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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수필미학 원문보기 글쓴이: 여세주
(1) 진정한 성공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다. 그가 존재하던 곳에서 벗어나면 낯선 환경 적응에 제법 시간이 걸리고, 심한 경우는 도태되기도 한다. 인간들이 사는 사회는 군집 생활을 하는 꿀벌이나 개미처럼 완결된 조직이 아니다. 우주에서 하나뿐인 지구를 30억 인구와 동물들이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사회는 완성되지 않아서 다른 문화와 문화가 만나는 곳에는 틈이 있다. 틈과 틈의 간극에 따라 다르겠지만 경계에는 무장된 보초가 있고, 끊이지 않고 들려오는 삐걱대는 소리는 단잠을 방해한다. 때때로 문화가 발전했다고 자부하는 지역에서는 다른 지역의 문화를 수준 낮은 것으로 여겨 인종 차별이 행해지고 있다는 소식이 심심찮게 들리는 오늘이다.
몇 달 전, 딸아이가 미국의 대학원으로 진학을 했다. 떠나기 전, 한국의 많은 매체에는 딸아이의 인터뷰가 실렸다.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렵다는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선발’된 것이다. 학생신분으로서는 최고의 혜택을 누리는 행운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가방을 챙기는 딸아이 표정은 즐거워 보이는 것만은 아니었다. 앉은뱅이저울을 앞에 두고 40Kg들이 큰 가방을 들었다 내렸다하며 무게를 조정한다. 미국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 필요한 물품들은 다 있을 텐데 속옷, 이불, 베개, 된장, 고추장, 김 등이 제법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입을 거리, 먹거리뿐 아니라 생각까지 토종 한국인이다. 솟아오르는 짐의 머리를 꾹꾹 눌러가며 키 높이까지 맞춰야하는 모습에서 앞으로 아이에게 펼쳐질 고생길이 훤히 보였다.
한국과 미국 사이에는 약 11시간의 시차가 있다. 목소리 듣기조차 쉽지 않다. 저녁에 문득 차를 마시다 플로리다에 교환학생으로 갔던 학부 때의 딸아이 말이 떠올랐다. ‘엄마, 미국에 딱 내리니까 이상하게 사람들 말을 한 마디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 방학이라 가게는 문을 다 닫았고 그래서 이틀 동안 아무 것도 안 먹고 굶었어.’ 벌써 서너 해가 흘렀고, 이번에는 짐 속에 햇반을 챙기는 것도 보았지만 나의 걱정은 가시지 않는다. ‘전화를 할까 말까, 아니야 아직 자고 있겠지? 그곳은 지금 새벽? 아니면 이른 아침?’ 혼자서 시계 바늘을 앞으로 돌렸다, 뒤로 물렸다를 반복하고 있는데 ‘딩동’ 전자편지가 왔다. 환하게 웃고 있는 딸아이의 사진 옆에 장문의 편지가 실렸다. 감탄사 곁에 다섯 개의 느낌표가 훈장처럼 붙은.
“우와우와!!!!! 벅차는 마음이 주체가 안 된다ㅜㅜ 신입생 주제에 겁 없이 음성학 스터디 참여하겠다고 갔는데, 프리젠테이션 할 논문 주제 고르라길래 ISIB에 대한 논문 발표하겠다고 하니까 옆에 계시던 여자 분이 자기가 ISIB 관련 논문 쓴 거 아냐고 하시네? 아, 신입생이라 몰랐다고, 죄송하지만 이름이 어떻게 되냐고 여쭈었더니 Tessa Bent래...... 설마 내가 석사 논문 쓸 때 읽고 또 읽었던 Bent and Bradlow(2003)의 그 Bent 헐...... 스터디 끝나고 따라 나가서 만나서 영광이라고 인사 청하며 나의 석사논문이 그 연구를 바탕으로 했다며 설명하니까 자기 논문 잘 읽어줘서 고맙다고 손잡아 주며, 자기 있다고 겁먹지 말고 꼭 ISIB 논문으로 프리젠테이션하라고 하셨음, 나 지금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게 생겼다. 엉엉ㅜㅜ. 근데 진짜 넘 놀래서 다리가 후들후들 했음. 내가 Ken De Jong이랑 Tessa Bent랑 매주 스터디를 같이 할 수 있다니ㅜㅜ. 나 지금 완전 열정 터짐!!!!! 진짜 열심히 할 거야!!!!!’
나도 모르게 두 손이 모아졌다. 아! 고맙다. 묻지 않아도 글 속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엄마, 나 잘 있어. 걱정하지 마.’ 딸아이는 본인이 가르침 받고 싶은 교수를 찾아 학교를 선택해 갔다. 그러나 어찌 즐겁기만 하겠는가. 모국어도 아닌 이국서적을 산처럼 쌓아놓고 연구에 매진해야 하는 학문의 세계는 절벽과 절벽 사이로 난 하늘에서 잠깐 보였다 사라지는 별처럼 절망과 환희의 두 얼굴을 지니고 있으니까. 내가 살아오는 동안 삶의 회의를 느끼고 허우적거릴 때 캄캄한 절망의 바다에 등대를 세워준 에머슨의 시 한 편을 아이에게 보낸다. “자주 그리고 많이 웃은 웃는 것, 지적인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아이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 정직한 비판에 대해 감사를 얻어내는 것, 거짓 친구의 배반을 견디는 것, 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고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 건강한 아기를 낳든, 한 뙈기의 정원을 가꾸든, 사회 환경을 개선하든,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때 세상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 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나는 지금 ‘진정한 성공이란 무엇인가’ 자신에게 묻고 있다.
이 작품은 미국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유학을 떠난 딸의 ‘지적 욕망’을 바라보면서 딸의 ‘진정한 성공’을 기대하는 어머니의 바람을 이야기하려고 한 듯하다. 그러려면, 딸과 어머니, ‘지적 욕망’과 ‘진정한 성공’을 대립적 관계에 놓아야 한다. 그게 지식과 인성의 대립이든 무엇이든. 이런 구도 속에서 이 작품을 바라볼 때, ‘진정한 성공’에 대한 의미를 에머슨의 시에 전적으로 의존할 것이 아니라 화자의 사유를 통해 얻어내야 할 것이다. 수필은 체험과 사색의 문학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첫째 단락이다. 문화절대주의 현상을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문화절대주의 의식이 팽배해 있는 미국사회를 제시하고 있는데, 전체성에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짚어보아야 한다.
(2) 현상수배 방문(榜文)
고을 이곳저곳에 방문이 나붙었다. 대장간 건물 벽에 붙은 방문에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 있다. 한문으로 씌어져서 까막눈이들에게 그저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씨일 뿐이다. “거 글깨나 읽은 양반님네 무슨 말인지 좀 일러 주시구려” 갓 쓴 양반 한 사람이 어험 헛기침을 크게 한번 하고는 큰 소리로 읽어 내려간다. 한문으로 읽으니 들어도 여전히 까막귀다. 해석을 덧붙인다. ‘왼편 얼굴에 흉터가 있는 자, 부녀자를 겁탈한 자로서 육척 장신에 길쭉한 얼굴에 짙은 눈썹, 코도 입도 큼직하게 생긴 자이다. 이 자를 신고하면 상금으로 오백 냥을 주겠노라.’ 그 옆에는 험상궂게 생긴 사내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낯익은 얼굴이다.
나는 남사당패거리다. 재주가 뛰어나서 어름(외줄타기)을 한다거나 마상무예를 할 수 있는 수준은 안 되지만 덩치 좋고 힘깨나 쓰다 보니 줄 매고 공연장비 챙겨주고 놀이꾼 뒤치다꺼리가 주된 일이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가끔씩은 몸이 아픈 놀이꾼을 대신하여 농악놀이나 덧뵈기(탈춤놀이)에 출연할 때도 있긴 하다. 그도 아니면 심심파적으로 관중 속에 묻혀 구경꾼이 되기도 한다. 구경꾼들 호응이 적으면 ‘잘한다!’ 하고 추임새를 넣으며 환호를 유도하는 것도 내 일 중의 하나다.
그 날은 오일장이라 유난히도 구경꾼이 많았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장날이 아니니 공연도 두어 차례 더 해야 했다. 나까지도 덩달아 바빴다. 더운 날씨에 하루 종일 바삐 뛰어다니다보니 저녁 무렵이 되자 온 몸이 땀으로 후줄근하다. 피곤한 몸을 눕혀 잠자리에 들려니 땀에 절은 몸이 끈적끈적하고 찝찝해서 뒤척거렸다. 창밖에는 상현달이 휘영청 밝다. “형님 잠들었수?” 삼 개월 전에 남사당패에 들어온 석이다. 아직 삐리(새내기)지만 열두 발 상모를 곧잘 돌리는데다 젊고 곱상한 얼굴이라 특히나 아낙네들로부터 연모의 눈길을 많이 받는다. 마을 위쪽 개울에 가서 물이라도 한번 뒤집어쓰고 오잔다. 마을 끄트머리에 정자가 있고 그기를 지나면 개울위로 둥글게 걸쳐진 구름다리가 나온다. 다리를 건너면 물레방앗간이다. 다리를 건널 때 주위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조금 더 위쪽으로 올라가면 물레방아 수차 돌릴 물을 가둬두는 물막이가 있어 제법 가슴팍까지 차는 물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단다. 웃옷을 벗고 엎드려 서로 등목을 해주다 훌훌 옷을 벗어던지고 물속으로 첨벙 뛰어들었다. 시원하여 몸이 날아갈 듯했다.
한바탕 물놀이를 하고 나와 옷을 걸치려는데 다리 아래쪽에서 그림자가 일렁거린다. 여인네 둘이다. 동네 아낙네인가? 처녀들인가? 그네들도 무더운 여름밤을 이기지 못해 등목을 하러 나왔던 모양이다. 그녀들은 다리 그늘에서 씻은 모양이다. 빨리 자리를 뜨자니까 석이 녀석이 소매를 끈다. 수작을 붙여보잔다. 남정네들뿐인 남사당패거리와만 어울린 탓인지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 인물값을 하느라고 호감을 갖는 아녀자들을 다루는 솜씨도 여간 아니다. 나는 나이 차도록 여자들과 사사로이 말을 섞어본 적도 없는 숙맥이다. 입으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못이기는 체 어슬렁거리며 뒤를 따랐다.
그녀들의 속살이 달빛에 유난히 뽀얗게 보였다. 혼비백산한 여인네들은 어마지두 물에 젖은 몸을 닦을 새도 없이 옷들을 걸친다. 덩치가 큰 내 모습은 여자들의 눈에 쉽게 띄었다. 석이라고 눈에 띄지 않을 리 없었을 것이다. 나를 보고 놀라던 여자들이 석이를 보고 이내 반색을 한다. 윤 영감네 과수 며느리와 과년한 시누이라 하였다. 주로 석이가 그녀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냥 듣기만 한 편이었다. 달은 하늘 가운데로 휘영청 솟아 있었다. 맹세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주막에 돌아왔는데 가슴이 두근거려 잠을 설쳤다.
이튿날 아침나절 마을을 둘러보고 온 꼭두쇠(우두머리) 어른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우리 패거리 중의 한 사람과 모습이 많이 닮은 사람을 잡는 현상수배 방문이 여기저기 나붙어 있단다. 나를 쳐다보았다.
왜 그런 누명을 씌웠을까? 석이도 함께 있었는데 왜 하필 나만인가? 인상이 고약하게 생겼다는 이유 하나로 진상도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방을 붙이다니, 당연하다는 듯이 나를 그런 눈으로 보다니, 꼭두쇠 어른은 일이 시끄러워지기 전에 당장 짐을 싸라고 했다. 이 고을을 떠나 멀리 달아나라고 했다. 억하심정을 안고 나는 길을 떠나야했다. 이 억울함을 해소하지 못하면 죽어도 제대로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함께 문학기행을 간 동료문인들이 용인민속촌 대장간 벽에 붙은 방문(榜文)을 둘러서서 읽는다. 온통 한자 행초서로 씌어졌다. 모르는 한두 글자는 앞뒤문맥으로 유추해 해석한다. 장난기 심한 김 선생은 육척장신과 큰 코라는 대목만으로 나를 범인으로 지목하며 놀려댄다. 유사한 한두 가지 신체 특징을 끌어다 서로 범인으로 몰아붙이며 놀리며 재미있어 한다. 야당의 한 여성국회의원이 요청해서 받은 자료에 의하면 금년 1~7월 사이에 우리나라 성범죄는 12,234건으로 25분에 한 건 꼴이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부녀자 급탈 사건이나 성범죄는 심각한 사회적인 문제였나 보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잠시 눈을 붙였는데 꿈을 꾸었다. 꿈에서 나는 억울하게 범인으로 몰린 그 사내가 되어 있었다. 외모만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사회의 오만과 편견에 희생된(동일한 형태의 수식어가 가까이에서 중첩되면 문장이 자연스럽지 못함) 피해자였다. 과거사진상위원회란 게 있다더니 그 사내의 억울함을 밝혀줄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13.9매)
이 수필은 재미있는 일화 한 편을 읽는 즐거움을 준다. 주제는 마지막 단락에서 선명하다. 첫 단락과 마지막 두 단락이 외화로서 연결되어 있고, 그 가운데 놓인 사건은 내화로서 상상이나 꿈에 해당한다. 그래야만 이해가 된다. 첫째 단락의 시공간적 배경을 분명하게 드러내면 이해를 용이하게 하지 않을까. 내화로 제시된 스토리는 꿈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구체적이고, 상상이라고 하기에도 지나치게 조직적이다. 허구성은 진솔성의 상실로 이어진다. 꿈이나 상상을 수필 쓰기에 끌어들이는 실험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3) 옥수수 자루
아가, 이 가을을 못 넘길 것 같구나. 얼마 전만 해도 목소리로는 커다란 밭을 다 갈아엎고도 남을 듯하던 아버님이 한데, 둑에 서서 이것저것 가리키다가 이내 털썩 주저앉으신다. 안색도 좋지 않다. 일 할 동안 차에 가서 좀 쉬시라고 자리를 봐 드렸다. 무릎이 아파 가끔 밤잠을 설친다는 말씀 끝에 나이가 많아 그렇다 하셨다. 병원 치료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시니 당신 의사에 따르기로 했다.
지난봄, 날이 풀리자 아버님을 모시고 당신 텃밭으로 갔다. 고랑 하나를 내 손으로 만들면서 노인네 기력으로 일구기엔 넓은 곳임을 깨닫는다. 어른 소일거리쯤으로 여겨 무심하게 지냈던 시간이 후회로 다가온다. “나 없거든…” 일러주시는 말씀에 대답을 못 한다. 잔소리라 생각했던 것들이 막상 당신이 없을 때란 말 뒤에서 보약이 된다.(은유가 적절?) 밭에 들어오지 못하고 멀찍이 서서 작대기로 며느리를 조종하신다. 구덩이를 파고 퇴비를 넣고 호박씨를 정성스레 심는다. 주변 잡풀들을 싹 걷어낸다. 처음 해보는 일인데도 할만하다. “네가 오면 밭이 훤해져.”
한두 번 외출을 꺼리더니 급기야 거실 소파에 누워 있는 시간이 늘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 들락거려야 하는 식구들이 안절부절못했다. 그래도 거기가 편하다 하시니 어쩔 수 없었다. 잠들 시간을 놓쳤던 어느 날 밤, 거실의 아버님이 못 주무시고 계신다는 걸 알았다. 아침이 되자마자 여쭈어보았다. 무릎 통증 때문에 몇 번이고 잠을 깬다고 하셨다. 내가 다니던 병원에 모시고 가서 물리치료를 받고 약을 복용해도 으로 모셨다. 약을 받고 물리치료까지 해도 별 차도가 없었다. 그러던 중 안색이 안 좋아 내과 검사를 했다. 초음파에 CT까지 찍었는데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 쓸데없는 검사비만 날렸다며 언짢아하셨다. 나 또한 어안이 벙벙했지만 나쁜 병은 아니니 다행이다 했다. 며칠 후, 혈액검사에서 이상증세가 있으니 내과로 오라는 말에 아버님은 가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모든 치료를 포기하셨다. 그러는 사이 피부가 점점 황색으로 변해갔다.
더운 여름이 되자, 휴가 안 가냐고 하셨다. 회도 먹고, 바다도 구경하고 싶다 하셨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인 양 최선을 다했다. 회도 거의 드시지 못하고 한 점 먹고는 더 드시지 못했고, 바닷가로 모셨더니 모래사장 평상에 누워만 계셨다. 시동생네 다섯 살배기 늦둥이의 재롱에도 까르르 웃음에도 시큰둥하셨다. 마음 같아서는 장도 보고 맛난 것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힘들다 하셨다. 가족 누구도 아버님의 말에 반응하지 않았고 아버님도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아무 대꾸가 없었지만 아버님 당신도 가족들도 흐르는 시간의 끝을 생각하고 있었다. 평소에 늘 하시던 말씀이 (어떤 말 ? ) 이젠 유언처럼 느껴졌다.
아버님과 함께 심어둔 옥수수가 자라 영글었다. 알이 빼곡히 배긴 것을 하나 골라 따로 두었다. 잘 말렸다가 내년에 파종할 요량이다. 껍질을 두어 가닥 남겨 가지런히 땋았다. 올가을을 못 넘기겠다는 아버님을 두고 거실 벽에 옥수수자루를 매달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아버님의 기력이 점점 쇠해졌다. 날씨가 더우니 더 그런 듯 했다. 속수무책으로 그냥 보고 있을 수만 없었다. 혈액 검사해놓고 결과 보러 가지 않은 그 병원으로 가보자고 애원했다. 정말 노환인지 아니면 다른 질병이 있는지. 병이라면 약이라도 받아오자며 윽박질렀다.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서신다. 의사가 신장 기능이 약화되었으니 큰 병원으로 가보란다. 주사 한 방이면 증세가 완화될 것이라며 소견서를 써주었다. 거의 석 달 만의 실랑이가 끝났다. 구체적 병명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커다란 위로가 되었다.
큰 병원 의사가 그간의 과정을 듣더니 왜 이리 늦었냐며 나무란다. 고집 부린 아버님이 야속하기도 하고 그렇거나 말거나 우겨서라도 병원에 모셨어야 했다는 자괴감이 눈물로 쏟아졌다. 간단한 시술 후 투석해야 한단다. 보름 후 시술 여부를 가족들과 상의해서 오라고 한다. 했다. 시술은 필요 없다는 아버님을 모시고 집으로 왔다. 주사 맞은 효력이 열흘쯤 갔다. 사흘이 더 지나자 병원 갈 날을 꼽고 계셨다. 증세가 안 좋은 탓이다.
어머님이 안방으로 나를 불러들였다. 장롱 위에 얹혀있던 상자를 내렸다. 하얀 명주로 만든 수의가 곱게 들어있다. 시집온 지 얼마 안 된 새댁 때, 두 분 연세도 젊으신데 수의를 마련하는 모습이 언짢아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미리 장만해두면 장수하신다는 말씀에 억지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리곤 잊었던 일인데, 그 상자를 열어 보이신다. 이십 년도 더 넘은 시간인데도 흐트러짐 없이 그대로다. 한 조각 한 조각 만져보는데 눈앞이 뿌옇다. 시누, 시동생을 불러 시술과 그 이후 병원에서의 일을 상의했다. 생명 연장을 위한 어떤 시술도 받지 않을 것이며 장례는 간단하게 하라는 아버님의 뜻을 전했다.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여든여섯의 숫자에 내포된 일이 모두의 가슴을 짓눌렀다.
발 빠른 추진과 알맞은 선택 덕인지 시술은 도 잘 되었고 투석을 받으면서 혈색도 점점 좋아졌다. 곁을 주지 않던 아버님이 이번엔 꼼짝없이 자식들 수발을 받았다. 아들 둘이 번갈아 가면서 밤 병상을 지켰고, 딸과 며느리가 낮 시간을 맡았다. 그렇게 자주 드나들어 내겐 짐이 되던 식구들이 병원에서 만나니 하나같이 반갑다. 경과가 좋아 석 주나 걸릴 것이란 예상을 뒤엎고 여드레 만에 퇴원했다. 그간의 병원생활이 입 무거운 가족들을 수다쟁이로 만들었다. 우울해하던 아버님도 자식들의 정성과 같은 치료를 받는 환우들을 통해 안정을 점점 찾으셨다. 이틀에 한 번꼴로 자식들과 함께하는 병원 나들이가 그리 싫지 않은 눈치다.
주말 동안 아들 내외가 집을 비운 사이 당신의 텃밭으로 가셨던 모양이다. 놀라는 며느리에게 다른 자식들이 땅콩을 캐는 동안 농막에 계셨다고 어머님이 귀띔해주신다. (상황에 대한 이해가 잘 안 되는 까닭은 주어의 생략 때문임, 아 문장의 주어와 동일한 주어일 경우 뒷문장의 주어 생략 가능) 호박넝쿨을 잘못 관리해 감나무가 고사하게 생겼다며 넝쿨을 자르든지, 다른 방향으로 돌려주어야 했었다고 일침을 놓는 아버님의 목소리에 힘이 느껴진다. 듣고 있던 며느리의 혀가 입 밖으로 쑝 나온다. 그래요 아버님, 내년 봄에 옥수수 같이 심어요.(16.3장)
삶의 의욕과 집착의 끈을 놓아버리려는 시아버지와 그 끈을 붙들어 두고자 하는 화자의 애정 어린 노력, 그리고 삶에 대한 의욕의 소중함을 잘 드러내었다. 관찰자적 시각으로 그려낼 수밖에 없지만, 시아버지의 내적 갈등, 즉 ‘삶에 대한 집착과 초탈’ 사이에서의 갈등 내지 방황을 보다 자세하게 그려보면 어떨까.
(4) 탈, 탈, 탈
어둠 속에서 뭔가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우린 또 어디로 가는 것일까”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꽃들이 속삭이는 소리다. 생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슬픔에 젖어 있다. 그들은 모태로부터 슬그머니 버려진 꽃들이다. 달팽이가 갉아 먹었다고 가슴이 베인 설중화 수선, 남들과 다른 모습을 한 샴쌍둥이 루드베키아, 태내에서 탈頉이 있다고 탯줄이 잘린 등심붓꽃, 있음으로써 고통스러운 사랑니 같은 존재라고 발치를 당했다. 많은 곳을 옮겨 다니다 활착을 하는 꽃들이다.
허리 꺾인 꽃들이 쿨룩쿨룩 기침하고 있었다. 뿌리내리지 못한 삶이 푸석푸석 일어나지 않도록 흙을 고르고 다졌다.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바람막이를 해주었다. 인위적인 환경에 순응하도록 살대도 세웠다. (어떤 상황인지 잘 이해되지 않는다. 버려진 꽃들을 위해 ?) 이젠 비바람 따위는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토닥였다.
처음 만난 그들에게선 은행 냄새가 났다. 숨을 고르기가 힘들었다. 입에서는 장맛비 냄새가 심했다. 음식 찌꺼기가 삶의 슬픔처럼 닥지닥지 붙어 있었다. 그런 얼굴로 활짝 웃으며 반기는 모습은 이슬을 머금은 나팔꽃 같았다. 얼결에 따라 웃으려고 입을 벌렸지만 크게 열리지 않았다. 그런 내 마음을 들킬까 봐 미안했다. 식사 때엔 참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식판에 있는 여러 반찬을 섞어서 국에다 말아주는데 식욕을 잃게 했다. 메스꺼워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날따라 올려다본 하늘은 유난히 청명했다. 마음이 울컥하여 입술을 깨물었다.
일주일에 한 번 만나지만 아주 오랜 후에야 만나는 것처럼 설렘이 있어서 좋았다. 반갑다고 넘어질 듯 달려오는 그들을 대할 때는 눈물이 났다. 전류처럼 흐르는 가슴이 선홍빛으로 물드는 게 보였다. 만날수록 따스함이 느껴지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자꾸 보였다. 꿈에서도,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길을 걸을 때도……. 꼭 옆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맑은 웃음이 사무치도록 어른거렸다. 천진하게 웃던 모습이 내 얼굴을 포갰다. 따라 하려고 거울을 보며 연습을 했다. 입을 조금 조금씩 벌렸다.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웃음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었다. 삶의 모습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평소에 살아온 모습이 반사적으로 나오는 것을 인위적으로 각색하려고 했다. 마음이 보이지 않는다고 속이려 했던 것이 걸렸다. 웃음 하나에도 진심과 가식의 차이를 보며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남의 횟수가 늘어갈수록 나도 변했다. 내 속에 있던 거짓의 껍데기들이 하나씩 벗겨지는 듯했다. 세상에서 쓰고 다녀야만 행세하던 탈假面, 그것을 훌훌 벗어 던졌다. 부실한 내면을 감출 수는 있지만, 언제까지 가짜 행세로 살 수는 없지 않겠는가. 포장지 속에 감춰진 내용물이 빈약할 때의 실망감을 들키는 부끄러움보다 스스로 벗는 것이 좋을 듯했다. 허물을 감추기 위해 얼마나 많은 치장을 하고 살았는가. 때론 진짜 내 모습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살았다. 아픈 사람은 아픈 사람을 알아본다. 우리는 허물로 인해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라 더 껴안고 부대꼈다. 애써 가면 속에 감출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늘 웃었다. 아파도 웃었고 기뻐도 웃었다. 웃음이 언어였다. 세상에서 받은 아픔이 위로가 되었다. 표면적으로는 내가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지지만 치유되는 건 나였던 것 같다. 눈곱이 떨어지지 않은 부스스한 얼굴도, 이에 고춧가루가 낀 채로 활짝 웃을 때도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 진심이 담겨 있기 때문이리라. 무엇이 나를 미치도록 하는가. 그건 길들지 않은 사람다운 냄새인지도 모른다.
숨을 쉰다. 심장이 뛴다. 살아 있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런데도 우울했다. 남편이 던진 ‘전업주부’란 말의 의미가 탈頉이 있다는 소리로 들렸다. 옆집 아줌마 얘기를 할 때는 나와 비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자격지심에 이리저리 이력서를 내보았지만, 선뜻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체력이 좋지 않아 잡일도 하기 힘든 처지였다. 그러다 마음병이 났다. 보란 듯이 일어서고 싶은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골골거리면서 오래 누워 있었다. 나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그들을 만나면서 용기를 얻었다.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졌다. 생활에서 느끼는 불편함이나 궁핍함조차 감사하게 되었다.
새벽 첫 기차를 타고 서울을 오르내리면서 상담공부를 했다. 오랫동안 쉬었던 머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새로운 용어들이 머리에서 튕겨 심장에 박혔다. 스트레스로 체력이 소진하여 지병이 도졌다. 신경안정제를 먹으면서 끝이라는 각오로 버텼다.
미술심리작업을 했다. 네모가 사람이고 세모가 사람이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새로운 낯선 자였다. 입은 이마에 붙어 있고 눈은 머리에 뿔처럼 그려 놓았다. 자화상을 그릴 땐 검은 색 크레파스로 까맣게 까맣게 덧칠을 하면서 자꾸만 파묻었다. 삶도 망각하고 싶을 때가 있는데 하물며 상처이랴. 상처가 얼마나 많으면 파묻기만 할까. 가슴이 아려왔다. 꼭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내가 세상이 두려운 것처럼 그들의 상처도 바깥으로 나오기가 싫은지 자꾸만 몸을 움츠렸다.
그림은 나와 눈 맞추기를 한다.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옹알거리기며 말을 건다. 바깥세상이 궁금하다고 손을 높이 든다.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그런 그들에게 눈이 밝아져야 한다고 선악과를 먹였다.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출산을 강요했다. 표본 상자에 박힌 나비도 날 수 있다고 퍼덕이라며 피를 토했다. 그렇게 오래도록 파묻었던 자신을 벗기까지는 긴 시간이 지난 후였다. 덧칠된 자화상은 내 모습이었고 그림은 무의식 속의 나였다. 절망의 입자들이 껍질을 벗고 나왔다. 새로운 세상을 보겠다고 까만 눈이 반짝거렸다. 새로운 몸을 입은 나비가 되었다. 전업주부로서 안일하게 있었다면 몸속에 숨겨진 날개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허물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바위틈에서 자란 나무일수록 몸이 뒤틀려 있어서 멋스럽다. 사람들은 이런 나무를 보고 감탄하지 않는가. 몸은 기형일지라도 역경을 이긴 매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탈頉은 또 다른 생의 길을 여는 탈脫이었다. (15. 4장)
‘탈’의 동음이의어를 잘 활용하였다. 착상이 기발하고 주제 제시도 그렇다. 탈(병)이 생겨 버려진 꽃, 자원봉사에서 발견한 화자 자신의 탈(이중성) 벗기, 전업주부의 일상성으로부터 털(이탈)하기의 순서로 시간적 질서를 부여했다.
문제는 이 세 부분의 통합이다. 바위틈에서 자란 뒤틀린 나무에 비유하여, ‘허물을 간직한 존재의 아름다움’ ? 앞부분의 글도 어렵다. 거듭해서 읽은 후에야 어떤 상황을 알려주고 있는지 비로소 이해되었다. 왜 난해한가? 그것은 과장된 비유를 통해서 요란한 치장을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소박한 문장이 화려한 문장보다 진솔하다. 수필은 진솔성을 담보로 삼는 문학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5) 그녀의 숙제
태양이 한 뼘밖에 남지 않은 느지막한 오후. 모처럼 그녀와 마주 앉았다. 그간의 안부를 묻기도 전에 그의 얼굴이 먼저 대답한다. 진기라곤 다 빼앗긴 얼굴, 그사이 대상포진을 심하게 앓았고 장염으로 두 번이나 입원했고 나머지 날은 입 퇴원을 반복하신 친정어머니의 병 구완을 했단다. 했다 한다. 남들은 지난여름이 더웠다고 하는데 자기는 병원에서 더위 모른 채 살았으니 피서 한 것 아니냐며 그녀가 먼저 웃는다.
팔순을 넘은 친정어머니가 위암 진단을 받은 것이 삼 년 전이다. 본인에게는 골다공증이라 숨기고 수술을 했다. 아버지를 손아래 올케에게 맡기고 자기가 사는 아파트 내의 아파트 한 채를 월세 내어 어머니를 모시고 간병을 시작했다. 그 연세에 여섯 차례의 항암치료를 견디는 일은 지옥이었다. 항암 치료가 끝나고 어머니가 서서히 몸을 가눌 수 있게 되자 그녀가 아프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간병하면서 두 집 살림한다는 것이 그녀의 체력이 감당하기에 버거운 일이었다.
대상포진이었다. 처음에는 몸살이려니 했다. 좀 쉬어야 하는데 환자를 간병하는 사람이 쉰다는 게 가당한 일인가. 게다가 친정어머니의 간병인지라 남편이 뭐라 하지 않아도 눈치가 보여 집안일을 팽개칠 수 없었다. 그 병이 그렇게 아픈 줄 몰랐다고, 뼛속에서부터 피부까지 일제히 통증으로 일어서는데 이렇게 아파서 사람이 죽나 보다 싶더라고 했다. 약을 먹어야겠기에 병든 어머니가 쑤어주는 죽을 받아먹었다. 두 달 동안 죽을 만큼 아픈 동안에 희한하게도 어머니의 체력이 돌아오더라고 했다. 팔순을 넘긴 암환자인 어머니의 간병을 받으며 병세가 호전되었다며 그녀는 쓸쓸하게 웃었다. 그 일 이후에 형제들이 팔공산 근처에 작은 주택을 한 채 마련했다. 어머니에게 공기 좋은 집이 필요하다는 게 명분이었지만 큰누나의 짐을 나누려는 동생들의 마음씀이었다.
봄이 되자 어머니는 마당에 텃밭을 일구어 갔다. 아침저녁으로 텃밭에 물주면서 매일 자라는 채소를 손자 보듯 하며 어머니의 얼굴이 환했다. 자식들이 드나들 때마다 푸성귀 한 소끔 챙겨주는 재미도 쏠쏠했다. 겨울이 오고 어머니가 또 아프기 시작했다. 암세포가 뼛속까지 전이되어 목까지 잠식해왔고 골수가 피를 만들지 못해 2주에 한 번씩 수혈을 받아야 했다. 아무래도 겨울나기가 힘들 것 같다는 염려와는 달리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삶이 또 한 해, 어머니는 그렇게 버텨내셨다.
어머니는 매일 집으로 돌아갈 꿈을 꾼다. 당신의 병명이 골다공증이라고 믿고 계신 어머니는 진통제가 뼈에 해롭다는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전신이 무너져 내리는 통증에도 가끔 진통제를 거부한다. 어제는 간병인과 교대하고 병실을 나서려는데 느닷없이 큰장에 가서 주름치마를 하나 사오라 하신다. 주름치마 입고 어머니는 어디로 나들이가시려는지. 한동안 옥상에 심어놓은 고추를 따야 한다고 조바심을 내더니 두 소쿠리나 따놓았다는 말에 어제부터는 날씨가 궂다고 고추 말릴 걱정이 한창이다. 암세포가 이미 전신을 지배하고 있는데 고추라니. 올해 같은 폭염에 주인 없는 집 옥상에 고추가 가당한 일이냐고 아무도 말하지 못한다.
어제는 밤새 숨이 버거웠다. 고통의 마디들, 전신이 무너져 내리는 통증이 정신을 혼미하게 한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며 종잡을 수 없는 말을 쏟아낸다. 이제 정말 가망이 없는 걸까. 어찌해볼 수 없는 체념으로 또 간호사를 부른다. 다시 진통제가 들어가고 잠깐 정신이 돌아온 어머니가 링거병을 올려다보면서 ‘그것 참 희한하네 아편 맞은 것 같네.’ 하시더니 온몸의 힘이 모두 사라져 버린 듯 탈진되어 잠에 빠진다. 잠든 어머니를 내려다본다. 어머니도 엄마의 뱃속으로 들어가고 싶은지 뱃속의 아기처럼 웅크리고 잔다. 종부로 살면서 한 해 열세 번의 제사를 모시고 오 남매를 길러낸 어머니의 손을 잡아본다. 거죽만 남아 쭈글쭈글한데 핏줄이 선명하게 솟아 겨울나무처럼 앙상하다. 아픈 사람 앞에서 울면 안 되는데 자꾸 눈물이 난다.
그녀는 지금도 조금만 피곤하면 다시 그 자리가 아프다. 그 와중에 아버지마저 폐암 판정을 받았고 서른다섯 된 딸의 혼사는 엄두도 못 낸다. 주말에는 타지에 있는 형제들이 어머니를 보러 와서 그녀의 집에서 자고 간다. 이번 주엔 이모님들이 오신다고 한다. 한 며칠 계실 요량이란다. 혹시 마지막일까 하여 다녀가신 게 세 번째다. 아픈 엄마 걱정에서 금방 손님맞이 반찬 걱정이다. 숙제가 끝이 없다. 이미 살림살이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 김치와 밑반찬은 어디서 사야 하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그녀가 일어선다.
건들마가 분다. 그 길던 여름도 잠깐이다. (12.1장)
첫 단락과 마지막 단락은 ‘그녀’를 바라보는 화자의 느낌을, 그 가운데 배치한 이야기는 ‘그녀’의 이야기다. 그런데 문제는 시점이다. 외화는 1인칭시점이어서 문제없이 읽힌다. 그런데 내화의 시점이 분명치 않다. 화자의 이야기인양 독자는 착각할 수도 있다. 물론, 첫 단락으로 미루어 짐작은 하겠지만. 1인칭 관찰자시점으로 일관해야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일 수 있다.
‘건들마가 분다. 그 길던 여름도 잠깐이다.’라는 마지막 두 문장은 주제를 실어놓은 부분이다. 그 두 문장에 작가 자신에 대한 성찰과 독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것이 형상화를 통한 의미 전달법이다. 그래서 독립된 단락으로 구성하는 것이 좋을 듯.
(6) 목소리를 삼키다
느닷없이 전화 좀 받으라는 친구의 전화기 속 목소리가 커진다. 지금 전화 받고 있지 않으냐니까 아침부터 전화했는데 안 받더란다. 부재중자전화번호 안 봤느냐고 한다. 웬, 부재중자전화번호. 오늘 전화 온건 이것뿐이라고 인데 라고 했더니 이미 아니라고 한다. 지금 네 번째란다. 휴대폰을 열어본다. 문자로 수신된 건 기록이 남아 있었다. 아, 통화 기록이 없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시간을 거슬러 어느 날, 지인의 전화를 받았다. 친구가 내게 몇 번이나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아 혹시 번호가 바뀐 게 아닐까 하고 나를 알고 있는 가까운 지인에게로 전화가 왔다는 전갈을 받았다. 고 전해 주었다. 그 때도 휴대폰에 을 열어보니 남겨진 번호가 없었다. 전화해서 번호가 뜨지 않아 전화 온 줄 몰랐다고 했더니 몇 번이나 전화했었다고 한다.
휴대전화는 계속 업그레이드되고 있다. 2G, 3G, 4G, LET 등. 아날로그인 내가 겨우 한 기능을 익히고 나면 벌써 2~3단계 추월해 버린다. 굳이 그걸 따라가 보려고 애쓰지는 않았다. 요즘 아이들처럼 휴대폰을 끼고 있지도 않는다. 외출할 땐 가방 안에 두고 집에서는 식탁 위나 책상 위에 놓아둔다. 어쩌면 무심하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문자 메시지는 기록이 남아 있고 전화가 울리면 통화가 되었기에 별로 신경 쓰지 의심하지 않았다.
전화기가 목소리를 삼켰다. 벨이 울리고 받으면 통화가 되었지만, 혹시 전화를 못 받을 때는 부재자전화번호가 남아 있어야 하건만, 없다. 한동안 몰랐다. 지인들로부터 전화 안 받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혔다.
건망증의 속도도 휴대폰의 기종이 변하는 것만큼 빠르다. 특히 책을 읽고 난 후 책 속 사람 이름이라든던가 배경이 된 장소가 전혀 생각나지 않을 때가 많다. 다시 책장을 앞으로 넘기는 일이 다반사다. 분명 어떤 일로 현관 밖을 나섰건만 나온 이유를 몰라 머리를 쥐어박은 적도 있었다. 머릿속 생각을 삼켜버린 것이다.
올여름 유난히도 더웠다. 사람도 짐승도 더워서 헉헉거렸다. 나무도 풀도 제대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럴수록 태양은 더 열기를 퍼붓고 여름은 온몸으로 열정을 토해 냈다. 계절은 다시 가을을 준비한다. 서늘한 바람이 분다. 어느덧 여름은 뜨겁던 열정을 안으로 삼켜야 할 때를 알았다
내 휴대폰도 업그레이드를 한다 해도 새로운 기종에 못 미친다는 것을 알았나 보다. 이제까지 온 힘으로 밀어 올리고 토해 냈던 것을 스스로 삼켜 버린 것은 아날로그 주인이 디지털 시대에 맞게 적응하며 살아가라는 뜻일 것이다.
내 머릿속 기억도 시간이 지나가는 것처럼 사위어간다. 꽤 기억력이 좋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었다. 영원한 것은 없나 보다. 어릴 때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누구의 간섭도 없이 하고 싶은 걸 하고, 삶에도 여유와 평안함이 있을 것 같았다.
물끄러미 휴대폰을 내려다본다. 닳아서 져 반질거리는 린 네 귀퉁이, 드문드문 떼가 묻은 뚜껑, 내 속에 켜켜이 쌓인 시간이 정리되지 못해 혼란스러울 때가 있었다. 결국에는 목소리를 삼켜야 했던 휴대폰과 지우개로 헝클어진 시간을 지우개로 지우는 내 모습이 많이도 닮았다.
창가로 쳐다본 하늘이 높고 푸르다. 금방 가을을 쏟아 놓을 것 같다. 다가오는 계절에 자리를 비워 주는 여름에게 또 하나를 배운다. 그리고 내 머릿속 지우개는 하나를 지운다. (?)
수명이 오래되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휴대폰과 나이를 먹으면서 기억 기능이 무뎌져 가는 자신을 비유했다. 사물이나 사람이나 노후화되어 간다. 그것을 억지로 막으려고 하거나 지연시키려고 하는 것보다는 순리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지고자 한 것 같다.
이 작품의 구조적인 틀이 이렇다면, 전체적인 통일성을 되짚어 보면 좋겠다. 단적인 예로, 난데없이 끼어든 여름. 여름이 비우듯이, 화자는 지운다고 한다. 무엇을 비우고 무엇을 지운다는 말인가. 기억? 휴대폰에 대한 진술은 의인화시킬 필요까지는 없지만, 사물의 인격화라는 정도에서 휴대폰을 바라보고 그려준다면 훨씬 재미있고 전달력 있는 표현들이 가능하지 않을까를 생각해 본다.
(7) 베트남
중년의 여자 6명이 해외여행을 나섰다. 이 나이가 되도록 남편 밥걱정을 하고 살던 친구들이 이번엔 과감하게 떠났다. 아내가 해외여행을 가면 곰국을 끓인다는 말이 있던데 나는 곰국을 끓이지 않았다.
친구들과 처음 떠나는 해외여행이라서 작은 흥분과 설렘 설레임 속에 하노이 공항에 을 내렸다. 아열대 기후라서 무척 더울 것이라는 염려와 달리 한국과 기온 차이는 나지 않았으며 간간히 스콜성 소나기가 내려서 내리기 때문에 시원함을 느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몇몇 지인들 이 동남아 국가는 향신료가 강해서 음식을 못 먹을 것이라는 어설픈 상식으로 충고를 듣고 비상식도 조금 챙겼지만, 다. 처음 먹는 베트남식 쌀국수와 볶음밥은 도 한국에서 먹던 것 보다 맛있었다. 고 두리안, 용과 등 여러 가지 열대과일들을 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젊은 여인성들, 베트남 여인들의 균형 잡힌 몸매는 의 원인은 주식인 쌀에 포함된 탄수화물의 함량이 낮기 때문이란다. 라는 현지가이드의 설명을 뒷받침 해주듯 여성의 곡선미를 살려주는 아오자이를 입은 여인들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베트남의 도심에는 자전거와 오토바이 사이를 비집고 오트바이, 자동차가 뒤엉켜서 질주를 한다. 중앙선이 없고 신호등도 없는 도로에서 자동차는 클랙슨을 크락션을 울리며 자전거와 오토바이들의 밀물을 가르려고 기를 쓴다. 면 내가 앞지르기 할테니 마주 오는 차는 내가 갈 수 있도록 천천히 오라는 신호를 보내면서 신호등이 없는 거리에서도 자전거와 오트바이들이 밀물처럼 밀려들어 가고 있으면서도 나름대로 그 무질서 속에서 그들 나름의 질서를 유지해 나가는 모습들이 신기하다. 질서가 있는 모습이 신기하게 바라보면서 우리네 삶도 저런 모습이리라. 의 모습을 닮은 것처럼 느껴졌다.
베트남은 1960년대 월남과 월맹으로 나눠져 내전을 치렀으며 치뤘으며 1970년대 중반 통일국가로서 기틀을 마련했다. 다모작 농업 국가이면서도 저가의 노동력으로 글로벌시대에 맞는 정책적 뒷받침으로 현재는 아시아의 용이라고 불릴 만큼 눈부신 경제성장을 도모하고 있었다. 푸른 들판을 메워나가는 공업단지는 폐허의 땅에서 꿈틀거리는 성장 동력이었다. 을 보았다. 베트남전이 일어났을 때 우리나라는 맹호, 청용, 비둘기 부대 등의 군사력 지원과 민간인 편의시설을 지원했지만 결코 떳떳하지 못한 전쟁에 참가했음은 부인하지 못한다. 역사적인 진실의 화해와 보상 없이 우리나라와 1992년 정식 수교를 맺으면서 감정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면서도 지난 일은 잊지 않겠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라고 한다.
파월한국군의 월남전 전과 및 경제부흥에 일조한 공은 퇴색되고 있다. 참전으로 얻은 경제적 가치가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기반이 되었기 때문에 현재와 같은 경제적 안정을 누리고 있는 점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파월 군인과 기술자 사이에서 태어난 라이 따이한은 현지 사회의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미국은 미군 2세들을 본국으로 데려가서 미국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었지만 우리는 그들을 외면하고 있다. 이는 한국정부의 양심불량과 국가이미지 실추라는 부메랑이 되어 오늘날 한국사회의 각성을 촉구하기도 한다.
요즘은 다문화라는 단어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우리 주변에서 다문화 가정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내가 자원봉사를 하는 곳에서 만난 그녀는 나를 무척 따른다. 주변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베트남에서 시집왔다고 한다. 그녀와 나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도 표정과 행동으로 알아차리고 일을 함께한다. 자신의 부모 형제를 두고 다른 나라 어르신들의 식사수발을 드는 그녀의 모습에는 애잔함이 묻어난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나라에서 결혼생활을 한다는 것은 폭풍우 몰아치는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화목한 가정을 가꿔나가는 그녀를 만나면서, 보면서, 단일민족국가가 우월하다며 잘못된 교육 탓으로 그동안 편견의 늪에 빠져 라는 생각이 무의식속에 똬리를 튼 채 차가운 시선으로 다문화가정을 바라보지 않았는지 나 자신을 되돌아본다. 보는 계기가 되었다. 문화가 다른 나라에서 적응하고 뿌리 내리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들을 이방인처럼 바라보지 느끼지 않았을까. 그들을 차가운 눈길로 바라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니 갑자기 가슴속에서 뜨거움이 북받쳐 오른다. (감정의 과잉노출 또는 과장된 표현은 진정성을 떨어뜨린다.)
<베트남 여행에서의 첫인상 – 베트남 전쟁과 파병 – 그 이후의 베트남과 우리 정부의 무관심 – 한국으로 시집 온 베트남 여인과의 만남과 관심>으로 이어지는 연상의 연결이 자연스럽다. 구성의 일관성을 갖추었다는 말이다. 국가적 담론을 개인의 담론으로 축소시켜 나갔지만, 독자에게 전달되는 메시지는 개인의 문제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 모두의 문제로 다가온다.
(8) 잘난 후손들
걱정이 앞선다.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설렘으로 기다려지던 추석 명절이 이제는 가까이 다가올수록 되레 마음을 무겁게 한다. 명절 즈음에 집사람의 구시렁거리는 소리는 어린아이 밥투정 정도로 애써 흘려버렸으나 오랫동안 연마한 칼날이 점점 예리해지고 있음을 언뜻언뜻 느끼곤 한다. 그러나 아내의 투정을 받아 줄 마음의 여유가 없다. 추석에 성묘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내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분명치 않음)
내 고향마을은 順興 安氏 집성촌이다. 마을 전체가 크게 보면 한집안이다. 2, 30년 전만 해도 약 50여 호가 살았고 집집이 식구가 보통 6명에서 10명 정도 되었으므로 마을 상주인구는 3백 명이 훨씬 넘었다. 자그마한 시골 마을에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까닭에 마을은 온통 시끌벅적하였고 매일 잔칫날 같은 분위기였다. 명절날이나 집안에 일이 생기면 그것은 마을 전체의 행사였다.
중추절이나 설날이 다가오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집집이 제사에 쓸 쇠고기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주문량에 따라 적당한 소가 선택되면 마을 주민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소를 잡았으며 그것이 명절을 알리는 신호였다. 쇠고기는 주문량에 따라 배분하였으나 내장 등 남은 부산물은 큰 어른들의 회식으로 사용하였다. 우리 마을은 집안을 크게 3계파로 나누었으며 1계파당 15가구 정도 되었다. 명절날 아침 일찍부터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면 오후 3시쯤 되어서 끝이 났다.
유럽인들이 하계휴가를 기다리며 열심히 일하듯이, 시골 사람에게 설은 추석 쇠고 나서 기다리던 삶의 목표였고, 추석은 설을 쇠고 난 다음 날부터 학수고대하던 희망이었다. 양대 명절은 마을 사람을 한데 묶는 동아줄이었으며 조상을 섬기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던 시대에 남녀노소 모두에게 가장 귀중한 가치를 지니던 날이었다. 조상을 핑계 삼아 주린 배를 채웠고 멀리 떨어져 지내던 가족을 한데 모이게 하고 이웃 간에 정을 나누게 한다. 하던 장날이자 장터였다. (이 단락의 문장들은 무생물을 주어로 삼고 있다. 일반주어(나, 우리)로 바꾸어 쓰는 것이 읽기에 용이할 것이다.)
지난해부터 부모님께서 연로하신 까닭에 설은 고향이 아닌 대구에서 쇠기로 하였다. 우리 집도 역귀성이 시작된 것이다. 겨울철 을씨년스러운 시골집에 형제들이 모여드는 번거로움을 피하고자 어른께서 그렇게 결정하셨다. 하지만 벌초와 성묘 때문에 추석은 고향에서 지낸다. 아무리 조상님들이 귀신이라 하지만 진짜 헷갈리겠다. 이제는 몇 집만이 고향에서 추석차례를 지낸다. 명절이면 사람들로 북적거리던 고향 마을은 이제 연로하신 집안 어른들이 몇 분 남아 양반동네라는 명맥을 근근이 유지하고 있다.
집성촌인 고향 마을에서는 은 옛날부터 관혼상제 의식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유교사상에 젖어있는 어른들은 특히 제례 절차를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로 여겼다. 집안 어른들의 간의 사소한 다툼 대부분은 관혼상례 절차에 관한 의견 충돌이었다. 추수가 끝나고 한숨 돌리기 무섭게 본격적인 성묘준비가 시작된다. 조부모나 부모님과 같이 가까운 조상의 성묘는 가까운 친척들이 참배하였으나 한참 윗대의 조상 묘소는 마을 사람 모두의 참배를 원칙으로 하였다. 묘제 일을 정하기 위해 동네 어른들이 의논해서 집집이 성묘날짜를 정하였다. 성묘에 참가하는 인원이 100명이 훨씬 넘기 때문에 준비해야 할 음식이 매우 많았다. 집안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큰 마당에는 남정네들의 떡메 치는 소리, 정지에는 아낙네들의 전 부치는 냄새, 방안에는 할머니의 술 거르는 풍경으로 온 집안이 잔칫날처럼 왁자지껄하였다.
조부님을 제외한 윗대 조상님의 산소는 고향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것도 사방팔방으로 흩어져있다. 이런 까닭에 멀리 떨어져 있는 산소는 추석 쇠러 고향에 내려간 참에 벌초와 묘제를 동시에 한다. 승용차가 갈 수 있는 곳까지 간 다음 다시 묘소를 찾아 산길을 오른다. 찾아 나선다. 어릴 적 벌겋던 민둥산은 간 곳이 없고 온산이 나무에 뒤덮여 있어 옛날의 산길은 흔적조차 없다. 더군다나 간벌하면서 잘라낸 나무들이 온산에 널브러져 있어 그나마 희미하게 남은 조붓한 산길마저 막고 있다. 성묘 때마다 이 길이 저 길 같고, 저 길이 이 길 같아 온산을 헤맬 때가 부지기수다. 성묘객이 아니라 험준한 산을 오르는 산악인이 된다.
이렇게 험준한 곳을 찾아 성묘하므로 집안의 아이들은 데리고 가지 않았다. 우리 집의 조부모산소는 마을 근처에 있어 아이들도 알고 있으나 나머지 묘소는 알지 못한다. 우리 삼 형제만이 성묘를 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살아 계실 때는 인근 마을 사람에게 묘답을 주어 관리하던 곳, 묘제 때는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던 산소는 이제 우리 형제만이 몇 가지의 음식을 제단에 올려놓고 절 몇 번하고 만다.
오늘 아침 뉴스에는 관리가 어려워 시멘트로 묘를 덮어씌우고 녹색 페인트칠한 기사가 보도되었다. 매년 벌초는 부담되고 멧돼지가 묘를 마구 파헤치니 궁여지책 끝에 한 일이라고 하나 뒷맛이 영 개운치 않다. 나도 성묘가 너무 힘들어 이것을 해결하고자 몇 년 전에 아버지께 이장(移葬)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묘를 건드리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며 극구 반대하였다. 차라리 나중에 묵혀 두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의견이었다. 하기야 묘를 이장한들 내 세대 이후의 후손들이 묘를 관리할까. 어차피 관리하지 않을 묘소라면 굳이 이장할 필요가 없는 것 같다.
‘등이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키고, 병신자식이 효자 노릇한다.’ 는 속담이 있듯이 옛 조상님들이 명당자리 찾아 묘소를 쓴 덕분에 후손들이 모두 잘되어 불효자가 되었으니 이것 또한 조상님들의 자업자득이 아닙니까. 나처럼 좀 못난 자손이 있어 그나마 해 그르지 않고 묘제를 지내니 참 다행이라 생각하세요. 불행하게도 내 아들 녀석 대부터는 조상님 묘소를 찾아뵙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제가 저가 못난 탓이기도 합니다. 제가 저가 한 번이라도 조상님 묘소를 더 찾을 수 있도록 오래오래 건강하도록 도와주세요.
추석과 설 명절의 의미와 풍속들을 부연, 확장해 나간 글이다. 그러한 전통의식들이 점차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우회적으로 드러내었다. 수필쓰기에 희곡의 전유물인 독백을 끌어들인 실험적 시도가 주목을 끈다.
(9) 비오는 날의 갓바위
처서도 지난 8월말, 오후가 되자 하늘이 흐려지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했다. 불현듯 오랫동안 가보지 못한 갓바위 풍경이 떠올랐다. 가 생각났다. 비 내리는 갓바위의 밤은 야간에 비까지 내리는 그곳이 미지의 세상처럼 신비스러움으로 가득할 것 같았다. 그려졌다. 더위 끝의 단비에 마음이 동했던 걸까. 혹시나 싶어 전화를 했더니 남편도 흔쾌히 오케이다. 남편도 동행해 주겠단다.
빗길인데다가 에 퇴근차량까지, 차들로 북적대는 시내와는 달리, 몰리는 시내를 벗어나자 날은 어두워지고 갓바위 가는 길은 스산하리만치 한산했다. 저 멀리 비에 젖은 팔공산자락이 휴식에라도 든 듯 한가로워 보인다. 여름내 북적이던 주변 식당들도 불빛만 희미한 채 체 기척이 없다. 모처럼 가는 길에 빈손으로 갈 순 없지 않은가. 입구에 차를 세우고 불 켜진 가게를 찾아 공양미와 향을 샀다. 젖을세라 비닐로 싸서 배낭 깊숙이 넣었다. 다행히 내려오고 하산하고 올라가는 사람들이 다문다문 눈에 띄었다. 젊은 남녀도 있고 우리 또래로 보이는 부부도 있다. 반갑다. 산행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종교를 떠나 왠지 기특하고 건강해 보인다. 그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산길로 접어든다. 들었다.
마지막으로 다녀온 게 작년 작은아이 수능 때였나 보다. 신심 깊은 불자도 못 되면서 그때그때 순간순간 갓바위를 오르고 절을 찾아 다녔다. 운동 삼아, 나들이 삼아 간다고는 했지만 정작 마음 비우고 간 날이 얼마나 될까. 오히려 간절한 바람으로 매달린 적 더 많았으리라.
우산도 없이 맞는 비바람이 시원하다. 바람이 불때마다 나뭇가지에서 떨어진 빗방울이 죽비처럼 후드득 등을 갈긴다. 힘겹게 관암사에 이르자 그 모습이 장관이다. 선방에서 새어나온 불빛이 빗물에 반사되어 유리알처럼 반짝인다. 거린다. 쉬어갈 겸 마루에 걸터앉아 목을 축이고 그 광경에 한참이나 넋을 빼앗긴다. 잃고 바라본다. 남편의 재촉이 없었다면 그곳에 부처처럼 앉아 밤을 새웠을지도 모른다. 에 발길을 옮기자 돌계단과 주변을 새로 단장해 놓았다는 현수막이 우리를 반긴다. 그러고 보니 군데군데 아담한 쉼터도 만들어 놓았다. 고 한층 밝아진 가로등 불빛은 비에 젖어 청초하다. 무엇보다 360계단이었던 돌계단을 1,365계단으로 늘렸다니, 확대했다니 중생들의 힘겨운 보폭을 헤아리는 부처님의 아량인가. 발걸음도 한결 가벼우리라.
올라갈수록 빗줄기는 가 굵어지고 바람도 세졌다. 간간이 들려오던 인기척도 끊겼다. 지고 불빛과 함께 지나온 길도 불빛과 함께 어둠에 묻혔다. 사라졌다. 불빛을 따라 올라갈 수밖에 없는 길, 조금만 한 눈을 팔거나 발을 헛디뎌도 어둠속으로 떨어질 것 같아 남편을 바싹 따라 붙었다. 그런데 매일같이 헬스장을 간다던 남편이 습도 때문에 더 힘들어 한다. 비가 오면 나섰던 길도 되돌아오는 사람이다. 눅눅한 걸 싫어하는 데다 여름나기는 쉬웠겠는가. 천천히 가자고 몇 번을 쉬면서도 공연히 부추긴 것 같아 후회가 밀려왔다.
어느 순간 옆에서 걷던 남편이 보이지 않는다. 신발 끈을 다시 묶어야겠다고 했는데 내가 한참 먼저 온 모양이다. 걸음을 멈추고 오겠거니 하면서도 왠지 오싹하다. 적막산중, 망망대해 같은 어둠을 사이에 두고 그와 내가 혼자라는 사실이 무서웠다.
형이 아빠- 대답대신 돌아온 내목소리에 내가 울컥 한다. 다시 불렀다. 두 번 세 번, 그제야 남편이 숨을 헐떡거리며 눈앞에 나타났다. 빗소리 때문에 못 들었다고. 생각보다 힘이 든다는 얼굴에 땀이 범벅이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오지 않을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잡았던 손을 놓아야 할 순간, 그리고 그 순간이 준비도 없이 온다면. 눈앞의 일처럼 가슴이 먹먹해져 온다. 말처럼 산다는 것이 고개의 연속이다. 한 고개 두 고개 넘고 나니 어느새 건강을 걱정해야 할 나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그 시간이 조금이라도 천천히 오게 해달라고 빌어 본다.
드디어 정상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러나 그곳이라고 사정이 나을 리 없다. 거칠 것 없는 바람은 노도처럼 밀려오고 피하자고 들어간 천막 밑은 고였던 빗물이 바가지로 쏟아진다. 방향을 종잡을 수 없으니 한 곳에 서서 부처님을 대하기도 어렵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배낭에서 공양물을 꺼냈다. 수건으로 물기를 두르고 불전 위에 올려놓고 나니 그제야 주위가 눈에 들어온다.
주변을 살피고 공양물을 정리하는 두 사람 사이로 쉬지 않고 절을 하는 부부가 보인다. 수험생이 있는 걸까. 무엇 때문에 무얼 저리도 갈구하는 것일까. 자리에 빗물이 흥건한데도 멈출 기색이 없다. 그들을 뒤로하고 난간에 기대서자 눈앞이 경계도 없이 캄캄하다.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이 마치 거대한 풍랑위에 떠 있는 일엽편주 같다.
갓바위에 오르는 과정에서의 느낌과 생각이 잘 그려져 있다. 특히, 남편과의 거리가 떨어졌을 때의 심리적 상황이 매우 의미심장하면서도 감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정작 갓바위 부처님을 대했을 때의 느낌과 생각은 실종되어 있다. 서두에서 말한 미지의 신비 같은 그 무엇을 현장에서 확인해야, 문제 제시에 대한 해답의 역할을 하게 되어, 통일성을 획득할 수 있다. 자질구레한 소원들을 잔뜩 짊어지고 와서는 염치없이 풀어놓곤 하는 중생들을 비바람 속에서도 하염없이 기다리고 맞이하는 부처님이 아니던가. 무엇이 비오는 밤에 화자의 발길을 그곳까지 이끌었는지. 그런 과정과 결과가 부가되어야 구성의 일관성은 물론이거니와 주제도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10) 열심히 일한 당신
‘바람이 불어와도 화염만 같아 / 부채로 불기운을 부쳐대는 듯 / 목말라 물 한 잔 마시려 하니 / 물도 뜨겁기가 탕국물 같네.’ 고려 문인 이규보의「고열: 무더위」중 한 대목이다. 낮 최고 기온이 사람의 체온을 웃도는 날이 이어진다. 에어컨을 계속 틀고 찬 음료를 연신 마셔도 천 년 전 선생이 살아 계실 적과 다를 바 없이 덥다. 집 가까이의 슈퍼만 다녀와도 꾀부리지도 않았건만 솜을 지고 일부러 물에 빠진 나귀 꼴이 된다. 숨 쉴 틈조차 주지 않으려는 듯 하는 빽빽한 열기에 습도까지 높아 아프리카보다 더 덥다는 대구는 오늘 밤도 잠 못 든다.
더위에 지친 이들은 매일 대하는 이웃들이 자신들 마냥 안쓰러운 모양이다. 얼굴만 마주치면 시원한 곳으로 휴가 가지 않느냐며 묻는다. 백수인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속으로, 그린란드쯤이면 몰라도 지리산 계곡이나 강원도 골짜기도 덥다던데 하고 만다. 왜 사람들은 365일 매일 놀고 있는 나에게 까지 휴가가기를 권하는 걸까. 백수에게 휴가 가라고 등 떠미는 건 과분한 배려가 아닐까 싶어진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라는 광고가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노동의 반대급부로 주어지는 휴가 문구에 걸려 길을 나설 땐 괜스레 미안해지곤 한다. 물론 주부로서 집안일을 하고 있으니 전혀 놀기만 하는 건 아니지만 열심히 일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지 나는 늘 백수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딸아이는, 내가 백수라고 말할 때의 표정이 처량하게 보이는지 백수라고 하면 주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며 꼭 고쳐주려 든다. 직업이란, 생계를 위해 일상적으로 하는 일을 뜻한다 하니 주부도 직업 중 하나이고 나는 백수가 아니다. 그럼에도 항상 백수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건 가사를 제대로 하지 않고 또 그 가치를 인정 않는 것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싶다.
가사노동이 건강하게 그려진 김홍도의「빨래터」그림을 본다. 여인들이 냇가로 나와 빨래를 한다. 갓 쓰고 도포 입고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훔쳐보는 선비의 소심한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치마와 고쟁이를 걷어 다리를 드러낸 채 평평한 바위에 앉아 힘차게 빨래 방망이를 두들긴다. 찬 물에 발을 담그고 서서 빨래를 헹군다. 넓적한 바위에 앉은 젊은 여인은 속바지가 다 드러나도록 편하게 앉아 감은 머리를 손질 중이고 옆에 붙어있는 사내아이는 아예 아랫도리를 깨벗고 있다. 염천의 빨래터는 그네들의 일상이 신나게 표출되는 삶터가 아니었을까. 뒤 뜰 연못가에서 격식 갖춰 차려 입고 조용히 물빛을 감상하는 것으로 더위를 식혀야했던 양반집 마님들도 찌는 듯 하는 무더위엔 이들이 부럽지 않았을까. 누가 빨래터의 이 여인들을 백수라 말하며 이들의 노동이 무가치하다 하랴.
90년대 중반 무렵부터 30, 40대 여성들은 ‘직업인으로서의 주부’를 자임하면서 ‘주부 아무개’임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그들은 집안일을 합리적으로 잘 해 낸 뒤 공부도하고 취미생활도 즐겼다. 나도 그 땐 주부도 직업이라는 지각을 가진 30대 여성이었던 것 같건만. 세월을 거슬러 잘못 살았나보다. 주부도 직업 중 하나 인 것을 왜 잊고 살았을까.
여름 내내 하루 세끼만 겨우 해 먹었으나 세탁기는 열심히 돌렸다. 빨래를 널어놓고 돌아서면 내리쬐는 강한 햇볕에 이내 보송보송 말라 미뤄두기가 아까워서였다. 반면에 청소는 언제 했는지 기억이 까마득하다. 앞 베란다에서 지내는 우리 고양이 부수가 거실로 들어와 날도 더운데 제 거처까지 지저분하다고 내 얼굴을 쳐다보며 앙칼진 목소리로 야옹거려도 못 본 척 안들은 체 한다. 그러면서 이 가마솥더위에 꼬박꼬박 밥 챙겨 먹은 게 어디냐고 날씨를 내 게으름의 제물로 삼는다.
말복을 지났다. 머잖아 삽상한 바람이 불어 올 것이다. 우선 부수가 사는 베란다를 깨끗이 청소해 줄 것이다. 녀석은 제 의자에 앉아 나에게 슬쩍 짧은 눈 맞춤을 보낸 뒤 털 고르기를 하다 이내 오수에 빠져들 것이다. 청소하는 내내 녀석이 낮잠만 잔다하더라도 잠시 보내 준 그 눈빛에 홀린 나는 그 잠을 깨우지 않으려 공손한 하인을 자처하며 조용히 움직일 것이다. 거실의 창을 활짝 열고 살갗에 와 닿는 서늘한 바람의 감촉을 즐기며 공들여 쓸고 닦을 것이다. 식탁도 정성들인 음식들로 채울 것이다.
이젠 나도 ‘열심히 일한 당신’이 될 것이다. 염천과 폭우를 견뎌 낸 잎들은 빨갛게, 노랗게 단장하고 파랗게 높아진 하늘아래 설 것이다. 사람들은 가을을 보러 떠날 것이다. 나도 그 대열에 당당히 주부라 말하며 부끄럼 없이 동참하고 싶다.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다반사가 되어 있는 현실 속에서 전업주부로서의 심리적 갈등을 진솔하고도 차분하게 잘 드러낸 작품이다. 일상의 이면에 가려진 채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전업주부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당면하게 될 법한 심리적 갈등을 들춰냄으로써, 주제의 참신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획득했다.
(11) 둘레 길을 걸으며
걷는 데에 재미를 붙였다. 걷기야말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행동이고, 몸의 움직임이 적어진 현대인들이 비교적 손쉽게 할 수 있는 운동이다. 의학적 관점에서도 걷기가 건강에 좋다 고 여러모로 소개되고 있지만, 나는 홀로 걷는 것을 좋아한다. 혼자서 걸으면 홀로 걷기는 사색을 할 수 있어서 좋다. 통한 마음의 안정뿐 아니라 힐링의 효과까지 거둘 수 있어 정신건강 측면에서도 순기능을 한다.
조붓한 오솔길로 들어선다. 도심에 위치한 공원이지만, 야산을 그대로 살려 둔 채 산책로를 두르고 공원을 만들었기에 중심부로 들어가면 그런대로 제법 깊은 숲속에 들어온 느낌이 든다. 의 흔적이 느껴진다. 개발 전 산의 DNA가 그런대로 남아 있는 야산이다. 한 바퀴 둘레길이 그리 길지도 않고, 오르내리는 경사도 적당하다. 외롭게 보일지는 몰라도 혼자 걷는 운동은 물론 걷기에도 좋지만, 가볍게 달리는 코스로도 아주 그만이다.
한적한 시간대에 혼자 걷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여기서 만난 사람에게는 말벗이라도 되고 싶은 마음에 반가움이 앞선다. 생판 모르는 낯선 이들인지라 사이인지라 혹시나 받을 오해가 염려되면서도, 왠지 먼저 마음을 열어 주고 하찮은 이야기나마 나누고 싶은 생각이 든다. 들면서 자질구레한 이야기나마 함께 나누고 싶은 정감이 든다. 불현듯 인연을 들먹이고 싶어진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렇게 옷깃을 스치는 인연도 드물지 않은가. 낯선 사람과 마주친 확률이 기막히지 않은가.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오늘 하필 이 순간에 여기에서 나와 대면했다는 것은. 그러다 보면 언젠가 언제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는 듯한 친근감마저 든다. 수억 년의 시간과 상상할 수 없는 커다란 공간 속에서의 한 점 마주침을 어떻게 우연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있으랴.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고 한 노랫말에 공감이 간다. 외로운 나그넷길을 가노라면 봄볕에 흐드러진 장미 꽃동산도 만날 것이고, 몰아치는 채찍 비에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궂은 날씨도 맞닥뜨린다. 살아가는 데에 어렵고 힘든 일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수월한 일만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네 삶에는 절망과 좌절도 있지만, 거기 곳곳에는 기쁨과 희망, 과 환희와 보람도 함께 섞여 있는 것이다.
같은 방향의 길지 않은 둘레 길에도 갈래는 여럿이다. 같은 길을 가면서도 어떤 이는 돌을 밟고, 어떤 이는 풀에 베이며 어떤 이는 흙탕물을 밟는다. 인생길에서도 그렇다.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는 지극히 자발적이지만 결과에 만족하지 못할 때에는 강요된 선택이었다고 항변들을 한다. 자기의 선택에 대한 미련을 길게 갖지 말고 긍정의 힘을 믿어야 할 때가 이때이다.
둘레길에는 인공적으로 잘 배열된 정연한 아름다움만 깐총함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무질서하게 제 맘대로 퍼져 앉은 것 같은 개망초도 예쁘기만 하고, 헝클어져 뻗어나가는 진가를 몰라주는 환삼덩굴에서도 생명력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은 너무 많이 흔하게 깔려있어서 푸대접을 받는다. (앞문장과 뒷문장의 연결성 문제) 평범함에서 얻는 번뜩이는 착상과 주도면밀한 노력이 성공하는 경우가 많듯이 무질서하게 보이는 자유분방함 속에서도 건져 올릴 수 있는 월척은 예상외로 많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간과하고 있다. (의미상의 논리성 점검이 필요함)
째깍째깍 시간이란 놈은 거침이 없다. 어디서 그런 힘이 솟는지 멈추는 법이 없다. 봄․여름을 구분 없이 보내고 가을․겨울을 한꺼번에 맞아도 힘든 줄을 모른다. 하지만 시간만큼 공평한 것도 없다. 누구에게나 어김없이 일정하게 흘러가는 것이다. 둘레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더 보고 싶은 이내 풍경이지만 요만큼도 더 길지 않다.
밤이 되면 작은 휴양림의 느낌이 든다. 적당한 간격으로 늘어선 가로등 불빛이 운치를 더하고, 도심 건물사이를 비집고 나온 바람이 나뭇잎의 그림자와 뒤섞이면 싱그러운 산바람이 되어 돌아 나온다. 적당한 어둠을 품은 잔잔한 밝음은 뭇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도 매일같이 반복될 뿐이다. 불빛에 비치는 구절초도 인간 모두가 이어가는 긴 역사의 길 한쪽에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다. 풀잎도 우리네와 함께 같이 시간의 역사를 인간사를 엮어 가고 있음 아닌가.
올려다 보이는 아파트 불빛들이 정겹다. 저 집들이 모두 행복할까 어리석은 물음을 해 본다. 정겹게 보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 뿐, 모두 행복할 것이라는 것도 나 혼자만의 추측이다. 괴로움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지기가 얼마나 쉽지 않은지, 임종을 앞두고 ‘괴로운 일도 많았지만 살아 있어서 참 좋았다’고 한 시인의 말은 옳았던 것 같다. 희로애락의 꽃은 항상 뒤섞여 피는 것이니까.
‘다시 없는 특별 할인’이라는 신설 헬스장의 요란한 권유도 관심이 없다. 우선 막힌 공간이 마뜩찮잖다. 도심의 혼탁한 공기를 들먹이며 실내 운동을 권하는 이들에게 딱히 반박할 만한 이론도 없다. 하지만 복잡하게 얽힌 일들을 차분하게 정리하며 타박타박 혼자서 걷노라면, 실마리의 끝이 잡히듯이 할 일에 대한 완급이 조절되는데다가 운동의 효과까지 얻을 수 있어서 걷는 일이 좋다. 좋아졌다. 모든 일이 즐겁다.
둘레길을 걸으며 사람들을 보면서 인생을 생각한다. 큰 역사의 실핏줄 같은 그 인생들에서 나의 길도 비친다. 잠시나마 인생을 둘러보는 둘레길이다.(12.6
사색적인 수필이다. 둘레 길을 걷는 즐거움, 그리고 둘레 길을 걸으면서 떠오르는 생각, 즉 삶에 대한 관조와 사색이 있기에 깊이를 가지게 되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