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보상운동 희귀 원본 자료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는 최근 국채보상운동 관련 희귀 원본 자료 28점을 확보했다. /국채보상운동기념시업회 2009.07.27
국채보상운동 (國債報償運動)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 전개된 국권회복운동의 하나로서, 일본에서 들여온 국채를 국민의 모금으로 갚자는 운동. 1904년 제1차 한일협약 이후 한국에 재정고문으로 부임한 메가타[目賀田種太郞(목하전종태랑)]는 1906년까지 4차례에 걸쳐 1150만원의 차관을 도입하였다. 일본측의 차관공세의 목적은 첫째, 한국의 재정을 일본재정에 완전히 예속시키는 것이고, 둘째는 그 차관으로 식민지건설을 위한 정지작업(整地作業)을 하자는 것으로 정부와 민간의 경제적 독립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 한국의 토착자본은 일본차관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운동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07년 2월 대구의 광문사(廣文社) 사장 김광제(金光濟)와 부사장 서상돈(徐相敦)은 단연(斷煙)을 통하여 국채를 갚아 나가자는 국채보상운동을 제창하였다. 1907년 2월 21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취지문을 발표하고, 민회소(民會所), 즉 단연회(斷煙會)를 설립하여 직접 모금운동에 나섰다. 대동광문회(大同廣文會;대구 廣文社)의 국채보상운동 발기가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 《황성신문》 등에 보도되자 각계각층의 광범한 호응이 일어났다. 전국에서 약 20여 개에 달하는 국채보상운동단체가 창립되었고, 각계각층이 참여하였다. 이 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민족자본가와 지식인층이었다. 상인들은 이 일본차관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인천·부산·평양 등지에서 상업회의소 등을 통하여 적극 참여하였다. 또, 지식인들은 각종 단체·학회·언론기관 등을 중심으로 적극 참여하였고, 신지식인들만이 아니라 유림(儒林)과 각 지방의 하급관리·상민층도 참여하였다. 특히, 부녀자들이 각종 패물을 의연소(義捐所)에 보내왔으며 노동자·기생 등 하층민들까지도 이 운동에 참여한 범국민적 운동이었다.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것은 1907년 4월부터 12월까지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1908년에 들어서면서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일제 통감부는 이 운동을 대한매일신보사를 중심으로 추진해 가던 양기탁(梁起鐸)과 베델(Bethell)을 탄압하고 <국채보상금소비사건>을 조작하여 결국 이 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순수한 애국충정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국권회복운동의 하나로 그 역사적 의의는 큰 것이었다.
국채보상운동 100주년 행사

21일 일제의 경제침탈을 막기 위해 모금운동을 한 국채보상운동 100주년을 맞아 대구 중구 국채보상운동공원에서 김광제 서상돈 독립지사 흉상제막식을 갖고 있다. 대구 2007.02.21
국채보상운동

100주년 국채보상운동 100주년을 맞아 대구시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 이 운동의 발기인인 독립지사 서상돈(右), 김광제 선생의 흉상이 세워졌다. 21일 공원을 찾은 초등학생들이 흉상 주변에서 국채보상운동에 관한 설명을 듣고 있다. 대구 2007.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