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3.1독립운동의 기폭제
3?1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된 것은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주장한 민족자결주의였다. ‘그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 스스로의 의사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라는 것이 요지였다. 1918년에 제 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민족 강화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약소민족의 자결주의를 제창한 것이다.
또한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자극했던 결정적 계기는 바로 조선의 제 26대 왕 고종황제가 1919년 1월 21일 오전 6시, 67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서거한 사건이다. 일제는 뇌출혈로 사망한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일본에서 유학 중인 영친왕 이은(李垠)과 왕족 니시모토노미야 마사코와의 결혼이 1919년 1월 25일로 발표된 이후 갑자기 새벽에 쓰러져 사망한 고종의 석연찮은 죽음 때문에, 항간에는 일제의 독살설이 퍼지게 되었다. 영친왕은 이미 유학 전 민갑완이라는 약혼녀가 있었기 때문에 고종은 자신의 아들이 일본 왕족과 결혼하는 것을 원치 않아 반대하였고, 이 혼인은 1920년 4월 28일로 연기되었다.
국상 기간 내내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던 고종황제의 죽음을 애통하는 통곡소리는, 나라 잃은 백성의 울음이요 통곡이었다. 덕수궁 대한문 앞에는 거적자리가 펴졌고, 오고가는 조문객들이 시키는 사람이 없어도 자발적으로 줄을 지어 기다렸다가 한 무리가 꿇어 엎드려 통곡하고 일어나면 또 다른 한 무리가 엎드려 통곡하였다.
실로 고종황제의 일제독살설은, 나라 잃은 설움으로 일제에 짓눌려 있던 백성들로 하여금 민족적 의분과 울분을 유발시키기에 충분했다. 거기에는 남녀노소 계급 지위 따위의 차별이란 전혀 없었고 다시 나라를 되찾아보자는 일치된 민족감정뿐이었다.
온 국민과 민족 대표들은 나라 잃은 슬픔이 극에 달하였던 때, 고종황제의 국장을 보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서울로 모여들 것을 예상하고, 이 시기를 독립운동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그리하여 고종황제의 인산일(因山日?장례식)인 3월 3일을 이틀 앞둔 3월 1일에 거족적인 민족 운동인 3?1독립운동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