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홍립(姜弘立)과 진주강씨
큰제목: <불운의 무장 강홍립, 병자호란 당시 후금군의 향도로 귀국>
병자호란 때의 적의 향도가 돼야했던 불운의 무장 강홍립(姜弘立)은 진주강씨(晋州姜氏)의 한 사람이다.
1618년 명나라가 후금을 토벌할 때 명의 요청으로 조선에서 원병을 보내게 되자 오도도원수가 되어 부원수 김경서와 함께 1만3천여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한다. 그러나 후금과의 접전에서 일부러 항복한다. 남의 전쟁에 피를 흘릴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이듬해 조선 포로들은 석방되었으나 김경서 등 10여 명과 함께 계속 억류당해 있다가 1627년 정묘호란 때 후금군의 향도로써 입국해야 했다. 그리고 강화에서 화의를 주선한다.
그 바람에 나중 역신으로 몰려 관직을 삭탈당했으며 사후에 복관되었다. 국제정치의 격동기에 군비도, 안목도, 줏대도 없었던 나라의 군인으로 겪어야 했던 불행이었다.
<진주강씨의 시조 강이식, 요동을 사수한 일세의 명장>
“요동을 정벌하는 자, 만주를 지배하고 만주를 지배하는 자는 동북아세아를얻는다”
수나라 문제의 침략군 30만을 5만 정병으로 격퇴하고 요동을 사수했던 일세의 명장 강이식(姜以式) 장군은 영남의 고도 진주를 본으로 하는 강씨들의시조다.
진주. 진양지방에서의 강. 하(河). 정(鄭)씨의 3성은 대성으로 일러올 뿐 아니라 진주강씨와 진주하씨는 다 같이 이 지방의 토성이다.
강씨는 우리나라의 성씨 가운데 여섯째 가는 대성으로 총인구의 2.4%를 차지한다.
문헌상의 본관은 진주. 금천. 안동. 백천 등 9본이 있으나 모두가 대종인 진주의 지파로서 오늘날 모든 강씨들은 진주가 유일본임을 내세운다. 따라서 진주강씨의 시조 강이식은 모든 강씨의 도시조(都始祖)가 된다.
고구려 제26대 영양왕 8년(597), 5호16국과 남북조의 난세를 평정하고 한족의 통일국가를 형성한 수나라는 북방의 강국 고구려에 국서를 보내온다. “상국인 수나라에 지성과 충절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방자한 내용이었다. 왕은 군신들을 모아 이에 대한 회답을 논의했다. 이때였다.
“이같이 무례한 글은 붓으로 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써 답해야 합니다”. 어전을 감싸는 침묵을 깨고 강 장군은 수나라의 무력에 대결할 것을 주장한다. 이에 왕은 강 장군의 주장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장군은 정병 5만을 인솔, 수나라 군사 30만을 요동 땅에서 격퇴하고 개선한다.
그 후 장군은 살수(지금의 청천강)대첩의 명장 을지문덕과 함께 문제의 아들 양제가 이끄는 1백만 대군을 무찔러 다시 한번 기개와 용맹을 떨쳤다.
<진주강씨 시조 강이식 장군 이어 숱한 장군 배출>
이처럼 문중 시조의 혼과 백이 무장의 길에 흐르고 있다. 우국충절의 기개와 무장 특유의 강한 자존심은 후대에서도 숱한 장군을 배출했으니 해동의명장이라 일컫는 구주대첩의 강감찬 장군과 자주대첩의 강민첨 장군이 대표적 인물이다.
이 두 명장파와 고려 원종15년(1274) 통신사서장관으로 일본을 다녀온 국자박사 강계용과 사도소감 강위용, 문하시중 강원용 등 3파가 진주강씨의 3대 산맥으로 그 후손이 번성, 1백만 명을 헤아린다.
조선조에만 상신(영의정.좌의정.우의정) 5명, 대제학 1명, 원수 및 장군 25명, 명신과 공신 51명을 배출했다.
<강희안, 강희맹 형제, 조선 초기 대문장으로 이름 날려>
강희안과 강희맹 형제는 조선 초기 진주강씨가 배출한 대문장이다. 강희안은 세종 23년 문과에 급제, 집현전 직제학으로 정인지, 성삼문 등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다. 그 후 단종 복위 계획에 관련되어 신문을 받았으나 “참으로 현사(賢士)이니 죽이지 말고 중용하라”는 성삼문의 변호로 화를 면했다.
그는 당대의 독보적인 존재로 “시서화삼절”의 칭을 들었다. “용비어천가”의주석을 붙일 때도 참여했고 “청천양화소록”의 저서와 “교두인수도”, “산수인물도” 등의 그림과 “강지돈령석덕묘표” 등의 글씨가 전해져 조선조 문화의 귀중한 보배가 되고 있다.
그의 아우 강희맹 또한 당대의 문장가요 서화가다. 세종 29년 문과에 급제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아 세자빈객이 된다. 예종 즉위년에는 남이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진산군에 봉해졌다. 신숙주 등과 세조실록을 편찬했으며 병조. 이조판서 등을 거쳐 좌찬성에 올랐다. 당대 으뜸가는 문장으로 꼽혀 그의 사후에 성종은 서거정을 시켜 유고를 편찬케 했다. “사숙재집”, “금양잡록” 등이 전한다.
세조조에 우.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던 강맹경은 근후성실한 인품으로 젊어서부터 명재상 황희 정승의 남다른 총애를 받았다.
연산군 때 우의정을 지낸 강구손은 강희맹의 아들이다.
강세황은 정조 때 시서화의 대가로 명성을 떨쳤다. 글씨는 왕희지 등의 서체를 본떴으며 어느 서체에도 신묘의 경지에 들었다. 그림은 산수와 사군자에 뛰어났으며 시는 육유의 시풍을 본받아 독자적인 경지를 보였다. 저서로 “표암집”이 있고 그림으로 “난죽도”와 묵죽도 등이 전한다.
<정유재란 당시 왜군 포로 강항, 일본 성리학의 원조로 꼽혀>
인조 때 우의정을 지낸 강석기는 사계 김장생의 문인으로 예학에 정통했다. 그의 딸은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의 빈이다. 소현세자는 병자호란 때 봉림대군(뒤의 효종)과 함께 청나라 심양에 인질로 붙잡혀 갔다가 서양문물에 관한서적을 가지고 귀국했다 그러나 왕위에 올라보지 못한 채 귀국 두 달 만에 죽고 말았다. 만약 소현세자가 왕위에 올랐더라면 강씨의 역사는 또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월당집이 전한다.
강항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 공조. 형조좌랑 등을 지냈다. 정유재란 때 고향 영광에서 의병을 일으켜 이충무공 진영으로 가던 중 왜군에 포로가 되어 일본 오사까로 잡혀간다. 일본에서 그 곳 사람들과 교유하면서 성리학을 가르쳐 일본 성리학의 원조로 꼽히게 된다. 뒤에 교토로 옮겨졌다가 선조 32년에 석방되어 귀국한다.
조정에서 교수에 임명했으나 스스로 죄인이라 하여 거절하고 학문 연구에 에만 전념, “수은집”, “간양록”, “문차록” 등 저서를 남긴다.
2006. 9. 2 글쓴이 정복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