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의 삶 - 한 시대의 꼭두각시 -
인생이 역사 무대의 꼭두각시노릇을 한 대표적 사례로 청나라 마지막 황제를 지낸 애신각라(金) 부의(溥儀))를 들 수 있다. 대충 이에 대하여는 알겠지만 좀 더 상세한 일생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부의는 1906년 2월 7일 청나라 황실에서 할아버지가 도광황제의 일곱째 아들이었다. 1908년 11월 광서황제의 죽음으로 인하여 3세에 청조 10대 황제에 등극하였다. 세 살짜리 꼬마가 즉위식 때 어찌나 울었던지 옆의 사람들은 불길한 징조라고 여겼다고 한다.
1911년 11월 손문이 일으킨 공화정의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6세의 나이에 부의는 황제자리에서 축출되었다. 그는 1912년 2월 12일 퇴위 조서를 읽었으나 원세개가 혁명정부를 장악하여 대총통에 부임하면서 자신의 좁은 입지를 위해 퇴위한 황실의 특권을 보호해준다는 조처를 취했다. 그래서 그는 실제는 황제는 아니었지만 황제의 존호는 가지고 있었다. 그 무렵 그는 황제 교육을 받았는데 가장 영향을 준 것은 전 학부시랑을 지낸 한학자 진보탐과 영국의 모 대학을 졸업한 문학석사 찰스톤 두 사람이었다. 그는 영어 이름으로 Henry(형리)라는 이름을 가지기도 했고, 변발을 짜르고 양복에 구두를 신은 양식 복장을 갖추기도 했다.
1917년 장훈 등 5000명이 이끄는 군대가 북경을 포위하여 정권을 장악하자 이 때 부의는 2차로 황제위에 올랐으나 이는 12일 만에 다시 퇴위하며 통곡을 하여야 하였다. 그는 황제위에서 내려왔으나 자금성 내에 거처하고 있었다.
그는 한 명의 후(后)와 비(妃)를 두게 되어 1922년 16세였던 부의는 동갑의 완용(婉容)을 황후로 14세의 문수(文綉)를 비로 취하였으나 그는 혈손을 가지지 못했다. 1924년 풍옥상이 이끄는 혁명군에 의하여 정권이 바뀌자 그는 자금성에서 쫒겨났고, 황제의 모든 칭호도 버려야 했다.
그후 그는 일본공사관으로 피신하여 천진에 있는 일본 조계지에서 살아야 했다. 이 때 그곳에서 그는 골프를 쳤다. 이때부터 그는 일본 제국주의의 꼭두각시노릇을 했다. 그의 명분은 조업(祖業)을 회복하겠다고 하였으나 그에게는 그럴만한 의지와 뜻 그리고 힘이 없었다. 이는 후대 역사가의 생각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1931년 9․18 지나사변으로 인해 일본의 중국진출이 적극성을 띠게 되었다. 그는 그해 11월 10일 일본인의 호송 하에 천진에서 몰래 동북지역으로 오는데 이곳이 장춘이다. 1932년 3월 8일 하오 3시에 장춘에 도착했다. 그는 만주국 집정관으로 아랫사람들이 작성한 일만의정서에 서명함으로서 그의 집무는 시작되었다. 1934년 3월 1일 만주국의 황제로서 천단에서 즉위하고 이 때 그는 육해공 3군 원수의 군복 정장을 입고 즉위했으며, 연호를 ‘강덕(康德)’이라 했고, 일본의 제1위 훈장을 받았다. 비록 그가 황제라고는 하나 그는 일본 군사령관의 조종 하에 움직였다. 그는 1935년과 1940년 두 차례 일본방문을 했다.
1941년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일으켰고, 1945년 7월 소련군이 참전했다. 그는 일본으로 도망을 치다가 1945년 8월 19일 심양비행장에서 소련군에 체포되었다. 1950년 7월 21일 그는 중공으로 인도되어 인간개조운동에 10년간 각종 사상교육을 받아 1959년 12월 4일 보통 공민으로서 출소했다. 1964년 그는 전국인민대표로 지정되었고, 1967년 10월 17일 북경병원에서 간암으로 사망했다. 61세였다.
이상과 같은 그의 일생은 물질적으로는 생활에 걱정을 받지 않았으나 그는 일반사람과 같은 교육을 받지 못했고, 온상 안에서 홀로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어린 시절부터 그는 국가의 예절이나 격식이라는 무거운 짐에 겨워 울먹였다. 그리고 사회의 급변하는 사태는 그를 황제에서 평민으로, 그리고 다시 황제로 천정과 땅바닥을 왔다 갔다 했다. 그리고 국제적 정치세력에 이용되어 한족에 의한 만주족의 배격운동, 그리고 일본의 만주진출을 위한 조작에 걸려들어 매국노와 황제라는 양면을 가지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사회주의 중국에 의하여 그는 공민에서 인민대표라라는 지위를 얻기까지 했다.
이런 그의 일생을 보통사람이 말하는 새옹지마라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그 변동의 폭이 너무나 컸다. 또한 남가일몽이라고 가볍게 보기에는 그의 지위는 사회의 최고위층에서 맴돌았다. 의식이란 측면에서 보면 그는 제정신을 잃은 정신병자라고나 할 가? 이런 사람의 일생을 비유하는 적절한 용어가 없다.
역사와 시대의 꼭두각시라고나 하여야 할 까. 그렇기에 지금 그의 궁전을 굉장한 역사적 유물 유적지로 만들어 비싼 입장료(80위안: 한국돈 2만원)를 받고 문화유산으로 만들고 있다. 하기야 전근대에서 근대 그리고 현대에 이르는 시대의 연출자로서는 적격이라고 할 수 밖에 없지 않는가? 그의 일생을 보고 우리는 인간 삶의 다양한 의미를 반추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과 국가, 사회, 문화의 전환이라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음미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보통의 인간이 아니라 지배층의 후예가 갖는 종말을 보기에 우리 서민의 마음에 포근히 안길 그런 연출자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