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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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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스크랩 14강. 님이 오는 소리
jtr28114 추천 0 조회 1 13.07.26 14:1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4강. 님이 오는 소리 (아가 3:6-11)

 

아 3:6-11= “연기 기둥과도 같고 몰약과 유향과 장사의 여러 가지 향품으로 향기롭게도 하고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인고 7 이는 솔로몬의 연(輦)이라 이스라엘 용사 중 육십 인이 옹위하였는데 8 다 칼을 잡고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밤의 두려움을 인하여 각기 허리에 칼을 찼느니라 9 솔로몬 왕이 레바논 나무로 자기의 연을 만들었는데 10 그 기둥은 은이요 바닥은 금이요 자리는 자색 담이라 그 안에는 예루살렘 여자들의 사랑이 입혔구나 11 시온의 여자들아 나와서 솔로몬 왕을 보라 혼인날 마음이 기쁠 때에 그 모친의 씌운 면류관이 그 머리에 있구나”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술람미가 님이 오는 소리에 기뻐하였듯이 우리도 주님이 오시느 소리를 듣고 기뻐 할 수 있게 하옵소서. 잠시 잠간후면 오신다고 하신 주님을 소망하면서 믿음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보편적으로 사람들은 어둠을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밤은 분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둡다는 것은 사물을 분간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분간이 안 되면 사람은 불안해요.

낮엔 사람을 만나도 두렵지가 않은데 밤엔 사람을 만나면 두려워요.

분간이 안 되기 때문이에요.

눈에 확실히 들어오고 분간이 되면 두려움이 없는데, 분간이 안 될 땐 본능적으로 공포감이 밀려옵니다.

 

성경은 진리를 빛이라 하고 비(非) 진리를 어둠이라고 합니다.

죄를 어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죄인을 어둠에 속하였다고 합니다.

 

죄를 어둠이라고 하고 또는 타락이라고 해요.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펴면 제일 먼저 창세기가 나옵니다.

창세기 1장 1절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운을 뗍니다.

 

편의상 창세기 1장 1절이 하나님이 세상에 던진 최초의 말씀이라고 합시다.

그런데 어둡고 칙칙하게 출발합니다.

천지를 창조 하였다고 하는데 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를 보면 우울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1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했다고 하고선

이어서 2절에서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고 합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아니 천지를 창조하실 정도의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이 만든 세상치고는 좀 허술하지 않나요.

뭔가 미완성된 것처럼 보이지요.

질서정연하게 만들지 않고 무질서하게 만들어 놓았잖아요.

 

마치 어린 아이들 방처럼 말이에요.

어지럽혀져 있어요.

온갖 장난감과 잡동사니가 한데 어우러진 난장판과 같잖아요.

 

우리 인간들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은 완전하고 완벽하고 빈틈이 없는 분으로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창세기를 열면 하나님이 만든 땅이 혼돈하다고 합니다.

 

혼돈 하다는 말은 뒤죽박죽 섞여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공허하다고 합니다.

이는 텅 비어 있다는 말이에요.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는 말은 옳고 그름을 분간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예전에 어느 집에 심방을 갔는데 전 기절 하는 줄 알았어요.

집은 엄청 넓은데 방이고 거실이고 한마디로 개판이에요.

어린 아이들 장난감으로 온 방이 어질러져 있어서 발 디딜 틈이 없어요.

거기다가 강아지는 깽깽거리고 돌아다니지요.

 

아이들을 이 방 저 방으로 뛰어다니면서 타잔놀이를 하지요.

몇 놈들이 마치 올림픽 경기를 중계 방송하는 각국 방송사 앵커들처럼 서로 소리는 고래 고래 지르는데!

정신이 사나워서 무슨 말을 하고 왔는지 모르겠더라고요.

 

제가 한마디 했어요.

아이들을 방목으로 잘 키우시네요? 라고!

제가 워낙 인품이 고매하다(?)가 보니 그렇게 점잖은 말을 했습니다만!

이게 어디 고매한 말인가요?

 

그 모습을 보고 야! 이 집은 창세기 1장 2절이네!

혼돈과 공허와 흑임이 깊음 위에 있구나!

그래서 주여! 이 집에 주의 말씀이 오셔서 빛과 어둠을 갈라내야 하겠습니다! 라고 했어요?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우리 집도 동일해요.

 

암튼 창세기를 펴면 하나님이 만든 세상이 이 집처럼 엉망진창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흑임이 깊음 위에 있고 공허하다는 것을 타락이고 죄의 모습이에요.

그리곤 3절부터 질서정연하게 각각 제 자리로 찾아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은 죄와 타락을 먼저 이야기 할까요?

성경을 펴면 하나님께선 하루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혹은 둘째 날이니라! 라고 하여 어둠을 먼저 언급을 하잖아요.

 

성경은 어둠은 죄(罪)의 영역이고, 빛은 의(義)에 영역이라고 합니다.

그럼 저녁을 타락이고 죄(罪)의 세계라고 한다면, 아침은 구원이고 의(義)에 세계가 되겠지요.

이렇게 되면 죄(罪)가 먼저이고 의(義)가 나중이 되지요.

 

성경은 왜? 이런 구도로 말을 시작하고 있을까요?

이는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흔히들 창세기를 천지창조 이야기로 보지요.

 

그런데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창조 이야기는 만물이 만들어진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에요.

성경은 천지 창조를 예수님을 통하여서 구원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이는 만물을 만든 창조 이야기가 아니고 구원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래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은 타락이 먼저 등장하는 겁니다.

 

중요한 말을 했으니 잘 이해하세요.

 

창세기 1장의 창조 사역을 보더라도 창조된 세계가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고 합니다.

세상이 혼돈하고 공허하잖아요.

빛과 어둠이 뒤섞여 있잖아요.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등장합니다.

흑암 속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라고 외칩니다.

이는 하나님이 “말씀 하시되” 라는 말입니다.

 

고요하고 적막한 흑암이라는 세상에 하나님의 언명(言令)이 떨어집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고요하던 흑암이 용트림을 합니다.

흑암 속에서 뭔가 튀어 나옵니다.

마치 흑암이 찢어지듯이 뭔가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더니 흑암 속에서 뭔가 툭 터져 나옵니다.

흑암이 품고 있던 빛이 툭 터져 나오는 겁니다.

흑암이 빛을 삼켰다가 토해내듯이 갑자기 빛이 툭~하고 토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흑암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 흑암 속에 빛이 가두어져 있었던 겁니다.

말씀이 떨어지니 흑암 하나라고만 여겨지던 것이 둘로 쫙~ 나누어집니다.

어~ 천국과 지옥이 있었네!

 

마치 괴물이라는 영화에서처럼 고요하던 강물 속에서 갑자기 괴물이 용솟음 하듯이 쑥~ 올라오는 것과 같아요.

섬뜩하고 전율이 오지요.

 

이건 마치 예수님이 무덤 앞에서 나사로야 나오너라! 고 말씀하시자 무덤이 갑자기 입을 쫙~ 벌리더니 삼켰던 나사로를 툭하고 토해내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요나를 삼켰던 물고기가 우웩~ 하면서 요나를 토해낸 것과 같아요.

 

이 세상의 구조가 그래요.

우리가 보기엔 하나인 것 같지만 둘이에요.

마치 흑암이 깊음 중에 있어 어둠이 전부인줄 알았는데 그 속에 빛이 있었던 겁니다.

하나가 아니고 둘이었던 겁니다.

 

어둠인 전부인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가라사대” 라고 외치자 세상이 쫙~ 갈라집니다.

“가라사대” 가 말씀이에요.

 

그런데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면 “가라사대” 라는 말씀이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이 또 다른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러다가 그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오셨어요.

 

고요하던 이 세상에 말씀이신 하나님인 예수님이 오시자 용트림을 시작합니다.

갑자기 마귀가 난리를 칩니다.

귀신들이 왜 왔냐고 신경질을 냅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이 오시자 세상이 두 쪽으로 쫙~ 갈라지는 겁니다.

가는 곳마다 빛과 어둠처럼 쫙~ 갈라지는 거예요.

세상이 하나가 아니고 둘이었던 겁니다.

 

이건 마치 교회 안에 복음을 전하면 두 편으로 갈라지는 것과 같아요.

모두가 한편인 줄 알았는데 복음을 전하니 두 편으로 갈라지는 겁니다.

모든 교인이 하나인줄 알았는데 둘이었어요.

 

결국 창세기는 예수님 이야기인 겁니다.

예수님이 그러시지요.

모든 성경은 자신에 대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그럼 창세기도 성경 중에 하나이니 예수님 이야기인 겁니다.

비록 만물을 창조한 이야기이지만 그 만물이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가 된 것이잖아요.

그러니 만물의 창조 이야기도 결국엔 예수님의 구원 이야기로 풀어지는 겁니다.

 

성경 속에 나온 이야기는 그 어떤 이야기라 할지라도 전부 예수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보세요.

예수님과 연관된 이야기란 말입니다.

우리의 구원 이야기란 말입니다.

 

성경이 구원 이야기가 되려면 죄가 나오고 피가 나오고 구원이 나오겠지요.

그럼 성경 그 어디를 펴도 죄 문제가 나오고 피 이야기가 나와야겠지요.

맞아요.

성경 어디를 펴도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가 나와야 올바른 해석인 겁니다.

 

암튼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갈라내는 일을 하십니다.

 

고요하던 세상에 말씀이 활동을 합니다.

말씀이 운동하자 고요하던 세상이 꿈틀 거립니다.

빛과 어둠이 갈라집니다.

 

빛과 어둠만 섞여 있는게 아닙니다.

물도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궁창 윗물과 궁창 아랫물로 갈라냅니다.

 

땅과 바다도 섞여 있습니다.

어김없이 하나님이 땅과 바다를 갈라냅니다.

셋째 날까지 혼돈된 것을 정리정돈 하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갈라내는 것을 창조라고 합니다.

우리가 아는 창조와 다르지요.

우리가 생각하는 창조는 뭘 만드는 것을 생각하잖아요.

 

만약에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가 뭘 만드는 것을 말하고자 했다면 빛과 어둠은 언제 만들었으며!

궁창 윗물과 아랫물은 언제 만들었으며!

땅과 바다는 언제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했어야 해요.

 

그러나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 했다고만 하고 실제 창조 이야기는 갈라내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이는 뭘 만드는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 아니고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하실 일을 만물을 가지고 예표(豫表)적으로 말해주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이렇게 혼돈된 세상을 둘로 갈라낼 것이란 말을 해 주고 있는 거예요.

실제 예수님 오셔서 창세기 1장의 창조 사건을 일으켜서 세상을 두 쪽으로 갈라내셨어요.

이걸 심판이라고 해요.

 

이렇게 심판하는 분을 주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심판 하는 일을 주(主)의 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뭐냐 하면 세상을 심판하는 일이에요.

 

물론 창세기 1장의 창조 사역엔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셋째 날부터는 만들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는 섞여 있는 것을 갈라내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선 하루의 시작을 저녁부터 하는 겁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요.

이는 죄에서 구원하는 것을 말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말씀이신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불러내는 일을 하시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제자들에게 어둠에서 기이한 빛으로 불러냈다고 합니다.

 

너희는 빛에 아들들이라고 하잖아요.

구원받은 자를 일컬어 너희는 이제 빛에 속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곤 세상을 어둠이라고 합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불러냄을 당한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처음 창조가 된 세상은 구원을 필요로 창조가 되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구원을 하기 위하여 창조가 된 것입니다.

 

생소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이에요.

만물은 구원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어요.

아담과 하와도 구원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어요.

 

그래서 아담과 하와를 처음부터 영생하는 자로 창조하지 않고 영생을 위한 자로 창조한 겁니다.

어떻게 영생 하게 하셨나요?

이는 생명과를 먹음으로서 영생하도록 하셨어요.

생명과를 안 먹으면 죽은 자에요.

 

아담이 선악과를 먹어서 죽은 것이 아니고 생명과를 안 먹어서 죽은 겁니다.

먼저 생명과를 먹었으면 선악과를 먹어도 안 죽어요.

왜냐하면! 생명과가 선악과를 이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랬어요.

예수님은 이미 영생 하시는 분이에요.

그러니 죽어도 죽음이 예수님을 가두지 못하고 토해내는 겁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부활하게 되어 있어요.

죽음이 예수님을 받아 두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부활 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그 속에 영생을 담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죽어도 다시 산다고 걱정 하지 말라고 한 겁니다.

죽음이 우리를 가두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에덴동산에서 생명과는 예수님을 예표해요.

하나님이 아담에게 생명과를 먹으란 말은 예수 믿으라는 말과 같아요.

그러니 아담도 예수 믿고 구원 받도록 창조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누구든지 내 살과 피를 먹어야 영생 한다고 했잖아요.

에덴동산에선 생명과를 먹어야 영생한다고 했잖아요.

그럼 생명과가 예수님과 같은 거지요.

그래서 구약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보여주는 그림자라고 하는 겁니다.

 

이해되시지요.

그럼요.

 

예수님 이야기로 풀면 성경이 어렵지 않아요.

그냥 술술 풀려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풀면 아주 아주 쉬워요.

 

영생은 예수님에게 만 있어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다고 하지요.

예수님 안에 영생하는 생명이 있어요.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이 생명을 주시려고 오셨어요.

예수님이 주신 생명을 받는 것을 구원이라고 해요.

그러니 구원은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겁니다.

예수님 이외는 그 누구도 생명을 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세상은 예수님에 의하여 구원을 받도록 창조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는 세상은 예수님의 구원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창조 이야기를 갈라내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 아래서 태어나는 우리를 예수님께서 구원해 내는 것도 다 이와 같은 이치 때문입니다.

우리를 죄 아래서 나게 하신 후에 예수님에 의해서 갈라냄을 당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일을 하시도록 우리가 죄 아래서 태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도 죄 아래서 태어나는 저녁이 먼저이고 구원받는 아침이 나중인 겁니다.

어둠 아래서 태어남이 먼저이고, 빛 안으로 불러냄을 당하는 것이 나중인 겁니다.

비로서 저녁이 되어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 되는 것이 우리 구원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재미있지요.

 

하나님께선 죄로 헝클어진 세상을 예수님을 보내서 정리정돈을 하게 하셨어요.

마치 재활용품 분리수거 하듯이 집어넣을 것은 넣고 버릴 것은 버리는 겁니다.

이를 두고 심판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심판주로 보내셨습니다.

 

이 세상은 예수님의 타작마당이에요.

그래서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시고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신다고 했어요.

예수님은 곡식과 가라지를 구별하고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냈어요.

지금도 갈라내고 있구요.

 

자 이걸 우리에게 적용해 봅시다.

창세기 1장 2절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에요.

우린 예수님을 만나기 전 까지만 해도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비 진리인줄 모르고 살았어요.

 

내가 누구인줄 몰랐어요.

내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줄 몰랐어요.

그러니 “나” 라는 땅은 혼돈하고 흑암의 깊음 중에 있었던 겁니다.

 

인간들은 흑암의 깊음 속에 있기 때문에 사는게 두려운 겁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가 장악하고 있으니 두려운 거예요.

인간의 마음은 밤이에요.

어둠이에요.

그래서 일평생 두려움에 쫓기고 사는 겁니다.

 

두려움이란? 마음으로부터 와요.

인간이 쫓아 낼 수가 없어요.

어둠은 퍼 낸다고 해서 퍼 내 지지를 않아요.

 

어둠을 쫓아내는 것은 오직 하나 빛이 들어와야 해요.

빛만 들어오면 어둠은 순식간에 물러가요.

그 빛이란 다름 아닌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없는 사람은 밤이에요.

그 속에 어둠이 지배하기 때문에 두려운 겁니다.

두려움은 예수님을 만나면 사라져요.

 

이런 이야기가 바로 아가(雅歌)서의 술람미 이야기에요.

 

지난 시간 술람미는 꿈에 신랑을 잃어버렸다고 했어요.

신랑이 없으니 불안하고 두려운 겁니다.

그래서 몽유병환자처럼 찾아다녔어요.

그러다가 신랑을 만나자 두려움이 사라졌어요.

 

신랑을 찾아서 다시는 빼앗기지 않겠다고 꼭 붙잡았어요.

어미 집으로 들어가서 사랑을 했어요.

어미 집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으니 참고하세요.

 

인간이란?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럼에도 뭔가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살아가는게 인간입니다.

참 어리석지요.

 

여러분도 꿈을 꿔 보셔서 알지만 꿈은 순서가 없어요.

지금 술람미의 꿈도 그래요.

아가(雅歌)서가 그래서 난해한 겁니다.

 

논리적으로 보면 이건 뒤죽박죽이에요.

이 말했다! 저 말했다! 그래요.

이게 다 꿈이라서 그래요.

 

꿈은 신약적 의미에서 계시(啓示)에요.

묵시 이야기란 말입니다.

묵시 세계엔 시간과 공간 개념이 없어요.

묵시는 사건중심으로 말해요.

 

그래서 꿈처럼 뒤죽박죽인 겁니다.

성경은 묵시이야기에요.

그래서 사건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성경을 시간 순서로 말하지 않고 사건 중심으로 기록한 것도 다 이 때문이에요.

 

아가(雅歌)서도 그래요.

그러니 앞뒤 두서가 없는 겁니다.

언제는 만났다고 하고!

언제는 헤어졌다고 하고!

만났다 싶으면 헤어져 있고!

헤어져 있다 싶으면 만나고 있어요.

 

오늘 본문도 지난 시간과 모순이에요.

지난 시간엔 신랑을 잃어버렸다가 찾았다고 했어요.

이젠 다시는 안 잃어버린다고 했어요.

꼭 붙잡았다고 했어요.

 

그런데 느닷없이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오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붙잡고 있는 신랑은 누구이고!

지금 오는 신랑은 또 누구입니까?

 

신랑이 둘이란 말인가요?

아니에요.

신랑은 분명히 하나에요.

그런데 둘로 나타나고 있어요.

 

이게 묵시 세계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신비에요.

영적으로만 이해가 되어요.

이성으로는 도무지 맞지가 않아요.

 

예수님이 그러지요.

성령이 오면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다고 하지요.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영원히 있겠다고 했지요.

 

그리곤 훌쩍 먼 길을 떠났어요.

다시 오마 약속을 주고선 하늘나라로 떠났어요.

분명히 영원토록 우린 안에 계신다고 하면서 떠나셨다구요.

이겐 논리적으로 맞지 않아요.

 

내가 너희 안에 있다!

그런데 다신 온다!

이게 어찌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이해 할 수가 있겠어요.

그래서 인간의 지식으로 성경을 보면 하나도 이해가 안 가는 겁니다.

 

그런데 이 장난 같은 이야기가 성령을 받으면 다 이해가 된다니까요.

그래서 술람미가 신랑과 어미 집에서 들어가 사랑을 하면서도 저 멀리서 오는 신랑을 보고 있는 이야기가 이해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은 너무도 황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가능하면 사족을 금할까 합니다.

황홀한 기분에 흥이 깨어질까봐서 기승전결로 짧게 끝낼게요.

 

오늘 본문은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오는 모습이에요.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왕궁으로 입성하는 내용입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의 재림을 연상케 하는 내용이에요.

장차 예수님이 재림 하실 모습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술람미가 신랑을 꼭 붙잡고 있으면서도 신랑이 자기를 데리러 오는 모습을 보고 있어요.

이건 마치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과 같아요.

자기 안에 예수님이 있으면서도 장차 나를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려고 재림하시는 그 예수님을 기다라고 있는 것과 같아요.

 

예수와 함께 살면서도 예수님을 기다리는 이 모순!

이게 신앙이에요.

이게 믿음 안에서만 이해가 되어요.

 

그러니 술람미의 모습이 곧 우리 모습인 겁니다.

신랑과 사랑을 하면서도!

신랑을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고 꽉 붙잡고 있으면서도!

 

그러면서도 자신을 왕궁으로 데리러 오는 신랑을 보고 있는 겁니다.

참 재미있지요.

이런 것이 이해가 되면 가슴이 설레이고 흥분이 되고 신이 나요.

 

저만 그런가?

여러분도 그렇지요.

그럼요.

그래야지요.

그래야 한 성령 안에서 교제가 되지요.

 

자 그럼 신랑이 오는 모습을 봅시다.

본문을 봅시다.

 

아 3:6= “연기 기둥과도 같고 몰약과 유향과 장사의 여러 가지 향품으로 향기롭게도 하고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인고”

 

먼 들판에 연기 기둥을 휘날리면 한 무리가 달려옵니다.

이는 아주 귀한 분이 온다는 뜻입니다.

누군가 가만히 보니 신랑이 오는 모습입니다.

 

아주 시끌벅적하게 오고 있어요.

향기로운 향내가 천지를 진동을 하면서 오고 있어요.

당시엔 왕의 행차 때에 각종 향을 태워 연기로 향기를 흩날렸다고 합니다.

 

향을 피우면 연기가 마치 야자수처럼 기둥이 되어서 쭈욱~ 올라가다가 우산처럼 옆으로 확 퍼져 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왕의 행차를 알렸어요.

그럼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고 아! 귀한 분이 오시는구나! 를 감지하고 영접할 준비를 했어요.

 

왕이 행차하는 주변엔 향긋한 향냄새로 진동을 했어요.

향냄새가 연기처럼 바람을 타고 온 세상에 퍼져 나갔어요.

이는 왕의 강림을 온 세상에 알리는 겁니다.

 

이런 연기가 지성소에서도 피어났어요.

7월 10일 대 속죄일이 되면 대 제사장이 법궤 위에 피를 뿌리면 하나님께서 그 피를 흠향하셨다는 뜻으로 지성소에 연기로 가득하게 하였어요.

밖에서 보면 연기가 기둥처럼 하늘로 치솟는 겁니다.

 

하나님이 구름 기둥으로 임재하신 것은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 해 주셨다는 말이에요.

그럼 백성들은 환호성을 지릅니다.

야~ 죄 용서함 받았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하고 제사를 지내가 온 성전에 연기가 가득하여서 제사장들이 일을 하지 못하였다고 했어요.

이처럼 연기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해요.

 

솔로몬이 연기 기둥 가운데 오는 것은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구름 기둥을 앞세우고 법궤를 메고 가나안으로 행진하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가나안 땅은 천국의 모형이에요.

 

광야에 백성들은 멀리서 구름 기둥이 떠오르는 것을 보면 떠날 준비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구름이 움직이면 그 구름을 따라 갔어요.

구름은 하나님의 동행하심에 징표였어요.

 

지금 솔로몬이 그 연기 기둥으로 술람미에게 알리는 겁니다.

여보~ 나 지금 당신 데리러 가고 있어!

잠시만 기다려!

곧 도착할게!

 

그러니 저 멀리서 연기 기둥이 솟아난다는 것은 왕이 행차한다는 것입니다.

술람미는 연기 기둥을 보고선 환호하는 겁니다.

야호! 우리 신랑이 온다!

내 낭군이 나를 데리러 온다고 흥분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동네 여자들에게 나와 보라고 난리입니다.

봐라! 우리 신랑이 오고 있잖아!

내가 뭐라 그랬어!

우리 신랑은 반드시 날 데리러 온다고 했지!

 

너희들 내가 우리 신랑이 날 데리러 온다고 하니 콧방귀 켰지!

저기 봐!

저기~ 저! 연기 기둥 보이지!저 연기 기둥이 우리 신랑이 온다는 싸인이야!

이제 내일이면 도착할거야!

어째 흥분 되지 않나요.

전 엄청 흥분이 되는데!

 

솔로몬이 술람미를 처음 만나 사랑을 할 때는 조용히 했어요.

사랑을 하고선 다시 온다는 약속만 주고 갔어요.

술람미는 그 약속 하나만 붙잡고 오매불망 기다렸어요.

그동안 예루살렘 여자들로부터 숱한 핍박을 받았어요.

 

자기 주제도 모르고 왕을 사랑하고 있다고 미친 여자 취급도 많이 받았어요.

엄청만 수모와 모멸감을 받고 살아왔어요.

신랑이 자신을 데리러 온다는 그 약속하나만 믿고 말이에요.

 

숱한 날을 눈물로 밤을 지새웠어요.

신랑이 주고 간 그 약속 하나 부여잡고 북받쳐 오는 설음을 이겨냈어요.

그런데 그 신랑이 약속대로 오고 있는 겁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의 말대로 허황된 꿈처럼 여겨졌던 그 약속이 이제 실상으로 드러나고 있어요.

눈물이 나지 않나요.

 

술람미의 모습은 우리 성도의 모습이에요.

우리도 다시 온다는 그 약속 하나 달랑 붙잡고 살고 있어요.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부도수표가 될지도 모르는 그 약속 말이에요.

 

저도 이 약속 하나 때문에 이렇게 복음 전하고 있어요.

분명히 다시 온다고 하셨거든요.

예수님께서 내가 다시 와서 나 있는 곳에서 영원히 함께 살게 하시겠다고 약속을 했다구요.

전 그 약속 하나만 믿고 살고 있는 겁니다.

 

달려라 하니 처럼!

슬퍼도 달리고!

아파도 달리고!

괴로워도 달렸어요.

달려온 세월이 여기까지 왔어요.

 

우린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어요.

그런데 달랑 성경 하나만 받았어요.

그런데 그 성경이 나에게 주신 약속임이 믿어지는 겁니다.

믿어지기 때문에 술람미처럼 신랑을 기다리는 겁니다.

 

그런데 그 약속이 이제 이루어지는 순간이에요.

얼마나 기쁘고 신이 나고 황홀합니까!

술람미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인 겁니다.

술람미의 기쁨이 곧 우리 모두의 기쁨인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아가(雅歌)서를 통해서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곧 예수님께서 가신 그대로 재림 하실 것입니다.

솔로몬처럼 천지진동하면서 강림하실 겁니다.

솔로몬의 행차는 곧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 천사장의 호령과 나팔소리로 강림하는 것과 같아요.

 

초림으로 오신 예수님은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도록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어요.

이는 자기 백성의 구원자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초림으로 오신 초라한 예수님은 자기 백성만 알아보았어요.

 

초림으로 오신 예수님은 나사렛 촌놈으로 오셨어요.

자기 백성만 나사렛 촌놈이 메시야임을 알아보았어요.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은 그냥 나사렛 촌놈이었어요.

그래서 우습게 여긴 겁니다.

 

그러나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천지를 진동하시면서 오세요.

천사장의 나팔소리를 울려 퍼지게 하면서 말이에요.

 

아무리 설교가 길어도 이건 성경을 찾아보고 갑시다.

 

마 24:30-31=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31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살전 4:16-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예수님께서 재림을 하실 때에는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일 겁니다.

마치 솔로몬이 연기 기둥 가운데서 오는 모습처럼 예수님도 구름타고 오실 겁니다.

천사장이 호령을 합니다.

 

에이~ 물렀거라!

만왕의 왕이 행차하신다!

그 앞엔 천사들이 하나님의 행차를 알리는 나팔을 울려 불 것입니다.

나팔 소리에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자기 백성들은 다 듣습니다.

 

천사들을 온 세계에 보내서 그 택하신 자들을 다 찾아내십니다.

하나님의 나팔이 울려 퍼지면 자기 백성들을 자기를 부르는 소리로 듣고 다 예수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야~ 우리 왕이 드디어 오시는구나!

호산나 하면서 환호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7대 절기 중에서 나팔절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이스라엘에겐 7대 절기가 있어요.

7대 절기는 제 블로그에 있으니 참고 하세요.

꼭 읽어보세요.

 

7대 절기는 모두가 예수님의 일생을 담고 있어요.

 

봄 절기엔 유월절과 무교절과 초실절이 있어요.

이는 예수님의 초림을 상징해요.

 

여름 절기엔 칠칠절이 있어요.

칠칠절은 성령 강림을 말해요.

이는 예수님이 현재 성령 안에서 일하시는 모습이에요.

 

칠칠절 후 넉 달 동안 농사를 지어요.

 

그리고 가을 절기에 나팔절과 속죄일과 초막절이 있어요.

가을이 되면 농사를 다 짓고 수확하여 곡간에 들이고 긴 안식에 들어가요.

이는 장차 예수님의 재림을 상징해요.

 

농사 절기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성도를 구원하는 모습을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초림은 봄 절기와 같아요.

마치 씨를 뿌리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예수님은 한 알의 밀알이 되셔서 유월절 날에 유월절 어린양이 되셔서 죽으셨어요.

 

그리고 무교절에 무덤 속에 계셨어요.

무덤 속에 들어 가셔서 자기 백성들을 찾아 내셨어요.

그리고 초실절 날에 부활을 하셨어요.

 

그리곤 50일 후에 칠칠절이라고 하는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어 주셨어요.

성령이 임하자 온 세계에 복음이 전파되고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들이 벌어지는 겁니다.

넉 달 동안 농사를 짓는 겁니다.

넉 달 농사 기간은 성령 강림으로 새 언약 백성들을 구원하는 시기에요.

 

이제 넉 달 농사가 끝나면 가을 추수 절기가 되어요.

7월 1일 날이 되면 제사장이 성전 꼭대기에서 나팔을 울려 불어요.

빠~아~빠앙~ 하고 길게 울려 붑니다.

 

그러면 넉 달 동안 각자 흩어져서 농사를 짓던 백성들이 곡식을 수확하여 곡간에 들이고 하나님께 드릴 헌물을 가지고 다 성전으로 다 모여요.

백성들은 넉 달 동안 농사를 지은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들고 성전으로 모여요.

제사장은 그 헌물들을 가지고 큰 잔치를 벌려요.

 

나팔 절은 주의 재림의 날이에요.

나팔 절에 제사장들이 부는 나팔은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 천사들이 불 것입니다.

우린 그 나팔 소리를 듣고 주님을 영접하게 되는 겁니다.

흥분이 되지요.

이 맛에 예수 믿는 겁니다.

 

이럴 때 부르라고 168장 찬송이 있어요.

찬송은 이럴 때 부르라고 있는 것이니 한번 불러보고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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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하나님의 나팔소리 천지진동 할 때에 예수 영광중에 구름타시고

천사들을 세계만방 모든 곳에 보내어 구원 얻은 성도들을 모으리

 

(후렴)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부를 때에 잔치 참여하겠네

 

2절) 무덤 속에 잠자던 자 그때 다시 일어나 영화로운 부활승리 얻으리

주의 택한 모든 성도 구름타고 올라가 공중에서 주의 얼굴 뵈오리

 

3절) 주님 다시 오실 날을 우리 알 수 없으니 항상 깨어 기도하고 있어서

기쁨으로 보좌 앞에 우리 나가서도록 그 때까지 참고 기다리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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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 신나지요.

그래요.

예수 믿는다는 것이 신나는 일이에요.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는 비밀히 오시지 않고 공개적으로 오세요.

아주 영광중에 오신다구요.

이땐 신자도 보고 불신자도 보아요.

 

계 1:7절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보세요.

각인의 눈이 그를 본다고 하지요.

예수를 찌른 자들도 본다고 하지요.

땅에 모든 백성이 애곡 한다고 하지요.

이 땐 예수 안 믿는 자들은 작살나는 겁니다.

 

십자가 복음을 방해하고 십자가 도를 증거하는 자들을 이단이라고 하던 놈들은 그 땐 난리가 날 겁니다.

마치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시온의 여자들도 다 나와서 왕이 오는 것을 보게 되어요.

 

신자들은 야호~ 할렐루야! 하면서 환호성을 지르지만!

우리더러 이단이라고 하던 자들은 그때 죽을 맛입니다.

불신자들은 땅을 치면서 통곡을 할 것입니다.

 

그 위엄에 사로잡혀서 얼음처럼 굳어져 두려워 떨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울고불고 애통할 것입니다.

 

마치 2002년 월드컵 8강전에서 우리나라가 스페인을 꺾고 온 나라가 난리를 치던 모습과 같을 겁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좋아서 환호성을 치르지만!

스페인 선수와 국민들은 머리를 감싸고 애통해 하는 모습과 흡사할 것입니다.

 

참으로 황홀하지 않나요.

이런 약속이 있기에 예수 믿는 재미가 나는 겁니다.

바울이 이걸 보았기 때문에 환란은 장차올 영광과 족히 비교 할 수가 없다고 했어요.

오늘 술람미를 데리러 오는 솔로몬의 왕림을 통해서 잠깐 맛이라도 보시기 바랍니다.

 

보세요.

오는 모습이 역전의 용사들이 허리에 칼을 차고 왕을 옹위하면서 오잖아요.

 

아 3:7절 “이는 솔로몬의 연이라 이스라엘 용사 중 육십 인이 옹위하였는데 8 다 칼을 잡고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밤의 두려움을 인하여 각기 허리에 칼을 찼느니라”

 

솔로몬을 호위무사들이 대동하고 와요.

솔로몬을 호위하는 용사 육십 인은 최 정예 멤버에요.

당시 솔로몬 궁궐엔 왕의 호위무사가 육백 명이 있었어요.

 

그중에서 난다 긴다 하는 자들만 엄선했어요.

왜? 최고의 무사들만 대동하고 올까요.

이는 원수들을 때려 부수기 위함이에요.

자신의 신부인 술람미를 괴롭힌 자들을 징벌하기 위함입니다.

 

장차 예수님 재림 하실 때도 이런 모습으로 오실 겁니다.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에는 천사들이 호위하고 와요.

요한계시록 19장을 봅시다.

 

계 19:11-16=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2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15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예수님이 백마를 타고 오십니다.

백마는 승리자가 타는 말이에요.

이제 만왕의 왕으로서 오세요.

 

그런데 그 뒤를 수많은 하늘에 군대들이 예수님처럼 백마를 타고 따라와요.

맹렬한 진노를 머금고 와요.

이는 세상을 심판하러 오기 때문입니다.

 

초림 땐 구원 하러 왔지만!

물론 초림도 옛 언약은 종말을 고하게 하는 것이므로 심판의 성격은 있어요.

하지만 온 세계에 흩어진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입장에선 씨를 뿌리는 것과 같아요.

 

그러나 재림 땐 바다에 처 놓았던 그물을 끌어 올려서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로 분리합니다.

밭에 곡식을 추수하듯이 낫으로 쭉정이는 쳐내고 알곡은 모아서 곡간에 들여요.

초림 땐 긍휼의 주님으로 오셨지만!

재림 땐 무서운 심판의 주님으로 오세요.

 

그러니 호위무사들을 전부 날선 검으로 무장시켜서 대동하고 오는 겁니다.

복음을 폄훼하고 핍박한 자들은 곡(哭) 소리 날 겁니다.

원수 갚는 날이니 그럴 만도 하지요.

이때 우리를 이단이라고 하던 놈들은 전부다 굴비 엮듯이 엮어서 지옥으로 끌고 갈 겁니다.

 

반면에 자기 신부들에겐 위로의 신랑으로 오세요.

예수님께서 백마를 타고 재림을 하실 때 피 뿌린 옷을 입고 오시지요.

왜? 피 뿌린 옷을 입고 옵니까?

이는 자기 신부를 자기희생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에요.

 

화려한 복장으로 오지 않고 십자가에서 피 흘린 그 옷을 입고 오심으로서 긍휼과 사랑으로 신부에게 다가오는 겁니다.

피 뿌린 옷을 입고 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어요.

신부에겐 긍휼의 옷이지만, 자신을 찌른 자들에겐 분노의 옷이에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신부들은 피 뿌린 옷을 입고 오는 예수님을 통하여서 자신이 구원을 얻은 것은 전적인 예수님의 은혜이고 사랑임을 깨닫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모친이 씌워준 면류관을 쓰고 오는 겁니다.

 

아 3:11 “시온의 여자들아 나와서 솔로몬 왕을 보라 혼인날 마음이 기쁠 때에 그 모친의 씌운 면류관이 그 머리에 있구나”

 

솔로몬이 쓴 왕관을 오늘 본문에서 어머니가 씌워준 왕관이라고 합니다.

왜 솔로몬은 아버지가 준 왕관이 아니고 어머니가 씌워준 왕관을 쓰고 올까요?

그것은 솔로몬 왕의 출생의 비밀과 관련이 있어요.

 

지난 시간 술람미가 잃어버렸던 신랑을 찾고선 어미의 집 자기가 잉태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 사랑을 나누었다고 하였지요.

이는 곧 자신이 솔로몬에게 사랑을 받은 것은 솔로몬을 잉태케 한 그 사랑이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나 술람미는 사랑 받을 수 없는 사랑을 받았어요.

솔로몬은 적자(嫡子)가 아니고 서자(庶子)에요.

본처(本妻)에 자식이 아니고 간통으로 낳은 첩(妾)의 자식이라고요.

 

첩의 자식은 상속권이 없어요.

그런데 왕위를 계승했어요.

이건 모두가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신 증거에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입은 증거라고요.

 

그래서 솔로몬의 본래 이름도 “여디디아” 라고 지었어요.

“여디디아” 란? “사랑을 입은 자” 또는 “긍휼을 입은 자” 란 뜻이에요.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하나님께 긍휼을 입었기 때문이에요.

 

솔로몬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은 것은 곧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긍휼을 입은 자들이에요.

 

다윗이 밧세바를 본처보다 더 사랑했기 때문에 밧세바의 소생에게 왕통을 물려준 겁니다.

솔로몬은 엄마 때문에 왕이 된 겁니다.

그러니 솔로몬이 쓴 왕관은 어머니가 씌워준 왕관인 겁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긍휼로 왕이 되었다는 의미에서 어미가 씌워준 왕관을 쓰고 오는 겁니다.

이는 곧 술람미도 솔로몬처럼 긍휼을 입은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서자(庶子)가 왕이 되는 은혜를 입었듯이!

노예인 술람미를 왕의 신부로 맞이하는 것도 하나님께 긍휼을 입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신부를 사랑했으면 이런 것까지 세심하게 배려하고 있을까요.

행여 술람미가 미안해 할까봐서!

어머니가 씌워준 왕관을 머리에 쓰고 오는 겁니다.

나도 당신처럼 긍휼을 입은 사람입니다! 라는 표시로 말이에요.

 

신부는 초라한데 신랑이 화려하게 오면 신부가 기가 죽잖아요.

그래서 신부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신부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자신도 불쌍히 여김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려고 어미가 씌워준 왕관을 쓰고 오는 겁니다.

 

신랑과 신부는 동격이에요.

왕이신 신랑이 신부와 동격이 되려면 자신을 낮추어야 해요.

그래서 솔로몬은 왕의 위용을 자랑하는 아버지의 왕관을 쓰지 않고 어머니가 씌워준 긍휼의 왕관을 쓰고 오는 겁니다.

 

솔로몬이 왕으로서 업무를 볼 때는 왕권의 적법성을 내세우기 위해서 아버지 다윗이 썼던 왕관을 썼어요.

신하들에겐 아비의 왕관을 쓰고 나타나요.

 

그러나 신부에겐 왕이 아니라 지아비로서 데리러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비의 왕관을 쓰지 않고 어미의 왕관을 쓰고 오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세요.

괜히 저만 은혜 되어서 떠드는 것이 아니지요.

 

왕이 아니라 지아비로서 오기 때문에 솔로몬이 직접 가마를 타고 오는 겁니다.

비서를 보내지 않고 본인이 직접 와요.

왜냐하면! 그 옆 자리에 술람미를 앉히기 위해서 에요.

그래서 자기 자가용인 가마를 타고 오는 겁니다.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재림을 하십니까?

그냥 천국에 앉아서 이리로 올라오너라!

그러지 않고 말이에요.

이는 자기 신부를 데리러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을 보면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가요.

신부 집에서 잔치를 벌이고 그리곤 신랑 집으로 데리고 와요.

신부는 신랑을 따라 가면 영영 오지 못해요.

그래서 신부 집에선 떠나가는 딸을 위해 성대하게 잔치를 해 주는 겁니다.

그런데 이 비용을 전부 신랑이 줘요.

 

장차 예수님이 재림 하시면 예수님을 찌른 자들도 본다고 했지요.

예수를 찔렀다는 말은 복음을 핍박했다는 말이에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저와 여러분을 이단이라고 하는 자들이 예수를 찌른 자들이에요.

 

예수님께서 오시면 이놈들이 보는 앞에서 우리를 영접해 주실 겁니다.

이단이라고 하면서 핍박한 자들 앞에서 보란 듯이 예수님이 타고 있는 가마에 동승할 겁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 자리에 앉을 겁니다.

 

솔로몬의 가마에 술람미가 앉으면 술람미를 핍박하던 예루살렘 여자들은 통곡을 하겠지요.

이를 두고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푼다고 하는 겁니다.

어이쿠~ 우리가 왕비를 핍박 했구나!

아! 이를 어쩌면 좋나!

이젠 우린 죽었구나!

통곡을 할 겁니다.

 

이제 그 날이 가까이 왔어요.

전 개인적으로 내가 살아 있을 때 예수님이 재림 한다고 믿어요.

물론 제 생각이에요.

 

그만큼 예수님을 사모하고 산단 말입니다.

 

당장이라도 주님이 왔으면 좋겠어요.

아니면 오늘 밤이라도 데리고 가시면 더 좋구요.

아침에 눈이 떠지지 않고 바울과 함께 커피 마시고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물론 천국엔 커피가 없겠지만 말이에요.

 

살기 좋아 보세요.

신랑을 기다리지 않아요.

천국도 사모하지 않아요.

 

등 따습고 배 부르면 천국은 그냥 립써비스로 전락해요.

세상이 천국인데 뭣 하러 천국을 기다려요.

세상이 지옥 같기 때문에 천국을 사모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세상에선 지옥 같은 환경으로 몰아넣는 겁니다.

거기서 천국을 사모하라고!

신랑을 기다리라고!

 

저 같이 복음 전하며 개척교회하면서 고생을 해야지 예수님 재림을 가다리고 천국을 사모하지!

대형교회 꿰차고 왕처럼 행세 하는 목사들은 예수님이 올까봐 걱정해요.

천국은 여기가 천국인데!

무슨 천국을 가고 싶겠어요!

그래서 어찌 하든지 오래 오래 살고자 불로초를 먹고 있잖아요.

 

그러나 복음 전하면서 고난당하는 사람은 하루라도 빨리 예수님 오기를 소망해요.

빨리 죽기를 바래요.

주님 언제 제대 시켜 줄 건데요!

언제 데리러 올 겁니까!

날짜를 좀 앞 당겨서 오면 안 됩니까!

그런 다구요.

여러분은 어떤지 몰라도 전 그래요.

  

어떤 분이 무서워서 목회 못하겠다고 하더군요.

맞아요.

무서워서 목회 못하겠어요.

아니 무서워서 복음 못 전하겠어요.

 

그러니 빨리 주님 오실 날을 기다리는 겁니다.

죽을 날을 가디라는 겁니다.

주여! 언제 오시렵니까!

주님 언제 죽여주실 건데요!

 

술람미가 그 모진 세월을 솔로몬의 약속 하나 믿고 살았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약속 하나 믿고 살고 있어요.

솔로몬이 약속대로 술람미를 데리러 왔으면!

예수님도 반드시 우리를 데리러 오십니다.

 

술람미가 지금 그러잖아요.

여러분! 예수님은 반드시 오십니다!

이미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아 오시리니 인내하고 조금만 기다리라고 합니다.

 

오늘은 긴 말을 하고 싶지 않네요.

그냥 나팔 불면서 재림 하시는 그 주님을 생각하면서 황홀함의 그 여운을 간직하고 싶습니다.

술람미가 받은 동일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술람미가 그토록 사모하던 신랑이 왔습니다. 자기 안에 품고 살았던 그 신랑을 이제 실상으로 만났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실상으로 만날 그날을 사모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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