |||||
중종 소생 | |||||
인종 소생 |
| ||||
명종 소생 | |||||
선조 소생 | |||||
광해군 소생 |
| ||||
추존왕 원종 소생 | |||||
인조 소생 | |||||
효종 소생 |
| ||||
현종 소생 |
| ||||
숙종 소생 | |||||
경종 소생 |
| ||||
영조 소생 | |||||
추존왕 진종 소생 |
| ||||
추존왕 장조 소생 | |||||
정조 소생 | |||||
순조 소생 | |||||
추존왕 문조 소생 |
| ||||
헌종 소생 |
| ||||
철종 소생 |
| ||||
고종 소생 | |||||
순종 소생 |
| ||||
의민황태자 소생 |
조선의 역대 국왕 | ||
---|---|---|
대한제국의 황제 | ||
---|---|---|
추존황제 | ||
대한제국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