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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物理學과 東洋思想
The Tao of Physics Fritjof Capra 이성범 역 범양사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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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와 원자를 구성하는 소립자를 관찰하는데 있어서는 그 입자들을 공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체로서는 파악할 수 없으며, 그것은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 천변만화하는 에너지의 일시적 형태, 또는 에너지장의 변화의 과정이나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석된다. 7
나는 그 때 수많은 입자들이 창조와 파괴의 율동적인 맥박을 되풀이 하면서 외계로부터 쏟아져 내려오는 에너지의 폭포를 보았던 것이다.
기계적인 서양적 관점과는 대조적으로 동양의 세계관은 유기적인 것이다. 동양의 신비론에 있어서는 감각에 비치는 모든 사물과 사건은 상호 관련되고 연결되어 있으며 다 같은 궁극적인 실재의 다른 양상 내지 현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29
힌두교도이건, 불교도이건 도가이건 간에 그들의 지상의 목적은 모든 사물의 전일성과 상호관련성을 깨달아 고립된 개별아라는 관념을 초극하여 궁극적 실재와 합일시키는 일이다. 29
운동과 변화가 사물의 근본적 속성이기 때문에 그 운동을 일으키는 힘은 고대 그리스의 관점에서처럼 객체의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물질의 본원적인 성질이다. 따라서 신성에 대한 동양의 이미지는 이 세계를 위에서부터 지배하는 통치자가 아니라 모든 사물을 그 내부에서 제어하는 하나의 원리인 것이다.
아무리 명료하게 보이는 말이나 개념도 그 모두가 적용의 범위에 있어서는 꼭 어느 한계가 있는 법이다. <하이젠베르그>
실재에 대한 우리의 표상이 실재 그 자체보다 훨씬 파악하기 쉽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이 개념들과 상징들을 실재 그 자체로 곧잘 혼동하기도 한다. 35
고기를 잡으려고 망을 치지만, 고기를 잡고나면 망을 잊는다.
토끼를 잡으려고 덫을 놓지만, 토끼를 잡고나면 덫을 잊는다.
뜻을 전하려고 말을 하지만 뜻이 통한 다음에는 말을 잊는다.
<장자>
*낮선 곳을 찾아가기 위해 지도를 보지만 길을 알고 나면 지도는 무용하다.
아무리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어도 길을 나서지 않는 이상 목적지를 찾아갈 수는 없다.
絶對知란 전적으로 실재의 비지성적인 체험이며 이것은 명상적 또는 신비적 상태라고 불릴 수 있는 비일상적 의식 상태에서 일어나는 경험이다. 37
불교적 인식론에 있어서는 본다는 것이 안다는 것의 기본이 되기 때문에 본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앎은 봄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모든 지식은 본다는데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스즈끼> 43
실재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은 사유와 언어의 영역을 초월하는 것이다. 51
신화는 말로써 표명될 수 있는 절대적 진리에 가장 가까운 것을 구현한다.
<아난다 구마라스와미>
언어의 문제는 여기에서 정말 심각한 것이다. 우리는 원자의 구조에 관하여 어떤 방식으로든 말하려고 하지만.. 그러나 일상 언어로서는 아무래도 이야기할 수가 없다. <하이젠베르그>
*빛은 파동인가 입자인가?
파동이기도 하고 입자이기도 하다. 파동성과 입자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우주는 끝이 있는가? 없는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無는 살아있고 기능을 다하고 있는 생동하는 불성의 표현이다. 당신이 필히 해야 할 바는 이 무의 정신이나 정수를 지적인 분석을 통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가장 내밀한 존재 속으로 파고듦으로써 찾아내는 일이다.
통상적인 인식으로서는 무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당신의 전 존재를 내던져 그것을 고바로 거머 잡아야 한다. <야수타니>
*무 - 有生於無 유는 무에서 생겨났다.
절대적 무 / 상대적 무
유의 경계 너머 무한
사물의 본질적인 속성이 지성으로 분석될 때마다 그것은 불합리하거나 역설적인 것으로 보이게 마련이다. 이 점을 신비가들은 언제나 인지해 왔지만 과학에서는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문제가 되었다. 61
우리가 보거나 듣는 것은 결코 탐구된 현상 그 자체가 아니고 언제나 그러한 과정의 결과인 것이다. 원자와 아원자세계 자체는 우리들의 지각영역 밖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자연의 속으로 더욱 더 깊이 파고들면 들수록 우리는 일상 언어의 이미지와 개념을 더욱 더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62
원자물리학은 사물의 본질적 속성의 일단을 과학자들에게 처음으로 보여준 것이다. 신비가들과 마찬가지로 물리학자들도 이제 비감각적인 경험을 다루게 되었고, 또한 신비가들 처럼 이러한 경험의 역설적인 면모에 마주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로부터 현대물리학의 모형과 이미지가 동양철학의 그것과 동류가 되기에 이른다. 63
뉴톤식 우주의 무대는 고전적인 유우클리트 기하학의 3차원적 공간이었다. 그것은 언제나 정지하여 있고 변화할 수 없는 절대적인 공간이었다.
“절대적이고 진정한 수학적 시간은 저절로 그 자신의 본성에 의하여 외부의 어떤 것과도 관계없이 한결같이 흘러간다” <뉴톤>
시간과 공간은 둘 다 단지, 어떤 특정한 관찰자가 그 현상의 기술을 위하여 사용하는 언어적 요소에 불과하다.
질량은 단지 에너지의 어떤 형태에 불과하다.
시간과 공간을 포함하는 모든 측정은 상대적일 뿐만 아니라 시간의 전 구조가 우주 안에서의 물질의 분포에 따라 결정된다. 그리고 빈 공간의 개념은 그 의미를 상실한다. 78
양자론은 입자들조차 고전물리학적인 견고한 물체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해 주었다. 물질의 아원자적 단위의 물질은 양면성을 갖고 있는 매우 추상적인 실체이다. 우리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것들은 때로는 입자로, 때로는 파동으로 나타난다. 81
아원자적 단계에서 물질은 어떤 한정된 장소에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존재하려는 경향을 나타내며 원자적 사건들은 확실성 있게 한정된 시간에 한정된 방식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하려는 경향을 나타내 보이는 편이다. 82
양자론은 우주의 근본적인 전일성을 드러내 주었다. 그것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최소의 단위로 이 세계를 분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물질을 뚫고 들어가 보면 볼수록 자연은 어떤 독립된 기본적인 구성체를 보여주지 않고 오히려 전체의 여러 부분들 사이에 있는 복잡한 그물의 관계로서 나타난다.
어떤 원자적 대상물의 성질들도 단지 관찰자와 대상과의 상호작용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자연의 객관적인 기술이라는 고전적 이상은 이미 빛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자물리학에서는 우리 자신을 동시에 언급하지 않고서는 자연에 관해서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83
원자 안에서 전자들은 핵의 인력과 전자들의 속박에 대한 반발 사이에 최적의 균형이 유지되는 그런 식으로 궤도에 정착하게 된다. 원자는 작은 xodidr|P로서 묘사될 수 없다. 핵의 주위를 회전하는 입자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여러 궤도들에 마련되어 있는 확률파라고 상상해야 한다. 85
상대성이론은 질량은 어떤 실체같은 것과는 아무 관계없는 에너지의 한 형태라는 것을 밝혀 주었다. 그러나 에너지는 활동 또는 작용과 관련된 동적인 량이다. 입자의 질량이 일정한 량의 에너지와 동등하다는 사실은 입자가 이미 정지된 물체로서 이해될 수 없고, 입자의 질량으로서 그 자신을 나타내는 작용하는 에너지의 역동적 모형으로서 여겨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93
두 개의 입자들이 높은 에너지로 충돌하면 일반적으로 조각들로 쪼개어지게 되는데 이 조각들은 원래의 소립자들보다 더 작지는 않다. 그것들은 역시 동일한 종류의 입자들로서 충돌과정에 포함되어 있는 운동에너지로부터 생겨난다.
아원자적 입자들은 파괴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파괴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94
실험을 통하여 물질은 완전히 없앨 수 있는 것으로서 나나났다. 모드 입자들은 다른 입자들로 바꾸어질 수 있다. 그것들은 에너지에서 생겨나 어네지로 소멸될 수 있다. 이러한 세계에서 소립자, 물질적 실체 혹은 독립된 물체와 같은 고전적 개념들은 그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전 우주가 따로 떼어질 수 없는 에너지 모형들의 역동적인 그물로서 나타난다. 96
우파니샤드의 위대한 무기를 활로 삼고
명상으로 날카롭게 간 화살을 그위에 걸어
<그것>의 본질로 향하는 사유로서 잡아당기어
벗이여, 표적인 그 불멸을 꿰뚫어라.
<우파니샤드>
크리슈나의 정신적 교시의 기초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온갖 사물이나 사건들이 다 같은 궁극적 실재의 다른 현시일 뿐이라는 사상에 있다. 103
至上의 영혼은 불가지하고 무량하고 태어나지도 않고, 더듬어 찾을 수도 없고, 생각이 미치지도 않는 것이네.
신은 이 세계가 되고, 종국에 가서는 또다시 신으로 되돌아간다.
마야(환상)의 주술에서 해방되는 것은 카르마의 속박을 부셔버린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감각으로 인지하는 모든 현상이 다 같은 실재의 부분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이 브라만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몸소 체험하는 것을 뜻한다. 이 체험이 모크사moksha 즉 인도철학에서 <解脫>이라고 불려지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힌두교의 바로 그 정수이다. 106
도의 주요한 특성은 끊임없는 운동과 변화의 순환성이다.
“돌아옴이 도의 움직임이다.” 反者道之動
“멀리 가는 것은 돌아오는 것을 뜻한다.” 遠曰反 <노자>
이 사상은 자연계의 모든 발전이 인간상황에 있어서는 물론 물질계의 발전까지 포함해서 오고 감과 확장과 수축의 순환 패턴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126
성인은 과도와 낭비와 탐익을 피한다 聖人, 去甚 去奢 去泰 <노자>
양이 그 정정에 도달하면 음을 위해서 물러나고
음이 그 절정에 이르면 양을 위해 물러난다.
개가 잘 짖는다고 좋은 개로 인정받는게 아니고
사람이 능숙하게 말한다고 슬기롭다고 인정되는게 아니다. <장자>
저것과 이것이 대립자임을 그만두는 것이 바로 도의 본령이다.
구부려라, 그러면 당신은 곧게 되고
텅 비게하라, 그러면 당신은 가득찰 것이며
다 닳고 해지면 새로운 것이니.. <노자>
자연질서를 따르는 자는 도의 물결을 타고 흐른다. <회남자>
만약 어떤이가 도에 관해서 묻고, 다른이가 거기에 대답한다면 그들 중의 누구도 도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장자>
敎外別傳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
이건 얼마나 경이롭고
얼마나 신비스러운 일인가!
나는 장작을 저 나르고, 물을 긷는다. <스즈끼>
일상사의 한 복판에서 깨달음을 얻는다는데 그들의 역점이 놓여 있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일상생활을 開悟에로 나아가는 도정으로서 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開悟 그 자체로서 보았던 점을 분명히 했다. 144
당신이 선을 공부하기 전에는
산은 산이요 강은 강이다.
선을 공부하고 있는 동안에는
산은 더 이상 산이 아니고 강은 더 이상 강이 아니다.
그러나 당신이 일단 깨달음을 얻고 나면
산은 다시 산이고 강은 다시 강이다.
개오의 과정이란 우리가 이미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본래면목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란 깨달음일 따름이다. 대선사 百丈이 불성을 찾는데 관하여 질문 받았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황소 등에 타고 황소를 찾는 것과 너무나 같다.”
아원적 입자들은 일정한 시간에 확실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려는 경향’을 나타낸다. 그리고 원자적 사건들은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방식으로 확실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154
독립된 물질적 입자들이란 추상물로서 그들의 속성은 다른 체계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정의될 수 있고 관찰될 수 있는 것이다. <닐스 보아>
양자론은 우리로 하여금 우주를 물리적 대상들의 집합으로서가 아니라 통일된 전체의 여러 가지 부분들 사이에 있는 다양한 관계의 망으로서 보게 된다. 159
만물은 서로 의존하는데서 그 존재와 본성을 얻는 것이지, 그 자체로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용수 나가르주나>
세계는 그 안에서 복합적인 사건들이, 서로 다른 종류의 연결들과 교체하고 겹쳐지고 종합되어서 전체의 구도를 결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이젠베르그>
원자물리학의 결정적 특성은 어떤 대상의 속성을 관찰하기 위해서 관찰자는 반드시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속성들을 정의하는 데에도 관찰자란 존재는 필요하다는 것이다. 원자물리학에서 우리는 대상 그 자체의 속성에 관해서는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대상과 관찰자의 상호작용이라는 맥락에서만 의미가 있다.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질문 방식에 따라 도출된 자연이다.” <하이젠베르그>
외적인 세계와 내적인 세계는 동일한 직물의 양면에 불과하다. 165
동양에서 덕이 있는 사람이란 선을 위해 분투하고 악을 소멸시키는 불가능한 과업을 떠맡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선과 악간에 역동적인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다. 169
원자적 단계에서 보면 물질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입자로 나타나기도 하고 파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175
對立的인 것은 相補的인 것이다. <닐스 보아>
붇다는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다. 오 비구들이여! 과거 미래 물리적 공간은... 그리고 개별적인 것 등은 다만 이름뿐이요 사유의 형상이요, 일상적인 관용어요, 피상적인 실재들에 불과하든 것을 알아라. 190
아인쉬타인의 이론에서 비롯된 진정한 혁명은 공간 시간의 좌표계가 제각기 독립된 물리적 실체로서의 객관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버리게 한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대신하여 상대성이론은 공간-시간 좌표계는 관측자가 그의 환경을 기술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하나의 언어적 요소에 불과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195
빛의 속도는 일정하기 때문에 천문학자는 결코 우주를 그 현재의 상태에서 바라다 볼 수 없으며 언제나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이다. 빛이 태양으로부터 지구에 도달하는 데는 8분이 소요된다. 그런고로 우리가 어떤 순간에 보는 태양은 8분전에 존재했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장 가까운 별을 보는 것은 4년 전의 별을 보는 것이다. 성능이 좋은 망원경을 가지고 은하계를 관찰하면 그것들은 이미 수백 만 년 전에 존재했던 것이다. 198
공간은 제각기 다른 정도로 휘어져 있으며, 시간은 우주의 서로 다른 지점에서, 서로 다른 속도로 흐른다.210
화엄의 중심사상은 우주는 그 본성이 언제나 계속하여 움직이는 것이므로 그 우주를 영원히 운동의 상태에 있는 것, 즉 살아있는 것이라고 역동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힌두교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상은 유기적인 것으로서 성장하고 율동적으로 움직이는 우주, 즉 모든 것이 유동적이고 끊임없이 변화하며, 정적인 형태들은 마야 즉 환상적인 개념에 불과한 것이라는 우주의 상이다.
붇다는 ‘모든 복합된 것(제행)들은 무상하다’라고 말하고 이 세계의 모든 고는 세계를 움직이고 변화하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고정된 형상, 사물, 인간, 관념에 집착하려는 데서 나온다고 설파하였다. 따라서 역동적인 세계관은 바로 불교의 그 근본을 이루고 있다. 225
어떤 물체의 질량은 그 자체의 무게, 즉 물체를 당기는 중력의 크기이다. 이 외에도 질량은 어떤 물체의 관성 즉 가속화에 대한 저항의 크기가 된다. 237
상대성 이론은 질량은 에너지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에너지는 고전물리학에서 알려진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어떤 물체의 질량 속에 잠겨 있을 수도 있다.
현대물리학에서 질량은 이미 어떤 물질적 실체와 결부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입자는 기본적인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에너지의 뭉치로서 이해된다.
원자들은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입자들은 어떤 물질적 요소같은 것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것들을 관찰해 봐도 우리는 그것에서 어떤 실체같은 것을 결코 볼 수 없다. 우리가 관찰하게 되는 것은 서로 서로에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동적인 모형들의 끊임없는 에너지의 舞蹈인 것이다. 240
이 세계의 대상들-입자들-을 정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에너지, 활동, 작용의 견지에서 역동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요셉 니이담은 “유럽 철학이 실체에서 실재를 찾으려고 했던 반면에 중국철학은 그것을 관계에서 찾으려고 했다. 241
물질과 공간은 단일한 전체의 분리될 수 없는 상호의존적인 면으로 이해된다.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은 가장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대규모적인 현상과 매우 밀접하게 통합되어 있으므로 그 둘을 분리시켜 생각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247
우리는 물질이라는 것을 場이 극도로 강하게 집중된 공간의 영역들에 의하여 성립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새로운 물리학에서는 場과 물질의 양자를 위한 것이 있을 수 없다. 장이 곧 유일한 실재이기 때문이다. 248 <아인쉬타인>
동양적인 견지에 있어서는 모든 현상들을 떠받치고 있는 실재는 어떠한 형태도 초월하고 있으며 어떠한 묘사와 詳述로도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그것은 종종 無形, 空 또는 虛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 공은 단순한 무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형태들의 본질이며 모든 생명의 원천이다. 249
天道는 空하며 無形하다. <管子>
<물질의 장이론>에 의하면 전자와 같은 물질적인 입자란 단지 場力이 엄청나게 높이 집중되어 있는 전기장의 한 좁은 영역에 불과하며, 이것은 비교적 큰 장 에너지가 매우 좁은 공간에 결집되어 있는 것을 뜻한다. 그러한 에너지의 마디는 결코 남아있는 장과 뚜렷하게 윤곽을 지울 수 없으며 호수의 표면을 가로질러 가는 파도와 같이 빈 공간을 통하여 전파되어 나아간다. 전자를 언제나 구성하고 있는 단일한 동일체같은 것은 없다. 251 <헤르만 와일 Herman Weyl>
氣가 응축될 때 그것은 가시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그때에는 개별적인 것들의 형체가 된다. 그것이 분산될 때는 不可視하게 되고 형체들도 없어진다. 이러진대 그것이 응축되었을 때 그것이 단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외에 달리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흩어져 있을 때 성급히 그것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252 張載(張橫渠)
색과 공의 관계는 서로 배타적인 대립의 상태로서 생각될 수가 없으며, 다만 동일실재의 양면성으로서 공존하면서 연속적인 협력관계 속에 존재한다. 254
<라마 고빈다>
色卽是空 空卽是色 色不異空 空不異色 受想行識亦復如是 <般若心經>
운동과 변화는 만물의 본질적이고 본래적인 성질이다.
아인슈타인의 중력장이론과 양자장이론은 둘 다 소립자들이 그것들을 둘러싸고 있는 공간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밝혀 주었다. 한편 그것들은 그 공간의 구조를 결정하는 반면에 독립된 실체로서 여겨질 수가 없고, 전 공간에 미만해 있는 연속적인 장의 응결로서 이해해야 한다. 261
素粒子들의 나타남과 사라짐은 단지 장의 운동 형태에 불과하다. 262
가상적 소립자들과 진공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동적 관계이다. 진공은 진실로 생성과 소멸의 끝없는 리듬으로 고동치는 ‘살아있는 허’이다. 진공의 동적인 성질의 발견은 많은 물리학자들에 의하여 현대물리학에서 최고로 중요한 발견중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물리적 현상을 담는 빈 그릇에로서의 역할에서부터 虛는 이제 가장 중요한 동적인 양으로서 나타났다. 263
“태허가 기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 때 無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장재>
장재(張載: 1020년 ~ 1077년)는 중국 송나라 시대의 사상가이다. 성리학의 기초를 닦았다. 자는 자후(子厚)이다. 봉상미현의 횡거진(橫渠鎭) 출신이었기 때문에 횡거 선생(橫渠先生)이라고 호칭된다. 존칭하여 장자(張子)라고 불린다. 저서 <張蒙>
有生於無 / 有生於有 / 有生於虛 / 有生於氣
*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유 또한 존재할 수 없는데 太虛는 무도 유도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263
원자의 구성요소들인 亞原子的인 입자들이 독립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상호작용들의 불가분한 망의 불가결한 부분들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상호작용들은 입자들의 교환으로서 그 자신을 나타내는 에너지의 끊일 줄 모르는 유동을 포함하고 있다. 즉 그것들은 에너지 모형의 연속적인 변화를 통해 입자들이 끝없이 생겨나고 소멸되는 역동적인 상호작용이다. 265
현대물리학은 우리에게 운동과 율동이 물질의 본질적인 성질이라는 즉, 지구상에서나 혹은 외계에서나 모든 물질은 연속적인 宇宙的 舞蹈에 휩쓸려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285
시바의 세계의 다양한 형상들이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 환상이라는 것, 즉 그가 그의 춤의 끊임없는 유동속에서 그것들을 계속하여 창조하고 소멸시키므로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 망상이요, 계속하여 변화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깨우쳐 준다. 286
아원자의 세계는 리듬과 운동과 연속적인 변화의 세계이다.
불교도들은 대상을 사건으로 여겨왔지 사물이나 실체로서 여겨오지 않았다. 불교도들이 그들의 자연에 대한 신비적 체험을 통하여 깨달은 것이 현대 과학에서 실험과 수학적 이론을 통하여 재발견되어 온 것이다.318
동양의 신비가들은 우리가 감지하는 모든 사물들과 사건들은 어떤 특별한 의식 상태에서 일어나고 이 의식 상태가 지나가면 다시 사라지는 마음의 소산물임을 거듭거듭 우리들에게 말해준다. 326
세계의 모든 현상들은 마음의 환상적인 顯現에 불과하며 그것들은 그 자체의 실재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 326
< 아슈바고사>
일체의 형상들은 오직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며(一切唯心造) 그 마음의 투사 혹은 그림자들이다.
마음으로부터의 분별 때문에 무수한 사물들이 생겨난다. 이러한 것들을 사람들은 외적인 세계로서 받아들인다. 외적인 것으로 나타난 것은 실재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잡다한 것으로 보여지는 것은 기실은 마음이요, 말하자면 물질이나 소유물이나 그와 같은 것 일체의 것은 단지 마음 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현대물리학은 동양의 성인들과 함께 물리적 세계의 구조들은 마야 즉 唯心이라는 것에 동의하기 위하여 머나먼 길을 온 셈이 될 것이다.327
어떻게 하여 우리는 이 절대적인 流轉 속에서의 변천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사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우리의 눈이 연속적인 사건들을 보기를 거절함으로서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변화의 흐름 속에서 절단된 부분을 만들고 그것을 사물이라 부르는 것은 인위적인 태도이다. 우리가 사물들의 진실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변화의 끊임없는 연속에서 떼내어진 소산물들을 마치 영원하고 실재적인 것인양 숭배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생은 사물도 아니요 사물의 상태도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움직임이요, 변화이다. 328
<라다크리슈난>
* 내가 보고 있는 산은
그 산이 태어나서 다시 앞으로 소멸될 때까지
무수한 시간의 극히 일부분이다.
내가 보고 있는 강은
그 강이 밤낮으로 흘러서 끊임없이 유전하고 있는
한 순간을 강이라는 이미지로 여기고 있다.
내가 느끼고 있는 삶은
영겁의 세월 속에서 태어나
알 수 없는 먼 곳으로 갈 때까지
한 찰나에 불과하다.
모든 것은 흐르고 있는데
우리는 멈춰 서서 멈춘 듯이 바라보며
반짝하는 한 순간을
세상으로 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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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물의 근본적인 본성은 이름지어질 수도 설명되어질 수도 없다. 그것들은 어떤 언어의 형식으로도 적절하게 표현될 수 없다.
<아슈바고샤>
우주란 하나의 상호 연관된 전체이고, 그 안의 어느 부분도 다른 부분보다 결코 더 근본적인 것이 아니며, 따라서 어느 한 부분의 속성은 다른 모든 부분의 속성으로부터 결정되어진다. 344
깨달은 경지에서의 상호관통의 체험은 우주안의 모든 현상들이 조화롭게 상호관계하는 완전한 ‘붓스트랩’ 상황에 대한 신비적 투시로서 여겨질 수 있다. 그러한 의식의 경지는 모든 사물과 사건의 상호의존성에 대한 직접적 경험에서 나옴으로써 지성의 영역은 초월되며 인과적 설명도 불필요하게 된다. 346
두 영역에 있어서 다차원적인 경험들은 감각의 세계를 초월하며 그러므로 일상적인 말로 표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361
신비가들은 도의 가지가 아니라 도의 뿌리를 이해하고, 과학자들은 뿌리가 아니라 그 가지를 이해하고 있다. 과학은 신비주의를 필요로 하지 않고 신비주의는 과학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그러나 인간은 그 둘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종합이 아니라 신비주의적 직관과 과학적 분석 사이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이다. 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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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조각독서>란에 올린다는 게 잘못 올라왔습니다. 책의 내용을 문장 단위로 발췌해서 적은 것입니다. 요약해서 파악하고 싶은 분들에게는 유용하리라 봅니다.
소설이 아닌 역사 철학에 관한 종이 책 한 권을 읽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책의 저자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핵심은 알고 싶은 경우,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근래 '요약본'이 자주 나오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인터넷에 들어가면 '미리보기'가 있는데 이것을 보면 내용을 대강 짐작할 수 있습니다.
책의 앞뒤 표지를 상세히 읽어보고 추천자의 말을 읽어보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그러다 이 책을 시간을 들여서라도 읽어야 겠다고 마음이 내키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읽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수많은 책들 중에서 한 권을 선택해서 시간 낭비하지 않고 읽고 거기서 얻을 것을 얻는 것은 큰 인연입니다.
책을 많이 열심히 읽는 사람은 읽을 책 한 권을 선택함에 매우 신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