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和順) 능주(綾州)
조광조(趙光祖) 적려유허지.
소 재 지:~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 동면 천덕리
능주는 화순 지방 평야 지대의 중심이다.
조선 시대 에는 인조의 어머니
인헌왕후의 고향이라고 하여
목으로 승격되기도 하는 등 한때는
인근에서 가장 세력이 큰 고을이었다.
그런 까닭에, 화순군에 속하는 지금도
이곳의 나이 든 사람들은
독특한 자존심을 지니고 있다.
이곳 능주면 남정리에는
조선 중종 때 선비 조광조가
기묘사화를 당해 귀양 왔다가
사약을 받고 죽은 터와 그를 추모하는 비(碑)가 있다.
"적려"는 귀양을 일컫는 뜻이다.
작은 비각과 전각, 복원된 초가집이
전부인 유적지이지만
조선 중기 이상적인 개혁정치를 꿈꾸었던
젊은 정치인의 노력과 37세
짧은 생(生)의 마지막을 담고 있는 뜻 깊은 땅이다.
조선 중종대의 개혁공신 정암 조광조의
유배지와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긴 사람들의
마음을 담은 붉은빛 글씨가
선명한 비석은 ‘정암 조선생 적려 유허 추모비’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적려’는 귀양을 일컫는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을 도와 유교 정치의
이상향을 실현하는 과감한 개혁 정치를
실시한 조광조는 도교 사당인 소격서의 철폐,
향약 실시, 토비와 노비 하사의
특권을 인정받았던
훈구공신의 명부인 훈적 삭제 등 왕도정치의
이상 세계 구현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약 2년여 동안의
무리한 급진정책은 기존 세력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무엇보다 그의 강력한 정치적
후견인이 되어야 할 중종이
중국의 요, 순 임금에 버금가는
성군을 만들려는
조광조의 열정을 부담스러워하였다.
결국 역성 혁명을 꾀한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개혁 세력 모두 축출된
당시의 사건은 기묘사화로 불린다.
화순으로의 유배 한 달 만에
사약을 받아 그 생을 마감한
조광조의 억울함을 달래는
비석과 사당은 우암 송시열의 비문을
새긴 비석과 사당이 남아 있어
그 시대의 이야기를 사람들에 전하고 있다.
조광조의 영정을 모신 영정각과
유배 당시 거처했던 초가집이 복원되어 있다.
조광조의 영정초상화
정암 조광조는 성종 13년(1482)에 태어났다.
17세 되던 해에, 어천(魚川, 지금의 평안북도 영변)
찰방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갔던 그는
평안도 희천에 귀양 와 있던
한훤 김굉필(寒喧 金宏弼, 1454~1504)에게서
글을 배워 사림파의 학통을 이어받게 되었다.
지금 능주면 남정리의
조광조 적려유허지에는
‘정암 조선생 적려 유허 추모비’와
영정각, 3칸 초가, 강당이 있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41호로 지정된
추모비는 현종 8년(1667)에
능주 목사였던 민여로(閔汝老)가 세운 것이다.
뒷면에는 우암 송시열이 지은 비문이
동춘 송준길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비석 아래의 거북이 오랫동안
땅에 묻혀 있었는데 보수하면서 파 올렸고,
강당 쪽에 있는 문은
원래 비각 정면에 있던 것이라고 한다.
초가와 영정각 등은 근래에 복원한 것이다.
2 0 1 6. 4. 1 6. 영 국(英 菊).
출처: 5670 아름다운 동행 원문보기 글쓴이: 영국(英菊)
첫댓글 정암 <조광조>의 묘소는 가까운 경기도 용인 수지 상현동(심곡서원)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울 도봉산 입구 <도봉서원>에 배향되어 있소이다
아?그렇군요 종산이 용인 수지쪽에 있나봅니다^^*
첫댓글 정암 <조광조>의 묘소는 가까운 경기도 용인 수지 상현동(심곡서원)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울 도봉산 입구 <도봉서원>에 배향되어 있소이다
아?
그렇군요 종산이 용인 수지쪽에 있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