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해상 실크로드
서기 600년경 물물교역차 아랍 상인들이 오간 해상실크로드 돛머리는 저두산(猪頭山, △347m)자락에 있다. 강진만 바닷가를 따라 국도 23호선이 나있고 칠량의 희목재에서 고바우까지의 4km는 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데, 사시사철 계절마다 바뀌는 아름다운 풍광으로 유명하다. 이를 강진만의 구십포라 하며 수백 년 전부터 바다를 오갈 때 배를 대던 순수한 우리말의 항구이며, 서쪽건너 도암(월구지)에서 바라보면 참으로 아름답게 보여서 감탄이 저절로 나게 하는 명승지이기도 하다. 마을의 명칭은 저두산(猪頭山)에서 따오고, 강진만의 구십포(구강포)는 저두산의 구십동(九十洞)에서 유래한다.
저두리의 유적으로는 “별공(別貢)으로 쇠붙이를 바치던 부리터 즉 야철지(冶鐵址)에 해당되는 안골 밭과 바재밭이 있고, 잡공(雜貢)으로 옻칠을 바치던 칠재소(漆材所)가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칠촌(漆村)으로도 불렀다” 한다.
내려오는 전설도 있는데 “길을 새로 낼 때 희목재에서 피가 나오고, 도둑골에는 금절구통이 묻혔다”고 하며 명당 터로는 조리, 오시발복, 삼밭재 등이 있기도 하다.
나. 저두산과 구십동
저두산과 구십동은 그 이름을 잊은 지 오래이다. 그러나 그 기록은 1723년부터 1885년까지 기록된「호남좌도 금릉현 천태산 여지승람」에 있다. 먼저 저두산은 계국(界局)조에 있는데 ‘천태회위내백호 이위저두산 이외백호(天台廻爲內白虎 以爲猪頭山 爲外白虎)’라 하니 설명하면 “천태봉이 감싸고 돈 곳(동쪽)은 내백호가 됐고, 내려 뻗힌 곳(서쪽)은 저두산이 됐다” 이다.
구십동은 산천(山川)조에 있는데 ‘저두산 재천태지외 유구십동 봉학유수 위승관(猪頭山 在天台之外 有九十洞 峯壑幽邃 爲勝觀)’이라 하니 내용은 “저두산은 천태봉우리의 바깥쪽에 있으며 구십동도 있다. 산봉우리와 골짜기들이 그윽하고도 깊숙해서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면서 즐길만한 경승지이다”라는 뜻이다.
현재의 호칭은 하저를 기준으로 북에서 남으로 적으면 궁시리, 가마골, 양지쪽등, 안고랑(구십동), 삼밭재, 새종기, 방애골, 매물등, 삼바우, 고바우가 있다. 또 구십동에 대해서만 북에서 남으로 적으면 양지등, 땅까시바탕, 지챙이, 대소잠박, 옹지샘, 홈, 도둑, 밤나무골, 대소요등, 시리봉(두류봉, 頭流), 홍두깨잔등, 조리명당, 중산골, 벙구나무골, 동백나무잔등, 삼밭재가 있다. 등성이는 양지, 대소요, 홍두깨, 동백, 삼밭이고 골짜기는 지챙이, 대소잠박, 옹지샘, 홈, 도둑을 합친 합수골, 시리봉골, 중산골이 해당된다.
다음으로 샘은 옹지, 벙구나무, 요등, 시리봉, 중산골에 있으며 집터로 추정되는 곳은 중산골 바우밑과 도둑골에 있고 논은 요등샘발치의 댓마지기, 시리봉골 서너다랭이, 중산골의 칠팔다랭이가 있으며, 벙구나무골의 시누대와 동백나무잔등 묘지에 동백나무가 있었다.
사람이 사는 곳마다 길지라는 곳이 있는데 하저마을은 조리명당, 오시발복, 닭이울터 등이 있다. 첫 번째는 구십동, 두류봉 정상에 있으며 금릉8학사와 쌍효자로 알려진 창녕 조씨 몽린의 묘소며, 두 번째는 삼바우 길 위에 있는 진주 강씨 묘소며, 세 번째는 삼밭 재에 투묘했다 파냈던 곳이 해당된다.
다. 황가오리
하저의 고기잡이 역사는 아주 오래 됐지만 시작은 알 수가 없다. 옛 방법을 적으면 돌을 쌓아 잡던 독살, 대발로 막아 잡던 덤장, 그물을 둘러친 개매기 등이 있다. 개매기는 조석 간만의 차가 큰 바닷가 갯벌위에 그물을 쳐놓은 후 밀물 때 조류를 따라온 물고기 떼를 썰물 때 가둬 잡는 전통적인 고기잡이 방식이다.
하저 앞바다에는 독살터가 남아 있으니 예전에는 다섯 곳이고, 덤 장터는 삼바우 둘, 모래등 둘, 횟집 앞 하나이다. 수면에는 항상 상쾡이(돌고래)떼가 떠다니고 뻘에는 반지락, 새꼬막, 참꼬막, 꼬막, 비틀이, 멩기고동, 소랑고동, 뻘떡기, 하랑기, 설키가 나오고 물속은 오징어, 줄치, 넙치, 황가오리, 세대, 장대, 농어, 광어, 돔, 쎄미, 한새치, 미금장어, 중하, 대하 등이 잡혔다.
라. 도사공(都沙工)
배를 부리는 일을 업으로 삼던 사람 중에 으뜸을 말하며 하저와 월구지 사이에 1975년까지 운영하던 나룻배와 관계된다. 조선왕조실록 1448년 8월 27일의 기록에 ‘연해주현의 여러 섬과 곶(串)의 소나무가 잘 자라는 땅을 찾아가 기록하라’는 내용에 “강진은 월이곶(串), 좌곡곶, 산달도, 완도, 고시도, 선달도가 있으니...” 구십동과 월이곶의 나루는 이 무렵부터 시작이 됐지 않았을까 추정해 본다. 폐지할 때는 이재수와 곽상철이 운항했고 배는 노를 젓던 돛단배였다.
그 때에는 주막이 하저에 두 군데 월구지에 한군데 있어 바닷길을 건너 오가는 이들의 슬픔과 기쁨을 함께 하였다 한다.
마. 명당과 정 총각
옛날 저두리에 정씨 성을 가진 총각이 있었는데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한 분을 모시고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모친이 병을 얻어 자식의 극진한 봉양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슬픔에 잠긴 총각은 묘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모친을 가매장한 후, 어느 날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는데 한 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마침 가져온 점심 도시락을 함께 나눠 먹은 총각의 딱한 사연을 들은 그 스님은 모친을 위하여 묘지를 한 곳 잡아 주었다.
총각은 감사의 마음으로 좋은 날을 잡아 모친을 이장시키기에 이르렀는데, 때는 엄동설한 겨울이라 갑자기 눈보라가 앞을 가릴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땀을 흘리면서 묘자리를 파고 있는데, 마을앞 바닷가에 (중국) 대상선 한 척이 다가와 이 총각을 부르더니, 배를 잠시 ‘맡아 달라’ 이르고는 전마선(큰 배와 육지를 연락하는 배)을 타고 넓은 바다로 떠나 버렸다. 그 뒤 들려오는 소문에 그 선원들이 폭풍으로 침몰되어 모두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며칠을 기다린 총각은 그들에게 아무런 소식이 없자 마침내 그 배 안에 들어가 살펴보니, 고급비단이 가득하여 그 비단을 팔아 모친의 장례를 성대하니 치르고도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는 정총각의 효성이 지극하여 천지신명(하늘)이 명당을 내려주고, 그 즉시 발복하였다고 하는 풍수설에 의한 전설로 풀이된다. 그래서 이 지방에서는 묘를 잘 쓰고 집에 돌아오면, 먹을 음식이 갑자기 생기게 되었다느니, 자식들이 출세하게 되었다느니 하는 설이 항간에 회자되고 있다. 그 뒤 정총각은 훌륭한 규수를 아내로 맞아 백년해로 하였다. 그러나 그 묘가 어디 있는지, 정총각이 누군였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출전, 강진향토지. 1978년).
바. 영화 ‘봄날은 간다’의 촬영장소
두 남녀의 짧은 만남과 헤어짐 속에서 사랑에 대한 긴 성찰을 담아냈던 허진호 감독의 영화 '봄날은 간다'는 감정의 흐름이 유연하게 펼쳐지는 이야기 자체로 큰 호응을 얻었다.
또 영화 속에 잔잔하게 녹아 있는 풍경들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강진군 대구면 저두리의 하저마을도 그 중 하나다. 바로 그 곳, 청보리와 살구나무가 유난히 아름다웠던 그 곳이 이제는 복어 양식장에 들어서 살구나무만 뎅그라니 비탈길에 서 있다.
“나도 그 영화를 봤어. 한 5분정도 우리 마을의 살구나무가 나와. 도로에서 보리밭 뒤로 살구나무가 있는디, 우리가 봐도 멋있든마. 그런데, 묵구(먹고) 살라한께, 그것(양식장이)이 만들어지고 그런 것이 아니여(겠어)?” 중저리 차경환(61세)의 이야기이다.
‘봄날은 간다’를 본 사람이라면 반드시 기억할 수 있는 풍경이 있다. 푸른 보리가 바람에 흔들리며 드넓게 펼쳐지고, 상우(유지태)는 그 위에서 마이크를 양팔로 벌린 채 바람과 청보리가 만들어내는 소리를 녹음한다. 보리밭 가장자리로 오래된 살구나무 두 그루가 서 있고, 넓은 바다는 아주 조용히 가라앉아 있다. 영화 '봄날은 간다'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장면이다.
강진읍에서 대구면을 향해 달리다 보면 강진만이 길게 이어진다. 그 바다 중간인 저두리 하저마을이 바로 그 풍경을 품고 있는 곳이다. 사실 이곳은 영화 '봄날은 간다'가 아니더라도 즐겨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봄이면 영화에 담긴 그 장면을 잡기 위해 화가나 사진 작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영화가 개봉된 후 그 관심의 폭이 일반에까지 확산되었다.
그런데 이 곳에 최근 땅 주인이 복어 양식장을 지었다. 불과 일이년 사이에 야윈 살구나무만이 예전의 그 곳임을 증명할 뿐 보리를 키우던 밭은 두껍게 다져지고, 콘크리트로 뒤덮였다.
최근 인기 있는 영화나 방송 드라마의 촬영지를 관광명소로 부각시키려는 지자체들의 노력에 비추어 보아도, 촬영지를 보존하려는 주민들의 의지가 부족했다. 이제 한 번 사라지고 나면 그 아름다운 자연은 복구하기엔 어려운 것이기에 아쉬움은 더욱 크다. 매년 하저마을 해변과 살구나무에 봄날은 다시 찾아오겠지만, 그곳에 영화 속의 그 아름다운 '봄날' 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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