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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씨의 흔적
조윤옥
정우는 군 생활을 철원의 작은 마을 보건소에서 근무를 마쳤다. 제대 후에는 인턴과정을 계열 K 대학병원에서 보내고 고향 읍에 내과 병원을 차렸다. 그는 자유로운 영혼을 표방하며 사는 시골의사다. 도색적인 것보다 편안한 행복을 추구하는 낙천가다. 고향에 터를 내린 이유는 모친의 영향이다. 차멀미가 심하고 휘발유 냄새를 못 맡는 유별난 시골아줌마 박여사. 유복자를 키운 과부. 시골농사를 홀로 좌지우지하여 의사를 만든 억척스러운 여인. 정우는 그런 어머니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효자이다. 도시가 싫다는 홀어머니를 위해 고향에 그대로 안주를 하였다.
읍 소재지에서 개업을 하고 어머니를 한 집안에서 모시겠다는 처녀와 결혼하였다. 상대는 자기 병원에 있던 간호사 순실 이었다. 순실이와의 사이에서 첫째 쌍둥이와 다시 아들을 낳았다.
정우 처가 서무를 보았으나 신건축 3층을 올리고는 이층 살림집에서 아이들 교육과 가정일 만을 하고 있었다. 가끔 살림집에서 내려오는계단을 통해 병원에 들렸다 가고 하는 일이 전부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내녀석 셋이나 보살피다 보면 하루 종일 그것도 벅차다.
하루에 몇 번 아랫층 병원 시찰회는 돌아가는 상황보다는 자유인 호색가 정우를 살피기 위해서다.
정우는 잘 생기고 허우대가 좋다. 환자가 많아 진료로 실내에서 하루종일 햇빛을 못 봐 허여멀겋다. 흰까운에 잘난 얼굴이 돋보인다.
"박여사네 아들만 같아라. "
"사위감으로도 그만하면 최고지." 읍을 통털어 비교의 대상, 표본오차가 적은 일등감이다. 선망의 대상. 어른들의 기준에 의한 표준 1위로 오르내린다.
흠이 있다면 본색이 여자를 좋아한다. 끼있는 남성의 정갈한 멋도 없이 꼬리가 잡혀 아내의 입김을 통해 끝을 낸 전과도 여러 건이다. 계획적이 아니면 잠깐 헤픈 마음은 죄가 아니라고 외쳐대는 정우라 순실은 늘 신경이 쓰인다. 한눈을 팔아 아내의 속을 뒤집어 놓는다. 뒷수습이 빠른 아내 덕에 대부분 일막에서 종결되었다.
요 며칠 입장에는 외지 사람들로 횔기가 찼다. 서울에서 정우네 마을로 의과 동기생인 한 설영이 의료봉사를 나왔다. 치 의대생과 갓 입학한 학생들을 데리고 내려왔다. 여섯명이디. 의대 여자 동기라 잦은 왕래는 없었으나 설영은 소탈하여 군 입대 기간으로 인턴이 늦은 동기를 잘 챙겨주고는 했었다.
‘ 정우야. 정우형 ’ 이라는 실용 어를 사용, 호형 호제를 하며 쿨하게 지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라 이웃사랑을 실천한다. 백의의 여인답게 일 년에 두 세번 의료봉사를 다닌다. 후덕한 노처녀 이끄는 봉사대는 아낌없이 나누고 베푸는는 헌신에 동참하는 후배들이 많았다. 특히 봄 기간의 봉사는 활기차다. 해외 봉사는 겨울에, 국내 봉사는 봄과 여름에 하며 주기적인 봉사의 끈을 놓지 않았다.
봄이다. 정우에 고향. 봄의 정취는 흠뻑 올라서고 있었다. 삼봉국민학교 울타리 는 개나리 꽃이다. 막 꽃이 물러나고 잎새가 돗았다. 운동장에는 벚꽃이 한창 피었다. 운동장은 반지르르 하다. 체육을 하는 아이들로 시끄럽다. 골을 지난다. 야산에는 진달래가 등선을 오르기 시작한다. 밭에는 보리가 청청, 고개를 내밀며 여기저기 봉사대 일행을 반긴다. 외길인 삼리로 가는 길. 냇가. 섶 다리를 밟으며 내를 건넌다. 비가 오면 언제 다시 떠내려갈 지 모르는 물 먹은 나무. 얼기설기로 이어 놓았다. 물이 맑으나 가물어 바닥이 훤하다. 돌틈 푸른 이끼 사이로 다니는 송사리가 보인다.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물위에 소녀의 치마가 내 비친다.
정우가 깨복장이로 놀던 곳이다. 정겹다. 다시 한 번 옛날로 돌아가서 물장난을 치고 싶어진다. 향수에 젖어 아객지로 흩어진 친구도 그립다. 물속에 고기와 같이 유영하는 상념이 회를 친다. 봉사데에 어린 소희를 바라본다. 눈에 쓰인다. 섶다리를 통과해서 뚝 길로 올라간다. 다섯명 중 여지는 둘. 설영과 소희다. 소희의 가방을 정우가 들어 주었다. 고개를 끄덕인다. 학생이 웃는다. 신선하게 와 닿는다. 바람이 살랑거린다. 햇살은 따스하다. 도시에서 공부에 여념이 없던 소희가 작은 환성을 터트린다. 발걸음이 가볍다. 여자에게 관대한 정우의 심장을 툭툭 건드린다.
정우도 오랜 만에 어릴 적 살던 동네를 들어왔다. 임종을 집에서 맞는 사람. 병명을 알아 사망신고를 하여야 하는 사람 외에는 왕진을 하지 않는다. 종환자는 응급차기 모셔온다. 바깥 출입이 잦지 않았다.
이장네 마당에 임시진료소를 마련하였다. 광목천막도 두 개 펴 놓았다. 새마을 금고와 농협 천막을 빌려 놓았다. 한 곳은 치과. 한 곳은 내과이었다. 확성기를 통해 열시부터 진료를 한다고 선전을 하고 있었다.
이장집 입구에 안내자를 배치. 진료준빌르 빠르게 한다. 사람들이 모인다.다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서둘러 나온 사람이 있다. 대기로 앉아 있었다. 편안히 앉도록 권유한다. 양쪽으로 가른다.
농사로 바쁜 사람들이 등한시 해 온 이 치료로 많이 몰렸다. 일찍 신경을 쓰면 간단한 치료를 방치하다시피 하여 뽑는 경우가 허다한 부위가 치아다. 임시 치료와 뽑는 것 외에 상담이다.
내과도 소홀치 않았다. 설영이 내과를 보았는데 동네 의사보다 처음 보는 설영이 쪽으로 더 환자가 왔다. 정우는 소희의 가방을 섶 다리에서 부터 진료소로 들고 와 그녀를 보조로 모셨다. 관심이 쏠렸다. 서울에서 내려온 봉사자가 불편하지 않게 배려를 하였다. 정우는 마치 자기가 보조 의사처럼 챙겼다. 정우는 서서히 빠진다.
함께 한 정우의 처가 약간 떨어져 설영이를 돕고 있는데도 남편의 여학생에 대한 관심이 눈에 들어온다. 전적을 감으로 느낀다. 바람이 획 지나간다. 다른 사람들은 눈치를 채지 못했으나 아내인 순실은 바람도 신경에 걸린다. 정우의 헛손질. 금속성의 쨍그랑 소리를 낸다. 핀셋을 주어 올린다. 멋적은 웃음. 생수도 건낸다. 포획한 노획물처럼 여러가지가 걸린다. 순실은 스스로 상처를 받는다.삼일 간 임시 진료소를 옮기며 진료하였다. 하루에 삼백 명 이상을 진료하였다. 바쁜 통에 바람은 잦아들어 잠자고 말았다.
그러나 정우는 무료봉사를 그 해 여름에 다시 신청하였다. 설영에게 미리 부탁 했다. 설영이 역시 한 곳을 정해 이년 간은 갔던 곳을 가는 편이었다. 친근감이 좋았다. 소희 여학생도 또 참가를 하였다. 계획없던 눈맞음은 죄가 아니라 했으나 이번 경우는 다르다.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 번에는 아내에게 이내 들키고 싶지 않았다. 조신을 떨며 접근을 한다. 식사는 부녀회원들이 맡아 해줘 병원신세를 지지 않았다. 늦게까지 여름이라 진료를 하고 시골 마당에서 놀았다. 정우와 봉사대는 친숙해졌다. 의도적으로 마음을 썼다. 자기의 색깔을 냈다. 다정다감한 남자로 더위에 찬 수건을 건내준다.
잠자리도 깨끗한 마을 집으로 정해 먼저 들어가 점검을 하였다. 모기장도 쳐주고 외등도 달아 화장실을 잘 가도록 안내 표시판을 붙여 놓았다. 글자 채색과 나열도 신경을 썼다. 의사의 섬세하고 정교함 수준을 훨씬 넘었다. 단단히 준비한 환영 이벤트에 모두가 놀랬다. 프랑카트도 걸었다. 소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나 해주고 싶었다. 얼음 냉채도 초저녁에 보내줬다. 모두에게 명함도 주었다.
의료 봉사대가 떠나기 전날. 봉사대는 병원에서 숙식을 하였었다. 소녀에게 아무도 눈치채지 않게 쪽지도 주었고 작은 선물을 주었다. 귀걸이였다. 감사의 글과 메모.
몇 가지 제안도 하였다. 만남의 조건이다. 상투적인 것이 아니다. 학생도 여러가지 제안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이 있었다. 정우는 꽃을 따다 한 아름 안기지는 못해도 마음의 절절한 향을 펀지 바구니에 듬뿍 담아 보낸다. 초장부터 여심을 흔들며 매혹시켰다.
펜리라는 도구. 때로는 정우의 그 협약은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쌍방의 과실을 인정받기 위한 증거물도 되었다.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상으로 구애를 하는 세태에 익숙한 젊은이가 자필로 쓴 편지를 받고 색다른 느낌을 받는다. 그런 구시대적인 발상이 현대의 틈 사이에서 통했다. 여러 번 하다 보니 요령도 생겼다. 아내가 낳은 쌍둥이와 귀염둥이 막내가 재산목록으로 치부되어 여자는 안타로 족한 정우다. 작은 안타로 여러번 가능한 한 아내에게 들키지 않으면 된다. 그저 선친을 닮아 유혹의 뿌리를 좇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족보는 자식없는 이유의 방황였다. 끝난 것은 죽음이었다. 유복자를 남겨놓고 떠났다. 남편의 외도보다 지식을 못 낳는 설움에 정우의 어머니는 속을 끓였었다. 그 대를 잇는 것도 모르고 죽었다. 저우는 아버지의 전철을 좀처럼 끊지 못하고 있다.
의료봉사라는 멋진 인연으로 연서가 오고 가고 만남이 시작되었다. 그들의 만남은 협약이 되어 정우가 졸업까지 학비를 대는 조건과 언제든지 이별을 전재로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시간이 갈수록 순탄한 흐름에도 삐걱거리는 것이 불륜이다. 그리고 불안하고 조급함으로 이어지면 이별이 다가옴을 알게 된다.
순실은 남편이 야간열차에 동창회를 핑계되는 잦은 행보에 이혼을 하겠다고 맞선다. 서울과는 불과 두 시간 거리라 정우와 소희는 마음만 먹으면 만나고 소통은 활짝 열려있다. 여학생은 신사고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별의 전재를 달았다. 바람둥이가 부담도 덜하고 자유롭다. 싫어지면 안 오고 안 만나면 된다. 주고 받는 것이 분명하다. 범위가 차 탈선의 소리가 나는 이별선 까지 가기 위해서는 불가분의 만남이 필요하다고.
방종을 부추기는 성의 개방화 물결에 편승. 소희에게 있어서는 결혼이 임박한 젊은이보다 터득이 된 넉넉한 유부남이 좋다고 생각한다. 도색적인 것을 원치 않는 정우가 유희로는 안성맞춤이다. 의사라 급하게 만나 병원 소독약 냄새는 가끔 난다. 편안하다. 정우는 특이한 냄새를 풍기거나 느끼하지가 않다. 무례한 요구를 하거나 완전한 속박을 원하지도 않는다. 경제적인 부담이 없다. 소희는 별안간 내려와 놀람과 환희로 정우를 들뜨게 하였다. 짧게 톡 쏘는 매력과 서구적 스타일로 시원하다. 굵은 선이 선명하다. 자유자제로 마음을 사로잡고 구역과 경계를 짓고 획을 휘두른다.
아내의 강경한 태도에도 바람 난 정우는 소희가 남기고 간 흔적을 찾고 있었다. 떠나기 전날 숙식을 병원에서 해서 곳곳에 그녀의 모습이 있었고 달이 떨어지는 냇물에도 소희의 짧은 치마가 팔락팔락 하늘거렸다. 운동을 핑개삼아 냇가로 산책을 나간다. 바람을 쐬러 나온 어른들께 깍듯이 인사를 한다. 속은 검고 타들어 갔는데 정우 같은 친절한 의사는 없을 거라고 칭찬을 한다. 노인들은 단순하다. 소희에 대한 집착으로 포기나 절제가 안 돼 재포장하여 다시 이웃에게 나누어 주고 있는 것을 모른다. 아내의 겅경노선에 발목이 잡혀 행동의 폭은 좁아져도 불길은 넓게 타들고 있었다.
운동이다 산보 다 하는 행위가 이미 타기 시작한 갈증을 없애지는 못했다. 타인이 잠시 누르는 경계는 불길을 잠재우지 못한다. 여름 날 작은 불씨가 초가삼간을 태웠다. 정우는 예전같이 쉽게 멈출 수가 없었다. 서울이 자꾸 가고 싶었다. 아내가 집을 나간 다고 큰소리친다. 이혼. 끝내는 소희가 자기 곁을 지켜준다면 밀어붙이고 싶은 심정이다. 아니 일 년간의 외출이 허용된다면 좋겠다. 가당치도 않은 생각을 하루에 몇 번 씩 한다.
아내의 목소리가 거세진다. 정우가 이전의 전과 기록과는 전혀 다르다. 서랍에 간직한 쌍방과실의 증거물을 내어 놓으며, 아내에게 화해의 신호를 보내지 않는다.
소희는 사랑한다고 쓰지도 않았다. 흥미로우니 진행하자는 말과 이별의 명시. 이렇게 마지막 항목이 명백히 적혀 있었다. 닳고 닳은 아내는 믿지 않는다. 정우는 너무 빠져있다. 들떠서 일이 뒷전이다. 일년을 짧다해도 돌풍은 쉽게 돌아오지 않을 길로 빠지고 있다. 정우는 안타깝다.
그 맹랑한 문구가 불을 지피는 쏘시게 가 되었다. 불씨가 타오르면 소희의 매력은 형용키 어려운 기쁨을 준다는 사실이다. 소희는 숲속에 뛰어노는 암사슴처럼 사랑스럽고 갓 익은 앵두 같았다. 입에서 녹을 것 같다가도 광활한 대지로 펄펄 뛰어가는 발길질을 잘하는 귀여운 암사슴이었다. 성숙해진 사슴은 멀리 멀리 뛰기 시작한다. 암사슴은 벌판에서 보이다가 찾고 찾으면 숲에서도 아른거린다. 정우는 헤매며 찾고 있는 우직한 목동에 불과하다. 어느 때는 목동은 불안하다. 아내와의 마찰로 찬기도 서린다. 그 냉기에 가슴도 아프다. 그러나 목동은 심한 회오리 바람에 반들거리는 꽃사슴이 사라질까 두렵다.
가슴은 뛰어노는데 현실은 무겁고 가족은 어느새 정우를 묶어놓아 자유롭지 못하다. 이중적인 잣대로 사정없이 흔들린다.
정우와 한바탕 소동을 피운 날 순실은 소희를 찾아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남편을 닦달하여 끝날 풋 사랑이 아니다. 외도를 넘고 있었다. 결단을 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다급해졌다.
학교 앞 카페에서 소희를 기다린다. 순실은 물 한 잔을 먼저 마셨다. 그리고 달짝지근한 모카 향 커피를 시켰다. 늦게 도착한 소희가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셨어요"
"....... 네" 그녀도 같은 커피를 시켰다. 소희가 당당해 보였다. 질식할 것 같은 소희의 아름다운 미모에 쉽게 한풀이 죽는다. 아무리 성형이 유행해도 칼 될 곳이 없는 미인이다. 반짝이는 눈망울에 목긴 선이 눈이 부시다. 소희의 인사도 받지 못했다. 여자가 봐도 이쁜 여인. 풋풋하다. 잠시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 사모님! 저한테 할 말이 있으세요? " 당돌하다. 순실은 똑바로 미녀를 바라본다.
" 제 얼굴에 ?" 손사래를 친다.
“ 아니. 그냥 쳐다보았어요. 소희 씨 내가 최의사의 아내인 것이 부끄럽군요.” 지금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 사모님 부끄럽다니요?”
“ 남편은 소희 씨를 사랑하고 있거든요 . ”
“......, 알고는 있는데 ”
“ 그럼 내가 물러날 게요.” 소희는 빙그레 웃는다. 도도해 보였다. 상대의 허약함을 본다. 그리고 여인의 내심을 들여다본다.
“ 우리는 이미 계약을 했습니다.”
“ 계약을 하다니요?”
“ 이별로 끝내기로 말입니다.”
“ 이별. 언제요?”
“ 처음 시작부터요. 이별조항을 붙이라고 해서 홍이 발동했습니다. ”
“ 흥이요?” 젊은이의 세련된 말이 더욱 혼란을 가져다준다.
“ 삶이란 가끔은 흥이 있어야 제멋이 아닐까요.”
“ 흥으로만 살수 없지 않을까요. ?” 순실은 진솔하게 말했다. 상대가 자신의 남편이 아닌 아가씨의 맨토처럼 주고 받는다.
“물론입니다. 그래서 이별을 달지 않았습니까?”
“ 그 끝은 언제?” 자신도 모르게 이어가는 말장난을 쫓아가고 있었다.
“ 최 정우 의사님의 달뜬 모습이 아직은 매력으로 보이거든요. ”
“달뜬다? 남자란 늘 그랬거든요”
“ 늘 그랬다는 것 인정 할께요. 그러나 우리의 감정은 처음이거든요. "
"우리의 감정이라?"
내 우리의 감정 말입니다. 선생님과 나는 첫번째입니다. " 우리라는 말 생경스럽다. 순실과 정우도 우리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흔들리고 낯이 설은지 모르겠다. 잠깐 말을 잇지 못했다. 침묵을 깬다.
잠깐 동안 만 빌려주세요. ”
“잠깐 만 빌려 달라?” 이 말이 새롭다. 시적 표현처럼 난해하다. 간결하지만 뜻을 은미하는데 시간이 필요하다. 먹먹하다.
“네. 잠깐”
현대시를 쓰는 맹랑한 소희를 주산 알 같은 맑은 해법으로는 안된다. 은유적이다. 짊은이를 당할 수가 없었다. 남편이 매력이 있어 잠깐 만 빌리자는 아가씨와 시론 따위를 생각하며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평론을 쓸 기운도 없어졌다. 시간은 소모품이 아니다. 참으로 아껴야 할 우리들의 일상의 일부분이다. 소통이 있어야 내 시간이다. 소통이 없는 말은 반대편에서 오는 기차와 같다. 막 부딪힐 순간을 순실을 다 식은 커피를 마시고 일어서 나왔다.
순실은 차를 몰고 집으로 오면서 자존감을 상실한 자신을 발견한다. 전에는 이런 경우에 불륜을 윽박지르고 헐뜯어 해결하면서 읍내 최 의사의 아내라는 존재감을 잃지 않은 최소의 품위를 세우면서 살아 왔었다.
그러나 이번은 당사자의 입을 통해 확실한 종결을 약속받고도 자신이 너무 초라해 보였다. 소희는 미와 학식과 신사고로 당당하게 변혁을 선언하고 있는데 자신은 과거의 산물인 고루하고 진부한 구시대의 틀에서 팔정난 사내를 잡기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지 않는가. 낯이 뜨겁다. 화가 난다. 그녀는 상실감으로 통곡을 하고 싶다.
여태껏 많이 가진 자들의 횡포 앞에서도 이렇게 무참하지 않았다. 통곡을 삭히다 차창이 흐릿하게 눈물이 쏟아졌다. 당찬 소희보다 남편이 더 미웠다. 레비를 무시한 채 방향을 틀어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어디를 향해, 누구를 위하여, 바람도 목적지도 잃은 난파선이 된 순실은 차를 계속 몰았다. 해안선을 달린다. 끝없이 달리고 싶다. 8차선 도로를 쌩쌩 달린다. 속도를 무시한다.
소희 는 순실 앞에서 당당했지만 헤어지고 나서 생각하니 그녀가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남을 통하여 한 남자에 일생을 건 여자의 허한 마음을 읽었다. 독소가 있는 파편을 맞으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았다. 흔들리는 처절함에도 소리치지 못하는 남의 아내의 모습을 보았다. 머리칼도 잡혔을 법한 상황에 조용히 나갔다. 패배를 인정하는 황급한 뒷모습이 불쌍했다. 소희는 여자다. 상대의 입장에 서 본다.
잠시 고민을 하다가 이별을 앞당기기로 결심을 한다. 책상에서 편지지 한 장을 꺼냈다.
이별 ㅡ 즉시 실행 ㅡ 종료
소희는 분홍지에 이렇게 간단히 종료를 알리고 까맣게 지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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