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가 왔습니다. 주일 점심에 줍깅하다보니 생각보다 날이 더웠던 모양입니다. 긴 팔 입고 나갔는데 땀에 흠뻑 젖어 들어와서 셔츠 벗고 쉬었던 것이 감기의 원인이 된 모양입니다. 방심하면 안 되는데 바이러스는 방심한 틈을 타고 우리 몸에서 기를 펴나 봅니다. 특별히 바쁜 것도 없었지 싶었는데 지난주 일정을 정리하다 보니 생각보다 바빴던 모양입니다. 동창 신부들 모임도 일박이일로 있었고 마르티노 신부님 천장에 물 새는 것도 공사하느라 사제관이 어수선하였고 대리구 사제 총회 앞두고 지역장 신부들 회의도 일찍 가서 준비하는 것이 일 아닌 일이었고 성시간, 봉성체까지. 되짚어 보니 조금 어수선했던 한 주간이었습니다. 매일 하는 루틴도 있고 매주 하는 루틴도 있는데 그만 반복되는 일정들이 틀어지니 피곤했던 모양이고 그것이 지난 주일 오후에 감기로 찾아온 모양입니다. 오늘 월요일 푹 쉬었으니 내일부터는 낫겠지요. 그나저나 밭에 빨간 고추가 달려 있을 텐데 바로 안 따면 썩는다는데 일주일 넘게 가보질 못해 마음만 조급할 따름입니다.
오는 수요일에 저희는 성지순례를 떠납니다. 작년보다 더 많은 분들이 성지순례를 함께 해 주시니 고맙고 든든합니다. 해마다 성지순례를 가면 성지 담당 신부님들이 미사를 드리며 돈이야기를 너무 많이 해서 불편했었습니다. 물론 성지 개발을 위해 자금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정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을 요즘에는 갈 때마다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올해 성지순례의 고려사항 중 하나는 돈 이야기 좀 적게 하는 성지였습니다. 화려한 공원처럼 꾸미고 웅장한 성당을 지어놓는다고 성지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외형적인 화려함보다 작고 소박해도 그 안에 순교 성인들의 흔적과 정신이 살아 있다면, 그래서 순례를 하는 사람들도 그 안에서 순교자들의 영성과 흔적을 살핀다면 그것이 바른 순례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번에 저희 순례하는 성지는 호남에서 제일 먼저 복음을 받아들이고 선포한 유항검 아오스딩과 관련이 있는 곳입니다. 먼저 방문하는 성지는 초남이 성지인데 이곳은 유항검 아오스딩 복자의 생가터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교리를 가르쳤던 교리당과 능지처참을 당한 사형터에 세워진 성당이 전동성당입니다. 그분의 가족들이 고초를 겪고 옥살이를 한 전주옥 순교지도 점심 즈음에 찾아갈 것이고 그분과 그분의 가족이 합장한 무덤이 있는 치명자산 성지도 방문할 예정입니다.
유항검 아오스딩은 전주 초남이에서 ‘그의 집 땅을 밟지 않고서는 열 곳의 마을을 지나가지 못한다’고 할 정도의 부잣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유항검의 어머니는 첫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의 어머니와 자매지간인 권씨 부인이었습니다. 어머니 집안의 유명한 학자인 권철신의 집에 머물면서 신학문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권철신의 동생이 권일신이었는데 그분은 열심히 복음을 전하던 분이었습니다. 유항검은 권일신에게서 복음을 배웠고 받아들였습니다. 1784년에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고 고향인 전주로 내려와서 교리당에서 열심히 교리를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는 엄격한 신분사회였던 조선에서 신분의 벽을 허물고 가족과 친척에게도, 종살이는 하는 노비에게도, 천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도 교리를 가르쳤고 그들을 평등하게 존중하였습니다. 집안의 여인들은 교리를 배우기 위해 집을 찾아오는 모든 사람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에게도 커다란 가마솥에 밥을 짓고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분은 이 땅에서 평등한 사회를 꿈꾸었고 하느님 나라를 꿈꾸었습니다.
1786년 봄, 가성직제도를 실시하였을 때 유항검은 전라도의 신부로 임명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성직제도가 옳지 않음을 깨닫고 이를 멈추도록 알리신 분도 유항검입니다. 이후에 성직자를 모셔오는데 적극 나서시게 되었습니다. 북경으로 윤유일 밀사를 파견하고 주문모 신부님을 모셔오게 하는데 자금을 지원하였습니다.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들어오게 되자 전라도 순방을 요청하였고 유항검의 집에서 일주일간 신부는 머물면서 성사를 집전하였습니다. 조선에서의 박해를 멈추게 하려는 방법을 찾던 주문모 신부는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선교사를 태운 서양 선박을 요청하는 구상을 하게 되고 유항검은 이 생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습니다. 서양 사람을 태운 큰 배는 곧 그리스도교 세력을 의미했습니다. 계획은 성사되지 못했지만 이 계획으로 인해 유항검의 가족은 멸문지화를 당합니다. 한편 주문모 신부는 동정을 원하는 유항검의 아들 중철 요한의 뜻을 알고 같은 소망을 지닌 한양의 이순이 누갈다와 혼인을 주선하였습니다.
그리고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났습니다. 초기 이 땅 신자들의 뿌리를 뽑을 듯한 박해였습니다. 유항검은 전라도 교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가장 먼저 추포되었습니다. 하지만 집안에서 종살이하던 어떤 하인도 복자 유항검을 고발하지 않았습니다. 대박청래(大舶請來)의 주도자로 알려져서 가장 먼저 능지처참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앞서 1791년 박해 때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한 전주 남문(풍남문) 밖에서 순교당하셨습니다. 이곳에 후일 전동성당이 세워졌습니다. 이때 복자의 나이가 45세 때였습니다.
저희가 이동하다가 들릴 곳은 초록바위 순교터와 서천교 순교터입니다.
흥선대원군은 1866년에 병인박해를 일으키는데 이때 한양에서 순교하신 분이 승지였던 남종삼 요한과 진사였던 홍봉주 토마스였습니다. 이분들의 아들인 남명희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홍봉주의 아들이 순교한 곳이 초록바위 순교터입니다. 병인년에 이 아들들의 나이가 사형에 처할 나이가 되지 않았기에 1년을 더 옥살이를 시킨 후에 초록바위에서 교수형에 처한 뒤 밀어 전주천에 떨어뜨리게 하면서 순교 당하게 하였습니다.
서천교 순교터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에 의해 성인품에 오른 조윤호 요셉 성인의 순교터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체포되었고 아버지 조화서 베드로는 1866년 12월 13일에 순교치명하셨습니다. 부자를 한날 처형할 수 없다는 당시의 국법에 따라 18세의 아들 조윤호 요셉은 처형이 며칠 미뤄졌습니다. 그리고 배교의 유혹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12월 18일, 서천교 다리 밑에 모여든 장꾼들이 보는 앞에서 태장 200대를 맞았습니다. 목숨이 끊어졌으려니 하였지만 그의 목숨이 여전히 남아 있었기에 거지들을 시켜 목에 밧줄을 감고 줄질을 하여 죽였습니다.
치명자산 성지는 앞서 말씀드린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복자와 그의 가족 일곱 분을 1914년에 모신 성지입니다. 복자의 부인인 신희부인과 제수였던 이육희, 그리고 장남 부부이자 동정 부부인 복자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누갈다, 차남이었던 복자 유문석 요한, 조카였던 복자 유중성 마태오의 가족묘가 이 산 정상에 모셔져 있습니다. 그리고 장녀였던 유섬이의 묘가 있던 거제도의 비석을 수습하여 합토하였습니다. 1Km 조금 넘게 걸어서 가는 순례길이지만 가깝게는 160년 전 멀리는 223년 전에 이 전주 땅에서 순교하신 성인과 복자들의 희생을 기억하면서 걷는 순례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첫댓글 신부님, 감기 회복 잘 하세요.
순례를 앞두고 좋은 가르침을 마음속 깊이 새깁니다!!
순례길을 생각하며 신부님의 훈화말씀을 연관시켜봅니다 우리성당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