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케이블 영화, 드라마 전성기다. 몇 차례 실험을 거쳐 하루가 멀다 하고 시청률 기록을 갱신하며 대중성까지 얻었다. 미국드라마의 벤치마킹, 충무로 영화 인력 투입으로 질이 향상된 데다 시청자들의 관심까지 더해진 결과다. 날개 달고 비상하기 시작한 케이블 영화, 드라마. 그 흥행배경과 촬영현장, 화제의 작품까지 소개한다.
요즘 안방극장에선 케이블 채널의 <조선과학수사대 별순검>(이하 <별순검>), <정조암살미스터리 8일>(이하 <8일>), 그리고 <메디컬기방 영화관>(이하 <영화관>)이 그야말로 ‘난리’다. 연일 시청률 갱신에 경쟁구도까지 형성돼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광경을 연출하고 있다. 지상파와 달리 유료인 데다 접근도가 낮은 케이블 프로그램은 그동안 시청률을 논할 계제가 못됐다. CJ미디어 김정덕 차장은 “케이블 자체 제작물이 시청률 1%가 넘으면 성공한 거고 3%가 넘으면 대박”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케이블에서 3%의 시청률은 체감적으로 지상파의 20~30%대 시청률에 맞먹는 것으로 평가된다. 최근 3%가 넘는 케이블 프로그램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MBC 드라마넷의 <별순검>은 지난 17일 방송된 12화 ‘매분구 살인사건’이 4.33%(TNS 미디어 집계)라는 케이블 TV 드라마로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했다. 같은 날 첫 방영한 채널CGV의 <8일> 역시 3.11%(AGB닐슨 미디어 집계)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별순검>의 뒤를 이었다. OCN의 <영화관>도 20일 첫 회분이 평균 시청률 2.86%, 최고 시청률 4.42%(AGB닐슨 미디어 집계)를 기록하며 케이블 방송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차지했다.
이들은 케이블 프로그램으로는 이례적으로 ‘국민 드라마’라는 수식어까지 갖게 됐으며, ‘미드’(미국드라마), ‘일드’(일본드라마), ‘한드’(한국드라마)에 이어 ‘케이블 자체 제작 드라마’의 줄임말인 ‘자드’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별순검>의 MBC 드라마넷, <8일>(채널CGV)의 CJ미디어, <영화관>(OCN)의 온미디어가 지상파의 MBC, KBS, SBS처럼 3파전 양상으로 경쟁하는 구도도 흥미롭다.
‘미드’의 영향아래
케이블 영화, 드라마가 본격적으로 제작에 활기를 띄기 시작한 것은 약 1년 전부터다. 배두나, 김민준 주연의 멜로물 <썸데이>, 김민종과 윤다훈 등이 출연해 30대 미혼 남성들의 연애와 일상을 그린 <하이에나>, 뱀파이어와 인간의 사랑을 담은 이서진, 박한별 주연의 <프리즈> 등 스타 배우를 기용한 작품들이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지상파와 차별되지 않은 이 작품들은 모두 평균 시청률 1%를 넘기지 못하며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더군다나 <썸데이>는 애초에 지상파 방영을 목적으로 제작됐다 케이블로 방영된 경우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케이블 드라마’로 보기 힘들다. 한 방송 관계자는 “지상파에서도 볼 수 있는 스타일의 드라마를 보기 위해 굳이 케이블 채널로 이동할 시청자는 얼마 되지 않는다”고 분석한다.
이 같은 현상은 ‘보다 케이블다운 작품’을 탄생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가족연애사> <색시몽> <이브의 유혹> <도시괴담 데자뷰>처럼 지상파에 비해 제약이 덜한 케이블만의 장점을 살려 보다 솔직하고 과감한 성 표현을 시도하거나,
<막돼먹은 영애씨> 등 다큐멘터리와 드라마를 혼합한 새로운 형식이 선보였다. 케이블 제작물의 색다른 시도는 국내 시청자들을 사로잡고 있는 미국드라마의 영향으로 다양해졌다. <별순검>은 ‘조선과학수사대’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를 한국적으로 변용한 경우고, <영화관>이나 21일 첫 방송된 은 <하우스>처럼 매 회 다른 환자를 등장시키는 의학 드라마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또 미국드라마의 시즌제를 도입한 <막돼먹은 영애씨>도 현재 시즌 2가 인기리에 방영 중이다.
특히 2005년 지상파 방송 MBC에서 조기종영의 아픔을 겪었던 <별순검>은 10월 13일 케이블 채널 MBC 드라마넷을 통해 부활한 독특한 이력을 지닌 작품. 마니아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으며 방송 초기부터 3%에 가까운 높은 시청률을 유지해 ‘지상파 찬밥’에서 ‘화려한 케이블 복귀’라는 인생역전을 이뤘다. 조선시대 수사기록서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과학수사기법과 퍼즐을 짜 맞추는 듯한 구조가 미국드라마에 열광하는 젊은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한 시청자는 <별순검>에 대해 “미국드라마처럼 만듦새가 매끄러운 것보다는, 약간 어설프지만 그것을 조선이라는 독특한 배경으로 극복해가는 게 재밌다”고 평한다.
사극으로 통하다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많은 케이블 자체 제작 드라마가 나왔지만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주목을 끌게 된 시점을 들여다보면 ‘사극’이라는 키워드가 발견된다. <별순검> <8일> <영화관>이 모두 사극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 판타지 사극을 표방한 MBC <태왕사신기>처럼 전부 수사물이나 미스터리에 사극을 결합한 ‘퓨전 사극’으로, 현재 지상파 드라마를 장악하고 있는 사극 열풍이 케이블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셈이다.
그동안 케이블에서는 저예산으로 쉽게 제작할 수 있는 섹시코드를 앞세운 현대물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공중파에서만 통하던 사극을 케이블에서 적극적으로 시도하면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CJ미디어 드라마 제작팀 안상휘 팀장은 “그동안 케이블에서 다룬 장르는 섹시코드와 공포물이 대세였고 사극은 없었다"며 “사극은 지상파에서 우수한 인력으로 제작되는 간판 드라마다. 우리도 간판을 만들고 싶었다. 마침 대선을 앞둔 시기라 올바른 지도자상인 정조 이야기를 해보자는 아이디어가 나와 사극으로 기획하게 됐다”고 <8일>의 제작배경을 설명했다.
<영화관>을 제작한 온미디어 PR팀 이영균 팀장은 “처음부터 사극을 생각하고 기획한 것은 아니었지만, 케이블만이 보여줄 수 있는 좀 더 색다른 이야기를 찾는 와중에 성에 대해 가장 보수적인 시대였던 조선시대의 성문제를 다루면 신선하겠다 싶어 퓨전 사극을 선택했다”고 말한다. <별순검>을 제작하고 있는 MBC 드라마넷의 이재문 프로듀서는 “사극은 프로덕션디자인에 드는 비용이 크기 때문에 예산과의 싸움이 가장 크다. 지상파 사극은 회당 3~4억 원이 들어가지만 <별순검>은 제작비가 회당 1억 원밖에 안 된다. 한정된 제작비로 최대한의 퀄리티를 뽑아내기 위해 적은 개런티에 연기가 검증된 배우를 기용하려고 오디션을 많이 보는 등의 노력을 많이 했다”며 “이제 지상파나 케이블의 구분은 무색해졌다. 재미있고 좋은 작품이면 시청률은 얼마든지 나온다”고 덧붙였다.
공중파든 케이블이든 사극을 빼고서는 드라마를 얘기할 수 없는 상황이다. 공중파가 정통 사극의 틀을 벗고 퓨전 사극으로 새로운 불씨를 마련했다면, 케이블의 공격적인 자체 제작 사극은 여기에 기름을 부었다. 그리고 공중파에서는 시도하기 어려운 과감한 표현들이 가능해지면서 충무로 영화인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케이블에 뛰어들어 ‘TV영화’를 정착시키기에 이르렀다.
'인간의 향기'가 가미된
<조선과학수사대 별순검>
20부작 수사극 ㅣ제작 MBC프로덕션ㅣ연출 이승영, 김병수ㅣ출연 류승룡, 안내상, 박효주, 온주완ㅣMBC 드라마넷 매주 토요일 11시
“시신, (눈) 깜빡이지 마, 이제부터 넌 시체야." 김병수 감독의 주문을 신호로 <조선과학수사대 별순검>(MBC프로덕션 제작, 이하 <별순검>) 13화 <백여령 살인사건> 촬영이 시작됐다. 류검률(이일웅)은 외상 하나 없는 시신 백여령을 바라보며 고뇌하고, 곧 승조(류승룡), 복근(안내상), 여진(박효주), 강우(온주완)가 검안실 안으로 들어온다. 승조가 돋보기를 들고 시신을 꼼꼼히 살필수록 저 여인의 사인이 궁금해진다. "컷!" 사인이 나자 배우들은 일제히 큰 숨을 토해내고 다음 촬영을 준비한다. 여기는 두터운 외투를 입고 추위와 싸우며 촬영하고 있는 <별순검> 현장이다.
2005년 조기종영의 아픔을 겪었던 <별순검>은 2년 뒤인 2007년 10월 13일 MBC 드라마넷을 통해 컴백했다. 2005년 <별순검>을 최초로 기획했던 이승영 감독과 <추리다큐 별순검>을 연출한 김병수 감독, <별순검> 아이디어를 제안했던 황혜령 작가가 다시 모인 <별순검>은 색다른 소재와 탄탄한 시나리오, 배우들의 호연으로 ‘완성도 높은 케이블 드라마’로 정평이 나 있다. 마니아들의 지지가 대단해 한국산 시즌 드라마의 가능성도 점쳐진다.
<별순검>은 ‘과학수사대’라는 타이틀 때문에 '미드' 와 비교되지만 지향하는 바는 다르다. 가 과학과 기술을 통해 사건을 해결해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면, <별순검>은 추리를 통해 사건을 해결하는 동시에 사람에 초점을 맞춘다. 김병수 감독은 “사건을 통해 그동안 관심받지 못했던 인물들, 죽음에 이르러서야 세상을 향해 말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한다. 사람 취급조차 받지 못하는 백정 칠갑의 죽음을 그린 <백정살인사건>(1화), 과부라는 이유로 자신의 모든 욕망을 억눌러야 했던 효은의 죽음을 그린 <관속의 딸 살인사건>(2화) 등 대부분의 작품에서 죽음과 사회적 약자의 슬픔이 교묘하게 만났다.
여기에 ‘가해자-피해자’라는 이분법은 없다. 살인을 저지른 가해자라도 그가 처한 상황이 설득력 있게 묘사돼 종반부로 갈수록 추리의 재미와 함께 감동까지 얻게 된다. “범인이 살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알았지만, 정죄해야만 하는 장면을 연기할 때 가장 힘들다”고 말하는 배우 류승룡의 말이 괜한 고민은 아닌 것이다. 제작진은 이처럼 사람에 초점을 맞춘 <별순검>을 "아날로그적인 작품"이라고 부른다.
<별순검>은 시간적인 배경상 사극이지만 시대와 사회상을 통해 '현재'와의 관련성도 찾는다. 시간 배경은 개항이 한창 이뤄지던 시기인 19세기 말의 혼란했던 사회상을 보여준다. 일본이 서민경제 밑바닥까지 침투해 조선인들이 겪는 고통이 담겨 있는 <권총살인사건>(6화), 서양문물이 들어오면서 여자아이들이 교육 받을 수 있는 학당을 배경으로 한 <돌아온 옥이>(9화) 등 작품 곳곳에서 조선 말기 상황을 엿볼 수 있다. 김병수 감독은 “신분사회가 와해되고, 세계열강의 침투로 초래된 혼란한 시대를 묵묵히 살아간 이들의 모습을 통해 2007년을 사는 우리는 어떤 모습을 하고 싶은지, 과연 행복한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다”고 말한다.
2년 전 조기종영한 드라마인만큼 다시 만들어지기까지 곡절도 많았다. “상대적으로 낮은 예산에 협찬마저 들어오지 않아 배우와 스탭들 고생이 심했다.” 이승영 감독의 말이다. <과부 겁탈사건>에 진주댁으로 출연한 배우 김청은 우정출연으로 힘을 보탠 경우. 밤낮으로 '살인'만 생각하던 작가들이 가위에 눌려 회의를 취소한 일도 있었다. 지금은 시즌 초반 벌어졌던 사건과 연관된 큰 규모의 사건, 그리고 인물들 간의 애정관계를 보여주는 시즌 막바지를 향해 숨 쉴 틈 없이 달려가고 있다.
다음 시즌 제작이 기정사실화된 지금 이승영 감독은 “다음 시즌은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웰메이드로 승부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다음 시즌이 언제 시작될 것인지는 확정되지 않은 상황. 하지만 무엇보다 다음 시즌에서도 '인간의 향기'를 담은 <별순검>의 개성은 쭉 이어진다. (안효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