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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문학작품- 두 편의 장편소설
나의 청년 후반기 (1950-1954년, 19-23세)는 국가적으로는 6·25 전쟁 즉 동족상잔의 수난을 겪은 시기요, 개인적으로는 나의 병고의 소강상태에서 많은 공부를 하고, 두 편의 장편소설을 썼던 시기였다. 나는 신체적인 장애로 군대에 가지 못 하는 대신 고향 집으로 가서 요양하면서 그 기회에 많은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유교, 불교, 동양철학, 한국 역사, 국어 공부, 문학, 위인전 등 많은 독서를 한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많이 한 것은 우리말 공부와 문학으로서, 우리말 공부로는 최현배의 ‘우리 말본’이고, 문학으로서는 여러 작가의 여러 작품을 읽은 중에서 특별히 감동한 것은 이광수, 박종화, 이무영의 여러 작품이었다. 책이 있는 대로 다 읽고, 빌려서도 다 읽고 나서 시간이 많이 있는데, 책을 살 돈은 없고 시간이 있어 그저 취미로 소설을 써 보게 된 것이 장편소설 두 편을 쓰게 된 것이었다.
■ 첫 소설의 반응
내가 처음으로 문학생활을 한 것은 앞으로 문인이 되겠다고 하는 생각으로 한 것은 아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약 4년 간 고향에서 지낼 때 시간이 있어 글을 써본 것이 한 편의 장편소설(상·하권, 557면)이 된 것이었다. 1952년(21세 시) 봄의 일이다. 원고지도 아닌 백지에 빡빡하게 300여 매를 써서도 나로서는 책을 낼 생각을 안 하고 있는데, 대구에서 교직생활을 하고 계시는 형님이 방학 때 고향 집에 다니러 와서 깜짝 놀라 “네가 어떻게 이처럼 긴 소설을 썼니?” 하시면서 출판을 하도록 하자고 하시기에 나는 형님 마음대로 하시라고 하였다. 형님은 그것을 당시 대구에 피난 와 있는 서울의 선진문화사라는 출판사에 맡겨서 출판을 하였다. ‘愛情千里’라는 제목으로 나온 이 연애소설은 20대 초반의 신인이 썼다는 특색 때문인지 8쇄까지 상·하 2권 또는 단권으로 나오다가 그 후에는 절판이 된 듯하다. 얼마 전 고서를 수집하는 어떤 분이 고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그 가격을 물으니 5만원을 호가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소설에 대해서는 나로서는, 무명의 신인 작품을 출판사에서 출판을 해 준 것만이라도 뜻밖의 일이라 생각했는데, 여러 번 판을 거듭한 것 또한 뜻밖의 일이었다. 출판에 관한 사항을 잘 알지 못 하는 형님은 이 소설 원고를 출판사가 요구하는 대로 원고 전체 판권을 일시불로 팔아서 그 후에도 몇 쇄나 더 했는지는 지금껏 모르고 있다. 그런데 내가 한번은 고향인 성주읍에 있는, 가장 큰 제일서점에 가보았더니 거기에는 큰 광고문이 다음과 같이 붙어 있었다.
“고향 성주 출신 문학청년 나채운의
장편소설 ‘애정천리’가 나왔습니다”
이 광고를 본 성주중학교 동기생 친구들이나 재학생들은 기뻐했을지 모르지만 저자인 나는 좀 부끄러웠다. 왜냐하면 나로서는 문학생활을 많이 하지도 않은 나의 처녀작이 문학적인 면에서 평가할 때 훌륭한 작품이 못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후 내가 서울에 가서 대학에 다닐 때 한번은 성주 출신 도진희(都晋熙) 국회의원(도의원은 아버지의 친구이며 나의 외척 아저씨)을 효자동의 국회의원 아파트로 인사차 찾아갔을 때 그의 딸들이 내가 소설 ‘애정천리’를 쓴 사람인 것을 알고는 자기가 그때까지 수많은 소설을 읽었는데, ‘애정천리’ 만큼 재미있는 소설은 처음 읽었다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다시 한번 부끄럼을 느끼면서, 그러나 그 소설이 어린 여고생들의 사춘기 심리에는 공감을 일으키는 면이 있음은 확인할 수 있었다.
■ 베스트셀러가 된 둘째 소설
그러나 이 첫 소설에 대하여 나는 불만이 컸다. 그 불만이란, 아무리 문학이라고 하더라도 단순히 재미있는 이야기뿐이라면 그것이 인간(독자들)의 심성과 생활에 무슨 공헌이 되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즉 문학에도 어떤 사상성이 있고 교훈적인 것이 있어야 되지 않으냐 하는 나대로의 문학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세계적인 문호를 두고 말할 때, 나는 셰익스피어 편보다는 톨스토이 편에 서고 싶은 것이다. 재미로 말하면 극작가 셰익스피어가 쓴 작품들(예를 들어 ‘로미오와 줄리엣’, ‘베니스의 상인’, ‘하믈렛’ 등)이 대중들의 기호에 맞는 바가 많겠지만, 사상적이고 윤리적인 면에서 말한다면 농민운동가이며 인도주의자인 톨스토이의 작품(예컨대 ‘전쟁과 평화’, ‘부활’, ‘안나 칼레리나’ 등)이 얼마나 더 역사와 인생을 바로 가르치고 계도하는 데 큰 공헌을 하겠느냐 하는 생각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1950년대에 ‘청춘극장’이란 김내성의 5부작 장편소설에 대하여 평론가 백철(白鐵)이 말한 “소설은 우선 재미가 있어야 한다”란 말에 50% 밖에 찬성하지 않는다. 이광수의 문학이 높이 평가를 받는 것도 어떤 평론가로부터는 ‘설교문학’이니 ‘도덕문학’이니 하는 평까지 받을 정도로 사상적이고 교훈적인 면이 있어서가 아닌가 하는 것이 나의 문학관이다.
첫 장편을 쓰고 아직도 대학교 공부를 할 수 있게 가정형편이나 나의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기까지 얼마간 시간의 여유가 있어, 나는 문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토대로 정말 내가 쓰고 싶고 또 독자들에게 그 어떤 사상적이고 교훈적인 감동을 줄 수 있는 소설을 써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서 쓰게 된 것이 둘째 장편 ‘초가집’이었다. 시기적으로 보면 내가 둘째 장편을 쓰기로 작정한 것은 아버지의 소원을 따라, 다시 말하면 아버지에게 효도를 하기 위하여 곧 대학에 가서는 전적으로 법학을 공부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는 때여서 마치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는 심경이었다. 그러면서도 나의 심중(心中, 心重)은 문학에 있기에 나는 당분간은 소설을 쓰는 데 집중을 하였다.
두 번째의 소설을 쓰면서 나는 첫 소설 ‘애정천리’를 쓸 때와는 아주 다른 경험을 한 사실을 참고로 증언하지 않을 수 없다. 21세 때 쓴 첫 장편은 말 그대로 애정소설인데, 그것을 쓰는 데는 여느 소설가나 하는 것처럼 처음에 세밀하게 플롯(plot, 구상)을 짜서 남녀의 사랑의 이야기를 엮어 나갔는데, 둘째 장편인 ‘초가집’을 쓰는 데는 그런 구상을 전연 하지 않고 마치 누가 불러주는 것을 받아쓰는 것처럼 일사천리로 써내려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6개월 만에 탈고를 하였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 신기하게 생각되며, 그 당시는 내가 어떻게 그처럼 쓸 수 있었는지를 이상하게 생각도 하지 않은 사실조차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작년 가을 오늘날의 대표적 소설가인 이문열 씨를 만나 이야기를 하는 중에 그러한 나의 경험을 말했더니 자신도 그러한 경험이 있었다고 말을 하였다. 나는 이 점에 대해서 신학교에 들어가서 성경의 저자들이 성경을 기록할 때는 하나님의 영감(inspiration)을 받아서 그러한 훌륭한 글을 썼다는 것을 배웠을 때 그 영감이란 것이 내가 ‘초가집’을 쓸 때와 같은 것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이 소설이 이렇게 아무런 플롯도 없이 6개월 정도의 짧은 기간에 쓸 수 있었던 것은 내 마음 속 깊이 오랫동안 잠재해 있던 깊은 사상이 강하게 발현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써 놓은 둘째 소설은 그러나 내가 곧 대학교 공부를 시작하고, 한편 첫 출판사를 잘못 만나서 오랫동안 나의 관심 밖으로 밀려 있다가 한번 나의 친구인 박달진 목사(장신대 제 57기로 1년 후배)가 대구에서 우리 집에 며칠 머무는 동안 내 원고를 보고 놀라면서 자기가 아는 출판사에 출판을 하도록 말해 보겠다고 하여 가지고 가서 1971년에야 출판이 되었다.
이 두 번째 소설은 출판이 되자 뜻밖에도 신인으로서 기성작가들을 제치고 전국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이것은 나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서울과 지방에서 두 번이나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이 소설(상·하권, 각 560 여면)에 대해서 문학 평론가 중에는 기독교문학이라 성격 짓기도 하였으나, 저자인 나로서는 ‘애국문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사랑’을 주제로 한 소설로서, 그 사랑이란 첫째 나라에 대한 사랑, 둘째 인도주의적인 사랑(박애사상, humanitarianism), 셋째 하나님에 대한 사랑(기독교신앙)을 다룬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 여러 독자들로부터 극찬과 감동의 편지가 오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그 책의 내용에 짙은 애국심과 인도주의적인 사랑이 있어 다른 소설과는 다른 독특성 즉 사상성이 있어 그런 점에서 특별한 감동을 받은 결과라고 여겨진다.
나는 그때 장신대 교수로 있을 때였으나 아무도 내가 과거에 문학생활을 했다는 사실도 거의 모르고 있었고, 많은 사람이 신문 보도를 보고도 저자가 나와 동명이인(同名異人)인 줄 알았다고 한다. 그 때 한번은 김윤식 목사님(종암교회 담임)이 전화로 물으시기를 “신문(중앙일보)에 베스트셀러로 이름이 난 나채운이 우리 나채운이오, 다른 나채운이오?”라고 물으셔서 내가 “우리 나채운입니다”라고 대답한 일도 있었다. 내가 뚜렷한 사상을 가지고 쓴 두 번째 장편에서는 주인공 ‘한재운’을 통해서 나의 사상 인생철학을 마음껏 나타낸 것으로서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이 소설은 1940년대 아직도 농업이 우리나라의 주산업이었을 때를 배경으로 한 것으로서, 소설 중 농촌운동에 자신의 전 생애를 바치는 젊은 애국자인 주인공 한재운은 바로 저자인 나 자신의 사상과 이상적인 생의 한 단면을 투영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주인공의 이름을 명명할 때에 ‘한’(韓)이란 성은 ‘한국’의 ‘한’에서 따오고, ‘재운’이란 이름은 ‘채운’에서 한 획을 뺀 ‘재운’으로 비슷하게 한 것이다.
이제 나의 장편소설 ‘초가집’의 몇 가지 면모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1. 저자의 머리말
1) 초판 머리말 ......(전략)
이 작품 속에는 적어도 세 가지의 사상이 들어 있다. 그것은 농촌에 대한 사랑과 인도주의 사상과 기독교 신앙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애국사상과 도덕과 종교라고 볼 수 있다. 현대인은 무엇인가 피부로 느끼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많은 문학작품들이 그런 것에 영합하려고 한다. 그러나 진정한 문학은 피부와 말초신경을 자극하기보다 인간의 영혼과 심장을 울리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후략)
2) 재판 머리말 .......(전략)
나는 이 작품에서 세 가지의 사랑을 그려 보았다. 자신에 대한 사랑을 ‘작은 사랑’, ‘좁은 사랑’, ‘낮은 사랑’이라 보고, 그것에 대응하는 ‘큰 사랑’은 나라에 대한 사랑, ‘넓은 사랑’은 인도주의적인 사랑, ‘높은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라고 그려본 것이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애국심과 박애정신과 기독교신앙으로 사랑을 가르치는 “사랑의 교훈서”이다.
....... (후략)
4. 한 독자로부터의 독후감 “감동적인 교훈과 흥미가 병행”
이 소설을 읽고 논평을 쓴 김재남 교수는 자신이 강의를 하는 장신대 학생들에게 독후감을 써 내도록 과제를 내어 많은 학생들로부터 크게 감동을 받았다는 반응을 받았거니와, 한 번은 어떤 독자로부터 나에게 다음과 같은 독후감을 써 보내오기도 하였다.
“평화롭고 아름답게 시작되는 이 글은 고귀한 사랑과 사상의 실체를 보여주면서 깊은 사고와 철학, 의에 강한 투지로 엮어 독자를 책 속에 깊이 파묻히도록 이끈다. 이 책은 요즘의 흥미 위주의 많은 소설과는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저자가 외치고 싶은 강한 교 훈이 끊임없이 한 줄기를 타고 흐르면서 진한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새겨준다. ...(중략)
흔히 소설은 교훈적 메시지를 강하게 강조하게 되면 흥미면에서는 당연히 그 농도 가 줄어 지루함과 무거운 감을 주기 쉽다고 생각하던 편견이 여지없이 깨어지고, 나는 557 페이지나 되는 두꺼운 이 “초가집”을 읽기 시작하여 끝장까지 거의 단숨에 눈을 뗄 수 없도록 잡힌 채 읽었다. ...(중략).
이 책을 읽는 독자는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나와 같이 진한 감동으로 삶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고 내면의 변화를 주는 동기가 되리라 믿어진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강한 교훈의 감동을 주면서 진한 흥미까지 병행하고 있을까 하는 것과, 남성적인 강한 티가 흐르면서도 섬세하고 아름다운 표현과 묘사에 놀랐고, 소설 전체에 담긴 박식한 내용과 능숙한 문학 솜씨에 당시 저자의 연령(21세)에 의구심이 일도록 감 탄했다. ...(종략). 92. 12. 11. 김현숙 올림.
나는 이 독자의 독후감을 읽고 이 작품의 저자인 내가 무명의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베스트 셀러가 된 것에 이해가 되기도 했지만, 더 놀라운 한 가지 사실은 내가 친근하게 지내던 오리 전택부 선생이 80대의 고령에서 두 내외분이 이 소설을 단숨에 읽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당시 아버지의 소원 때문에, 아니 나의 너무나 순진한 효성(孝誠) 때문에 문학을 떠나 법학으로 몇 년을 보낸 것이 아깝고, 또 한 편 하나님의 소명(召命) 때문에 문학을 포기한 것 또한 후회스럽게 생각하는 때가 없지는 않다. 왜냐하면 나는 일생동안 내 작품 “초가집”의 주인공 ‘한재운’의 삶을 살면서, 자신에 대한 이기적인 작은 사랑, 좁은 사랑, 낮은 사랑을 떠나 나라에 대한 큰 사랑, 전 인류에 대한 넓은 사랑, 하나님에 대한 높은 사랑을 실천하면서 가르치는 독특한 문학가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전연 그 방면으로 공부할 수 있는 처지가 되지 못 한 것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대학에 법과로 가서 관리로 출세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아버지께서는 아직도 내가 대학에 들어가기도 전이지만 당시(1953년) 시행된 고등고시(현재의 사법고시) 예비고사에 응시해 보라는 것이었다. 철저한 유교 가정에서 자라난 나에게는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최고의 윤리여서 순종 외에 다른 생각을 해볼 여지가 없었다. 당시 시험은 임시수도 부산에서 시행되었는데 과목은 국사와 논술 두 과목이었다. 별 준비공부를 할 시간의 여유도 없이 아버지의 명령대로 응시를 했는데, 응시자 중 연소자로서 뜻밖에도 합격이 되었다. 이 시험의 결과로 아버지는 내가 대학에 법과로 들어가서 공부를 하면 고등고시 본고사에 합격할 것을 확신하시고, 당시 대구에 피난 와 있는 고려대학교(당시 서울대와 연세대는 부산으로 피난) 법과에 시험을 보라고 하셔서 응시를 하였고 합격이 되었으나 대학공부는 가정의 경제형편이 갑자기 어렵게 되어 후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