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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raham Lincoln, 1809년 2월 12일~1865년 4월 15일).
남북 전쟁에서의 업적으로 모든 미국 대통령 설문조사에서 거의 1위를 차지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1861년 3월 4일,
U.S Capital Building 앞에서 열린
링컨의 취임식 사진
생애
1809년 2월 12일 켄터키 주의 조용하고 아담한 나무로 된 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토마스 링컨은 나이가 50세가 넘을 때까지도 소작인으로 산 목수였으며, 그는 링컨 역시 목수가 되기를 바랬다. 링컨은 어렸을때 키가 크고 말라서 맞는 옷이 거의 없었다. 링컨의 어머니 낸시는 링컨에게 성경을 읽어주고, 평화는 가치있는 싸움보다 더 중요하다는걸 가르쳤다. 허나, 낸시는 1818년 독이 든 풀을 먹은 소에서 짠 우유를 먹고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아내의 죽음으로 집안을 돌볼 사람이 없게 되자, 톰은 어린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인 사라 부시 존스턴과 1819년 12월에 재혼하였다. 부지런한 성격의 사라는 아이들이 잘못하면 매를 드는 톰과는 달리 아이들을 소중하게 대했고, 책을 좋아하는 링컨의 편을 들어주었다. 덕분에 링컨은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지만 풍부한 독서를 통해 지식을 얻었다. 청년시기에는 우체국장, 변호사 , 뱃사공, 가게점원, 토지측량 등 다양한 일에 종사하면서 온갖 고생을 하였다.
링컨은 농담을 잘하는 쾌활한 성격이었지만, 누나와 애인과의 사별이라는 불행으로 오랫동안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재임 중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더구나 링컨은 메리 토드와 연예결혼을 했지만 결혼생활을 하면서 갈등을 겪었다. 물론 링컨은 아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3명의 아들을 사랑했지만, 메리와의 성장환경차이는 극복하기 힘들었다.메리는 명문가문에서 자랐기 때문에 예의범절이 몸에 밴 사람이었던 것에 반해, 소작인의 아들인 링컨은 자유분방하게 자랐기 때문에 벽에 발을 올려놓고 책을 읽는 등 제멋대로 행동했다. 이러한 차이는 이들 부부가 갈등을 겪게 했다. 뉴스위크 한국어판 보도에 의하면 1960년대에 한 내과 의사는 그가 마르팡 증후군일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냈다. 링컨은 키가 매우 크고 사지가 길었는데 이는 마르팡 증후군의 특징이며, 이 증후군을 가진 소년이 링컨의 먼 친척이라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링컨의 DNA는 현재 남아 있지만, 그가 이 유전질환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링컨의 일생에 대한 사료(史料)로는 어머니 낸시의 사촌인 드니스 행크스의 증언과 변호사시절 같이 활동한 윌리엄 핸더슨 변호사의 전기가 있다. /백과사전
정치생활
1858.8.21 - 링컨-더글러스 논쟁 시작
1858년 8월 21일 에이브러햄 링컨과 스티븐 A. 더글러스가 노예제 확대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1854년 더글러스는 북위 36°30′ 이북 준주의 노예제 금지조치를 해제하고, 대신 '주민주권'의 원칙을 적용하는 내용의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을 제안했다. 이 법안의 요점은 노예제의 채택 여부를 해당 준주의 주민들이 결정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 법안이 통과되자 노예제를 확대하는 데 반대하는 사람들은 공화당을 결성했다. 그러나 1857년 대법원에서 미국 의회나 준주의 입법기관은 준주에서 노예제를 배제할 권한이 없다고 판결(드레드 스콧 판결)함으로써 양쪽의 주장은 모두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그러다가 1858년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 상원의원인 더글러스와 공화당 후보 링컨이 맞붙으면서 노예제 확대 문제가 주요 쟁점으로 다시 부각되었다. 링컨은 이 문제를 놓고 더글러스에게 토론을 제의했다. 토론은 8월 21일~10월 15일 일리노이 주의 7개 선거구에서 각각 3시간씩 모두 7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토론 결과 더글러스는 남부 민주당원들의 지지를 잃었다. 그러나 선거에서는 더글러스가 링컨을 간신히 물리치고 상원의원에 재선되었다. 한편 2년 뒤 벌어진 대통령 선거에서는 링컨이 더글러스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 브리태니커
1861.3.4 - 링컨 미국 제16대 대통령 취임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링컨(Lincoln, Abraham, 1809~1865)은 어려서부터 노동을 하였기 때문에 학교교육은 거의 받지 않았지만, 독학하여 1837년 변호사가 되어 스프링필드에서 개업하였으며, 1834~1841년 일리노이 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847년 연방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미국멕시코전쟁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인기가 떨어져 하원의원직은 1기로 끝나고 변호사 생활로 돌아갔다. 1850년대를 통하여 노예문제가 전국적인 문제로 크게 고조되자 정계로 복귀하기로 결심하고, 1856년 노예반대를 표방하여 결성된 미국 공화당에 입당하여, 그해 대통령선거전의 공화당후보 플레먼트를 응원함으로써 자신의 웅변이 알려지게 되었다.
1858년 일리노이주(州) 선출의 상원의원선거에 입후보하여 재선을 노리는 민주당의 S.A.더글러스와 치열한 논전을 전개함으로써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더글러스와의 공개논전에서 행한 “갈려서 싸운 집은 설 수가 없다. 나는 이 정부가 반은 노예, 반은 자유의 상태에서 영구히 계속될 수는 없다고 믿는다” 는 유명한 말을 하여 더글러스의 인민주권론을 비판하였다. 선거결과에서는 패하였으나, 7회에 걸친 공개토론으로 그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고, 1860년 대통령선거에서는 공화당의 대통령후보로 지명받았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후보로 지명된 것은 노예제에 대한 그의 견해가 과히 급진적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선거에서는 민주당 쪽에서 노예제 유지의 브리켄리지와 인민주권의 더글러스의 두 명의 후보로 분열되었기 때문에 링컨이 당선되었다. /naver
1862.9.22 - 링컨 미국 대통령 '노예해방 예비선언' 발표
링컨(Abraham Lincoln) 미국 대통령이 앤티담 전투에서 북부군이 승기를 잡자 이튿날인 1862년 9월 22일 ‘노예해방 예비선언’을 발표했다. 이것은 연방에서 탈퇴한 남부의 여러 주가 연방에 복귀하지 않으면 노예해방을 선언하겠다는 경고였다. 자치주가 이에 응하지 않자, 링컨은 1863년 1월 1일 흑인노예의 해방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선언은 반란상태에 있는 여러 주의 노예를 전부 해방하며, 해방된 흑인은 폭력을 삼가고 적절한 임금으로 계속 일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 이외에도 흑인들의 연방 군대 입대를 허용하고 있었다.
이 노예해방선언은 내전에서의 전략적 의의도 지녔는데, 그것이 노린 것은 남부의 사기저하와 남부 여러주의 연방 조기복귀였다. 더욱이 흑인을 북군 병력에 흡수할 수 있게 됨으로 북군이 더욱 강해지는 계기가 됐다.
링컨이 "자신의 이름이 역사에 남는다면 바로 이 노예해방선언 때문일 것"이라고 했듯이, 후세의 역사도 그의 바램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은 인도적인 명분에서 출발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단지 미 연방의 대통령으로서 미 연방을 수호한다는 현실적인 목표를 위해 전쟁을 결심했고, 선언을 발표했?뿐이다. 노예해방은 단지 부수적인 산물이었을 뿐이었다.
노예해방의 실현은 북부의 산업 자본가와 남부의 대지주 사이의 경제적 이해대립이 전쟁으로 폭발한 뒤에야 형식적으로 이뤄진 셈이다. /조선
1863.1.1 - 링컨 미국 대통령, 노예해방 선언
링컨(Lincoln, Abraham, 1809~1865) 미국 대통령이 남북전쟁이 한창인 1863년 1월 1일 노예제를 인정하고 있는 자치주에 대해 흑인 노예의 해방을 선언했다. 링컨은 이 선언을 통해 반란상태에 있는 여러 주의 노예를 전부 해방한다고 밝힌 뒤, 해방된 흑인들에게도 옛 주인들에 대한 폭력을 삼가고 적절한 임금으로 계속 일할 것을 당부했다.
노예해방 선언은 노예제를 인정하고 있는 자치주 즉 남부를 겨냥한 것이었다. 이는 남부의 내분을 노리는 동시에 흑인을 북군의 병력에 흡수하는 효과가 있었다. 노예해방 선언 이후 흑인들이 북군에 입대해 남군과 싸웠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었다.
링컨은 이 선언으로 "자신의 이름이 역사에 남는다면 바로 이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후세의 역사도 링컨의 바람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노예해방의 인도적인 명분이 링컨으로 하여금 남북전쟁을 수행케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미 연방의 대통령으로서 미 연방을 수호한다는 현실적인 목표를 위해 전쟁을 결심했을 뿐이다. 노예해방은 단지 부수적인 산물이었을 뿐이었다. /조선
1865.4.14 - 미국의 링컨 대통령, 극장에서 저격 당함 (다음날 사망)
1865년 4월 14일 미국의 링컨(Lincoln, Abraham, 1809~1865) 대통령이 워싱턴의 포드 극장에서 연극 관람 도중 남부출신의 배우 J. W. 부스(Booth, John Wilkes)에게 저격당했다. 링컨은 다음날 아침 사망했다. 연극배우로 활동하던 암살범 부스는 미국 최남부 순회공연에서 폭넓은 인기를 얻었으며, 남부를 열광적으로 지지해 공공연하게 노예제를 옹호하고 링컨을 비난했다. 그는 1859년에 노예제폐지론자 존 브라운을 교수형에 처했던 리치먼드 민병대에 자원했으며, 남북전쟁 중에는 남부의 비밀첩보원으로 활동했다. 처음에는 링컨 납치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자 암살을 결심했다. 연극의 3막이 진행되는 동안 관람석에서 링컨의 머리 뒤쪽을 향해 총을 쏘고는 "남부는 복수했다"라고 외치며 난간에서 뛰어내렸다. 12일 뒤 연방군이 버지니아의 한 농장 담배창고에서 부스로 알려진 시체를 찾았다. 암살이 성금요일에 이루어져 링컨은 사후에 성인으로 더욱 추앙받았다. /브리태니커
1860년 2월 27일,
쿠퍼유니온 연설을 한 날,
뉴욕에서 촬영한 사진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 (1863년 11월19일)
지금으로부터 87년 전 우리 조상은 자유 속에서 키워졌고,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신조에 바쳐진 새로운 나라를 이 대륙에 창설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와 같은 나라가 또 이와 같이 키워지고 이와 같이 바쳐진 모든 나라가 과연 영속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실험하는 커다란 내전을 치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전쟁의 커다란 싸움터에서 만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싸움터의 일부를 이 나라가 영원무궁할 수 있도록 이곳에서 생명을 바친 사람들의 최후의 안식처로 바치기 위하여 모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의미로 이 땅을 바칠 수 없습니다. 이 땅을 성스럽게 할 수 없습니다.
이 땅을 깨끗하게 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싸운 용사들은 살아남은 사람이든 전사한 사람이든 다 같이 우리의 빈약한 힘으로는 더 보탤 수도 더 뺄 수도 없을 정도로 이 땅을 성스럽게 하였습니다. 세계는 지금 우리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을 별로 마음에 새기지도 않을 것이며 오래 기억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는 여기서 쓰러진 용사들이 지금까지 그렇게도 훌륭하게 추진해 온 미완성의 사업에 몸을 바쳐야 할 사람들은 오히려 우리들 살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앞에 남아있는 대사업에 몸을 바쳐야 할 사람들은 오히려 우리들입니다.
그 대사업이란 이들 명예로운 전사자가 최후까지 온 힘을 다하여 싸운 대의에 대하여 우리는 더욱 더 헌신해야 한다는 것, 이들 전사자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으리라고 굳게 맹세하는 것, 이 나라를 하나님의 뜻으로 새로운 자유의 나라로 탄생시키는 것,
그리고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Lincoln's Gettysburg Address
Four score and seven years ago our fathers brought forth on this continent, a new nation, conceived in liberty, and dedicated to the proposition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Now we are engaged in a great civil war, testing whether that nation, or any nation so conceived and so dedicated, can long endure. We are met on a great battlefield of that war. We have come to dedicate a portion of that field, as a final resting place for those who here gave their lives that nation might live. It is altogether fitting and proper that we should do this.
But, in a larger sense, we cannot dedicate, we cannot consecrate, we cannot hallow, this ground. The brave men, living and dead, who struggled here, have consecrated it, far above our poor power to add or detract. The world will little note, nor long remember, what we say here, but it can never forget what they did here. It is for us the living, rather, to be dedicated here to the unfinished work which they who fought here have thus far so nobly advanced.
It is rather for us to be here dedicated to the great task remaining before us ―
that from these honored dead we take increased devotion to that cause for which they gave the last full measure of devotion ― that we here highly resolve that these dead shall not have died in vain ― that this nation,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 ― 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해설
불과 266 단어로 된 이 짧은 연설문이 유명한 것은 그 짧은 길이 때문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나라의 명분을 몇 마디 말 속에 간결하게 압축하고 미국사의 대사건인 남북전쟁의 의미, 자유의 가치, 민주정부의 원칙을 그 핵심에서 포착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 지도자의 연설치고 이처럼 간결하면서도 강력하고 쉬운 말을 쓰면서 도 감동적일 수 있었던 예는 거의 없다. 나 자렛 예수의 「산상수훈」에 곧잘 비교되는 그 간결성과 간명성, 그리고 감동적 효과 때문에 이 연설은 미국 역사를 지탱한 원 칙과 비전의 원천이자 항구한 준거의 틀이 되었고 정치만이 아니라 문학사적으로도 긴 생명의 고전적 텍스트가 되어 있다.
연설 전편을 통해 가장 빈번히 사용된 핵심 어는 「봉헌」(dedication)이라는 어휘이다 .
원문에서는 이 「봉헌」이라는 핵심어가 명사, 동사, 형용사의 형태로 모두 여섯 번 사용되고, 연관어 「헌신」(devotion)도 두 번 쓰이고 있다. 미국이라는 나라를 『 자유 속에 잉태되고, 만인은 모두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명제에 봉헌된 나라』라고 규정한 첫 문장은 미국 「독립선언서」에 천명된 건국의 의미와 이상을 다시 한 줄로 요약하고 「봉헌」의 첫 번째 의미를 제시 한다.
링컨의 이 언명은 이후 미국인 들에게 『나는 민주주의의 명제에 봉헌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이 되어 부단히, 조석 으로, 되돌아 온다. 그런데 그날 사람들이 게티스버그에 모인 것은 그 싸움터의 한 조각을 전몰자들에게 「봉헌-헌납」 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봉헌」의 두 번째 의미이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부터 연설은 절묘한 역전의 논리를 발휘하여 「봉헌」의 세 번째 의미로 넘어간다.
그 땅은 이미 사자들이 목숨을 바쳐 자유와 민주주의 의 제단에 신성하게 봉헌한 곳이므로, 묘지 헌납을 위해 모인 자들이 해야 할 것은 그 들 자신을 미국 건국의 이상에 「봉헌」하 여 사자들이 미완으로 남긴 과제를 완수하는 일이다--이것이 그 역전 논리가 제시하는 「봉헌」의 세 번째 의미이다. 이 연설은 마치 한 편의 시처럼 탄생(birth), 죽음(death), 재생(rebirth)이라는 상징적 은유 구조를 갖고 있다.
「탄생」의 은유적 이미지는 미국 건국을 「잉태」(co nceived)와 「출산」(bring forth)이라는 말로 표현한 첫 줄에 나타난다. 「죽음」의 이미지는 게티스버그에서 「목숨을 바친」 사람들, 「명예로이 죽어간 사람들」과 그들을 위한 「마지막 안식처」 같은 말들로 표현되고, 여기에는 그들을 죽게 한 것이 미국의 건국 이상에 가해진 시련과 죽음의 유혹이라는 암시도 들어 있다.
「재생」의 이미지는 사자를 위한 땅의 축성과 헌납( 이는 정화/부활의 기원의식과도 같다), 신의 가호 아래 미국이 「새로운 자유의 탄생 」을 다시 보게 될 것이라는 구절, 그리고 마지막 절--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는 이 지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불멸성의 다짐 속에 나타나 있다.
출처: <설악을그대가슴에>
링컨의 유머
● 링컨의 외투
링컨이 젊었을 때 급하게 시내에
나갈 일이 생겼는데 말과 마차가 없었다.
마침 시내를 향해 마차를 몰고 가는 노신사를 발견했다.
"죄송하지만 제 외투를 시내까지 갖다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거야 어렵지 않지만 시내에서 옷을 받는 사람을
어떻게 만날 수 있죠?"
"걱정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외투 안에 제가 있을 테니까요."
● 두 얼굴의 이중인격자
"링컨은 두 얼굴을 가진 이중인격자"라며
한 의원이 의회에서 링컨을 질책했다.
링컨은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되물었다.
"거참, 내가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면,
오늘 같은 중요한 자리에 왜 이 못생긴 얼굴을 갖고 나왔겠습니까?"
의회의 의원들은 박장대소했고 그 의원은 슬그머니 자리에 앉아야 했다.
● 불법영업
링컨이 상원의원 선거에 입후보했을 때
합동연설회에서 경쟁자였던 더글러스 후보가 목소리를 높였다.
"링컨 후보는 자신이 경영하던 상점에서 팔아서는 안 될 술을
팔았습니다. 분명한 위법이며 이렇게 법을 어긴 사람이
상원의원이 된다면 이 나라의 법질서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더글러스는 의기양양했고 청중은 술렁였다.
이때 링컨이 연단에 올라가 태연하게 말했다.
"존경하는 유권자 여러분, 방금 전 더글러스 후보가 말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 가게에서 가장 많이 술을 사 마신
최고 우량고객이 더글러스 후보라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상대편의 음해에 대해
링컨이 위트로 응수하자 좌중은 웃음바다가 됐다. /<dwchung>
링컨의 일화
일화1.
링컨이 변호사가 된 지 얼마되지 않아 매우 중요한 사건을 맡게 되었다.
그와 함께 변호를 맡게 된 변호사들은 대단히 관록있는 변호사들이었다.
그 중 한 변호사는 링컨을 보자마자 "저런 애송이가 왜 여기 있단 말인가?저런 촌뜨기와 같이 일할 수 없으니 당장 꺼지라고 해!"라고 말했다. 그런 모욕적인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링컨은 자리를 지켰다. 재판중에도 링컨은 완전히 왕따를 당했다.
그래도 링컨은 매일같이 재판장에 나와 자기를 모욕한 변호사의 능숙한 변호를 지켜봤다.
재판은 링컨쪽의 승리로 끝났다. 다음날 링컨은 사표를 제출했다. 공부를 더 해야 되겠다는 것이 이유였다.
몇년이 더 지나 링컨은 공화당 후보로 대통력이 되었다. 이전에 그를 야유했던 변호사는 여전히 그를 강력히 비판했다. 그래도 링컨은 국방(육군)장관 자리가 비자 민주당원인 그를 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만한 적임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장관이 된 다음에도 그는 여전이 직언을 해댔다. 하지만 대통령이 암살되었을 때 누구보다도 서러워한 사람은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에드윈 스탠턴이다.
일화2.
매글렌런 장군은 남북전쟁 당시에 스콧 장군의 후임으로 사령관이 되어 뛰어난 조직력과 병참술로 패배의 혼란에 빠져있던 북군을 재정비하여 뛰어난 전투부대로 되살렸으며, 남군의 침입을 막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
하루는 링컨 대통령이 그를 격려하기 위해 국방장관과 함께 그의 야전사령부를 찾았다. 장군은 전투에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링컨은 몇시간을 사령관실에 앉아서 그를 기다렸다. 드디어 장군이 돌아왔다. 그는 방안에 있는 대통령과 장관을 본체만체하고 그냥 2층 자기방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링컨과 장관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고는 장군이 곧 내려오리라 생각하고 다시 의자에 앉아서 그를 기다렸다. 한참 후에 하녀가 나타나더니 "죄송합니다만 장군께서는 너무 피곤해 잠자리에 드셨다고 대통령께 말씀드리라고 이르셨습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놀란 사람은 장관이었다. 일개 장군이 직속상관인 자기는 고사하고 감히 대통령마져도 그렇게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각하 저렇게 무례한 놈은 제 생전에 본적이 없습니다. 맥클렌런을 당장 직위해제해야합니다."
링컨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조용히 장관에게 말했다.
"아닙니다.맥클레런 장군은 우리가 이 전쟁을 이기는데 절대로 필요한 사람이오. 맥클레런 장군 때문에 단 한시간이라도 이 유혈의 전투가 단축될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의 말고삐를 잡아주고 그의 군화도 닦아줄 것이오. 그를 이해서라면 무슨일이든 다할것이요" / <푸른바다>
링컨과 어머니
링컨의 전기 작가는 링컨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링컨에게 위대한 사람이 될 만한 조건은 한 가지도 주시지 않으셨다. 다만 그에게 가난과 훌륭한 신앙의 어머니만을 주셨을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링컨의 어머니 낸시 링컨은 황무지 개척자의 아내로서 그리고 두 자녀의 어머니로서 척박한 자연 환경과 싸우며 가난한 시골 생활을 견뎌냈습니다. 그녀의 삶은 하루 종일 농사일과 허드렛일로 바쁜 생활의 연속이었지만, 자녀들을 돌보고 교육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관찰력이 뛰어났던 그녀는 링컨을 데리고 숲 속이나 강가를 거닐면서 링컨으로 하여금 신기하고 경이로운 자연의 세계에 눈뜨게 했고, 풍부한 상상력과 창의적인 사고로 사물을 바라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아들 링컨의 마음속에 '신앙'과 '꿈'을 심어 주고자, 한가로운 오후나 저녁 식사 후엔 찬송가를 불러주고 성경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때로는 분주한 대도시의 이야기도 해주었다고 합니다. 링컨의 어머니는 외진 시골마을에 살고 있어서 학교에 다니기 어려웠던 링컨 남매를 학교에 보내는 교육에 대한 집념이 강한 분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링컨이 10살 때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링컨에게 이렇게 유언을 남겼습니다.
“사랑하는 에이브야! 이 성경책은 내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내가 여러 번 읽어서 많이 낡았지만 우리 집안의 값진 보물이란다. 나는 너에게 100에이커의 땅을 물려주는 것보다 이 한 권의 성경책을 물려주는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한다. 에이브야! 너는 성경을 부지런히 일고, 성경 말씀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다오. 이것이 나의 마지막 부탁이다. 약속할 수 있겠니?”
링컨은 비록 나이 어렸지만 어머니의 유언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링컨은 그의 친한 친구에게 어머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고 합니다.
“내가 아직 어려서 글을 읽지 못할 때부터, 어머니께서는 날마다 성경을 읽어 주셨고, 나를 위해 기도하는 일을 쉬지 않으셨네. 통나무집에서 읽어 주시던 성경 말씀과 기도 소리가 지금도 내 마음을 울리고 있네. 나의 오늘, 나의 희망, 나의 모든 것은 천사와 같은 나의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네. </'백악관을 기도실로 만든 대통령 링컨’에서>
공(功)은 하에게 책임은 내가
미국의 남북 전쟁 시, 링컨 대통령이 남군의 리(Lee) 장군의 퇴각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미드 장군에게 하달하면서 편지 한 통을 동봉하였다.
“내가 보내는 명령은 기록에 남기지 않겠소.
만일 장군께서 내 명령대로 작전을 실시하여 성공하면 이 명령을 세상에 알릴 필요가 없소.
이 편지는 실패한 경우에 공개하시오.
성공하면 모든 공은 당신의 것이고,
실패하면 그 책임을 내가 지겠소.”
작전은 성공했고, 미드 장군은 감명을 받아 이 편지를 공개했다.
이것은 나의 신앙입니다
링컨이 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기쁨과 감격에 환호하는 지지자들이 링컨의 당선을 축하하기 위해 링컨의 집으로 모여들었다. 링컨의 가까운 사람들은 이미 그가 신앙인으로서, 그리고 돌아가신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링컨의 참모들은 축하객들에게 오늘만큼은 포도주나 위스키를 제공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링컨은 대답했다. “우리 집에는 아무 술도 없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저희가 장만하겠습니다.”
“아닙니다. 나는 나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여러분에게 하라고 명령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당선을 축하하는 술이 링컨의 집으로 배달되자, 링컨은 정중하게 감사를 표시하고는 모두 되돌려 보낸 후 청중들에게 이렇게 인사를 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여러분!
저는 오늘 포도주나 위스키로 여러분을 대접하지 못함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의 신앙이며, 어릴 적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오늘은 제가 평소에 포도주 대신 애용하고, 가족들에게 권장하는 건강 음료를 여러분에게 대접하려고 합니다.
이 음료수는 샘에서 방금 길어 온 생수인데 시원하고 건강에도 참 좋습니다.
자, 함께 마십시다!”
링컨은 냉수 잔을 들고 마시며 그들에 대한 최고의 존경을 표시했다.
링컨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비록 술과 고기로 대접을 받지는 못했지만 대통령의 진실한 신앙과 검소함,
끝까지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려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 / <'백악관을 기도실로 만든 대통령 링컨'에서>
화 다스리기
에드윈 스탠튼은 남북전쟁 당시 링컨대통령의 비서관이었다.
어는 날 그는 자신의 결정이 편파적이라고
모욕적인 말로 비난하는 육군소장때문에 무척 화가 났다.
스탠튼은 분을 참지 못한 채 링컨에게 이 사실을 얘기했다.
"육군소장에게 자네의 분노를 담은 신랄한 내용의 편지를 써보게"
링컨의 말을 들은 스탠튼은 공격적인 내용의 편지를 써서
링컨에게 보여줬다. 편지를 본 링컨은
그 편지의 강하고도 날카로운 어조에 대해 칭찬하며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이 편지를 어떻게 할 작정인가?"
당황한 스탠튼이 말했다.
"보내야죠!"
그러자 링컨은 고개를 흔들었다.
"편지는 난로에 갖다 버리게나, 나도 화가 났을 때 쓴 편지는
그렇게 한다네, 그건 좋은 편지야
자네는 그 편지를 쓰는 동안 기분이 나아졌을 것이네,
이제 그걸 태우고 다른 것을 쓰게나." / <밁은샘물>
인생길
1834년 주 의회에 진출을 시도해 성공했다.
1834년 결혼을 하기로 했으나 약혼자가 갑자기 사망했다. 마음에 큰 상처를 받음.
1836년 극도의 신경쇠약증에 걸려 병원에 6개월간 입원.
1838년 주 의회 대변인 선거에 출마했으나 패배.
1840년 정부통령 선거위원에 출마했으나 패배.
1843년 미국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패배.
1846년 또 다시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해, 이번에는 성공했다.
1856년 소속 정당의 대의원 총회에서 부통령 후보 지명전에 출마했으나 100표 차로 패배.
<링컨 생가 비지터 센터의 내부 모습>
링컨의 명언
가장 훌륭한 사람이 되고자 결심한 사람일수록 언쟁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한 성질의 악화나 자제력의 감퇴 결과를 훌륭한 사람일수록 감수하려 들지 않는다. 이쪽에 반쯤의 타당성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크게 양보하고, 자신이 만만한 일일지라도 조금은 양보해라. - A. 링컨
국가는 거기에 거주하는 국민의 것이다. 국민이 현정부에 염증을 느끼게 되면 그들은 언제든지 그것을 개선할 헌법에 보장된 권리를 행사하거나 분할 내지 전복시킬 수 있는 혁명권을 행사할 수 있다. -링컨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링컨
국민의 일부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속일 수는 있다. 또한 국민의 전부를 일시적으로 속이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국민 전부를 끝까지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링컨
그랜트 장군의 위대한 점은 침착하면서도 목표에 집요하게 매달린다는 점이다. 그는 쉽게 흥분하지 않으면서도 불독같이 용맹스럽고 끈질기다. 그의 이빨에 한 번 물리면 그 누구도 끄집어낼 수가 없다. -링컨
나는 계속 배우면서 나는 갖추어 간다. 언젠가는 나에게도 기회가 올 것이다. -링컨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의 최선의 것, 내가 아는 한의 최선의 것을 실행하고 또한 언제나 그러한 상태를 지속시키려고 한다. -링컨
나는 노예가 되고 싶지 않은 것처럼, 주인도 되고 싶지 않다. -링컨
나는 어릴 때, 가난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온갖 고생을 참으며 살았다. 겨울이 되어도 팔굽이 노출되는 헌 옷을 입었고, 발가락이 나오는 헌 구두를 신었다. 그러나 소년시절의 고생은 용기와 희망과 근면을 배우는 하늘의 은총이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영웅과 위인은 모두 가난 속에 태어났다. 성실 근면하며,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정신만 있으면, 가난한 집 아이들은 반드시 큰 꿈을 이룰 수 있다. 헛되이 빈고(貧苦)를 슬퍼하고 역경을 맞아 울기만 하지 말고, 미래의 밝은 빛을 향해 분투 노력하며 성공을 쟁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링컨
나는 찬스가 올 것에 대비하여 배우고, 언제나 닥칠 일에 착수할 수 있는 태도를 갖추고 있다. -링컨
나는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뒤로는 가지 않는다. -아브라함 링컨
나에게 밤낮으로 무서운 긴장이 생겼기 때문에, 만일 내가 웃지 않았다면 나는 이미 죽은 지가 오래 되었을 것이다. -링컨
나이가 40을 넘은 사람은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링컨
내가 대통령이 된 것은 나의 어머니가 준 성경때문이었다. -링컨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내가 있음으로 해서 이 세상이 더 좋아졌다는 것을 보는 일이다. -링컨
내가 성공을 했다면, 오직 천사와 같은 어머니의 덕이다. -링컨
노동을 소중히 여기자. 노동의 빛은 아름다운 것이다. 노동은 온갖 덕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링컨
만나는 사람마다 교육의 기회로 삼는다. -링컨
많은 자유국가가 자유를 상실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그런 날이 올지 모릅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이 나라가 나의 자랑스러운 훈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제일 마지막으로 도망을 쳐서가 아니라, 결코 도망을 치는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스프링필드의 연설 중에서) - A. 링컨
모든 사람을 얼마 동안 속일 수는 있다. 또 몇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링컨
미국의 국민에 대하여, 그리스도교의 세계에 대하여, 역사에 대하여, 더욱이 '나'라고 하는 일개 인간의 궁극적 인격을 가지고 하느님께 대하여, 나는 책임을지지 않으면 안 된다. -링컨
변호사가 되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면 그것만으로 목적은 절반이나 완성된 것이나 다름없다. 꼭 성공하고 말겠다고 결심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임을 항상 명심하라. -링컨
뿔뿔이 흩어진 집안은 살아갈 수 없다. 저는 연방이 해체되거나 집안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링컨
사람이 얼마나 행복하게 될 것인지는 자기의 결심에 달려 있다. -링컨
40세가 지난 인간은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링컨
시비를 가리느라고 개에게 물리느니보다는 개에게 차라리 길을 양보하는 것이 현명하다. 개를 죽여 본들 상처는 치유될 수 없는 법이다. - A. 링컨
어떤 일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길이 열리게 마련이다. -링컨
일이란 기다리는 사람에게 갈 수도 있으나, 끊임없이 찾아 나서는 자만이 획득한다. -링컨
자기가 살아가는 목적은 자신의 이름을 우리시대의 사건과 연결짓는 것이다. 이 세상에 함께 살고 있는 삶에게 있어서 자신의 이름과 어떤 유익한 일과를 연결짓는 일이다. -링컨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먹기만 하고 일을 하지 않는 부류의 인간을 만드셨다면, 그 인간은 아마도 입만 있고 손은 없을 것이다. 또 다른 부류로 일만 하고 먹지는 못하게 되어 있는 인간을 만드셨다면, 아마도 그 인간은 손만 있고 입은 없었을 것이다. 입과 손을 동시에 만드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일하면서 먹고, 먹으면서 일하자. 어느 한 쪽에만 치중하는 불구자가 되지 말자. - A. 링컨
절반은 노예, 그 절반은 자유의 상태에서 이 관계가 영속할 수는 없다고 나는 믿는다. -링컨
타인의 자유를 부인하는 자는 그 자신도 자유를 누릴 가치가 없다. -링컨
하나님이 자기를 만드셨기 때문에 자기는 가치있는 사람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을 비참한 사람으로 비참한 사람으로 만들기는 어렵다. -링컨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에이브러햄 링컨 /<채록>
링컨 생가
구글에서 검색하여 찾은 링컨 생가 (Lincoln birthplace)홈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사진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링컨생가는 미국 켄터키주 호젠빌에 있습니다.< / 설악을 그대 가슴에>
왼쪽에 링컨 동상, 그 뒤 링컨 뮤지움이 보이네요. 1-2층으로 되어있습니다.
링컨 생가 비지터 센터의 내부 모습입니다.
이 집이 위의 깨끗한 건물 안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미국 대통령이 방문한 장소입니다.
참고로 링컨이 15년간 살았던 집, 변호사 법률사무소, 링컨 묘등은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에 있음.
또한 앉아있는 큰 링컨 동상은 워싱턴 DC에서도 볼수있음.
[링컨 기념관] 마치 파르테논 신전을 보는 듯한 느낌...
링컨이 암살된 당시 존재한 36개 주를 의미하는 36개의 도리아식 기둥과
하단에는 그 36개주의 이름이
상단에는 완공시 48개주의 이름이 새겨있다.
링컨의 명성은 그가 구원한 국민들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이 신전에 영원히 간직될 것이다.
정면에서는 평범한, 오른쪽에서는 온화한, 왼쪽에서는 화난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오른쪽 벽에 있는 2회 취임 연설문
링컨은 항상 국회 의사당을 보고 있다.
영화에서 많이 본 바로 이곳, 링컨 기념관 앞이다
링컨 기념관을 내려와서 오른쪽에 있는 한국전 기념비
오른쪽 검은 벽면에는 당시 사진들이 대리석에 print(?) 되어있다.
그리고 써있는 문구 'Freedom is not fr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