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50231 윤창국 <버닝>, 이창동 감상문
고등학교 때 친구와 맥도날드에 갔던 적이 있다. 나는 앱 쿠폰으로 40%를 할인을 받아먹었고, 친구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왜 귀찮게 그런 짓을 하냐고 물었다. 비싼 옷, 좋은 집을 봐도 딱히 부럽다 생각하지 않았던 내게 유독 자격지심에 불을 지피는 순간이었다. 종수에겐 혜미와 벤이 같이 있는 순간들이 그랬을 것이다. 당연하게 벤이 먹은 것을 계산하던 순간, 혜미가 트럭이 아닌 포르쉐에 타던 순간.
자신이 우물에서 구원한(구원했다 믿는) 여자아이. 가장 믿는 친구사이, 내가 사랑하는 여자. 혜미는 종수에게 있어 현실에선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채워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을 것이다. 영화는 벤이 혜미의 실종과 연관이 있다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보일이와, 시계. 눈물을 이해할 수 없는 벤 앞에서 눈물 흘리는 혜미, 쓸모없고 눈에 거슬리며 자기가 채워주길 바라는 것 같은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벤. 그레이트 헝거를 채우려는 혜미. 이 모든 것은 메타포이고, 벤은 메타포에 대한 설명을 소설가인 종수에게 맡겼다. 명확한 증거는 없는 미스터리의 나열은 종수가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시키고 관객도 그렇게 받아들이도록 한다.
세상은 수수께끼 같아서 소설을 쓸 수가 없다는 종수의 말. 종수는 무엇을 알게 되어 소설을 쓰게 되었는가. 해미의 집에서 자위를 하던 구도와 소설을 쓰는 구도가 오버랩 되었다. 혜미가 보여준 무언극의 표현을 빌리자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없다는 것을 잊는 것이 중요하다. 종수는 아마 세상에 대해 알게 된 것이 아니라 모른다는 것을 잊지 않았을까. 그 모든 화를 소설 속에서 벤을 죽임으로서 욕정하듯 풀어낸 것은 아닐까. 갈 곳 없는 화를 풀기 위해선 그 모든 미스터리, 메타포가 벤의 살인으로 해석되어야 했다.
영화가 끝난 후 난 혼란에 빠졌다. 실존의 위기로까지 이어지는 청년들의 여러가지 문제들, 갈 곳 없는 화를 다룬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고민하게 되었다. 상상속 혜미가 애무를 해주고, 망상에 가까운 소설로 욕망을 쏟아내는 비극적이고 냉소적인 영화로 볼 것인가? 아니면 ‘태운다’에 집중해 신 혹은 개츠비로 표현되는 벤을 불태우고, 있다는 것을 잊으려 하며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봐야할 것인가? 그 청년기에 막 들어선 나로선 후자의 해석을 믿으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어쩌면 내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