漁父辭 / 屈原
屈原旣放 굴원기방
游於江潭 유어강담
行吟澤畔 행음택반
顔色憔悴 안색초췌
形容枯槁 형용고고
漁父見而問之曰 어부견이문지왈
子非三閭大夫與 자비삼려대부여
何故至於斯 하고지어사?
屈原曰 굴원왈
擧世皆濁 거세개탁
我獨淸 아독청
衆人皆醉 중인개취
我獨醒아독성
是以見放 시이견방.
漁父曰 어부왈,
聖人 성인
不凝滯於物 불응체어물,
而能與世推移 이능여세추이.
擧世皆濁 거세개탁,
何不淈其泥而揚其波 하불굴기니이양기파,
衆人皆醉 중인개취
何不飽其糟而歠其醨 하불포기조이철기리
何故深思高擧 하고심사고거,
自令放爲 자령방위.
屈原曰 굴원왈,
吾聞之 오문지.
新沐者必彈冠 신목자필탄관,
新浴者必振衣 신욕자필진의.
安能以身之察察 안능이신지찰찰,
受物之汶汶者乎 수물지문문자호?
寧赴湘流 녕부상류
葬於江魚之腹中 장어강어지복중,
安能以皓皓之白 안능이호호지백
而蒙世俗之塵埃乎 이목세속지진애호?
漁父莞爾而笑 어부완이이소,
鼓枻而去 고예이거
乃歌曰 내가왈,
滄浪之水淸兮 창랑지수청혜,
可以濯吾纓 가이탁오영.
滄浪之水濁兮 창랑지수탁혜,
可以濯吾足 가이탁오족.
遂去不復與言 수거불부여언
최북 작
굴원이 이미 쫓겨나
강가와 물가에 노닐고
못가에서 시를 읊조리며 다니는데
얼굴은 초췌하고
모습은 수척했다.
어부가 보고 묻기를
"그대는 삼려대부(三閭大父)가 아니신가요?
어찌 이리 되셨나요?" 하니
굴원이 말하기를
"세상이 다 혼탁한데
나만 혼자 맑고
사람들이 다 취했는데
나만 혼자 깨어 있어서 쫓겨났지요." 하니
어부가 말하기를,
"성인은 사물에 매이지 않아
세상 따라 능히 변해야지요.
세상 사람이 다 탁하면
어찌 진흙탕을 휘저어 물결을 일으키지 않으며
사람들이 다 취했다면
어찌 술지게미 먹고 박주(薄酒)를 마시지 않나요?
어찌 깊이 생각하고 높게 처신해
스스로 추방당하셨나요?" 하니
굴원이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새로 머리 감은 이는 반드시 갓을 털어 쓰고
새로 몸을 씻은 이는 반드시 옷을 털어 입는다고 하였소.
어찌 깨끗한 몸으로
더러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소?
차라리 상수(湘水)에 몸을 던져
물고기 뱃속에 장사지낼지언정
어찌 깨끗한 몸으로
세속의 먼지를 뒤집어 쓸 수 있겠소?" 하니
어부는 빙그레 웃으며
노를 두드리고 떠나가면서 노래하기를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이나 씻으리라.' 하고는
마침내 가버려 다시는 말이 없었다.
굴원(屈原) (BC 343~BC 289) (생몰연도는 추정임)
중국 전국시대의 정치가·비극 시인으로 초(楚)의 왕족과 동성(同姓). 이름 평(平). 원 자. 생몰연대는 기본자료인 《사기(史記)》 <굴원전>에 명기(明記)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설이 있으나, 지금은 희곡 《굴원》의 작자인 궈모뤄[郭沫若]의 설에 따른다. 학식이 뛰어나 초나라 회왕(懷王)의 좌도(左徒:左相)의 중책을 맡아, 내정·외교에서 활약하였으나 법령입안(法令立案) 때 궁정의 정적(政敵)들과 충돌하여, 중상모략으로 국왕 곁에서 멀어졌다. 《이소(離騷)》는 그 분함을 노래한 것이라고 《사기》에 적혀 있다.
그는 제(齊)나라와 동맹하여 강국인 진(秦)나라에 대항해야 한다는 합종파(合縱派)였으나, 연형파(連衡派)인 진나라의 장의(張儀)와 내통한 정적과 왕의 애첩(愛妾)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왕은 제나라와 단교하고 진나라에 기만당하였으며, 출병(出兵)하여서도 고전할 따름이었다. 진나라와의 화평조건에 따라 자진하여 초나라의 인질이 된 장의마저 석방하였다.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던 굴원은 귀국하여 장의를 죽여야 한다고 진언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고 왕의 입진(入秦)도 반대하였으나 역시 헛일이었다. 왕이 진나라에서 객사(客死)하자, 장남 경양왕(頃襄王)이 즉위하고 막내인 자란(子蘭)이 영윤(令尹:재상)이 되었다. 자란은 아버지를 객사하게 한 장본인이었으므로, 굴원은 그를 비난하다가 또다시 모함을 받아 양쯔강 이남의 소택지로 추방되었다.
《어부사(漁父辭)》는 그때의 작품이다. 《사기》에는 <회사부(懷沙賦)>를 싣고 있는데, 이는 절명(絶命)의 노래이다. 한편 자기가 옳고 세속이 그르다고 말하고, 난사(亂辭:최종 악장의 노래)에서는, 죽어서 이 세상의 유(類:법·모범)가 되고 자살로써 간(諫)하겠다는 결의를 밝히고 있는데, 실제로 창사[長沙]에 있는 멱라수(汨羅水)에 투신하여 죽었다. 그의 작품은 한부(漢賦)에 영향을 주었고, 문학사에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된다.(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굴원(屈原)과 어부사
중국 전국시대의 정치가·애국시인으로 이름은 평(平). 원(原)은 자. 일찍부터 그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그의 시들은 초기 중국 시단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굴원은 양쯔 강[揚子江] 중부 유역의 큰 나라였던 초나라의 왕족으로 태어났다. 그의 친척이었던 회왕(懷王)의 신임을 받아 20대에 벌써 좌도(左徒:侍從)라는 중책을 맡고 있었다. 법령입안(法令立案) 때 궁정의 정적인 상관대부(上官大夫)와 충돌해 그의 중상모략으로 면직당하고 국왕 곁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굴원은 제(齊)와 동맹해 강국인 진(秦)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진의 장의(張儀)와 내통하고 있던 정적과 왕의 애첩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왕은 제와 단교했으나 결국 진에게 기만당하고 진의 포로가 되어 살해당하고 말았다. 회왕이 죽은 뒤 큰아들인 경양왕(頃襄王)이 즉위하고 막내인 자란(子蘭)이 영윤(令尹:재상)이 되었다. 굴원은 회왕을 객사하게 한 자란을 백성들과 함께 비난하다가 또다시 모함을 받아 양쯔 강 이남의 소택지(沼澤地)로 추방되었다.
〈어부사 漁父辭〉는 그때 쓴 작품이다. 그는 유배지에서 무속적 민속의식을 관찰하고 그의 작품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전설들을 수집했다. 맨처음 회왕에게 내쫓기어 유배되었을 때 최대 걸작으로 꼽히는 장편 서정시 〈이소 離騷〉를 써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이'는 '만나다'의 뜻이고 '소'는 '근심'이라는 뜻이니 이소란 곧 '근심을 만나다'라는 뜻이다. 〈이소경 離騷經〉이라 하는 것은 후세 사람들이 높여 부르는 이름이다.
"이것은 위로 당우(唐虞) 3후(三后)의 성왕을 법을 들어 말하고, 아래로는 걸(桀)·주(紂)·예()·요()의 패망함을 들어 말함으로써 군왕이 깨닫고 정도(正道)로 되돌아가 다시금 자기를 불러줄 것을 기원한 것이다."
위의 글은 왕일(王逸)과 주자(朱子)의 〈이소경〉 서문의 한 토막이다. 굴원은 그토록 애타게 자기의 충정을 노래하다가 한 번 용서받은 바 있었으나, 다시금 참소를 받아 경양왕에 의해 멀리 양쯔 강 남쪽 강남지방으로 내쫓기는 몸이 되었다. 애국시인 굴원은 유배에 대한 절망감으로 강가를 하염없이 거닐며 시를 읊조리다가 〈회사(懷沙)의 부(賦)〉를 마지막으로 고결한 성품을 그대로 간직한 채 돌을 안고 미뤄 강[汨罷江:지금의 汨水]에 몸을 던졌다.
중국에서 음력 5월 5일에 벌어지는 유명한 용선(龍船) 축제는 이 애국시인의 유체를 찾던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굴원의 작품들은 고대 중국의 명시선집인 〈초사 楚辭〉에 실려 있다. 이 시집은 후세 시인들이 굴원의 전설적인 삶에 대해 쓴 글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한부(漢賦)에 큰 영향을 주었고, 후대에 높이 평가되고 있다. 趙允卿 글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楚辭 (초사)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나라의 굴원(屈原)·송옥(宋玉) 등에 의하여 시작된 운문(韻文). 북방문학인 《시경(詩經)》의 뒤를 이어 나온 남방문학의 대표격이며, 이를 본뜬 한(漢)나라 때의 작품들도 포함된다. 샤머니즘이 성행하였던 초나라에서는 많은 신화·전설·가요가 존재하였고, 그러한 토양 속에서 문학적인 형식과 내용을 갖춘 초사작품이 형성되었다. 먼저 천지구조와 역사에 대한 의문을 제시한 《천문(天問)》, 산천(山川)의 신들에 대한 제사의 노래인 《구가(九歌)》, 몸에서 벗어난 영혼을 불러들이는 《초혼(招魂)》 등 종교의식을 반영한 작품들이 생겼고, 이러한 기반 위에서 지상(地上)에 들어오지 못하고 천상(天上)이나 신화적인 이역(異域)을 떠도는 주인공의 자서(自敍)를 다룬 《이소(離騷)》가 완성되어 초사문학의 정점을 이루었다.
《이소》의 주인공의 고뇌에는 중국통일로 향하는 급격한 사회변동의 소용돌이에 내몰린 초나라 사람들의 고통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뒤 초사문학은 《구장(九章)》에서 보이듯 긴장이 풀어진 문학으로 변모해 갔고, 《어부(漁父)》 《복거(卜居)》 등에서는 그때까지의 날카로운 문제 제기의 자세를 거의 잃어버렸다. 따라서 초사문학은 한·후한(後漢)시대를 거치면서 종말을 맞게 되었으며, 그 형식과 내용은 뒷날 부(賦) 등의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체로 《시경》이 4자구(字句) 중심의 안정된 형식을 갖추고 있었음에 반하여, 초사작품들은 어구가 길고 보다 유동적인 형식 속에 신화·전설 등의 비장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문체의 특징으로는 《구가》의 구절 <욕란탕혜목방 화채의혜약영(浴蘭湯兮沐芳, 華采衣兮若英>에서처럼 3자(字)와 2(3)자 사이나 2자와 2자 사이에 <혜(兮)>를 두는 구법(句法)과, <혜> 대신 구 사이에 <지(之)> <이(以)> <이(而)> 등의 조사를 넣고, 무운구말(無韻句末)에 <혜>를 두는 《이소》식의 구법이 있으며, 《초혼》 《대초(大招)》에서처럼 <사(些)>나 <지(只)>를 구말에 두는 경우도 있다. 이 밖에 편말(編末)에 20구 안팎의 종편사(終編辭)인 <난(亂>을 두는 것도 특징이다. 초사문학의 원전(原典)으로는, 한나라의 유향(劉向)이 굴원의 《이소》와 25편의 부 및 후인의 작품 등에 자작 1편을 덧붙여 엮은 《초사》를 비롯하여, 후한 왕일(王逸)의 주석서 《초사장구(楚辭章句)》, 남송(南宋) 주희(朱熹)의 《초사집주(楚辭集註)》 등이 있다.
(자료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