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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야고보의 길'(Camino de Santiago)이라는 이유로
젊은 오스삐딸레로가 새벽같이 와서 아침식사를 준비했다.
이 땅의 아침 식사란 빵, 커피, 우유와 음료 등 간단한 메뉴지만 쉽지 않은 대(對) 뻬레그리노
봉사(volunteer) 프로그램일 것이다.
남은 고기를 레인지에 데워먹고 출발하려던 간밤의 계획을 바꿔 레인지에 비해 불편한 버너에
데워 오스삐딸레로가 마련한 빵과 함께 먹었다.
나는 정갈하거나 위생적이지 못하는 영감이고 또 여러 사람이 이미 사용한 레인지지만 간밤의
일이 명멸하여 레인지가 불결하기 짝 없는 덩어리로 보였기 때문이다.
"아는 것이 힘"이 진리라면 때로는 "모르는 것이 약"도 그럴 것이다.
7시 30분쯤(5월 18일 월)에 알베르게를 나섰다.
노르떼 길은 동구에 위치한 교회를 지난 후 사라초길(Calle de Saracho)을 따라 마을 끝 주택
단지와 해변의 대형 캠핑장(Camping Playa Arenillas)을 지난다.
감탄사를 연발할 수 밖에 없도록 멋 있게 전지된 캠핑장의 그늘막 나무들.
지난 번에 내가 이베리아 반도에서 수입해 갈 것(bench-marking) 중 하나로 정원수와 가로수
기타 숲 나무들의 전지를 꼽았는데 이 아침에 재차 확인했다.
캠핑장에 이어 서핑 수련장(Escuela de Surf)을 지나 N-634국도에 편입되는 노르떼 길.
자욱한 새벽안개 때문에 까미노에서 아구에라 강(Rio Agüera)하구, 오리뇬 만(Ensenada de
Orinon), 잘 정비된 습지 등을 볼 수 없는데 이 현상은 다반사로 나타나겠다.
습지를 정비하여 바다를 깊숙이 끌어들임으로서 이용 가치를 높이기는 하였으나 이로 인해서
상습적 안개지역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대소의 다목적 댐과 저수지의 건설로 인해 상습 안개와 혹한지역이 되어 주민들의
피해가 막심하지 않은가.
일리일해(一利一害)?
인위적 수리시설의 불가피한 두 얼굴을 여기에서도 보게 된다.
덮친 새벽안개를 야속해 하며 도로에 올라섰는데 동쪽은 산이 병풍처럼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해가 중천에 올 때 까지는 음산한 길을 면할 수 없는 지역이다.
그래도, 아구에라 강쪽 도로 밖으로 센다(senda/샛길)가 있어 다행이지만.
밝은 날 아니면 분간할 수 없도록 좁고 이용하는 이가 별로 없는지 희미한데 두 장년 에스빠뇰
뻬레그리노들이 걸어감으로서 확인되었다.(이 에스빠뇰들은 당분간 자주 만난다)
까미노 마커(노랑화살표, 가리비)도 한국의 백두대간과 9정맥의 각종 리본처럼 군거주의자?
외롭더라도 헷갈리는 지점들에 고루 분포되어 있지 않고 한 데 모여 있으니.
나는 혼란스런데도 안내 표지가 없거나 표지가 오도하고 있다고 판단되는 지점 외에는 좀처럼
보지 않는 지도를 까미노가 N-634국도를 떠나는 지점(엘 뽄따론 입구)에서 펴보았다.
국도는 이 곳에서 리오세꼬(Rioseco), 프랑꼬스(Francos), 라 막달레나(La Magdalena) ....
리엔도(Liendo)로 이어지는 오리지널 까미노와 달리 북쪽 산을 뚫고 직행한다.
따라서, 엘 뽄따론 데 구리에소 들머리는 많이 단축되는 길의 유혹을 물리쳐야 하는 지점이다.
조금 전에 만났던 2명의 에스빠뇰은 물론 많은 뻬레그리노가 단축된 국도를 선택하는 것 같다.
유혹에 홀리기는 했으나 오리지널 길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다면 국도가 엘 뽄따론을 통과하는
다음 지점에서 까미노로 복귀할 수도 있다.
본래의 노르떼길은 상당히 멀기는 하나 건조하고 지루한 국도와 달리 목장지로 개발된 야산에
산재해 있는 소규모 자연마을들을 점검하며 가는 길이라 걷는 맛이 있으니까.
신작로(新作路/국도와 지방도로)의 많은 구간이 '까미노 데 산띠아고'를 흡수하거나 까미노와
병행하고 있지만 이 구간의 국도는 까미노를 외면하고 거리 단축을 위한 직선화를 꾀했다.
주행거리와 시간을 보다 더 단축하기 위해 더 많이 직선화 한 길이 고속도로다.
도로가 이같은 시도를 끊임없이 계속하는데 반해 '사도 야고보의 길Camino de Santiago)'이
라는 이유로 원형의 고수를 고집할 수 밖에 없는 많은 까미노.
이 까미노들 역시 제정(최초) 당시에는 위 도로들과 같은 시도를 최대한 반영했을 것이지만.
지자체 마을 구리에소(Guriezo)의 자연마을 리오세꼬도 잠시 헷갈리게 하는 지점이다.
N-634국도를 떠난 노르떼 길이 CA-151지방도를 따라 십자로 까지 계속 진행하거나 리오세꼬
입구에서 마을을 관통하며 예배당(Ermita de San Blas)을 거쳐 십자로로에서 합류하거나.
CA-151도로의 개설 이전에는 마을길이 유일한 노르떼 길이었겠지만 교회에 들르도록 설계된
루트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을까.
나는 전자를 택했다.
곧, 마주친 한 영감이 나를 반겼다.
내가 자기의 연배일 것으로 보였는가.
73세라며 세뗀따(70세)에 노르떼 길을 완주한 뻬레그리노라는 자부심을 가진 이 영감.
내 나이와 까미노 경력에 스스로 위축되는 듯 하면서도'마라비요소'(maravilloso/wonderful)
를 연발하며 자상하게 길 안내를 했다.
CA-151도로 로터리(rotary)에서 분기하는 도로(CA-510)를 따라 아구에라 강을 건너라고.
포장지가 그럴싸하고 품위있는 이름이면 내용물이 업그레이드 되는가.
로터리에서 치렁치렁한 흑발을 날리며 버스를 기다리는 반흑(半黑)의 젊은 여인과 마주쳤다.
가무잡잡한 피부와 초롱초롱한 눈망울, 청바지가 어울리는 날씬한 몸매에서 풍겨나오는 매력
이 만점인 이 여인은 아마도 혼혈 2~3세쯤 되며 근자의 우리 용어로는 다문화가족?
고백하건대, 내가 까미노에서 매력적이라고 느껴본 여인은 처음이다(유일한 여인이다).
그래서 주저 없이 에르모사(hermosa/beautiful), 보니따(bonita/pretty)라고 말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던가.
아침에 과묵하고 웃음기 없는 검은 오스삐딸레로로 하여금 해맑은 웃음으로 '아디오스'(adios
/bye)하게 한 힘이 칭찬이었는데 이 미녀가 환하게 웃으며 길 안내를 자임한 동기도 칭찬이다.
민족동란의 불행한 산물인 혼혈아(混血兒)를 우리 사회는 '튀기'라고 스스럼없이 불러왔다.
산아제한 정책과 여아의 출산 기피증은 성(性)의 수적 불균형을 초래하였고, 마침내 결혼적령
여인의 수입으로 우리나라는 혼혈가정, 튀기의 양산 체제에 돌입하고 말았다.
용어의 정제가 불가피해졌으며, 그래서 등장한 새 이름이 이른바 '다문화가정'(多文化家庭/
multicultural family)이다.
그러나, 포장지가 그럴싸하고 품위있는 이름만 붙이면 내용물이 업그레이드 되는가.
튀기를 다문화가족이라고 부르면 해결될 만큼 품격이 올라가며 사회적 골칫거리였던 혼혈아
문제가 과거완료형이 되는가.
오랜 세월에 걸쳐 결혼 적령기의 남녀에게 절대적 문제였던 반상의 혈통이 모계의 혈통(종족)
으로 대체될 날이 코앞에 다가오고 있다.
격세유전(隔世遺傳/Atavism)에 따른 비극의 주인공들이 우리 주변에서 자라고 있지 않은가.
옛 부터 교불삼년 권불십년驕不三年權不十年)이라 했다.
긴 세월로 보면 한 점에도 미치지 못하며 기독교의 신약성서를 빌리면 풀의 꽃과 같은 인간의
영광(1베드로1:24)을 위해 미쳐 날뛰는 형국에 대한 경구다
사농공상(士農工商) 시대의 사회적 위계는 상업이 최하급이었다.
그들에게 삶의 지침이 되는 속담이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라" 였다.
비천하게 벌 망정 품위있게 사용하면 사회적 신분상승이 가능하다는 뜻이 함축된 속담이다.
하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와는 거리가 먼 나라.
몇명의 한센병 미감아 때문에 학생 5천여명의 학교가 문닫을 뻔 했다.(부모들의등교저지로)
가난도 서러운데 빈민 자녀와 짝 할 수 없다고 대량 전학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갖은 추악을 떨어 크고 작은 권력을 잡거나 졸부가 되면 천방지축으로 날뛰며 끊임없이 펼쳐
대는 저주스런 편가르기와 이른바 갑질에 희생될 것이 불 보듯 뻔한 다문화가정.
오호 통재로다.
까미노와 인연을 맺게 한 것은 '숱한 교통사고의 후유증인 공차증(恐車症)으로부터 자유로운
길' 이라는 이유였으나 보다 더 절대적인 까닭이 뒤따랐다.
기어코 실현하려는 한 가지 이유 외에도 현실 도피라고 누가 비판해도 개의치 않을 만큼 나는
'까미노 데 산띠아고'가 좋다.
"굶주린 이에게 물고기 한 마리를 주면 한 끼는 배부르겠지만 그에게 고기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면 다시는 주리지 않게 되리라" 믿고 미약하나마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작은
뜻을 펴기도 했으나 이미 무력해진 늙은이에게는.
비단 우리 사회만의 현실은 아니라 해도 참담하고 역하며 저주스런 현실을 보지 않고 듣지도
않음에 따른 평온한 나날에 맘껏 걸을 수 있는 곳이 바로 까미노다.
한데, 매력 만점의 이 여인이 어이없게도 미구에 닥칠 우리의 비극적 현실에 마음 쓰게 하다니.
구리에소 산을 오르며 평온을 되찾고 까미노의 일상으로 돌아온 것이 다행이지만.
힘겨울 때마다 나를 격려하고 재충전을 도운 '예수의 상'이건만
아구에라 강을 건넜다.
비스카이아 주(바스크 자치지방)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깐따브리아 주 소속 아구에라(지자체
마을 구리에소의 자연마을)에서 발원하여 오리뇬 만으로 흘러드는 길지 않은 강이다.
노르떼 길은 라 막달레나 자연마을에서도 예외 없이 교회(Iglesia de la Magdalena)를 거쳐
우측 산(Alto de Guriezo)으로 오른다.
대부분이 목장으로 변신한 해발 200m대의 야산이다.
한데도 이 지역민들은 '몬떼'(Monte/山)를 연발하며 난이도가 높은 구간이라는 시늉을 한다.
하긴, 해안의 200m대는 내륙의 웬만한 고산과 맞먹으니까.
여닫는 엉성한 목장문들은 단지 가축들의 무단이탈 방지용일 뿐 뻬레그리노들의 통행을 제지
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음을 의미한다.
거듭 밝히지만 우리나라 야산의 목장주들과 극과 극의 대조를 이룬다.
이따금 들려오는 깡통(가축의 목에 달아놓은 위치 확인용) 소리는 생음악에 다름 아니다.
광활한 목초지가 펼쳐지지만 프랑스 길의 메세따(meseta)지역과는 전혀 다르게 해안의 높지
않은 산들이라 프랑스 길보다 한결 더 안정감이 느껴진다.
장신의 유칼립뚜스(eucalyptus) 숲길이 지루함을 덜어주기도 하고.
구리에소의 초원을 다 오른 언덕(Arza?)에서는 지자체 마을 리엔도(Liendo)가 내려다 보이고
그 뒤로 산 너머 깐따브리아 해까지 눈에 잡힌다.
계속되는 내리막 길은 A-8고속도로 밑으로 해서 이세까 누에바(Iseca Nueva)로 이어지는데
허름한 가건물에서 무언가 조각에 열중하던 에스빠뇰이 의자를 내주며 꽤 요란스럽게 반겼다.
목조각(木彫刻)이 취미(hobby)라는 중년남인데 직업이 무엇이기에 평일(월요)인데도 취미에
빠져있느냐고 물었으나 알아듣지 못할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그.
이 예술가(?)가 아무래도 맛이 좀 간 듯 하여 일어서려는데 자기의 배 이상 늙은 뻬레그리노는
처음이라며 경의의 표시로 자기 작품 하나를 선물하겠단다.
기분 좋기는 하나 까미노에서 처음 겪는 일이라 당황스럽기도 한데 그는 엽서 크그만한 성모
마리아 목상을 집어들었다.
가톨릭 신도들은 예수보다 마리아와 더 친근하다.
그래서 내게도 마리아 상을 주려 한 것일 텐데 가톨릭 신도가 아닌 나는 옆에 있는 예수 상(십
자가를 지고 가는)이 더 좋다는 의사를 밝혔고 그는 흔쾌히 나를 기쁘게 했다.
이 예수 상은 내가 힘겨울 때마다 나를 격려하고 나의 재충전을 도왔다.
그래서 까미노에서 어떤 인연으로 이따금 받은 다른 어느 선물보다 더 소중히 간직했다.
다른, 크고 작은 선물들도 쌓여가며 무거운 짐이 되기도 했으나 무게 이상의 힘이 되어 주므로
모두를 지니고 다녔건만 그 의미가 지중해 남부의 알메리아(Almeria)에서 종식되고 말았다.
오토바이를 탄 2명의 도둑이 내 모든 것이 들어있는 배낭을 싣고 달아나는 순간에.
배낭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용도가 끝났거나 덜 필요한 것들을 집에 보낼 때 마다 망설였을 뿐
제외한 것이 후회막급하다.
작은 마을이 산재하고 청결하게 관리되고 있는 마을이라는 인상이며 거대한 카르스트(karst/
침식된 석회암 臺地)지형이라는 인구 1.000여명의 리엔도.
바르(Villa- Mar?)에 들러 생맥주 1잔을 마시며 보까디오 1개를 먹었다.
값은 4.20유로지만 5.20(5유로 지폐+20센트)유로를 지불했다.
여러 개의 동전일 거스름돈 80센트가 거추장스럽겠기 떼문에 1유로 동전을 받기 위해서.
EU의 화폐는 1, 2, 5, 10, 20, 50센트와 1, 2유로는 동전이고 지폐는 5유로 이상이다.
그래서 동전 관리가 부담스럽기 때문에 동전을 덜 받기 위해 나는 이 방식을 자주 쓴다.
한데 이베리아 반도인들의 가감산 머리가 수준 이하인지 가끔 손해를 본다.
이 바르에서도 내 의도와 달리 여러 개의 동전을 받으며 20센트 손해보고 나왔다.
많은 금액이라면 당당하게 따지겠지만....
제 2의 오 세브레이로의 기적? : 유일한 기피 인물이 유일한 룸메이트가 되다
리엔도에서도 까미노는 교회(Iglesia de Nuestra Señora de Liendo)를 지난다.
북쪽으로 오르면 깐디나 산(Candina)으로 해서 리엔도를 싸고 도는 N-634국도에 이른다.
국도에 합류한 노르떼 길은 국도 따라 라레도로 가는데 나는 국도의 왼쪽 길 아래로 약간 비켜
있는 알베르게(Asociacion 'La Encina' Casa Peregrinos Camino de Santiago)에 들렀다.
묵을 리도 없고 제법 내려갔다 다시 올라와야 하는 부담이 있는데도 어떤 인력(引力) 때문에?
몇채의 주택이 띄엄띄엄 있는 작은 마을의 목장 주택을 개조한 듯 너른 목초지 변에 홀로 있는
2층집이 알베르게다.
알베르게의 운영 주체나 유형은 최근에 오픈된 경우 외에는 여러 자료와 입소문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는데 여기 '떡갈나무' 협회(Asociacion 'La Encina')는 초시문(初視聞)의 이름이다.
호소력있는 음악(Spiritual Song?)이 흘러나오고 목가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으나 이용료와
규칙 등에 대해 아무런 안내문이 없어 괴이쩍기도 하고.
기웃거리는 나를 보고 2층에서 뛰듯이 내려온 젊은 오스삐딸레로.
얼음물을 들고 나온 그는 내가 묵고 갈 뻬레그리노가 아님을 알고 있다는 듯 점심식사를 하고
떠나라는 등 감동적인 호의와 친절을 베푼 알베르또 꼰뜨레사스(Alberto Contresas)다.
곧 앳된 오스삐딸레라가 들고 온 보까디오(jamon)를 먹고 그들과 함께 촬영도 하였으나 그의
이름이 적힌(그의 글씨) 메모지만 운 좋게 살아남았다.
라레도(Laredo)에 도착했다.
중세 때(1.200년/Alfonso Vlll) 개창되어 해상무역과 어업에 의해 발전하였다는 인구 11.800명
(2014년INE)의 지자체마을(Cantaberia 주)이다.
미국과 멕시코를 육로로 왕래할 때 낮익은 국경도시와 동명이지(異地)라 설지 않는 이름이다.
국경이 관통하고 있기 때문에 텍사스 주(Texas)의 러레이도(Laredo의영어발음)와 따마울리
빠스 주(Tamaulipas)의 라레도로 불릴 뿐 하나의 도시다.
본래 멕시코 땅이었던 텍사스 주가 1836년에 멕시코로부터 텍사스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가
1845년에 미국의 주로(28번째)로 흡수됨으로서 라레도는 양분된 국경도시가 되었다.
중남미의 지명에는 스페인 본토의 지명이 많다.
라레도도 그 중 하나지만 최고로 많은 지명은 칠레의 수도를 비롯해 아르헨띠나, 도미니까와
쿠바 등에 있는 산띠아고(Santiago)다.
자기네(스페인)의 수중에 들어온 땅들의 이름 짓기가 어려웠던가.
영구히 자기 것임을 확인하기 위해 그랬는가.
아무튼, 스페인 본토의 지명이 뽀르뚜갈의 식민지였던 브라질을 제외한 남미와 중미에 많다.
여장을 푼 알베르게는 산 프란씨스꼬 가(C / San Francisco)에 있는 뜨리니따리아스.
몬하스 뜨리니따리아스 수도원(Monasterio Monjas Trinitarias) 안에 있으며 나의 상한선인
10유로에 아침식사를 제공하는 2인 1실 구조(1인용 침대 2개)의 숙박소다.
나는 프랑세사(Francesa)가 이미 들어있는 방에 배정되었는데 공교롭게도 낯 익은 여인이다.
이슬라레스 알베르게에서 양말을 레인지에 말리던 장골녀(壯骨女).
호감이 갈 리 없는 룸메이트(roommate)다.
라레도에는 여러개의 알베르게가 있으며 아직 이른 시간이므로 임의로 선택할 수 있는데 하필
한(同一) 알베르게의 한 방일까.
전번의 프랑스 길 '오'세브레이로'(메뉴 <까미노이야기>23번글 참조)가 퍼뜩 떠올랐다.
가까이 하게 되는 일 없기를 간절히 바랐건만 내 벙크의 윗층에 배당되었던 술취한 여인이.
제2의 오'세브레이로의 기적, 그 때의 재판(再版)에 다름 아닌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셨음에도 박학다식한 내 조모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집안의 임산부들에게 들려주신 태교(胎敎)다.
"누구를 미워하거나 그의 흉을 보면 그를 닮은 아이를 낳게 된다"고.
마음 가짐을 바르고 곱게 하라는 뜻이지만 마치 나를 두고 하신 말씀 같다.
까미노에서 내가 미워하거나 흉볼 대상이 있을 리 없지만 조우를 피하고 싶은 유일한 여인이
프랑스 길과 노르떼 길에서 각기 1명씩 있었는데 그들이 유일한 룸메이트로 배정되었으니.
일찍(오후3시) 도착하였기에 우체국으로 갔다.
노르떼 길 첫날(이룬을 떠날 때) 라레도 우체국으로 보낸 짐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베리아 반도에서 보기 드물게 업무 마감시간이 2시 40분이라는 별난 우체국.
시에스타(siesta) 때문이라면 석양에 다시 문을 열건만 한낮에 종료하다니?
8시 40분에 개시하여 겨우 6시간 일하는 우체국이다.
새벽같이 출발하려는 계획이 깨졌는데 미리 알았더라면 도착 우체국을 바꿨을 텐데.
수도원 교회에서는 노르떼 길 순례자들을 위한 축복 미사가 매일 밤에 있단다.
교회 신도들이 출석한 미사에서 신부가 순례자들에게 성수 축복을 하는 의식이다.
나는 개신교 쪽이지만 까미노에서 이런 류의 미사에 거의 빠짐 없이 참석한다.
중요한 것은 종파의 의식이 아니라 '축복'이라는 점에 의미를 두니까
.
이 자리에서 간밤에 함께 묵었으며 아침에 만난 두 에스빠뇰을 다시 만났다.
미사 후 작은 공간의 주방 겸 식당에서 또 만난 그들은 자기네 저녁식사에 합석하기를 권했다.
홀 늙은이라 그런지 이같은 경우가 자주 있는데 걷는 것 외에는 장기가 없는 내가 맛깔스럽게
만들어내는 그들의 조리 솜씨를.부러워하고 있는가.
평생을 나그네로 살아오면서 먹는 것은 단지 걷기 위해서일 뿐인 늙은이가 생뚱맞게도 식도락
또는 미식을 탐하는가. <계 속>
이슬라레스 알베르게의 식당(위)과 오스삐딸레로(아래)
농아(聾啞) 아닌지 의심갈 정도로 말이 없을 뿐 더러 표정도 없는 검은 피부의 오스삐딸레로.
나그네들을 맞은 간밤에도 떠나보내는 이 아침에도 닫힌 입이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잘 생긴(muy guapo/very handsome) 청년'이라는 한 마디에 입이 환하게 열리고 함께
촬영도 하고. 역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첫댓글 반가운글월 재미나게 잘읽었읍니다, 건강히 지나시온지요?
십여년 간격으로 3번째 받은 수술인데 이전과 달리 회복이 더딘 것은 정녕 나이 탓인 듯 합니다.
재활치료 삼아 북한산 대동문까지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늙은山나그네 그때....한 번 만났지요? ㅎㅎ
대단하십니다 재활하셔서 다시 활기찬 노정을 계속 하실줄믿습니다.
Ame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