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 야그 속편 에필로그
('74 통계. 최종후)
'야그 속편'을마치고 - 그때 그 시절, 그리운 시절
물론 처음엔 설레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 마음이 눈을 만들고, 그 눈이 발을 만들고,
그 발이 길을 만들었을 것이다. 길이 있어서 걷는 것이 아니라, 떠나고 싶은 우리의 마음,
다가가고 싶은 우리의 눈, 이르고 싶은 우리의 발이 스스로 길을 만들며 걷고, 종종걸음치고,
내달렸을 것이다. 길은 그렇게 생겨났을 것이다.
물론 처음엔 오솔길이 있었을 것이다. 들판을 가로질러 작은 언덕을 끼고 돌다 비스듬히
갈짓자 걸음을 치며 구릉을 넘어가는, 가늘고 여리고 부드러운 길. 마음이 마음을 부르고
마을이 마을에 응답하여 만들어낸 길.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걷는 길. 떨어져 쌓이는
갈잎으로도 덮이고 한데 모여 흐르는 빗물에도 끊어지고 흩날리며 내려앉는 함박눈에도
쉽게 지워지는 길. 사라지는 양 다시 나타나고 끊어질 듯 새롭게 이어지는 길...
(沈在祥 詩人의 散文 '골목길'에서)
그간, 이 창에 소개된 '야그 속편1'--'야그 속편12'의 기록은 小生의 대학시절을 지배한
高麗大學校 붓글-그림 동아리 '書畵會'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추억에 대한 기록이다.
돌이켜보니 小生은 대학에 첫발을 디디던 1974년 이래 지금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30년 세월을
'書畵會' 분위기에 취해서 살아 온 것이다.
임재무(81 독문) 동지의 노력에 의하여 탄생하고...유지되고 있는 虎美會 웹사이트를 통해
수삼년 소식이 단절된 '그 시절 그 얼굴'을 만나게 된다. 홍광택(68 사학) 형의 경우도 그러하다.
광택 형은 수개월 전부터 '나그네 야그'라는 시리즈를 통해 30년 전, 형의 재학시절 '書畵會' 얼굴을
회고하는 야그를 이 창을 통해 쏟아붓기 시작했다. 광택형의 야그는 실로 경탄할 만한 것이었다.
마른 침을 삼켜가며, 돌아온 전설, 홍광택 형의 그 시절 야그를 접하고 나면 여지없이...
구성지면서도 유장한 목소리의 변사와 함께 '書畵會' 그때 그 시절을 담은 무성영화 몇편을 접한
기분이 들었다.
형의 야그를 읽은 날이면 두어잔 소주를 찾지 아니하고서는 잠자리에 들 수 없었다.
보고싶은 얼굴 - 구월의 노래 - First of May - 기차는 여덟시에 떠나네 - 해운대 엘레지 - 얼굴 -
고독...노래가...노래가...마구마구 소생의 귓전을 때렸다. 형의 야그는 소생의 신경망에 미세한
충격을 가한 것이다.
눈을 뜨나 눈을 감으나 그때 그 시절, 그때 그 얼굴이 소생 주위에서 오락가락했다.
술을 먹어도 아니 취했고, 아니 먹어도 취한 것 같았다. 엔돌핀이 마구마구 솟아났다.
무엇에 감동하기 어려운 시절에 광택형은 소생에게 울림을 준 것이다.
'나그네 야그'의 場이 이렇듯 펼쳐지게 된 것은 오로지 김유원(70 생물) 형의 노력에 따른 것이다.
영원한 書畵人, 유원 형께 머리숙여 감사드릴 따름이다. 유원 형을 생각하면 평생 절름발이로
살 수 밖에 없다.
얼마전 유원 형은 小生에게 광택 형의 '나그네 야그'에 이어 '야그 속편'을 써볼 것을 권유하신 것이다.
형의 제안에 대한 화답이 그간 '야그 속편'의 연작으로 풀어낸 졸렬한 기록물인 것이다.
이 기록을 작문함에 있어 두려우면서도 미심쩍은 게 한둘이 아니었다.
그 까닭은 실명 야그의 등장인물이 본인의 일화가 이렇듯 만천하에 공개되는 것을 수긍할 것인가
하는 것과, 小生이 기억하고 있는 야그꺼리의 상당 부분이 이를 적날날하게(?) 공개하기에는
좀 그렇고 ‘거시기’한 구석이 많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비오는 날 저녁, 쐬줏집에 둘러않아
실없는 웃음을 ‘실실실’ 흘려가며 서로 나누는 '아는 자는 알리라' 類의 야그가 그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여하간 이러한 고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小生의 무지한 용기가 이런 작난을 도모하게 하였다.
歲月은 歲月을 잊어 새로운 歲月을 낳는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과연 그러하다.
여기에 기록한 것들도 세월이 흐르면 小生의 기억에서 차츰 잊혀져 갈 것임은 분명하다.
그리하여 여기에 기록해 둠으로써 이 졸렬한 기록이 혹시 書畵會-虎美會에 선후배의 다사로운 정이 남아
전하도록 하는데 작은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하는 생각에서 이리 남겨두는 것이다.
2003년 10월 10일 저녁이다. 鷄龍山 노을을 바라보며, 山天齋 崔鐘厚가 적다.
2003.10.11
('71 건축. 오진원)
종후 군!
여기서 '마치시 마시게' 이럼 너무 심한 욕심이겠지?
유원형, 광택형,산천재 등등 호미회 사랑이 너무 절절한 그분들덕에 그간 그나마 잊고 살았던
그때 그 시절의 그 기억이 되살아나 이 곳에서도 사는 재미가 있었는데...
특히 멀리계신 용권형도 그러하실거고 남쪽에 가계신 두일형도 그러하실거고 당장 달려가
보고픈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거늘 멀리 나와있는 우리들에게 만날순 없어도 계속 그리운 시절들을
회상만이라도 할 수 있는 그 즐거움을 누군가라도 다시 이어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오늘아침에 거실에 나오니 신영옥의 새로운 음반이라는데 우리 주제가
'얼굴'이 흘러 나온다.
둥그란 터줏대감님(병옥형)얼굴 부터 (아마 내 기억엔 그분이 처음 이노래를 전차하시지
않았었나 싶다) 줄줄히 여러 동무들 얼굴이 동그랗게 멤돌다 사라져 간다.
엊그제 같은데 벌써 30년이다.
얼마전 73 광신도들 덕에 파주까지가서 해방꾼 놀음을 잘 하고 왔었는데 다시 한번 짬을 내어
한국에 들어가 멤돌다가는 그얼굴들을 확인하고 싶다.
잊혀져가는 기억을 되 살려준 종후군의 필설에 너무 감사하며..
조만간 들어갈테니 수육에 소주한잔 하세.
진원.
2003.10.11
('74 통계. 최종후)
형님...형수님이랑 가내 두루 무고하신지요...
'파주해방군' 후유증은 없으셨는지요...싱가폴서 오시다니...정말로 감격했습니다...
소생은 감각이 둔탁해서리 어지간한 일로는 감격하는 법이 없는데 말입니다.
들으셨겠습니다만...유원형, 형님, 그리고 놀부형님과...문산역 앞 설렁탕집에서 헤어진 뒤...
'국지전'이 남아 있다는 첩보에 따라...UN 지원군이 떠나간 뒤...국군생존자들은 다시금
파주잔당(영대 형집에 남아 있는 쐬주-맥주)을 정벌하고자 전장으로 향했던 것이지요...
형님 떠나신 날 오후 6시경...상황은 종료되었습니다...빈병을 치우느라 영대 형 그리고 형수님께서
꽤나 고생하셨을 겝니다...
'파주해방군' 상황종료 이틀 후 였지요. 해방군 후유증으로 학교연구실에서 졸다자다 자다졸다 하고
있는 소생에게 영대 형이 전화를 하셨지요...몽골에 독수리 돌보러 가신다며...인천공항이라며...
그날 잘 갔나며...끔찍한 사람...운정 형은 그 사이에 몽골로 가는 기슬링을 또 꾸린 것이지요...
후배를 위하야...소생이 아는대로 오진원(71 건축) 형에 대하여 난설하는 것이다...
오진원(71 건축) 형은...재학시절... 같은 학과 동기인...연태규(71 건축) 형과 '뺑끼브라더스'로
명성을 날리던 분인데...'뺑끼브라더스'라고 한 것은 짐작하겠지만 '환쟁이-화실'이어서 그리 지칭
받게 된 것이다...연놀부(연태규 형의 재학시절 별호) 형의 재학시절...본부인은 오진원 형이다.
그만큼 단짝이었다 함이다. 연태규 형의 어부인은 김화순(76 물리) 여사이니...그러한즉 태규형은
'서화커플'이시다. 운정 형과 소생이 중신애비 쯤 되는 것이다.
진원 형이나 태규 형은 '술'로서도 당시 '서화회'에서 '권노갑'의 지위에 있었으며...
그림으로 말해도...대학가 환쟁이 그룹에서는 마땅히 '박지원'의 지위에 있었다.
태규 형은 寡作이었는데...소생이 기억하는 태규 형 그림은 세잔 풍이었다.
유화붓을 동글동글 돌려대며 화폭을 채워가는 손놀림을 보고 있으면...소림고수의 손놀림과 이슷했다.
소생이 2학년 때였을 것이다. 5월 석탑미전을 며칠 앞둔 날이었다. 그날도 여지없이 서화일당은
총각집에서 먹을대로 먹고...노란집으로 들어오는 길이었다.
진원 형이 길가에 버려진 마대포대 같은 것을 주어들고 오는 것이다. 형은 학생회관에서 열린 그해
석탑미전에 그 마대포대를 캔바스로 하야 근사한 유화 1점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진원 형, 태규 형과의 추억을 되뇌이다 보니 航進的으로 71학번 형님들 얼굴이 더풀더풀 떠오른다.
임인규(71 건축) 형은 졸업 무렵, 남파 권동재(71 농경) 형과 안국동에 있던 '명동화랑'에서
2인전을 열었을 만큼 그림솜씨나 그림에 대한 열정이 또한 고수의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인규 형은 경주 유명한 양조장집 아드님이신데 소시적부터 술배달 다니면서 아버지 몰래몰래
'쎄벼 마신' 솜씨 때문인지 몰라도 형의 음주량은 가히 無量大酒였다.
기분이 나시면 한자리에 앉아 막걸리 한말쯤이야 가배얍게 자셨다. 홍광택 형님의 '나그네 야그'에
보니...인규 형은 지금 제주에 유하고 계신다는데...한번 찾아뵈러 가야겠다.
인규형은 막걸리 몇 통을 들고 다니지는 못해도 마시고는 다닐 수 있다고 하신 분이다.
남파 권동재(71 농경) 형 또한 술에서는 남에게 결코 뒤쳐질 분이 아니라는 걸 아는 자는 다 알고 있다.
남파 형은 술자리에서 흥이 나면 '번지없는 주막'을 부르셨다. 소생이 호미회 회장을 맡고 있던...
1999년 9월 19일은 '제 70회 고대미전' 개막일이다.
당일 세종문화회관 전시장에서 있었던 개막행사에 이어 서울시청 건너편에 있는 '프레지덴트 호텔'에
선후배가 같이 하는 연회를 마련한 바 있는데...그 자리에서도 남파 형은 색스폰반주에 맞추어
여지없이 '번지없는 주막'을 부르신 것이다.
이러한 정황이다 보니 당시 제기동-안암동에서 막걸리 냄새가 가실 날이 있었겠는가?
모다모다 취중에 학교를 다닌 셈이다. 소생은 형들이 전공공부하는 걸 한번도 본 적이 없다.
공부는 남몰래 숨어서 했나?? 그래도 형들은 큰 회사(쌍룡건설, 진흥건설, 현대건설)에서
理事까지 지내시고 모두 건승하고 있는 것 아닌가!! 운정형이 이미 증거하지 않았는가!!
과연 전공공부는 세상을 살아 가는데 필요한 내공의 힘을 기르는 것과는 별로 관련이 없는 게 틀림없다.
71학번 형님들을 보면 오로지 '술'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지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酒力은 國力이다!! - 山天齋 어록-
남파 형은 지금도 가락동 농수산시장을 지배하는 서울청과(주) 총무理事이시다...
언젠가 여름에 남파 형을 뵈러 그곳에 간 적이 있다...그렇다...소생이 '야그 속편 12'에 쓴대로
午川선배님 일로 갔을 때였다...사무를 보다 급작스레 소생을 보러 나오신 남파 형은 아무렇지도
않게...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수박 중에서 하나를 집어 들더니 이를 내리쳐서 주먹으로 깨고서는
수박속을 파내어 손에 움켜쥐고 여기에 손을 씻고 소생에게 악수를 청하는 것이 아닌가...
그 전에도 그 이후로도 소생은 그때 수박을 향해 날쎄게 손날을 날리던 남파 형 모습보다 과격한
모습의 남파 형을 본 적이 없다. 오성(75학번 여성 패밀리)이 어느날 소생에게 말한 적이 있다.
곗날 모임을 마친 오성은 무리지어 남파형에게 쫓아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남파형은 그들의 자동차
트렁크에 왼갖 과일을 가득 담아 보냈다고 자랑스레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소생이 답하였다.
수박으로 손을 씻는 서울청과(주) 총무理事이신데...그깟 자동차 트렁크 쯤이야...
그러한 남파 형이... 최근 풍문에 의하면...남파 형은 치아병이 위중하여 큰 고생을 하시고 있다고 한다...
소생의 성의가 모자라서 아직 찾아 뵙지 못한 것이다...조속히 한번 찾아 뵈야겠다.
오진원-연태규 형님 듀엣 '뺑끼브라더스'는 당시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했는데...
그중에서도 장안의 화제는 '고향의 푸른잔디'...'강원도 아리랑' 이었다.
'파주해방군' 집결시 소생은 근 20년만에 형들의 노래를 보고 듣는 '眼福-聽福'을 누린 것이다.
이마에 새겨진 주름만이 야속하였으되...그 목청은 전혀 녹슬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그날 '파주의 밤'은 조수미-신영옥-홍경옥-이인범-박인수-조영남-양희은-이미자-심수봉이 무더기로
동시 출연한 것이나 진배없었다... 志山 함소남 형은 그날 '케세라' 그리고 '고향의 노래'를 불렀으며...
기화형은 형은 그날 '갈대의 순정'을 불렀으며...'걸래' 노명호 동지는 그날 '땐서의 순정'을 불렀으며..
박송완 동지는 그날 '빌딩의 그림자~~'를 부르신게다. 소생은 마땅이 '해운대엘레지'였고...
유원 형은 여전히 '꽃집의 아가씨'를 부르셨다...노래에 앞서 '뱀장사'까지 곁들여 가시면서...
'파주해방군'의 유일한 'UN 지원군'이었던...(싱가폴 지원군이 아닌가!! 싱가폴도 UN 회원국임을
아는 자는 모다 알고 있는 것이다) 진원 형을 위하야 '파주해방군' 전후의 야그를 재정리하여 리포팅한다.
2002년 구월말 늦은 저녁, 소생은 조치원 연구실에서 대전을 향하여 차를 몰고 있었다.
'구월의 노래'를 들으면서...
구월이 오는 소리 다시 들으면
꽃잎이 지는 소리 꽃잎이 피는 소리
가로수에 나뭇잎은 무성해도
우리들의 마음엔 낙엽이 지고
쓸쓸한 거리를 지나노라면
어디선가 부르는듯 당신 생각뿐
운정 형 전화가 온 것이다... "소능...임진강 뱀장어가 물이 오른 철이니...쇠주하러 오시게나..."
소생이 이 사실을 다음날 학교에서 만난 기화형에게 처음으로 고지하게 되었다.
기화형 안색은 마치 압제하 나라 독립소식을 접한 듯, 꼭 사월 철쭉색으로 피어나는 것이었다.
그리하야 기화형은 놀부형으로 이 소식을 전차하고, 소생은 유원 형, 용호 형, 주연 동지에게
이를 전차하니...그 어느도 아니가곤 못하리라에 다름없었던 것이다.
소생은 2002년 10월 5일 야밤을 기하야 하기와 같은 '파주해방군' 전령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제목 : 자!! 배얌이요...배얌...최종후(광고아님)
아래 기별을 전차하난 소이는 이러해서 이러한 것입네다...우리 형제가 항상 동거하매 살 줄
알았더니...한번 분리한 후...종종 상대 못하며 서신도 자조 통하지 못하니 궁금하기 칭량없던 중...
경기도 파주에 유하시는 운정형(영대형)께서 일상의 분주함을 무릅쓰시고...
수삼일전 소생에게 전화를 하시고선... "임진강 뱀장어가 물이 오른 철이니...쇠주하러 오시게나..."
그리하야 지금... 이 소식을 전차하는 형제는 이러합네다... 영대형, 유원형, 진환형, 건수형,
순모형, 기화형, 상환형, 창호형, 용호형, 원주연, 차호승, 박송완, 노승기, 이영철, 황성민
모다모다 모여서 같이 가는 것이로세...19일 오후 3시에 구로역에 모여서 파주로 출발하며...
1박하는 것이올시다... 집결지에 미리 당도하는 파주해방군은...
마땅히 유원 형 회사 건너편의 곱창집에서 술먹는 리허설을 할진저... 밤새 물오른 임진강 뱀장어를
뜯을 작정이로세... 자!! 배얌이요...배얌... 그때까지 형님들은 물론 형제들 두루 기력안강하시고...
대소제절이 역시 안과하시길 두루 앙망이로세...가난지 아니 가난지 답신을 기다릴 것이로세...
소능자가 고하난 말쌈이로세...
이런 연후에, 기화 형 소식이 이렇게 온 것입네다. 이렇게...
수신: 파주 해방군
대원: 길섭형, 영천형, 태규형, 용호, 순모, 종후, 그리고 영대형(=해방군 사령관),
그리고 소남형은 계속 꼬시고 있음.
告1: 전대원에게 알립니다. 그냥 여행가는 것이 아니라, 무박2일, 주색잡기, 사생결단,
파주전투를 피비린내나는 승리로 장식하기 위해 출진하는 것이므로 고개운동, 총검술 실전훈련
많이 하시고 완전군장에 5분대기 하시기 바랍니다.
告2: 어이 종후, 이러다 3차 핵대전이 터지겠군먼. 파주에 샥시가 남아나지 않겠어.
적당한 선에서 자르라고.
告3: 노영대 해방군 사령관님, 돌아가는 전황을 보니 국지전이 아니라 국운을 건, 전면 핵전쟁이
될 것이 손금보듯 빤합니다. 해서, 이 살기등등한 해방군을 그냥 풀어놓아서는 땡칠이가
남아 날 수가 없을 것이 분명하매, 다음과 같이 작전을 수립하심이 어떨까 합니다.
1: 모든 숙식을 야전에서 해결한다.
2: 민가 근처에 얼씬거리는 대원은 무조건 사살한다.
3: 샥시는 민가에 없고 야전에 널려있음을 주지시킨다.
4: 파주내에 있는 모든 여관에 비상을 걸어 하시라도 점령당할 차비를 하고 있으라
계엄을 선포함(거 뭐시냐, 방을 잡아두시라 이 말입니다. 숫자는 추후 대원이 확정되는 대로
다시 상호교신하기로 하죠).
告4: 길섭 형님의 눈물겨운 사연을 첨부합니다.
처절한 전투가 될 것이라는 점을 그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모두 유서를 남기고 오시기 바람(그렇다고 계백장군처럼 할 필요까지야...)
김기화 드림
<길섭 형님의 답신>
기화! = 포주: 이제는 이 별호도 다른이에게 넘기도록!
아래의 메시지 받고 부산하게 움직였다네. 그날이(20일 일요일) 일년 구개월만에 돌아온
일직날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바꾸느라고...폐일언하고, 갈 수 있음을 전한다.
어떻게 가는지를 알려주기 바람. 요즘은 그 버릇이 없어지고 껴안는 다정한 색기가 있음.
빨리 그날이 오기를 고대함. 길섭.
그리하야 결성된 '파주해방군'의 당시 전황은 유원형이 깔끔하게 정리하시어
이 창에 올린 바 있으니 下記와 같다.
당시 전황 사진은 유원형 홈-> 추억의 서화회-> 디지탈시대에 생생하게 보존되어 있다.
< 참조 : '추억의 서화회' 사진설명 3탄을 참조바람... ~~~~ >
그럼 안~녕~~
상기, 유원 형의 전황 기술을 보면...이러한 구절이 나온다...
"해장술에 취한 잔여 병력은 파주사령관의 움막을 급습하여, 그 곳에서 무슨?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한다" ...무슨? 무슨? 일은 이러한 것이다...
소생이 모두에 전술한대로...문산역 앞 설렁탕집에서 헤어진 유원형-진원형-태규형은 상경하시고...
(진원형은 그날밤, 싱가폴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했다)... UN 지원군이 떠나간 뒤...
용감한 국군생존자들은 시들해진 전투력을 재정비하야 다시금 파주잔당(영대 형 집에 남아 있는
쐬주-맥주)을 정벌하고자 전장으로 향했던 것이다. 이후 '국지전' 전황에 대하야 운정 노영대 형은
2002년 11월 3일, 이 창을 통하여 下記와 같이 술회하고 있는 것이다.
" 마누라 성당간 사이에 사단(?)이 벌어졌다. 열집 채 안되는 작은 동네가 생긴 이래로 고성방가에
음주난행은 첨. 마침 동네 사람들의 90%가 예수믿는 사람들이라 집들이 빈 것이 천만다행.
소능은 전화를 들고 114를 불러 문산의 '연다방' 번호를 안 다음, "아가씨 좀 보내 주소.
커피 40잔이면 되우? 10잔에 한명씩..." 얼마후 자가용에 2명의 여자가 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그 다방 여자가 모다 2명이란다. 포주 (소생의 주: 이는 김기화 형의 별호인데...
껴않을 '포'자 술 '주'자 해서 '포주'인 것이다... 기화 형은 재학시절 늘상 술단지를 껴잡고
살았다 해서 그리 별호가 붙은 것이다) 옆에 앉은 여자가 연변에서 온 아가씨.
분위기에 취해 그녀가 한 말... "아~, 취하고 싶습네다!!" 소능은 이렇게 말했다.
"연변아가씨든, 흑룡강성 아가씨든 모두 독립군의 후예들이다. 잘 모셔야 하느니"
얼마 후 마누라가 나타나 난 혼날줄 알았다. 얘들이. 그러나...같이 놀았다. 참 다행이다.
얘들이 가고도 난 혼나지 않았다. 휴~ "
진원 형과의 근 20년만의 눈물겨운 재회의 자리가 '파주의 밤' 이었다.
필시 소생의 남은 생애 내내 잊히지 아니 할 '파주의 밤'이다. '파주의 밤'은 오로지 운정 형의
전화통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운정 형께 감사할 따름이다.
야그 속편12 - 午川 선배 行長 - 으로써 '야그 속편'을 大尾짓고... '그때 그 시절, 그리운 시절'
이라고 하여 '야그 속편'을 마치는 所懷까지 적어 둔 소생은 당분간 小生의 生業에 邁進하려고 作心하였다.
10월 17일-18일, 대구대학교에서 열리는 '한국자료분석학회' 그리고, 10월 30일-11월 1일,
서울대학교에서 열리는 '한국통계학회'에 소생의 논문발표가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소생의 '한국자료분석학회'에서의 발표 논문토픽은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에 기반한 마이크로타겟의 구축'
이며...'한국통계학회'에서의 발표 논문토픽은 '마이크로타겟 의 구축과 그 활용'이다.
또한, 11월 12일 오후 3시부터는 한국은행(신관)에서 국가승인통계 작성기관 책임자를 대상으로
(현재 국가승인통계 작성기관의 수는 124개) '한국통계학회 공식통계연구회'와 '통계청-한국은행'이
공동 주최하는 '국가승인통계에 관련된 포럼'이 열리게 된다 (공식통계는 미국에서는
'Official Statistics' 라고 부르며, 일본에서는 '官廳統計'라고 부른다).
소생은 현재 '한국통계학회 공식통계연구회' 총무를 맡고 있다.
그날, 국내 '산재통계' 작성의 총괄 책임자, 문용호 형은 '산재통계 -현황과 개선책- 題下의
발표를 하게 된다. 그날, 발표 토픽은 통계청에서 2개, 농림부에서 1개, 한국산업안전공단에서 1개,
그리고 학계에서 1개, 도합 5개이다. 소생은 그날, 사회를 보랴...패널토론에 임하랴...
여타 잡일을 하랴...하는 숙제를 떠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에 있고 보니, 어이 生業에
골몰하기로 마음을 되잡지 않을 수 있는 것인가!!
그러한데...소생이 적은 '야그 속편'을 마치고 -그때 그 시절, 그리운 시절- 을 보시고서...
저 멀리 싱가폴로 부터...진원 형께서 답신을 보내신 것이 아닌가!! 이렇게...
종후 군! ~~~
진원 형의 이 글을 보고서... 어이 졸렬한 논문 만을 만지작거리고 만 있을 것인가!!
더구나 오늘 아침...신영옥이 불러재키는 우리들의 영원한 주제가 '얼굴'을 들으셨다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야...정리하던...논문을 미루어 두고...진원 형께 답신으로 올린다 하는 것이...글을 쓰며
마셔댄 닥비어 탓인지...흔들이는 이 마음 탓인지...이러한 亂筆이 된 것이다.
진워니형... '수육'이 되었든... 유원형 동네...'곱창'이 되었든... 보고 싶습네다...
귀국에 맞추어 '파주해방군'을 재소집하겠습니다... 이번엔 花津浦(꽃나루) 쯤이 어떠하신가요...
유원 형도 좋아하는 곳이니까요... 운정 형이나 형님이나 놀부 형이 영락없이 좋아 할...
'동명항' 좌판에 걸터 앉아서 펄펄 뛰는 '오도리'와 더불어 좌판석쇠에 구은 기름이 자글거릴
'양미리'를 구워 먹는 맛...그럴듯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쯤 동해안 '오도리' '양미리'가
제철이지요... '동명항' 좌판장사 67번 아줌마는 10 여년 째 단골이지요... 지령만 내리십시오...
67번 아줌마에게 미리 전화해 두겠습니다... 不遠千里 어딘든 못가겠습니까... 지령만 내리십시오...
다시 뵐 때까지...아무쪼록 건강하시길 비옵니다.
2003.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