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동 아시아지만 본 사이트에서 중앙아시아로 분류 된 몽골지역과 관련이 많은 내용이라 이곳에 게시함.
동 아시아 유목민의 세계관(이영철)
一. 들어가는 말
목축문화란 가축사육문화의 한 형태로서 물이나 목초를 찾아 가축 떼를 이끌고 이동을 되풀이하는 목축 중심의 문화이다. 문헌에 등장하는 최초의 유목민은 주전 8세기 경의 스키타이인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유목문화는 러시아 동부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초원지대에서 발생해서 그 지역으로부터 시베리아, 티베트, 서아시아, 아프리카 등지로 확산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지상에서 몽골고원은 목축하기에 가장 적합한 대형 목초지로 평가된다. 목축을 위해 가축의 방목지를 찾아서 이동하는 “방목형 유목”(pastoral nomadism)의 형태는 오늘날 아프리카 서부, 중동지역, 몽골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그리고 시베리아 지역에 분포한다(Carmichael, 1991:9).
근대에 들어오면서 유목은 전 세계적으로 쇠퇴하고 있는 추세이지만 아직까지도 유목생활을 영위하는 유목집단이 세계의 여러 곳에 남아있으며, 최근에 들어와 유목이 오히려 활발해지는 추세를 보이고 있는 곳도 있다. 그러나 이 글은 ‘라마불교’라는 종교적 공통점을 지닌 동 아시아 지역, 특히 중국의 내몽골 자치구와 티베트, 외몽골과 함께 러시아의 부리야트와 투바 공화국 등지에 산재하고 있는 유목민들의 세계관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자 한다.
二. 유목민의 개념 이해
현대인들이 ‘유목’이란 용어를 종종 사용하고 있지만 유목이 갖는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그 뜻을 “정처 없이 발길이 닿는 대로 떠돌아다니며 살아가는 일종의 집시 같은 ‘방랑자’의 생활양식”으로 이해하는 경우다. 그러나 유목민의 이동은 결코 임의적이거나 생각나는 대로의 유랑이 아니며, 유목민들은 목적 없이 떠돌아다니는 낭만적이거나 비현실적인 개인주의자들이 아니다.
유목민들에겐 뚜렷한 목적지가 있다. 유목민을 의미하는 영어의 'nomad'란 단어도 그리스어인 ‘nemein’(목초지를 향한 방랑)에서 파생했다(Carmichael, 1991:8). 유목민은 풀과 땅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에 근거해서 판단하고 계획을 세운 후 목초지를 찾아서 옮겨 다닌다. 그러므로 유목민들은 기상과 자연환경의 변화에 대한 민감성과 함께, 주기적인 이동을 위한 계획성은 물론, 가축을 제어하기 위한 내구력, 순간의 판단력과 결정능력을 일상생활에서 키워온 사람들이다.
이와 함께 유목은 가축을 중심으로 이뤄진다는 점, 또 주어진 자연환경 속에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지속적으로 이뤄지는 미래지향적이고 친환경적인 경제활동이란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三. 유목민 세계관의 특성
1. 간소함을 추구
하나의 문명으로서 유목의 첫 번째 특징은 소박함이다. 유목지대의 풍경은 단조롭다. 인공물은커녕 나무나 꽃도 구경하기 어렵다. 하늘과 땅이 거대하게 시야에 들어오고, 그 안에 살아가는 인간과 동물이 띄엄띄엄 눈에 띨 뿐이다. 게다가 유목민은 씨를 뿌리지도, 땅을 경작하지도 않기 때문에 가축과 천막 위에는 별로 소유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프랑스의 석학 자크 아탈리(Jacques Attali)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노마드는 모아두지 않고 아끼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자신들이 기생하며 살고 있는 자연을 파괴하 지 않는다. 불, 지식, 제식, 이야기, 증오, 회한과 같이 가지고 다닐 수 있는 것들만을 전수한다. (아탈리, 86)
2. 이동성을 추구
유목 생활은 사람이 가축의 이동로를 따라가는 이동성에 기초를 둔다. 하자노프는 “유목은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광역적 이동을 중요한 행위로 하는 특이한 형태의 식량생산경제”라고 정의하고 몽골 유목민들이 북쪽으로, 겨울에는 남쪽으로 이동하는 거리가 무려 600 킬로미터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유목민은 이러한 광역적 이동을 수 천 년 동안 지속함으로써 자신이 속한 생태계를 집중적 사용으로 인한 훼손으로부터 보호하였고 초원을 주기적으로 소생시켰던 것이다.
과거에 몽골이 적은 수의 군대로 많은 적을 이길 수 있었던 비결도 바로 이 간소함(simplicity)에서 우러나오는 이동성(mobility)과 속도(velocity)의 우위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유목민이 조직한 군대는 군사 장비를 경량화해 속도를 늘릴 수 있었던 까닭에, 당시 유럽 기사단 갑옷과 전투 무기의 무게는 70 킬로그램이었지만 몽골의 유목민 군장(軍裝)은 7 킬로그램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높은 이동성은 유목민의 군사력을 강화시켰지만 경제력을 약화시켰다. 왜냐하면 무거운 물건을 많이 소유할수록 이동성이 줄기 때문에 부의 축적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유목사회는 빈부차가 두드러지지 않으며 사회구조가 대체로 평등하다. 농경사회처럼 부의 편재나 엄격한 사회계급구조가 발생하기 어렵다.
3. 자연친화적
유목민은 자연에 인위를 가하지 않는다. 농경이 자연에 인위를 가함으로써 가능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유목민은 가축 떼를 이끌고 주어진 생태계를 그대로 이용하면서 생활한다. 그러므로 몽골의 학자 하브흐(Kh. Khavkh)는 유목문화의 지도원리를 “자연과 조화 속에 사는 것”이라고 했고, 삼필덴데브(Kh. Sampildendev)는 “자연에서 보고 싶은 모든 것을 집 밖에 나가기만 하면 볼 수 있는 몽골의 깨끗한 자연은 유목적 삶과 문화에 깊이 관련된 것”이라고 밝혔다(정경일, 57).
四. 동아시아 유목민의 자연관
유목민에게 있어 자연은 숭배와 두려움의 대상이다. 유목민들은 초원과 동물에 대해 아무리 풍부하고 자세한 기술적 지식을 지닌다 해도 한파나 가뭄 같은 재앙을 일으키는 변화무쌍한 자연을 인력으로 통제할 수 없음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기에 동물과 인간의 생사를 주관할 뿐 아니라 위협하기도 하는 자연에 대해 경외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특히 농경민들과는 달리 축적된 곡물이나 음식이 부족하므로 급격한 환경변화로 인한 가축의 몰사는 유목민들에게 치명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자연친화적인 유목민은, 자연을 제어하는 인위적 기술의 발전에 있어서 정착민들보다 늦었던 것이 사실이다. 대부분의 유목사회에 있어서 자연과 맞서 자연을 제어하려는 과학적 사고보다는 자연을 숭배하고 자연과 조화하려는 애니미즘적인 종교성향이 강했다.
유목민의 애니미즘 성향은 첫째, 자연현상을 신격과 관련짓는데서 찾아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 몽골인들이 섬겨온 텡게르(tenger, 天神)의 개념에는 ‘하얀 천둥 텡게르’라든지 ‘비를 내리게 하는 텡게르’처럼 자연 현상과 관련된 신격이 포함되어 있다. 유목민은 종종 높은 산이나 강 같은 지역적 의미를 지닌 자연물을 신격화하기도 했다.
둘째, 전통적 유목민들이 지녀온 동물에 대한 태도 역시 애니미즘적인 자연관을 포함한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한 몽골인들의 사유의 원형은 신화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신화 속의 동물은 세상 창조의 협력자였거나 씨족의 조상이었을 뿐 아니라 인간과 함께 “중간 세계(中界)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살아있는 피조물”이었므로 유목민들은 동물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전승받았다.
셋째, 자연과 관계된 각종 금기(禁忌)들이 유목민의 일상생활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도 애니미즘적인 종교성향이 엿보인다. 물론 몽골 인들이 실천하고 있는 금기들이 모두 종교적 성격을 갖는 것은 아니며, 한편으로 생태학적 합리성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금기들이 시대를 초월해서 지속적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은 금기들을 철학적, 종교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유 없이 땅을 파서는 안 된다”라는 금기는 “우물을 만들 목적으로 만물의 어머니인 대지에 구멍을 파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대지에 대한 종교적 의미가 부착되어 있었으므로 지속적 영향력을 갖게 된 것이다.
유목민의 애니미즘적인 성향은 자손의 이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즉 유목민은 악신의 존재를 믿기 때문에 자녀에게 종종 괴기한 이름을 지어준다. 예를 들어 몽골의 어린이들은 어느 특정한 기간 매우 ‘이상한’ 이름을 갖는 것이 일반화 되어 있다. 이 경우 몽골 어린이들은 보통 두 가지 이름을 가지게 되는데, 하나는 공식적인 사용을 위한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역신을 속이기 위해 집에서 사용하는 이름이다. 대부분의 괴상한 이름은 후자에 해당하는데, 남자아이가 여자의 이름을 갖거나 어떤 경우엔 동물의 이름을 갖기도 한다.
五. 유목민의 우주관
동아시아의 유목민들이 가장 먼저 받아들인 신앙은 무속신앙, 곧 샤머니즘(shamanism)이었다. 원래 샤먼(shaman)이라는 말 자체가 동 아시아에서 유래한다. 즉 샤머니즘이란 말은 동 아시아에 살던 ‘에벵키’족이 무아지경의 상태에 이른 제사장의 정신적 특성을 일컬어 ‘샤먼’이라고 부르는데서 기원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양민종, 21).
1. 부리야트 샤머니즘의 우주관
동아시아의 샤머니즘은 바이칼 호를 중심으로 한 부리야트 족의 우주관에서 비롯한다(양민종, 55ff). 이 우주관을 이해하는 것이 동아시아 유목민들의 세계관을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부리야트 족의 우주관을 따르면 우주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하늘 위의 상계(上界)와 땅 위의 중계(中界), 그리고 땅 아래의 세계인 하계(下界)로 이뤄져 있고, 이 세 개의 세상은 영원한 푸른 하늘(허흐 멍흐 텡게르)를 정점으로 일곱 개의 층으로 나뉘어져 수직적인 위계질서를 이루고 있으며, 각 층에는 별개의 신 또는 정령들이 살고 있는데, 그들의 이름을 위에서부터 거명하면, ① ‘허흐 멍흐 텡게르’ 곧 영원히 푸른 천신(天神), ② ‘에첵 미르긍 텡게르’곧 지혜로운 어버지 신 ③ 하늘에 거주하는 신들 ④ 신들의 자손인 왕족 ⑤ ‘노용’또는‘자양’곧 위대한 남녀 샤먼들의 영, 종족의 시조가 되는 영웅들의 정령들 ⑥ 산, 강, 호수 등 거대 자연물들의 정령들, 질병의 원인이 되는 정령들, 조부와 조모, 영험한 처녀의 정령들 ⑦ 종족 사이에서 특별한 업적을 세우지 못한 일반인들이 사후에 변신하게 되는 영혼, 집안을 보호하는 조방신, 이승에서 모욕을 당했던 가난한 민중의 영혼, 병사한 사람들의 영혼 등이다.
일곱 계층 중 가장 위의 세 층에 해당하는 신들은 모두 다 하늘의 거주자들이며, 이 신들은 인간들처럼 결혼을 통해 자손을 갖게 되는데, 천신들의 자녀가 지상에서 인간의 육신을 얻고 삶을 영위하게 되면 이들은 인간이 사는 우주 곧 중계(中界)의 지배자인 왕의 지위를 얻게 되고, 지상의 왕이 죽게 되면 그의 영이 천계로 회귀해서 하늘 거주자인 신 바로 아래 신들의 위계인 ④의 세계에 편입된다. 예를 들어 칭기즈칸은 우주를 뜻하는 ‘칭기즈’와 지배자란 뜻을 가진 ‘칸’을 그 이름으로 삼고 있었으며, 그의 지배 하에 놓인 우주는 땅위 곧 중계(中界)였다.
인간은 사후에 자연으로 환원된다고 보는 점이 흥미롭다. 이것은 인간과 가축,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유목민의 삶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어 보인다. 이러한 자연 복귀설은 불교의 윤회사상과도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에, 바이칼 호수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몽골이나, 투바, 부리야트, 티베트에 거주하는 유목민들은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과는 달리 직선적 시간관념을 가진 이슬람 대신 불교를 쉽게 받아들였는지 모른다.
2. 샤머니즘이 라마불교에 끼친 영향
부리야트의 샤머니즘적 우주관은 동아시아 유목세계에 도입된 불교, 특히 달라이 라마 제도와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활불(活佛) 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즉 인간의 삶에 화를 몰아내고 복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우주에 떠다니는 무수한 영혼을 달래기 위한 중재자가 필요 했는데 바로 그 역할을 달라이 라마 곧 불보살의 화신인 활불이 맡게 된 것이다.
티베트 사람들이 달라이 라마의 책봉방법이나 달라이 라마가 정말로 공덕이 있느냐의 여부에 별다른 의문을 제기하지 않은 채로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인에게 관음보살의 화신일 뿐 아니라 절대적 신앙의 대상이자 정치적 결정권을 갖는 통치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도 티베트 사람들이 샤머니즘적 전통에 따라, 천신들의 자녀가 지상에서 인간의 육신을 얻고 삶을 영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인간이 사는 우주 곧 중계(中界)의 지배자인 왕의 지위를 얻게 됨을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최은경, 9-10). 실제로 달라이 라마의 의도적인 부인에도 불구하고 티베트의 대부분 사람들이 달라이 라마를 신으로 보고 있다. 시사저널도 인도 북부 다보의 칼라 챠크라 법회장에서 만난 티베트인들과 인터뷰에서 “티베트인들은 대부분 달라이 라마를 신으로 묘사했다”고 보도했다 (정희상, “대화와 비폭력으로 21세기를 열자”<시사저널> 1996년 8월, 36).
3. 샤머니즘적 우주관의 비판
신앙의 대상이 되는 신과 신의 세계, 사후의 영들이 머물게 되는 내세관들을 따져보면, 샤머니즘의 우주관은 기독교 등에서의 구원의 방식과는 달리 세속적 사회구조를 닮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세속적인 출세를 하는 왕이 천부적 신성을 타고났다든지, 세속적인 부와 명성을 축적한 행운이 사후에도 이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모든 인간들이 신 앞에서 동등한 기독교의 보편적 신앙 세계관과는 거리가 멀다.
일본의 야마구치 즈이호(山口瑞鳳)과 야자키 쇼캔(矢崎正見) 역시 “권력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일반 민중 속에 녹아있는 티베트 불교를 이용했다”고 주장했다. (야마구치 즈이호, 야자키 쇼켄, <티베트 불교사> 민족사, 1990:193-4).
六. 유목민의 내세관
타쉬켄트에 살았던 고대 유목민들은 지상에서의 삶을 마감한 후에 또 다른 세계에서의 삶을 지속하기 위해 생전에 친숙했던 물품이나 심지어 동식물, 하인들까지 함께 매장했다. 이것은 애니미즘 세계관에서 유례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혼은 사후에 다른 인간의 영혼이 될 수도 있고, 동식물이나 심지어 기타 자연물에 깃들이거나 살아있는 존재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유목민의 장례식은 샤머니즘 및 라마불교와 많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그들의 죽음에 대한 개념은 윤회환생(輪廻還生)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유목민의 윤회환생적 내세관은 그들의 전통적 장례방법, 곧 시체를 대형 독수리나 야생동물에게 넘겨주는 조수장(鳥獸葬)에 잘 표현되어 있다. 조수장은 첫째로, 다음 세상에서 가급적 빨리 태어나도록 잠시 입는 옷에 불과한 육신을 신속히 처리한다는 의미와 함께, 둘째로 독수리나 야생동물, 또는 곤충이나 미생물에 육신을 내어 놓음으로써 죽기까지 자선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조수장은 오늘날에도 라마불교의 중심지인 티베트나 부탄에 부분적으로 남아있다.
유목사회엔 샤머니즘의 영향을 받아, 인간이 태어나면서 갖는 땅, 물, 불, 바람, 나무 등 다섯 가지 우주의 요소를 고려한,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절과 맞닿는 듯한 장례방법도 있다 (松川節, 1999). 이 방식으로 장례를 치를 때에는 고인이 태어나면서 지녔던 우주의 한 요소를 부각시켜 식을 치룬다. 이러한 장례식을 그 요소에 따라 토장(土葬), 수장(水葬), 풍장(風葬), 또는 목장(木葬)이라고 부른다. 가령 땅의 성질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 죽으면 다시 땅으로 돌려준다는 의미로 땅에 시체를 묻는 토장을, 물과 불의 성질을 갖고 출생한 이가 사망하면 각각 수장과 화장을 했던 것이다. 풍장은 초원에 시체를 눕히는 것이요, 목장은 나무 판 위에 눕혀서 초원에 두는 장례다.
七. 유목민의 사회관
1. 혈족 공동체가 기초
유목민들은 소규모의 집단이 독립된 유목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러한 생활에 있어선 가족의 결속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거주 형태인 가죽천막 집[러시아어로는 유르트(yurt), 몽골어로는 게르(ger), 중국어로는 빠오]을 중심으로 가족, 친족 또는 친지들로 구성된 하나의 소집단을 구성하여 공동의 생업활동 뿐 아니라 육아, 가족의식이나 제례, 축제, 놀이 등을 공유한다.
그러나 자식들은 결혼과 동시에 부모로부터 분가해서 독자적인 유목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결혼하면 식구가 늘어나고 이에 따라 가축의 수도 늘어나야 하는데, 자연의 본래 상태를 유지하면서 방목할 수 있는 가축의 수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아들이 분가하면 부모의 텐트로부터 말을 타고 2-3시간 걸리는 거리 내에서 독립적으로 방목하면서 어려운 일에는 공조하면서 생활한다.
이처럼 유목민에겐 연대성과 함께 독립성, 언뜻 보기에 모순되어 보이는 속성이 비교적 조화롭게 병존한다. 그러므로 전통 유목민족 개개인은 유럽 인들보다는 더 연대성이 있으며, 농경아시아인들보다는 더 독립적인 성향을 보인다.
2. 경제 공동체와 정보 네트워크
유목민 경제의 핵은 가축이다. 유목민은 주어진 자연환경 속에서 환경을 훼손하거나 큰 변화를 주지 않으면서 가축을 효과적으로 방목하기 위해 유목민들끼리 다양한 정보를 공유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서 갑작스런 기후 변화나 자연재해에 상부상조하며 대처한다든지, 방목지를 이탈하여 넘어온 가축을 보호하고 다시 돌려보내 주는 일, 그리고 새로운 방목지를 찾아서 이동할 때 유목민들은 서로 도움을 주게 된다.
유목민이 지역의 여건에 맞게 효율적으로 방목할 수 있는 것은 유목민 사이에 정보의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유목민들은 방목하는 가축을 비롯해서 주변의 자연환경, 가축의 먹이가 될 식물, 날씨, 인근 시장에 대한 정보 등을 교환하기 위한 인간관계가 형성되어 있으며, 이러한 관계는 종종 실질적이고 경제적인, 물물교환을 위한 네트워크로 발전되는데, 이러한 인간관계는 크게 친족 네트워크와 경제 네트워크로 대별된다.
유목문화에서 친족 네트워크는 다른 인간관계를 형성하는데 가장 기초적 역할을 수행한다. 그것은 친족 네트워크가 성립된 이후에야 그것을 바탕으로 인위적 친족관계 또는 경제 네트워크가 생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리치는 “거의 모든 인간의 대면 집단 속에서 친족관계는 경제적 거래를 지속시키는데 있어서 근원적 네트워크를 제공해 주기 때문에 친족관계는 경제적 관계의 한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Leach, 1991:4).
기본적 인간관계, 곧 친족 네트워크는 흔히 혼인을 통해 기존의 네트워크를 보완하기도 하고 확대하기도 한다. 혼인에 의해 친족관계를 형성할 때 결혼자금(結婚資金)이 필요한데, 보통은 가축이 사용된다. 이차적 인간관계, 곧 경제적 목적을 위한 네트워크에서는 흔히 서로 ‘호혜적 교환’이 이뤄진다. 특히 오늘날 시골과 도시 사이에 이러한 관계가 발달해 있는데, 유목민의 경우 고기나 가축의 젖, 양털, 야구르트나 발효된 우유로 만든 술 등 가축이나 가축에서 나온 생산품을 팔아 도시에서 만들어진 가공품이나 공산품을 산다. 왜냐하면 유목민들은 생활용품이나 식료품이 필요하고, 도시 사람들은 가축에서 나오는 신선한 유제품과 고기를 얻고 싶어 하는 상호보완적 수요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유목민들은 가축이라는 비교적 단순한 기본품목을 통해서 일상생활에 필요한 나머지를 구입할 수 있는 것이다.
3. 경제 네트워크의 선교 전략적 활용가치
몽골의 유목민들은 일정한 주소도 없이 초원을 집 삼아서 주기적으로 이동한다. 때로는 주어진 자연조건이나 제반여건 때문에 꽤 멀리 이동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 사람들은 경제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위해 유목민들을 찾아다니는 것을 귀찮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만큼 유목민들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강한 편이다. 이러한 경제적 관계가 친족관계처럼 지속되는 경우도 있고 일시적으로 단순한 경제적 인간관계로 남아있는 경우도 있다. 그 결과가 어떻게 진행되든지 시골의 유목민들에게는 방목할 가축만 있다면 도시의 사람들과 경제적 네트워크를 언제든 성립시킬 수 있는 요건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친족관계 또는 경제적 네트워크가 바로 유목민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접촉점이다.
八. 유목민과 정착민의 세계관 비교
최근 한국의 경영학자 가운데 “현대엔 정착 민족 보다 유목 민족의 사고방식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김종래는 유목 이동 민족이 농경 정착 민족 보다 우월한 점을 다음과 같이 도표에 정리했다 (김종래, 21)
물론, 유목민적 기업정신을 강조한 나머지 김종래는 유목 민족의 장점과 농경민족의 단점을 과장해서 불공정하게 비교했지만 (예를 들어서 유목민족의 사고방식은 서비스, 봉사 중심이며 농경 민족은 군림, 착취적으로 본 것), 그가 어느 정도 유목 민족과 농경민족의 차이점을 간파한 것은 사실이다.
유목민족들은 그들의 생활방식이 끊임없는 이동과 자연과의 투쟁으로 이어지다 보니 자연히 농경민에 비해 역동적이고 진취적 삶을 살아야 했다. 반면에 농경민은 한 곳에 정착하다보니 정적, 정신적 생활을 영위했다. 따라서 군사적인 면에서는 유목민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문화적인 면에는 농경민이 훨씬 강했다.
역사상 수많은 유목민족들이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정착 왕조를 점령했지만 정착민족의 문화에 동화되어 자신들의 정체성마저 잃고 역사에서 사라져갔다. 중국을 점령했던 요나라의 거란족, 금나라와 청나라의 여진족 등이 대표적이다. 토인비(A. Toynbee)의 역사 이론인 “도전과 응전”은 유목민과 정착민 사이에도 그대로 적용시킬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중앙아시아의 역사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중앙아시아의 역사를 주도했던 대표적인 두 민족인 투르크 및 몽골의 유목민족은 동쪽으로 중국과 서쪽으로 페르시아 및 이슬람 세계와의 접촉을 통해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 왔다. 그러나 이들은 강한 제국을 건설했지만 문화적으로는 중국이나 페르시아-이슬람 문화에 동화되었다.
농경민족과 유목민족의 사회구조를 비교해보면 정착 민족은 종적, 수직적 구조를 갖고 있는 반면에 유목 민족은 횡적, 수평적 구조로 되어 있다. 그것은 정착 민족의 경우 일정한 테두리 안에 동일한 관습과 전통을 가진 사람들이 한정된 공간을 상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그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고의 절대 권력을 갖는 군주를 정점으로 수직적 계급 구조를 형성해야만 했다. 또한 농경에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소수의 지배 계층이 다수의 노동력을 이용하는 사회가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그래서 계급 구조가 분화된 사회는 주로 농경 문화권에서 발견된다. 벼농사를 주로 하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가 대표적이다. 또한 농경 생활을 해왔던 우리 민족도 양반-상놈의 계급구조를 갖고 있었다. 반면에 유목 민족은 혈연 중심의 씨족 사회를 형성해 살고 있었다. 그들의 생존은 가축들을 위한 목초지 확보에 달려 있었음 그 목초지도 풀이 나있는 동안만 자신들의 것이고 새로운 목초지를 따라 또 다시 이동해야만 했다. 이렇게 여러 씨족이 목초지를 찾아 이동하다 모니 충돌도 많이 발행하고 그 충돌에서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따라서 약산 씨족들은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른 씨족과 연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방식으로 씨족이 연합해 부족이 되고 부족이 연합해 부족 연맹이 탄생하는 횡적 결합이 이뤄진다. 거대한 부족 연맹이 이뤄지고 칭기즈칸과 같은 카리스마적 지배자가 탄생하면 걷잡을 수 없는 에너지가 분출되어 세계 정복의 길에 나서게 되고 그렇게 해서 이룩된 것이 역사상 수없이 탄생한 유목 제국이다.
유목민족과 정착민족은 재산 소유의 형태에 있어서도 차이점을 확연히 드러낸다. 농경민의 사회는 철저한 사유제다. 논밭도 금이 그어져 있고 자신이 거주하는 집도 담장으로 영역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자신이 소유한 땅에서 나는 모든 생산물은 분명 자신의 것이며 다른 사람이 손을 댈 수 없다. 반면에 유목 사회는 공유제이다. 씨족과 씨족, 부족과 부족이 연합된 형태를 취하고 연합과 동시에 각자가 소유했던 가축들은 피아의 구별 없이 공동 소유가 된다. 서로 자신의 소유를 나누려 하면 연합은 깨진다. 즉, 한정된 목초지 속에서 서로 자신들의 가축들에게 먼저 풀을 뜯게 할 것이 뻔하며, 그러면 경쟁이 발생하고 그 연합은 파멸로 이어질 것이다. 따라서 유목민들의 가축에서 생산되는 모든 산물도 공동으로 분배하고 소유한다. 오늘날 자본주의가 농경문화권에 주로 분포되어 있고 사회주의가 중앙아시아 및 중동과 같은 유목문화권에서 성행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동아시아의 유목민 문화권에 진출하는 우리나라 선교사들의 숫자가 늘고 있다. 정착문화 속에서 유교적 세계관에 익숙한 우리나라 선교사들이, 이동문화 속에서 자란, 유교와 별 상관없는 세계관을 가진 유목민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할 때는 그 차이점을 인식하고, 유목민들의 상황에 맞는 복음전달 방법을 찾음이 필요하다.
먼저, 유목민들이 유교문화권의 우리 민족보다 더 평등한 사회구조를 가졌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더구나 그들이 속한 나라 곧 중국, 몽골, 러시아 모두 사회주의를 70년 이상 유지했거나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평등 개념은 더욱 강화됐을 가능성도 있다. 유교적인 색채가 짙은 남존여비(男尊女卑), 장유유서(長幼有序)는 유목민 문화에서 잘 통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몽골에는 여성이나 20대, 30대 청장년들의 공직 활동이 우리나라보다 더욱 왕성하다. 그러므로 현지인들에게 나이나 선교사라는 권위를 내세워서는 존경 받지 못한다. 실제로 몽골에서 한국식으로 가부장적 권위를 내세웠던 목사 선교사들이 결국은 현지 교인들의 심한 반대에 부딪히거나 심지어 축출되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
한편, 자주 이동하는 유목민들은 한 곳에 오래 머무는 전통의 우리 민족보다 더 변화에 유연하고 민감하다는 점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유목민들은 정적인 예배 보다 역동적인 예배를 선호한다. 예배의 자유가 보장된 몽골에서의 경우 형제교회(brethren church) 스타일의 정적인 예배보다는 오순절 교회식의 역동적인 예배 형식이 훨씬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고 있다. 또 기록문화 보다는 구전문화가 발달한 유목문화에서는 원고를 읽는 스타일의 설교 보다는 예화가 풍부한, 정형에 구애받지 않는 창의적 설교가 환영을 받을 것이다. 또 유목민들의 역동적인 특성은 전도의 열심에서도 두드러진다. 몽골의 경우 현지인의 전도여행은 거의 대부분 많은 지원자들을 끌어들인다. 현재 몽골의 많은 선교사들은 몽골 교회가 장래에 매우 선교 지향적 교회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유목은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어서 상생하는 친자연적인 경제활동이다. 인류의 생태계 파괴로 인한 환경문제가 화두가 되고 있는 요즘 유목은 가장 미래지향적 생업활동이 될 수 있다. 또한 독립된 넓은 초원에서 유목집단과 집단 사이를 연결하는 유목의 네트워크는 인간관계가 소원해져가는 현대사회에서도 소중하게 다룰 수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유목문화가 갖는 세 가지 특징인 토지의 공유, 이동성, 그리고 간소함 등은 인류의 미래에 신선한 대안을 제공하고 있다는 의견도 있다. 즉 유목민의 토지소유에 대한 집착의 부재, 정기적인 이동능력,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 등은 인류의 미래에 어떤 해답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종래는 유목적 세계관을 경영원리에 적용하여, “성을 쌓고 살던 정착민의 수직적 사고로는 21세기를 이끌 수 없다”면서 “오랜 정착 문화식 의식과 습성들이 폐단으로 작용하면서 새로운 이동형 문명이 도래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요즘 유목민적 세계관은 21세기 디지털 시대 지식인들의 매력적인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uze)는 기존 가치와 삶의 방식을 맹종하기를 거부하고 불모지를 찾아다니며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유목주의(nomadism)’를 제안했다. 철학적으로는 철학, 문학, 정신분석, 신화학, 수학, 경제학 등 학문 분야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매달리지 않고 자신을 바꿔나가는 자유분방한 삶을 ‘유목주의자’들은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유목주의에 대한 비판도 있다. 천규석 같은 환경주의자들은 유목주의란 것이 침략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세계관이요 생활방식이라고 한다 (문화일보 2006.02.24). 즉 유목은 그 생태적 한계로 인구증가 문제에 항구적 해결책을 줄 수 없기 때문에 현대에 부적합하다는 것이다. 학자들의 계산에 따르면 지금의 몽골지역을 차지했던 고대 흉노족의 경우 1인당 소 사육두수는 17.8~19 마리로 1918년 내몽골의 유목민들이 가졌던 가축 수와 정확하게 일치했다고 한다. 유목은 본질 적으로 단위 토지 당 식량 생산이 농업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생산양식으로 자급자족이나 지속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목적 생활양식은 사회주의가 약화된 이후에도 몽골과 동 아시아 초원의 거주민 사이에 남아있을 뿐 아니라 오랫동안 지속될 전망이어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선교사들에게 유목민의 세계관에 대한 이해와 적용은 여전히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