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와의 영원한 결별을 선언합니다"
송당 박영 선생 18대 종손 박기후 성도 공식 선언
500여년 조상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모든 ‘제사’를 단호히 거부하고 지금 존재하고 있는 사당마저 허물어 그 자리에 기독교 관련 건물을 짓겠다고 공식 선언한 문중 종손이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경북 구미시 선산읍 신기리에 사는 올해 83세된 박기후(83) 성도.
박 성도가 이같은 결정을 하게 된 배경을 보면 많은 고충이뒤따랐음을 엿 볼 수 있다. 특히 ‘제사’를 필생의 업으로 여기며 살아 온 정통 유교 문중들의 곱지않은 시선들은 박 성도의 이러한 결단을 철저히 좌절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단 ‘제사’와의 영원한 결별을 선언키로 결심한 박 성도에게 문중들의 반대나 회유따위는 결코 걸림돌이 될 수 없었다.
더욱이 박 성도가 낳은 자식들이 예외없이 하나님을 믿는 목회자 내지는 크리스천들이라는 점에서도 아버지 박 성도 역시 더 이상 문중의 뜻을 따를 필요는 없어지고 말았다.
지난 달 10일 오전 11시, 구미시 선산읍 신기리 송당정사에는 ‘송당 박영 선생 추모예배 및 기독교예절연구회’ 창립준비모임에 참석하려는 사람들로 하나 둘 밀려들기 시작했다.
워낙에 시골인지라 사람 몇명만 방문해도 금새 눈에 띄는 시골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날 50여명에 이르는 숫자는 결코 적은 수가 아니었다.
송당 박영 선생 제18대 종손 박기후 성도.
박 성도에 대한 실마리를 풀어 가려면 먼저 지금으로부터 500여년 전 1471년(성종 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밀양이 본관으로 당시 규정공파 증조부였던 할아버지는 함길도병마절도사를 지냈으며 조부는 통정대부안동대도호부사 철손(哲孫)이자 증가선대부이조참판 수종(壽宗)의 아들로써 자는 자실이요 호는 송당이었다.
22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황간현감, 강계부사, 의주목사, 동부승지를 지내고 중종 14년(1519)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년 온 후 이듬해 경상도병마절도사와 병조참판 겸 중추부사를 지낸 무(武)와 문(文)을 겸한 당대 세도가 중의 세도가였다.
바로 그러한 문중의 18대 종손이 지금의 박기후 성도다.
사실 몇년전까지만 해도 1년에 13번에 달하는 각종 조상제사를 지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후손들의 출세와 가문의 부흥을 일으키는 길이라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자식들이 성장하면서 하나 둘 품안에서 떠나자 박 성도의 심경에는 서서히 변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더욱이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해 왔던 ‘제사’를 마치 마귀와도 같이 생각하는 장남 효진(서울 명문교회 시무장로)과 연진(구미제일감리교회 권사) 혁진(구미한빛교회 담임목사) 주진(집사) 선정(대학교수) 그리고 막내 아들 민진(성도)까지 5남 1녀 모두가 하나같이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상황에 이르다보니 더 이상 ‘제사’를 지낸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그 무엇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래서 마음을 다 잡았다. 한 두명도 아닌 모든 자식들이 하나님을 믿는데에는 그만한 이유와 뜻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 나름대로의 확신이 들자 더 이상 ‘조상제사’에 대한 고집을 피울래야 피울 수 있는 명분이 사라지고 말았다.
급기야 수년 전부터 제사를 지내지 않게 되자 문중에서는 난리 아닌 난리가 났다.
“아무리 대종손이라해도 그렇지, 어떻게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지 않을 수가 있느냐. 그것도 순전히 대종손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냐”라며 시도때도 없이 항의와 딴지를 걸어왔다.
그러나 한번 결심한 박 성도의 의지는 뿌리깊은 나무처럼 흔들리지 않았으며 결국 지난해부터는 문중에서 따로이 제사를 지내기에 이르고 말았다.
박 성도의 이러한 마음고생과는 달리 박 성도가 살아 온 삶의 궤적을 들여다보면 얼마만큼의 고충이 있었겠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박 성도는 유교의 근원지라 여기는 선산에서 선산유도회 회장과 선산향교 전교, 금오서원 향장 그리고 성균관 전의를 지낼만큼 유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박 성도 못지 않게 아내 류시원 성도 역시 출중한 가문 출신이다.
풍산 류씨 후손으로 서애 류성룡의 둘째 아들 수암선생으로 칭하는 유진의 후손이라는 점이 이를 입증해 주고 있다.
이렇듯 뼈대있는(?) 가문에서 자란 후손이다 보니 시집을 와서도 가사쓰기와 읽기에 능했음은 물론 학식과 봉제사(奉祭祀) 그리고 접빈객(接賓客)에 한치의 소홀함이 없는 전형적인 유교 후손이었다.
그런 류 성도도 자식들 앞에서는 두손을 들고 말았다. 아니 지금은 오히려 박 성도나 류성도 모두 자식들보다 신앙심이 더했으면 더했지 조금도부족한 면이 없다.
“제사요? 글쎄요. 지난 세월 조상을 향해 셀 수 없을만큼 많은 제사를 지내봤지만 오늘 이 시간에 이르러 남는 것은 어느 것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지난 세월 그러한 행위들을 위한 세월을 허비했다는게 너무도 억울하고 슬픈 생각까지 듭니다”라고 박 성도는 술회한다.
“지금 세워져 있는 사당도 조만간 허물기로 자식들과 협의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식들이 계획하고 있는 것처럼 ‘기독교예절연구소’를 세워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을 대상으로 기독교 예절에 대한 교육을 시킬 생각입니다”라고 말한다.
이날 추모 예배에서 설교를 맡은 정영화 원로목사는 “다산 정약용도 예수를 믿었으며 양반 중의 양반이었던 바울도 예수를 믿었다”며 “오늘 이 추모 예배를 기점으로 박기후 성도님도 사도 바울과 같은 믿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큰 아들 박효진 장로는 “아버님께서 이러한 결정을 내리시도록 하신 배경에는 사람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할 만큼의 하나님의 크고 높으신 뜻이 작용했으며 더욱이 기독교예절연구소를 설립할 계획까지 하게 하신 데에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은혜를 느낍니다”라고 강조했다.
이날 예배에 참여한 선산중앙교회 이순락장로도 “500여년 지켜 온 조상제사를 과감히 접고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한 박 성도님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행사가 끝나고 그 동안 박기후 성도가 소장해 오던 박영 선생 관련 유품과 각종 문헌, 현판, 목판 그리고 집 뒷편 사당에 있던 위패 등 총169점을 국립국학진흥원 김형수 박사팀에 기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