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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비닐 순례자가 숙식료의 5분의 3을 팁으로 내놓았다면....
간밤에, 아침출발시간을 6시 이전으로 정했기 때문인지 새벽5시부터 거동한 미소노.
일본의 아침식사는 토스트에 우유 또는 커피 1잔이면 되는 까미노와 달리 성찬이다.
500엔에 이런 성찬을 2끼나 차린다는 것은 웬만한 봉사정신으로는 못할 일일 것이다.
게다가 미소노는 오니끼리(御握り/주먹밥) 이상의 도시락까지 준비했다.
2끼 식사를 포함한 숙식료는 2.500엔이다.
이에 팁(tip)1.500엔을 더해서 내놓은 1.000엔권 4장에 미소노는 당황해 했다.
왜 1.500엔인가.
500엔을 더해 3.000엔을 지불하면 500엔이 거스름으로 돌아올 확률이 높다.
1.000엔을 더하면 동전500엔 때문에 예의스럽지 못한 느낌이다.
4.000엔이면 다른 가능성을 완벽하게 배제한 팁1.500엔이 된다.
무엇보다 미소노는 4.000엔을 받을만 하도록 '이치고이치에'의 성의를 다했다.
시설은 젠콘야도와 료칸의 중간쯤이지만 숙식료가 수고에 비해 과소하므로 정한 값의
5분의 3을 팁으로 줬다 해도 결코 과도한 지불이 아니다.
내가 통이 큰 것은 더욱 아니며 한국 영감의 위신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하긴, 나로서도 전무후무한 일이며 이런 나를 누가 통비닐 속의 순례자라 하겠는가.
9월 15일(月), 6시 정각에 화이트하우스(旅の宿 美園)를 나와 55번국도로 진출했다.
타노역(田野驛)만이 첫 열차를 대비하고 있을 뿐 바글거리던 널따란 미치노에키(田野
驛屋)도 아직 잠들어 있는 이른 아침.
목욕도 하고 잘 먹고 편안한 밤을 보냈는데도 유난히 더 말썽을 부리는 다리.
눈치 보지 않고 무시로 주저앉을 수 있으니 나홀로인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일본 볼런티어 서포트 프로그램인 '후레아이(만남)해도(海道)'에 만화(滿花/花いっぱ
い)추진회가 가꾼 화단의 싱그러운 아침 인사도 맘 편히 받을 수 있고.
27번 코노미네지로 가는 헨로미치는 이른 아침이기 때문인지 걷는 사람이 없고 차량
왕래도 뜸한 국도 55번을 따라 야스다초(安田町)에 들어섰다가 국도를 벗어난다.
야스다강을 건넌 후 토타니(東谷) 마을길과 포장 농로를 지나고 토사쿠로시오철도를
건너면 보행로는 돌고도는 차도(車道) 가로지르기를 거듭하는 산길(竹林山)이다.
오르는 길가의 농장에 무거운 배낭을 맡기고 가벼운 몸으로 올라갔다.
(부지런한 농장주 영감의 호의가 이 때는 고마웠지만 하산 때는 다른 마음이었다)
삼한정벌의 성공을 기원하던 곳을 애써 찾아가다니 온전한 정신인가
코노미네산(山)의 해발450m 지점에 자리잡은 코노미네지(神峯寺).
쇼무천황(聖武/재위724~49)의 칙명에 따라 교키(行基)보살이 십일면관음상(十一面
觀音像)을 조각해 본존으로 안치하고 창건했다는 사찰이다.
훗날(809년/大同4)에 코보대사가 가람을 건립, '칸온도'(觀音堂)라 하고 27번 후다쇼
(札所)로 정했는데 타쓰에지(19번)가 시코쿠의 총관문이라면 이 사찰은 토사(土佐)의
관문이란다.
한데, 내가 가진 안내책에는 "코보대사가 쇼무천황의 칙명에 따라...."라고 되어 있다.
코보대사는 헤이안시대 초기의 승려로 쇼무천황 때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건만.
칙령을 내린 천황이 헷갈리도록 많아서 걷는 동안에 교키와 코보가 활약한 나라(奈良
/710~794)와 헤이안(平安/794~1185) 시대의 천황과 연호를 숙지했는데 딱 걸렸다.
안내책도 믿지 못하겠고 황당한 안내판, 해설판도 적지 않은데다 관리마저 소홀한 길.
이토록 허술하게 취급하면서도 UNESCO문화유산 대접받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이런
길을 걷고 있는 늙은이도 다 한심한 사람 아닌가.
그보다, 코노미네지는 나로 하여금 오르기를 많이 망설이게 한 사찰이다.
진구황후(神功皇后)가 삼한(三韓)정벌의 승전기원을 목적으로 아마테라스(天照大神)
를 주제신(主祭神)으로 하여 여러 신을 제사했다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진구는 15대 오진(應神)천황의 모후로 남편(仲哀천황/192~200)의 급사 후 201~269
년(?)의 섭정기간에 오진을 임신한 몸으로 신라를 정벌했다는 여인이다.
신라를 복속시켰을 뿐 아니라 고구려, 백제까지 싸우지 않고도 조공을 바치게 했다는
허무맹랑한 설화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신라가 건국 초부터 왜구(일본)의 침략에 시달린 것은 역사적 사실이며 결국
한 때나마 그들의 지배를 받았던 치욕을 안고 사는 늙은이의 발길이 선뜻 내키겠는가.
본당과 대사당을 오르내리는 150(?) 돌계단 양쪽으로 수령 수백년의 고목과 오밀조밀
하게 정비된 일본식 정원이 시각적으로는 아름답다.
질병치유에 영험있는 물로 알려진 종탑 뒤 절벽 바위를 흐르는 석간수(石淸水).
마시려는 헨로상이 끊이지 않고 평일인데도 버스헨로상들이 북적대고 있는 납경소.
헨로미치 -1 보름에 처음 보는 장면들인데 월요일이지만 일본의 연휴라 그런단다.
본래, 신불(神佛/일본의 天照大神과 부처 등)을 합사(合祀)했지만 메이지초기의 신불
분리령으로 아마테라스 등의 신사만 남기고 폐사되는 등 곡절이 많았다는 사찰인데.
붐비는 납경소에서 하마터면 실수할 뻔 했다.
한 단체의 청년이 6.25동란 때 인연이 된 아우의 일본인 사위로 보여서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다가 멈추고 그의 옆에서 얼쩡거렸다.
맞다면 그가 나를 먼저 알아볼 것이라고 생각되어.
어떤 반응을 기다리다 못해 그에게 "한국을 아느냐"고 영어로 물었다.
한국을 모른다면 그는 내가 아는 청년이 아닐 것이기에.
한국을 모를 뿐 아니라 4단어의 간단한 영어(Do you know Korea)도 모르는 청년.
간밤에 미소노가 추천한 코노미네산 전망대에 오르기를 포기했다.
코보대사의 법명 쿠카이를 따라 공(空)과 해(海)의 전망대라지만.
삼한정벌 성공 기원지라는 이유만으로도 달갑지 않은 코노미네지인데 아무리 최고의
조망대라 해도 신사에 참배하러 가는 꼴이 되는 곳을 어찌 스스로 가겠는가.
신사참배를 강요했던 일제에 대한 소년의 적개심이 산수(傘壽)의 늙은이가 되어서도
단단한 응어리 그대로일 줄이야.
코노미네지에서는 되돌아 내려가는 길 외의 하산로가 없으나 중간쯤에서 있는 지름길
농로 앞에서 잠시 억울하다는 생각, 원망하는 마음이 일었다.
이 지역 지리에 밝을 텐데 영감은 왜 그렇게 안내했을까.
여기 민가에 배낭을 맡기고 올랐더라면 되걷느라 돌지 않고 쉬이 하산할 수 있으려만.
더 내려가다가 재회한(올라오는중인) 알렌(오스트랄리아)에게 나를 닮지 말라고 당부
하고 배낭 있는 농장으로 내려갔다.
농장 영감은 냉장고에서 500ml페트병 찬물을 꺼내주고 어수선한 의자들을 정비하며
쉬어가도록 권하는 등 호의적이었다.
이 영감도 까미노의 노인들처럼 무료하고 사람이 그리운가.
내가 한국 늙은이임을 알고는 적잖이 놀란 표정인 71살 영감은 역사를 공부했나.
일본의 한국 식민통치 시기에는 어린애였을 그가 과거사를 들먹였으니.
그러나 그는 전형적인 일본인이다.
황당하게도 "무카시와 무카시"(むかしはむかし/과거는 과거)라는 일본인.
과거보다 미래가 중요하니까 옛일은 잊어버리자는 이 영감이야 말로 골수일본형이다.
죄과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진솔한 사과는 커녕 이런 식으로 얼버무리며 토모니(共に
/더불어) 운운하는 저들을 상종해야 하는 일본땅을 스스로 찾아간 늙은이.
더구나, 삼한시대(삼국시대)까지 소급해서 적개심에 점화하는 이 지역에서 잠시지만
한심하다는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쿠카이(코보대사)는 기독교 학습을 한 것일까
원점으로 내려와 토노하마(唐浜)마을을 지나는데 조개화석 안내판이 시선을 끌었다.
코보대사와 관련 지은 조개 이야기라 그랬을 것이다.
300만여년 전의 쿠로시오(黒潮/해류) 상황을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지층에서 조개,
상어의 이빨 등의 화석이 발견되었는데 코보대사와 관련된 전설이 있다니.
조개를 굽고 있는 현장을 지나가던 코보대사가 조개를 달라고 청했지만 현장사람들은
먹지 못하는 조개라며 주지 않았다.
대사가 그 곳을 떠난 후에 그들이 조개를 먹으려 하였으나 조개가 굳어서 먹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는 욕심쟁이들을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 대사가 인근 조개들을 모두 토석
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라는 것.
24번 호쓰미사키지의 '먹지 못하는 감자'와 똑같은 구조의 전설이다.
다만, 감자의 이야기는 시대적으로 있을 법한 일이지만 300만년 전의 화석이 1.200년
전(800년대)의 사람(코보대사)과 관련이 있다니 말이 되는가.
전설이란 황당하기는 해도 있을 법한 일인데 이 경우는 너무 심하다.
전지 전능한 신이라도 이 억겁에 해당하는 시간은 극복할 수 없을 것이거늘.
전번에 텐구몬도(天狗問答)와 이치류만바이노카마(一粒万倍の釜)를 언급했다.
텐구몬도의 주인공 코보대사는 자기를 꼬드기던 사탄을 물리친 예수와 흡사하다.
코보가 쌀 한 톨을 만배로 늘려서 기아를 해결한 것은 예수가 떡 다섯덩이로 오천명을
먹인 것과 다를 것 없는 것 처럼.
수만리의 공간을 극복하는데 800년의 시간이 필요한 셈인가.
시장했을 때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발견한 예수는 먹을 열매를 기대했으리라.
한데 아무 것도 달리지 않아 실망한 그는 나무를 저주했다.
제 철이 아닌 것을 알았으면서도 왜 그리 심했는지.
비유법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해도 제자의 물음에 대한 대답도 석연치 않은 비유다.
러셀(B. Russell/1872~1970/영국철학자)이 자기가 기독교인이 아닌 이유(Why I am
not a Christian) 중의 하나로 꼽을 정도로 충격적이다.
한데 코보대사의 감자와 조개에 대한 처사도 그랬다.
달라는데 주지 않았다 해서 아무도, 영영 먹지 못하는 것으로 만들어야 했는가.
쌀 한 톨로 만인을 구휼한 것과는 전혀 달리 매정하고 도덕도 인격도 찾아볼 수 없다.
예수와 코보의 만민 구원과 중생 제도는 목소리가 다를 뿐 궁극적으로는 한 뜻일 텐데
참으로 불가사의한 코보의 예수 답습.
정녕, 당나라에서 기독교 학습을 한 것일까.
망망한 태평양 해안로
코치현에 들어선 이후 코노미네지 외에는 연3일 태평양 해안로다.
코노미네지에서 내려오면 헨로미치는 다시 국도55번이 되어 아키시(安藝市) 지역의
해안을 따른다.
토사쿠로시오철도를 왼쪽에 끼고 가다가 시모야마(下山)마을에서 좌우위치를 바꾼다.
토사만의 오야마곶(大山岬), 해안 미치노에키 오야마 등을 지나 코노(河野) 마을에서
국도와 방파제길 중 택일하여 이오키(伊尾木) 마을까지 걸을 수 있다.
이오키강을 건너면 아키시 다운타운이다.
코멘 - 나하리선(線) 철도의 여기, 시모야마 ~ 이오키의 약 4km는 완벽한 해안로다.
태평양 바람을 온몸으로 안으며 시각적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해안쪽을 특수
제작한 관광용 전동차도 간간히 운행한단다.
이 전동차를 타고 이 구간을 통과해 보고 싶었는데 시모야마역을 지날 때 운 좋게도
곧 오는 열차가 바로 그 전동차란다.
"손과 얼굴을 창 밖으로 내밀지 말라"는 주의사항이 붙어있다.
창이 없고 추락 방지용 난간이 가로로 설치되어 있을 뿐인데 무슨 창밖?
시코쿠헨로 1.200km에서 미소노의 호의 때문에 걷지 못한 약 20km와 이 구간 4km 등,
60분의 1(1.200분의 20) 정도는 불로소득한 셈이다.
210엔짜리 1구간을 탐으로서 소원성취는 했으나 싱겁기 짝없는 체험이었지만.
그래도, 이 체험이 이후로 유사한 유혹을 차단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므로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닌 듯.
번잡한 도심을 피해 해안으로 나가 무심코 걷다가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에서 잘못되었는지 실컫 걸어서 도심을 벗어나는 중이라고 생각했는데 아키강의
태평양 합류지점에서 막히다니.
역으로, 지나온 쪽으로 가고 있지 않은가.
아마도 4km남짓 헛걸음을 한 것이다.
관광용 전동차를 탐으로서 방향감각이 헷갈리게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키어항 휴게소에서 잠시 쉬며 하기모리 젠콘야도를 오늘의 목적지로 정했다.
오후 2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므로 10km쯤 되는 그 곳에 해 안에 당도할 수 있으니까.
히시모토 젠콘야도에서 눈여겨 보았을 뿐인데 마치 맞춤형인 것 처럼 되었다.
간밤에 배터리충전을 충분히 했으므로 더 가도 되겠는데 미리 정한 것은 오후 들어서
빗방울이 떨어지고 날씨가 수상쩍기 때문이었다.
하늘에는 불순해진 날씨도 아랑곳없이 패러글라이딩에 도취된 마니아도 있지만.
아키어항 이후의 헨로미치는 국도와 거의 동행하는 보행자 전용로다.
아무리 차로에 인도가 있기로 편안함이 전용로에 견줄 수 있는가.
아나나이(穴內),야마다(山田),야나가레(八流),아카노(赤野) 등 마을을 지나 게이세이
무라(藝西村)까지 10km 넘는 길은 넋놓고 가도 잘못 들 염려 없는 해안길이다.
코보대사가 수행했다는 바위(千丈岩)에 1924년(大正13) 야나가레의 타나베(田邊)가
일도삼례하며 조각한 후도손(不動尊)을 안치하고 건립했다는 코쿠라쿠지(極樂寺)와
고텐노하나(御殿ノ鼻) 일대에서 꺾이기는 해도 동에서 서로 곧게 뻗은 직선길이다.
특히 아카노 이후 와지키(和食), 젠콘야도 하기모리가 있는 니시분(西分) 까지 해안숲
길(栗山映子의 遍路接待所, 해수건강풀, 琴ヶ浜松原야외극장)은 낭만적이다.
시코쿠길의 총 길이 1.600km에서 코치현(高知縣) 구간은 600km라는데 야나가레에서
코토가하마(琴ヶ浜)의 늙은 해송이 우거진 약 4km의 사장(砂浜)은 달(月)의 명소란다.
9월 초순~중순에 달구경(觀月)잔치가 벌어진다는데 날씨 탓인지 이 날에는 없었지만.
자전거길을 겸한 해변로라 높은 방파제 때문에 태평양 바다 밖에 볼 수 없서서 때로는
지루한 느낌을 주는 것이 흠이라 할까.
하기모리와 젠콘야도
아카노를 지나면 행정구역은 아키시에서 다시 아키군으로 바뀌고 와지키역을 지나서
얼마 가지 않아 하기모리 젠콘야도다.
토사쿠로시오철도의 니시분역(西分驛) 고가도 밑에 들어선 가건물 젠콘야도(善根宿).
"젠콘야도 하기모리"라는 한글 가로 간판도 있다.
'喜, Hee, ヒ' 등 이니셜(initial)과 낯익은 엠블럼(emblem)으로 보아 한국여인 센다스
(先達)라는 '최O희'의 작품인 듯 싶다.
문에 붙어있는 안내대로 전화했다.
내 스마트폰으로 일본인과 나눈 첫 통화다.
곧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문을 열어준 영감이 하기모리(萩森).
내가 80살의 한국영감임을 알고난 73살(?/나이를 말했는데 기억이 가물가물) 그는 내
건강 걱정을 하며 몇가지 당부를 한 후 지도책을 꺼내란다.
바야흐로 오소리티(authority) 과시 타임?
책장을 넘겨가며 줄을 긋고 O X 표시 하기를 전광석화로 끝낸 하기모리.
남은 길 걷기를 자기가 표시한 대로 실행해야 고생을 덜 한단다.
건강이 걱정되는 늙은이를 위하는 마음은 고맙지만 무례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까미노를 전혀 모르면서 겨우 1.200km 헨로미치로 까미노를 임의로 재단하려 드는
불손한 사람?
(적잖이 도움이 되기는 했으나 그는 "순례자란 누구인가"를 모르거나 간과하고 있다.
고생이 두렵다면 그는 이미 순례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다미바닥에 침구가 비치되어 있는 분리된 2동으로 남녀를 구분하며 1박이 원칙인
(부득이한 경우 2박 허용) 다른 젠콘야도들과 달리 숙박일수에 제한이 없단다.
이른바 홈리스(homeless), 헨로미치를 떠도는 직업적(?) 헨로상들에게는 하기모리
젠콘야도가 보금자리에 다름 아니겠다.
특히 장마철이나 태풍이 몰려올 때는 그들의 낙원일 것이니까.
그가 앞장서 안내한 마트에서 저녁과 내일 낮까지의 먹거리를 구입한 후 그와 헤어져
돌아와서 어두워지기 전에 저녁 식사를 마쳤다.
전기가 없기 때문이었다.
밥은 먹지 않고도 잘 수 있으나 모기향 없이는 그 일이 불가능한 시코쿠.
밥 이상의 필수인 모기향 준비는 헨로상 각자의 몫이지만 전기는 건물의 기본시설에
속하건만 전기가 없다니.
헨로 코야(遍路小屋)에도 콘센트(concentric plug)가 있고 여기 젠콘야도 앞에서도
가로등이 어둠을 몰아내고 있으나 정작 방안에는 없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까.
전기요금이 부담되기 때문일까 전열기 사용에 따른 화재 위험의 예방차원일까.
전자가 이유라면 전기 사용료를 따로 받으면 되고 후자의 경우라면 대책이 없다.
정신치료 외에는. <계 속>
미소노(旅の宿 美園/위 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