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 정재학의
숲에서 쓰는 시, 편지
사랑에 대하여/2009년 10월 9일 시인정신 발표작
추워지면
서로의 가슴팍으로 파고드는
새들처럼
부리를 맞대고 어둠을 이겨내는
새들처럼
밤이 되어
너의 가슴 속으로 길을 떠나는 나의 영혼은
어쩌면 뜨거운 입술을 지닌 아비새였으리라.
만나는 날을 위해
때론 박꽃이 되고
때론 댕기머리물떼새가 되어
다리를 놓고 길을 여는 것처럼
나를 위해
머리를 조아리고 깃털을 다듬는 너는
아마도 뜨거운 눈물을 지닌 어미새였으리라.
어느 벌판에 홀로 떨어진 별처럼
오늘도 밤을 맞는다 하여도
날개 접은 가슴팍에 숨겨놓은 솜털을 뽑아
겨울옷을 짓는 너를 위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름으로
밤을 새우는 나는
분명 사랑이었으리라.
☼ 프롤로그
풍향계
바람이 옮겨온 것들이었다. 생성과 사멸, 애증과 뜨거운 고독, 야뇨증으로 시달리는 밤과 창문으로 스며드는 풀벌레, 경멸을 주며 떠나가는 시대와 해양의 나침반도, 손목에서 울리는 초침소리도, 모두 바람이 옮겨온 것들이었다.
모두가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서 있었다. 바람이 불어오는 그 곳. 깊은 그리움의 뿌리 속에는 분얼(分蘖)하는 또 하나의 그리움이 있었다.
바람의 고향 너머에는 또 다른 바람의 마을이 있었다. 바람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배반의 편지를 띄우기를 바랐었다. 그러나 떠나지 못하는 우체부. 바람에도 길이 있었다. 아침이 길을 찾아오면 훌쩍 허공에 몸을 띄워 청동의 새가 되어 보기도 하였다.
이루지 못한 비상(飛翔)의 꿈이 들판에 쌓이면, 마침내 독이 되어 서 있기도 하였다. 때론 녹슨 화살이 되어 너를 향해 쏘아보기도 하였다. 날카로운 겨눔이 있었지만 직격(直擊)한 것은 오직 빈 가슴의 비움뿐이었다.
바람이 되어 바람을 맞고 있을 뿐이었다.
/ 제목 : 풍향계 (2007년 6월 30일 시인정신 발표작)
☼ 봄
Ⅰ. 들길
영속하는 것은 그대를 향한 나의 믿음입니다. 피었던 잎은 반드시 다시 피고, 그 자리에 있었던 것들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만나리라는 믿음. 그리고 봄. 버드나무 끝에 강아지 솜털이 입혀지면 물안개 오르는 들길을 지나 그대를 맞이하러 떠납니다. 먼 곳, 아주 먼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듯이 당신을 느끼기에는 볼을 부비는 모든 것들이 너무 가볍습니다. 구름 밑에서 날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남촌(南村)을 떠나온 새들을 향해 작은 웃음을 지어보입니다.
Ⅱ. 갈대로부터
절망의 시대를 지나 다시 시작하는 것들을 봅니다. 잿빛으로 쓰러진 갈대에게서 지난 가을 나는 죽음을 배웠고, 이제 봄이 되어 그 자리에서 새로운 생명을 봅니다. 당신과 나도 그리 될 것입니다. 당신이 사라져 간 그 자리에서 나는 당신을 기다립니다. 끝난 곳에서 다시 시작하리니, 헤어진 곳은 새로운 출발점이 됩니다. 다시 만날 것을, 곡 다시 만날 것을 생명처럼 믿습니다.
Ⅲ. 소유를 위하여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슬픔을 겪고 난 뒤의 일입니다. 겨울 저 편에서 반짝거리던 나의 편지는 봄이 되어 풀빛을 띠고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내 사랑이 기록된 그 터에도 수선이 피어오르나 봅니다. 간절한 아주 간절한 꽃망울은 눈동자처럼 밝습니다. 내 심연(深淵)의 못에도 한줄기 물풀이 돋습니다. 당신에게 보내는 이야기 속에 새들이 찾아오고 둥지를 짓고 아기참새가 깨어납니다. 이름을 붙여주고 이마를 다독이면서 나와 내 소유에 대한 모든 것을 알려줍니다. 소유했던 사랑과 이별, 그리움까지 알려줍니다. 아마 내가 이 자리를 떠나면, 새들은 이곳에서 내가 소유하였던 사랑과 이별, 기다렸던 몸부림을 위해 노래하고 춤추고 다툴 것입니다.
☼ 여름
Ⅰ. 부러짐
은사시나무 잎새 흔들리는 거리에서 몸을 놓았습니다. 흔들리는 만큼 강렬한 햇빛과 폭풍이 거리를 지나갑니다. 나도 그들처럼 허리를 굽힙니다. 강한 것은 부러지듯이 강한 나의 사랑도 부러지는 아픔을 맞이하였습니다. 아픔 끝에 풀잎처럼 누워볼까도 생각하였지만 나는 약할 수 없었습니다. 약한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Ⅱ. 파란 낙엽이 되어
허리쯤에서 통증이 옵니다. 폭풍은 정확하게 나의 중동을 부러뜨리고 무수한 파란 낙엽의 시체를 남기고 갔습니다. 괴로운 나의 선택은 죽음이었으나, 사람들은 파란 죽음에 대해 남아있는 또 다른 미래를 봅니다. 그리곤 아까운 시선을 남기고 갑니다. 다시 일어나 포도(鋪道)위를 굴러봅니다. 죽음으로 해결되는 것은 괴로움뿐, 사랑하고 사랑받는 존재까지 지우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Ⅲ. 자유
다만 나는 나뭇잎처럼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어야 하는 굴욕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습니다. 내가 그대에게 매달려서 언젠가는 사멸(死滅)하고, 무너지고, 손톱을 세워야 하는 굴욕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습니다. 구차한 그 무엇에 대하여 매달리고 애원하는 초라함. 그리하여 파란 낙엽으로 사라지는 나의 영혼은 자유입니다.
☞ 쉼
- 숲속에서 -
태풍과 폭우를 견뎌낸
무성한 녹음은
떨어진다.
님이여.
나 역시
정면(正面)의 태풍과
배면(背面)의 폭우를 견뎌내고
그대에게 가는,
나는
어느 때면
저처럼 낙엽이 되어 타오르다
떨어지기 전
그대의 소원 속에
발화(發火)하는
한줄기 불꽃이 될까.
☼ 가을
Ⅰ. 평온
굽이치던 구름도 지나가고, 열사(熱沙)의 보리밭에도 평온처럼 허수아비가 서 있습니다. 수숫대 사이사이로 그토록 갈망하던 서늘한 바람이 붑니다. 분노와 열정이 배어든 과일들은 붉게 물들어갑니다.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기다림에 지친 분노와 서운함과 체념과 미련을 베어문 채, 가을을 맞습니다.
Ⅱ. 나그네처럼
산모롱이를 돌아오는 나그네처럼 짐을 싸고 떠납니다. 한번쯤은 나도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기다림이란 이 긴 시간과 자리하는 공간으로부터 생성되는 것. 비우는 것은 채워짐을 위한 배려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도 떠나야 합니다. 다른 누군가가 이곳에서 나처럼 애달픈 한숨을 배우고, 나처럼 기다려야할지 모릅니다. 새로움을 위해 혹은 새로운 이별을 위해 미리 떠나주는 것도 옳을지 모릅니다.
Ⅲ. 겨울맞이
그러나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것도 압니다. 그리고 그녀의 겨울을 위해 준비해야 한다는 것. 나 외에 아무도 당신을 돌볼 수 없다는 기쁨으로 나는 가을산을 헤매야 합니다. 머루와 다래와 맹감을 따서 자루에 넣고, 너도밤나무 밑에서 알밤을 줍고 지게 위에 참나무 장작을 싣고 돌아와야 합니다. 그녀의 따스한 겨울을 위해 장작을 패고 시원한 샘물을 길러놓아야 합니다. 가을 산마루에서 뒤를 돌아봅니다. 내가 가면 비어있을 그녀의 자리. 혹시 한순간이라도 찾아올 그녀를 위해 나는 산을 넘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떠날 수 없음을 진작부터 알고 있습니다.
☼ 겨울
Ⅰ. 남겨짐
회귀하던 모든 사랑은 알을 낳고 떠났습니다. 사마귀도 잠자리도 귀뚜라미도 여치도 연어도 그렇게 그녀들은 떠났습니다. 그 후 나의 사랑은 오직 수컷만이 알을 지키고 있습니다. 하얀 눈과 저 먼 눈길을 남기고 당신은 갔고, 나는 남아서 부활할 내일을 위해 그녀가 남긴 알을 싸안고 마지막 사랑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 후 눈앞에 하얀 장막이 처지고, 나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하얀 추억이 되어갑니다.
Ⅱ. 수놓기
겨울나무에 눈이 내리고, 침엽수림엔 잎사귀마다 바람꽃이 맺힙니다. 처음은 통곡으로 시작하여 나중엔 호소로 이어지는 밤이 번갈아 찾아옵니다. 숯불을 얹은 화로를 끌어당겨 가슴을 데웁니다. 하고픈 수많은 이야기들이 녹아 실이 되어 흘러나오고, 오색 그리움은 실 위에 색깔을 입힙니다. 대바늘을 들고 당신을 위해 뜨개질을 합니다. 수틀에 밑그림을 그려놓고 하염없는 생각에 잠깁니다.
Ⅲ. 약속
당신의 몸에 꼭 맞는 조끼 하나와 털장갑을 인편(人便)에 보내고, 이제 부지런한 새들도 발길이 끊긴 초막에서 나는 은둔과 고립의 시를 쓸 것입니다. 어느덧 삶은 짙은 눈빛 서정으로 바꾸어지고, 하얀 나의 동면(冬眠)은 희미한 절편(切片)이 되어 갑니다. 사랑도 잠이 든다는 것에 대해 나는 그 까닭을 몰랐습니다. 지금까지는 진정한 기다림이었을 줄 압니다.
저 계곡에 눈물이 흐르고 다시 복수초 피어나는 무성(茂盛)한 날에, 마음 없이 우는 산새 울음소리를 듣고 일어날까 합니다.
☼ 에필로그
숲에서 쓰는 편지
Ⅰ. 별을 위하여
조릿대 지천으로 널린 성출산 청류동에서 그 봄 맨 먼저 핀 복수초 노오란 선의(善意) 앞에서 하얀 눈을 쓸어 담고 나는 옷깃을 여미며 반야를 기다렸다. 깨우침은 적요(寂寥)한 밤하늘에 긴 강물 은핫물가에 목 쉰 사공처럼 묵묵히 서 있었고, 가끔씩 뚝딱거리며 북두성만이 초침을 울리며 지나간다.
운명의 별을 찾아서 마침내 그 운명의 색깔을 찾아냈을 때처럼 숲은 바위처럼 가라앉은 채, 어두운 밤하늘 절망 어린 나의 우주로 이어져, 그 젊음 화려한 꽃잎 채색을 지우고 마주 선 돌복숭아 나무 곁에는 때 이른 가을 코스모스 한 그루 반항처럼 서 있으리.
Ⅱ. 산까치에게
타오르듯이 산곡을 훑고 지나가는 고라니 울음소리. 애기단풍나무 홀로 요람을 걷는 아침 여명(黎明)이 끝나지 않은 산길에는 곰솔 가랑잎 떨어지고, 황홀한 구름너머로 송이버섯이 돋고 있다. 그 어떤 기다림으로도 다가갈 수 없는 산 너머 산 속 나의 오두막 귀틀집 마당에는 섶불을 올리며 따스한 아침을 마련하는 산까치 같은 여인이 있을 터이고, 산록을 펴서 깔아놓은 잠자리에는 흥건한 사랑이 이슬처럼 내리고 있을 것이다.
겨울 하얀 백양나무 숲에서 은회색 편지지를 주워들고 눈밭 가장자리에 앉아 아픈 참회(懺悔)의 소식을 전할 때, 햇빛처럼 반사(反射)하던 눈부신 얼굴을 잊을 수 없다. 그러나 어젯밤 온 숲을 울리며 지나가던, 무릎관절을 헤집는 염증처럼 시린 눈보라를 보면서, 내일 아침 숲에 누어있을 무수한 주검을 생각하였다. 나를 찾아오던 너의 여린 목소리도 하얀 산길에 쓰러져 있는가. 꽃부채마냥 붉은 한숨을 쉬며 귀틀집 들창문을 올렸을 때, 들려오던 산까치 울음소리.
Ⅲ. 귀천(歸天)의 그림자
저녁 기우는 빛에 구상나무가지 오랜 구원(救援)의 손길을 뻗어 하늘에 올리고 있었다. 짧고 단단한 높이에서 출발하여 산언덕 긴 그림자로 자라나기까지, 수백 번 공허한 하늘을 뒤집고 수천 번 질문을 던지고 이 자리와 이 시간에 대한 의문, 그리하여 얼마나 오래도록 과거와 현재의 시련과 고통에 대한 의문을 풀고자 하였는지 모른다.
바람이 일어날 무렵, 떠나는 이를 위하여 고개를 숙인 후 바라보는 땅거미 내리는 산정(山頂)에는 눈구름이 산길을 내려오고 있었고, 홀로 기울던 구상나무 그림자와 산까치 울음소리는 때론 어둠 속으로 때론 누군가의 기도 속으로 떠나고 있었다.
가을 편지
우려(憂慮)하는 것처럼
가을 깊은 곳으로는 가지 않을 게요
하늘 파랑 근처에서 머무르다
붉은 노을 저물녘이 되면 돌아올 게요
나뭇잎, 열매, 산, 들꽃, 그림자
홍엽(紅葉)이 더 짙어지기 전에
산길을 따라서 돌아올 게요
나무로부터 이산(離散)의 슬픔이 더해지기 전에
과일을 따서 돌아올 게요.
바람, 이 허무한 나그네
산을 넘어 오기 전에
당신을 찾아 돌아올 게요.
/ 2007년 8월 28일 시인정신 발표작
시인 정재학
- 전북 고창 출생. 광주 사레지오중13회. 충남고등학교13회. 조선대 국어국문학과 44회.
- 한국문인협회 시분과 회원. 시인정신작가회 회원
- IPF국제방송 편집위원. 인사이드월드 논설위원. 데일리안 광주전라 편집위원.
- 자유지성 300인회 회원. 반국가교육척결 국민연합 사무총장
- 제8회 시인정신 작가상 수상(07, 12, 8). 제9회 공무원 문예대전 수필 부문 행정자치부 장관상 수상(2006. 7. 25). 제10회 공무원 문예대전 동화 부문 최우수 국무총리상 수상(2007. 7. 9). 제12회 공무원 문예대전 희곡 시나리오 부문 최우수 국무총리상 수상(2009. 7. 10). 제13회 공무원 문예대전 동시 부문 행안부 장관상(2010.9.1)
<후면 표지 시>
겨울 원두막
겨울을 밟고 언덕을 넘어갈 때, 그 시절 파아란 잎들이 무성하던 고갯길에서 손님을 기다리던 말없는 집 한 채가 있었다. 오로지 네 개의 기둥과 몇 개의 서까래로 지붕을 엮고 넓은 들밭을 향해 사방으로 문을 연 이 집이 있음으로 해서 언덕엔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벽을 허물고 저 먼 곳을 향해 가슴을 연 열린 마음으로 삶의 겨울을 넘어가야 했다. 잠자리가 날아다니는 언덕 아래로 길게 뻗은 밭이랑처럼 모든 것들이 줄무늬 수박잎으로 덮이던 때. 참외들이 여름볕에서 노오란 몸으로 익어가는 풍경을 바라보던 말없는 집처럼 나는 겨울 언덕에서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겨울이 된 나의 존재는 언덕 위 원두막처럼 적막에 싸여 있었다. 산허리를 덮던 검은 머리카락은 하얗게 퇴색되고 있었다. 내일을 위해 홀로 남겨진 원두막, 다만 푸른 수박잎으로 덮일 다가올 시절을 향해 겨우 몸을 지탱하는 네 개의 기둥, 사이사이로 거침없이 지나가는 바람과 겨울달빛이 있었다.
- 기타 시-
(이 시들은 본문 시 하단 작은 글씨로 넣었으면 함)
- 낙엽 -
비록 퇴락한
음유(吟遊)의 들을 온몸으로 뒹굴고 있지만
푸르렀던 생과
순결한 추락
너를 향해 전진하다
전멸한 시신(屍身)을 모으고
다시 꿈을 꾸리라
그리고
별이 운명을 만들어
짙어지면
다시 태어나리라
태어나
깊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어느 전생(前生)의 별빛 아래에서
나누었던 사랑을
다시 품어 보리라
/ 2005년 12월 1일 시인정신 발표작
- 꽃씨 -
깨어나고 싶을 때는
가슴의 온기가 필요하리라 싶다.
지난 가을
퀑한 내 눈 안에서 구르고 있던
예비하는 사랑이었다.
하얀 눈에 덮인 봄도
깨어나고 싶을 때는
가슴의 온기가 필요하리라 싶다.
녹아서 흐르는 것이
가슴만은 아니리라.
사랑이 그토록 미적거릴 때
밀어대던 강물이 말했듯이
설산에서는 그토록 하늘이 가까웠다고
불 꺼진 거리에서
아프게 몸을 구르던 너는
지난 가을
쓰레기차에 실려가던 시든 꽃대 뒤에 떨어져
하늘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만나는 이 없이 쓸쓸하리라 싶은,
겨울바람을 위하여 남겨진
예비하는 사랑이었다.
/2005년 2월 12일 시인정신 발표작
- 정향(丁香)의 숲속에서 -
비정(非情)을 안고 숲의 향기를 떠본다.
파르르 발꿈치를 떨고 있는 오솔길에서 은유의 답을 찾아
햇살을 부벼보고
정밀한 인연의 실을 뽑아 손바닥 위에 올려본다.
젖은 나뭇잎 위에 한 방울 햇살이 번진다.
함께 살아온 수많은 교만을 굽혀 나를 내린다.
불길을 피해 살아남은 몇 개의 초록잎으로 이룩하는 숲은
가난하지 않다.
풍성한 그 설레임이 충만해질 때
휘어져 돌아오는 과거의 흔적을 묻었다.
푸른 날개를 저어 바위를 떠난 멧비둘기는
초라한 비행의 시작을 기억할 수 없고
다가올 착륙과 종말에 대해 위로를 받을 수 없다.
지금은 작은 우물을 파, 존재를 씻어낸 후 먼 훗날엔
한 줄기 바람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때까지
묵은 별들이 뱉어놓은 쓰디쓴 운명에 젖어 있어야 한다.
은빛의 고독과 글썽이는 숲의 눈망울 사이에서
손을 뻗어대는 간절한 넝쿨들의 몸짓을 뒤로 밀어내고
아침 숲에 가라앉은
침향(沈香)의 바다에서
숲, 낙엽의 무덤으로 항해할 것을 묻는다.
/2010년 4월 27일 시인정신 발표작
첫 눈
눈송이들이 구르고 있다.
세상의 가장 밑바닥으로 추락한 하늘의 기억들이다.
손을 뻗어 손을 잡는다.
잡지 못하고 다시 굴러간다.
비명소리 하나 없이 녹여지지 않는 하얀 슬픔이 보인다.
춥고 어두운 날이었다.
바람이
막힌 채마밭 둔덕에서 돌아올 때에야
곁에 가랑잎도 함께 굴러간다.
비로소 소리가 느껴진다.
착한 영혼들에 대한 무수한 애원이 들린다.
떨어져 나간 한쪽 팔과 다리처럼
쓰라린 생각들이다.
다시 구른다.
구름이 압축해 오고
검은 흙들이 하늘을 향해 마주 섰다.
보내온 기억들을 하늘로 돌려보낸다.
/2008년 11월 20일 시인정신 발표작
- 봄이 되면 이 아픔에서 깨어나리오 -
세상에 연초록 봄빛이 찾아들면
제일 먼저 일어나리오.
제일 먼저 일어나서
온 세상에 연분홍 물감을 퍼뜨리고
한 가닥 한 줄기로 피어나는 꽃을 보면
그때사 뒤늦은 성불(成佛)의 길을 물으리오.
그리하여 가슴을 뚫고 일어나는 사랑
한 가닥 한 줄기를 풀어서
이 나라 강산 우리 님 살아가는
작은 세상에 남기면 되는 것을
봄이 되면
이 아픔에서 깨어나면 되는 것을.
/2010년 2월 13일 시인정신 발표작
- 비오는 창가 -
저것은 눈물일 수 없다.
가닥가닥 은실처럼 갈라져
산지사방으로 흩어지는 갈잎 무성한 갯가.
꽃을 달고 순백으로 받쳐 오르는 메밀밭 배경은 같을지라도
체온도 없고
원망과 그리움의 간기마저 제대로 배이지 않은 채
뿌려지는
진실 같지 않은 것은
눈물일 수 없다.
다만 병동처럼 격리된 유리창 이쪽으로
마구 몰려오는 까마귀 울음소리 같은 집요함.
그래서 적셔지는 나의 슬픔은
눈물 같은 진실일 수 있다.
/2009년 9월15일 시인정신 발표작
- 봄 -
이 봄
그대 없었으면 어떻게 견뎌내고 있을까.
어젯밤은
꽃잎에 닿은
하얀 달빛마저도
바알갛게
붉어져 가데.
/2009년 4월 9일 시인정신 발표작
- 모닥불 -
오직
빛으로
인간을 탐했으니
당연한 최후
저기 시린 어두운 땅
피기도 전에 꺾인 꽃송이들
어둠이 다가올수록
돌 틈 모진 바위뿌리로 자라나
굵은 한 줄기 비처럼
떨어지는
불똥 같은 유성(流星)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이다.
/2006년 9월 29일 시인정신 발표작
-동천(冬天)-
살아야 한다고 하길래
끝없이 하늘만 바라보았는데
함께
날아온 수많은 새들
하나씩
보이지 않는구나
/2005년 11월 16일 시인정신 발표작
- 갈대 -
비워버리면 회색인 것을
강변 갈대숲을 보고 알았네
진초록으로 물들던 날들이여
누워버리면 회색인 것을
일으켜 세웠던 것
욕망의 심층(心層)에 술밥처럼 쌓이던 달빛도
그믐에 이르면 저 홀로 삭히고 간다는 것을
새들도
갈망하던 것을 얻고 나면
들꽃처럼 넘어진다는 것을
비인 들판이여
타고 남는 것은 모두 회색인 것을
보내고 남아있는 회색빛 고독
꿈도 애욕도 미움도 없는 것
머리 위에 하늘거리는 갈꽃의
풍경(風磬)소리를 듣고 나는 알았네
/2005년 11월 30일 시인정신 발표작
세밑에서
이때쯤이면
당신이 나를 기다리는 들길로 가야겠지요.
마른풀들의 황금빛 향기가 널리 널리 퍼져가는 들판에서
두 개의 그림자로 만나는
우리는
아마도 철 늦은 사랑이라 해야겠지요.
눈보라가 치고
이렇게 겨울이 깊숙이 익어가는 12월이 오면
당신이 그리워지는 이때쯤,
아니 어느 때쯤이라 해도
당신이 나를 기다리는
거기 그 들길로 가야겠지요.
/2009년 겨울을 보내며
동시(童詩)
<제13회 공무원문예대전 동시 부문 행정안전부장관상 : 동상>
살구꽃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은
높은
하늘에
꽃구름 한 점 올려놓았다.
뭉게뭉게 구름처럼
송이송이 활짝 핀 꽃
손을 쭉 뻗어도
닿지 않은
높은
하늘에
꽃구름 한 점 그려 넣었다.
나무와 친구
나무는
날씨가
따뜻해지면
우리에게
꽃을
보여준다.
친구는
마음이
따뜻해지면
우리에게
꿈을
보여준다.
봄비 한 모금
똑딱똑딱
봄비가 내리고 있어요.
봄비 한 모금 꿀꺽
뿌리 한 자락 쑤욱
봄비 한 모금 꿀꺽
새잎 한 웅큼 쏘옥
봄비 한 모금 꿀꺽
줄기 한 둘레 불쑥
봄비 한 모금 꿀꺽
예쁜 꽃 송이송이 활짝
똑딱똑딱
봄비가 내리고 있어요.
벚꽃
봄에 피는
꽃을 생각하면
벚꽃이 생각나요.
바람 때문에
눈처럼 날아가는
벚꽃 참 예쁘지요.
길을 걸으며
가로수를 바라보면
벚꽃이 생각나요.
동무 삼아
함께 걷던 길
벚꽃 참 정답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