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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基鎭 - 투철한 역사의식와 현실인식
이재창
八峰 김기진(1903, 6, 29~1985)은 충북 청원군 남이면 팔봉리에서 태어났다. 1920년 일본 릿쿄대학 영문학부 중퇴, 1923년 매일신보 시대일보 중외일보 등에서 17년간 기자생활을 했다. 6․25때는 북한군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기도 했다.
1922년 일본 유학시 신극운동 <토월회>를 참여했고, 김복진 안석영 이익상 박영희 이상화 등과 <파스큘라>라는 문예단체를 만들어 인생을 위한 예술을 지향하는 새로운 경향의 문예운동을 전개하였다.《백조》에 시와 수필을 발표하였으나, 일 유학시 팽배하던 사회주의 사상에 입각한 그는《백조》동인들의 번뇌와 자조를 도피적 영탄조로 규정하기도 했다. 1923년《개벽》에 실린 <클라르테운동의 세계화>를 시작으로 자신의 문학적 신념인 프롤레타리아 문학이론을 폈으며, 1925년 <카프>라는 예술가 동맹을 결성하면서 사회주의 문학운동을 본격화 했다.「붉은 쥐」「불이야 불이야」「젊은 이상주의자의 死」등의 소설은 그가 신경향파에서 프로문학으로 발전하여 카프의 이론적 실질적 지도자로 활동하기까지의 대표적 작품이다. 1920년대 후반 예술대중화론이 프로문학측의 반발을 받았고, 카프 1․2차 검거사건을 계기로 그는 김남천 임화 등과함께 카프를 해체했다. 그는 80여편의 비평문 외에도 장편소설, 시, 시조 등의 작품을 남겼다. 1985년 그가 타계한 뒤 그의 유작인 시조작품이 문학사상지에 의해 발굴되어 그의 문학활동의 폭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생활의 문학에서 계급의 문학으로 전환한 그의 문학적 신념이 드러나 있다.「붉은 쥐」는 경향성을 가진 소설의 선두주자로서 문학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며, 그가 주도한 카프문학은 한국문학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형성하기도 했다.
박영희와 함께 이론적 지도자였던 그는 1938년 시국대응 전선사상 보국연맹의 결성위원으로 참가한 것을 계기로 친일노선으로 전향하였다. 황도정신을 문예생활의 지표로 삼아야 한다는 평론과 징병 및 학도병의 출진을 권유하는 시「신세계의 章」등과 시조「대동아전송가」등을 통하여 친일어용의 행각을 해 附日문학의 오욕을 한국문학사에 남기기도 했다.
(……)
푸르른 저 강물은 발아래 말이없고
단풍진 버들닢은 뚝 우에 설레이네
이 강에 피눈물 뿌린 젊은 사람 몇인고
연기는 남쪽으로 마음은 북쪽으로
광야의 西켠으로 저 해는 지는고나
이대로 한없이 가면 어느 님을 뵈오리
님중에도 그리운님 별 중에도 저 붉은별
아름다운 이름 갖인 오로라 분명하네
저밭에 일하는 동무 나와 함끼 갈거나
(……)
질펀한 輸城平野 트럭터 농장되고
콩크리트 共同住宅 이땅에 세워질 때
그 때가 언제인가 어서 바삐 갑시다
-「관북기행」에서
김기진은 소설가로서 그리고 식민지적 모순과 시대적 상황을 직시하고 극복하려한 프로문학의 평론가로 문명을 떨쳤지만 그에게도 역시 우리의 민족시에 애정을 가진 행동주의 작가로 보인다. 당시대의 많은 문인들이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으로 한글 작품이 극도의 제약을 받는 상황에서 애국애족이나 광복을 주장하는 대부분의 민족진영의 작가들은 시조 창작이 우리의 것을 찾는 하나의 방법으로 이용한 것처럼 생각된다. 김기진 역시 그러한 범주 속에서 이해 할 수 있다. 대다수의 시인들이 전통적 형식과 자연주의로 귀의하는 과정에서도 그의 시조는 상당히 현실적이고 미래적이다. 위에 인용한 작품에서도 기행시조를 통한 당시대의 고뇌를 읽을 수 있다. 망국의 설움 피눈물로 뿌리고 두만강을 건너는 젊은 애국지사들의 한과, 억압의 일제를 청산하고 자유의 나라나 광복한 나라의 임을 만나고 싶은 심정과, 밤하늘의 별 오로라와 함께 그리고 우리 동포들과 더불어 한 길을 가겠다는 의지와, 그러한 의지의 노력 끝에 언젠가 다가올 우리의 미래상을 제시하고 있다. 트럭터와 콘크리트 공동주택이 그 시대에 상상할 수 있었다는 게 놀랍다. 문학 이론가로서 가지는 그의 시선이 결코 만만치 않고, 그만큼 그의 시조에는 당시대의 상황을 고발하는 투철한 역사의식과 현실인식이 짙게 나타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