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란 일본의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국조신을 모시는 신당과 각 지역의 토속적인 향토신을 모시는 신당, 일본 황실(皇室)의 조상이나 신대(神代)의 신, 또는 국가에 큰 공로가 있는 사람을 신으로서 모신 일본의 사당을 통틀어 지칭하는 말이다.
우리 나라에는 1609년 일본인들이 부산진에 상륙한 후 항해의 안전을 위하여 부산진에 세운 곤삐라(金比羅) 신사가 최초의 신사였는데 1900년대 이후 일본에 의하여 개항된 도시들에는 모두 곤삐라 신사가 들어섰다.
곤삐라 신은 일본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대물주신으로 바다의 신인 용을 상징하며 세속적으로는 어민들의 해상 수호신으로 받들어 지지만 일본인들에게는 해외 원정에 기적을 낳는 신이라는 믿음도 있다.
군산에 언제 처음 신사가 만들어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개항(1899년) 직후인 1900년 현 도선장과 해망로 일대에 후꾸오까(福綱)의 어민 30가구가 이주해 왔는데 이때 어민들이 자신들을 지켜주는 신인 곤삐라 신사를 세웠지 않나 생각된다. 곤삐라 신사는 현 수시탑이 있는 산의 동북쪽 9부 능선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주로 어부들이 많이 찾아왔고 1년 운세와 점을 치기도 하였다고 한다.(군산에는 수시탑의 곤삐라 신사 외에도 수시탑 아래에 두곳, 신흥동에 한곳, 월명동에 한곳의 곤삐라 신사가 있어 총 다섯곳이 있었다고 한다.)
군산의 곤삐라 신사는 1915년 지도에 처음 등장하는데 지도에서 수시탑이 있는 산을 곤삐라산으로 적고 있어 당시 일본인들이 군산 지역의 산에 마음대로 지명을 정하여 불렀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어청도는 군산보다 앞선 1898년 일본인들이 이주한 곳인데 일본인들은 어청도를 곤삐라섬이라 불렀으며 지금도 섬의 주산에는 거대한 콘크리트 제단이 남아 있다.
이밖에 어민들의 신인 곤삐라 신사와는 성격이 다른 일본의 향토신으로 군산에 세워진 서수 신사를 들 수 있다. 서수에는 일본 니이가타(新片)현 출신인 가와자끼(川崎)가 1905년 자신의 이름을 따 가와자끼 농장을 개설하는데 농장 개설 4년 후 고향인 니이가타의 흙을 가져와 1909년 신사를 만든 것이 일본 향토신의 시초로 보인다. 가와자끼 농장은 후에 싱싱한 벼이삭을 의미하는 서수촌(미즈호)으 이름을 바꾸어서 오늘날에도 일본식 명칭인 서수라고 불리게 된다. 이러한 향토신은 군산의 거대 농장주들이나 집단 이주자들이 자신의 출신 지역의 향토신을 모시는 형태로 많이 만들어지게 된다.
1920년 불이흥업 주식회사가 만든 군산의 대표적 간척지인 불이농촌의 경우에는 간척사업으로 육지에 포함된 팔이도(八耳島)에 신사를 두고 1년에 두 차례씩 제례를 지낼 정도였다. 이처럼 소규모의 신사 외에도 군산에는 군산을 대표하는 일본인들의 신사가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군산 신사이다.
군산 신사는 1915년 11월 만들어졌다. 이곳은 명실공히 군산의 대표 신사로서 일본의 국조신인 아마테라스오미가미(天朝大神)를 주신으로 삼았다. 그 위치는 현재의 서초등학교 뒤 주택가이다. 현재도 주택가 사이로 군산 신사의 대리석 계단들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일제시대 신사의 사진을 보면 계단을 올라 도리라고 하는 우리의 홍살문과 비슷한 문을 두 개 지나야 신사에 닿을 수 있었다.
군산 신사는 본래 군산의료원 뒤의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 회전그네 자리에 있었으나 신사의 격을 높여 (일본 신사에는 신의 서열에 해당하는 등급이 있는데 군산신사는 본래는 서수 신사와 격이 같았지만 후에 격을 한 단계 높여 신사의 규모를 확장했다고 한다) 그 왼쪽인 서초등학교 뒤의 구 군산애육원 자리로 크고 웅장하게 증축하여 옮겼다. 신사에는 신관 1명이 있었고 신당과 함께 신관이 지내는 부속 건물이 있었다.
군산 신사에서는 주로 하는 일은 일본의 국경일에 제사를 지내는 일과 매달 2차례씩 치르는 제사였다고 한다. 개항 35주년 기념 행사의 경우에도 군산 신사에서 먼저 제례를 지낸 후 시작되었다. 이밖에도 신사의 주요 기능으로 결혼식이 있었다. 많은 일본인과 소수의 한국인이 신사에서 결혼식을 하였던 것이다. 또한 군산 신사에서는 매년 10월 1일 '마쯔이'라는 축제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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