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근이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10여년간 생활하면서 가장 힘들어했던 부분 가운데 하나가 교민과 관계 설정이었다. 분데스리가에 입성하기 위해 독일에 첫 발을 내딛었을 때 차범근은 현지 교민들에게 음으로, 양으로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전담하는 에이전트가 없었던 상황에서 현지 사정을 잘 알고, 독일어를 할 수 있는 교민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또 분데스리가에서 놀라운 활약을 펼치며 '차붐 신드롬'을 일으키자 독일에 살던 교민들은 열광적인 응원을 보내며 그의 발 끝에 따라 함께 웃고, 함께 울었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차범근과 교민들 사이에 묘한 분위기가 형성됐다. '차붐이 교민사회에 발을 끊었다','어려울 적 생각은 안하고 은혜(?)를 저버렸다' 등등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축구계에서는 그 당시 이런 이야기와 분위기가 있었다는 것을 '사실'로 믿는 이들이 많다. 한국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있을 수 있는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정작 당사자인 차범근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주간스포츠 85년 3월 27일자 창간 10주년 기념호는 차범근을 '10년 최우수선수'에 선정했다. |
◇"살아남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주간스포츠 84년 2월 1일자)
<차범근은 서독 분데스리가에 진출한 뒤 한 때 현지 교민들로부터 미움을 샀었고 국내 매스컴으로부터도 외면을 당한 적이 있다. "살만 하니까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지금도 일부 교민들로부터 눈총을 받고 있는 차범근은 "분데스리가에서 살아 남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중략) "서독으로 건너온 뒤 1년쯤 지나서부터였습니다. 저로서는 어떤 단안을 내리지 않으면 안될 위기가 그때 닥쳤습니다". 차범근이 말하는 그 무렵, 그러니까 80년 중반까지만 해도 차범근은 현지 교민들과의 관계가 좋았다고 한다. 차범근이 출전하는 경기장에는 플래카드를 들고 응원오는 교민들이 많았고 접촉도 빈번했다는 것. 그러나 차범근은 이로부터 얼마 뒤 교민들과 접촉을 일체 끊지 않으면 안됐다고 한다. "그런 생활을 지속했다가는 분데스리가에서 배겨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서독프로축구계가 그래요. 축구 외에 다른 일에까지 신경을 썼다가는 버티어 낼 수가 없지요. 감독의 미움을 사지 않고 또 주전 자리 싸움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서는 축구에만 전념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경기가 끝날 때마다 교민들과 어울리고 찾아오는 사람마다 몇시간이고 할애할 수 있겠습니까.">
당시 차범근은 프랑크푸르트의 동료 선수(페차이)에게 공개적으로 시기를 받고 있었고,부동산 사기를 당하면서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된 상태였다. 여기에 지난 번에 소개했던 겔스도르프에게 척추를 다치는 부상을 당하면서 최악의 상황에 몰려 있었다. 서독 매스컴들도 '차붐은 이제 끝났다'는 식의 기사를 퍼붓고 있었다.
<차범근은 당시의 심정을 "미칠 것만 같았다"고 토로했다. "저보다도 아내의 충격이 컸습니다. 금방이라도 정신분열을 일으킬 것만 같았죠.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일체 외부와의 접촉을 끊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딱 6개월만." 이때의 결심으로 6개월 동안 일체 주위와 접촉을 피했다. 전화번호도 바꾼 채 만나려는 사람을 피했으며 심지어 현지 및 국내신문도 일체 보지 않았다.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분데스리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만 오해를 사는 원인이 돼버렸습니다. 서독에서 자리잡을만 하니까 거만해졌다는 겁니다. 저를 미워했던 교민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곳 교민들은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고 정착한 분들 아닙니까. 분데스리가에서 자랑스럽게 버티어 가는 후배를 만나려는데 거절하니 박절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겠지요." 요즘은 일부러 훈련에 지장을 받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교민들과 접촉을 꾀하고 있다는 그다. 이 때문일까. 한때 차범근에게 등을 돌렸던 교민들도 그의 처지를 이해하고 동조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차범근의 처지와 분데스리가의 풍토를 안다면 그를 탓할 수 만은 없을 것이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차범근이 분데스리가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어느 시점부터 '코리안 스타일'을 버리고 오직 축구에만 올인한 게 분명하다. 하지만 교민들에게 이런 행동은 무척 서운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차범근이 한국적인 교제 방식을 유지하면서도 분데스리가의 치열했던 경쟁에서 살아남아 98골을 넣을 수 있었을지는 알 수 없다. 역사에 가정은 없기 때문이다. 지난 겨울 차범근 감독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내가 골을 넣을 때마다 서독에 있던 한국분들이 정말 좋아했다. 나는 내가 골을 넣는 것이 진정으로 그분들을 위하는 일이고, 기쁘게 하는 일이라고 믿었다. 상사에 나와 있던 분들은 내가 골을 넣으면 (서독쪽 파트너들에게)'차붐' 이야기를 하면서 대화를 풀어나갔다고 한다. 내가 골을 넣으면 서독에 있던 모든 한국분들이 '차붐'이 되는 거였다. 그것이 더 보람있고, 진정으로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작은 정리를 버리고 대의를 택했다는 뜻으로 들렸다. 결과적으로 '차붐'은 분데스리가에서 놀라운 기록을 남겼고, 지금껏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남아 있다. 엄청난 부와 명예도 거머쥐었다. 하지만 만일 초창기 차붐의 행동에 상처받았던 교민들의 마음은 어떻게 치유될 수 있는 것이냐고 누가 필자에게 묻는다면 "글쎄요"라고 대답할 것 같다. 모든 이들에게, 모든 것들이 충족되기에 세상이라는 곳은 너무나 복잡하다고 말한다면 혹시 위로가 될까?
◇차붐을 만들 사람들(주간스포츠 85년 3월 27일자)
주간스포츠는 85년 3월 창간 10주년을 맞으면서 '10년 최우수 선수(Player of the Decade)'를 선정했다. 이 잡지는 '지난 75년부터 올해까지 활약하고 있는 각 종목의 우수선수 중 선수 경력이나 공적, 국위선양 면에서 단연 돋보인 차범근에게 이의 영광을 안겨 주었다'고 쓰고 있다. 특집 기사는 차범근의 풀 스토리와 인터뷰를 4페이지에 걸쳐 소개한 뒤 '차붐'의 지금을 있게 만든 두 사람의 특별 기고를 실었다. 부인 오은미씨와 경신중·고 시절의 은사 장운수 감독이다. 그 내용을 간추려 본다.
분데스리가에 진출하기 전 차범근-오은미 부부의 단란했던 한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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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오은미씨가 본 차범근-77년 1월에 결혼했으니 그이와 부부가 된지도 8년이 넘었다. 그 사이 아들과 딸을 하나씩 두었고 길다면 긴 세월이었지만 나는 그이게게서 별다른 변화를 발견할 수 없다. 그이는 결혼 전부터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성실하고 진실하며 꾀를 모른다. 또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속이거나 해칠 줄도 모른다. 좋게 말해 착하고 뒤집어 보면 너무 비사교적이고 융통성이 부족한 셈이다. 때문에 선의의 피해를 보거나 오해를 살 때가 적지 않다. 직접 관련이 없는 일에 철저히 무관심한 것도 변함이 없다. 그이는 운동과 관련이 없는 일로 쓸데없이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을 극히 싫어한다. '축구밖에 모르는 사람'이니 '멋없는 사람'이란 평을 듣는 것도 이 때문 인 것 같다. 그이에겐 남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점이 많다. 많은 사람들은 그이가 담대하지 못하고 결단력이 없는 것처럼 보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할 때 그이는 과감하고 신속한 결단을 내리곤 한다. 딱 두번 만나고 청혼했던 분이다. (중략)최근 현 소속팀(레버쿠젠을 뜻함)과 재계약을 맺기로 최종 결심을 굳힐 때도 나는 한국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이었지만 그이 단독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다.>
차범근의 경신중고 시절 은사 장운수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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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장운수씨가 본 차범근-흔히 차범근을 가리켜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난 축구 선수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가 오늘의 차범근으로 성장하기까지에는 이런한 천부적인 자질보다 후천적인 노력이 밑거름이 됐다. 차범근은 어렸을 때부터 소문난 연습벌레였다. 그가 고교(경신고)에 진학 한 뒤의 일이다. 어느날 갑자기 교정에는 수은등이 하나 설치됐다. 순전히 차범근 때문이었다. 남들이 깊은 잠에 떨어진 한밤중까지 홀로 개인훈련을 하는 차범근을 위해 학교에서 특별히 불을 밝혀준 것이다. 학교 시절이나 대표팀에 있을 때나 그에게만은 코치들이 개인훈련을 시킬 필요가 없었다. 서독 분데스리가에 진출한 뒤로도 현지 코치로부터 "훈련 좀 그만하고 쉬어라"는 부탁을 여러차례 들었던 그다. 그를 지켜보노라면 오직 축구밖에 모르는 사람 같다. 축구 외에는 도대체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그와 나 사이에 인연이 닿은 것도 그에게 축구선수로 대성하려는 남다른 집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울 영도중학 필드하키 선수로 뛰던 그가 나에게 찾아와 축구선수를 시켜달라고 했을 때만 해도 경신중학은 그를 받아들일 형편이 못됐다. 차범근의 처지가 딱했지만 거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수없이 학교로 찾아와 끝내는 나를 설득했고 학교장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차범근은 곰처럼 순하면서도 보통의 끈기를 지닌 선수가 아니다. 처음 경신중학에 전학해 왔을 때만 해도 그는 키만 컸지 약골이었다. 게다가 병추기가 많았고 70년말 청소년대표로 발탁될 때까지 늘 부상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고난을 훌륭히 이겨냈고 끝내는 최고의 스타플레이어로 성장했다.>
'10년 최우수 선수'에 선정된 차범근에게 부인과 스승이 보내는 글이니 어떤 찬사도 가능했을 것이다. 두 사람이 쓴 글의 공통점은 한마디로 '차범근은 축구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지금 축구계에서도 그대로 통용되고 있다. 차범근을 좋아하는 사람이나, 싫어하는 사람이나 '축구밖에 모르는 차범근'이라는 명제는 똑같이 인정한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그 명제의 의미를 저마다 자기 편한대로 해석한다는 점이다.
위원석기자 batmaa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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