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동배추를 씹을 때 / 손진은
봄동배추 씹을 때
바스락거리는 건 어린 추위들의 연둣빛 마음
세상 어느 것과 비교도 안 되는 그
단 맛 우물거릴 때 입안에서 파들거리는 건
발전소처럼 윙윙거리는 바람떼거나 한 밤,
가슴에 끌어당겼을 먼 마을 불빛, 잔기침처럼 쏘아올린 별들
그건 또 슬픔과 두려움, 놀람과 상쾌 같은
육체의 서랍 속에 있던 감각들
버려진 밭자락에서 뽑아온
오소소 잎맥에 돋은 소름이 혀끝에 만져지는
파리한 배추 답사 온 일행과 함께 씹을 때
입안에서 잘게 부서지는 그 엽록소 속엔
가르릉대는 어린 추위들과 싸우다
마침내 순해진 고 짐승 어여 와 어여 와! 손주이듯
다독이는 할머니의 다정 같은 게 들어 있다
구체적으로 부서지면서 배추는
그 연둣빛 마음을 씹는 이들 내장에
핏줄 속에 심는다, 하여
입술에 묻은 쌈장 쓱 닦으면서 우리는
바스락거리는 생 하날 들고 나오는 것이다
마치 장바구니이기나 하듯!
『생각과 느낌』2008. 가을호
손진은 시인
경북 안강 출생
경북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와 동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1995년 매일신문 시평론에 당선
1992년 시집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민음사
1996년 <눈먼 새를 다른 숲에 풀어놓고> 문학동네
저서 <현대시의 미적 인식과 형상화 방식 연구> <한국 현대시의 정신과 무늬>
<현대시의 지평과 맥락> <현대시의 미적 인식과 형상화 방식 연구>
경주대 문예창작과 교수
앞치마를 두르고 / 조말선
앞치마를 두르고 시를 쓴다 앞치마를 두르고 독서를한다 전문가들은 앞치마를 두른다 앞치마를 두른 생선장수 앞치마를 두른 생닭장수 앞치마를 두른 화가 앞치마를 두른 엄마 앞치마를 두르면 피를 튀긴다 피 튀기게 열중이다 앞치마를 두르면 함부로 버젓이 칼을 휘두른다 앞치마를 두르고 하는 짓은 앞치마가 다 받아준다 피를 보고야 말 사람들은 앞치마를 두른다 살아 있는 것을 죽이고 죽어 있는 것을 또 죽이고 죽어서 살아가는 전문가의 작품들 전문가용 앞치마는 뒤가 트여 있다 전문가용 앞치마는 간혹 눈요기용 프릴이 있다 전문가용 앞치마는 팽개치기 간편하다 피가 잔뜩 묻은 앞치마 오물이 깊이 있게 얼룩진 앞치마 앞치마를 벗으면 시는 사라진다
조말선 시인
1965년 경남 김해 출생
동아대 불문과를 졸업1998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
'현대시학'으로 등단2001년 '제7회 현대시 동인상'을 수상
2002년 시집 - 매우 가벼운 담론 ( 문학세계사)
2006년 둥근 발작 ( 창비)
그믐 / 성선경
그믐은 지퍼를 잠근 입
믐 하고
입 두 개가 수평선을 사이에 두고
아무 말 없이 쭉 지퍼를 잠근 입
달도 없는 밤을
아버지는 얼굴로 말했다
늘 빡빡한 살림에
이자가 이자를 낳는 그믐
호롱불도 없는 저녁상을
말없이 물리고 나면
별빛같이 담뱃불만 반짝거릴 뿐
무겁게 입을 닫고
믐 했다
나는 아직도 그믐이 되면
달도 없는 하늘이 불쌍해져
믐
입을 닫는다.
<학산문학> 가을호
성선경 시인
1960년 경남 창녕에서 출생198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널 뛰는 직녀에게」「옛사랑을 읽다」「서른 살의 박봉씨」「바둑론」
文 · 靑’ 동인. ‘서정과현실’편집주간마산무학여자고등학교 교사
모과 / 손택수
아파트 화단에 떨어져 있던 모과를 주워왔다
올 겨울엔 모과차를 마시리라,
잡화꿀에 절여 쿨룩이는 겨울을 다스려보리라
도마에 올려놓고 쩍 모과를 쪼개는데
잘 익은 속살 속에서
애벌레가 꾸물거리며 기어나온다
모과 속살처럼 노래진 애벌레가
단잠을 깨고 우는 아이처럼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애벌레에게 모과는 인큐베이터 같은 것
눈 내리는 겨울밤
어미 대신 자장가를 불러줄 유모의 품과 같은 것
이미 쪼개버린 모과를 다시 붙여놓을 수도 없고,
이 쌀쌀한 철에 애벌레를 업둥이처럼 내다버릴 수도 없고
내가 언제부터 이깟 애벌레 한 마리를 두고 심란해 했던가
올 겨울 나는 기필코 모과차를 마시리라,
짐짓 무심하게 아내를 바라보는데
아직도 책장 어딘가에 애벌레처럼 웅크린 태아의
초음파 사진을 간직하고 있는,
놓쳐버린 아기의 태기를 놓지 못하고 있는 모과
속을 드러낸 거죽에 검은 주근깨가 숭숭하다
수술실에서 나올 때 흐느끼는 내 어깨를 말없이 안아주던 너
칼자국 지나간 몸 더 거칠어가는 줄 모르고
바깥으로만 바깥으로만 떠돌던 날들이 있었는데
날을 세운 불빛에 움찔거리는 애벌레처럼 허둥거리는 한때
빈속에 쟁인 울음이 아리디 아린 향을 타고 흘러나온다
손택수 시인
1970년 전남 담양 출생 경남대 국문과를 졸업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언덕위의 붉은 벽돌집>당선
부산작가상, 현대시동인상 수상
제22회 신동엽창작상 수상
2003년 시집 <호랑이 발자국> 창비
벽시계의 얼굴 / 조성식
벽시계를 떼었다
동그란 얼굴이 벽에 새겨져 있다
파리똥도 안 묻은 얼굴로똑딱이는 심장소리를 두근두근
얼마나 들었는지
금이 가있다
등 뒤에 서있는 일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시계를 떼어낸 자리가
창백하다 영정사진
걸었던 곳처럼
슬프다
조성식 시인
1967년 충남 예산 출생
순천향대 국문학과 졸업
1998년 <충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비무장지대 동인
2008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토요일 오후 / 오탁번
토요일 오후 학교에서 돌아온 딸과 함께
베란다의 행운목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일 세상사람 저마다 눈을 뜨고
아주 바쁘고 부산스럽게 몸치장 예쁘게 하네
하루일 하루공부 다 끝내고 중고생 관람가
못된 장면은 가위질한 그저 알맞게 재미난 영화
팝콘이나 먹으며 구경하러 가는 것일까
한 주일의 일과 추억을 파라솔 접듯 조그맣게 접어서
가볍게 들고 한강 시민공원으로 나가는 것일까
매일 물을 뿌려 주어야 싱싱한 잎을 자랑하는
베란다의 행운목이 펼쳐 주는 손바닥만큼씩한 행복
토요일 오후의 우리 집은 온통 행복뿐이네
세 살 난 여름에 나와 함께 목욕하면서 딸은
이게 구슬이나? 내 불알을 만지작거리며 물장난하고
아니 구슬이 아니고 불알이다 나는 세상을 똑바로
가르쳤는데 구멍가게에 가서 진짜 구슬을 보고는
아빠 이게 불알이나? 하고 물었을 때
세상은 모두 바쁘게 돌아가고 슬픈 일도 많았지만
나와 딸아이 앞에는 언제나 무진장의 토요일 오후
모두다 예쁘게 몸치장을 하면서 춤추고 있었네
구슬이나? 불알이나? 딸의 어릴 적 질문법에 대하여
아빠가 시를 하나 써야겠다니까 여중 2학년은
아니 아니 아빠 저를 망신시킬 작정이세요?
문법도 경어법도 딱 맞게 말하는 토요일 오후
모의고사를 열 문제나 틀리고도 행복하기만한
강남구에서 제일 예쁜 내 딸아 아이구 예쁜 것!
오탁번 시인
고려대학교 영문과와 동대학원 국문과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동화).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1969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당선(소설). 현재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창작집으로 「처형의 땅」「새와 십자가」「내가 만난 여신」 절망과 기교」「겨울의 꿈은 날 줄 모른다」 등이 있고, 시집으로 「아침의 예언」「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생각나지 않는 꿈」「겨울강」 등이 있으며, 저서로 「한국현대시사의 대외적 구조」「현대시의 이해」가 있음.
전어 / 김혜경
전어 몸에 기름이 돌고
사람들은 가을을 씹는다
매암섬 밑
수천 마리 물고기 떼 붙은
자루가 발견되었다
살이 다 차지도 않은 어린 가리비처럼
열려 있는 소녀의 젖
전어 몸보다
가시가 더 많은 세상
우리가 발라내야 할 살의 무게는
자루 한 자루
어미의 통곡 소리
파도에 부딪혀 갈라지고
현장 수사 끝낸 형사들
선창에 앉아 매운 양념 소주
전어무침을 오독오독 씹고 있다
-제 6회 시와창작 문학상 당선작-
김혜경 시인
2005년 시와시학 가을문예 「전어」외 4편으로 데뷔
2008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동화 「타임캡슐을 찾아라」당선
토란잎 우산 / 정윤천
토란잎 우산 한번 받쳐보지 않은 사람과는 추억에 대하여 거래하지 않을 작정이네. 어쩌다가 빌어썼거나 빌려주었던 일 해결하러 가는 길 아니라면, 그에게라면 오리길인들 멀어 보일 것 같았네.
때로는 어느 후미진 길 모퉁이쯤이던가, 수수로운 바람의 손사래질처럼이나 ‘그리움’이라던 쑥스러운 호명 하나가, 그 옛날 토란잎 우산 같이 마음에 차오를 수도 있었네. 그런 일 전혀 상관없다면, 사소하다면, 자네와도 어울려 밤낚시 핑계 삼은 어느 은밀했을 遠足의 궁리에서도 뒤에 처질 듯 싶었네.
토란잎 우산이라니, 그게 어디 우산이었겠는가. 어깨도 벌써 다 젖어버리고, 이마 위엔들 찬 빗방울도 토닥였던 것이지.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우리들이 이후로도 오래 견디며 살아가야 할, 흐린 하늘의 저쪽에다 치받아보았던 그리움의 여린 손짓이기도 했다네. 그중에서도 아직까지 남아있었을 한 닢의 일렁이는 푸르름이기도 했다네.
정윤천 시인
1960년 전남 화순 출생
광주대를 졸업
1990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1년 '실천문학' 여름호에 신인 작품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
현재 제주도에서 '제주유람선' 홍보이사로 재직
계간 '시와사람' 편집위원
시집「생각만 들어도 따숩던 마을의 이름」「흰 길이 떠올랐다」「탱자꽃에 비기어 대답하리」「구석」
마른 들깻단 / 정진규
다 털고 난 마른 들깻단이 왜 이리 좋으냐 슬프게 좋으냐 눈물나게 좋으냐 참깻단보다 한참 더 좋다 들깻단이여, 쭉정이답구나 늦가을답구나 늙은 아버지답구나 빈 밭에 가볍게 누운 그에게서도 새벽 기침소리가 들린다. 서리 맞아 반짝거리는 들깻단 슬픔도 저러히 반짝거릴 때가 있다 그런 등성이가 있다 쭉정이가 쭉정이다워지는 순간이다. 반짝이는 들깻내, 잘 늙은 사람내 그게 반가워 내 늙음이 한꺼번에 그 등성이로 달려가는 게 보인다 늦가을 앞산 단풍은 무너지도록 밝지만 너무 두껍다 자꾸
삽 / 정진규
삽이란 발음이, 소리가 요즈음 들어 겁나게 좋다 삽, 땅을 여는 연장인데 왜 이토록 입술 얌전하게 다물어 소리를 거두어들이는 것일까 속내가 있다 삽, 거칠지가 않구나 좋구나 아주 잘 드는 소리, 그러면서도 한군데로 모아지는 소리, 한 자정子正에 네 속으로 그렇게 지나가는 소리가 난다 이 삽 한 자루로 너를 파고자 했다 내 무덤 하나 짓고자 했다 했으나 왜 아직도 여기인가 삽, 젖은 먼지 내 나는 내 곳간, 구석에 기대 서 있는 작달막한 삽 한 자루, 닦기는 내가 늘 빛나게 닦아서 녹슬지 않았다 오달지게 한번 써볼 작정이다 삽, 오늘도 나를 염殮하며 마른 볏짚으로 한나절 너를 문질렀다
<불교문예> 2008년 봄호
제3회 '현대불교문학상' 시부문 수상작에서
1939년 경기 안성 출생 고려대 국문학과 졸업 196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마른 수수깡의 平和』(1965) 有限의 빗장(1971)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1977) 매달려있음의 세상(1979) 비어있음의 충만을 위하여(1983) 연필로 쓰기(1984) 뼈에 대하여(1986)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1990) <도둑이 다녀가셨다>(2000),
몸詩(1994) 본색(2004) 껍질(2007)한국시인협회상·월탄문학상·현대시학작품상 수상 시전문지 월간『現代詩學』주간
2008년 제3회현대불교문학상 수상
고구마를 삶으며 / 서안나
고구마를 삶다 보면 제대로 익는지
젓가락으로 고구마를 쿡쿡 찔러보게 된다
나의 어머니도
열 달 동안 뱃속에서 키워
세상에 내놓은 잎사귀도 덜떨어진 딸년
잘 익고 있는지를
항시 쿡쿡 찔러보곤 하신다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느냐?
차 조심해라 겸손해라 감사해라
고구마 푸른 줄기처럼
휴대폰 밖으로 넝쿨 져 뻗어 나오는 어머니
세상에 사나운 일 벌릴까 봐
40이 넘어도 설익은 딸년
마음과 영혼 병들지 말고 제대로 익으라고
핸드폰 속에서 쿡쿡 찔러보는 어머니
뜨거운 아랫목에서 뒹굴 거리며
알았다고요 귀찮은 듯 대답하는
뜨뜻하게 잘 익어가는 딸년
<다시올문학 >2008년 봄호 (창간호)
등 / 서안나
등이 가려울 때가 있다
시원하게 긁고 싶지만 손이 닿지 않는 곳
그곳은 내 몸에서 가장 반대편에 있는 곳
신은 내 몸에 내가 결코 닿을 수 없는 곳을 만드셨다
삶은 종종 그런 것이다, 지척에 두고서도 닿지 못한다
나의 처음과 끝을 한눈으로 보지 못한다
앞모습만 볼 수 있는 두 개의 어두운 눈으로
나의 세상은 재단되었다
손바닥 하나로는 다 쓸어주지 못하는
우주처럼 넓은 내 몸 뒤편엔
입도 없고 팔과 다리도 없는
눈먼 내가 살고 있다
나의 배후에는 나의 정면과 한 번도 마주보지 못하는
내가 살고 있다
2007년 <시인세계> 봄호
서안나 시인
1965년 제주출생
1990년 「문학과비평」겨울호 시부문 등단.
1991년 「제주한라일보」신춘문예 소설부문 가작.
시집 「푸른 수첩을 찢다」「플롯속의 그녀들」2005년 문학과 경계
현재 한양대학교 박사과정 재학 중
「현대시」「다층」「시산맥」동인
내 친구 야간 대리운전사 / 최명란
늦은 밤
야간 대리운전사 내 친구가 손님 전화 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은
꼭 솟대에 앉은 새 같다
날아가고 싶은데 날지 못하고 담배를 피우며 서성대다가 휴대폰이 울리면
푸드덕 날개를 펼치고 솟대를 떠나 밤의 거리로 재빨리 사라진다
그러나 다음날이면 또 언제 날아와 앉았는지 솟대 위에 앉아 물끄러미 나를 쳐다본다
그의 날개는 많이 꺾여 있다 솟대의 긴 장대를 꽉 움켜쥐고 있던 두 다리도 이미 힘을 잃었다
새벽 3시에 손님을 데려다주고 택시비가 아까워 하염없이 걷다 보면 영동대교
그대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참은 적도 있다고 담배에 불을 붙인다
어제는 밤늦게까지 문을 닫지 않은 정육점 앞을 지나다가 마치 자기가
붉은 형광등 불빛에 알몸이 드러난 고깃덩어리 같았다고
새벽거리를 헤매며 쓰레기봉투를 찢는 밤고양이 같았다고
남의 운전대를 잡고 물 위를 달리는 소금쟁이 같았다고 길게 연기를 내뿜는다
아니야, 넌 우리 마을에 있던 솟대의 새야
나는 속으로 소리쳤다
솟대 끝에 앉은 우리 마을의 나무새는 언제나 노을이 지면
마을을 한 바퀴 휘돌고 장대 끝에 앉아 물소리를 내고 바람소리를 내었다
친구여, 이제는 한강을 유유히 가로지르는 물오리의 길을
물과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물새의 길을 함께 가자
깊은 밤
대리운전을 부탁하는 휴대폰이 급하게 울리면
푸드덕 날개를 펼치고 솟대를 떠나 밤의 거리로 사라지는
야간 대리운전사 내 친구
오늘밤에도 서울의 솟대 끝에 앉아 붉은 달을 바라본다
잎을 다 떨군 나뭇가지에 매달려 달빛은 반짝인다
1963년 진주 출생. 세종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졸업. 200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200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시 당선. 동시집 『하늘천 따지』. 2008년 시집 『쓰러지는 법을 배운다』랜덤하우스
가을 바다 / 강희근
비온 뒤
가을 바다는 조선 삼베, 삼베올처럼 적당히 거칠다
바다 아랫도리가 도시 앞바다 얼굴을 하고 있다
해수욕장 기인 모래사장도 살갗이 텄다
섬을 보면,
까끌 까끌한 바람이 지난 철 꿈의 명암을 뜯어내고 있는 중이다
수평선이 중심이다
가을은 여기서부터 쓸쓸함 또는 쓸쓸함의 길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인간은, 이 흔들리는 쓸쓸함으로 들어가서
까끌거리는 삼베올로 들어가서
섬과 섬 사이 섬 하나가 된다
노을에 버티다가 노을에 그림이 되는 섬,
섬 하나 !
시집 <물안개 언덕> 2008. 도서출판 경남
Coffee Bean / 강희근
새로 생긴 커피 빈은 늘 성탄절이다
알전구 줄이 벽창에 커튼처럼 내리고
어둠을 머금고 불이 켜이고
캐럴 같은 음악이 안락한 의자 사이로
아가씨처럼 다닌다
신장개업이지만 마음 나누는 이들의 말씨처럼 적당히
전아하다
우리들의 삶은 조금씩 슬프기도 하지만
조금씩 즐거움을 많게 하시는 분이 태어나고
어둠을 새벽의 이마로 밀어내는
새로 생긴 커피 빈은 늘 성탄절이다
설탕이 욕망이라면 욕망 한 스픈씩 덜어내고
프림이 교만이라면 교만 한 스픈씩 갈라내는
밤,
우리가 굴곡 같은 걸 커튼처럼 치고 살아왔다
하여도
우리가 시간을 설탕과 같이 맹목의 빛깔로 계량하지 않는
여유, 그 한 홉들이
몇 홉이 불을 켜들어 밤을 켜고 있다
커피가 탁자를 사이에 두고 향기로 흐르고
낯익은 말의 억양에 한 모금 한 모금씩 얹히기도 하는
성탄절
새로 생긴 커피 빈은 늘 성탄절이다
시집 <물안개 언덕 >2008. 도서출판 경남
강희근 시인
경남 산청 출생. 진주고, 동국대 국문과, 동아대 대학원 수료(문학박사). 196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부 당선. <신춘시> <흙과 바람> <진단시> <화전>동인 공보부 신인예술상. 경남도문화상. 조연현문학상 수상. 국립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소장. 인문대학장. 도서관장 전체교수 회장을 비롯 전국국공립대교수협의회 부회장. 배달말학회장. 경남문인협회 회장 역임. 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시집 <연기 및 일기> <풍경보> <산에 가서> <사랑제> <사랑제 이후> <화계리> <소문리를 지나며> <물안개 언덕>등. 저서 <시 짓는 법> <우리 시문학 연구> <한국 가톨릭시 연구> <극예술 이론> <오늘 우리시의 표정> <시 읽기의 행복>등.
첫댓글 詩 창작에서 [제목과 같거나 가까운 말이 첫 행에 있는 것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잘 몰라서 조사하던 중에 너무 흔해서 저도 놀랐습니다. 박윤배 시인의 의견을 무시하거나 반감으로 이 글을 올리는 것이 아니고, 詩를 쓰는 우리가 모두 나름대로 공부해 보자는 취지입니다. 그 판단은 우리 각자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시인의 블로그에서 두 시간에 약 70편을 찾고 그만두었습니다. 추천 시 난에 올린 것은 2008년 미당문학상 최종 후보작품이고 문학창작 이론 방에 올리는 것은 신춘문예 당선 작가들과 문창과 교수나 그와 비슷한 시인들의 작품입니다. 신춘문예 당선 작가 시인들의 詩 약 30편만 올립니다.
그렇군요. 저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군요. 이렇게 힘들게 다울을 위해 수고하시다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우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