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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통한 역사의 완성 - 김제방 수필가
김순진(시인, 고려대 강사)
김제방 선생을 생각하면 세 가지 직함이 떠오른다. 12권의 시집과 9권의 수필집을 상재하신 분으로 우선 ‘문인 김제방’을 꼽을 수 있다. 틈틈이 취미활동을 하면서 남들에게 공부하는 지식인의 귀감이 되신 선생은 ‘공인회계사 김제방’으로 평생을 바쳐오면서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기여해 오신 분이다. 인터넷에서 김제방을 검색하니까 수십 권의 책이 검색되어 올라온다. 그런 그가 이번에 스토리문학을 발행하고 있는 도서출판 문학공원에서 대한민국 역사를 총 망라하는 “김제방 역사서시리즈 4권”을 완간하였다. 그러기에 ‘역사학자 김제방’으로도 당당히 이름을 드높혔다는 평가다. 지난 2009년 10월 1일 『한국근현대사』를 출간한 것을 시작으로 2010년 7월 26일 『한국중고대사』, 2011년 7월 15일『한국민주화역사』에 이어 지난 7월 25일 『조선왕조사』등 4권을 도서출판 문학공원에서 출간, 대한민국 역사를 완간하는 쾌거를 이뤄 화제다. 이 네 권의 페이지 수를 합하면 총 2,448페이지로 이는 고려 후기 고승 일연이 충렬왕 7년(1281)에 편찬한 『삼국유사』(5권 목판본)에 견줄만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삼국사기』는 고려 인종 23년(1145)경 김부식이 신라 · 고구려 · 백제 3국의 정치적인 흥망과 변천을 중심으로 편찬한 역사서이지만 인종의 명에 따라 김부식의 주도하에 11명이 참여하여 편찬되었으므로 정부 차원의 역사서다. 따라서 금번 ‘김제방 역사서시리즈’의 완간은 개인으로서, 더구나 역사를 전공하거나 역사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닌 직업인으로서 이뤄낸 성과이기에 그만큼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불러 모으고 있다.
역사에 관심을 두어 우리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진 나라인지 알지 못하고서는 애국심을 가지기 어렵고 애국심이 없는 사람은 어떤 일이건 승리자가 되기 어렵다. 김제방 선생이 수십 년 동안 이렇게 방대한 양의 역사서를 집필한 이유는 단순히 취미를 넘어서 외국에서 공부하는 유학생들이나, 국내에서 자라나고 있는 청소년, 그리고 직장인을 비롯한 참전세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역사를 다시금 돌이켜보고 더 잘사는 나라로 갈 수 있는 시금석이 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었을 것이다. 저자 김제방 선생은 正史적인 시각에서 편중된 의견을 최소화하면서 객관적인 시각으로 기술하려고 노력하였고, 野史적인 시각에서 흥미를 유발하였으며, 通史적인 시각에서 우리의 역사를 꿰뚫어 공감각적 시각으로 우리의 정통성을 찾고 긍지를 심어주려 애쓴 흔적이 곳곳에 묻어나 있다. 그러기에 이번 스토리문학 메인스토리는 문학이란 정통에는 조금 벗어나는 측면이 있으나 문인으로서의 시각과 감각으로 써낸 재미있는 역사서이기에 취재를 결정하였다.
스토리문학에서 수필부문에 등단하기도 한 김제방 선생의 본은 안산安山으로 1935년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연곡4리에서 아버지 김두진金斗鎭 선생과 어머니 한용순韓龍順 여사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하여 어릴 때 서울로 상경하였다. 서울 덕수상고와 건국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수료, 미국 일리노이대학교를 수학하고 현재 공인회계사로 일하고 있다. 그런 이력의 그가 어떻게 이렇게 방대한 역사를 저술할 수 있었을까? 그는 공인회계사 이전에 어려서부터 문학과 역사를 좋아하는 문학도이자 역사학도였다. 그랬기에 그동안 그는『왕건의 나라』, 『장하다 홍국영』, 『흥선대원군과 명성왕후』, 『고종황제의 최후』, 『이승만과 김구의 대좌』, 『박통의 그늘』, 『세종대왕의 실수』, 『불타는 창덕궁』 등의 서사시집과 『이집트로 가는 길』, 『오아시스로 가는 길』, 『베이징으로 가는 길』, 『긴 만남 짧은 이야기』등 12권의 시집을 출간해올 수 있었으며 『인간적인 것이 그립다』, 『빌딩 숲에 매달린 고슴도치』, 『어느 여름밤의 방황』, 『물꼬를 터가는 사람들』, 『사도세자 압구정역 하차』, 『비에 젖은 남치맛자락』, 『둥지를 찾아 헤매는 텃새』, 『호박이 넝쿨째 굴렀네』, 『목화 꽃이 필 무렵』등 9권의 수필집을 낼 수 있었다. 그러다가 대한민국의 역사를 완간하겠다는 당찬 포부를 안고 지난 20여 년 동안 불철주야로 작업해온 역사시리즈를 완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높은 문학적 성취와 함께 역사분야에서도 큰 업적을 이룬 김제방 선생을 방배동 자택을 찾아가 만났다.
이번 여름은 매우 장마가 긴 여름이었다. 방배동 일대는 지난 7월 29일 우면산에서 쏟아져 내린 산사태로 많은 가옥이 파손되거나 침수되고 13명의 희생자를 낸 직후라 크게 걱정했는데 선생의 가옥에는 큰 피해가 없었다고 하니 천만 다행스럽다. 선생을 만나러 간 날은 마침 궂은비가 오락가락 하는 8월 13일 말복이었는데, 선생은 선풍기 하나에 의지한 채 더위를 이기시며 근검절약하는 정신을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집은 3층이었는데 위층으로 통하는 옥상 층은 선생께서 서재로 사용하고 있었다. 집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사모님께서는 커피와 율무차를 섞은 차에 떡과 과일이 든 정갈한 다과상을 준비해 내오셨다. 사모님 임용원林容元 여사께서는 판소리와 서도창을 하는 등 국악에 취미를 두신 분으로 두 분의 우리 문화예술에 대한 사랑은 남달라보였다. 슬하에는 2남 2녀를 두고 있다.
김순진 : 오늘 이렇게 스토리문학 메인스토리 취재에 응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이왕에 역사서 시리즈에 초첨을 맞추러 왔으니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여쭙고 문학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나요? ‘김제방 역사서시리즈 총 4권’을 완간하는 소감을 짧게 말씀해주세요.
김제방 :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과거의 모습을 통하여 현재의 삶을 다듬고 미래를 설계하자는 것입니다. 끈끈한 맥을 이어오는 조상들의 슬기와 사상, 어려웠던 경험을 통하여 늘 새로움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번에 완간한 ‘김제방 역사서시리즈’에서 저는 한국사와 세계사를 알기 쉽게 사건을 시간대별로 나열함으로써 지루함을 없애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시공時空의 간격을 좁히고자 역사현장에 가서 하나씩 골라 담는 심정으로 기획하였습니다.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배워야 해요. 부족하지도 말고 넘치지도 않는 지혜로서 우리의 이 행복을 지켜나가야 할 것이지요.
김순진 : 최근 우리나라는 G20회의를 개최하는 등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세계 속의 한국의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당선이나 재선 같은 것도 자부심을 느껴야 할 쾌거라 할 수 있지요. 그런 저력은 어디서 나온다고 보시나요?
김제방 : 중국의 왕조는 전후한前後漢을 합쳐서 410년이 가장 긴 왕조였으며 그 다음이 남북송南北宋을 합해 321년, 청나라 297년, 명나라 294년, 당나라 290년의 순으로 결국 중국에는 500년 왕조가 하나도 없었는데 우리나라는 고구려 704년, 백제 678년, 신라 992년, 고려 474, 조선 518년 등 장수국가를 건설하였습니다. 우리 고대국가들이나 중세국가들이 그렇게 오래도록 장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변화무쌍한 중국대륙에 대처하기 위해서였지요. 따라서 우리의 삶은 순탄할 수 없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했어요. 역동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 있었던 것 같아요. 흔히 우리 민족을 한恨이 많은 민족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현대사는 이와 같이 ‘응집된 한을 발전 동력으로 키운 것이 성공의 요체’가 아닌가 하고 저는 여기고 있습니다.
김순진 : 역사는 우리에게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준다고 생각합니다. 꽃이 피어나는 것은 뿌리로부터 줄기로 이어진 역사의 증거입니다. 어둠을 승화하여 피어난 한 떨기 아름다운 꽃을 보며 생각해 보았습니다. 수많은 외세의 침략에도 굴하지 않던 우리나라지요. 안으로는 수많은 소용돌이에서도 굳건하게 이어온 우리나라라고 생각해요. 선생님께서 이런 우리나라의 역사를 써오신 데 대한 특징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김제방 : 5천년이라는 기나긴 역사를 가진 나라는 지구상에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제가 쓴 ‘김제방 역사시리즈(총 4권)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모든 역사의 전개를 세계사와 병행하여 기술함으로써 시대별로 세계역사와 우리의 역사의 상관관계, 그리고 발전방향을 제시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역사는 사가에 따라 그 평가가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저 역시 역사를 써나감에 있어서 저의 생각을 군데군데 넣으면서 저의 애국심을 밝히려 했습니다. 보수와 우익의 편에서 역사를 기술하려고 애썼습니다. 나라를 누가 더 사랑하느냐를 가늠할 수는 없지만 보수 우익으로 대변되는 강남 사람들이나 광복 전후의 출생세대들은 나라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역사에 관한 사회적 관심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지난 몇 년간 한국사를 가르치지 않았던 학교에서는 다시금 한국사를 필수교양과목으로 채택하고 있어요. 과거를 숨김이나 왜곡 없이 드러내고, 과오는 인정하여 온고지신의 발판으로 삼으며 장점은 널리 장려하여 정통성 있는 나라세우기만이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세계 속의 1류 국가를 건설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중국에서 몇 년 전부터 해오고 있는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광개토대왕비와 고구려, 부여의 역사를 자기네 나라라 우기고, 일본의 극우 국회의원이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 주장하며 울릉도를 방문하려 했다가 입국이 취소되었던 상황에서 투철한 애국심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많은 사람들이 가져야할 태도라고 저는 감히 힘주어 말하고 싶습니다.
김순진 : 얼마 전 미국에 다녀온 분의 후담을 기억해봅니다. 한 미국시민이 50년 된 부채를 가지고 수백 년 된 도자기마냥 자랑을 해댔다고 하네요. 200년밖에 되지 않은 미국의 역사에서 50년 된 유물을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일까요? 그렇게 본다면 우리들의 생활용품은 모두가 유물이며 가보인 셈입니다. 어릴 적, 집에서는 양은그릇이 세상에 나오자 백자로 이루어진 가재도구를 모두 내다버린 적이 있습니다. 깨지기 쉽고 무거운 도자기보다는 다루기 쉬운 양은그릇이 좋았을런지 모를 일이지요.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맷돌, 써래, 대나무갈퀴, 키, 채반, 체, 궤, 함지박, 발탈곡기 등은 모두 우리의 얼이요 혼이며 문화재입니다.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 너무도 많은 유물이 산재해 있는데 그것에 대한 가치를 모르고 있습니다. 역사란 아픔까지도 고스란히 감싸 안는 것이라 생각해요.
김제방 : 맞습니다. 『맹자孟子』의 고자장구하告子章句下편에는 “천장강대임어시인야天將降大任於是人也, 필선고기심지必先苦其心志, 노기근골勞其筋骨, 아기체부餓其體膚, 공핍기신空乏其身, 행불난기소위行拂亂其所爲, 소이동심인성所以動心忍性, 증익기소불능曾益其所不能.”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를 풀이하면 “하늘에서 장차 그러한 사람들에게 큰일을 맡기는 명을 내리면 반드시 먼저 그들의 심지를 괴롭히고, 그들의 근골을 수고롭게 하고, 육체를 굶주리게 하고, 그들 자신에게 아무것도 없게 하여서 그들이 하는 것이 그들이 해야 할 일과는 어긋나게 만드는데, 그것은 마음을 움직이고 자기의 성질을 참아서, 그들이 해내지 못하던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게 해주기 위해서이다.”로 풀이됩니다. 이는 우리 민족에게 있었던 많은 시련은 우리민족을 단련시키고 힘들게 하여서 세계를 움직이고 리드할 수 있는 최고의 민족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뜻으로도 풀이할 수 있습니다. 중국, 몽고, 러시아, 프랑스, 일본, 그리고 공산주의 둥 수많은 외적 요인으로부터 끊임없는 침략과 시련에서도 한강변에 이렇게 발전한 대한민국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우리의 지난 역사를 잊지 않고 전국 각지에 사고(史庫)를 두어 보존해왔기 때문이라 생각해요. 자기나라의 역사를 모른다는 것은 부모를 모른다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식은 결코 성공할 수 없어요.
김순진 :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은 역사에 대해 경시하는 풍조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점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김제방 : 1960년대 초만 해도 우리는 한국인인 걸 부끄럽게 생각하고 한국인을 비하하는 풍조가 만연해있었습니다. 엽전 · 팽이 · 코리안 타임 등 여러 가지 말로 자기비하를 서슴없이 하던 때였지요. 이렇듯 자조적自嘲的 표현으로 자기얼굴에 침을 뱉고 다니던 시절이 불과 50여 년 전의 일입니다. 이와 같은 사회분위기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는 덩달아 우리 한국인은 모두가 못난 사람이란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36년간 일제식민지의 질곡에서 벗어나자마자 나라는 분단되었고, 그 분단은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이어져 많은 사람들이 죽고 피를 흘렸습니다. 못나도 한참 못난 국민이었던 게 사실입니다. 전쟁으로 국토는 파괴되고 5천년 찌든 가난의 끝이 보이지 않던 우리사회는 암담하기조차 하였지요. 그런데 우리의 역사는 기적적으로 반전(反轉)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961년 5.16혁명을 계기로 우리나라는 비약적인 발전을 시작하였습니다.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이제는 원조를 하는 경제대국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그 힘의 원천은 어디에 있었을까? 우리는 지정학적으로 중국대륙에 붙어있어 중국의 영향을 받으면서 독자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고 생각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은연중에 은근과 끈기, 즉 지구력을 키워야했던 겁니다. 모래알처럼 흐트러졌던 발전동력을 한곳으로 집결하는데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의 지도력은 세계가 놀랐습니다. 이는 50여 년 전의 생각을 바꾸게 한 배경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엽전도 아니고 팽이도 아닌 그저 자랑스러운 한국인일 뿐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발전모델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전수해 가고 있습니다.
김순진 : 제가 생각해도 정말 빠른 발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어렸을 땐 라디오도 없던 시절이었는데 지금은 사람마다 스마트폰을 쥐고 다니니 말이에요. 선생님께서는 일본강점기 시대의 역사가 우리의 역사에 너무나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우려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김제방 : 우리나라는 1910년 한일합방으로부터 1945년 해방이 되기까지 36년간을 일제식민지 하에서 일본침략에 저항하는 항일투쟁을 계속하였습니다. 이 36년간의 일그러진 역사, 암흑의 역사를 떠올리면서 우리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아 가슴 아프기도 하지만 그것도 역사는 역사인 것입니다. 그런 역사를 거울삼아 다시는 그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 이후 우리는 많은 세월을 살아왔지만 그 36년의 악몽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우려되는 것은 우리의 5천년 역사가 일제 36년 역사에 매몰되어 우리의 현대사를 위축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3·1절과 8·15광복절 행사를 볼 때마다 느끼는 감정입니다. 그와 관련한 역사적 만행을 부각시키면 시킬수록 우리의 현대사가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독도문제 · 신사참배문제 · 일본위안부 문제 · 친일과거사 정리 등 연중행사로 들고 나와 국민의 패배의식을 조장하는 일은 이제 지겹기까지 합니다. 광복이 된 지도 66년이 지났습니다. 물론 최근의 뼈아픈 역사이기 때문에 잊지 못하겠지만 우리의 역사에는 그보다 훨씬 자랑할 것도 많고 기억해야 할 것도 많습니다. 이젠 일본강점기 시대의 악몽에서 벗어나 그 부분을 최소화하고 우리의 찬란하고 웅대했던 발해, 부여, 고구려와 대마도를 정벌했던 역사, 일본에 우리의 문화를 고스란히 전해준 역사를 부각시켜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만들어야 할 때입니다.
김순진 : 맞습니다. 사실 일본사람들이 들으면 기분이 나쁘겠지만 일본사람들은 모두 한국사람들의 후예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시아대륙의 끝인 한국에서 건너가지 않으면 어떻게 일본사람들이 있을 수 있으며 그 문화가 전수될 수 있었겠어요. 중국도 그렇습니다. 지금은 옛 고구려나 발해, 부여의 땅을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나 역사까지 그들의 역사는 될 수 없지요. 일본과 중국에 대한 선생님의 시각에 공감합니다. 그럼 북한문제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김제방 : 우리는 8·15해방 이후 동서냉전으로 남북분단과 동족상잔의 뼈아픈 경험을 하였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해방을 맞이한 것이라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을까요. 남쪽에는 대한민국이 건국되었고, 북쪽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세워져 서로 체제대결을 벌이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 험난한 대결을 거치면서 성공한 대한민국, 실패한 북한, 이렇게 승패가 분명해졌지만 그 반목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퍼주면서도 좋은 소리 못 듣는 게 남북관계인 것 같습니다. 김일성은 북한 국민들에게 살아생전에 흰 쌀밥에 쇠고깃국을 먹여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쌀밥에 쇠고기국은 고사하고 강냉이도 없어서 얻어먹는 지경에 이르렀고, 1994년 김일성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사망하였지요. 결국 식량난으로 300만 명의 북한주민들이 굶어죽었다고 합니다. 최근에 살기 위해 북한을 탈출하는 사람들이 속출하여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의 수가 2만 명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중국으로 넘어간 탈북자들은 북으로 잡혀가 공개 처형된다고도 합니다. 사정이 이와 같은데도 우리의 현대사는 좌편향左便向으로 기울고 있다고 하니 참으로 속상한 일입니다. 북한만이 고립상태입니다. 대화의 단절은 파멸을 초래할 뿐입니다. 어느 나라에도 좌파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좌파는 종북주의, 친북주의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제 국민적 자각을 통해 마치 연자방아를 돌리려고 한쪽 눈을 가린 소처럼, 한쪽 눈으로 보려는 좌파지식인들의 시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 하는 것을 뒤늦게나마 깨닫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김순진 : 사람은 누구나 특별한 시야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글로 써 냈을 때 작가의 눈이 됩니다. 선생님께서도 개인의 눈으로 작품을 쓰셨는지요?
김제방 : 역사가들이 주저하고 있는 사이에 우리나라는 경제와 함께 좌우익과 동서 지역 간의 생각차도 빠른 속도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역사의식의 결여로 시도 때도 없이 반항하고 격돌하려 듭니다. 역사의식의 결여는 국가의 정체성마저 흔들어 놓습니다. 국가발전을 위해서 불행한 일이지요. 현대사는 언제 정리하겠다는 말인가요? 저는 역사를 전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논할 자격도 없는 사람이지요. 자격이 없으니까 부담도 덜한 게 사실이고 나는 영호남 어디에 편향된 사람도 아닙니다. 때문에 내가 어떻게 쓰더라도 시비 거는 사람이 없을 것이란 생각에서 자유롭게 시도해 보았습니다. 역사를 배경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지도 어언 30여 년이 되었습니다. 오리엔트의 역사에 머물지 않고, 그리스, 로마, 유럽, 중국, 인도, 터키 등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범위를 넓혀나갔어요. 학문적으로 체계 있는 연구가 아닌 역사유영歷史遊泳을 시작한 것입니다. 취미생활로 세계사에 다가갔고 그 흐름 속에서 한국사에 접근하여 역사를 써보고자 하는 욕심이 생긴 것입니다. 물론 글을 쓰는 사람이 개인의 감정이 들어가지 않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저는 될 수 있으면 개인의 의견을 될 수 있으면 반영하지 않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어느 특정 정당이나 지역의 특색에 치우지지 않고 글을 쓰려 애썼습니다. 우선 저는 독자들로 하여금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 쉽고 빠르며 바르게 전달하고자 애썼습니다. 두 번째로는 아이가 읽든 어른이 읽든 편한 문체를 사용하였으며, 음란한 용어나 속어, 특정 정당을 비방하는 말, 왜곡된 시각을 가지지 않고 대한민국 국민의 입장에서 우리나라가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 잘 되기를 바라는 객관적이고도 공정한 시각을 가지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국내정세만 기술된 것이 아니라 당시 추구했던 정치의 의미와 시대적 배경은 무엇이었으며, 우리나라 예술문화에 대한 시각을 구체화시켜 독자로 하여금 그 당시의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가 무엇이었는가를 전달하려 애썼습니다. 무엇보다도 중 ․ 고등학교 국사시간에도 접할 수 없었던 다양한 역사적 사실을 모아 기술함으로써 보다 정확한 우리나라에 대한 역사지식의 습득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우리나라를 바로 알 수 있는 계기로 삼고자 노력하였다고 자부합니다.
김순진 : 정말 대단하신 역사관이십니다. 박수를 보냅니다. 생님께서는 일본 강점기 시대에 태어나셔서 우리나라가 근대화되어가는 과정을 몸소 체험하신 세대이십니다. 그것은 선생님께서 역사를 써오시는데 어떤 역할을 했다고 보시나요?
김제방 : 『논어論語』의 위정편爲政篇에 “옛 것을 알고 새 것을 알면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라는 구절이 있어요. 선역사를 배우고 옛 것을 배움에 있어, 옛 것이나 새 것 어느 한 쪽에만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지요. 즉 전통적인 것이나 새로운 것을 고루 알아야 세상을 바로 읽고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니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얼마나 지대한가요? 조선 후기의 실학자였던 박지원은 법고창신法古創新 이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이 또한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創造한다는 뜻으로, 옛것에 토대土臺를 두되 그것을 변화變化시킬 줄 알고 새 것을 만들어 가되 근본根本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뜻인데요. 공자의 말 ‘온고지신’이나 박지원의 말 ‘법고창신’은 모두 옛것을 바로 알아야 새것을 알 수 있고 새로움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말이니 역사歷史가 현대인들에게 주는 의미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일본강점기시대에 태어나 우리나라 격동기 시대를 몸소 겪고 체험하고 보아온 제가 전달하려는 것은 옛일이 그리워서 향수에 젖거나, 옛날엔 이렇게 고생했는데 지금 뭐가 힘든 일이 있느냐며 현대인들에게 야단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 연연하지 말되 바로 알고 앞으로 나아간다면 또다시 아픈 상처의 전철을 밟지 않고서도 우리나라를 세계 열강대열에 올려놓을 수 있으며 지금보다 더욱 윤택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는 말을 전달하고 싶습니다.
김순진 : 역사에 대하여 우리들이 가져야 할 마음자세는 무엇일까요?
김제방 : 공기의 속성이나 물의 속성은 일부러 실험을 통해 증명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체험되는 것이며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조국이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물과 공기처럼 고마운 것이지만 그 가치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때로 공기와 물을 오염시켜 스스로 재앙을 불러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가끔 우리나라의 정치상황이나 교육환경이 싫다며 우리나라의 돈으로 이민을 가거나 스스로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발언을 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누워서 침 뱉기지요. 중국 사람들이 외국에 유학을 가는 이유는 ‘공부해서 중국을 부강시키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학을 가는 것은 ‘한국이 살기 싫어져서 떠나기 위함’이라고 하니 우리 모두가 반성해야 할 일이에요. 한국에 살 때는 한국을 흉보다가도 실제로 외국에 나가면 모두 애국자가 되면서 왜 떠나기 전에 한 번쯤 더 생각해보지 않는지, 나는 무엇을 하기 위해 공부하러 가는 것인지에 대한 반성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김순진 : 최근 교육과학기술부가 2012년부터 고교에서 한국사 과목을 필수로 하겠다고 발표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김제방 : 지금 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교과서는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해선 ‘냉전과 독재의 함정에 빠지다’ ‘군사독재 시작되다’라는 제목을 달면서 김일성에 대해선 ‘유일사상체제를 세우다’ ‘북한이 개방에 나서다’라는 제목을 달아놓았다고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지적한 바 있습니다. 남한의 독재는 보면서 그보다 몇 십 배 지독한 공산독재는 보이지 않는 그런 교과서라는 말입니다. 국사교육을 제대로 시키려고 한다면 국민이 공감할만한 국가관 · 역사관을 토대로 자라나는 세대를 올바로 교육할 교과서부터 내놓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박정희 대통령 같은 위대한 대통령이 있어도 섬길 줄을 모릅니다. 우리를 배고픔에서 구해준 공로는 인정하지 않고 독재자라 폄하합니다. 우리 지도자의 위상부터 세워놓고 봐야 할 일입니다.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고 함부로 하는 집안은 잘 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남의 분야를 넘보지 않고, 자기분야에서 최고가 되어 존경 받는 사람이 되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나의 일보다는 남의 일에 간섭하다가 사회갈등을 키우는 현실이 개탄스러울 뿐입니다.
김순진 : 선생님께서는 12권의 시집과 9권의 수필집을 내신 대단한 문학도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저서를 내신 원동력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김제방 : 작품은 재료의 소재에 따라 나오는 것입니다. 돌로 만든 물건은 조각이나 건물이 되고, 종이로 만든 물건은 책이나 포장지가 됩니다. 흙으로 빚은 송편은 먹을 수 없으며, 설 때 송편을 하거나 추석 때 가래떡을 뽑아서는 우스개꺼리가 되고 맙니다. 소재의 쓰임을 알고 새로움을 취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국제화시대다, 글로벌시대다 하지만 우리나라를 잘 알지 못하고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성공하기 어렵다는 말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대한민국을 이루고 있는 것, 특히 우리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진 나라인지를 알지 못하고서는 좋은 작품을 쓰기 어렵습니다. 지금 내 주변에 있는 것이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볼펜 한 자루와 오래된 가방은 나에게 영감을 주지만 남의 좋은 시계나 명품 가방은 그저 남의 것입니다. 자기의 추억이 소중합니다. 자기의 고향이 중요합니다. 내가 가진 물건과 주변환경과 가정이 중요하고 자기가 속한 단체, 나라가 중요한 것입니다. 내 주변의 돌 한 개, 풀 한 포기라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마음에서 문학이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가정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가정이 깨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제가 수십 년 동안 이 방대한 양의 글을 쓴 이유는 단순히 취미를 넘어서 외국에서 공부하는 유학생들이나 국내에서 자라나는 청소년, 그리고 직장인을 비롯하여 참전세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역사를 다시금 돌이켜보고 더 잘 사는 나라로 갈 수 있는 시금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제가 쓰고 있는 문학이나 역사의 주된 대상이 없습니다. 바꿔 말하면 ‘모두 관람가’ 등급이다. 남녀노소 누구나 읽을 수 있으며, 학생들이 읽으면 역사에 관한 재미를 느낄 수 있게 동기를 부여해 앞으로 우리나라를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토대가 되었으면 합니다. 특히 외국에 나가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나 공부하고 있는 자녀들에게 권한다면 우리나라를 이해하고 사랑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란 생각에 적극 추천하고 싶습니다.
김순진 : 오늘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좋은 말씀으로 대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스토리문학 독자들이 모처럼 올바른 역사이야기를 들려줄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김제방 : 문학적 감수성이나 역사 지식이 부족한 저에게 이처럼 귀한 자리와 지면을 할애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독대로 만난 김제방 선생과의 취재는 그렇게 끝이 났다. 선생께서는 많은 이웃들이 수해의 아픔을 함께 해야 한다는 안타까움을 나타내시며 긴 장마 끝에 밝은 햇살처럼 풋풋하게 웃으셨다. 그리고 필자를 데리고 방배동 청권사 건너편 한 식당에서 따끈한 삼계탕을 대접해주셨다. 바쁜 중에도 취재에 응해주신 김제방 선생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조선왕조사』 중에서 한 대목을 뽑다 게재한다.
제주에 표착한 하멜
-『조선왕조사』 중에서
김제방
1653년 효종4년 8월, 하멜을 비롯한 네덜란드인 38명이 제주에 표착했다.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이들은 폭풍을 만나 부서진 상선의 돛을 건져 천막을 치고 그 속에 들어 앉아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제주도 백성들이 먼저 알고 달려왔다.
“야, 괴상하게 생겼다.
“무얼 먹고 저렇게 키가 클까. 눈을 봐라. 마치 고양이 눈처럼 파랗고, 머리카락은 또 어떻고? 옥수수수염 같은 걸."
이상하게 생긴 사람을 바라보며 손가락질을 하고 놀려대면서도 막상 겁을 먹기는 저들과 마찬가지였다. 백성들은 가까이 가지 못하고 웅성거리기만 하였다. 하멜 일행이 모여든 사람의 복장을 보니 일본사람들이 아니었다. 혹시 해적들이 사는 곳은 아닐까 하멜은 긴장해서 구경꾼들의 동태에 촉각을 세웠다. 이윽고 신고를 받은 제주목사 이원진은 대정현감 권극중을 보내면서 당부하였다.
“군사를 이끌고 가되 그들이 먼저 공격하지 않는 한 살상하지 말고 인원과 소지품을 살피고 오시오.
군사 100여 명을 이끌고 달려간 권극중은 그들이 무슨 조화를 부릴 것 같아 조심스러웠다. 하멜도 신중했다. 군사의 수로 보아 쉽게 도망칠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권극중은 이들이 침략해온 것이 아니고 난파를 당해 뭍으로 올라온 것 같다고 제주목사에게 보고하였다. 다음날 이원진은 군사를 거느리고 그곳으로 갔지만 의사소통이 될 리가 없었다. 다만 이들이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걸 알고 제주부윤으로 압송해 감옥에 가두고 그들의 물건을 모두 감옥에 넣어주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었다. 하멜 일행은 비록 감옥에 갇히는 했으나 숙식에는 아무 지장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조선인의 친절에 보답하기 위해 하멜은 포도주를 권했다. 은잔에 따라 옥졸에게 주자 옥졸은 겁을 내는 눈치였다.
“이것이 무엇이오. 시뻘건 것이 피가 아니오.
하멜이 먼저 마시자 옥졸들이 따라 마셨다. 그 다음부터 물론 제주목사까지도 포도주를 좋아하였다. 이원진은 조정에 보고해 놓고 손짓발짓으로 급한 의사는 전달을 할 수 있게 되어 하멜 일행을 감옥에서 풀어 광해군이 18년간 귀양살이를 하던 곳으로 옮겨주었다. 그들이 살기에는 큰 불편이 없었다. 이원진의 장계를 받은 조정에서는 회의를 열었다.
비변사에 박연(朴淵)을 임명하여 이 일을 위임하였다. 박연은 본래 화란 사람으로 26년 전인 1627년 정묘호란이 나던 해 33세에 붙잡혀 와 조선인 여자와 결혼하여 자식까지 낳고 살고 있었다. 허연 수염을 기르고 도포를 입고 있었지만 붉은 머리와 파란 눈은 속일수가 없었다. 하멜 등은 박연을 보자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기뻤다.
“우리를 일본으로 보내주시오."
“그건 모르는 소리요. 일본에서는 문호를 개방한 곳이 나가사키밖에 없소. 멋모르고 갔다가 더 참혹한 대접을 받고 죽을 수도 있소. 때를 기다리시오."
한편 중전 장씨는 이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전하, 제주도에 양인들이 도착했다는데 사실이옵니까."
“그렇소. 중전은 심양에서 양인들을 본 일이 있지 않소."
“그들이 우리나라에 온 것이 신기해서 그러 하옵니다. 그들을 어찌하실 작정이십니까."
“글쎄 아직은……. 신하들이 말이 많고 백성들도……."
“그럴 것이옵니다. 그러나 연경에까지 가서 문물을 배워오는 처지에 이 땅에 온 양인을 잘 이용하면……."
“중전도 그리 생각하시오?"
1654년 어전회의를 열어 하멜 등을 서울로 데리고 왔다. 하멜 등은 명나라사람들의 피란민촌인 연못골(연지동) 근처에 수용하고 어영청에 배속시켜 호패를 내렸다. 어영청에 배속된 박연과 하멜 등은 대포와 총을 만들 도록하였다.
1666년 9월, 유배생활 14년 만에 네덜란드인 하멜 등 8명이 조선을 탈출하였다. 이들은 하멜 외에는 글을 모르는 무식한 사람들이었으나 그 시대에는 일등국민에 속해 있었다. 조선에서는 이들을 서양오랑캐 정도의 대우밖에는 하지 않았다. 여수 ․ 순천 ․ 남원 등지에 분치되었던 하멜 등이 조선을 탈출하여 우리나라를 유럽에 제일먼저 알리게 되었다. 하멜 등은 작은 고깃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구사일생으로 귀국해서『난선제주도 난파기』,『조선국기』를 썼다. 유럽에서는 그 책이 곧 영어 ․ 독일어 등으로 번역되어 유럽인의 호기심과 흥미를 돋우어주는『이상한 나라의 이야기책』으로 읽혀졌다고 한다. 당시 우리의 사정은 병자호란의 여파가 가시기도 전이었다. 정치적 ․ 사회적 혼란에 시달려야 했으며, 인조의 낙담 ․ 효종의 북벌계획 좌절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당파싸움에 천재지변까지 극성을 부리고 있었다. 중국대륙에서는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는 대변혁의 시대였다.
古土 金濟邦 선생 연보
아호는 고토古土
시인
수필가
역사학자
공인회계사
세무사
1935년 경기도 포천 출생
덕수상업고등학교 졸업
건국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고려대하교 경영대학원 수료
미국 일리노이대학교 수학
학교법인 건국대학교 감사
한국공인회계사회 윤리위원장
세동회계법인 이사
안진회계법인 이사
현재 신일회계사무소 소장
월간 <스토리문학> 수필부문 등단
수필집
『인간적인 것이 그립다』(열음사) 1988.
『빌딩 숲에 매달린 고슴도치』(지문사) 1989
『어느 여름밤의 방황』(지문사) 1991.
『물꼬를 터가는 사람들』(지문사) 1992.
『사도세자 압구정역 하차』(지문사) 1993.
『비에 젖은 남치맛자락』(행림출판사) 1993.
『둥지를 찾아 헤매는 텃세』(행림출판사) 1994.
『호박이 넝쿨째 굴렀네』(행림출판사) 1996.
『목화꽃이 필 무렵』(행림출판사) 1996.
시집
『이집트로 가는 길』(지문사) 1988.
『오아시스로 가는 길』(지문사) 1999.
『베이징으로 가는 길』(지문사) 2000.
『긴 만남 짧은 이야기』(지문사) 2001.
『왕건의 나라』(지문사) 2001.
『장하다 홍국영』(지문사) 2001.
『흥선대원군 ․ 명성왕후』(지문사) 2003.
『고종황제의 최후』(지문사) 2005.
『이승만과 김구의 대좌』(한솜) 2005.
『박통의 그늘』(한솜) 2006.
『세종대왕의 실수』(한솜) 2006.
『불타는 창덕궁』(한솜) 2007.
김제방 역사서시리즈
『한국근현대사』(문학공원) 2009.
『한국중고대사』(문학공원) 2010.
『조선왕조사』(문학공원) 2011.
『한국민주화역사』(문학공원)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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