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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정보가 새고 있다
수사반이 죽은 강치수에게 얻은 것은 두가지였다.
하나는 그가 숨을 넘기기 직전에 중얼거린‘2,4,
다른 하나는 그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메모 쪽지였다.
‘2,4,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무도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다.
반면 메모 쪽지는 분명한 의미를 보여 주고 있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볼펜으로 적혀 있었던 것이다.
‘빨리 피하라. 너희들은 경찰에 포위되어 있다. 경찰이 너희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
출구는 봉쇄되어 있으니 화장실 창문을 통해 달아나라.’ 그것은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그것을 한번씩 읽어 본 수사요원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건 단적으로 우리의 수사 정보가 새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거야.
도대체 어떻게 된일이야?"
수사본부장은 흥분한 나머지 책상을 두드리며 수사요원들을 쏘아보았다.
그가 흥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체포 직전에 정보가 새어 나감으로써 범인 체포에 결정적인 증언을 해줄지도 모를
인물을 잃었으니 말이다.
"클럽에서 강치수에게 메모지를 전해 달라고 부탁한 자의 인상이 당구장에서
돈가방을 가지고 간 자의 인상과 흡사합니다. 웨이터의 증언입니다."
조태가 상사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는 이스탄불의 웨이터를 데려다가 신문했던 것이다.
그 웨이터는 어떤 사람의 부탁을 받고 강치수에게 메모지를 전달해 주었던 청년인데,
그 바람에 장시간은 아니지만 수사본부에 연행되어 곤욕을 치러야 했던 것이다.
"그 자가 바로 범인이야! 범인은 대담하게도 나이트 클럽 안에까지 들어왔던게 분명해!
그 메모지를 전달해 주기 위해서는 클럽안에 들어올수밖에 없었어!
놈은 그러니까 우리 손아귀에 들어왔다가 달아난 거야!" 본부장은 억울해 못 견디겠다는
투로 말했다.
수사 요원들은 모두 흥분해 있었다. 사건은 해결되기는커녕 더욱 크게 확대되었던 것이다.
이제 사건은 단순한 유괴 사건 정도가 아니었다. 엄연히 살인 사건으로 확대된 것이다.
"놈은 왜 기를 쓰고 그 메모지를 강치수에게 전달해 주려고 했을까?"
본부장은 좌중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거야 강치수를 유인해 내어 제거하려고 그런거 아닙니까." 한 수사관이 재빨리 말했다.
"맞았어, 바로 그거야! 강치수는 놈이 누군지 알고 있어.
그래서 범인은 우리보다 한발 앞서 강치수를 제거한 거야. 문제는 범인이 우리가 이스탄불을
덮친다는것을 어떻게 알았느냐 하는 점이야. 이건 정보가 새지 않으면 알수 없는 일이야.
정보가 새고있어! 이 중에 누군가가……."
본부장은 마지막 말만은 차마 수 없었던지 말끝을 흐렸다.
"범인은 적시에 나타나서 강치수를 제거한것 같습니다." 허걸이 말했다.
그 역시 정보가 새고 있다는데 대해서는 이의가 없었다.
수사정보가 새고 있다면 그것은 정말 큰일이었다.
"왜 정보가 새고 있지? 범인이 수사본부 안에 도청 장치라도 했단 말인가?"
"범인은 혼자가 아닌 것 같습니다. 공범이 있지않고는 수사 정보를 얻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누군가가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공범이 있을 가능성이 많아.
이제부터 여러분이 신경을 쓸것은 수사정보가 새지 않도록 조심하는 일이야.
이 안에서 주고받은 말을 밖에 나가 흘리면 절대 안돼.
기자들에게 발표하는 것은 일단 내 허가를 받고 나서 하도록.
그리고 정보가 새고 있는 곳을 빠른 시간 안에 알아내야 해.
그걸 알아내면 범인은 체포한거나 마찬가지일 거야."
본부장은 조태와 허걸을 따로 불러 정보가 누구로부터 새고 있는지 그것을 탐지해 내라고
특별히 당부했다.
"범인이 혼자가 아니고 공범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수사본부를 나서면서 허걸이 조태에게 물었다.
"글쎄, 그럴 가능성이 많지 않아?"
"꼭 그렇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범인은 혼자일수도 있습니다.
수사 정보란 우연히 얻어 들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난 우연이라고 생각지는 않아."
"저도 우연이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정보가 어디서 새고 있는지 어떻게 알아내지?"
"이제부터 알아봐야겠죠. 범인은 의외로 가까운 데 있는지도 모릅니다.
가까운 데서 우리들의 움직임을 웃으며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이 사건이 제1단계로 접어들었다고 생각해.
유괴 사건이 마침내 살인 사건을 몰고 왔다고 생각해.
제2, 제3의 살인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어.
그리고 청미는 이미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더 커졌어.
강치수를 칼로 찔러 죽인 잔인성으로 보아 인질을 지금까지 살려두었을것 같지가 않아."
"강치수를 살해하면서까지 자신을 지키려고 한것으로 보아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볼수 있죠.
하지만 예외라는 것에 저는 기대를 걸고 싶습니다. 언제나 변수가 작용하게 마련이니까요."
"자넨 언제나 낙관적이야."
경찰은 코브라파 일당을 밤새 신문했다.
죽은 강치수가 범인을 알고 있다면 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들의 다른 범죄 행위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경찰은 오로지 그들이 유괴범을 알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이번 유괴 사건과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었고,
그래서 그 점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추궁해 들어갔다.
그러나 밤을 꼬박 새우면서 신문한 결과는 아무것도 없다 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유괴사건과 아무런 관계도 없었고 범인의 얼굴을 알지도 못했다.
홍상파가 일억을 날리던 날밤 코브라파 일당은 당구장에 있지도 않았다.
오직 강치수만이 당구장에서 범인과 당구를 쳤던 것이다.
강치수는 스물아홉 살이었다. 그리고 그는 혼자 몸이 아니었다.
천호동에 있는 사글세방에는 그의 아내와 일곱살짜리 아들이 살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만삭이 된 몸으로 형사들을 맞이했다.
형사들은 먼저 범인의 몽타주를 보였다. 그것을 들여다본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는 전혀 모르는것 같았다.
그녀는 남편의 죽음까지도 아직 모르고 있었다.
남편의 죽음을 알리자 그제서야 어린 아들을 부둥켜안고 울었다.
형사들은 다시 몽타주를 보이면서,
"이놈이 바로 당신 남편을 죽인 범인이오. 집에 한번쯤 찾아왔을 텐데 그래도 모르겠소?"
하고 다그쳤지만 그녀는 원망 어린 눈으로 그것을 들여다보면서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신원 조회 결과 강치수에게는 전과가 있었다.
칠년전 그는 강도 강간으로 사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한 경력이 있었다.
그후로는 전과가 없었다. 그러나 코브라파 일당을 족친 결과 그 동안 드러나지 않은
범죄가 열다섯 건이나 되었다.
허걸은 강치수에게 메모지를 전 준 이스탄불의 웨이터를 다시 번 만나 보았다.
"자, 처음부터 다시 한번 말해 봐요. 자세히 말이야.
이건 아주 중요한 거니까 귀찮겠지만 사실대로, 그리고 아는 대로 이야기해 봐요."
지칠 대로 지친 웨이터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다 이야기했는데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다시 한번 말해 봐요. 새로운 사실이 드러날지도 모르니까.
그 손님전에 본적이 있나?"
"아뇨, 처음이에요. 그 손님이 들어온것은 오후 여덟 시경이었어요.
룸을 달라고 하기에 3번 룸으로 안내했어요. 어떤 아가씨하고 함께 왔었어요."
웨이터의 말이 그 아가씨는 미인측에 들기는 어려운 그저 그렇고 그런 차림의
좀 야한 여자였다고 했다. 덧붙여 말하는 것이 못생겼기 때문에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 손님은 맥주 네병과 안주를 시켰습니다.
그리고 아홉시쯤 되었을때 저를 불렀습니다. 술값을 미리 계산하면서 거스름돈 오천원을
저에게 팁으로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메모 쪽지를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흰티셔츠를 입은 청년을 가리키면서 그 청년에게 쪽지를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시키는 대로 전해주었을 뿐입니다. 전 그 사람 알지도 못하고, 잘못한 것도 없습니다.
"웨이터는 피곤에 지친 얼굴로 말했다.
"그 사람이 클럽을 떠난 것은 언제였나?"
"그러니까 쪽지를 전해 주고 나서 바로 가보니 보이지 않았습니다.
감쪽같이 사라져서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여자와 함께 사라졌나?"
"네, 3번 룸이 텅 비어 있었으니까요."
"쪽지를 전해 받은 청년은 뭐라고 했나?"
"이게 뭐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3번 룸에 있는 손님이 전해 달라고 부탁하더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3번룸에 가보는것 같았습니다만 그때는 그 손님이 떠나고 난 뒤였습니다."
"3번 룸에 있던 그 손님 인상 착의를 말해 주겠나? 자세히 말이야."
"안경을 끼고 있었습니다. 테가 검은 안경이었습니다.
키는 작은 편이었고 나이는 마흔쯤 돼 보였습니다. 턱은 뾰족했고 광대뼈가 튀어나와
있었습니다. 눈은 움푹 들어가 있었습니다. 말투가 몹시 느리고……
어쩐지 기분 나쁜 목소리였습니다. 머리는 기름으로 발라 붙였습니다.
그리고 위에는 흰색 사파리를 입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할말이 없습니다."
허걸은 다음에 강치수의 애인을 만나 보았다.
그녀는 강치수가 피살되던 날 밤 그와 함께 이스탄불에 춤추러 왔던 아가씨였다.
그녀는 여대생으로 강치수를 알게 된지는 두달쯤 된다고 말했다.
어리석게도 그녀는 강치수에게 아내가 있는지도 모른채 그와 결혼까지 약속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강치수의 죽음에 별로 슬퍼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이 사람 본적 있나요? 강치수와 자주 만난 걸로 알고 있는데……."
허걸은 범인의 몽타주를 내보였다.
"본 적 없어요."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2,4,
정말 공범이 있는것일까. 범인은 앞으로 좀처럼 자신을 노출시키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짓인가를 알고 있기 때문에.
하긴 자신을 노출시킬 일도 앞으로는 별로 없을 것이다.
범인은 지금까지 두번 자신을 노출시켰다.
한번은 당구장에 나타나 돈가방을 챙겨갈때, 또 한번은 강치수를 제거하기 위해
이스탄불에 나타난 것이 그것이다.
놈은 수사정보에 접근하는 것도 삼갈것이다. 일단 위험 요인을 제거한 이상 수사정보에
접근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는 수사원 외에 수사 정보에 접근할수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짚어 보았다. 먼저 생각난 사람이 홍상파였다.
홍상파·송묘임·송태하·송지회로 이어지는 얼굴들이 어지럽게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들과 함께 기자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 홍상파:그는 유괴된 청미의 아버지다. 그에게 어떻게 의심을 둔단 말인가.
* 송묘임:그녀는 청미의 어머니다. 그녀를 의심할수는 없다.
* 송태하:그는 청미의 외삼촌이다. 왜 조카를 유괴하겠는가.
* 송지회:그녀는 청미의 이모이다. 그녀 역시 수사대상에서 제외시킬 수밖에 없다.
* 기자들:그들은 항상 수사 본부에 드나들면서 정보에 접할수있는 기회가 많다.
그러나 그들중의 누군가가 범인과 내통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 수사반:정말 곤란한 상대다. 의심하는 것은 좋지만 그들을 난처하게 만들지는 말자.
그러고 보니 아무도 의심할 만한 사람이 없다.
모두가 신원이 확실하고 청미가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뿐이다.
그러나 일단은 모든 주위 사람들을 의심해 볼수도 있는 일이다.
범인은 의외로 가까운 데서 맴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의심해 보는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수사관은 누구도 믿어서는 안된다.
모든 사람들을 일단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정보가 새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말이다.
그러고 보니 짚이는 인물이 한명 있었다. 청미의 외삼촌인 송태하 기자였다.
그는 청미의 외삼촌이기 때문에 수사 정보에 자연스럽게 접근할수 있다.
더구나 그는 기자가 아닌가. 그는 물론 경찰이 이스탄불을 덮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른 기자들이 모르는 것도 그는 알고 있다.
그는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있기 때문에 정보원이 풍부하다.
그러나 그를 맞대 놓고 신문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송태하 기자의 일과는 아침 아홉시에 신문사에 출근하여 한시간 가량 머물다가
수사본부로 가서 그곳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낸 다음 오후 다섯시에 신문사로
돌아와 여섯시에 퇴근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퇴근 후에도 그는 수사본부에서 거의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밤이 깊어서야 팔층에 있는 누나의 아파트로 가서 잠자리에 드 것이었다.
강치수가 살해된 지 이틀후, 그러니까 7월 24일 오후 다섯시 조금 지나 J일보 사회부의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전화통 앞에 앉아 있던 기자가 전화를 받더니 그것을
송태하기자에게 넘겼다.
"나……장만두네, 잘 있었나?" 태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자기 귀를 의심하고 다시 한번 물었다.
"네? 누구시라구요?"
"장만두라니까. 기억하겠나?"
"아이구, 난 또 누구시라구요! 하도 오랜만에 전화를 주셔서 미처 못알아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수인사가 지난후 상대방은 물었다.
"저녁에 시간 좀 낼수 없겠나?"
태하는 난처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그를 만나야 할 이유 같은 것이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온 사람한테 무슨 일로 그러느냐고 따져 묻기도 곤란했다.
그런 것도 그런 것이지만 그는 퇴근 후에 약속이 있었다.
그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애인이 있었다. 그들은 10월쯤해서 식을 올리기로 되어있었다.
두달전 맞선을 보고 서로 마음에 들어 거의 매일이다시피 만나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의 조카가 유괴되는 사건이 발생하는 바람에 서로 만나지 못한 지가 일주일이 넘었다.
그도 여자가 보고 싶었고 여자도 그를 보고 싶어했다.
그래서 오늘 퇴근후에 만나기로 했던 것이다.
"네, 좋습니다." 그는 장만두를 만나 보기로 했다.
뭔가 부탁하려고 그러는 것이겠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여섯시 반에 어떤가?"
"일곱시면 좋겠는데요."
태하는 여섯시 반에 약속 장소에서 애인을 만났다.
그리고 중요한 일로 가봐야 한다고 하면서 차만 한잔 마시고 일어섰다.
그의 애인은 모욕을 당한듯 얼굴빛이 붉어졌다.
일곱시 오분에 그는 장만두와 약속한 다방으로 들어섰다.
장만두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구년만의 대면이었다.
장만두는 많이 늙어 있었다.
이제 마흔인데 흰머리가 눈에 띄게 많아 보였고 얼굴의 주름살도 훨씬 많아져 있었다.
그는 중키에 마른 편이었고 얼굴빛이 조금 검어보였다.
젊은 시절의 희망을 접어 둔채 외롭게 나이 들어가는 중년 사내의 초라함 같은 것이
그의 몸에는 배어 있는 듯했다.
한가지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의 맑은 눈빛이었다.
누나가 이 남자에게 끌린 것은 저 눈빛 때문이었을 거야 하고 태하는 생각했다.
장만두. 그는 송묘임의 과거 애인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이뤄지지 못한 채
비련으로 끝나야 했다. 그것이 순전히 누이 때문이라는 것을 태하는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눈 다음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차를 마시는 동안은 의례적인 이야기만을 나누었다.
"어떻게 지내십니까?"
"나야 뭐 여전하지. 지금은 K여고에 있네."
그는 수학 교사였다. 송묘임은 여고시절 그에게 수학을 배웠다.
그러니까 그는 송묘임의 은사인 셈이었다.
"자제분은 몇이나 되십니까?" 그 질문에 장만두는 쓸쓸하게 웃었다.
"난 아직 결혼을 못했네."
그 말을 듣는 순간 뭉클한 것이 가슴에 와닿는 것을 태하는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괜한것을 물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장만두가 그의 누이를 얼마나 깊이 사랑했던가를 잘 알고 있었다.
누이와 헤어진 뒤 아직까지 그 상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내에게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의 누이와 장만두가 어떻게 맺어지게 되었는가는 태하도 자세한 것은 잘 모르고 있었다.
아무튼 그들은 집안이 다 알도록 열렬히 사랑했고, 결혼까지 약속한 사이였다.
태하도 그를 좋아했다. 그는 겸손하고 조용한 인품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법 없이도 살만큼 선량했다.
그런데 집안에서는 그들의 결혼을 한사코 반대했다.
일개 평교사에게 딸을 시집보낼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러다 보니 나이 차이가 많다느니 신랑측이 너무 가난하다느니 하는 것들이 들먹여졌다.
사실 장만두의 집안은 몹시 가난했다. 그는 오 남매의 맏이였다.
그리고 부모가 다 살아있었다. 따라서 결혼하면 묘임이 그 집안에 들어가서 시부모를
모셔야 하고 시동생들의 뒤치다꺼리까지 맡아 해야 할판이었다.
그러니 묘임의 집안에서 한사코 반대하고 나선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묘임은 그 사이에서 고민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그녀 앞에 홍상파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를 보자 그녀의 마음은 갈대처럼 흔들렸다. 그는 잘생기고 멋진 사내였다.
그리고 얼마든지 뻗어 나갈수 있는 남자 같았다.
그에 비해 장만두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수학교사였다.
고민 끝에 그녀는 마침내 장만두를 떠나 홍상파의 품에 안겼다.
그것이 지금부터 구년 전의 일이었다.
결국 그녀가 그를 배신한 셈이었다. 태하는 그때 누나를 신랄하게 비난했었다.
그때 그는 대학생이었는데, 누나의 배신 행위가 더없이 비열하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세월이 흐르자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리고 장만두라는 사람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져 뇌리에서 거의 사라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참, 제가 J일보에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고 전화를 하셨습니까?"
"우리는 각별한 사이였지 않았나. 난 항상 만나지는 못해도 자네를 생각하고 있었지.
그리고 난 J일보 애독자 아닌가. 사회면 기사 끝에 실리는 자네 이름을 보고 자네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지.
자네 기사가 나오면 빼놓지 않고 보고 있다네."
"그러셨군요."
묘임을 통해 알게 된 그들은 그의 말마따나 각별한 사이였다.
태하는 앞으로 매형이 될 그를 아주 좋아했다.
그러나 누나가 그와 헤어짐으로 해서 태하 역시 그를 만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차를 마시고 난 그들은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만두가 저녁을 사겠다고 하면서 태하를 일식집으로 안내했다.
"자네 누나가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은 신문을 통해 알고 있지."
글라스에 맥주를 따라 주면서 만두가 말했다.
마침내 누나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 것이다.
태하는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누님 댁은 풍비 박산입니다. 모든 것이 정지 상태입니다."
"아이 이름이 청미라고 했지?"
"네, 그렇습니다. 아주 귀여운 아입니다."
"가능성이 전혀 없나?"
"절망적입니다." 태하는 신음하듯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검은 장만두의 얼굴이 더욱 검어지는 듯했다.
"왜 하필 그 애를……." 만두는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제가 하는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그 많은 아이들 중에 왜 하필 그 애를 유괴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