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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자문학론(諷刺文學論)
-문단위기(文壇危機)의 타개책(打開策)으로서-
최재서(崔載瑞)
침체에 침체를 거듭하여 오다가 드디어 한계에 다다른 현재의 조선문학(朝鮮文學)을 해부하고 아우러 그 대책을 각 방면으로부터 논구하는 것이 오늘의 문단(文壇)의 중심적 흥미가 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에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문단(文壇)의 위기(危機)를 해부하고 설명함에 있어서, 거지반 유감이 없으리 만큼 상세하고 논리적임에도 불구하고 그 구체적 대책에 있어서는 너무도 공소하고 빈약함은 어쩐 까닭인가? 물론 이 같은 논단은 일종의 예언인지라 현명한 비평가(批評家)가 처음부터 손대기를 꺼려할 종류의 물건이라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언(豫言)이란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실현되어야만 긍정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스라엘의 예언자(豫言者)들이 절규하든 신(神)의 왕국(王國)은 아직도 지상에 실현되지 않았다. 이 경우에 예언(豫言)이란 (저급한) 미래(未來)의 점복(占卜)이 아니라 (필연적인) 현재의 갈망(渴望)내지 (정직한)인류(人類)의 고백(告白)이다. 이러한 의미의 예언(豫言)이라면 누구나 다 한 마디씩은 준비가 있을 것이고 또 발언을 삼갈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적(文學的) 예언(豫言)이 영세함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출발점에 무리가 있었던 까닭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즉 문단위기(文壇危機)를 관찰하고 분류하는 방법(方法) 그 자체가 제한되고 고정되었기 때문에, 결론도 자연 속박되지 않는가 나는 생각한다. 실례를 들어 말하면, 요새 우리가 흔히 보는 문단위기론(文壇危機論)에 대체로 공통된 점은 현문단정세(現文壇情勢)의 분류법(分類法)이다. 즉 조선(朝鮮)은 과거에 국민주의문학(國民主義文學)을 가졌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 아니하여 사회주의문학(社會主義文學)에 압박을 받아 잠식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 신흥문학(新興文學)도 최근에 발발한 여러 가지 사회정세로 말미암아 활동불능에 빠지고 말았다. 이리하여 조선문학은 현재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고 말았다. 이것이 논지의 골격이다. 이만하면 독자(讀者)제씨도 대강 예상할 수 있겠지만, 이곳에선 현재의 문단위기(文壇危機)를 타개(打開)할 아무런 방책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냐하면 국민주의문학(國民主義文學)과 사회주의문학(社會主義文學)은 현재의 조선문학을 분할하는 이대(二大)분야로서 중간적 존재를 허용하지 않는 두 개의 대립적 문학이기 때문이다. 둘 밖에 없는 데서 둘을 다 제거한다면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은 자연의 수이다. 따라서 문단위기(文壇危機)의 타개책(打開策)을 논구하려면 우리는 종래의 것과는 좀 다른 분류법으로써 문학에 접근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는다.
우리는 과거의 문학(文學)에 있어서 정치사상의 지위를 너무도 과대시한 허물이 있다. 물론 정치가 우리의 사회생활에 있어 기초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정치가 우리 생활의 전부는 아니다. 더욱이 문학에 있어 정치의 가치(價値)를 절대시하는 기풍은 흔히 그 사회의 문학을 진퇴양난의 함정으로 몰아 드리는 수가 많다. 즉 그 사회의 정치가 실질적으로 정지하거나 혹은 위기(危機)에 설 때, 그때까지 그에게 추종하여 오든 문학은 별안간 방향전환할 기지도 이성(理性)도 발견하지 못하는 법이다. 따라서 문학세계는 일반적 세계의 갈등이 풀려나오기를 기다리면 수수방관(袖手傍觀)할 수 밖에 없이 된다. 이것은 누가 보든지 문학의 명예도 아니고 사명도 아니다. 사회가 핍박(逼迫)하더래도 아니 핍박하면 할수록 문학은 문학 독자의 사명과 활동이 있어야 할 것이고, 또 그 같은 실례를 우리는 많이 본다.
이상 말한 것은 문학비평(文學批評)에도 그대로 들어 맞는다. 정치학적 체계(政治學的體系)에만 절대적 배타적으로 의거하여 모든 문학비평(文學批評)이 정치의 혼란을 따라 방향을 잡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치적으로 의거할 아무런 체계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 현대의 실상이라면 그에 따라 문학비평도 문학창작(文學創作)과 더불어 활동을 중지할 수밖에 없을 도리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진리도 아니고 또 현재의 실정도 아니다. 현대(現代)는 문학비평이 활동할 가장 적절한 시기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현재에 있어서 비평(批評)의 임무(任務)는 문학의 나아갈 방향을 지시하고 아울러 창작지대(創作地帶)를 방어함이라는 것을 우리는 아무리 주장한대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현재에 문학비평이 조선문학의 장래에 관하여 지시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향은 무엇일까? 그것은 풍자문학(諷刺文學)이라고 나는 대답하고 싶다. 이것은 결코 일 개인의 취미(趣味)로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문단위기(文壇危機)를 관찰하고 해부함에서 생겨나는 자연적 귀결이라는 것을 위선 말하고 싶다. 그러면 나는 현재 조선문학(朝鮮文學)의 위기(危機)를 어떻게 관찰하며 또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것부터 말하려 한다. 결국 이것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사회적 위기(社會的危機)와 문학적 위기(文學的危機)를 혼동하는 이론을 우리는 흔히 본다. 사회적 위기가 문학적 위기의 주요한 원인이 됨은 다시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사회적 위기가 그대로 문학적 위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위기가 문학적 위기로 되려면 모든 신념(信念)의 상실이 의식화되어야 한다. 즉 사람의 감정생활이 의거할만한 모든 지주가 붕괴하여 무신념(無信念)이 사람들의 생활태도로 화할 때에 비로소 문학적 위기(文學的危機)는 도래한다.
문학이 창조적 문학만을 의미한다면 문학은 감정생활(感情生活)이 안정되지 못한 곳에 발생할 수 없고, 또 감정생활(感情生活)은 신념(信念)이 없는 곳에 안정할 수 없다. 감정이란 풀의 넝쿨 모양으로 늘 남에게 의지하여 생장하는 물건이다. 따라서 사회를 통일할만한 전통(傳統)도 신념도 없는 곳에선 감정은 돛대를 잃은 배 모양으로 표량할 수밖에 없이된다. 그리고 또 표랑하는 과정에서 진정한 창조적 문학의 발생을 기대할 수는 없다.
작가(作家)와 독자(讀者)의 문제는 언제나 곤란(困難)한 문제이나 현재에 있어선 더욱이 까다로운 문제이다. 그러나 과거의 문학사를 통관하여, 다음 같이 말할 수는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즉 작가는 독자를 예상하지 않고 창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는 신념이 없이는 창작할 수 없다. 설혼 전세계가 그의 예술을 조소하고 비난한다 할지라도 작가가 그 자신의 예술에 대한 신념만 있다면 그는 창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최후의 신념은 흔히 보편적 진리(普遍的眞理)라는 형식을 취하여 존재하여 왔다. 그러나 작가자신(作家自身)이 아무런 신념도 갖지 못 할 때엔 작가는 산란한 인상(印象)의 파편 속에 고민할 따름이고 그것들을 수집하고 통일하여 예술(藝術)로 집대성할 방법도 용기도 갖지 못한다. 따라서 그의 열렬한 창작의사(創作意思)는 창작(創作) 이전에 좌절되고 만다. 유산(流産)이라는 말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여하튼 작가(作家)가 충분한 창작의사(創作意思)를 가지면서도 성실하게 창작할 수 없는 모순상태—이것이 즉 진정한 의미의 문학적 위기(文學的危機)이다. 이 위기에 비한다면 일반적 사회적 위기(危機)의 한 변종(變種)에 지나지 못하는 문단적 위기—독자가 줄고 책이 팔리지 않고 작가가 빈궁하고 등등—는 오히려 용이한 무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이상과 같은 문학적 위기가 조선에도 도래하였느냐? 그렇다고 나는 대답한다. 인생 삼십을 지나고서도 오히려 문학 밖에는 없다는 순진하고 강렬한 신념을 가지고 문학에 종사함을 가능케 할 신념(信念)과 지지(支持)가 조선에 있는가? 그는 믿을 뿐 아니라 사랑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실천할만한 대의명분(大義名分)을 가지고 있는가? 그의 순간순간의 부분적 자아(自我)뿐만 아니라 자아 전체를 통일할 만한 태도(態度)와 그의 사색생활뿐만 아니라 생활전체를 규율할 만한 주의(主義)나 원리(原理)를 가지고 있는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이것을 나는 작가(作家)의 허물로 돌릴 생각은 조금도 없다. 이 같은 자아(自我)의 파산(破産)은 결국 사회적 위기(社會的危機)에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하여튼 조선(朝鮮)의 문학적 위기(文學的危機)는 창작불능(創作不能) 내지 좌절(挫折)의 상태를 가져오기에까지 이르렀다고 나는 본다.
이것이 현재 조선문학이 출발할 지반이다. 이 같은 지반 위에서 문학은 어떤 방향을 취할 수 있으며, 또 취함이 합리적이냐 함을 생각하여 봄이 나의 목적이다. 앞서 나는 조선문학의 장래의 방향으로서 풍자문학을 지적하였다. 이 지적의 동기를 설명하기 위하여 나는 조선 현재(朝鮮現在)의 문학적 위기(文學的危機)를 해부하여 보았다. 나는 이제 그 준비의 제이단(第二段)으로서 문학을 분류해 보려 한다. 이것은 분류법(分類法) 여하에 의하여 그 결과가 대단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즉 나는 현재와 같은 정세하에서 장래의 문학을 암시할 여지를 주지 않는 그러한 분류법(分類法)은 처음부터 기피하려고 한다. 이것은 이론적 자살(理論的自殺)이기 때문이다.
나는 문학분류(文學分類)에 있어 내용(內容)과 사상(思想)에 중점을 두지 않고 작가의 태도(態度)와 기술(技術)에 중점을 두는 방법(方法)을 취하려 한다. 어떤 문학이 국민주의적(國民主義的)이냐 사회주의적(社會主義的)이냐 혹은 기타의 주의를 가진 것이냐 등등의 질문을 나는 제이차적 지위로 돌려 보낸다, 그 대신 그 작품(作品)의 작가(作家)가 외부정세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취하느냐? 하는 질문을 제일의적 지위에 올린다. 사람은 외부세계에 대하여 더욱이 현재와 같은 혼돈세계에 처하여 무릇 세 가지 태도를 가질 수 있다. 수용적 태도(受容的態度)와 거부적 태도(拒否的態度)와 및 비평적 태도(批評的態度)다. 외부세계를 현재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승인하고 접대하는 태도를 나는 수용적 태도라고 한다. 이것은 문학창작엔 가장 적절한 태도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대작가는 위선 사회인으로서 이 같은 태도를 가질 수 없지 않을가 하고 생각한다. 둘째로 외부세계를 전체적으로 부인하고 거절하려는 태도를 나는 거부적 태도라고 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태도는 현재세계에 관심하기 보다는 혹종의 신세계를 건설함에 분명하다. 따라서 신사회의 콘트라스트로서 혹은 안티태제로서 그를 거부하는 외엔 현재사회에 대하여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 따라서 기능적(機能的)으로 볼 때에 이 태도는 건설적 태도(建設的態度)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후에 말하는 바와 같이 자기의 예술적 양심(藝術的良心)에 충실한 현대작가(現代作家)로서 이 역시 용이하게 취할 수 없는 태도이다. 억지로라도 건설적 태도(建設的態度)를 취하려면 실제성의 일부분을 왜곡 내지 묵살하여 인위적으로 태도를 작성할 수밖에 없이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것은 벌써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예술적 태도(藝術的態度)가 아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최후의 희망을 비평적 태도(批評的態度)에 걸게 된다.
현대는 말할 것도 없이 과도기(過渡期)이다. 전통(傳統)을 그대로 수용할 수도 없고 또 그렇다고 실질적으로 거부 할 수도 없는 곤란(困難)한 시대이다. 이 때에 인간 예지(人間叡智)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전통의 비평이 아닐가한다. 비평적 태도는 다만 모든 사회현상의 진위 선악(眞僞善惡)을 변별하여 이론적 판단(理論的判斷)을 도울 뿐만은 아니다. 더욱 중대한 직능(職能)으로서는 정서의 냉각에 있다. 사람은 자기네 전통이 그릇되어 있음을 잘 이해하면서도 오히려 애착심을 품고 있는 법이다. 이것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보수적 본능이기 때문에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비평적 태도를 가질 때엔 이지적 작용으로 말미암아 자연히 유-모아라든지 혹은 풍자가 부수한다. 이 같은 심리상태는 우인담․루이스가 말한 바와 같이 정서의 왁진주사(住射)(즉 반독소주사(反毒素住射))가 되어 맹목적으로 침전하려는 열광심을 소독 즉 냉각함에 신통한 작용을 발휘한다. 더욱이 쎈치멘탈리즘의 대응제(對應劑)로선 천하무쌍의 묘약이다. 따라서 우리는 낭만적 도취로부터 냉각되어 스스로 실재성을 보게 된다. 진리(眞理)를 이론적으로 주입하는 것 보다 흐리지 않는 눈으로 인생을 직시함이 실재성을 파악함에 몇 배의 위력이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현대(現代人)이 요구하고 있는 실재적(實在的) 동찰(洞察)은 이와 같은 냉소적(冷笑的) 심리(心理)가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상은 수용적 태도(受容的態度)와의 관계 밑에서 비평적 태도(批評的態度)의 지위(地位)와 직능(職能)을 고찰한 것이나, 다음으로 나는 거부적 태도(拒否的態度)와의 관계 밑에서 그것을 생각하여 보고자 한다. 문학에 있어 거부적 태도는 현재의 외부 세계를 전면적으로 거부한다. 즉 그 존재를 허용치 않는다. 그것은 현재 세계에 관계하기보다는 혹종의 신세계를 건설함에 분주하다. 따라서 이 같은 문학(文學)은 혹종의 이상과 주의를 선전함에는 유효하나 진정한 문학으로서 사람이 예술적 상상에 호소함에는 비현실적이라는 약점이 있다. 왜 그러냐하면 문학의 성립은 언어와 씸볼(象徵)로써 가능하다. 언어는 어떤 필요에 의하여 그 의미 내용을 임의로 변경시킬 수 있다. (실제에 있어선 이것도 그리 용이하지는 않으나 그러나 정의와 개념규정의 과학적 수단을 통하여 실행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씸볼에 있어선 그것을 별안간 임의로 변경할 수는 없다. 문학의 매개로서의 씸볼은 항상 장국한 시일과 민족적 경험에 의하여 사회의 전통적 생활로부터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 사람들의 정서적 상상적 생활과 얼키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같은 정서적 씸볼은 그 전통 자체가 소멸한 뒤에도 착실히 오랫동안 사람들의 정신생활을 지배한다. 낡은 전통을 일거에 거부하는 신문학이 왕왕 우리에게 생소한 감을 주어 친해지지 못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여기에 있다.
거부적 태도(拒否的太刀)는 문학에 있어서 위와 같은 난점(難點)을 가지는 외에, 생활태도로서 본대로 일반민중(一般民衆)을 통일할만한 태도가 아니다. 일반민중(一般民衆)에 있어 화급한 관심사는 늘 사회개혁보다는 그들의 출세이다. 그들의 이상적 사회의 출현을 고대하지 않음이 아니고, 그 보다도 그 자신과 그의 가족(家族)이 어는 일정한 사회적 수준에 올라서기에 부심한다. 그들은 아마도 신사회에 발을 드려 놓는 날까지 구제도(舊制度)에 대하여 어떤 의미에 있어서나 애착심을 가질 것이다. 이것이 오히려 사회의 현실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이것이 진리라면 인생과 사회에 대한 거부적 태도는 일부 사회 개혁가가 생각하듯이 용이하게 일반민중의 인생태도로는 되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도 문학(文學)에 있어서의 파괴적 태도의 약점은 있다.
현대와 같은 과도기에 있어 예술적 작가가 가질 수 있는 최후의 태도는 비평적 태도가 아닐까? 이 태도는 인생과 사회를 도매금으로 거부한다는 모험을 하지 않는다. 그는 위선 입장을 현대에 둔다. 그리고 목전에 살아 있는 사람과 제도를 끌어다가 비판(批判)의 도마에 올린다. 그는 사회의 표면을 아는 동시에 이면을 안다. 그는 장래(將來)할 사회를 그리기 보다는, 현실에서 우리가 목격하면서도 잘 인식하지 못하는 모든 결함과 악을 확대하고 혹은 적출하고 혹은 야유하고 혹은 매도(罵倒)한다.
따라서 비평적 태도(批評的態度)는 수용적 태도와 파괴적 태도와의 중간에 개재함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다. 그것은 결국 중간적인 존재임을 면하지 못한다. 그러나 현대(現代)와 같은 과도기(過渡期)에 있어선 오히려 합리적인 태도일가 한다. 그리고 그 직능(職能)에 있어 그것은 수용적 태도처럼 소극적이 아니다. 또 한편 건설적 태도처럼 같이 적극적도 아니다. 그것은 수용적 태도에 비하면 파괴적이고 건설적 태도에 비하면 소극적이다. 소극적(消極的) 파괴(破壞) ― 이것이 비평적(批評的) 태도의 직능(職能)이다.
비평적(批評的) 태도는 초월적이고 도피적이라는 비난이 있다. 그것은 어느 정도까지 사실일 것이다. 이 비난이 있다고 해서 이 태도의 사회적(社會的) 효용(效用)은 조금도 멸살(滅殺)되지 않는다. 이 태도는 직접으로 새로운 인생과 사회를 건설하지 못할망정, 구시대(舊時代)의 죄악(罪惡)과 부패(腐敗)를 소재하고 소독하는 준비공작은 될 터이다.
이상 비평적(批評的) 태도에 관하여 내가 말한 바에 과히 틀림이 없다면 주로 그 태도를 표현하는 풍자문학(諷刺文學)이 시대에 적합할 것은 자연히 추측될 것이다. 작가(作家)가 적극적으로 시대를 통일할 수 없는 이상 소극적으로나마 인심(人心)의 기회(幾回)를 포착하려면 그는 이 태도 말고 취할 아무런 태도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비평문학(批評文學)은 사람을 욕하면서도 독자(讀者)에게 그다지 불유쾌한 감정을 주지 않는다. 「풍자(諷刺)는 일종의 유리와 같은 것이어서 독자(讀者)는 거기서 그 자신을 빼어 놓고는 모든 사람을 본다」고 쓰위프트는 말하였다. 고래로 많은 풍자작가는 이 성질을 이용하여 그 시대의 죄악을 정면으로부터 공격하지 않고 측면 혹은 이면으로부터 공격하였다. 그것은 사람을 놀라게 할만한 통괘미는 없을망정 사람을 찌르고 질식시킬만한 신랄미와 삼각미가 있다. 영국(英國)의 쓰위프트, 불란서(佛蘭西)의 볼테엘, 독일(獨逸)의 하이네 등의 작품이 이것을 잘 실증하고 있다. 이리하여 풍자문학(諷刺文學)은 현대 작가에게 비교적 용이하고도 효과적인 전수를 약속하는 듯싶다.
그러나 풍자문학은 현대작가(現代作家)에게만 유망성을 약속한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현대 독자(讀者)에게 대하여는 더욱 매력있는 약속을 하여 주는 것 같다. 현대인의 심리를 짙으게 물들이고 있는 공통적 특색은 인생에 대한 실망, 그리고 거기에서 생겨나는 허무감과 무가치감이다. 그들의 대부분은 겨우 생존하여 나가는 외엔 아무런 희망도 갖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희망이 아니다. 뜻하지 않은 생존을 계속하려고 속는 줄 알고 속아 지내는 자기자신에 더욱 더욱 추악감을 일으키게 하는 실망에 대한 의식적 대조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절망 가운데서 현대인(現代人)은 무릇 두 가지 길을 취할 수 있다. 하나는 우울의 길고, 또 하나는 풍자의 길로, 절망에서 우울로 통하는 길 같이 용이하고 감미로운 것은 없다. 그러나 만일에 그가 현대적(現代的) 지성(知性)을 가졌다면 그는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굴욕의 길인가를 알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 지성(知性)의 권리를 포기하여 자기 스스로 최면술에 걸리는 우매인 까닭이다. 이리하여 그는 이를 악물고 풍자(諷刺)의 길로 들어갈 것이다. 이것은 소극적이나마 일종의 복수이다.
인생에서 모든 것을 잃어 버렸다 할지라도 그가 만일 그 실망을 해부하여 그 허무를 폭로하고 아울러 그 무가치를 냉소할 지성을 가졌다면 그는 아직도 그 자신의 주인이라고 할 것이다. 현대인은 이 지성의 소유자가 되기를 갈망한다. 풍자문학이 현대인의 비위에 맞는 이유의 태반은 여기에 있다.
또 한가지 이유는 인생에 대한 풍자가 현대인에게 움직일 수 없는 실재감을 주는 점이 있다. 낭만시대(浪漫時代)에 있어 사람들은 인생찬미(人生讚美) 가운데에 실재성을 발견하였었다. 그것은 인류의 진보를 신앙하였기 때문이다. 인간(人間)의 본성(本性)은 착하고 또 개성(個性)은 무한한 발전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방해가 되는 외부의 모든 제도만 개혁한다면 인간은 드디어 신(神)의 지위에 도달하리라! 이것이 전세기(前世紀) 사람들의 움직일 수 없는 신앙이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 실재성은 불완전으로부터 완전으로 진보하여 가는 향상 가운데에 있었다. 그럼으로 개성(個性)의 미(美)와 위대(偉大)를 표현한 것이면 그들에겐 무엇이나 진실한 예술(藝術)이었다. 그 자신은 불완전할지라도 완전한 인물 가운데에 인간의 명일의 장래를 보았다. 그들은 시인(詩人)과 천재(天才)와 영웅(英雄)을 숭배하였다.
그러나 이 시인과 천재와 영웅들은 인류에게 무엇을 끼쳐 주었는가? 신의 태를 품었다고 보이든 인간 개성은 결국 지상에 무엇을 나아 놓았는가? 이것은 현대인이 피할 수 없는 괴로운 질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볼테엘의 경구(警句) 가운데서 그 해답을 구한다. ―「이 세상이 지옥(地獄)이 아니라면 나는 지옥(地獄)을 상상(想像)할 수 없다.」따라서 현대인은 전세기(前世紀) 사람과 반대로 개성매도(個性罵倒)가운데에 실재성을 발견한다. 그가 비록 현재에 비교적 완전하다 할지라도 명일의 그는 더욱 불완전하여질 것이다. 그래서 불완전한 개성의 출현은 명일의 세계를 암시하여 준다. 인생찬미는 구십도(九十度)를 회전하여 인생찬미로 변하였다. 여기서 풍자문학의 무대가 마련되었었다.
풍자(諷刺)라는 문학형식(文學形式)이 현대에 생겨난 것은 아닌지라 그 내용(內容)에도 인류문화사와 거의 병행하는 변천이 있었다. 개인공격(個人攻擊)의 저급한 풍자로부터 시대의 정치적(政治的) 권력(權力)을 비판(批判)하는 소위 정치적 풍자(政治的諷刺)를 거쳐 인류전체를 조소하는 고급한 풍자(諷刺)에 이르기까지 많은 계단이 있었다. 그러나 풍자(諷刺)가 풍자(諷刺) 자신을 해부하고 비평하고 조소하고 질타(叱咤)하고 욕설하는 자기풍자는 일찍 보지 못하던 예술형식이다. 나는 이 같은 새로운 문학을 루이스와 엘리웃과 학슬리 가운데서 발견한다.
자기풍자(自己諷刺)는 무엇보다는 현대의 산물이다. 전대엔 생겨날 수 없었던 현대의 독특한 예술형식이다. 왜그러냐 하면 자기풍자(自己諷刺)는 자의식(自意識)의 작용이고 자의식(自意識)은 자기분열(自己分裂)에서 생겨나는데, 이 자기분열(自己分裂)은 현대에 와서 비로서 결정적으로 형태화(形態化)하였기 때문이다. 즉 밥을 먹고 장가를 들고 애를 낳고 친구와 교제하는 자아와 가끔 이 자아를 떠나서 먼 곳에서 혹은 높은 곳에서 회고하고 관찰하는 또 하나의 자아-이 두 자아가 대부분의 현대인 속에 동거(同居)하면서도 소위 「동굴(洞窟)의 내란(內亂)」을 일으키고 있다. 우인담, 루이스는 그것을 자아(自我)와 비(非)자아(自我)라고 일컫고, 비자아는 늘 자아의 적이며, 또 자아와 비자아의 양극 사이에 작용(作用)과 역(逆)작용(作用)이 교류할 때에 마침내 전기 모양으로 웃음의 스파크를 일으킨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자아(自我)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의 존재 그 자체이다. 우리는 대부분 외부의 힘을 빌어 존재한다. 따라서 이 자아(自我)는 될 수 있는대로 외부의 영향에 적응하려고 한다. 그리고 또 생존(生存)은 즉 행동(行動)이다. 그 행동이 순전하면 순전할수록 생존은 완전하다.
순전한 행동(行動)은 반성의 결무를 수반한다. 그래서 자아(自我)는 맹목적인 행동의 뭉치라고 할 수 있다. 한 조각의 빵을 위하여, 한잔의 술로 말미암아, 한마디 오해가 원인이 되어 우리는 얼마나 비루한 혹은 우스꽝스러운 혹은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가? 그러나 자아(自我)는 맹목적이기 때문에 이것을 자각치 못한다. 그러나 만일 다른 사람들이 다른 입장에서 그것을 본다면 그는 노예이고 인생의 피에로이고 우열한(愚劣漢)일 것이다. 여기에 풍자가 발생할 계기가 생겨난다. 그러나 현대인에 있어 이 같은 관찰자는 다른 사람에 구할 필요가 없다. 그는 그 자신 가운데에 이 같은 관찰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즉 비자아이다. 다시 말하면 비판적(批判的) 자아이다. 현대인은 맹목적으로 행동하는 다음 순간 비자아로 하여금 이를 관찰하고 비판하고 조소케 한다. 이것은 인생의 최대 비극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대인의 피치 못할 운명이다. 현대인이 자기자신(自己自身)에 대한 성실성과 날카로운 지성(知性)의 두 모순(矛盾)을 포용(包容)하고 있는 동안, 이 분렬의 비극은 성실하게 표현하는 외에 달리 처치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이리하여 자기풍자(自己諷刺)의 문학(文學)은 현대적 사명(使命)과 아울러 매력을 가지고 있다.
앞서 나는 풍자문학이 일종의 복수 문학이라고 말하였다. 이 말은 자기풍자 문학에도 적용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에 있어 풍자가(諷刺家)는 어떤 개인에 대하여 혹은 사회에 대하여 혹은 어떤 정치권력에 대하여 혹은 인류 전체에 대하여 이지적으로 복수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인류나 사회가 아직도 비평의 대상이 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가하거나 혹은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만일에 인생이나 사회에 대하여 완전히 허무와 무가치를 느끼던가 혹은 개선에 고나하여 아주 절망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벌써 풍자의 대상으로서 인류나 사회를 들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풍자의 메스를 자기 자신으로 돌린다. 밀튼의 <실락원(失樂園)>을 보면 신에 반역하여 실패한 사단은 신에 대한 가장 효과 있는 복수방법으로서 신(神)이 새로 창조한 인간(人間)- 즉 아담과 이브를 추락시킬 음모를 안출하였다. 자기풍자(自己諷刺)의 심리는 이 사단의 심리와 공통되는 점이 없지 않을 것이다.
끝으로 자기풍자(自己諷刺)에 관한 또 한 가지 중대한 동기를 들겠다. 그것은 즉 인생의 재출발이라는 것이다. 현대인(現代人)이 무엇이나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회의주의(懷疑主義)일 것이다. 우주와 인생에 대한 종래의 설명이 허위였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리고 그에 대신할 새로운 이론체계가 발견되지 않았을 때, 사람은 자기 자신의 재음미(再吟味)로 돌아간다.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 회의의 대양(大洋) 위에 표류하는 모든 문명(文明)의 파편 중에서 지각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데칼트의 철학을 보아도 알 것이다. 현대(現代)에 또 다시 한번 데칼트가 출현하겠느냐 함은 별문제로 치고, 현재의 문학이 자아에 대하여 가장 진지하고도 모험적인 탐구를 하고 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자아탐구가 위선 자기풍자의 형식을 취하여 나타나는 것도 자연한 도리라 할 것이다.
나는 넓지는 못하나마 외국(外國) 작가(作家)의 작품(作品)과 비평(批評)을 읽을 때에 자기풍자(自己諷刺)를 늘 느낀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현대사회에서 필연적(必然的)으로 발생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이다. 풍자문학(諷刺文學)을 우리 사회에 대망함은 과연 일장의 환상에 지나지 못할까?
(《朝鮮日報》. 1935.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