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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가 造作한 K, CIA 이대통령이 바로 세워야 합니다.
조용승 / 본지 편집인
1998년 6월 8일 오전 9시쯤 서울 중구 태평로의 프레스 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는 좀 이색적인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주인공은 당시의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장 이종찬 씨와 월간 한국논단의 이도형 발행인이었다.
<이종찬 안기부장과 이도형 발행인의 대결>.
국가의 기밀정보를 취급하는 총책임자 안기부장이 공개좌석에 나온 것은 지금까지도 前無後無(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러나 육사출신으로 여당(민정당)소속 국회의원 경력을 가진 이종찬 씨는 중견언론인들의 친목모임인 관훈클럽의 조찬강연과 토론에의 초청을 이례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부장의 기조연설이 끝나자 이발행인이 손을 들었다. 두 가지 문제를 제기했다. 그 하나는 이 부장 취임 후 안기부의 대공 업무 담당자들을 대거 퇴출시켰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혹여 대공 업무에 차질을 빚지는 않았는가? 그리고 퇴출인원이 자그마치 9백여 명, 전안기부 직원의 11%나 된다고 하는데 이는 정권교체에 따른 인사라기보다 숙청이라고 해야 마땅할것 같다. 이부장의 명쾌한 답을 바란다.
다른 하나는 소위 이대성 파일문제. 안기부 북한실장 직에 있던 이대성씨가 김대중 씨(대통령후보)의 대북접촉 관련 정보를 집대성, 7백여 쪽의 방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일컬어 이대성파일이라 하는데, 이는 현대통령(김대중)의 대북접촉을 소상히 기록한 것으로 국가안보상 중대한 사안이다.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공개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이발행인은 이상 두 가지 문제를 제기, 답변을 요구했다.
이종찬 안기부장은 요지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대공 업무 강화됐다.
<이대성파일정보ABC 모르는 사람이 만든 것, 이종찬 답변>
이도형 선배님 참으로 좋은 질문을 해 주셨습니다. 첫 번 째 문제부터 답변해 올리겠습니다. 제가 안기부장에 취임해보니 대공 분야에 비전문가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을 퇴출시키고 전문가들을 適材適所(적재적소)에 배치했습니다. 따라서 안기부의 대공 업무 분야는 한 층 더 강화되었습니다. 이점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다음 두 번 째 문제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정보의 ABC를 아는 사람 같으면 그처럼 확인도 안 된 미확인 첩보들을 주워 모아 보고서를 만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 내용이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킬만한 것이 못됩니다. 공표할 가치가 없는 문서입니다.
이도형 발행인은 이 문제제기로 말미암아 곧 엄청난 불이익을 받게 된다. (이 내용은 이도형이 지은 조선인. 한국인. 비한국인-302~308쪽에 상술) 김대중 씨가 총재로 있던 새정치국민회의로부터 고발, 계류 중이던 공직선거법위반 및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사건이 일사천리로 사법처리(징역2년, 집행유예3년)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제기한 문제는 사실이었다. 1998년 김대중 정권이 등장하면서 숙청된 911명중 서기관급 이상 간부만도 125명이나 되었다. 송영인, 강신호, 김명선, 김일태, 김종헌, 박완수, 심중수, 이종헌, 전인석, 하성호씨 등이 그중 일부다. 이들은 김대중 정권의 기피인물로 점찍혀 억울하게 강제퇴직 당한 것이다. 이들은 국가정보원 강제퇴직 진상규명 촉구 위원회를 만들었다. 송영인씨를 상임대표로 하고 나머지 9명은 공동대표가 되어 뜻을 같이하는 강제퇴직자 581명을 대표해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한편, 이들을 몰아낸 김대중 정권은 국정원을 어떻게 꾸미고 이끌어 왔는가. 퇴출당한 국정원 전문요원 자리를 메꾼것은 특정지역 출신들이었다고 한다. 호남을 중심으로 한 특정인맥 5백여명을 통해 한 것이다. 이를 가리켜 보수인맥 대학살 사건이라고도 한다. 사무관, 서기관급 이상인 이들은 서로 형님 동생으로 부른다고 한다. 정보기관 특유의 위계질서보다도 특정 지방중심의 私緣(사연)이 짙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들은 국가안보를 위한 정보수집. 분석이라는 본연의 임무는 간곳없고 反(반)김대중 인사에 대한 도청과 미행, 보이지 않는 탄압과 불이익을 주는 정치공작에 골몰했다. 특히 2000년 6월 김대중의 방북 이래 대공 업무는 명실 공히 국정원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나라 공안당국에서 간첩을 잡았다는 뉴스가 끊어진 지 오랜만에 이례적으로 국정원이 소위 386세대가 개입된 간첩단의 전모를 밝혀냈던 일이 있다. 일명 일심회란 간첩단사건의 수사는 당시 좌파정권 깊숙이 포진해 있던 반대세력들의 훼방으로 꼬리부분만 밝혀내고 흐지부지된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 간첩단사건 수사에 대한 사생결단식 방해공작 중심에는 다름 아닌 국정원내 핵심인물인 이상업 국내차장이 있었다. 이 차장은 간첩수사를 하고 있는 수사진에게 청와대 지시이니 수사를 하지 말라고 노골적인 압력을 넣었다는 것이 당시 수사관들의 푸념이다.
<국정원과 일심회 간첩단 사건>
이 차장은 김대중 정권 시 국정원 실세인 기조실장이던 문희상 통합민주당 의원의 매제이다. 문 전 기조실장은 경상도 인맥 대학살 당시 인적선정에서 퇴직조치까지의 집행을 진두지휘한 장본인이다. 후일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영전하는 등 승승장구하여 좌파정권 내내 정치 중심인물로 활약해 왔다. 이런 문 전 기조실장의 대를 이은 매제인 이상업 국내차장은 당시 좌파정권의 아킬레스건인 386세대 관련 간첩단 수사를 결사코 방해했던 것이다. 그는 담당국장에게 청와대에 가서 직접 보고하고 허락을 받으라.고 정보기관으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행태를 끝까지 고집했다 한다. 이에 당시 수사를 맡았던 국장은 이를 뿌리치고 청와대를 직접 찾아가 사건전말을 말하고 (어떤 불이익이나 퇴직을 각오하면서) 수사 강행을 고집했으나, 결국 수사는 축소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간첩단 사건을 언론에 공포해 버린 당시 김승규 국정원장은 피의자 측의 피의사실을 공표했다는 이유로 되려 고소를 당하는 어이없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결국 김 원장은 이 사건으로 옷을 벗었다. 이 사건은 당시 국정원의 추락한 치욕의 역사로 기록될 부분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당시 국정원의 해외파견관 인선에도 특정인사로 외교 면에 마찰을 빚기도 했다. 그동안 對美(대미)관계는 어느 국가보다 중요하게 생각해 미국 통 전문 인사를 선발, 파견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러나 미국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오히려 反美(반미)성향인 김대중 정권부터는 비 미국전문가를 파견함으로써 더욱 미국과는 소원해지고 말았다. 국정원 내에서도 영어조차 못하거나 미국과는 하등의 전문 식견이 없는 L씨(9기)를 미국에, O씨(15기)를 캐나다 요원으로, K씨를 태국요원으로 파견함으로써 현지 교민들부터 빈축을 사기도 했다. 언어소통은 물론. 정보와 능력부족으로 외교활동에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대신 미국전문가로 세 차례에 걸쳐 10여 년간 근무했던 소위 A급 요원으로 알려졌던 X씨를 엉뚱한 러시아대사관에 보냈다. 그러나 능력 있는 X씨는 러시아에서도 역시 A급답게 두각(역할)을 나타냈다. 러시아 푸틴대통령에게까지 능력을 인정받아 가히 세계 10대 심도 있는 정보협력국가로 오히려 중국을 제치고 자유주의국가로는 미국, 프랑스 등과 5개국 속에 한국을 끼게 한 성과를 냈다. 국제간에도 본인의 능력의 차이는 그만큼 차별이 났던 것이다.
<해외파견관 배치에도 美國 홀대>
김만복 전 국정원장이 해외 공작국 국장보좌관을 지낸 후 이에 대한 보은 인사차원에서 미국 워싱턴대사관에 파견(영전)됐을 때 일이다. 영어소통이 되지 않아 말단 한직인 교포담당업무를 맡겼는데 여기에서도 금전관계 등 교포사회에서 평판이 좋지 않아 결국 도중하차한 일이 있었다. 일심회 사건으로 물러난 김승규 원장은 후임에 김만복 씨가 내정됐다는 소식을 듣고 공식석상에서 김만복은 안 된다. 부적합 인물이라고 대놓고 말한 바 있었다. 김만복 전 원장은 재직 시 돌출행동 등 많은 입에 오르내렸던 인물이다. 이번 국가정보원 강제퇴직 진상규명촉구위원회의 청원 가운데는 김만복 전 원장의 국정원내 과거사위원회 간사직을 이용한 내부문제점을 들춰낸 것을 비롯하여 청와대 386들에게 떡값으로 지불한 천문학적 국고낭비 비리를 규명하라는 항목이 들어있다. 관심을 끌게 하는 대목이다.
<국정원내 핵심멤버 비밀 자문클럽 7인회>
노무현 정권 출범 시 국정원 실세로 들어온 당시 서동만 기조실장이 서울대 동기 및 경기고 출신 동기생으로 조직한 국정원 개혁을 위한다는 핵심 멤버 비밀 자문클럽 7인회란 조직이 있었다. 이 조직의 대표는 전옥현 씨(16기)였다. 멤버들의 성향과 지향역할을 감안할 때 집권자의 복심역할을 통해 국정원내 세력주도를 꾀한 출세 지향적 성격의 조직이었다. 즉 청와대 실세들의 핵심복안들을 국정원 조직을 통해 대임하는 등 정보기관의 주도권 장악을 꾀하고자 했던 것이다. 노 정권의 실세로 등장한 서 기조실장이 구상한 국정원내 인사개혁안으로 (인사개입까지) 밀어붙이다 보니 국정원 내부에서는 인사개혁이 아니라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반발에 부딪치고, 끝내 조직 내 극한 갈등으로 비화됐다. 결국 수장인 고영구 원장이 칼을 빼들어 결국 서동만 기조실장이 퇴진하는 사태로 한바탕 분란만 일으킨 채 와해되고 말았다.
그런데 노무현 정권에 밀착해 물의를 빚어 국정원 내에서 터부시됐던 전옥현은 좌파정권 종식 후에도 이명박 정권에 발탁되어 국정원에 중요한 포지션인 해외차장 자리에 앉아있다. 국정원 안에서는 전 차장의 국정원 입성을 두고 이명박 정권의 핵심 실세의 작용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로 알려져 있다. 국정원의 과거뿐만 아니라 오늘의 일그러진 잔영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국정원을 바라보는 국민들은 조직의 대대적인 혁신을 주문하고 있다. 정보기관에 정보가 없다. 상층부에는 머리만 득실거릴 뿐, 하층부에는 일꾼이 움직이지 않는다. 조직의 존립의의가 위험수위에 이르렀다는 등 진통의 진단이 쏟아지고 있다. 궁극적으로 통치권자인 이명박 대통령과 조직의 수장인 김성호 원장의 결단을 기대하는 눈치다. 화급하다는 분위기이다.
<국정원 개혁 미국사례를 보고 해법 찾아야>
1975년 인권을 주장한 미국 카터 대통령은 정보기관인 CIA기구를 대폭 축소해 버렸다. 정보기능을 과소평가했다는 것이다. 인권에 밀려 정보기관이 죽어버린 것이다. 이 와중에 이란에서 반미시위가 일어났다. 폭도들은 미 대사관을 점령했다. 업무가 마비됐었다. 이런데도 미국 본토에서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3일이 지나서야 알아채고 허둥거렸다. 인권만 부르짖던 카터의 정보먹통의 허구가 그대로 드러났던 것이다. 그래도 카터는 대권에 미련을 두고 재출마하여 공화당 레이건과 맞붙었다. 그러나 미국 국민들은 카터를 버렸다. 레이건은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아래 미 선거사상 최다득표로 당선됐던 것이다. 레이건은 평소에 강한 미국, 위대한 미국건설을 표방하면서 미 CIA의 원상복구를 서둘렀다. 하지만 무너진 정보기능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었다. 레이건은 카터가 내쫓았던 원로 정보관들을 다시 영입(자문위원 또는 고문관)함으로써 오늘의 강한 미국을 부활시킬 수 있었다. 레이건은 현명한 선택을 했다.
결국 미국은 정보는 국력이다라고 외치고 이를 실현시킴으로써 오늘날 최대 강대국의 기초를 다졌다. 우리 국정원 정문에는 정보는 국력이다라는 현판이 내걸려 있다. 물론 이 문구는 국정원의 院訓(원훈)이다.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정보의 본산인 우리 국정원이 해야 할 길에 해법이 보인다.현직 국내파트 핵심의 한 간부는 김성호 국정원장이 부임이후 간첩을 잡으라는 등 수사요원들을 닦달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부하들로부터 자신이 깨끗하지 못하면서 무슨 소리냐고 시큰둥 한다고 전한다. 별말은 아닌데도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고 신신 당부한다. 차라리 말을 하지 말 것이지 너무 답답해 보인다.
국익을 위해 필리핀에서 다수확 볍씨를 혓바닥에 숨겨 들어온 선배들의 아부할 줄 모르고 공익에 목숨을 걸었던 살신성인 정신을 받들어야 할 때이다. 우리 국정원의 일대개혁은 누구보다 김성호 국정원장의 결심에 달렸다고 본다.
<잃어버린 15년 前職정보원들의 실토>
小韓民國, 人民民國 다된 大韓民國
평양 아닌 서울 말 쓰는 이웃 아저씨 같은 조선로동당 공작원 김영삼 시절부터 권력핵심에 침투 시민단체 일부는 공작원소굴 김길상 / 전직정보원
김영삼 집권 이래 15년 대한민국이 차츰 小韓民國(소한민국), 인민민국이 되어오니 사람들은 우리나라를 좌파정권, 좌파세상이 되었다고 한탄하고 김정일 지령에 따라 움직였다가 문제가 일어나면 지적을 받은 좌익분자들은 색깔론 펴지 마라. 소설 같은 소리 하지마라 펄쩍 뛰며 반격한다.
<공작원들이 먼저 손댄 곳은 국사편찬위원회>
사실은 지금이 좌파세상이 아니라 김정일 공작원들의 세상이 되었다는 것을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고 있다. 지난 세월 중앙정보부, 안전기획부, 국가정보원과 경찰 정보 대공부서, 보안사령부, 기무사령부 등 군 對共(대공)부서에서 북한 공작원 색출에 일생을 바쳐온 사람들은 김대중 시대부터 울분을 가슴에 삼키며 살아왔다. 전직 정보요원들의 눈에는 지난날 증거가 불충분해서 또는 김영삼 때부터 그 사람이 어때서? 좋은 사람이니 손대지 마시라 압력 때문에 잡지 못한 북한공작원 혐의자들이 많았다. 그들이 10년 전부터 정부, 정당, 국회는 물론 모든 분야에서 중요한 인물로 등장했다. 소한민국 인민민국이 등장했던 것이다. 전직 정보요원들은 그동안 몇 사람씩 등산이나 회식을 하면서 후배현직자의 소식도 들으면서 망해가는 나라의 꼴을 한탄했다.조용한 기회에 또래들만 모여서 나눈 이야기들을 여기에 옮겨본다.
<광주사태가 끌어드린 공작원들>
우리나라 국가안보가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은 전두환 정권부터의 일이었다. 12.12와 광주사태 이래 민주화 운동이 격해지는 틈새에 북한공작원들이 대량 유입되고 포섭된 운동권의 수가 늘어났다.
공작원들은 먼저 국사편찬위원회를 주물러서 중. 고등학교 교과서의 근대사 기술을 반공 반북에서 친공 친북으로 슬쩍 돌려버렸다. 80년 후반에서 2006년까지 초.중.고, 대학의 역사교재가 친공 친북은 물론 반국가적 서술로 바뀌어서 이제 40대 초반의 젊은이들은 친북 반미성향이 높고 앞으로 세월이 갈수록 역사를 바로 알고 있는 세대는 죽어가니 남조선 혁명의 기운은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김대중 시대에 와서 합법화 시켜준 9만 명 「교원단체」를 거느린 김정일 공작부의 마음은 느긋하다. 노태우 정권에 들어서서는 만사가 물태우로 진행되어 조선로동당의 서울 판 기관지라 할 신문이 서울에 터를 잡아 지금은 어엿한 전국종합지가 되었다.
문화 분야 공작원들은 이어서 영화제작에도 침투, 소위 남부군이란 친공 영화가 해방직후 김일성 도당에 의해 남파된 수천 명의 공산게릴라와 남쪽에서 합세한 수천 명의 공비들이 영웅처럼 묘사되고 무자비하고 악랄한 군경에 의해 소탕되는 장면으로 교묘하게 꾸며내니 관객들이 공산게릴라를 동정하고 군경을 악당으로 인식하는 사태를 야기하고 있기도 하다. 김정일 일당은 남파공작원들 가운데 교육계 문화계 담당자들에게 무더기로 훈장을 주었다.
<공작원들은 김영삼 시대부터 활개 치기 시작>
1993년 김영삼 시대가 되자 공작원 일부는 청와대까지 침투, 국가안전기획부와 군 정보기관, 경찰정보부서의 대공요원들은 이상한 기류에 휩싸였다. 대통령 취임식에서 김영삼은 취임사를 통해 그 어떤 동맹국보다도 민족(북한)이 우선한다고 정신 나간 소리를 한 것이다. 내빈석에 있던 각국 대사들 특히 미국대사와 UN군 사령관은 안색이 달라지며 김영삼을 쳐다보는 장면이 생중계로 방영되어 국민을 놀라게 했다. 사실은 김영삼 시대부터 남쪽의 공작원들은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공작원용 의자를 포착해서 수사망을 좁혀 가면 어느새 청와대 수석비서관이니 무슨 비서관이니 하는 자들이 정보기관 상부를 통하여 브레이크를 걸어왔다.당신들 지금 누구누구를 이상하다면서 수사를 하는 모양인데 그분이 어때서요? 그런 착한 분을 괴롭히지 마시오. 증거수집 일보 전에 그런 지시가 떨어지니 요원들은 분통을 터뜨리며 상관에게 하소연했으나 상관은 허~! 그만 하라니까. 청와대에서 내려온 지시를 누가 거역하겠어요. 마! 우리 몸조심 합시다. 수사요원들은 차츰 무사안일주의로 흘러서 대북 대공 수사기능은 마비되어 갔다.
1998년 김대중이 집권하자 대북 수사요원들은 대량 숙청되고 대북보안부서는 거의 해체돼 버렸다.
안전기획부는 그 이름도 국가정보원이라 개칭하고 경찰청과 시도 경찰청 경찰서의 보안과는 정보보안과로 개편, 이름만 남기고 인원을 1/10로 감축해 버렸다. 임무도 대북 대공이 아닌 대 야당, 대 반북인사, 친미인사의 동향을 감시하거나 지역사회의 시위를 다루는 부서가 되었다. 그 동안 마을마다 거리마다 걸려있던 간첩용의자는 정보원 군부대 경찰에 신고하여 애국 합시다. 간판은 차츰 철거되고 남북 동일민족 겨레여 한마음으로 평화통일 조국번영을 이룩합시다.로 교체되었다. 교활한 늑대 김정일의 구미에 맞는 슬로건이 지하철 형광판이나 대중교통시설 등에 등장했다. 검찰청의 공안부서는 노무현시대에 와서도 겨우 유지되어 왔으나 2006년 2월에 와서는 검찰청 대폭인사를 계기로 공안 전담 검사들이 대폭 좌천됨으로써 와해되고 검찰공안부도 「공공형사부」로 개칭되었다.
<시민단체 일부는 공작원의 소굴>
많은 시민단체 가운데 일부는 공작원들의 소굴 단체란 것을 전 현직 정보요원들은 다 알고 있다.
XX문제연구소 000연합 등 그럴듯한 이름을 붙이고 무슨 부장 무슨 국장이란 명함을 가진 공작원들은 평양사투리를 쓰는 남파간첩의 인상을 송두리 채 지우고 거의가 남쪽 토착용어를 쓰는 이웃 아저씨들이 되었다. 그들은 이제 대담하게도 연고가 있는 사람을 음식점에 초대하거나 친목모임에서 알게된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면서 접근한다.남조선의 인민혁명은 예상외로 빨리 진전되고 있다. 당신은 여태껏 수구골통 반민족적 반통일적 인간들 말에 속아서 민족통일의 그날이 눈앞에 다가왔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다고, 설득하고 김정일 도당을 규탄하는 글을 신문잡지에 실었거나 여느 모임에서 김정일. 김대중, 노무현을 규탄하는 언동을 한 사람에게는 조용히 접근 음식대접을 하면서 협박도 했다.
선생님이 여태껏 잡지에 어떤 글을 썼고 어느 모임에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자세히 분석한 결과 선생님이 지금껏 수구골통이 되어 반민족적 반통일적 언동을 해 오신 것을 잘 파악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이제 우리나라의 정세를 잘 살펴보십시오. 우리를 억압하고 남북통일을 가로막고 있던 미군이 이제 차츰 떠나면서 우리 한겨레는 머지않아 평화적으로 통일이 됩니다. 우리 서로 협조해서 민족통일을 앞당깁시다. 선생님이 우리에게 협조해 주시면 경제적으로도 도움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음식비를 계산할 때 펼친 지갑에는 1백만 원짜리 수표가 수십 장 들어있어 80년대 이전에는 공작비가 없어 허덕이던 북한출신 공작원과는 격세지감이 있다. 공작원의 활동은 노무현시대에 들어서 더욱 활발해졌다. 선후배, 동창, 동향, 친구 등의 모임을 두루 돌면서 바람잡이를 시켜서 그 단체의 간부로 천거되면 백만 원 수표를 한두 장 기부금으로 내고 만장의 박수갈채를 받는다.
<기부금도 내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 부르고 갈채 받아>
이어서 인사말씀 한마디 하시라는 요청이 있으면저는 XX문제연구소 XX부장을 맡고 있습니다. 우리 연구소는 우리가 같은 핏줄로서 하루 빨리 조국이 평화적으로 통일이 되도록 힘쓰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민족적 통일과업에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공손하게 머리를 숙인다. 술이 거나해져 모임이 끝나면 가까운 노래방으로 간부들을 모시고 가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게 하고 스테이지에 뛰어나와서 큰 박수를 유도해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연달아 외쳐 부른다.통일을 위하여! 술잔을 돌리며 건배를 제창하기도 하니 사람들은 지금의 정치 사회 문화정세가 이대로 평화적인 남북통일로 이어지는 것 같은 환상에 빠지게 된다.
지난날 자기 뒤를 밟으며 위협을 주던 옛 정보원이 이제는 이빨 빠진 늑대가 되자 고소하다는 눈치를 보이는 어느 공작원은 어느 날 초라한 전직 정보원에게 이런 힌트를 주었다.옛날의 통일 일꾼들은 북에서 대남 침투교육을 받고 얼마간의 공작금을 가지고 내려와서 무척 고전을 했어요. 김영삼 시대까지는 몸조심과 가난에 허덕이며 더러는 낙심해서 노태우 때 전까지는 그랬다고 해요.또 못사는 사람도 있지만 잘사는 사람들은 흥청망청 잘살고 어디로 가나 자유롭고 평화로워 보여서 당황을 했다고도 합니다. 그래도 그들이 한 가지 믿는 것은 북에 남겨놓고 온 가족들이 어려운 북한에서도 특별한 대우를 받고 김정일 지도자의 따뜻한 배려를 받고 있다는 점에서 충성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남쪽에서 공로를 세우면 인민의 영웅이 되고 인민훈장, 김일성 훈장을 받으니 그 하나 희망을 가지고 혁명투쟁에 나섰던 거죠. 그런데 이제는 북에서 그런 혁명일꾼 안 보내 와도 됩니다. 한국사회에서 그 지독한 반공교육 반북교육을 받던 사람까지도 지난날 반공인식의 잘못을 크게 깨닫고 이 땅에서 미군을 몰아내고 우리민족끼리 통일해서 잘 살아보자고 나서니 말이오. 그리고 90년대부터 본격화된 혁명적 역사교육으로 초등학교부터 친공 친북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온 40대 이하 세대들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갈망하게 되었지요.자랑스럽게 말했다.
<북에서는 시험도 선거도 없고 충성만 다 하면 돼요>
그런데 지난날 회사의 하급직원으로 있던 자가 김대중 시대에 와서 돈을 물 쓰듯 쓰며 소위 통일일꾼, 혁명일꾼을 자칭하게 된 것은 어찌된 셈인가? 공작원의 친구로서 늘 상 음식대접을 받아오면서도 마음이 약해서 선뜻 그들의 유혹에 끌리지 않던 사람의 이야기는 이렇다.망할 놈의 세상 이래가지고는 당신도 못살겠지요. 당신은 지금 돈이 있나? 공부를 잘해서 실력이 있나? 자본주의 미 제국주의 식민정치 체제하에서는 우리가 아무리 날뛰어 보았자 이 사회의 밑바닥 신세를 면할 수가 없어요. 북한에서는 요 돈도 학식도 다 소용이 없어요. 조선로동당에 대한 충성 김정일 동지와 조국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공을 세웠느냐에 따라 인민의 사회적 계급적 신분이 결정되거든요. 여기서는 취직하나 하려해도 하늘의 별 따기로 시험이나 경쟁이 심하고 특히 높은 자리에 오르려면 어려운 시험을 돌파하거나 선거를 치러야 하는데 북한 사회에서는 시험도 선거도 없고 조국에 충성만 다하면 우대를 받습니다.
미군부대 앞에 가서미군 물러가라 양키 고우 홈을 외치거나 한미군의 전투연습장 앞에서 전쟁 놀음 중단하라고 팔을 흔드는 인원동원에 몇 번 불려나가며 용돈도 얻고 음식도 대접받은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는 자가 북한의 현지채용 공작원이라는 내막을 잘 모르고 있었다. 이런 선동을 하는 자는 지난날 남의 셋방살이를 하며 공작비도 생활비도 아끼던 옛날의 간첩이 아니다. 김대중 시대에 와서 오늘까지 북한에 보내진 금품이 공식으로도 10조원이 넘는다지만 남한 내의 공작부서가 공작원들에게 공급해온 자금도 막대한 듯 그들은 수억 짜리 호화 아파트에 살며 옷차림도 단정하다. 하나 특징은 공작원으로 보이는 자들의 용모가 대체로 광대뼈가 붉어져 나오거나 눈빛이 범죄인 형, 살인자형으로 날카로운 점이다. 옛 정보원들의 공통 의견은 삼성그룹에서 간부사원을 채용할 때 경영자가 신입생의 관상을 살펴서 인격자를 뽑는다는데 북한 공작부의 한국현지 지휘부도 공작원을 포섭할 때 먼저 관상부터 보는 것 같다고 한다.
<남한 현지 지도부, 공작원 포섭할 때 관상부터 본다.>
노무현 시대에 들어서서 정치도, 경제도, 국방도, 사법도 엉망이 되어 실업자 홍수가 터진 마당에 인생의 낙오자요, 빈 털털이가 되어 거리를 헤매는 사람들 가운데 관상 적으로 보아 범죄형에 가까운 자는 이런 포섭에 쉽게 넘어갈 것 같다. 하루는 옛 동료들이 택시를 타고 시내를 달리는데 노무현의 실정과 작전통제권 이관문제를 화제로 삼았더니 40대의 택시기사가 불쑥 끼어들더라고 했다.손님, 지금 우리 경제가 어렵다고 하지만 그거야 시대의 조류가 그래서이지 노대통령이야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겁니다.
또 작전통제권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것은 이 땅의 미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내고 우리민족이 완전히 자주 독립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노대통령의 조치가 이미 늦은 것 아닙니까?
깜짝 놀란 친구들이보시오. 손님들이 우리끼리 이야기하는데 택시기사가 나서다니 누가 당신한테 질문을 했소?손님들 말씀을 듣자하니 잘하고 있는 현 정권을 비방하고 조국의 자주통일을 거역하는 이야기가 나와서 나도 한마디 했어요.뒤를 돌아보는 기사의 인상이 범죄형이라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차를 내렸다고 한다. 공작원들의 하수인들이 하나씩 늘어나고 있는 현장이었다. 김대중, 노무현시대 몇 차례에 걸쳐 대북 대공 수사요원들이 숙청을 당했지만 아직 정보기관 내에는 극히 소수이긴 하나 애국적 정보요원들이 남아있다. 그들은 퇴진한 선배들을 만나 어쩌다 술잔들을 나누며 한탄한다.만약 다음에 반북 반공. 민주정권이 들어선다면 지금 양지에서 설치고 있는 공작원의 80%가 일망타진 될 수 있을 겁니다.수천 명에 달하는 공작원들의 상당수가 북으로 도주하거나 이라크 사태 같은 내전 혼란을 부추기기는 하겠지만 김대중, 노무현시대 이전에 비해 그 활동이 신문잡지와 책, 문건에 다 나타나 있거든요. 옛날 정황은 인정되는데 증거가 없어 못 잡았거나 김영삼 시대에 청와대 간섭으로 잡지 못한 사람들의 상당수가 지금은 화려한 무대 위에 등장을 해서 세상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선배님! 우리는 퇴근할 때 아! 오늘도 양심에 그리 내키지 않는 일을 하면서 바쁜 하루를 보냈구나. 그래도 이 자리를 그만둘 수 없는 것은 내가 이 자리에 있어서 그래도 나라의 안보가 좀 덜 무너지고 있지 않은가? 또 이 취직난 때 가족을 먹여 살릴 길이 따로 없으니! 한탄을 했습니다.
<지령 받으러 평양 갈 필요 없어져 서울에 현지본부 설치, 매일 매시 지침>
그런데 2005년 중반 노무현이 호남 출신이라고 믿어서 정보원장에 임명한 김승규씨가 부임하자 우리나라의 국운도 다하지 않았음이 입증되었다. 386공작원 무리들의 집요한 방해를 헤치고 공작원의 몇 사람을 포착한 애국 정보원들을 격려하여 모처럼 대공 대북 수사에 한때나마 박차를 가했던 것이다. 후배 전 현직요원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하급공작원들이 북의 지령을 받느라 북으로 갔던 시대는 지나갔다. 대남 공작조직의 1부 현지본부가 서울에 설치되어 매일 매시의 활동지침과 결과보고가 북한 아닌 서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대남공작은 김정일 총서기 → 로동당 대남 담당 → 당 대남 연락 부 비서 →통일전선 부 작전 부 → 중앙당 35호실이 분담하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한국 민주전선 중앙위원회 ○남조선문제연구소 등
엉터리 간판을 내세워 남북장관급회담, 경제교류회담 등 회담도 유도해서 금품을 얻어내고 대외 선전에 활용하고 있다. 회담 때마다 북측은 공작부의 수십 년 묵은 도사들을 대표로 내세워 남쪽의 신출내기 대표들을 고양이가 쥐를 갖고 놀듯이 갖고 논다. 만날 때마다 무슨 큰 선심이나 쓰듯이 생색을 내면서 취할 것은 다 취하고 양보는 하지 않는다. 어쩌다 남쪽에서 더 이상 양보를 하지 않을 때는 자리를 박차고 튀어 나가는데 속으로는 저네들의 마음이 더 답답하다. 상부의 문책이 두렵기 때문이다. 통일전선 부는 한국사정조사 연구에 수십 년 종사해온 골통품 같은 전문가들이 3,600명이상 있어 남쪽 사정을 꿰뚫어보고 있다.
<서울 현지 지휘부에 北(북) 서열 20번 내외거물책임자 상주해>
1990년대부터 남쪽의 종교를 허물어 버릴 술책으로 「조선 그리스도 연맹」 「조선천주교위원회」 같은 유령단체까지 꾸며서 대외적으로 종교의 자유가 있는 체 사기를 치고 있다. 예수를 진짜로 믿는 자는 총살하거나 정치범수용소에 보내면서 엉터리 교회를 여러 곳 세워 노회한 전술을 펴고 있다. 1990년대 남파공작원들이 북한 공작부와 교신한 무선전화는 하루 10만 건 내외였다. 그것이 김대중 시대에 와서는 한때 하루 50만 건을 넘다가 노무현시대에 와서는 1만 건 이하로 감소했다. e-메일의 활용과 함께 남한 현지 지휘본부가 서울에 설치되고 북한 정권에서도 서열이 20번내외쯤 가는 거물책임자가 서울에 상주하게 된 것 같다.
1975년 베트남 민족이 미군의 철수로 망할 때 북 베트남 인민공화국의 대남 공작 부는 현지 지휘부를 수도 사이공에 두고 공작부의 차장급 거물이 정부청사에 상주하면서 대통령궁과 정부 각 부처. 국회, 법원과 군부대까지 침투해있던 공작원들을 지휘해온 사례를 그대로 따르는 것 같다.1990년대 초 동부독일이 무너지고 서독공화국이 동독 인민공화국을 흡수통일하기 직전까지 서독정부 산하에는 1만여 명의 대 서독공작원들이 날뛰고 있었는데 수상비서실의 기밀문서 담당비서까지 공작원이었음이 발각되자 수상이 사임했다. 우리나라도 6.25이후 북한에서 보내온 간첩이 약 2만 명. 더러는 검거되고 더러는 자수하고 또 일부는 북쪽 선전이 거짓임을 알고도 자수하면 죽는다하여 가져온 공작금으로 지방에 숨어서 정착하는 등 남은 공작원이 수천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전직 정보요원들은 우리나라의 사정이 당시의 월남이나 독일보다 훨씬 심각하여 행정 입법 사법 언론 문화 등 각 분야는 물론 심지어 군부와 정보기관에도 침투해 있다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공작원들이 큰 소리를 치고 안주하고 있는 곳은 각 기관, 시민단체 등 광범위하며 그동안 혁명과업 수행에 바빴다.
공작원들이 안주하고 아지트로 삼고 있는 소위 시민단체는 대체로 조국통일, 민족연합, 평화통일, 민주민족청년, 민족문제연구, 한겨레 운운의 간판을 내걸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이 국민 아닌 정부, 정부 아닌 공작요원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전 현직 정보요원들과 밀접하게 협조해온 미국의 CIA외에는 잘 모르고 있다.
<공작원이 安住하는 시민단체와 각 공공기관>
김대중 시대부터 정권의 요소마다 김정일의 공작원이 자리를 잡도록 도와주면서 공산통일이 이룩되면 김대중도 노무현도 소위 통일조국의 원로급 유공자로 받들어질 줄 믿은 듯하다. 야당이 있긴 하는데 우리나라가 공작원에 의하여 엄밀히 공산화 수순을 밟고 있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좌파정권의 혁명시책에 안타까워하고만 있었다. 심지어 수뇌부까지 호남에 가서는 김대중을 찬양하여 95% 단결력을 과시하는 호남인들에게 한나라 표를 애걸하고 6.25를 모르는 소장파는 때로 북한에 동조한다. 한 두 사람 국회의원은 공작원 포섭자로 옛정보원들이 지목하고 있다. 멍청한 야당은 김정일의 지령에 의해 추진된 신문법, 사학법, 과거사캐기법 등등에도 동조하여, 있으나마나한 야당이 되었는데 한 가지 최후의 보루인 국가보안법 개폐에서는 애국지식인들의 결사저지로 법을 지켜 와서 김정일을 두려워하지 않는 기독교 장로인 국정원장에 의해 한때 북한 공작원을 검거했다. 그렇게 기력이 없는 오합지졸의 야당도 노무현정부가 워낙 망나니짓만 함으로써 민심을 잃어 반사이익을 얻었다.
여기에 노무현은 한 가지 큰 실수를 저질렀다. 김대중이 국가정보원장에, 공작원에 준한 친북 친공 자를 임명함으로써 공작원수사, 검거를 잘 막아왔는데 노는 애국정신이 투철한 검찰출신자를 정보원장에 임명한 것이다. 386실권자와 공작원들의 치열한 방해에도 피라미 급이나 공작원 일당들을 검거, 그것을 당당히 세상에 밝혔다. 노씨 일당이 크게 화를 내서 김 원장은 물러났지만 정권교체가 1년 남짓 남았을 뿐이라 대공수사요원들은 해임을 각오하고 수사에 전력할 수도 있게 되었는데 사실은 원장이 바뀌곤 꼼짝을 못했다. 1975년까지 당시 중앙정보부를 방문한 사람이나 중앙정보학교 고급 공무원반(1주 또는 2주짜리 통원교육)을 위한 북한영화 상영 때 강사가 미리 주의를 주었다.
지금부터 여러분이 보시는 북한의 평양. 남포 등지의 공장과 아파트 등은 우리 남쪽에 비해서 훨씬 잘돼있고 평양시민들은 서울시민보다 더 잘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도 5.16이후 10여년 이제 북한을 따라잡고 있어 75년을 고비로 우리가 우위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북한군의 작전훈련이나 퍼레이드에서 펼쳐지는 수만 명 북한군의 호전적 자세와 각종 신형무기 행진은 한국 국민으로서 공포의 대상이지요. 그러나 적들의 병력과 신무기가 비록 우리나라의 두 배이기는 해도 우리는 한미방위조약과 주한미군 7만(당시)이 있어 저들이 감히 우리를 넘볼 수 없습니다. 다만 이런 화면에 위축되어 보신 내용을 일반국민에게 흘려서는 안 됩니다.박정희 대통령의 놀라운 영도력으로 경제개발과 새마을운동에 일부 불평 인사 외 국민 모두가 잘살아보자고 나서니 남북의 경제상황은 역전되었다. 그 후 남북 간의 대화 때 자리를 같이했던 옛 정보요원 눈에 비치는 북쪽 대표들의 자세는 묘했다.
<김대중 정권 이래 고자세로 변한 북측대표>
수행원인 비밀경찰(노동당 정치 보위부) 감시요원이 있을 때는 고자세를 취하던 북쪽대표들이 요원의 눈이 없으면 인간 본연의 양심으로 돌아가(?) 남쪽대표들에게 저 자세로 예의를 갖추더라는 것이다.
당시 언론보도에서도 남쪽이 북을 흡수통일 한다.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을 하니 그럴 만 했다.
그런데 남북 간의 국력이 30대 1이상 벌어진 1990년대 말 김대중 시대가 되자 거지같은 북의 대표들은 오히려 고자세를 취하고 툭하면 당신네 대통령은 무엇이라도 북쪽의 형제들이 달라고 하면 주라고 지시를 했지 않소? 고자세로 나오면 어떤 자는 이제 북과 남의 평화통일은 머지않아요. 조국 통일의 위대한 혁명과업에 적극 협력해 주기를 바라오. 노골적으로 큰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그것이 노무현 시대에 들어서자 상황은 묘하게 되었다. 북쪽의 대표나 공작원도 남쪽 대표가 실세일 경우 조심스럽게 대해왔다.
남쪽의 회담대표가 바로 북쪽의 공작원인 듯 정식회담에서도 서로 웃음보가 터지고 북의 요구사항이 커지면서 남쪽이 쉽게 수락하는 것은 물론 공식. 비공식 시간이나 심지어 기자들이 취재하는 장면에서도 동지여러분! 이제 우리는 평화통일을 위해 같은 운명을 지닌 동지입니다. 공산통일이 방금이라도 이루어진 것처럼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공산북한에서도 신흥재벌이 생기고 있다. 위조지폐는 북한의 지폐공장과 멀지 않은 곳에 공장이 있어 인쇄의 정밀성에 비추어 조잡한 인민폐 제조 기계보다 월등히 정밀하게 찍혀 나오고 있다. 보위부 비밀요원이 호위하는 가운데 진행되는 마약제조와 가짜 미국담배, 국제밀수 등 사업은 인민들의 각종 민원과 중국지역 상거래 때 받는 뇌물과 함께 북쪽 보위부원들을 신흥 재벌로 키우고 있다.
보위부원들은 또 남쪽의 상납식량과 각종 물자도 군부대로 보내고 남은 것을 빼돌려 암시장에 흘리면서 수지를 맞추고 있는데 이산가족 비밀상봉 주선업도 벌려 재미를 보고 있다. 6.25사변을 일으켜 300만 인명을 앗아간 김일성 도당을 피해서 남쪽으로 피난한 300만 가운데 아직도 살아남은 난민 1세대는 북한에 두고 온 혈족을 죽기 전에 만나고자 애를 태우고 있다.
<북쪽 가족들 어떻게 된다는 것 각오하시오>
김정일 도당은 그것을 미끼로 큰 선심이나 쓰는 것처럼 100명씩 상봉행사를 벌이고 있는데 북쪽의 동포들은 남쪽의 혈족을 만나서 생활비 얻어서 좋고 또 못 먹어 야윈 몰골을 고친다며 상봉 두 달 전부터 호텔에 불러서 흰 쌀밥과 불고기로 살을 찌워 남쪽의 카메라 앞에 내세우니 수명이 연장되어 좋아한다.
여기에 보위부 요원의 좋은 부업꺼리가 생겼다. 하늘의 별따기 보다 어려운 이산가족 상봉에 지친 나머지 재력이 있는 월남노인으로부터 수억 원의 상납을 받고 비밀리에 북쪽 혈육을 만나게 해주는 것이다.
비밀을 엄수하되 만약 이 사실이 밝혀지면 당신의 북쪽 가족들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각오하시오
서약서를 쓰고 북의 가족들을 만나고 온 서울의 어느 갑부는 돌아온 후 당분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한다.
북경에 가니까 마중나온 요원이 북한주민의 임시여권을 주며 같이 북에 들어갔다. 도청소재지부터 고향까지는 승용차에 태워갔다. XX군 XX리 마을, 한참 그리운 집을 멀리서 바라보게 하고는 도청소재지의 어느 숙소에 가니 처와 동생들이 기다리고 있어 통곡의 소란이 벌어졌다. 몇 억 원을 쓴 덕택으로 북한을 다녀온 그 부자 노인은 입국 시와 같은 방법으로 북경을 거쳐 돌아왔는데 입이 얼어붙었다.
<김대중. 노무현 시대부터 혁명기운 급속확산, 미군만 철수하면 통일조국 이룩.>
서약서가 문제가 아니었다. 돌아오는 날 아침, 요원은 남쪽 정세 브리핑과 함께 각종 자료와 사진을 보이며 자세히 해주었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남쪽의 모든 정세는 그 이튿날 아침 김정일에게 보고되고 있다.
2. 그의 고향 XX군 출신 월남인사의 누구는 지금 무슨 사업을 하고 어떻게 지내고 있으며 어느 X은 반동분자가 되어 남조선 인민들을 반공 반통일의 길로 이끌고 있다.
3. 동무도 여기 오기 전에는 그동안 무엇 무엇을 했고 언제 어디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동무가 돌아간 후에도 우리는 동무의 일상 언동을 지켜보고 있을테니 통일혁명에 협조해 주기 바란다.
4. 김대중, 노무현 시대부터 남조선의 혁명기운은 급속히 확산되고 있으며 앞으로 주한 미군만 철수하면 통일된 조국에 김정일 지도자가 당당히 서울에 입성할 것이다.
5. 그날을 위해 혁명에 협조해 주시고 김정일 입성 시에는 북조선 출신자들도 거리에 뛰어나와 만세를 부르도록 유도해 주시오소름이 끼친 그는 그 후 당분간 다정한 친구를 만나도 깜짝 놀라며 혹 북한에 보고가 될까봐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미국의 CIA나 군 정보부대는 김영삼 시대 초까지 긴밀하게 협조해오던 한. 미 정보교환을 포기했다. 모처럼 믿고 제공한 정보가 수 일 내에 김정일에게 알려진 사례가 여러 건 생기자 미국은 아예 자위책을 쓴 것이다. 한국과 중국이 국교를 맺은 이래 처음에는 북한공작원에 준해서 경계의 대상이던 중국공산당 공작원들은 김대중 시대 이래 더러 정보를 교환하는 사이가 되었다. 북한의 핵실험이 터지면서 서로 정보를 교환하는 일도 생겼다.
<전직 정보원들의 김일성의 사망내막>
다정하게 지내는 어느 중국 정보원은 우리 정보원에게 지난날 극비정보의 정확성을 재확인시켜 주기도 했다. 당시 김일성은 외국 원수와의 만남 외에는 모든 일을 김정일에게 맡기고 있다가 김영삼과의 회담에 쓸 잔꾀를 구상하며 한가로이 평양에서 지방으로 차를 달리고 있었다. 어느 산촌 길에서 소변을 본 김은 마침 언덕위로 가는데 초라한 초가가 보여서 들어갔더니 어두컴컴한 부엌에 풀 냄새가 났다. 솥뚜껑을 열어보니 보리쌀알과 함께 이름도 모르는 채소(흔히 있는 잡초)가 삶아지고 있어 찌그러진 방문을 열어보니 초라한 여인이 누워 있다가 부시시 일어났다. 솥에 끓이고 있는 것이 여인의 저녁식사란 소리를 듣고 그래도 백성을 위한 양심은 남았었는지 김은 놀라서 무선전화로 김정일을 불렀다.
너는 내가 전권을 맡길 때 인민을 배불리 먹이겠다고 약속했지. 그런데 이게 뭐야 여기 산골의 어느 농가에 들어가 보니 인민이 굶고 있지 않아?울화통이 치민 김은 즉시 차를 평양으로 돌리며 배신감에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측근 호위가 김정일 측근에게 즉시 심장 전문 의사를 차가 가는 방향으로, 보내라고 하자 김정일은 주치의 출발을 일부러 늦췄다. 헬리콥터의 도착이 늦어지니 심장병은 더 악화되어 평양 궁전에 도착한 김일성은 아들 정일에게 심장의 고통을 참으며 너를 믿은 내가 잘못이다. 인민들이 다 잘 살고 있다고 입버릇처럼 보고하더니 현지 인민들은 저렇게 굶고 있어. 너 가지고는 안 되겠다. 너의 동생 평일이(외국에 대사로 쫓겨나가 있음)를 불러 들여야겠다며 떠들었다. 김정일은 아비를 진정시키며 심장병을 고쳐드리기보다 오히려 말대꾸를 되풀이하니 궁전의 밀실에서는 부자간에 말싸움이 벌어지다가 주치의의 치료도 보람이 없이 아비가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文件發送 : 國家中興運動中央會 2008. 7. 6.
첫댓글 개쉑기들 다 잡아 가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