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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민 구미시의원 예비후보 선거운동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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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 신 : 각 지역언론사
○ 문서번호 : 김보고2010-004
○ 발 신 : 김수민 구미시의원 바선거구(인동동, 진미동) 예비후보 선거운동본부
○ 발송일자 : 2010년 4월 19일
○ 제 목 : 김수민 구미시의원 예비후보 주간정책발표 제3호
제1호 학교무상급식 실시 찬성 (4/8)
제2호 동네미디어 육성 (4/12)
제3호 잊혀진 구미 항일운동을 찾아서
(주간정책발표는 매주 월요일마다 이어질 계획입니다.)
이상백, 이내성, 장진홍, 박상희, 조귀분, 허형식...
역사 후퇴와 이념 대립 속에 잊혀졌던 항일운동가들
학술 연구, 기념관 건립, 연극 제작으로 되살린다
[취지와 배경]
‘친일행위를 한 사람은 흥하고, 독립운동을 한 사람은 망한다.’ 해방 이후 65년째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원리다. 지난 몇년간 항일운동을 골고루 비추려는 노력은 계속되었지만 식자층 사이에서만 의미를 인정받을 뿐 대중적인 파급력을 모른다. 간디를 모르는 인도인, 쑨원을 모르는 중국인이 얼마나 될까. 여운형이나 조소앙, 이재유를 모르는 한국인은 숱하다. 해방정국에서 가장 큰 인기를 누린 정치지도자들의 이름은 순식간에 묻혀졌다.
오늘은 4.19 기념일이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도 그간 적이 꽃을 피웠다. 그러나 그 이전의 항일운동조차 기념하지 못하는 한, 민주화운동기념도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구미는 항일운동을 얼마나 기념하였는가? 금오산 저수지에 박희광 선생의 동상을 세우고, 임은동에 왕선 허위 선생의 기념관을 세운 걸로 자족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 구미시민들이 꼭 기려야 할 항일운동가들이 있다.
김수민 예비후보는 대학 시절 교육학과 함께 역사학을 이중전공했다. 구체적인 전공은 한국사였고 개인적 관심사는 한국근현대사였다. 그는 칼럼니스트 가운데 가장 앞서 동향인 박상희 선생에 관한 글을 쓴 바 있으며 2008년 구미고등학교에서 교육실습을 하러 귀향했을 때 알게 된 한 시민운동가의 소개로 박상희 선생 묘를 찾아간 적이 있다. 그후 이상백 선생, 이내성 선생, 장진홍 선생, 조귀분 선생, 허형식 선생, 진평교회 3.1운동에 대해서도 조금씩 관심의 폭을 넓혀 나갔다. 이외에도 몇몇이 더 물망에 올라 있으나 아직 검증 중이며, 김 예비후보가 아직 파악하지 못한 분들도 계실 것이다. 다만 위의 분들이 거명된 사유는 한국사회의 급소였던 이데올로기 문제를 극복하고 항일운동의 진실을 온전히 복원하려는 김 예비후보의 의지에 있다.
이내성, 장진홍, 허형식 선생은 무장투쟁으로 일제에 저항했다. 그러나 그동안의 한국 역사사업은 국내외 우익 민족주의 진영에 국한되었고 항일무장투쟁은 근래에 들어서야 근현대사 교과서에 실리기 시작했다. 박상희, 조귀분 선생이 몸담은 좌우합작단체에 대한 소개도 마찬가지다. 현재 이내성, 장진홍, 허형식 선생은 일단 지역사회에서 항일운동가로 인정을 받은 상황이며, 박상희, 조귀분 선생 역시 재조명이 이뤄질 것이다. 그러나 수구보수적인 지역사회 인사들이 과연 이분들의 활동을 제대로 알려낼지는 의문이다. 이 가운데 몇분은 지역 정치인들이 참배를 하는 대상이기도 하나, 그 정치인들이 선생들의 진보 성향을 과연 알고 있거나 직시하고 있는지도 심히 의뭉스럽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제대로 된 독립운동사업이 진행되기 어렵다. ‘훌륭한 분’이라며 얼버무리고 넘어가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이분들에 대한 색깔론, 이념공세는? 최소한의 상식과 조리를 가진 이라면 불가능하다. 이내성, 장진홍 선생에 대해 공세를 하면 동구미 주민들이 들고 일어날 터이며, 허형식 선생을 음해하면 남구미 주민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의 형님과 형수인 박상희, 조귀분 선생을 향해 감히 색깔론을 펼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아마 지역 인사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대충 넘어가는 배경이 아닐까, 김수민 예비후보 선거대책본부는 추정하고 있다. 기우이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이제는 퇴행과 분열을 넘어 반제국주의의 역사를 올바로 기려야 한다. 구미시 지방선거 모든 입후보자들에게 이 운동가들의 기념사업 주도를 권한다. 특히 해당 항일운동가들의 고향 지역인 마, 바, 사선거구의 시의원 후보자들 그리고 시장선거 후보자들은 이 같은 요청을 피해선 안 된다.
혹여 기념사업 대상자의 예시에 빠진 분들이 있다면, 김수민 예비후보는 기꺼이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기탄없는 지적과 제보를 받아 연구에 들어갈 예정이다.
그리고 덧붙이건대, 선조들의 고장에 돌아온 왕산 허위 선생 후손들에 대한 구미 시 당국은 대폭 개선되어야 한다. 구미 시민으로서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 면목이 없다.
[기념사업 방안]
@ 가장 대대적이면서도 고전적인 방식으로는 왕산 허위 선생 기념관과 같은 건물 신설이 있다. 참고로 현재 왕산 기념관은 동네도서관 기능까지 겸하고 있다. 김 예비후보의 지역구에 속한 진평동, ‘마’선거구에 속한 상모동, ‘사’선거구의 양포동 등지에 관련 시설 건립을 추진한다. 다만 고려할 점은 개발과정에서 주민에게 최대한 불편을 덜 끼쳐야 하며, 예산과 준비가 미흡할 시에는 통합적으로 [항일운동 기념관]을 설립하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
@ 물론 전시 위주의 기념관보다 사실관계의 확보와 학술적인 정리가 더욱 시급하다. 역사 및 향토사 연구자들의 주도와 역사학 전공자 및 관심있는 구미시민들의 전폭적 참여가 가장 중요하다. 이 가운데서 자료수집 및 세미나를 개최한다. 그리고 누차 강조하자면, 항일운동가들의 좌익단체 경력을 문제 삼거나 숨겨서는 안 된다. 일제강점기, 특히 태평양전쟁 시기 대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은 중도 및 좌익계열이었으며, 이 역사를 은폐할 경우 독립운동사 전반의 맥락이 매장된다는 것을 모두 깨달아야 한다. 해방직후 38선 이남 사람들의 대다수는 진보좌파를 지지했으며, 이러한 성향이 가장 뚜렷한 공간이 바로 대구경북이었다. 더이상의 역사왜곡은 용납될 수 없다. 현실적으로 학술 작업을 지휘할 주체는 진보 성향의 학자, 운동가들일 수밖에 없으며, 아무리 보수정치인을 자임한다고 해도 가장 견결했던 항일투쟁 역사기념에 훼방을 놓을 수는 없다. 후손들은 이를 제2의 ‘친일’ 및 ‘역사적 후퇴’로 기억할 것이다. 좌절은 반민특위의 해산으로 충분하다.
@ 어렵고 딱딱한 사업만이 아니라 시민들, 특히 학생들에게 친숙한 소재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지역에 존재하는 극단과 협력해 연극, 뮤지컬의 제작을 제안한다. 이내성과 장진홍의 우정과 투쟁, 박상희와 조귀분의 사랑과 일대기, 허위에서 허형식으로 이어지는 가문사는 드라마로서 손색이 없으며, 진평동 교계의 3.1운동은 당대의 시대배경과 진실한 픽션을 가미해 극단과 교계 연주자들의 협력 하에 어린이용 뮤지컬로 제작할 것을 제안한다.
@ 항일운동가 선생들의 묘소와 묘비 정비는 기본적인 예우이다.
@ 허형식, 장진홍, 이내성 선생은 해외에서 활동했다. 그분들의 활동 경로를 되짚어 보는 여행사업 기획을 제안한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는 항일운동가이자 민주화운동가인 장준하 선생의 기념사업이 있다.
@ 민주화운동 및 사회운동은 항일운동과 공통점을 지닌다. 핍박받는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항일운동 기념사업이 일정한 출발구간을 통과하면 민주화운동과 사회운동 기념사업도 시작되어야 한다.
@ 위의 모든 기조를 담아 ‘구미시 독립운동 기념 조례안’을 제의하고, 기념관 건립에 필요한 추가 조례안을 제의한다.
[예시된 항일운동가 소개]
1. 이상백 목사와 진평동 교계의 3.1운동
자료 출처: 디지털구미문화대전 (http://gumi.grandculture.net/)
1886년 8월 15일생. 이상백(李相栢)은 1919년 3월 12일 인동면(仁同面) 진평동의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동하였다. 당시 인동교회의 목사로서 대구 서문외(西門外) 시장의 독립 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3월 7일 이곳에 온 대구 계성학교 학생 이영식(李永植)과 만나 독립선언서 20매를 전해받고 함께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동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상백은 자기의 집에서 이영식, 이내성(李乃成), 이범성(李範成), 이영래(李榮來), 임점석(林點錫), 임용섭(林龍燮), 박명언(朴明彦), 권영해(權永海), 허도언(許道彦) 등과 다시 만나 3월 12일 오후 8시로 거사일을 정하고 사전 준비를 시작하였다. 이상백은 권용섭(權龍燮)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필사로 제작하고, 3월 11일에는 자기집에서 이영식, 이영래, 임점석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었다.
3월 12일 오후 8시 마을 뒷산 기슭에 3백여 명의 시위군중이 모이자, 이상백은 이영식과 교대로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따라 조국이 곧 독립될 것이라는 사실과, 또 이를 앞당기기 위하여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역설한 후, 독립 만세를 선창하였다. 이 날의 독립 만세 시위는 밤이 늦도록 전개되었는데, 소식을 듣고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주동자 8명이 체포되었다. 이상백은 이때 체포되었으며,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2년 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65년 9월 17일 몰.
2. 이내성(이만우)
자료출처: 디지털구미문화대전 (http://gumi.grandculture.net/)
이내성은 경주이씨(慶州李氏)로서 이만우(李晩雨)로도 불렸다. 1892년 4월 l일 현재의 경상북도 구미시 진평동 543번지에서 이성률(李成律)의 5남으로 태어났다.
이만우는 17세 때 계성학교를 중퇴하고 동향 동지인 장진홍(張鎭弘)과 함께 조선보병대(朝鮮步兵隊)에 입대하여 훈련을 받았고 제대 후 광복회(光復會)에 가입하여 독립 투쟁을 시작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매부 이영식(李永植) 목사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필사 또는 등사하여 배포하는 한편, 태극기를 만들어 3월 12일 인동(仁同) 장날을 이용하여 오후 8시 진평동 주민 200여 명을 집결시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선도하였다. 다음 장날인 3월 17일 다시 같은 곳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19년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l년 6개월의 형을 받아 옥고를 치른 뒤 출옥하였다.
이후 장진홍과 함께 왜관 지역의 공공기관을 파괴하기로 결심하고 폭탄을 제조하였다. 1927년 5월 28일 11시경 꿀로 가장한 상자 4개를 조선은행지점장, 식산은행지점장, 경찰서장, 도지사 등에게 전달하도록 박노선(朴魯宣)에게 의뢰하였는데 조선은행지점장에게만 전해지고 나머지 3개는 운반 도중 실수로 노상에 떨어져 연쇄 폭발을 일으켜 일본 경찰 4명, 은행원 1명, 통행인 1명이 중상을 입고 유리창 70여 장이 파괴되었다. 이후에도 요인 폭살과 시설 파괴를 기도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수색이 심해지자 추격을 피하여 은신하던 중 1927년 8월 구미에서 자결. 구미시 시미동에 묘비와 묘소.
3. 장진홍
1895년 칠곡(현 동구미 지역 옥계동) 출생. 일명 장성욱. 본관은 인동. 1907년 인동초등학교의 전신인 인명학교를 졸업.
1912년 조선보병대에서 복무한 뒤 1916년 제대. 죽마고우인 이내성의 권유로 1918년 광복단에 입단한다. 하바롭스크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중에는 청년들에게 군사교육을 지도했다. 3.1운동 당시인 1919년에는 다시 귀국해 일제통치의 전말을 다룬 자료를 모아 미국군함이 인천에 입항했을 적, 군함 하사 김상철에게 전달하였다.
1925년 베이징으로 망명. 1926년 1월 이내성을 다시 만나서는 국제공산당에 입당했다. 1927년 4월 국제공산당원인 일본인 호리키리 모사부로(堀切茂三郞)에게 폭탄제조술을 전수받았다. 영천에서 폭탄을 만든 다음 대구의 박노선에게 폭탄상자 배달을 지시 조선은행 대구지점을 폭파하였다. 이와 같은 행동은 조세와 기부금을 활용한 일제의 수탈과 이에 넘어간 제국주의 부역자들을 처단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거사 이후 안동에 피신하였고 1928년 도일하였다가 결국 현지에서 체포되었다. 그를 체포한 이는 조선인 경찰이었다고 한다. 사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던 중 1930년 대구감옥에서 자결하였다.
4. 박상희
1906년 경북 칠곡 약목면 출생. 일명 박주생. 1914년 가족과 함께 선산 구미면 상모리로 이주. 박정희의 형. 1920년 구미보통학교 입학.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도 학무관들의 취학 유도를 따라 4년제 보통학교에서 수학. 학제 개편 이후 5학년에 편입해 1925년 졸업.
그해 동아일보 선산지국에 입사. 중외일보 기자, 조선중앙일보 대구지국장, 동아일보 선산지국장 등으로 언론활동. 선산청년동맹 결성, 좌우합작 단체인 신간회 선산지회에서 간사 역임. 좌익계열이 대중운동을 활성화하고자 결성한 신간회에서의 활동은 박상희의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
1931년에는 다소 개량적이라고 평가받을 만한 ‘구미소비조합’ 이사로 재직했다. 박상희 선생이 ‘공산주의자’, ‘남로당 계열의 극좌’라는 오해가 있다. 그러나 박 선생은 조선공산당 참여경력이 없으며 ‘온건 사회주의’ 내지는 ‘진보적 민족주의’ 성향을 가진 것으로 보여진다. 또 인품이 넉넉하고 호쾌하였으며, 동생 박정희와는 달리 체구가 컸다는 전언이 있다.
여운형이 지휘하던 건국동맹의 일원으로 활동 중 체포되었고, 그 상태에서 해방을 맞이.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선산지역 내정부장과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푀 선산군 대표를 맡았다. 그 이후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 선산군지국 사무국장으로 선출. 이 같은 경력은 박상희가 중도좌익계열의 구미 지역 대표자였음을 증명한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노동자 봉기가 일어나면서 구미에서도 경찰서 습격이 일어난다. 이때 박상희 선생이 맡은 역할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우익 인사 살상을 막음으로써 민중의 분노와 지역의 평화를 모두 헤아렸다는 것이 중평이다. 사인도 확실하지 않다. 사태가 수그러든 다음 귀가하다가 경찰의 오인사격으로 사망했다는 유족 증언이 있다. 딸인 박영옥 씨는 훗날 김종필 씨와 혼인하였다.
박상희의 절친한 동지, 김천 출신 황태성은 박정희의 군사정변이 성공하자 그를 접할 목적으로 남파되었는데, 남로당 경력 등 사상 공세에 시달리던 박정희 정부는 황태성을 사형시켰다.
MBC 드라마 <제3공화국>에서 탤런트 김상중 씨가 박상희 선생 역을 맡았다.
5. 조귀분
1908년 출생. 본디 고향은 김천이다. 대구 신명학교를 졸업하고 최초의 여성독립운동 단체인 근우회의 창설회원이었다. 신간회처럼 좌우합작단체였던 근우회에서 조귀분 선생은 김천지회장 겸 중앙부회장을 맡았다.
(오른쪽)
김천의 저명한 항일활동가 황태성의 소개로 박상희 선생과 만나 혼인하여 구미 주민이 된다. 그리고 1946년 남편을 잃었으며, 대한축구협회장을 지냈고 현재 친박연합 대표인 박준홍 씨가 두분 사이에서 태어난 유복자이다.
MBC 드라마 <제3공화국>에서 탤런트 전양자 씨가 조귀분 선생으로 분했다.
조귀분 선생에 대해 알려진 바는 박상희 선생에 비해서도 훨씬 작은 편이다. ‘여성’과 ‘좌익’이라는 두가지 굴레가 모두 작용한 듯하다. 여성단체 근우회의 활동을 재조명하기 위해서라도 지역사회의 분발이 필요하다.
6. 허형식
자료 출처: 디지털구미문화대전 (http://gumi.grandculture.net/)
허형식(許亨植)은 1909년 11월 18일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에서 허필(許苾, 1855~1932)의 아들로 태어나 조국 광복을 위해 온 몸을 바쳤던 항일투사였다. 본명은 허극(許克)으로 알려져 있으나 호적에는 허연(許埏)으로 등재되어 있다. 한말 의병장 왕산 허위(許蔿, 1855~1908)의 종질이기도 하다.
허형식은 북만주 일대에서 동북항일연군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으므로 그의 활동이 바로 우리 민족해방투쟁사의 일환이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그가 이끌었던 동북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연군 제3군의 모체가 된 주허유격대는 조선인들이 대부분을 차지하여 일종의 민족 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당숙인 허위의 의병 투쟁에서부터 시작하여 허씨 가문의 남만주에서의 계속되는 항일 투쟁, 그리고 허형식의 북만주에서의 항일 무장 투쟁 활동은 단순한 개인의 투쟁 차원을 넘어서서 구미 지역 출신 한 집안의 항일운동이 의병 운동에서 독립운동과 적색 혁명 운동으로 이어지는 다양한 사상적 궤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1908년 의병장 허위가 일본군에 붙잡혀 순국한 후 계속되는 일본 순사들의 학대에 시달리던 허씨 집안은 간도로 망명하기로 결정하였다. 1912년 허위 유가족이 망명하고, 3년 뒤 허형식의 가족도 망명하였다. 이들은 망명 초기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1916년 류허현에 자리잡게 되었다.
1920년대에 일본이 간도 지역으로 침공해 오자 허필 가족은 헤이룽장성 주허현을 거쳐 랴오닝성 카이위앤현[開原縣] 리지아타이쯔[李家台子], 헤이룽장성 우창현[五常縣], 헤이룽장성 빈현(賓縣) 등지로 옮겨다녔다. 허형식은 빈현으로 이사한 1929년경부터 한인 공산주의자들과 활동을 같이하였다. 허형식은 1930년 초 빈현의 가판참(枷板站)에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허형식은 1930년 5월 1일 메이데이를 기념하는 시위와 일본영사관 습격에서 두각을 나타낸 후 1932년 빈현의 선전위원이 되었다. 1933년 10월 주허 반일 유격대 건립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1934년 6월 동북반일유격대 합동(哈東)지대가 건립되자 제3대대 정치지도원이 되었다. 이후 허형식은 본격적인 항일 무장 투쟁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1935년 1월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 제1독립사에서 선전부장과 제2단장을 지냈으며, 1936년 이후에는 동북항일연군 제3군 제1사 정치부 주임, 의동판사처(依東辦事處) 주임, 제9군 정치부 주임, 제3군 제1사 사장, 서북임시사령부 총참모장 등을 역임하였다. 1939년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이 편성되자 제3로군 총참모장 겸 산하 제3군장, 제3로군 총참모장 겸 12지대 정치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무장 투쟁을 주도하였다. 총참모장은 중국인을 포함한 동북항일연군의 최고위급 책임자로 허형식은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941년부터 일본이 북만주에서 활동하던 제3로군을 집중 공격하면서 커다란 손실을 입게 되어 소련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러나 허형식은 북만주에 남아 소부대 활동을 지휘해나갔다. 1942년 7월 말 허형식은 빠이엔[巴彦]·무란[木蘭]·뚱싱[東興] 등지에서 활동중인 소부대의 활동을 고취하기 위해 갔다가 8월 3일 경성현(慶城縣; 현 칭안현) 칭쏭링[靑松嶺] 샤오링허[邵凌河] 계곡에서 노숙하다가 만주국 토벌대의 습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중국 헤이룽장성 칭안현 당국은 1998년 10월 20일 허형식이 전사한 칭쏭링 입구에 허형식의 희생지임을 기념하는 비석을 세워 기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