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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현정(四賢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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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설명 | |
이 우물은 오래 전부터 이곳에 세거해온 순흥 안씨 후손들이 사용한 샘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로 인하여 마을의 별칭이 사현정 마을이라 불리기도 한다. | |
상세설명 | |
이 우물은 오래 전부터 이곳에 세거해온 순흥 안씨(順興 安氏) 후손들이 사용한 샘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로 인하여 마을의 별칭이 사현정 마을이라 불리기도 한다. 즉 고려말 호장(戶長)으로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은 밀직공 안석(密直公 安碩)과 그의 세 아들인 안축 문정공(安軸 文貞公), 안보 문경공(安輔 文敬公), 안집 제주공(安輯 祭酒公)이 함께 사용한 것이었다고 한다. 조선 1545년(인종(仁宗) 원년) 풍기군수로 주세붕 선생이 이곳에 사현정(四賢井)이라는 비를 세우고 네 분의 덕을 기리게 하였으며, 1636년(인조 14)에 방손 순원군(傍孫 順原君) 안응창(安應昌)이 현존하는 비각내의 비명을 쓰고 중수하였으며, 또 1821년(순조 21)에 안동영장(安東營長) 안성연(安性淵)이 현 비각을 세웠다고 한다. 비각은 측면이 각 1칸인 맞배지붕으로, 정면 처마 밑에 사현정각(四賢井閣)이라 기록된 현판이 있다. 이 우물은 마을 앞 부분에 위치하는데, 화강암을 다듬어서 정자형(井字形)으로 틀(높이 73cm, 118×118cm)을 만들고 윗쪽에는 화강암 판석을 덮어 두었다. 뒤에 사현정각이 세워져 있으며, 정각의 뒤로는 100여평의 공원에 잔디를 깔고 의자를 설치하여 주민들의 휴식처로 이용하고 있다. 사현정각의 앞 길은 넓은 공터가 마련되어 있고, 그 옆 약 100평의 공간에 잔디를 깔고 순흥안씨사현기적비(順興安氏四賢紀蹟碑)를 세운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서 마을 주민의 휴식공간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 |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 252-1번지에 있는 사현정(四賢井)은 경북기념물 제69호로 지정되었다.
이 우물은 대대로 이 마을에 살았던 순흥안씨 안석(安碩:밀직제학 봉익대부)의 집안에 있던 것으로,
이 우물의 물을 마신 세 아들 안축(安軸:문정공), 안보(安輔:문경공), 안집(安輯:좨주공)을 훌륭하게 키웠다.
1545년(인종1)에 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周世鵬)이 이 우물의 내력을 알고,
〈사현정(四賢井)〉이라는 비를 세우고 네 사람의 덕을 기리게 하였다.
우물은 높이 70cm, 넓이 100cm의 화강암으로 井자형으로 3단 조립하여 뚜껑을 덮었다. 뒷면에<고려안선생석 생자 축 보 집 인소위사현 차기구정 현식표용 종후 숭정병자 입>이라고 글이 새겨져 있다.
순흥안씨사현기적비문(順興安氏四賢紀蹟碑文)
이 자리는 고려때 사현(四賢)이 사시던 집 터이다. 사현은 순흥안씨의 문경공 휘 석(文敬公 諱 碩), 문정공 휘 축(文貞公 諱 軸), 문경공 휘 보(文敬公 諱 輔), 좨주공 휘 집(祭酒公 휘 輯) 네분이다. 휘 석(碩)은 아버님이시고, 축. 보. 집(軸. 輔. 輯)세분은 그 아드님들이다. 순흥안씨는 시조(始祖) 신호위상호군 휘 자미(神號衛上護軍 諱 子美)의 자제이신 휘 영유(諱 永儒), 영린(永麟), 영화(永和)의 삼형제가 일 이 삼파를 형성하는 바 휘 석은 삼파조 휘 영화의 증손이시고 일파조(一派祖)이신 휘 영유(永儒)의 손자이신 안문성공 휘 향(珦 )의 재당질(再堂姪)이요 이파조(二派祖)이신 휘 영린(永麟)의 증손이신 안문의공 휘 문개(文凱)의 삼종(三從)이시다. 안문경공 휘 석(碩)은 고려 충렬왕 임오(壬午 1282년)에 문과에 등제(登第)하셨으나 벼슬길에 나가시지 않고 이 터에 사시면서 수신제가(修身齊家)와 교자(敎子)에 전념(專念)하시어 봉익대부(奉翊大夫)와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추봉(追封)되셨다가 후(後)에 문경시호(文敬諡號)를 추증(追贈)받으셨고(잘못된 내용임:역사 기록오류) 세 자제(子弟)가 모두 세상에서 거유현인(巨儒賢人)으로 크게 추앙받는 인물이 되시매 사부자(四父子)분이 잡수시던 우물을 당시의 향인(鄕人)들이 사현(四賢)의 유덕(遺德)을 기리는 뜻에서 사현정(四賢井)이라 불렀다. 후일에 이 고을 풍기군수로 도임(到任)한 주세붕선생(周世鵬先生)이 중종(中宗 38년) 계묘(癸卯 1543년)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웠고 2년후인 인종원년(仁宗元年) 을사(乙巳 1545년)에는 이 우물 앞에 일가충효우제청백지풍(一家忠孝友悌淸白之豊)이라는 본문(本文) 103자(字)와 부대(附帶) 34자등으로 된 비문을 새긴 사현정이라는 석비(石碑)를 세웠다.
그로부터 101년후인 효종(孝宗) 7년 병신(丙申 1656년)에 비석(碑石)이 파손되어 순원군 응창공(應昌公)이 다시 주선생(周先生)이 쓴대로 새로 비석을 세웠다. 그 후 신사(辛巳 1821년)에 17대손 성연(性淵)씨가 사현정비(四賢井碑)에 비각(碑閣)을 세웠고 얼마후 20대손 혁중(赫中)씨가 비각을 중수 하였고 광복후(光復後)는 일본에서 치부(致富)해 귀국한 함안(咸安)의 국사(菊史) 상규(商奎)씨가 주졸(走卒)과 돈견(豚犬)의 난입(亂入)을 방지하기 위하여 비각주간(碑閣柱間)을 화강석장(花崗石墻)으로 둘렀던 것은 우당(愚堂) 학준(學濬)씨 찬문(撰文)에 나와 있다. 문경공 휘 석(文敬公 諱 碩)의 배위(配位)는 검교군기감 안공 휘 성기지녀(檢校軍器監 安公 諱 成器之女)이시고 흥녕군부인(興寧君夫人)의 칭호를 받으셨다.
묘는 영풍군 단산면 병산리 서창동 임좌지원에 모셨다. 묘정(廟廷)에는 기미년에 판서인 증손 휘 질(耋)이 단갈(短碣)을 세웠는데 금성대군에 연루되어 피화(被禍)될때 묘는 봉분을 없에고 비(碑)도 도괴파손(倒壞破損)시킨 것을 11대손 사촌공(沙村公) 휘 덕린(德鱗)께서 외후손 부윤 오운(吳澐)이 찬(撰)한 비문을 새겨 개수(改竪)하였고 묘지(墓誌)는 단곡 곽진(郭瑨)선생이 찬한바 묘비의 각자(刻字)가 마모되어 판독이 어려워서 무진(戊辰 1988년)에 22대손인 불초(不肖 사촌공 11대손)가 묘전비(墓前碑)를 그 옆에 개수하였다. 그리고 서창에는 오래전부터 매년의 향사를 위한 재숙지실(齋宿之室)로 은덕재(隱德齋)를 건영(建營)해 오신바 이전사(以前事)는 알 수 없으나 무인(戊寅 1938년) 향사일에 구재실이건이 발의되어 용환(龍煥)씨가 주관하고 상응(商膺)씨가 감역(監役)하고 충주의 상찬(商瓚)씨와 상윤(商尹)씨, 함안의 정재(鼎宰)씨, 평해의 노선(老善)씨와 병대(秉大)씨가 협력하여 이건한 것이 용환씨의 이건사적기(移建事蹟記)와 혁중(赫中)씨의 중건기, 상욱(商郁)씨의 이건추식(移建追識)에 나와있고 기후(其後)도 치호(致鎬)종손 감역(監役)하에 충주 상운(商運)씨와 함창 광동(光東)씨의 협력으로 은주재동재(隱住齋東齋:살림집)가 중건되었고, 庚申(경신년:1980)에는 당시 양도공종회 부회장 치상(致商)씨가 감역으로 주재하고 동재무이사 상덕(商悳)씨와 총무이사 형준(亨濬)씨가 현 재실을 양회벽돌 와용(瓦茸) 으로 중건하였다.
문정공(文貞公)의 자(字)는 당지(當之)이고 호는 근재(謹齋)이시며 충렬왕8년 임오(1282)년에 이터에서 출생하사 아버님으로부터 글을 베워 충숙왕초에 문과에 등제(登第)하셨고 司憲糾正등을 지내시다가 동11년(1324)년에 元나라에 가시어 제과(制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를 하셨다. 이것은 당시의 통일중국수도 북경에서 전중국의 인재를 상대로 실시하는 한시문(漢詩文)에 의한 최고 과거인즉 여기서 고려인(高麗人)이 정정당당하게 장원급제하셨다는 것은 고려의 국가선양은 물론 공의 학문실력이 당시의 중국전토를 휩쓰신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원나라에서는 요양로개주판관(遼陽路盖州判官)이란 관직밖에 나리지 않아 공은 말기(末技)에 귀국하셨다. 그후 공은 고려조의 성균악정(成均樂正)을 거쳐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가 되셨고 충혜왕(1331)때에 강원도안렴사(江原道按廉使로 부임하셔서 관동와주집(關東瓦注集)을 지으시고 관동별곡(關東別曲) 가사(歌詞) 9곡과 주계별곡(竹溪別曲)을 남기셨으니 정송강(鄭松江) 휘 철(澈)보다 250년전의 일로 국문학가사창작의 효시를 이루었다. 공은 성격이 매사에 공정하셨고 근엄하시어 조야(朝野)의 명망이 높으셨고 충목왕(1345)때에는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가 되시어 충렬, 충선, 충숙, 삼조(三朝)의 실록을 편찬하셨다.
그후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에 피봉되시고 충목왕4년 무자(1348)년 음 6월23일에 67세로 돌아가시니 시호는 문정(文貞)이시다. 묘는 경기도 장단군 송서면 대덕산 도솔암해좌(兜率庵亥坐)에 모셨고 묘지는 가정이문효공(稼亭李文孝公) 휘 곡(穀)이 찬(撰)하였으며 中宗 갑진(甲辰1544)년에는 백운동서원(6년후에 소수서원으로 賜額)에 배향되셨다. 仁祖 21년 계미(癸未1643)년에는 경기도 장단의 봉암서원에 배향되셨고 대한민국 73년 신미(辛未1991)년에는 충북 괴산 계담서원에 배향되셨다. 배위는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휘 구(龜)의 여(女) 이시고 감천군부인(甘泉郡夫人) 칭호를 받으셨다. 슬하에 1남을 두셨으니 태학사(大提學)이시고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 증시문간공(贈諡文簡公) 휘 종원(宗源)이시다.
손은 이조추충익대개국공신보국숭록대부 영삼사사 흥녕부원군 집현전태제학 증시 양도(李朝推忠翊戴開國功臣輔國崇祿大夫 領三司事 興寧府院君 集賢殿太提學 贈諡 良度) 휘 경공(景恭)이시고 증손은 숭록대부판중추원사수문전 대제학겸판호조사치사봉조하시정숙(崇祿大夫判中樞院事修文殿大提學兼判戶曹事致仕奉朝賀諡靖肅) 휘 순(純)이시다. 군부인(郡夫人)은 공민왕 4년 을미(乙未1355)년에 졸하사 순흥 수민방(壽民坊) 문단손우임좌(文坍遜羽壬坐)에 모셨다. 문경공 휘 보(輔)는 자가 원지(員之)이시고 충렬왕 28년 임인(壬寅1302)에 출생하시어 중씨(仲氏) 휘 축(軸)을 따라 글을 배워 19세(1320)에 문과에 급제하셨고 경주사록(慶州司錄)과 수찬(修撰) 및 편수관을 역임하시다가 중씨가 북경에서 중국천하의 장원을 하신 전례에 따라 21년후인 충목왕 원년 을유(乙酉1345)년에 중국과거급제의 장한 일을 또다시 재현하셨다. 그 후 원나라의 칙수장사랑중서성조마(勅授將仕郞中書省照磨) 승발가각고(承發架閣庫)등의 관직에 계시다가 자친(慈親)의 만류(挽留)로 귀국하시어 우대언 겸 집의(執義)를 거쳐 충정왕때 전법판서가 되셨고 공민왕 즉위 임진(壬辰1352)년에는 밀직제학겸 감찰대부제조전선사(監察大夫提調詮選事)를 지내셨다. 동4년 을미(乙未1355)년에는 동지공거(同知貢擧)와 정당문학이 되셨고 이어 예문관 대제학과 동경유수(東京留守)가 되셨다. 공은 공민왕 6년 정유(丁酉1357)년에 56세로 졸하시어 이 고을에 장(葬)하였으나 묘는 실전되었다. 묘지는 목은이문정공(牧隱李文靖公) 휘 색(穡)이 찬하였다. 중종 갑진(甲辰)에 중씨 문정공과 같이 백운동서원에 배향되셨고 무후(無后)이시다. 좨주공(祭酒公) 휘 집(輯)은 자(字)가 목지(穆之)이고 호는 성재(省齋)이다. 충목왕때 문과에 급제하시어 벼슬이 누진(累進)하사 수충보리공신(輸忠輔理功臣)으로 삼중대광보문각대제학(三重大匡寶文閣大提學)에 성균관좨주에 이르시고 순흥군에 피봉(被封)되셨다. 공은 두 형님을 섬기심에 우애가 융독(隆篤)하셨고 부친이 졸하신 후에는 자친을 받들어 성효극진(誠孝極盡)하셨으며 교우가 모두 명공거유(名公巨儒)이었다. 목은 이색선생은 시(詩)에 붙여 [三安이 잇달아 일어나 이 나라 글을 떨쳤는데 伯仲이 俱沒하고 季氏가 安心奉母하며 寒溫을 보살폈다] 하였고 복성부원군 권사복(權思復)선생은 만장(輓章)에 이르기를 나보다 4년장(年長)으로 크시고 또 크셔서 시종 사귀는 계(契)가 심상(尋常)보다 배라 하였다. 배위묘는 실전하였고 자(子)는 중정대부 삼사좌윤 진현관제학 휘 영부(永孚이고 손(孫)은 봉상시사 휘 질(耋)이고 증손은 문과에 급제한 병조정랑지제교 휘 수기(修己)이다. 순흥은 고호(古號)를 흥주 또는 흥녕이라고 불렀는바 고려중엽 이후는 순흥안씨가 거(居)하신 관향지이다. 그리하여 이 동리(洞里)는 오삼파선조(吾三派先祖)께서 정주(定住)하신 마을로서 궐리(闕里) 또는 평리촌(坪里村)이라고도 불렀다. 일파선조께서는 세현지가 있는 석교리에 세거하셨고 2파선조께서는 대평리에 세거하셨다. 그러던중에 단종복위모의(端宗復位謀議)를 둘러싼 금성대군피화시(錦城大君被禍時)에 오순흥안씨선조(吾順興安氏先祖)께서 연루(連累) 혐의(嫌疑)로 몰살지변을 당하셨다.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룬 죽계수는 무고(無辜)한 오선조(吾先祖)들의 선혈이 피끊이 앞까지 근어십리지간(近於十里之間)을 흘러내렸다. 1세기여(世紀餘)를 이곳에서 오안씨(吾安氏)의 인적은 찾아볼 수 없었고 선조묘소도 찾는 후손없이 황폐하고 고의(故意)의 파괴(破壞)와 파비(破碑)를 당하여 많은 묘소실전을 면할 수 없었다. 후에 향려단오산단산파단(鄕閭壇梧山壇産坡壇) 대산단(大山壇)등 각파별 제단을 마련하고 실전위의 시향을 모시게 되었고 거금(距今) 30년전인 임인(壬寅1962)년에 4개처에 분산설단되어 오던 viqufwpeks을 향려단 한곳으로 합단(合壇)하여 추원단으로 개칭하고 합동으로 향사(享祀)를 모셔왔다. 그러다가 추원구단소(追遠舊壇所)의 지형이 함(陷)하고 협소하여 을미(乙未1989)년에 순흥안씨전국화수회가 주체가 되고 각파종회가 협력하여 비봉산(飛鳳山) 남록대(南麓帶)를 매입하여 축단하고 구단에 모셨던 실전위를 모두 옮겨 모셨다. 종래의 구단소와 유허지는 각파종회소관으로 남아있는바 오3파(吾3派)는 이곳 사현선조의 저택유허지와 사현정(四賢井)의 대산단을 보전수호할 책무가 있다. 병인(丙寅1986)년에 당시 국회의원이던 오종회(吾宗會) 부회장 갑준보(甲濬甫)의 각별한 주선으로 사현정(四賢井)과 사현의 유허지를 경상북도 지방문화재 제9호로 지정받았고 국고와 도비보조를 얻어 시급한 비각(碑閣)의 개와개용(蓋瓦改茸)과 환경정화등 일단계사업을 완료하였다. 그 후 접속도로와 동리회관앞이 협소한 관계로 사현정(四賢井) 수호에 지장이 있어 오종회에서는 해토지(該土地)를 매입하여 도로확장과 회관광장으로 기부하는 한편 잔여지에는 이와같이 소공원을 조성하였다.
이에 오등(吾等) 사현후손들로서는 사현선조들의 높으신 유덕과 훌륭하신 유업을 계승 발전시킬 것을 다시금 다짐하며 446년전 이곳에 사현정(四賢井)비를 세우신 주세붕(周世鵬)선생에게 감사하고 그동안 이곳을 보존 유지하는데 진력하신 열선조(列先祖)와 이곳 사현정(四賢井)동 동민여러분과 이 유허지를 문화재로 지정해주신 도당국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이 뜻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이 비를 세운다.
단기4324(1991) 신미년(辛未年) 개천절
순흥안씨제3파대종회 건립(順興安氏第3派大宗會 建立)
후손 4선국회의원 동준(東濬) 근지(謹識)
후손 3선국회의원 갑준(甲濬) 근서(謹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