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때, 성체를 모셔도 되나요?”
“그리스도의 몸”, “아멘.”
가끔 성체를 분배하다가 신자들이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으면 흘낏 얼굴을 쳐다본다. 이 사람이 신자 아닌가? ‘아멘’이란 응답하는 것을 모르나? 괜히 분심도 든다. 요즘 본당마저 성체모독이나 훼손이 적지 않아 영성체전에 해설자가 “가톨릭 신자분만”, “가톨릭 교회에서 영세를 받으신 분만” 성찬에 초대하는 멘트를 날리는 것도 이유가 없지 않다. 제단에서 성체를 축성하는 사제의 마음에도 적지 않은 의문이 들 때가 있는데, 하물며 신자들이 성체를 대하는 태도야 오죽하랴. “이것이 정말 그리스도의 몸일까?” “내가 지난 주에 주일미사에 빠졌는데 성체를 모셔도 되나?” “밥 먹은 지 얼마 안 되었는데...” “하루에 두 번 성체를 모셔도 상관 없나?” 등의 질문은 대놓고 묻지는 못해도 마음 속에서 쉴 새 없이 튀어나온다.
어려운 성체에 대한 교리는 좀 뒤로 미루자. 우선 신자들이 갖고 있는 성체에 대한 신심부터 한 마디 하고 싶다. 독일교회에서 적지 않게 놀란 점 중에 하나는 유럽 신자들이 대개 주일미사에 정기적으로 참석하지 않으면서도 고해성사를 보는 일 없이 몇 년만에 성당을 찾아도 자연스럽게 성체를 모신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성체에 대한 교리와 신심이 유럽교회가 우리와 다르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처럼 주일 미사 한 번 빠지면 대죄이고, 고해성사를 볼 기회를 놓치면 성체마저도 모시지 못하는 죄스러움(?)으로 한 주간을 허전하게 보내야하는 그런 신자는 유럽에 별로 없다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가 성체에 대한 공경과 신앙의 중심으로서 성체성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만큼, 왜 성체를 교회가 그토록 존귀하게 여기는 지, 어떻게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되는 지, 그렇게 변화된 성체를 모시면서도 왜 내 마음에서는 의구심이 줄어들지 않는지 신자들은 솔직히 잘 모른다. 그냥 교회가 교리적으로 가르친 내용을 굳게 믿는 것이 참된 신앙인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성체에는 가톨릭 신앙의 진수가 담겨 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 역사를 주관하시고,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신 하느님은 당신 스스로 인간이 되시어 세상 속의 하느님이 되신 분이시다. 이제는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으로만 당신을 알리시는 엄위하신 구약의 하느님이 아니라, 먹고 마시고, 웃고 우는 우리의 일상과 현실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임마누엘)”, 육(肉)을 취하신 하느님이 되셨다. 하느님이 하느님이시기를 포기하시자 인간이 되셨다. 이것이야말로 성탄과 강생의 신비가 아니던가?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예수님의 모습 안에서 하느님은 자신의 얼굴을 우리에게 드러내셨다. 하지만 거기가 끝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계실 협조자 성령을 파견하시면서 우리와 더 가깝게 계시기를 원하셨고, 그래서 당시 일상의 음식인 빵과 포도주 안에 당신의 형상을 불어 넣어 주셨다. “눈으로 보고 만져보고 맛보아도 알 수 없는” 성체의 신비가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의 기적을 통해 제자들에게 전해졌다. 성체성사를 세우신 최후의 만찬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곧 당신이 보여주실 십자가에 봉헌될 당신 살과 피를 극명하게 드러내줄 성사(聖事), 즉 거룩한 사건이 되었다.
그래서 가톨릭 신앙은 성사적 신앙이라고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을 볼 수 있게 전해주는 표징과 실재를 신앙의 중심에 두기 때문이다.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느님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지금 만날 수 없는 그리스도를 매 미사 때마다 살갑게 만나게 해주는 성체성사. 그것도 모자라 언제든 성체가 모셔진 곳은 예수님의 현존이 약속된 만남의 장소가 된다. 그곳이 성당이던, 성체조배실이던, 성체강복과 봉성체를 하는 순간이던 그 분은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주신다. 하물며 미사 때 성체를 영하는 우리들의 마음이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성전’이 아니고 무엇이랴?
성변화의 신비는 우리가 증명해낼 대상이 아니다. 단지 우리에게는 어떻게 성체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본래 인간은 표징을 통해서 살아간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은 마음 그대로가 아니라 그 사람이 내게 보여주는 작은 행위들, 위로의 손길, 정성이 담긴 선물, 입가에 띈 미소로 전해진다. 병든 아내에게 인삼을 산삼으로 속여 먹인 남편의 정성에 치유가 된 아내가 있었다. 아내를 속인 미안한 마음을 고백한 남편에게 아내가 던진 한 마디. “저는 산삼도 인삼도 아닌 오직 당신의 사랑을 받아먹었을 뿐이예요.” 꽃장수에게 꽃은 돈벌이의 수단이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려는 이에게는 사랑 그자체가 된다. 의심하는 이에게 성체는 상징일 뿐이지만, 죽음을 앞두고 성체를 받아 모시는 이에게는 천국의 참된 맛이 된다. 미사 내내 분심 속에 성체만 날름 받아먹고 바쁘게 성당을 빠져나가는 사람에게 성체는 가톨릭 신자의 의무이지만, 죄를 피하고, 형제를 용서하고, 마음을 정결하게 닦은 후 교회가 가르친 대로 공심재를 지키면서 정성껏 성체를 모신 사람에게 성체는 생명의 빵이요, 영혼의 양식이다. 그 힘으로 사람들을 사랑하고, 세상에 봉사하며, 영원을 ‘지금-여기서’ 살아간다.
이토록 존귀한 성체이기에 과거 중세시대에는 성체를 일생에 단 한 번 받아 모실 수밖에 없었던 때도 있었고, 과거에는 성체를 모시기 전에 하루 전날 하루를 꼬박 굶기도 했다. 건강을 위해 내시경 검사를 할 때에는 전날 저녁부터 굶으면서, 예수님을 받아 모시기 위해 1시간을 준비하는 데에도 인색한 것이 우리들이다. 과도한 성체 신심으로 교회 내의 폐단도 많았고, 성체를 신비적으로 대하려던 잘못된 신심이 교정된 것은 잘된 일이지만, 그렇다고 성체 자체에 대한 공경심이 사라져서는 안 된다.
주일미사에 빠진 것이 내 게으름이 아닌 부득이한 사정이거나,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미사 전에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었거나, 성체에 대한 불신을 의도적으로 갖지 않는 한 성체성사는 살아계신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의 장소이다. 성체를 모실 자격보다는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이 사실 더 크다. 죄를 의식하고, 용서를 청하며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받아 모신 성체는 습관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받아 모신 성체보다 더 존귀하다. 성체는 양식이자, 동시에 ‘영혼의 약(藥)’이기도 하다. 과연 하느님의 눈으로 본다면 우리 중에 그리스도를 직접 받아 모실 자격이 있는 사람이 도대체 얼마나 있겠는가? 교회가 신자들에게 하루 2번까지 영성체를 허락한 것은 영성체의 유익함과 동시에 성체 남용을 경계한 교회의 현명한 판단이었으리라.
새해가 밝았다. 건강을 위한 다이어트와 좋은 약재들을 집안에 쌓아두는 일도 중요하지만, 영혼의 건강을 위한 ‘성체 다이어트’ 혹은 ‘명품 성체’를 받아 모시는 즐거움을 올 한 해 실천해보면 어떨까?
송용민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첫댓글 예 신부님 마음으로 새기며..매 미사때마다 그분과 함께하는 기쁨에 찬 미사가 되도록 은총을 청해봅니다.
네~!
오늘도 강릉에 먼길을 다녀오면서 몸이 힘들고 속이좋질않았지만, 성당을 향하며 미사를 기다리며.
제 몸과 맘을 달래면서 먼길 수고했다. 그분의 성체를 기다리며, 제스스로에게 조금만기다려라..'하면서요.
미사시간의 은총많이 받고 왔습니다.
명품성체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신부님 고맙습니다
대학 4년 임용준비로 공부 때문에 바쁜 딸이가 가끔 주일미사를 빠지게 되는데.
웃었습니다. 
성체를 모실까 망설이다 모셨습니다. 엄마인 저를 보고 싱긋웃으며 성체를 모시러 나가는 딸아이를 보며
그래 예수님을 몸 안에 모시고 싶은 마음이니 저도
1년에 한번정도 일이 있어 주일미사 빠지게 되는데 어느땐 바빠서 성사를 보지 못할때도 있었어요.
신부님 자세한 설명 감사 드립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성체을 모실 자격보다는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이 사실더 크다
무한한 사랑을 베푸시는 주님께 감사 드리며
신부님의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신부님 글 다시한번 정독하고 제 카페로 모셔갑니다.
이런때,저런때 가리지 않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