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로 내려가는 고속도로는, 대전까지는 길이 아니었다. 정체. 정체. 대전을 지나서야 정체는 길 로, 고속도로로 바뀌었다. 10월 2일, 연휴의 가운데, 시월 초순의 산하는 잘 말라가고 있었지만, 가을햇빛에 드러나는 고속도로 바닥은 누더기였다. 속도와 하중을 견디지 못한 증거들이었다. 우 리들 삶도 그러해서……. 수시로 기워야 하는 것이리라. 고속버스 안에서 펼쳐든 그의 시집 『호 랑가시나무의 기억』(문학과지성사)에서 자주 눈길이 삐져나와 차창 밖으로 튀어나간다. 중년, 그 래, 시인 이성복, 그도 이젠 중년인 것이구나.
“지금까지 내가 버린 것이 내가 간직한 것과 다른 것이 아니구나”("높은 나무 흰 꽃들은 등을 세우고 4")에서거나 혹은, “어제 저녁엔 어머니, 내 눈썹 끝에 매달려 울고 계셨네”("높은 나 무…15")라거나 “거기 있을 때 나는 남편이며 아버지였지만 여기서 나는 다시 아들이 된다”
("높은 나무…17") 또는 “세상에는 아내가 있고 아이들이 있다 이런 세상에, 어쩌자고, 이럴 수가”("높은 나무…22")와 같은 시구들을 나는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오늘 이 야기는 중년으로 풀어나가야 되겠구나’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리고 잠자리 날개처럼 가벼운, 흔들리는 가을 낮잠 한줌-.
햇수로 13년 전, 그러니까 1982년 가을에 나는 처음으로 ‘젊은 시인 이성복’을 대구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때 그는 『뒨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를 내놓은 지 2년 지난 뒤였고, 막 대구에 착근한 직후였다. 대구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가까운 아파트 근처, 비탈길에 붙박여 있는 허름한 술집에서였다. 그때 그는, 그해 봄에 시를 처음 발표하기 시작한 나에게 “시는 그렇지 않은데, 소도둑처럼 생겼네” 했다. 그 맑은 웃음이 지금도 선연하다. 그해 늦여름과 가을, 그리고 초겨울 을 나는 대구에서 났다.
손꼽아보니, 그 후로부터 지금까지 대구와, 김현 선생 묘소에서 서너번쯤 그와 만났다. ‘문학동 네의 일’ 때문에 서로 약속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약간 설레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부담 이 더 컸다. 내가 알아오기로, 그는 타인에게 여간해서 곁을 잘 내주지 않는다. 두어 달쯤 전에 그는 이번 지면에 나오기가 어렵다고 사양했었다. 네번째 시집 『호랑가시나무의 기억』을 펴낸 이후, 1년 반이 넘도록 시를 한 편도 쓰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이사도 겹쳐 있고. “창간호인데… …” 하면서 “한번 내려가겠습니다”라고 막무가내로 대구행 날짜를 잡았다. 그제서야 그는 “ 그럼 한번 오세요” 했다.
대구직할시 수성구 범어동. 스포츠 플라자 1층 찻집에 그는 먼저 나와 있었다. 자리에 앉으면서 그는 타이핑된 종이꾸러미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내가 약속을 어기는 편이 아닌데” 하면서 그는 아직 시를 완성하지 못했다고 했다. 타이핑된 시 ‘원고’는 여러 번 덧칠해져 있었다. 고치 고 고친 육필원고는 상처의 속살을 보는 듯해 아찔하고 아련했다. 나는 유리창 밖으로 눈을 돌렸 다. 오후 세시의 햇빛인데도 어느새 황금빛이 돈다. ‘중년’으로 얼른 들어가야 했다.
이야기는 중년, 시와의 불화, 지적 편력, 테니스에의 몰입, 언어에 대한 새로운 사랑, 동자무당, 그 리고 ‘발견의 시학’에 대한 ‘강론’으로 이어진다. 이야기의 순서를 바꾸거나 하진 않았으며 가능한 한 시인의 ‘육성’이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여기에 옮겨적었다. 미리 귀띔을 하자면 이 이야기는 시인 이성복의, 시와의 불화·별거에 대한 ‘고백성사’로 들리는 대목이 종종 있을 터이다.
선생님 나이도 벌써 마흔 셋이지요? 이번 시집에 중년의 목소리가 많이 엿보입니다.
이번 시집을 내고 중년에 관한 산문을 네 편 발표했어요. 내가 중년이 되기 전에 중년은 음탕한 이미지로 보였습니다.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마 섹스와 돈 버는 데에 바쳐지는 사회생활 그 자 체가 음탕해 보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이가 차오르면 몰리게 되어, 나이나 세상에 대하여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나 싶었던 것이지요. 음탕의 음(淫)자는 유(流)자와 같은 지나침, 무절제라는 뜻이어서 좋은 의미는 아니지요.
40대는 제3자가 보기에 바람이 나는 나이라고들 하는데, 막상 내가 40대가 돼보니까 자기 정리가 필요하게 되더군요. 마흔이 불혹이라고들 하는데, 사실 마흔에 가장 안 되는 것이 불혹이에요. 쉰 에 지천명이라는 말도 마찬가지지요. 쉰에 가장 어려운 것이 천명을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나는 이 지적이 훨씬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원불교 대종사 한 분이 “나이 사십부터는 보따리를 챙겨 라”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승갈 때 조바심이 난다는 겁니다. 40대를 그 냥 지나치다간 미처 처리 못 하는 일이 생긴다는 것이지요.
그럼 그 자기 정리는 어떤 식이었나요.
그 동안의 내 사상적 편력을 돌아보았습니다. 니체, 보들레르, 카프카와 같은 서양에서 출발했다 가 84년 프랑스에 갔다 와서는 일대 전환을 일으켜 소월, 만해의 연애시를 다시 읽고 이를 육화 했지요. 『뒨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와 『그 여름의 끝』의 과정이 그러했습니다. 그 사이에 있는 『남해금산』은 과도기였구요. 연애시를 쓰면서 『논어』 『주역』과 같은 동양사상에 빠졌 습니다.
지금도 『논어』는 참 좋아합니다. 그런데 세번째 시집을 내고 나서 일대 반성을 했습니다. 형태 는 연애시지만 사실은 세상과 인생을 역학적 관계에서 따져본 것인데, 세번째 시집은 시에 대한 배반을 했습니다. 나는 시를 인생에 대한, 사상적 탐구의 도구라고 여기고 있는데 세번째 시집은 수사와 모호함에 빠져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연애시집을 내고 삶에는 자연과 같이 자연의 이법(理法)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 이법에 저항할 때 장애가 발생합니다. 죽음이나 서양에서 보는 고통이란 이 순리"이법에 따르는"를 따르지 않 기 때문입니다. 이법을 알고 그대로 살면 삶은 낙(樂)이 되겠지요.
그런데 세번째 시집에서 내가 너무 이법적으로 몰아가 삶을 추상화하고 탈색시켜버리고 말았습니 다. 나뭇잎을 요오드에 넣듯이, 또는 잇몸 없는 입으로 삶을 십었던 것이 아닌가 싶었던 것입니 다. 삶은 이법적으로 추상화되는 것이 아니지요. 다시 이법에서 삶으로 나아가는 길을 모색했습니 다.
『그 여름의 끝』을 내고 다시 프랑스로 가셨는데, 그 프랑스행이 어떤 변화를 가져왔습니까.
두번째로 프랑스에 가기 직전부터 불교에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즉(卽)해 있다’고 할 때의 즉의 개념으로 현상, 본질, 삶, 죽음, 이상, 현실 등을 다시 보려고 했습니다. 불교에 “처음 한 마 음 낼 때 정각에 이른다”는 말이 있어요. 삶의 이치를 가공하지 말고 삶의 이치에 즉해 삶을 이 야기하자고 생각했지요. 달마, 즉 다르마는 법(法)인데 여기에는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부처의 말씀, 최고의 진리이고 둘째는 사물 속에 있는 이치, 그리고 세번째는 사물이라는 뜻입니 다. 사물 그 자체가 이치에 즉해 있다는 것이지요. 똥이며 돌, 그 어느 한 가지라도 이치 없는 것 은 없다는 것입니다. 최고의 진리가 어디에나 다 배어 있는데 따로 찾으려 했던 것은 아닌가, 애 업은 사람이 업은 애 찾는 격은 아닌가, 그때 다시 부처로 나아갈 수 없을까를 생각했습니다. 낙 (樂) 이전의 괴로움 그 자체, 지혜 이전의 어리석음 그 자체로 말입니다.
그럼 두번째 프랑스에 갔을 때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붙잡고 사유했나요.
84년 프랑스에서 돌아오면서 나는 동양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프랑스에 다녀오면서는 서 양을 찾아왔습니다. 두번째 가 있는 동안, 그곳 유학생들과 만나서 서당과 같은 모임을 만들어 원 불교 교전을 읽으며 토론도 하고 했습니다. 불교공부의 맥락이었는데, 그것이 후기구조주의의 한 가닥과 이상하게 맞아들어갔습니다. 탈중심과 탈이치라는 것이었지요. 불교로 간 길이 다시 서양 과 만났습니다.
프랑스에 있을 때의 메모를 바탕으로 이곳에 와서 1년 동안 생각한 것이 네번째 시집입니다. 세 번째 시집의 화자가 절대성, 즉 화자가 다 내다보고 지배하는 세계였다면, 이번 시집은 화자가 삶 에 대하여 자신없어합니다. 미혹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불혹이 아니라 혹으로 들어가는, 들어가려 는 40대의 시집입니다.
다시 서양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데 어떤 맥락입니까.
서양 현대 사상 쪽입니다. 20세기 초에 서양 현대 사상의 터전을 만든 카프카나 니체와 다시 합 류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번의 합류는 스승 또는 우상과 제자 사이가 아닙니다. 20대의 그 열정은 지금 없습니다. 내가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 것이지요. 그러나 서양의 현대 사상가들이 가깝게 느껴지는 걸 보면 세번째 시집과 나는 많이 달라졌어요.
동양 쪽 공부는 관심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내 책꽂이에 나와 가장 가까이에 꽂혀 있던 책들은 유가에서 불가, 그리고 서양 현대 쪽으로 변했습니다. 지난 10년간 내 사상의 편력이었지요.
그런데 지난 1년 반 넘게 시를 쓰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난해 제주도에서 한일 작가 교류회의가 열렸을 때 거기에서 메모한 것이 있습니다(이번에 발표 한 시가 그 메모에서 나온 것이다). 다소 음악적입니다. 의미의 상관은 좀 뚜렷하지 않아도 좋습 니다. 영혼의 목소리를 내고 싶었고, 내가 듣고 싶고, 내가 필요로 하는 그 무엇이 그 메모였습니 다. 그런데 막상 다시 꺼내면 항상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나는 시에 대한 원한이 많아요. 내가 시를 사랑하는 것만큼 시는 나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 시 와의 불화는 애인 사이의 불화와 닮아 있어요. 시를 사랑하게 되면 시 이외에 하고 싶은 것은 없 어지지요. 내가 글로 이 정도는 써야 하는데, 그런 수준이 있는데 막상 손을 대면 안 되는 거예 요. 지난 1년간 시와 별거했습니다. 일종의 투정이었겠지요. ‘시, 네가 그렇게 깨끗한 것이냐…… ’ 지난 1년 동안 테니스를 많이 쳤습니다. 시가 본처라면 테니스는 애인인 셈이죠. 난 원래 운동신 경이 없는 편입니다. 그런데 테니스를 배우니까 상당한 재미가 있어요. 학교 사람들과도 친해졌습 니다. 사람들도 내 심각하던 표정이 발랄해졌다고들 합니다.
몸을 ‘쓴다’는 것에 대한 체험이 꽤나 새삼스러웠겠네요.
체육을 혐오하고 경멸했었지요. 국민학교 3, 4학년 때 시골에서는 잘 뛰어놀았는데 홀로 상경한 뒤로는 체육과 거리를 두었습니다. 테니스는 매우 새로운 경험입니다. 내가 보면, 나라는 타입은 떠돌이 근성이 있어서 한 군데에 쑥 빠졌다가 나올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돌아섭니다. 연애도 그랬고, 한문·불교 공부도 그랬습니다. 일단 빠지면 이것 하나밖에 없다고 달려들다가도 나오고 나면 내가 왜 거기에 빠졌는지를 모르겠고는 합니다. 한 우물을 못 파는 이같은 성격은 결국 후 회로 남지요. 치명적입니다. 하지만 부모, 아내, 아이들과 같은 바꿀 수 없는 것에는 문제를 삼지 않고 일찍 적응합니다. 나의 이같은 삶의 방식은 화전민식입니다. 아마 이같은 지적 편력이 이런 식의 불모와 단필을 가져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운전을 처음 배우셨을 때 자동차에 관한 탁월한 산문들을 남기셨는데, 테니스에 대해서도 할 말 씀이 많겠습니다.
테니스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육체 자체가 아니라 몸에 대하여 새롭게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 다. 그 동안 몸은 너무 무시당했습니다. 언어도 몸의 소산이고 반영입니다. 몸이 드러난 것이 언 어예요. 몸은 껍질이면서 속입니다. 때[坵]와 살[肉]이 구분이 없다는 걸 서른 넘어서 깨달았 습니다. 그러나 알았어도 일상에서는 때와 살의 구분이 우리 의식을 지배합니다. 더러움과 깨끗함 으로 구분하는 이 이분법은 버려지기 힘듭니다.
언어도 실체가 없어요. 미끄러진다고 말하잖아요. 시니피앙의 미끄러짐. 화장실이나 변기라는 말 도 다른 언어들과의 연계 속에서 일시적으로 정지해 있는 것입니다. 계속 유동적으로 흘러야 하 는데 그걸 정지시키니까 괴로움이 나옵니다. 언어는 본질을 감추는 게 아니지요. 언어는 무수한 흔적들, 때들로 이루어진 것이지요. 후기구조주의에서 이렇게 말합니다만, 프루스트나 유식불교에 서도 우리의 자아는 하나의 알맹이가 아니라 무수한 흔적과 종자들로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모든 말들은 그런 식으로 두께를 가지고 있어요.
예를 들면, 청도라는 말이, 청도-도청-광주사태, 또는 청도-청나라-하늘색 등으로 번지잖아요. 유 사 이래, 혹은 이전의 무수한 흔적의 누적이 언어입니다. 몸이 겹으로 이루어져 있듯이 언어 역시 겹의 성층입니다. 몸의 언어는 곧 욕망인데, 이때 몸은 숨어 있는 것이고 언어는 드러내는 것입니 다. 보통 일상의 언어는 목적과 유용성을 가지지만, 시의 언어는 몸의 언어이고 말장난의 언어입 니다.
말라르메의 시에 ‘아볼리 비블로 디나니떼 소노르(Aboli bibelot d'inanite sonore)’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어요. ‘울림이 없는 없어진 골동품’이라고 해석되지만 의미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 다. 말의 음악성이지요. 이 문장을 각각 B, L, I, O음에 유의해서 차례로 읽어보세요. 여러 겹의 음악이지요. 여기서 보여지듯이 시의 언어는 말장난, 욕망, 광기, 어리석음 또는 지혜라는 특성을 지닙니다. 몸이 언어로 가기 때문이지요. 이 음악성, 물질성, 말의 몸 등이 최근 내 시학에 들어오 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나에게 있어서 시는 인생 탐구였기 때문에 언어에는 무관심했습니다. 몸을 통해 언어를 새로 보는 것이지요.
저 같은 경우는 시를 안 쓰고 있을 때 시를 가장 많이 생각하는데요. 미안함, 죄스러움 같은 것 말입니다.
화가나 서예가가 그렇다고 해요. 한참 붓을 놓으면 손 자체가 말을 듣지 않는답니다. 나도 메모를 매만지다가 체험했습니다. 하도 안 돼서 화가 친구의 이젤을 빌려다놓고 그 메모를 늘 걸어놓고 생각했습니다. 언어가 만드는 그림이다, 그러나 안 되는 거예요. 메모라는 지침으로 실제 시가 가 능할까? 숨이 막혀서 피하게 됩니다.
하지만 불화는 아직 애정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사상 편력이 내 삶인데, 이제 외도 를 마치고 본처(시)와의 새로운 삶의 설계도를 그려보려고 해도 거기에는 본처의 용서가 전제되 어야 합니다. 자신이 없어요. 초조하기도 하고. 남들 같으면 한창 일할 나이인데 글 악에 서면 한 두 시간도 마주할 수가 없습니다. 최근에 그래요.
이번 네번째 시집은 ‘물에 잠긴 밥알처럼 희미한 웃음’을 웃는 고모나, 어머니, 가족, 고향 등 이 자주 등장하고 있어서, 중년을 잘 넘어서고 있구나, 화해의 아름다움이구나 싶었는데요.
첫 시집을 펴내기 직전인 70년대 말이 시와 결혼한, 행복한 신혼이었다면 그 이후에는 계속 시와 불화였습니다. 불화 속에서 아이들(시집)을 생산했지요. 지금은 별거상태입니다. 이번 시집도 밖에 서 보면 ‘부부관계’가 좋아 보일 듯도 하지만, 머리는 안 따라가고 욕심만 승합니다. 욕심을 줄 이면 쉽고 자연스러운데, 나는 자꾸 어렵게만 생각합니다. 고민을 너무 많이 하다보면 프로포즈도 못 하고 말지요. 악으로도 그럴 것 같습니다.
‘애인’인 테니스는 어떻게 만났습니까.
처음에 시 쓰는 의사와 배드민턴을 치다가 배우게 됐지요. 굉장히 못합니다. 공의 생리를 생각하 지 않고 내 식으로 설칩니다. 무엇이건 내 식으로 정리해내야 속 시원한 것 말입니다. 테니스 코 치가 가르치는 것은 공을 치기 전에 충분한 여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공이 날아오면 밀면 되는데 나는 어떤 경우에든 부딪칩니다. 아마 이것이 글을 쓰게 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아닌가 싶어요. 운 동 잘하는 사람은 세상살이가 부드럽습니다. 힘이 있다는 것과는 다르지요. 상대방의 흐름에 자기 를 맞출 줄 알아요. 그러나 나는 공만 오면 때리려고 달겨듭니다. 온갖 맹세가 소용없어요. 악으 로도 잘 안 될 겁니다. 그 안 되는 힘이 오히려 몸에 대하여 생각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문학 의 공간이 아닐까요.
산문은 간혹 쓰잖아요.
산문 쓰는 일은 편해요. 컴퓨터로 한문단 한문단 써내려가는 게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그러나 쓴 다는 점에서는 괴롭지요. 산문을 쓰다보면 어떤 부분은 시보다 나은 경우도 있어요. 테니스에서 공에 집착하듯이 시에 너무 많은 부담을 갖고 있습니다. 갓난애는 물에 빠져도 뜨는데 어른들은 가라앉습니다. 갓난애는 가만히 있지만, 어른들은 뜨려고 애를 쓰거든요. 내가 이렇게 애를 쓰니 시가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연애라고 생각해보세요. 산문이 지치기는 해도 변비하듯이 쓸 만은 합 니다. 산문에는 막막함이 덜해요.
사실 나의 요즘 삶은 즐겁습니다. 시 안 되는 것만 빼면 학교 생활도 그렇고 집에서도 그렇고 무 척 행복합니다. 오직 시 때문에 즐겁지 않은 것이지요. 이게 도대체 뭔가 싶어요. 이 결벽성이 나 를 나이게 하는 족쇄이겠지요. 그래서 나는 어딜 가나 즐거울 수가 없습니다. 안 쓰면 어떠냐, 하 겠지만 그건 내가 아닙니다.
중년이 될수록 ‘마음의 나이’를 과장하게 된다는데 선생님은 어떻습니까.
나이는 사십이 넘었지만, 속생각은 아직 어린애입니다. 철이 없지요. 지금 나의 부모님들 다 살아 계시고 내 아이들 내 손안에서 자랍니다. 사람 한 생애에 이보다 더 즐거울 수가 없지요. 그러나 마음속의 나는 수긍하지 않습니다. 장마 뒤에 망초대궁 다 쓰러지듯이 정다운 사람들 다 떠나버 리면 내 속의 어린애가 말할 것입니다. ‘참 좋은 시절이 있었지. 그런데 난 언제 철이 들지?’ 어딜 가도 내가 불편한 것은 본질적으로 어린애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뜨내기 근성은 마음속의 어린애가 시키는 것입니다. 그 어린애는 늙지도 않고, 나이도 들지 않고, 만족도 모릅니다. 시는 그 어린애의 말입니다. 동자무당 말이지요. 모든 이들에게는 저마다 숨겨놓거나 혹은 가둬놓은 그 어린애가 있습니다. 그 말로 삶의 실상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시의 언어가 말장난이고 광기이고 욕망인 것은 동자의 말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시를 못 쓰는 것도 마음속의 동자무당이 침묵하기 때문이겠지요. 옛날 시의 분위기를 이으려면 동자무당이 입을 다물어버립니다.
지혜로는 지혜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탈출구가 없는 딜레마입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에이, 욕 한마디 하고 제3의 길로 뻗어나갈 테지만 난 안 됩니다.
소설은 눈사람처럼 굴리면 커지는데, 시는 굴릴수록 진흙탕만 묻어요.
지혜로는 지혜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탈출구가 없는 딜레마입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에이, 욕 한마디 하고 제3 의 길로 뻗어나갈 테지만 난 안 됩니다.
소설은 눈사람처럼 굴리면 커지는데, 시는 굴릴수록 진흙탕만 묻어요.
그 마음속 ‘동자’의 입을 열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요.
악으로 지혜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려 합니다. 몸을 통한 지혜를 유념하려 합니다. 몸을 억압하고 지시하는 지혜는 아닙니다. 리듬, 말장난의 언어로 이루어지는 시를 생각해야죠. 그렇다고 동자무 당이 낭만주의자들이 말하는 영감과는 다릅니다. 몸이 하는 말, 내가 듣고 싶어하는 내 속의 말이 동자의 말입니다. 몸으로 하여금 말을 하게 하려면 내가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내가 너무 자신만 만해하면 동자는 말하지 않지요. 내가 삶의 지혜를 높이 사고 즐거움이 클수록 동자는 입을 다뭅 니다. 내가 불안하고 자신이 없을 때 동자는 말을 할 것입니다.
시를 다시 쓰는 일은 역설적이게도 내가 자신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너무 꽉 차서 빈틈이 없어요. 학교와 가정만 해도 나는 너무 많아요. 연구실에 책이 가득해서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도 없습니다. 이젠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선택하게 하는데, 책을 그대로 놓고 연구실을 넓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처음 학교에 갈 때 연구실에 책을 가득 꽂는 게 꿈이었는데 지금은 조 교도 쫓아내야 할 판입니다. 지식, 처세술, 중산층의 자기만족 등 아무리 반성을 해도 여지는 없 습니다. 저 책들을 들어내기 전에는요.
그렇다면 아직 쓰지 않은 시, 써야 할 시는 어떤 것입니까.
단순합니다. 이번에 발표하는 "비가"보다 더 압축되고 밀도가 있는, 동자의 목소리지요. 내 말 보다 비약이 더 크고 훨씬 더 죽음에 가깝고 음악에 가까운. 지혜에 대해서는 절대 말하지 않겠 습니다. 지혜로는 지혜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탈출구가 없는 딜레마입니다. 다른 사람들 같으 면 에이, 욕 한마디 하고 제3의 길로 뻗어나갈 테지만 난 안 됩니다. 소설은 눈사람처럼 굴리면 커지는데, 시는 굴릴수록 진흙탕만 묻어요.
한국 시를 ‘묘사·고백/진술·발견’으로 대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한국 시가 어디에 편중 되어 있으며, 그 문제점들을 극복할 수 있는 지향점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를 최근 들어 생각하 고 있습니다. ‘사랑의 눈으로 안 보이는 것은 없다’라는 이번 시집 뒤표지의 말이 언뜻 떠오르 는데요.
묘사는 대상에의 집착입니다. 내가 공을 때리려고 덤비는 것처럼요. 묘사도 실제로는 주관적이고 직정적이고 이데올로기적입니다. 객관적 현실이 있을 수 있나요. 자기 주장이지요. 고백/진술은 반 대로 대상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머릿속에서 세계를 지식으로 조립합니다. 이때 세계는 방해물입 니다. 탁자는 그릇을 놓는 물건인데도 이 탁자를 돌아가려 하지 않고 치우려고 합니다. 방해물로 보는 거지요. 자의식으로 세상을 왜곡하는 겁니다. 해체주의자들의 언어 역시 자의식의 과도한 팽 배일 뿐입니다.
발견은 절대로 사랑 없이는, 인생에 대한 애정 없이는 안 됩니다. 대상이 벌려주지 않으면 발견은 불가능해요. 미국에서는 아내가 남편을 강간으로 고소하기도 하잖아요. 사랑이 없이 달겨드는 것 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지요. 투자한 만큼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문학은 더도 덜도 아닙니다. 발 견은 투자한 사랑만큼만 나와요. 그러니까 관찰 그 자체보다는 사랑이 담긴 시선이 더 중요하지 요. 사랑 없는 관찰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낚시찌를 드리운 낚시꾼은 찌에서 한순간도 눈을 떼어서 는 안 됩니다. 언제 찌가 움직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프루스트가 말했듯이, 그렇게 찾던 것이 어느 순간 옵니다. 참으로 오래 기다린 사람에게 말입니다. 그는 보상받을 만한 사람입니다. 인생 이 헛일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투자를 안 한 사람입니다.
발견은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만 일어납니다. 이 발견의 길이 가장 튼튼하 고 안전하고 즐거운 길입니다. 남들에게도 마찬가지지요. 라마 크리슈나의 글에 보면, 신에게 가 는 길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신을 안는 길이고 또 하나는 신에게 안기는 길이라고 나옵니 다. 두번째 길이 안전합니다. 자력 신앙과 타력 신앙 이야기지요. 자력 신앙은 지혜로 가는 길입 니다만 어렵지요. 일자무식이 천국에 더 쉽게 간다는 말도 있습니다. 해체주의는 한순간 번쩍할 수 있지만 가파른 길이어서 지칩니다. 그러나 발견의 길은 어느 때, 어디에서나 가능한 길입니다.
발견의 시학은 급소와 경락을 짚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가 길 수가 없지요. 생에도 그런 순간이 있는데, 발견은 절대 길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 급소, 경락들은 죽음과 항상 가깝습니다. 바닷가 에 시체가 떠밀려 오면 파리가 가장 먼저 몰려듭니다. 시인의 자리가 거기지요. 순간적인 죽음들 을 항상 발견해야 합니다.
문학의 아름다움은 죽음과 덧없음입니다. 죽음과 대면하는 순간은 언제든지 있잖아요. 벼랑, 단애 악에서 인생을 살펴보는 것이지요. 거기서는 뛰어내려도 아무도 받아줄 수가 없습니다. 그 막막 함, 단애에 서기까지 올라온 과정, 짧은 삶을 회한으로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단애에 섰기 때문에 돌아본 삶이 귀중해지는 것입니다.
시와의 불화, 별거를 귀담아 듣는 자리는 그렇게 뜨뜻한 자리가 아니었다. 기실 시와 원앙처럼 더 불어 지내는 자 있다면, 그는 시선(詩仙)이거나 아니면 ‘가짜’이리라. 그렇다고 이 반시, 비시의 시절에 시선을 꿈꾸기란 또 가능하기는 할 것인가. 어쩌면 시는 ‘시인과 시와의 불화’ 안에서 존재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성복 시인의 안에 있으며, 내 속에도 있고, 우리들 모두 에게 있는 ‘동자’는 그렇게 심술"은 것이어서 꺼내어 내팽개칠 수도, 그런 것은 없다고 자기 최면을 걸 수도, 무조건 굴복할 수도 없는, 속수무책의 존재인 것은 아닐까. 동자, 즉 문학의 신은 저렇게 칼날같이 예리하고 첨예한, 올라서면 발바닥이 갈라지고 마는 칼날 / 불화의 경계 위에 살 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구에서의 ‘경청’은, 오래 갈 것 같았다. 대구행의 당초 목적이 그의 시세계와 시 쓰기에 대한 캐묻기나 확인하기는 아니었다. 시의 텍스트 안으로 들어가 현미경을 들이대는 것도 중요하지만, 텍스트 밖에서 이 시대를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한 탁월한 시인의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 다면 하는 바람이었다. 시의 밖에서 시를 향해 던지는 시인의 ‘방백’을 말이다. 그 바람은 ‘기 대 이상’이었다. 돌아와서 나는 지금 다시 그의 시 한 대목을 읽는다.
한때 그는 벌집같이 많은 눈을 가졌네 이제 씨가 빠진 해바라기 꽃대궁처럼 그의 눈은 텅텅 비었 네 그의 고통은 말라버렸네 겨울에 그의 꽃대궁이 꺾여 눈발에 묻힐 때 그의 생애는 완성되네 그 가 본 것은 환상이었네
이성복 시인의 네번째 시집에 실린 "천사의 눈" 2연이다. 이 시의 ‘그’가 1인칭이 아니고 3
인칭으로 읽힌다면 그대는 아직 희망이 있는 것이다.
이문재 시인. 본지 편집위원. 1959년 김포에서 태어났다. 시집으로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산책시편』이 있다.
첫댓글 잘 보고 나갑니다........
콜로퀴엄엄 이성복시인 시인 명가의가 있었으나 사정상 듣질 못하구, 그의 시론을 이렇게나마 접하니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마리님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