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도 자료/한국독서학회(회장 : 박인기 교수) □
한국독서학회 선정 ‘이 달의 독서인’ (2007년 3월)
독서인으로서의 최항(崔恒, 1409~1474)
1. 선정 이유
태허정 최항(太虛亭 崔恒) 선생은 조선조 초기의 문신(文臣)으로서 집현전 학사(學士)이자 어문학 및 음운학자이다. 세종 16년에 문과 과거에서 장원급제한 이후에 세종이 승하하실 때까지 16년간 오로지 집현전에서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학문을 좋아하고 독서를 즐기는 그의 열정은 훈민정음 창제를 주도하게 하였고, 동국정운을 비롯한 다양한 저술을 하게 하였다. 그리고 독서를 통해 얻은 고결한 인품은 선비 정신을 바탕으로 효행을 베푸는 인간상을 보여주었다. 이에 이달의 독서인으로 태허정 최항을 추천한다.
2. 독서가 밑거름이 된 뛰어난 문신(文臣)
“무릇 조정의 사대 표전과 고문대책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으니 중국사람들이 매양 우리나라의 표사가 정절하다고 칭찬했는데 모두 공이 지은 것이다.”
위의 글은 『태허정 문집(太虛亭 文集)』에서 최항 선생에 대해 묘사한 부분이다. 이와 같은 최항 선생의 모습은 그가 평소에 독서에 대한 조예가 깊었음을 의미한다. 최항 선생의 이러한 넓고도 깊은 독서의 바탕이 그를 학자로, 창작가로, 그리고 문장가로 만들 수 있었다. 학자로서의 최항 선생은, 세종 임금으로부터 집현전 부수찬을 제수 받아 집현전의 선임학사로 활동하였다. 선생은 세종의 특지(特旨)를 받아 훈민정음 창제를 주도하였으며, 『동국정운(東國正韻)』 ․ 『경국대전(經國大典)』 ․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등 40여권의 저술을 주도하였다. 특히,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함에 있어서 집현전의 원로들을 배제시키고 소장 음운학자인 최항 선생에게 특지를 내린 것으로 볼 때, 이는 선생의 학식과 덕망을 높이 평가하신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불편 없이 문자 생활을 하고 있으며, 문화민족임을 세계에 자랑할 수 있게 된 것은 선생의 훌륭한 공임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또한 최항 선생은 창작가이자 문장가였다. 태허정 시집에는 200여 편의 각종 시문이 실려 있으며, 2권의 『태허정 문집』에는 다양한 저술이 수록되어 있다. 이 내용을 살펴보면 조정의 공식적인 문서는 모두 선생의 손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세종실록에는 선생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선생은 도덕이 높고 박학다식하며 천품이 어질고 겸손하여 항상 몸가짐을 공손히 하고 말이 적었으며 언제나 신중하여 삼사일언(三思一言)과 삼사일행(三思一行)을 실천하였다. 비록 한 더위에라도 의관을 정제하고 온종일 예의에 벗어난 용모를 보이는 일이 없었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독서에 탐닉하였고 특히 기억력이 뛰어났다.”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뛰어난 창작가이며 문장가인 최항 선생은 그의 노작과 독서에 대한 열정이 낳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3. 독서로 연마한 고결한 인품과 효행의 표상(表象)
최항 선생은 관직 재임 40여년 동안 한번도 탄핵을 받은 바 없는 청백리(淸白吏)였다. 강희맹의 묘지문에는 태허정의 인품을 묘사하기를, “공은 성품이 겸공(謙恭) ․ 간정(簡淨) ․ 단개(端介) ․ 무화(無華)하고 처신이 공정하였다. 사람들과 말할 때에는 항상 양보하고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으나, 조정의 논의에서 대사(大事)를 결정함에는 확고한 태도를 보였다. 집에서는 청백하여 뇌물을 받지 않았고, 성색(聲色)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재산을 탐하지 않았고, 집안 일은 모두 부인에게 맡겨 간섭하지 않았으며, 친척에게는 어질게 대하였고, 아랫사람들에게는 공순하게 대하였다. 유학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고 후학들을 권장하여 이끌었다.” 라고 칭송하였다. 이러한 인품은 선생이 독서를 통해 얻은 지혜로부터 연마되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늘 꼿꼿한 자세로 독서를 탐닉하는 선생의 모습에서 이미 어진 인성(人性)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고결한 인품은 모든 덕행의 근본인 효행의 실천인으로서 선생의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세조 4년(1458년)에 선생은 부친상을 당하여 시묘살이 중에 있었는데, 그 다음 해인 1459년 4월 28일에 임금께서 관직에 복귀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그 명령이 자식된 도리는 물론 조정의 기강에도 벗어나는 일로 옳지 못하므로 응할 수 없다는 진심어린 글을 3회에 걸쳐 왕에게 상서한 내용은 선생의 효행을 짐작하게 한다. 당시 선생이 3회에 걸쳐 상서한 글은 ‘기복불응상서문(起復不應上書文)’으로 조선왕조실록에 실려져 있으며, 후대에도 효행의 근본이 되는 글로서 읽히고 있다.
4. 현대에 귀감(龜鑑)이 되는 참된 독서인
조선 초기 문신(文臣)이자 훌륭한 인품을 갖춘 효행자(孝行者)인 최항 선생은 참된 독서인의 모습이 그 바탕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훈민정음 창제를 주도하였다는 선생의 훌륭한 업적은 현재 편리한 문자 생활을 하는 우리들에게 깊은 감동과 존경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모든 덕행의 근본인 효를 실천한 선생의 모습은 인륜과 도덕이 무너진 오늘날에 큰 교훈을 준다. 독서를 통해 얻은 옳은 지혜와 바른 인품, 이것이야말로 최항 선생을 통해 계승할 수 있는 참된 독서인의 모습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