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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정치방 스크랩 내 몸속에 흐르는 흉노의 피
신민수 추천 0 조회 181 12.09.16 17:3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내 몸속에 흐르는 흉노의 피 (출처 : JR의 유목민 이야기)

 

 

"민족사의 주도세력이 된 신라 김씨(金氏) 왕족은 흉노였다"

 

신라 김씨왕족(金氏王族)은 북방 초원에서 한반도로 진입한 흉노족(匈奴族)이라는 주장이 학계에서 공개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 문무왕의 비문(碑文)―『나는 흉노王의 후손이다』를 어떻게 볼 것인가
■ 신라에서만 나오는 적석(積石)목곽분·각배(角杯)·금관;로만 글라스는 흉노의 표시물
■ 주체성 : 남북국 발해-신라시대. 포용성·다양성·개방성을 지닌 신라의 통합력이 반도를 차지한 에너지였다 

 

신라 주도세력인 김씨왕족의 뿌리

 

문무왕, 그의 아버지 태종무열왕으로 상징되는 신라왕족과 귀족들이다. 박씨, 석씨에 이어 김씨 왕조를 연 것은 3세기 초 미추(味雛) 이사금이고 4세기 나물마립간대(奈勿麻立干代)에 와서 고대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추었다. 김씨 왕조에서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 무열왕, 문무왕 등이 나와 한반도 지배의 발판을 마련하고 남북국 발해-신라시대를 열었다.

 

요사이 정통 고고학계와 역사학계에서는 이 신라 김씨 왕족이 북방 유목 기마민족인 흉노계이며 이 집단이 북방에 서 경주지역으로 이동하여 집권세력이 되었다는 주장을 공개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신라 김씨왕족이 지배층으로 등장하던 4세기 중반부터 6세기 초까지 왕들은 나물 마립간, 지증 마립간식으로 불렸다. 마립간(麻立干)이란 말은 여러 부족들의 대표자란 뜻인데 유목민족의 칸(칭기즈칸의 칸)과 같은 어원이다. 이 김씨 왕족의 무덤이 경주 고분이다. 서기 4~6세기에 축조된 이 고분은 적석목곽분이라 불린다. 시신을 목곽(木槨) 안에 넣고 그 위에 냇돌을 쌓은 다음 봉토를 입힌 무덤이다. 나중에 목곽이 썩어 무너지면 냇돌이 무덤을 메워 도굴을 방지해 준다.

 

이 적석목곽분의 형식은 유라시아 북방 초원 지대의 주인공이었던 흉노의 무덤과 같다. 1973~1974년에 발굴된 천마총, 황남대총이 적석목곽분의 전형이다. 장례식과 묘제(墓制)는 어느 민족이든지 잘 변하지 않으므로 민족의 계통을 연구하는 데 가장 중요한 단서이다. 이 적석목곽분은 경주지역에서 4세기 초에 갑자기 나타난다. 이런 묘제를 가진 종족이 외부에서 침입했거나, 혁명적으로 득세했다는 이야기이다. 이들 무덤 속에서 금관, 금허리띠 등 많은 금세공품이 발굴되었다. 그 디자인도 북방 유목문화의 특징을 띠고 있다. 적석목곽분엔 중국식 물건이 거의 없는 반면 몽골 초원 문화를 이어받은 유물들과 로마지역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유리 제품이나 공예품들이 많다. 이는 신라 지배층이 몽골고원-중앙아시아-흑해로 이어지는 초원의 길을 통해서 서양문명세계와 무역을 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낳게 한다.

 

4~6세기의 6대에 걸친 마립간 시대(내물-실성-눌지-자비-소지-지증마립간)에만 나타나는 신라 적석목곽분에는 마구(馬具)와 무기가 특히 많다. 부장품을 들여다보면 중무장한 기사(騎士)가 떠오른다. 김씨 왕족은 기마군단의 지휘자였다는 이야기이다. 4세기에 갑자기 경주에서 지배층으로 등장한 이들은 누구인가에 대해서 요사이 역사·고고학자들이 과감한 견해를 내놓고 있다.


최병현(崔秉鉉) 교수 -「동아시아 기마민족의 한 여파가 밀려온 결과」

숭실대학교 역사학과 최병현 교수는 「신라고분연구(新羅古墳硏究)」(일지사 간)에서 이렇게 썼다.

  <신라 적석목곽분을 둘러싼 고고학적, 역사적 상황들을 종합하여 볼 때, 신라 적석목곽분은 결코 내부의 선행묘제(先行墓制)가 복합되어 이뤄진 것은 아니었으며, 기마문화를 배경으로 한 북방아시아 목곽분 문화의 직접 도래(渡來)에 의해 돌발적으로 출현한 것이었고, 그것은 3세기 말, 4세기 초부터 일어난 동아시아 기마민족 대이동의 와중에서 한 여파가 밀려온 결과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북방 기마민족의 일파가, 3~4세기 중국 북부 유목민족 대남진(大南進) 때(5胡16國시대) 한반도로 밀고 들어와 경주에서 토착정권을 점령하고 김씨 왕족를 세웠다는 이야기이다. 이들 유목민족의 상징이 금(金)이다. 유목민족은 금제품을 좋아하고 금세공 기술이 뛰어났다.

이들의 본거지였던 알타이 산맥의 그 알타이가 금(金)이란 뜻이다. 흉노계라는 신라 지배층이 성씨를 김(金)이라고 정했다는 것도 퍽 상징적이다. 경주 천마총 안으로 들어가보면 무덤의 주인공이 금관, 금팔찌, 가슴장식, 금귀고리, 금허리띠 등 온통 금장식품들과 칼, 마구(馬具)를 뒤집어쓴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여기 누워 있는 사람이 과연 한국인인가 의아해 할 정도로 이국적(異國的)이다. 적석목곽분이란 묘제(墓制), 북방계 출토 유물들, 풍부한 마구와 금제품, 김(金)씨, 마립간(麻立干)이란 호칭 등이 흉노의 표시물들인 셈이다.

 

경기도 박물관장 이종선(李鍾宣) 박사는 자신의 저서 「고신라왕릉연구(古新羅王陵硏究)」(학연문화사 간)에서 이렇게 썼다.

 

  <최근 흉노계 분묘를 종합한 연구에 따르면 거기에는 몇 가지의 유형이 있다. 흥미롭게도 반도 서북부의 소위 낙랑고토(故土)에 그러한 유형의 고분들이 모두 남아 있다는 엄연한 사실은 오르도스(지금의 내몽골 지역)와 연결해서 볼 때 매우 주목할 현상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오르도스 철기문화의 주인공들이 한(漢)의 팽창으로 그 일파가 서쪽으로 밀려가서 헝가리, 즉 훈족(흉노)의 나라를 세운 주체가 되었고, 뿐만 아니라 동쪽으로 이동한 다른 일파가 여러 차례에 걸쳐 반도로 진출하였고, 일부는 일본열도에까지 상륙하였다고 봐야 당시 시베리아 민족들의 대이동의 일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고신라 적석목곽분의 주인공들은 반도 서북부를 거쳐 동남진(東南進)한 시베리아계 주민의 후예로서, 그들은 중국계가 아닌 시베리아-오르도스계의 대형 적석목곽분과 철기, 승석문(繩蓆文)토기, 금세공기술을 그대로 갖고 남하한 것이다>

 

 

흉노-고조선-신라의 연결고리
 
경기도 박물관 이종선(李鍾宣) 관장(56)은 김병모(金秉模) 한양대 인류학과 교수와 함께 『신라 김씨 왕족은 흉노계이다』라고 확실하게 이야기하는 고고학자이다. 그를 만났다.
 
그는 「고신라왕릉연구(古新羅王陵硏究)」란 책에서 경주 황남대총의 주인공이 내물왕과 왕비라고 추정한 고고학자이기도 하다. 서울시립박물관장 출신인 이종선 관장은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를 졸업한 이후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선사원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그는 1970년대 천마총, 황남대총 등 경주 고분 발굴에 참여했었다.

유목기마민족 출신들이 우수한 마구(馬具)와 철제 무기를 가지고 일본열도로 건너가 일본 고대 국가를 만들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는 유럽 각국이 아메리카 신대륙을 개척할 때와 비슷한 전개였을 것이다. 영국계, 프랑스계, 스페인계가 아메리카로 들어갔던 것처럼, 고구려계, 가야계, 백제계, 신라계가 일본열도라는 신천지로 들어가서 정착하고 이합집산하면서 정복왕조를 만드는 과정에서 천황가(天皇家)도 가야 출신, 백제 출신 등으로 명멸하다가 어느 단계 이후에는 백제 출신이 정착하여 지금에 이른 것이 아닌가.
 
이관장은 신라 김씨족을 알타이계로 부르는 것이 정확하다고 했다. 흉노와 겹치기도 하고 흉노라는 이름 안에 포함되기도 하는 개념으로서의 알타이계이다. 몽골고원의 서쪽에 있는 알타이 산맥 부근에 뿌리를 둔 유목민이 동진(東進)하는 과정에서, 북방 초원 지대를 통일하여 거대 제국을 만든 흉노계의 일원이 되었을 것이지만 알타이적인 요소를 잃지 않고 신라지역까지 들어왔다는 것이다. 알타이계 민족은 중앙아시아와 가깝고 중앙아시아는 그리스-로마문화권과 끊임없이 교류해 왔기 때문에 알타이계 신라 김씨 왕족 무덤에서 로마적인 영향이 나타나는 것이다.
 
내몽골 오르도스 지방에서 살던 흉노족의 일파가 기원 전 3세기경부터 한반도의 서북지방으로 들어와 고조선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이들은 평양 근방에서 수백 년 살다가 고조선이 망하거나(서기 전 2세기), 낙랑이 고구려에 점령되는(서기 1세기) 등 정치변동기에 한반도의 동남쪽으로 이동하여 지금의 경주지역에 정착했다. 그 후 4세기 그들이 신라의 집권세력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내물왕 이후 신라 김씨 왕족이 바로 북방초원이 고향인 흉노족의 후예라는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박혁거세가 거서간(居西干), 3대 유리왕부터는 니사금(尼斯今), 내물왕 시대부터는 마립간(麻立干)으로 적었다. 今(금), 干(간)이란 호칭은 흉노-알타이 계통의 부족장, 제사장, 또는 왕을 가리킨다. 니사금은 제사장적인 성격이 강한 부족연맹체 시대 신라의 맹주를 이르는 호칭이고, 마립간은 왕권이 강화된 고대 신라의 왕이라는 의미이다.
 
내물왕은 삼국유사에선 마립간, 삼국사기에서는 니사금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김씨왕족의 실질적인 중시조(中始祖)라고 볼 수 있는 내물왕이 이사금 시대에서 마립간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왕이었다는 암시이다.

이관장은 신라김씨 계통의 이동경로를 알타이 산맥-내몽골(오르도스)-평양 부근-경주의 서북-동남방향으로 설정했다. 
  
『평양도 넓은 들이란 뜻이고 경주의 옛 이름도 서라벌인데 넓은 들이라는 뜻입니다. 서라벌이 나중에는 서울로 바뀌지요. 이는 흉노족이 평양에서 경주로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이관장은 신라는 마구와 금공예품은 발달했으나 갑옷 등 무기류는 가야가 더 발전했다고 말했다. 가야 지배층의 종족적 분류에 대해서 기마민족 일본 정복설을 주장했던 일본의 에가미 나미오 교수는 부여족이라는 주장을 했고 국내학자들 가운데서도 동의하는 이들이 있다.
 
이관장은 가야 유물로 볼 때 그 지배층은 신라 김씨와 비슷한 흉노-알타이 계통인 것 같다고 말했다. 고조선-낙랑지역에 거주하던 흉노계가 신라지역보다 먼저 가야지역, 지금의 부산 부근에 들어온 흔적이 부산․김해 등지에서 발견되는 토광목곽분과 무기류, 그리고 동(銅)(동복: 유목민이 쓰는 구리 항아리)이라고 한다. 
  
『무기로 보면 신라는 보병 의존, 가야는 기병 의존형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당시 기마전투는 거의 활로 했을 것입니다. 말을 타고 칼싸움은 하지 않았다고 봐야지요』

 

 

동서양의 대격변을 일으킨 흉노-훈족
 
최병현(崔秉鉉)·이종선(李鍾宣) 두 학자들이 말하는 흉노계 기마집단의 신라 유입 경로는 차이가 있으나 신라 김씨 왕족들이 흉노계라고 보는 데서는 일치하고 있다. 최교수는 흉노 기마군단의 급작스러운 경주 진출을, 이원장은 흉노계 민족의 단계적인 이동을 상정(想定)하고 있다.

 

흉노족은 지금의 몽골고원에서 유목민 최초의 대제국(흉노)을 만들어 중국의 한족(漢族)과 대결하던 용맹무쌍한 유목민 기마군단이었다. 이들이 한(漢)무제의 공격을 받자 일부는 서쪽으로 나아가 4세기 게르만족을 치면서 서양사에 등장한다.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그에 따른 로마제국의 붕괴를 일으킨 훈족의 출현이다.

 

3세기말 중국의 진(晉)이 내부 권력투쟁으로 분열하자 몽골고원과 중국 북방에 남아 있던 흉노 등 다섯 유목민들은 남침(南侵)하여 중국을 150년간 대혼란에 빠뜨리고 다섯 호족(胡族)이 16개국을 만드는 5호16국 시대를 연출한다.

 

 

여러 갈래의 흉노족 유입(流入)
 
삼국사기에는 또 서라벌의 산과 계곡 속에는 기원 전 2세기 고조선(古朝鮮)이 망한 뒤 그 유민들이 들어와 여섯 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박혁거세 조(條)에는 또 진한(辰韓) 토착민들과 섞여 살던 진인(秦人)의 수가 더 많아졌다고 적혀 있다.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공격하여 그 땅에 한사군을 설치한 것은 흉노권 공략의 일환으로서 흉노계인 고조선을 친 것이라고 한다. 위만조선이 망한 것은 서기 전 2세기. 서기 1세기에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이 고구려 대무신왕에게 망하자 낙랑 사람 5,000명이 신라로 투항해 와서 6부(部)에 나누어 살게 되었다고 한다. 이 낙랑사람들도 한족이 아니라 낙랑의 귀족인 흉노계일 가능성이 높다.
 
중국 진나라 사람 진수(陳壽)가 쓴 삼국지의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과 삼국사기를 종합하면 2세기 신라 땅에는 대강 네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1. 선사시대부터 농경을 하며 살고 있던 사람들. 이들은 지석묘(고인돌)에 묻혔다. 남방계가 많았을 것이다.
2. 서기 전 3세기 진나라에서 노역을 피해 들어온 사람들.
3. 서기 전 2세기 고조선이 한무제에 의하여 망하자 이동해 온 유민(遺民)들. 흉노계일 가능성이 높다.
4. 서기 1세기 낙랑에서 투항해 온 5,000명. 이들도 고조선이 망한 뒤 낙랑에 남아 한족 지배하에서 살던 흉노계일 가능성이 높다.
 
동이전의 기사를 분석하면 중국 서북쪽(진)에 살던 흉노족이 여러 차례의 흐름을 타고 고조선·낙랑지역인 평양 부근을 징검다리로 삼아 경주 지역으로 들어왔음을 짐작케 한다.
 
뒤에 자세히 설명하지만 문무왕이 스스로 자신의 비문에서 『나는 김일제(金日)의 후손이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김일제가 바로 진나라 땅에 살던 흉노왕의 아들이었다. 문무왕의 발언과 동이전의 기록, 그리고 고분 발굴 결과는 같은 맥락으로 귀결되는 것 같다. 
   
120년간의 흉노계 마립간(麻立干) 시대
 
한양대 김병모(金秉模) 교수는 남방계통인 농경민족을 북방흉노계 민족이 올라타는 식으로 신라종족이 구성되기 시작했는데 북방계가 권력을 잡아 지배층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3세기에 쓰인 진수(陳壽)의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한(韓)(백제, 신라, 가야의 전신인 마한, 진한, 변한의 통칭) 사람들은 구슬을 좋아하고 비단이나 금을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고 쓰고 있다.
 
그렇다면 금관을 쓰고 서방과 교류하면서 페르시아와 로마에서 만든 유리잔을 수입하고 기마부대를 지휘하였던 이 집단은 3세기 이후에 경주지역에 들어온 새로운 흉노족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김교수 등 많은 학자들의 견해이다.
 
한반도는 유라시아 대초원의 동쪽 끝으로서 초원세계의 변화에 큰 영향을 받아왔다.
 
흉노, 선비, 거란, 여진, 몽골 등 북방에서 일어난 유목기마민족들이 팽창할 때는 거의 반드시 한반도에 진입·침입·정복의 과정을 밟았다. 고구려·백제·신라가 정립하기 이전의 고대에는 이런 북방민족의 진입이 여러 루트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런 여러 흐름의 민족이동을 보면 하나의 분명한 차별성이 눈에 띈다.
 
김병모 한양대 인류학과 교수는 아주 명쾌하게 그 문제를 정리한다.
 
『삼국이 다 북방계의 지배를 받는데, 그 계통은 고구려·백제가 부여계, 신라는 흉노계입니다. 부여계는 만주 동쪽에 살았고 인종적으로는 퉁구스계이며 순수 유목민이 아니고 수렵과 농업도 함께 했습니다. 흉노계는 알타이 산맥 부근이 본거지이고 순수 유목민이며 서방과 접촉이 많고 그쪽 문화를 많이 수입했지요』

 

김씨는 흉노계 족보의 상징?

 

   [김알지 설화 부분도]

 

 

한양대 김병모(金秉模) 교수가 1998년에 쓴 「금관의 비밀」(푸른역사)은 금관을 만든 주인공들을 추적한 책이다. 그는 왜 신라의 김씨 왕족들이 알타이를 고향으로 하는 흉노계 출신의 기마민족인가를 논증하고 있다. 김교수는 수많은 발굴 경험, 알타이 지역 답사 경험, 언어학과 신화학을 동원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과감하게 『신라 김씨들은 흉노계이다』고 단정짓고 있다.
 
  1. 금관은 1921년 금관총에서 처음 발굴된 이래, 1973년 천마총, 이듬해 황남대총(皇南大塚) 등 신라 적석목곽분에서만 나왔다. 이 적석목곽분은 내물마립간(356~402)에서 지증마립간(500~514)에 이르는 여섯 대의 마립간 시대 왕족 무덤에서만 나온다.
 
  2. 이 금관은 그 형식과 상징성이 모두 스키타이-흉노계의 금관·샤머니즘·토템에서 유래한 것이다. 최근 무역전시관에서 전시된, 내몽골의 흉노 단우(單于)(선우: 왕) 무덤에서 나온 금관 꼭대기엔 날개를 벌린 새가 앉아 있다. 스키타이 전사의 투구에도 새가 앉아 있다.
  경주 서봉총(瑞鳳塚) 금관의 나뭇가지 장식 위에는 세 마리의 새가 앉아 있다. 천마총에서는 금제 새날개 모양의 관(冠) 장식물이 발굴되었다.
 
  3. 새는 북방 유목민족이 숭배하는 동물로서 신화에도 많이 등장한다. 박혁거세, 김알지, 석탈해 신화는 물론이고 지증마립간의 어머니 이름은 조생(鳥生)부인이다.
 
  4. 이란계 스키타이 유목민, 몽골-투르크계 흉노 등이 활약하던 곳에서 많이 나오는 술잔인 각배(角杯)는 한반도에선 동해시, 포항, 경주, 부산, 창녕 등 신라·가야지방에서만 나온다. 각배는 뿔로 만든 술잔인데 전사들이 맹세를 할 때나 출전할 때 승리를 다짐하면서 사용하는 것이다.
 
  5. 가야에서 출토된 기마인물형 토기에는 각배 모양이 붙어 있다. 기마민족과 각배의 상관관계를 잘 보여 준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석탈해(昔脫解) 신화와 관련하여 각배가 등장한다. 김교수는 신라와 가야에서 각배가 나온다는 것에 두 국가의 뿌리 상관성을 알 수 있다고 했다.

 

6. 삼국사기에 나오는 신라 김씨의 조상 김알지 탄생 신화 속에 열쇠가 숨어 있다. 
    <탈해(脫解)이사금 조(條)(서기 65년): 봄 3월, 왕이 밤에 금성(金城) 서쪽 숲(始林)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자 그곳으로 호공(瓠公)을 보냈다. 숲 사이에는 금색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그 사실을 왕에게 보고하자 왕은 사람을 보내 궤짝을 가져오게 하였다. 왕이 뚜껑을 열어 보니 그 속에는 작은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용모가 기이하고 위엄이 있었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조신들에게 이르기를 『이것은 하늘이 나에게 보낸 아들이니라』하고 거두어 길렀다. 아이는 점점 자라며 더욱 총명하고 지략이 많아 이름을 알지(閼智)라 했다. 시림(始林)을 계림(鷄林)으로 고쳐 국호로 정했다> 
  
7. 김교수는 이 신화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먼저 이 신화는 전형적인 알타이-흉노 문화권의 신화이다. 북방민족의 토템인 나무와 새가 등장하고 알타이에서 유래한 「알지」란 말이 나온다. 알지는 「알타이」의 한자식 발음이다. 알타이를 알타이 지방에선 알트, 알튼, 아르치로 발음한다. 알타이란 말은 금이란 뜻이다. 김알지의 뜻은 그래서 金金이 된다. 
  

8. 석탈해의 이름은 몽골어로는 「탈한」 또는 「탈하이」(복수)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한양대 김교수는 탈하이가 「대장장이」라고 해석했다. 쇠를 다루는 석탈해는 각배도 쓴 것으로 보아 흉노계로 보이는데, 김알지를 양자로 삼아 왕으로 만들려고 했으나 결국은 박혁거세계(系)인 파사(婆娑)이사금에게 양보했다. 늦게 경주에 들어온 흉노계 세력이 연합하여 선주(先住) 박씨 세력에게 대항하다가 좌절했다는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9. 알타이 산맥, 즉 금산(金山) 부근에서 살던 금을 좋아하던 흉노계 김씨 집단이 금성(金城 경주)에 들어와서 왕이 되더니 금관, 금팔찌, 금목걸이, 금허리띠 등 금공예품을 많이 만들고 무덤에까지 가져갔다는 이야기이다. 금이야말로 흉노의 브랜드이다. 10세기에 일어난 12세기 대제국을 건설하고 13세기에 칭기즈칸의 몽골에 망한 금은 여진족의 완안부(完顔部) 부족이 세웠다. 금사(金史)에 따르면 이 부족이 크게 된 것은 10세기에 김함보(金函普)(금나라의 시조라고 한다)라는 신라인이 들어오면서부터였다.

 

김함보는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바칠 때 반발한 왕족의 한 사람이 만주로 들어온 경우라고 한다(김위현(金渭顯)·「요금사(遼金史) 연구」).

 

고려는 몽골·거란 등 북방 유목제국의 침략을 받았지만 金은 고려를 치지 않았다. 금의 황실이 고려를 형제국처럼 생각한 때문이다.

 

17세기 이 여진족이 다시 일어나 세운 청(淸)제국의 황족들은 성(性)을 애신각라(愛新覺羅)라고 했다. 「신라(新羅)를 사랑하고 잊지 말자」는 의미이기도 한데, 만주어로는 그 뜻이 「금」이다. 이들은 청이 망한 뒤 금으로 성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처럼 동아시아에서 김씨는 흉노계통 유목기마민족의 족보를 이어가는 상징이다.

 

문무왕 비문(碑文)의 미스터리
  

 

반도를 차지한 신라 30대왕 김법민(金法敏), 즉 문무왕(文武王)의 능비(陵碑) 파편 하나가 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961년 경주시 동부동 주택가에서 발견되었다. 그 전 조선 정조(正祖) 때인 1796년에도 능비 파편 두 개가 발견되었으나 실물은 전하지 않고 비문의 탁본(拓本)은 청(淸)의 금석학자 유희해(劉喜海)에게 들어가 「해동김석원(海東金石苑)」에 실렸다. 이 비문은 한당류(漢唐流)의 명문장을 모방하였고, 중국의 경전이나 고사성어(古事成語)에서 따온 미사여구가 많이 들어 있다. 
  
이 비(碑)의 건립연대에 대하여는 문무왕이 죽은 서기 681년이거나 그 이듬해로 추정한다. 비문의 전체 내용은 일부의 파편만 발견된 상태에서 파악이 어려우나, 대체로 앞면에는 신라에 대한 찬미, 신라김씨(新羅金氏)의 내력,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과 문무왕의 치적(治績), 백제 평정 사실 등이고 문무왕의 유언, 장례, 비명(碑銘) 등이 적혀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문무왕의 시신(屍身)은 유언에 따라 봉분을 쓰지 않고 화장한 뒤 동해에 산골(散骨)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사천왕사(四天王寺) 근방에 의릉(擬陵․가짜 무덤)을 만든 것이거나, 문무왕이 창건한 이 절에 능비만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이 비문 중에 주목할 만한 대목이 있다. 
  
<그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서부터 내려와 화관지후(火官之后)에 창성한 터전을 이었고, 높이 세워져 바야흐로 융성하니, 이로부터 ○(판독불능)지(枝)가 영이(英異)함을 담아 낼 수 있었다. 투후 제천지륜(侯 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 하였다. 15대조 성한왕(星漢王)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영(靈)이 선악(仙岳)에서 나와(下略)> 
  
여기서 문제가 되는 대목은 「侯 祭天之胤傳七葉」이다. 후(侯)는 한무제(漢武帝)가 흉노와 싸울 때 청년 장군 곽거병(去病)에게 포로가 되었던 흉노왕 휴도(休屠)의 아들 김일제를 가리킨다. 
  
문제는 이 김일제가 중국 사서(史書)에 등장하는 유명한 흉노인이라는 데 있다. 이 비문의 문맥상 문무왕 스스로가 우리 조상은 흉노인 김일제라고 밝히고 있는 것으로 해석이 된다. 
  
김일제와 그 후손들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한서와 열전(列傳)에 실감 나게 쓰여 있고 중국서안(西安)에는 김일제의 무덤도 있다. 애매모호한 신화상의 인물이 아니라 실체가 분명한 김일제를 문무왕이 『우리 조상이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흉노 제국의 황제인 선우(單于) 아래는 여러 왕들이 있었다. 혼야왕과 휴도왕이 다스리던 곳은 옛 진나라 땅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초원(草原)이었다. 하서주랑(河西走廊)이라고 불리는 이곳을 거쳐야 西域(중앙아시아)으로 갈 수 있었다. 한무제는 흉노가 장악하고 있던 이곳을 차지함으로써 실크로드를 열고 서방과 무역을 할 이유가 있었다. 
  
한서(漢書)에 따르면 기원 전 121년 한무제의 명을 받은 청년장교 곽거병이 초원으로 쳐들어온다. 흉노 군대는 패배를 거듭한다. 곤야왕은 흉노제국의 황제인 선우(單于)로부터 문책을 당할까봐 두려워 휴도왕을 꾀어 항복하자고 한다. 휴도왕이 거부하자 그를 죽인 혼야왕은 곽거병에게 항복하는데 휴도왕의 부인 알씨(閼氏)(注-알타이=금을 뜻하는 閼智와 같다)와 아들 김일제, 그의 동생 륜(侖)은 끌려와서 곽거병의 포로가 되어 한무제에게 인계된다. 
  
한무제는 그때까지 성(姓)이 없던 김일제에게 성을 내리는데 금인(金人)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한(祭天) 집안 출신이라고 하여 김씨라고 붙여 주었다고 한다. 이 부분의 해석에 대하여 김병모 한양대 인류학과 교수는 좀 다른 견해이다. 그는 金人이란 「알타이 사람」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알타이가 고향이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일을 책임진 일종의 샤먼왕 집안 출신이므로 알타이의 의미를 따서 김씨 성을 주었다는 것이다.

 

한무제(漢武帝)의 경호실장이 된 김일제(金日)
 
1998년 중국의 언론은 감숙성(甘肅省)과 산서성(山西省)에 살고 있는 김씨들이 흉노족의 후손들임이 밝혀졌다고 보도한 바 있다. 문무왕이 김일제(金日)가 자신의 조상이라고 스스로 비문(碑文)에서 밝혔다면, 경주지방까지 김일제의 후손들이 들어왔던 까닭은 과연 무엇인가.
 
한무제는 소년 김일제에게 말을 먹이는 일을 맡겼다. 당시 흉노와 싸우던 한(漢)제국의 고민은 흉노와 대항할 수 있는 기병용 말을 기르는 일이었다. 잔칫날 한무제는 황실에서 사육하던 말들을 검열했는데 소년 김일제의 말이 훌륭하고 소년의 얼굴 또한 준수했으므로 그를 중하게 쓰기 시작했다.
 
金日는 한무제의 수행 경호원이 되었다. 로마, 오스만 터키, 바티칸의 예를 보면 권력자의 경호부대를 외국인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외국인은 반역을 함께 도모할 패거리가 없으므로 권력자에게만 충성을 바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김일제는 한무제를 가까이서 모시면서 암살기도를 현장에서 좌절시키는 등 큰 공을 세웠다. 한무제는 자신의 딸을 金日에게 주어 아내로 삼으려 하였으나 그는 사양했다.
 
궁중에선 『황제께서 망령이 들어 오랑캐의 애새끼를 얻어 도리어 귀하고 중하게 여긴다』고 수군거렸다고 한다.
 
한서(漢書)를 읽어 보면 金日는 남자답고 아주 청결한 성격의 소유자로 보인다.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草原의 흉노를 무력으로 누른 한족(漢族) 황제인 한무제는 나들이를 나갔다가 병이 들어 죽을 때 김일제를 포로로 데리고 왔던 곽거병(당시는 사망)의 동생 곽광(郭光)과 김일제를 불렀다. 한서 열전(列傳)에 적힌 대화이다.
 
   곽광이 눈물을 흘리면서 황제에게 아뢰었다.
   “폐하께서 만약에 세상을 버리시게 된다면 후사가 되실 분은 누구십니까”
   “그대는 앞서 받은 그림의 뜻을 모른단 말인가. 막내아들을 세우고 그대는 周公의 일을 하라”
   이에 곽광은 머리를 조아리면서 사양하며 말했다.
   “신은 金日보다 못합니다”
   金日도 또한 이렇게 말했다.
   “신은 외국인이요 곽광보다 못합니다”
  
황제는 곽광을 대사마대장군, 김일제를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임명하고 어린 황제를 보필하라는 유조(遺詔)를 내렸다. 그 전에 병이 들자 한무제는 조서(詔書)를 봉하고 이렇게 말했었다.
  

   “내가 죽거든 글을 열어 보고 그대로 따라 시행하라”

봉을 뜯고 열어 보니 한무제는 김일제를 侯(투후), 상관걸을 안양후(安陽侯), 곽광을 박륙후(博陸侯)에 봉하라고 써두었다. 이는 그 몇년 전 한무제에 대한 반역음모를 분쇄한 공에 대한 논공행상이었다. 여기서 문무왕의 비문에 나오는 후(侯)(는 金日에게 주어진 영지의 지명이고, 侯는 王, 公 다음 가는 귀족 등급이다)라는 작위 이름이 등장하는 것이다. 
 
김일제는 새로 즉위한 임금 소제(昭帝)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를 들어 侯의 직위를 사양했다. 소제의 즉위 1년 뒤 김일제는 앓아누웠다. 곽광은 임금께 건의하여 김일제는 죽기 전에 드러누워서 侯의 인수(印綬)를 받았다. 황실의 실력자인 곽광과 김일제는 사이가 매우 좋았던 것 같다. 김일제가 죽은 뒤에도 그의 아들들이 7대에 걸쳐 漢의 황실에서 중용되었다. 
  
김일제의 후손이 김알지(金閼智)?
 
한편 곽광은 한무제를 이은 소제(昭帝) 시절엔 황제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곽광은 소제가 죽자 다음 황제로 창읍왕(昌邑王)을 맞아들였으나 음란한 일만 하자 폐위시키기도 했다. 그가 새로 맞아들인 선제(宣帝)는 곽광이 황궁에 나타나면 용모를 가다듬는 등 조심하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곽광은 전권(專權)을 휘두른 지 20년이 되는 선제 6년에 죽었다.
 
당시 선제의 황후는 곽광의 딸이었다. 곽광이 죽자 이제 그의 비행(非行)이 터져나왔다. 곽광의 아내가 선제의 첫 번째 황후를 독살하고 자신의 딸을 황후로 앉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때 흉노인 金日의 동생 아들 김안상(金安上)은 여전히 선제의 신임을 받으면서 황실의 요직에 앉아 있었다. 김안상은 큰아버지의 친구였던 곽광의 딸을 아내로 데리고 있었다. 상황이 곽광 일족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그는 이혼해 버렸다.
 
선제는 마침내 곽광의 아내?아들 등 일족을 도륙해 버린다. 처형한 시체를 거리에 버렸는데 수천 명이 피살되었다고 한다. 황제를 농단한 권신(權臣)이 죽거나 실각하면 그 일족이 권력남용의 대가(代價)를 치르는 것은 동양정치사의 한 공식이기도 하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도 金日의 후손들은 황제의 신임을 받아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번성했다.
 
그들이 흉노인이므로 한족 사이에 권력기반이 없어 오로지 황제 한 사람에게만 충성을 바친 때문이었을 것이다. 포로로 붙들려온 흉노인 출신의 이런 성공은 순전히 그 개인이 가진 인간성 덕분일 것이다.
 
김일제 후손의 운명은 왕망(王莽)과의 인연으로 급전(急轉)한다. 왕망은 원제(元帝)의 황후 왕씨 가문 출신이었다. 왕망은 또 김일제의 증손자 당(當)의 이모부였다. 왕망은 어린 황제를 독살하는 등 전횡(專橫)을 하다가 서기 8년에 한을 멸망시키고 신(新)을 세우면서 황제가 되었다. 왕망이 황제가 되자 외가인 김일제 가문(家門)은 득세한다.
 
왕망의 新은 그러나 15년 만에 망하고 후한(後漢)이 다시 선다. 왕망 일가는 물론 김일제 가문도 멸문지화(滅門之禍)에 직면하게 되었다. 김일제의 후손들이 요서, 요동, 한반도, 일본 규슈, 오키나와로까지 도망갔고 그 일파가 경주로 들어온 김알지라는 과감한 추정을 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한반도의 서북, 김해, 제주지방에서 발견되는 왕망 시대의 오수전(五銖錢)을 들어서 왕망 세력이 국외로 도피할 때 가져온 것이라는 주장까지 한다. 삼국지 동이전(三國志 東夷傳)에 실린 「진한(辰韓)의 진인(秦人)」은 바로 진나라 출신 金日 후손들이 경주지역으로 도망쳐 온 사건을 뜻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문무왕 비문에 등장하는 「나는 侯 김일제의 후손이다」는 의미의 문장은 이처럼 무시할 수 없는 역사적 실체와 배경을 지니고 있다. 문제는 이 글귀를 액면대로 받아들일 것인가의 여부이다. 많은 학자들은 모화(慕華)사상에 젖은 문무왕이 자신의 뿌리를 중국에 갖다 댄 것뿐이라고 무시해왔다. 하지만 문무왕은 모화사상에 젖은 사람이 아니라 대당(對唐) 결전을 통해서 전성기의 세계제국 당을 한반도에서 물리친 自主의 화신이다.
 
그가 정말 모화사상에 젖어 조상의 계보를 조작하려면 왜 하필 한족이 싫어하는, 더구나 한에 반역했다가 도륙당한 흉노족 金日의 후손이라고 자칭했을까,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문무왕의 당당하고 깔끔한 성격에 비쳐볼 때 『나는 흉노인 김일제의 후손이다』고 정직하게 밝힌 것이라고 봄이 더 타당할 것 같다. 즉, 문무왕이 신라김씨는 흉노족 김일제의 후손이라는 뿌리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신라김씨의 출자(出自)를 둘러싼 의문은 깨끗이 풀린다.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요사이 들어 많은 정통 학자들이, 역사학·고고학·민속학·언어학·고미술학의 성과를 근거로 하여 문무왕의 신라김씨 왕족이 흉노계통이라고 주장하고 나서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여러 분야의 관점에서 입체적으로 그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어 재야(在野)학자들의 상상력이 앞선 주장과는 달리 무시할 수 없는 학계의 뚜렷한 흐름이 되고 있다. 

 

 사마천(司馬遷)과 흉노(匈奴)
  
서기 전 2세기 몽골고원을 통일한 최초의 유목제국은 흉노였다. 묵특單于(선우)라고 불린 영웅이 나타나 약 30만 명의 상시 동원 기마전사 집단을 조직했다. 당시 유방(劉邦)이 세운 漢의 인구는 약 5000만 명이었다. 30만 명의 잘 조직된 흉노 기마전사들은 유방의 군대를 백등산에서 포위하였다. 묵특(선우)는, 유방이 묵특(선우)의 아내에게 로비를 한 뒤에야 포위망을 뚫어 주어 유방(한고조, 漢高祖)이 달아나도록 했다. 그 뒤 漢은 흉노의 속국처럼 되어 매년 왕족 여인들과 금품을 바쳤다.
 
그 70년 뒤 漢무제가 흉노를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주도권이 바뀐다. 漢무제는 재위(在位) 54년을 흉노와 싸운 사람이다. 당시의 史官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에는 흉노와 싸운 장군들의 전기가 등장하고 흉노에 대한 관찰기록이 실려 있다. 흉노에 대한 그 뒤의 기록은 사마천의 것을 베낀 것이 많다. 사마천 또한 흉노 때문에 화를 입은 인물이다.
 
대대로 황실의 태사공(太史公)(사관, 史官)으로 봉직했던 집안 출신인 사마천은 흉노를 치러 가서 항복해 버린 이릉(李陵)을 변호했다가 한무제의 노여움을 사 생식기가 잘리는 궁형(宮刑)을 받았다. 사마천은 사기의 후기(後記)인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서 이렇게 썼다. 
  
       그(자신을 3인칭으로 지칭)는 옥에 갇히어 말했다. 
      『이것은 내 죄일까, 이것은 내 죄일까. 이제 내 몸은 병신이 되었으니 세상에 쓰이진 못하리라』 
       형(刑)을 받고 물러난 뒤 그는 깊이 생각한 끝에 말했다. 
      『…공자는 진(陳)․채(蔡) 나라에서 고생함으로써 「춘추(春秋)」를 지었고, 초(楚)나라 굴원은 쫓겨나 귀양살이를 함으로써

「離騷(이소)」를 지었고, 좌구명(左丘明)은 눈이 멀었기 때문에 「국어(國語)」가 있고, 손자(孫子)가 다리의 무릎뼈를 잘림으로써

「병법(兵法)」을 논했고, 여불위(呂不韋)가 촉(蜀)으로 쫓겨감으로써 세상에「여람(呂覽, 여씨춘추)」이 전해졌고, 한비(韓非)는 진(秦)나라에 갇힌 몸이 되어「설이(說離)」,「고분(孤墳)」을 남겼으며, 또 시(詩) 300편은 대개 현성(賢聖)이 분발하여 지은 것이다. 결국 사람은 모두 마음이 답답하고 맺힌 바가 있어 그 도(道)를 통할 수 없기 때문에 지나간 일을 말하며 장차 올 일을 생각한다』 
 
현실의 벽에 막혔을 때 과거를 뒤돌아보면서 거기서 힘을 얻어 그 벽을 돌파하고 미래를 열기 위해 쓴 사기의 기록정신. 그가 작심하고 쓴 동양 최초의 역사서인 사기의 흉노열전(匈奴列傳)을 읽어보면 지금도 살아 있는 기록임을 실감한다.
 
야성적인 유목문화와 지성적인 漢문화가 충돌하는 현장감은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사기에는 장건, 곽거병, 이광(李廣) 등 흉노와 漢의 충돌 전선에서 명멸해 간 영웅들의 이야기가 특히 많다. 그 이야기의 무대는 몽골 초원에서 지금의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지형이며, 야만과 문명, 충성과 배신, 야망과 좌절이 오가는 인간 드라마이다. 영화 장면처럼 시각적 상상이 가능하고 영웅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장대한 서사시이다. 
  
■ 유럽의 현재 지도를 만든 훈족의 침입
 
한무제와 흉노의 대결은 그 뒤에 오는 대초원의 대폭발과 동서양의 대격변을 준비해 간 시기였다. 漢무제의 공격을 받은 흉노는 약화되었다가 동서(東西) 흉노로 분열한다. 그 뒤 다시 남북으로 갈린다. 서기 1세기 漢과 손잡은 나(南)흉노와 동쪽의 유목민족 선비(鮮卑)에게 협공당한 북(北)흉노는 알타이 산맥을 넘어 지금의 중앙아시아로 물러갔다. 그 뒤 중국의 기록에서는 北흉노에 대한 언급이 사라진다.
 
서기 2세기 지금의 카자흐스탄 북쪽에 머물던 北흉노는 다시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여 흑해 북안(北岸)을 거쳐 4세기 말 러시아 초원 남쪽의 볼가江을 건너 게르만족인 東고트족을 쳤다.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연쇄적으로 발생한다. 민족이동의 뇌관을, 서양에서 훈족으로 불린 北흉노가 터뜨린 셈이다. 독일과 그 주변에 살던 게르만의 여러 부족은 훈족에게 쫓겨 로마 영내로 밀려 들어간다.
 
야만인으로 불리던 고트족, 반달족, 롬바르드족, 색슨족, 부르고뉴족, 프랑크족, 앵글로족 등이 지금의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스페인, 아프리카 북안(北岸) 등지(等地), 당시의 로마문명권으로 쳐들어가 기존정권을 정복한 뒤 게르만족이 지배하는 정권을 세운다. 이 정권이 모태가 되어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오늘날의 유럽 국가들이 탄생한다. 로마 제국은 곧 붕괴되고 게르만족이 세운 국가들이 중세를 연다. 東아시아에서 북방기마민족들이 중국과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 정복자가 되어 고대국가를 만들고 있던 바로 그 시기였다.
 
4~6세기 기마민족이 한족을 밀어내고 東아시아의 패자가 된 것처럼, 게르만족이 유럽에서 로마인들을 교체하고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 이후 1600년이 지났지만 지금의 유럽은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그려놓은 국가지도 위에 있고 東아시아도 이 시기에 유목민족 출신들이 만들어놓은 고대국가의 틀 속에 있다.
 
흉노족의 후신인 훈족의 황제 아틸라가 이끄는 대군(大軍)은 451년 지금의 프랑스(당시에는 로마령(領)) 중심부로 쳐들어가 파리 남쪽 살롱에서 로마군과 결전을 벌였으나 패퇴했다. 이것은 13세기 몽골 기마군단 보다도 더 서쪽으로 간 경우이다. 이 5세기에 흉노족의 일부는 한반도에 들어왔으니 이 기마민족의 활동공간은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에까지 이르렀다는 이야기이다.
 
고미술사를 전공하는 권영필(權寧弼)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한 논문에서 훈족이 된 北흉노가 서천(西遷)하기 시작한 서기 91년부터 200년간 역사 기록에서 사라지는데, 이 기간에 그 일파가 동진(東進)하여 경주에 들어온 것이 아닐까 하는 재미있는 추론을 했다.
 

■ 세계 4대 제국 중 3國이 기마민족系
 
유럽의 게르만족과 東아시아의 몽골계 기마민족은 동서양에서 새로운 민족국가의 질서를 만들어낸 뒤 1500년간 2대 군사 세력으로 세계사를 주도했다. 이 두 민족이야말로 세계사의 주먹이었다. 보병전술을 중심으로 한 로마군단의 군사기술은 게르만족의 세상으로 이어져 영국과 독일의 군사문화로 발전했다.
 
기마전술의 몽골군단은 활을 주(主)무기로 삼고서 수많은 제국을 부수고 세우고 하면서 유라시아 대륙을 흔들어놓더니 소총이 일반화되는 17세기 무렵부터 군사적 우위를 상실해 간다. 
  
그럼에도 19세기 초 현재, 세계 4대 제국 중 3대 제국의 지배세력이 몽골-투르크 기마민족 계열이었다. 몽골계의 방계로 볼 수 있는 여진족의 청(淸), 오스만 터키 제국, 중앙아시아에서 내려온 몽골계 기마군단이 인도를 정복하여 세운 무갈(이란어로 몽골이란 뜻)제국, 나머지 하나는 대영(大英)해양제국이었다.
 
한국의 군사문화 전통은 몽골 기마군단에 닿아 있다. 다만, 근세조선조가 한족 사대주의에 빠져 군대를 멸시하는 바람에 500여 년간 문약한 국가로 전락함으로써 몽골군단의 전통이 끊어졌다가 대한민국 건국 후 국군이 탄생함으로써 화랑대로 상징되는 장교단을 중심으로 하여 과거의 상무정신을 재건하고 있는 중이다. 
  
신라 삼국통일의 주체세력이 되었던 화랑도는 북방기마 문화의 전통을 고스란히 보존해 간 東아시아 최초의 장교 양성 기관이었다. 화랑도는 흉노적인, 북방적인, 민족주체적인 사고방식과 가치관과 종교의식을 이어간 조직이기도 했다.

 

사기(史記)의 흉노열전(匈奴列傳)

 

아래 글은 일신서적출판사에서 나온 「사기열전 2권」(권오현(權五賢) 역해(譯解))의 흉노열전 중 일부이다.

 

■ 흉노인들의 습속
 
흉노의 여러 종족이 북쪽의 미개척지에서 유목 생활을 하였다. 그들의 가축은 주로 말·소·양이었는데, 특이한 것으로 낙타·나귀·노새·버새(注-수말과 암나귀 사이에 난 잡종으로 노새보다 약함)․야생마 등이 있었다.
 
물과 들을 따라 옮겨 살기 때문에 성곽이나 일정한 주거지도 없고 농사마저 짓지 않았으나 각자의 세력 범위만은 경계가 분명했다. 글이라는 것이 없으므로 말로써 약속을 했다. 어린애들도 양을 타고 돌아다니며, 활을 당겨 새나 쥐 같은 것을 쏘고, 조금 자라나면 여우나 토끼 사냥을 해서 양식을 충당했다.
 
장정이 되면 자유자재로 활을 다룰 수 있어, 전원이 무장 기병이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평상시에 목축에 종사하는 한편 새나 짐승을 사냥해서 생계를 유지했으나 싸울 때에는 전원이 군사 행동에 나설 수 있었다. 이것은 거의 타고난 천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싸움이 유리할 경우는 나아가고 불리할 경우는 물러나는데 도주하는 것을 수치로 알지 않았다. 무엇이든 이익이 될 만하면 그것을 얻으려 하며 예의 같은 것은 돌보지 않았다.
 
임금을 비롯해 모든 사람들이 가축의 고기를 먹고 그 가죽이나 털로는 옷을 해 입거나 침구로 썼다. 건장한 사람을 소중히 위하고, 노약자(老弱者)는 천대했으므로 고기를 나눠줄 때만 해도 좋은 살코기는 우선적으로 장정들에게 돌아갔고 그 나머지가 노약자의 차지였다. 아비가 죽으면 그 후처를 아들이 아내로 맞고 형제가 죽으면 그 아내를 남은 형이나 아우가 차지했다. 서로 이름을 부르는 것을 꺼리지 않았으며 字 같은 것은 아예 없었다.
 
진(秦)의 시황제(始皇帝)는 몽염(蒙恬)에게 10만 군사를 주어 북쪽으로 흉노를 치게 했다. 몽염은 하수(河水)(황하, 黃河) 남쪽 땅을 모두 손아귀에 넣고 하수를 이용하여 요새를 만드는 한편, 하수를 따라 44개소에 현성(縣城)을 쌓고 유형병(流刑兵)을 옮겨 이를 지키게 하였으며, 구원(九原)에서 운양(雲陽)(산시성, 陜西省)에 이르는 도로를 개통시켰다. 
  
■ 묵특선우(單于)의 출현
 
당시는 동호(東胡)가 강하고, 월지(月氏)도 세력이 왕성했다. 흉노의 單于(선우: 흉노의 君主 칭호)는 두만(頭曼)이라 불렸다. 두만은 진(秦)나라를 당해 내지 못해 북쪽으로 옮겨갔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나 몽염(蒙恬)이 죽고 제후들은 진나라를 배반하여 중국은 온통 혼란 상태가 되고 진나라가 변경을 지키기 위해 보냈던 수비병들은 모두 이탈하고 말았다. 흉노는 마음 놓고 다시 차츰차츰 하수(河水)를 건너 남으로 내려와 마침내 옛날 요새선에서 중국과 경계를 맞대었다.
 
두만선우(頭曼單于)에게는 태자가 있었는데 이름은 묵특(冒頓)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뒤에 총애하는 알씨(閼氏)(황후(皇后)의 뜻)에게서 다시 작은아들을 얻어서 묵특을 폐하고 작은아들을 태자로 세우려 했다. 그래서 선우는 묵특을 월지에게 볼모로 보낸 다음 갑자기 월지를 공격했다. 월지는 선우의 예상대로 묵특을 죽이려고 했으나 묵특은 준마를 훔쳐 타고 본국으로 도망쳐 왔다.
 
두만은 일이 어긋나기는 했으나 그의 용기를 장하게 여겨 묵특을 1만기(旗)의 장군으로 맞았다. 그러나 묵특은 鳴鏑(명적: 소리나는 화살)을 만들어서 부하들에게 나누어주고 그것으로 기사(騎射) 연습을 시켰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런 명령을 내렸다.
 
  『내가 명적을 쏘거든 다같이 그곳에 대고 쏘아라. 쏘지 않는 자는 죽인다』
 
그런 다음 수렵에 나섰을 때 묵특은 자신이 명적을 쏘아 댄 곳에 쏘지 않은 자는 가차 없이 잡아 죽였다. 그 뒤 묵특이 또한 명적을 자기의 이마(愛馬)에게 날렸다. 그러자 좌우에서 차마 쏘지 못하는 자가 있었다. 묵특은 역시 당장에 그들을 잡아 죽였다. 얼마 후에 그는 또 명적을 자기의 애처(愛妻)에게 날렸다. 좌우에서 겁이 난 나머지 감히 쏘지 못하는 자가 있자 묵특은 그들 역시 사정없이 죽여 버렸다.
 
또 얼마 뒤에 묵특은 수렵에 참가해서 명적을 선우가 타는 말에 날렸다. 그러자 부하들은 모두 일제히 거기에 쏘아 댔다. 그제서야 묵특은 비로소 부하 전원이 자기의 명령을 따른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리고 다음 수렵에 나갔을 때 명적을 아버지 두만에게 날렸다. 과연 그의 부하들은 일제히 화살을 날려 두만선우를 죽였다. 묵특은 잇달아 그의 계모, 아우 및 자기를 따르지 않은 대신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고 스스로 선우가 되었다.
 
묵특이 선우에 올랐을 당시 동쪽에서는 동호(東胡)가 묵특이 아비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는 것을 듣자 묵특에게 사자를 보내 두만이 생전에 탔던 천리마(天里馬)를 얻고 싶다고 청했다. 이에 묵특이 신하들의 의견을 묻자, 신하들은 모두 이렇게 말했다.
 
  『천리마는 흉노의 보배입니다. 주지 마십시오』

 

그러나 묵특은 이렇게 말했다.

 

  『서로 나라를 이웃하면서 어떻게 말 한 마리를 아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결국 천리마를 내주었다. 얼마쯤 뒤에는 묵특이 자기들을 무서워하는 줄로 안 동호가 다시 사자를 보내 선우의 閼氏 중에 한 사람을 얻어 가지고 싶다고 청했다. 
  
묵특이 또 좌우에게 물었다. 좌우는 모두 성을 내며 말했다.
 
  『東胡는 무례합니다. 그러기에 閼氏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쳐서 버릇을 고쳐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때도 묵특은 이렇게 말했다.
 
  『남과 나라를 이웃하면서 어떻게 여자 하나를 아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드디어 사랑하는 閼氏 한 사람을 골라 東胡에게 보내 주었다.

 

 

■ 동호(東胡) 정벌
 
이로써 동호(東胡)는 더욱 교만해져서 마침내는 국경을 침범하려 했다. 당시 동호와 흉노 사이에는
1000여 리에 걸쳐 아무도 살지 않는 황무지가 있었다. 동호는 이 황무지에 눈독을 들이고 사자를 보내 묵특에게 이렇게 전했다.
 
  『흉노와 우리의 경계지점인 황무지는 흉노로서는 어차피 무용지물이니까 우리가 차지했으면 좋겠소』
 
묵특이 이 문제를 신하들에게 묻자 몇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이건 이래저래 버린 땅입니다. 주어도 좋고 안 주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묵특은 크게 성을 내며 말했다.
 
  『땅은 나라의 근본이다. 어떻게 줄 수 있단 말이냐?』
 
그러고는 주어도 좋다고 한 자들을 모조리 참수한 다음 곧 말에 오르며 전국에 명령을 내렸다.
 
  『이번 출전에 낙후한 자는 죽이겠다』
 
그리고 마침내 동쪽으로 동호를 습격했다. 동호는 처음에 묵특을 업신여겨 흉노에 대한 방비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묵특은 군사를 이끌고 습격해서 순식간에 동호를 대파해 그 왕을 죽였으며 백성을 사로잡고 가축을 빼앗았다.
 
그리고 돌아오자 이번에는 서쪽으로 월씨(月氏)를 쳐서 패주시켰고, 남쪽으로 河南(오르도스)의 누번왕(樓煩王)·백양왕(白羊王) 등의 영지를 병합하는 한편 일찍이 진(秦)나라의 몽염(蒙恬)에게 빼앗겼던 흉노 땅을 모조리 되찾았다. 당시 한군(漢軍)은 항우(項羽)와 서로 싸웠으므로 중원 천하는 전쟁에 지쳤다. 묵특이 손쉽게 흉노를 강화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흉노에게는 활에 능숙한 군사만 해도 30만 명에 이르렀다. 
  
■ 법률·
풍습·전법(戰法)
 
그들의 법률은 대개 이러했다. 평상시에 칼을 한 자 이상 뺀 사람은 사형에 처하고, 도둑질한 사람은 그의 재산을 몰수하고, 경범죄를 범한 사람은 알형(軋刑)에 처하고, 중죄를 범한 사람은 사형에 처했다. 옥에 가둬두는 것은 길어도 열흘 이내이며 옥에 갇힌 사람은 전국을 통해 몇 명에 불과했다.
 
선우는 아침에 영(營)을 나와 막 떠오르는 해에게 절을 하고 저녁에는 또 달을 보고 절을 했다. 앉는 자리의 차례는 왼쪽을 윗자리로 하고 북쪽을 향해 앉았다. 술일(戌日)과 기일(己日)을 길일(吉日)이라 하여 소중하게 알았다.
 
죽은 사람을 보낼 때는 시체를 널과 바깥 널에 넣고, 그 속에 금은(金銀)과 가죽옷들을 넣었는데, 무덤에 봉분을 하거나 나무를 심거나 하는 일은 없고, 상복을 입지도 않았다. 임금이 죽으면 사랑받던 신하나 첩들 중에 따라 죽는 사람이 있는데, 많을 때에는 몇십 명에서 몇백 명에 달했다.
 
전쟁을 일으킬 때에는 항상 달의 모양을 보고 결정했다. 달이 커져서 둥글어지면 공격을 하고 이지러지면 후퇴했다. 공격이나 싸움을 할 때에 적의 목을 베거나 적을 포로로 한 사람에게는 한 잔 술을 하사하고, 노획품은 노획한 본인에게 주는데 사람을 생포했을 경우는 잡은 사람이 하인이나 하녀로 삼았다.
 
그렇기 때문에 싸우는 마당에서는 누구나가 이득을 얻으려고 교묘히 적을 유인하여 한꺼번에 내리덮치곤 했다. 그래서 적을 보기만 하면 이득을 바라고 새떼처럼 모여들지만 일단 싸움이 불리해져서 패색이 짙어지면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 버렸다. 또한 싸움에서 자기 편 전사자(戰死者)를 거두어 준 자에게는 전사자의 재산을 몽땅 주었다.
 
그 뒤 얼마 안 있어 묵특이 죽자 그의 아들 계육이 뒤를 이어 스스로 노상선우(老上單于)라 칭했다. 그가 즉위하자, 효문제(孝文帝)는 곧 종실의 딸을 공주라 속여 흉노에게 보내 선우의 閼氏(황후)로 만들었다. 그리고 환관으로 연(燕)나라 사람인 중항열(中行說)을 공주의 傅(부: 스승)로 했다. 說은 흉노에 가는 것을 꺼려 사퇴했으나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이렇게 투덜거리며 떠났다.
 
  『내가 가면 반드시 漢나라의 화가 될 것이다』 
  
■ 흉노(匈奴)와 한족(漢族)의 비교
 
중항열은 흉노 땅에 도착하자마자 선우에게 투항하더니 곧 그의 총애를 받았다. 처음 흉노는 漢나라의 비단·무명이나 음식 등을 애용하는데 중항열은 그 점을 들어 선우에게 진언했다.
 
  『흉노의 인구는 漢나라 한 郡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흉노가 강한 것은 입고 먹는 것이 漢나라와 다르기 때문이며 그것을 漢나라에 의존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선우께서 풍습을 바꾸어 漢나라 물자를 좋아하시면 漢나라가 자기 나라에서 소비하는 물자의 10분의 2를 채 흉노에게 소비시키기도 전에 흉노는 모두 漢나라에 귀속되고 말 것입니다. 漢나라의 비단과 무명을 손에 넣으시거든 그것을 입으시고, 풀과 가시밭 사이를 헤치고 돌아다니십시오. 옷과 바지가 모두 찢어져 못 쓸 것입니다. 그리하여 비단과 무명이 털로 짠 옷이나 가죽옷만큼 튼튼하고 좋은 점을 따르지 못한다는 것을 온 나라에 보여 주십시오. 또 漢나라의 음식을 얻으시거든 이를 모두 버리십시오. 그리고 그것들이 젖과 건락(乾酪, 마른 젖)의 편리하고 맛있는 것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을 온 나라에 보여 주십시오』
 
漢나라 사신으로서 『흉노의 풍습에서는 노인을 천대한다』고 하는 사람이 있자, 중항열은 그 漢나라 사신에게 모질게 따져 물었다.
 
  『당신들 漢나라 풍속에도 누군가가 주둔군의 수비를 위해 군대로 떠날 때에는, 그 늙은 양친이 자기들의 두껍고 따뜻한 옷을 벗어 주고 살찌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군대에 나가는 사람에게 보내 주지 않는가?』
 
  『그렇다』
 
  『흉노는 다 잘 아다시피 싸움을 일로 안다. 늙고 약한 사람은 싸울 수 없다. 그러기에 자기들이 먹을 살찌고 맛있는 음식을 건장한 사람들에게 먹인다. 즉 이같이 분수에 따라 스스로를 보호하는 만큼, 아비와 자식이 오랫동안에 걸쳐 몸을 보존할 수 있다.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흉노는 노인을 가볍게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흉노는 父子가 같은 천막 속에 살며 아비가 죽으면 자식이 그 계모를 아내로 하고 형제가 죽으면 남은 형이나 동생이 그의 아내를 맞아 자기 아내로 해 버린다. 옷과 관과 묶는 띠 등 아름다운 예복도 없고 조정에서의 의식과 예절도 없다』
 
  『흉노의 풍습에서는 삶은 가축의 고기를 먹고 그 젖을 마시며, 그 털가죽을 옷으로 한다. 가축은 풀을 먹고 물을 마시며 철에 따라 이동을 한다. 그러므로 싸울 때에는 사람들이 말 타고 활 쏘는 법을 익히고 평상시에는 일 없는 것을 즐긴다. 법과 규칙은 가볍고 편리하여 실행하기 쉽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간단하고 쉬워서, 한 나라의 정치는 흡사 한 집안의 일과도 같다.
부자(父子) 형제가 죽으면 남은 사람이 그의 아내를 맞아 자기 아내로 하는 것은 뒤가 끊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흉노는 어지럽기는 하지만 종족만은 그대로 유지된다. 그런데 중국의 경우 외면상으로 아비나 형의 아내와 장가드는 일은 없지만, 친족 관계의 거리가 멀어지면 서로 죽이기까지 한다. 혁명이 일어나 제왕(帝王)의 성(姓)이 바뀌는 것도 다 그런 예다.
그리고 예의를 말하더라도 충성이나 믿음의 마음도 없이 예의를 강요하기 때문에 위아래가 서로 원한으로 맺어지고, 집만 보더라도 너무 좋은 집을 지으려고 하기 때문에 생활하는 데 필요한 힘을 다 써버리고 만다.
대개 밭갈이하고 누에를 길러, 먹고 입는 것을 구하고 성을 쌓아 방비를 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전시(戰時)에는 싸움을 익히지 않고 평상시에는 생업에 지치고 만다. 슬프다. 흙집에서 사는 漢나라 사람이여! 자기들이 하는 일을 잘 반성해 보고 필요치 않은 잔소리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 흉노의 자존심
  
중항열의 말은 유목기마민족과 농경민족 관계에서 중대한 의미가 있다. 유목민들이, 접경하고 있는 도시-농경문화의 물질적 풍요를 부러워하면 목축을 포기하고 도시-농경문화를 받아들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목축에 기반을 둔 기마군단이 약화되어 군사적 우위를 상실하고 망해 버린다. 중항열은 이 점을 선우에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유목민들이 「우리처럼 이렇게 사는 것이 가치 있고 멋 있는 것이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족(漢族)과 대결할 수 있다. 한족 출신인 중항열은 흉노의 인간적 장점을 많이 이야기하고 있다. 
  
자연과 벗하면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다가 군사를 일으켜 중국을 약탈하고, 자연의 법칙에 따라 죽은 아버지와 형제의 아내(生母는 제외)를 취하여 종족보존을 하며, 법과 규칙은 가볍고 편리하여 실행하기 쉽고 임금과 신하 관계도 간단하고 쉽다. 이렇게 사는 것이 중국인처럼 제도를 복잡하게 만들어놓고 음모를 꾸미면서 가식적으로 사는 것보다 못한 게 무엇인가-대강 그런 투이다. 
  
흉노-몽골-투르크로 대표되는 북방기마민족이 거의 2000년간 도시-농경민족에 대해 군사적인 우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자신들의 야만적 삶의 방식에 대해 자부심과 자신감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하찮은 것이라는 가치관이 농경 문화인들과 달랐고 그 다름에 대해서 열등감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유목사회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으며, 그리하여 기마전술의 기반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 화랑세기와 흉노적 성(性)풍습
 
신라 내물왕 이후의 김씨(金氏) 왕들이 실은 흉노계통의 기마민족 출신이라면 그들의 풍습 중에서 흉노적인 성격들이 드러나야 한다. 이 수수께끼를 푸는 데 좋은 자료가 화랑세기(花郞世紀)(위작설(僞作說)도 있다)이다. 김대문(金大問)이 썼다고 전해지는 이 책은 1980년대에 부산에서 그 필사본이 발견된 이후 진짜냐 가짜냐로 학계의 쟁점이 되어 왔다.
 
이 책을 읽어보면 신라 왕족들과 귀족들의 성풍습이 적나라하게 나와 있다. 근친 결혼뿐 아니라 아버지가 다른 남매끼리의 결혼, 작은아버지와 결혼한 경우, 왕족 여성들의 화려한 남성 편력, 그리고 형사취수(兄死娶嫂), 즉 형이 죽으면 그 처를 동생이 인수한다는 사례도 있다.
 
나중에 태종무열왕이 되어 삼국통일의 길을 여는 김춘추(金春秋)의 아버지는 화랑세기에 따르면 김용수(金龍樹)였다. 김용수는 동생보다 먼저 죽었다. 그는 죽기 전에 동생인 용춘(龍春)에게 아내 천명공주와 아들 춘추를 맡겼다. 용춘은 형수와 형의 아들을 자신의 아내와 아들로 삼았다고 한다. 용수는 그 전에 천화공주를 아내로 맞아 살고 있었는데, 천명공주를 다시 아내로 맞게 되자 천화공주를 동생 용춘에게 주었다. 즉 용수는 동생에게 두 명의 아내를 잇따라 준 것이다. 위의 사례는 사기(史記) 등 중국의 사서(史書)가 전하고 있는 흉노의 풍습과 비슷하다.
 
삼국사기 내물왕조(條)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신라에서는 같은 성(姓)끼리 혼인하는데 그치지 않고 형제의 자식이나 고모, 이모, 사촌 자매까지 아내로 맞았으니, 비록 외국으로서 각기 풍속이 다를지라도 중국의 예속으로써 이를 따진다면 큰 잘못이다>
 
삼국유사에는 7세기 문무왕 시절 지방관리가 경주에서 찾아온 손님에게 아내를 동침하도록 바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 풍습도 북방 유목민들 사이에 전해 오는 것이다. 화랑세기에는 진평왕 때 아버지가 다르고 어머니가 같은 양도(男)와 보량(女)이란 남매 사이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 양도는 어른들이 남매 간의 결혼을 권하자 이렇게 말한다.
 
  『저는 누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나 사람들이 나무랄까 걱정입니다. 제가 오랑캐의 풍속을 따르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누나 모두 좋아할 것이지만 중국의 예를 따르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누나가 모두 원망할 것입니다. 저는 오랑캐가 되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어머니는 아들 양도를 감싸안으면서 『참으로 나의 아들이다. 신국(神國)에는 신국의 도(道)가 있다. 어찌 중국의 道로써 하겠느냐』라고 말했다고 한다(김영사, 이종욱의 「화랑세기로 본 신라 이야기」에서). 6세기 당시 흉노계 신라 귀족사회에도 중국의 유교적인 가치관이 들어오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기록이다. 아들 양도는 『나는 오랑캐가 되겠다』고 선언하는데 이는 『나는 흉노의 아들이니 야만의 법속을 따르겠다』는 자아(自我)의 선언이다.
 
중국으로부터 밀려오는 유교적․보편적 가치관에 대응한 신라적인 주체선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신라 사회가 흉노적인 특수성과 중국적인 보편성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위대성은 특수성과 보편성을 종합하여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승화시킨 점이다. 신라 왕족이 대당(對唐) 결전을 선택하여 신라의 독자성을 확보한 정신적 배경에는 『중국은 중국 것이 있고 우리 신라에는 우리의 가치가 있다』는 자주성과 자존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 자주성과 자존심의 근원에는 『우리는 漢을 속국으로 삼았던 흉노의 후손이다』는 정체성 의식이 깔려 있었을지도 모른다.

 

 

■ 대초원(大草原)과 지중해(地中海)
 
이제 흉노와 신라의 관계는 세계사의 시야(視野) 속에서 바라볼 때 이렇게 정리된다.
 
흉노족이 신라의 지배층으로 등장하는 4세기부터 6세기까지 東아시아와 유럽은 대동란의 시대였다. 그 대격변의 충격은 만주-몽골-중앙아시아-흑해 연안-러시아 대평원-헝가리 평원으로 뻗어나가는 유라시아 대초원으로부터 나왔다. 지도를 놓고 보면 이 유라시아 대초원(大草原)은 길다란 타원형의 벨트처럼 되어 있다. 이 대초원을 지중해에 비교하면 배는 말이 된다. 서구 문명의 본류(本流)인 그리스-로마-西유럽 국가들이 지중해라는 일종의 호수를 통해서 문물과 영향력을 주고받으면서 발전해 간 것처럼 東아시아, 중앙아시아, 이란과 인도, 러시아, 東유럽 국가들은 이 유라시아 대초원이란 일종의 지중해를 통해서 기마민족의 침략을 받고 그들과 문물을 교류하면서 발전해 왔다.
 
3~4세기 이 대초원의 세계에서 큰 변동이 생긴다. 몽골고원에는 소빙하기(小氷河期)가 찾아와 목초를 구하기가 힘들어지자 유목민들은 농경민족 정복에 나서든지 풀과 물을 따라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이때 동서양의 도시 농경 문화권의 2대 축이던 로마와 중국이 분열하고 있었다. 유목기마민족은 대초원 연변의 농경국가들이 약체로 보이면 반드시 침략을 개시한다.
 
3세기 말 중국의 통일왕조 진(晉)(三國志 시대를 통일했던 漢族 왕조)이 황실의 분열로 허점을 보였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흉노계 세력이 들고 일어나는 것을 신호로 하여 흉노 등 북방의 다섯 유목기마민족이 일제히 남침하여 진을 멸망시키고 북중국에 16개 나라를 잇따라 세운다. 소위 5胡16國 시대이다. 이를 이은 남북조 시대까지 포함하면 수(隋)가 중국을 통일하는 서기 581년까지 약 300년간 東아시아에서는 유례없는 격동과 이동이 벌어진다.
 
이 시기는 혼란 속에서 창조적 파괴가 일어난 시대이기도 했다. 즉, 기마민족의 이동과 고대국가의 건설인 것이다.
 
한반도에선 이 시기에 북방기마민족이 주체가 되어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 옥저(沃沮), 예맥(濊貊) 등 부족국가들을 흡수 통합한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섰다. 이 3國은 7세기 말에 남북국 발해-신라로 통합되어 오늘날 대한민국의 모태가 된다.
 
북방기마민족의 일파는 한반도의 남부 지방을 도약대로 삼아 일본에 상륙한다. 말과 활로 무장한 기마민족은, 농경민족인 야요이 문화가 만들어낸 수십 개 부족국가를 점령해 가면서 나라(奈良) 지방으로 진격하여 5세기경에는 야마토(大和) 정권을 수립한다. 이들은 떠나온 한반도의 3국과 화전(和戰) 양면의 관계를 설정하여 오늘날 韓日관계의 한 정형(定型)을 만들었다.
 
북방 기마민족의 남진(南進)․동진(東進)으로 인해 만들어진 수(隋)(그를 이은 당(唐)), 고구려, 백제, 신라, 일본의 고대국가는 지금의 중국, 한국, 북한, 일본의 모태이다. 오늘날 동북아의 모습은 3~6세기에 형성된 틀 위에 서 있다.
 
특히 北중국의 한족들은 이 300년간 몽골계 유목민족들과 혼혈되어 양자강 이남의 순 한족들과는 유전자가 많이 다른 민족으로 바뀌었다. 한족의 몽골화(또는 한족의 북방화), 몽골족의 한화(漢化)이다.
 
東아시아 대이동의 시대는 수(隋)가 중국대륙을 통일하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581~676년 사이에 끝이 난다. 

 

■ 고대사(古代史)의 생동과 기동
 
배달-흉노-고조선-신라-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민족사의 주류(主流) 세력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과학적인 답을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정확한 정의(定義)가 필요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明나라의 한족보다는 여진족과 더 가깝다. 신라의 유민은 여진족을 지휘하여 나라를 세우고 자신의 성(姓)을 따서 金이라 이름 붙인 적도 있다. 이 金은 고려를 형제국으로 생각하여 치지 않았다.
 
이 금(金)의 후신인 후금(後金)과 조선은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후금(뒤에 청(淸))도 최소한의 체면만 세워 주면 조선과 전쟁을 할 생각이 없었다. 광해군은 망해 가는 명(明)과 떠오르는 후금 사이에서 줄다리기 실리외교를 하면서 전쟁을 피해 갔다. 이 광해군(光海君)의 실리(實利)외교를, 부모국가인 명(明)에 대한 배신이라고 단정하고 쿠데타를 해서 집권한 인조 세력은 신흥강국 후금을 적으로 삼는 자살적 외교정책을 펴다가 병자호란(1636년)을 불러 임금이 언 땅에 머리를 박는 수모를 당한 것이다. 잘못된 정체성과 역사관이 부른 국가적 대재난이었다. 

 

남북국시대를 연 신라 그리고 흉노
  
■ 다양한 문화와 민족의 통합이 신라의 에너지
  

7세기 당시 신라인의 구성은 농경을 가지고 온 남방계, 기마전술을 갖고 들어온 북방계, 피난 온 한족의 혼합이었을 것이고 문화적으로는 북방계, 서방계, 남방계의 혼합이었을 것이다. 다양하고 풍성한 문화적 인종적 종합이 이뤄진 신라였으므로 국력을 동원할 때도 입체적 안목과 다양한 수단의 구사가 가능했을 것이다. 북방계의 용맹성, 남방계의 성실함, 서방의 그 어떤 요소들을 두루 이용할 수 있는 문화적 깊이를 가졌기 때문이다.
 
신라는 북방계가 가져온 기마전술에서뿐 아니라 해군 또한 강했다. 신라의 조선기술은 당시 東아시아의 최고 수준이었다. 왜(倭)의 3만 군사와 400척의 대함대를 백촌강에서 전멸시킨 당(唐)의 해군을 신라 해군이 기벌포에서 격멸함으로써 대당(對唐) 전쟁의 승부를 결정지었다. 문무왕 때 선부(船府), 즉 해양수산부를 창설했고, 일본인들은 당을 오고갈 때 신라의 선박을 이용했으며 장보고는 9세기 한국 근해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이 해군력은 남방계의 소질이었을지 모른다. 화랑도는 흉노적․북방적인 샤머니즘(선도(仙道) 또는 신도(神道))을 바탕으로 하되 불교와 유교적인 요소를 더한 종합적인 교양과정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친 엘리트는 사물을 넓게 깊게, 그리고 입체적으로 볼 수 있다. 화랑도(花郞道)의 대표인 풍월주(風月主) 출신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金庾信)이 보여준 통일 외교와 전략은 비스마르크와 몰트케의 콤비가 보여준 독일통일 전략의 깊이와 넓이를 오히려 무색케 한다.
 
김춘추는 비행기도 없던 시절에 서해와 현해탄을 건너 당과 일본을 오가고, 적진인 고구려로 단신 돌입하여 목숨을 건 담판을 벌이는가 하면, 김유신은 병권(兵權)을 잡고 네 왕을 모시면서도 쿠데타를 꾀하지도, 왕의 경계심을 부르지도 않는다.
 
신라가 나당(羅唐)연합을 이뤄 내고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도 그것을 지켜 내다가 당이 신라마저 삼키려 했을 때 세계 최강의 전성기 제국을 상대로 결전을 감행하는 모습은, 세계사 어디를 뒤져보아도 좀처럼 찾아내기 어려운 감동적 장면이다.
 
신라의 이런 행태 속에서 작동한 가장 중요한 민족적 유전자는 흉노적 용기와 당당함과 자존심이었을 것이다. 
  
■ 말(馬)과 배(船)를 잘 부린 신라인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사국은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수용하고 소화한 개방성과 주체성을 바탕으로 성장했다. 
 
역사학자 이도학(李道學) 교수(한국전통문화학교)가 쓴 「한국 고대사, 그 의문과 진실」(김영사)에서 필자는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힘」을 이렇게 분석했다.
 
  1. 고대국가의 국력 척도인 양질의 철광(鐵鑛)을 확보했다.
  2. 국가를 위해 생명을 가볍게 던지는 무사도 정신.
  3. 신라 국왕의 정교(政敎)일치적 권위로 해서 국력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4. 지배세력의 거듭된 교체와 다양한 세력의 포용으로 활력을 더해갔다.
  5. 왜(倭), 백제, 고구려로부터 끊임없이 시달려오면서 내부 단합이 강화되었고 항상 사회의 긴장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李교수의 분석 중에서 특히 공감이 가는 것은 신라가 한반도의 동남단에 고립되어 있는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개방체제를 유지하여 다양한 세력과 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사회의 생동력과 참신한 기풍을 유지하였다는 지적이다.
 
신라는 박(朴)-석(昔)-김(金)씨로 왕실이 교체되었다. 기록에 의한 것만으로도 중국 진(秦)의 유민, 고조선의 유민, 낙랑군의 유민이 신라지역으로 몰려왔는데 서로 배타적으로 적대시하지 않고 여섯 촌(村)을 이루며 더불어 산다.
 
이도학 교수는 『여러 경로로 들어온 민족의 수혈에 의해 참신한 기풍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신라는 흡수한 이방인이나 피정복민을 배타적으로 대하지 않고 다양한 세력을 포용하였기 때문에 강력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요컨대 신라는 백제, 고구려, 조선에 비해서도 내부질서가 민주적이었다는 것이다. 다양성을 인정해야 포용이 가능하다. 신라의 힘은 북진 해양세력과 남진 북방세력의 교차지로서의 용광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는 점에서 우러나온 통합의 힘이었다는 것이다.
 
신라가, 해륙(海陸)의 문물을 다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든 주체성과 개방성이 남북국시대를 연 원동력이 된 것이다.
 
신라의 국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신라의 해군력을 알아야 한다. 512년 지증왕 때 이미 이사부는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을 점령했다. 울산항에 인도에서 보낸 쇠를 실은 배가 도착했다는 기록도 있다. 신라의 관등 중 파진찬(波珍)이란 직책은 「바다 칸」, 즉 「해간(海干)」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신라의 조선술은 당시 東아시아에서 최고 수준이었다.
 
왜(倭)에 조선술을 가르쳐준 이나베(猪名部)는 신라 사람이다. 639년 선덕여왕 때 당나라 승려들이 신라 배를 타고 倭로 갔고 649년에는 倭의 승려가 신라 배를 타고 나라에서 귀환했다. 658년엔 倭의 승려 두 사람이 신라 배를 이용하여 당에 유학을 갔다. 그때 倭는 백제와 더 친했는데도 당을 오고갈 때 튼튼한 신라 배를 이용했다.
 
583년 진평왕 때는 병부(兵部)에 선부서(船府署)를 두어 선박사무를 관장하게 했고, 678년 문무왕 때는 병부, 즉 국방부와 동급인 선부령(船府令) 한 명을 두었다. 해양부가 국방부와 동급으로 독립한 나라는 東아시아에서 신라가 유일했다.
 
신라 해군이 고대일본 시절 오사카 부근 아카시노우라(明石浦)에 상륙하여 왜군을 격파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북방 기마민족 출신인 신라김씨 왕족은 말을 통해서 북방초원 루트를 경유한 로마와의 문화 교류를 유지하였고, 배를 통해서는 倭와 唐을 비롯한 외국과의 무역을 유지했다. 말과 배는 고대 사회에서 양대 기동수단이었다.
 
말로 상징되는 북방초원, 배로 상징되는 남방의 해원(海原)이 신라인의 활동공간이었다.

 
신라는 농업생산성과 기마군단, 그리고 철생산력과 해양력까지 두루 갖춘 입체적이고 다양한 국력의 조합(組合)을 갖고 있었다. 이는 남방계․북방계 등 다양한 민족의 공존과 융합에 의한 시너지 효과로서 설명될 것이다. 이런 복합성은 신라가 가진 주체성을 매개로 하여, 복잡성으로 전락하지 않고 높은 단합력을 발휘했다. 특히 신라는 전쟁이나 외교 등 국가적 위기 때 국내의 다양한 수단을 동원하여 입체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신라는, 참으로 당차고 단수가 높은 나라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신라통일의 주체세력은 신라 왕족 김춘추와 100여 년 전(前)에 신라에게 망했던 금관가야 왕족 김유신의 연합세력이었다. 피정복자를 노예로 부리지 않고 통일 대업(大業)의 주역(主役)으로 중용(重用)한 신라의 포용성은 북방 유목기마민족의 개방성에서 나온 게 아닐까?

 

 

■ 민족사 최고의 천하 名文
 
우리 민족사를 통틀어 최고의 명문을 꼽으라면 나는 서슴지 않고 671년 신라 문무왕이 당장(唐將) 설인귀(薛仁貴)에게 보낸 답신을 추천할 것이다. 이 글은 신라의 名문장가 강수(强首)가 썼던 것으로 보인다. 「답설인귀서(答薛仁貴書)」라고 일컬어지는 이 글이 명문인 것은 민족사의 결정적 순간에 쓰인 글이라는 역사적 무게 때문이다.
 
이 글을 통해서 우리는 남북국시대를 연 신라 지도부의 고민을 읽는 정도가 아니라 숨결처럼 느낄 수 있다. 그만큼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쓰였다. 이 글이 명문인 또 다른 이유는 복잡다단한 상황에서 국가이익을 도모하여야 하는 문무왕의 고민이 고귀한 지혜와 품격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격문(檄文)이 아니라 외교문서이다. 당(唐)과 정면대결할 수도, 굴종할 수도 없는 조건에서 어떻게 하면 가장 작게 굽히면서 가장 많은 것을 얻을까 하는 계산에 계산을 거듭하여 만들어 낸 글이다. 너무 굽히면 唐은 신라 지도부를 얕잡아 볼 것이고, 너무 버티면 전성기의 세계 최대 제국이 체면을 걸고 달려들 것이다. 신라가 사활(死活)을 걸어야 할 균형점은 어디인가, 그 줄타기의 스릴을 느낄 수 있는 이 글은 삼국사기 문무왕條에 자세히 실려 있다.
 
이 글을 이해하려면 신라가 반도를 차지하는 과정에서 나·당(羅唐)연합을 유지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수모를 겪어야 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唐이 13만 명의 대군을 보내 신라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킬 때의 의도는 분명했다. 그것은 신라를 이용하여 백제 고구려를 멸한 다음엔 신라마저 복속시킴으로써 몽골, 만주, 연해주, 한반도 등 동북아시아 대륙 전체를 唐의 식민지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이 의도를 신라도 알았다. 서로를 잘 아는 나·당은 공동의 적(敵) 앞에서 손을 잡은 것이었다. 공동의 적이 사라졌을 때는 결판을 내야 한다는 것을 신라도, 唐도 알면서 웃는 얼굴로 대하고 있을 뿐이었다.
 
唐은 신라와 함께 백제 부흥운동을 좌절시킨 다음에도 이 옛 백제 땅을 신라가 차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唐은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하여 唐의 명령하에 백제 땅을 다스리게 했다. 문무왕이 반발하자 唐은 압력을 넣어 문무왕과 부여융이 대등한 자격으로 상호 불가침 약속을 하도록 했다.
 
唐은 망한 백제 사람들을 이용하여 신라를 견제하는 정책으로 나온 것이다. 唐은 또 문무왕을 계림(鷄林) 대도독에 임명하였다. 신라왕을 唐의 한 지방행정관으로 격하시킨 꼴이었다. 문무왕이야 속으로 피눈물이 났겠지만 고구려 멸망이 아직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다. 참아야 했다.
 
서기 668년 평양성에 신라군이 먼저 돌입함으로써 고구려가 망했다. 唐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안동도호부는 백제 땅을 다스리는 웅진도독부와 신라(=계림도독부)를 아래에 둔 총독부였다. 이 순간 한반도는 형식상 唐의 식민지로 변한 것이다. 김유신, 문무왕으로 대표되는 신라 지도부는 전쟁이냐, 평화냐의 선택을 해야 했다. 이들은 굴욕적인 평화가 아닌 정의로운 전쟁을 선택했다.
 
이때 만약 신라 지도부가 비겁한 평화를 선택했다면, 즉 唐의 지배체제를 받아들였다면 신라는 唐을 이용하려다가 오히려 이용당해 한반도, 만주, 연해주, 몽골 등의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을 唐에 넘겨준 어리석은 민족반역 세력이 되었을 것이다. 만약 평화를 선택했다면 신라 지도부만은 唐으로부터 귀여움을 받으면서 잘 먹고 잘 살았을 것이다.
 
문무왕의 위대성은 이런 일시적 유혹과 안락을 거부하고 결코 결과를 낙관할 수 없는, 아니 절망적인 것처럼 보인 세계제국과의 결전(決戰)을 결단했다는 점에 있다. 문무왕이 그런 결단의 의지를 담아 쓴 것이 바로 「답설인귀서」인 것이다.

 

 

■ 문무왕의 자존심
 
서기 668년부터 2년간 신라 문무왕은 대당(對唐) 결전을 준비해 간다. 문무왕은 고구려 유민(遺民)들이 唐을 상대로 부흥운동을 하는 것을 지원했다. 고구려의 검모잠(劍牟岑)이 유민들을 데리고 투항하자 익산 지방에 살게 했다. 그 뒤 고구려의 왕족인 안승(安勝)을 고구려왕으로 봉해 그가 이 유민들을 다스리게 했다.
 
唐이 백제왕족을 웅진도독에 임명하여 신라를 견제한 그 수법을 거꾸로 쓴 것이다. 고구려 유민들을 이용하여 백제 독립운동을 꺾으려 한 것이다. 문무왕은 또 대일(對日)공작을 개시한다.
 
唐은 한반도를 안동도호부의 지배하에 둔 다음 일본에도 2000명의 병력을 보내 주둔시키면서 지배하에 두려고 했다. 문무왕은 일본의 신라계 도래인들을 움직여 임신(壬申)의 난(亂) 때 일본의 천무천황(天武天皇) 세력을 지원, 친신라정권이 들어서게 만드는 데 성공함으로써 唐의 對日공작을 좌절시킨다. 천무천황 이후 약 30년간 일본은 唐과의 교류를 거의 끊고 신라에 대규모 사절단을 보내 문물을 배워 갔다.
 
701년 천무가 반포한 대보율령(大寶律令)은 일본 고대 국가의 완성을 의미하는 「고대의 명치유신」인데 신라를 모델로 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동북아시아를 안정시켜 그 뒤 200여 년간 평화와 번영을 가져왔다.
 
670년 드디어 문무왕은 행동을 개시했다. 唐의 괴뢰국 행세를 하던 옛 백제지역 웅진도독부로 쳐들어가서 성(城)과 땅을 차지하였다. 비로소 백제 땅이 신라 땅이 된 것이다. 671년 여름 신라군은 백제군을 도우려던 당군(唐軍)과 싸워 5300명의 목을 베고 장군들을 포로로 잡았다. 그 한 달 뒤 唐의 총관 설인귀(薛仁貴)가 서해를 건너와서 신라 승려 임윤법사를 통해 문무왕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편지엔 이런 구절이 있다.
 
  <지금 왕은 안전한 터전을 버리고 멀리 천명을 어기고, 천시(天時)를 무시하고, 이웃나라를 속여 침략하고, 한 모퉁이 궁벽한 땅에서 집집마다 병력을 징발하고, 해마다 무기를 들어서 과부가 곡식을 운반하고, 어린아이가 둔전(屯田)하게 되니 지키려도 버틸 것이 없고, 이는 왕이 역량을 모르는 일입니다. 인귀(仁貴)는 친히 위임을 받은 일이 있으니 글로 기록하여 (황제에게) 아뢰면 일이 반드시 환히 풀릴 터인데 어찌 조급하고 스스로 요란하게 합니까. 교전 중에도 사신은 왕래하니 이렇게 편지를 보냅니다>
 
설인귀는 과부와 어린이까지 동원되는 거국일치(擧國一致)의 단합으로 세계 최강의 제국과 정면대결하는 신라의 처절한 모습을 전하고 있는 셈이다.
 
이 편지에 대한 긴 답서(答書)의 서두에서 문무왕은 약속을 어긴 것은 唐임을 지적하면서 시작한다. 전쟁의 명분이 신라 측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신라는 선(善)의 편이고 唐이 도덕적으로 결점이 많다는 것을 확실히 한 때문에 이 답신의 권위가 처음부터 잡힌다. 
 
  <唐 태종은 先王(태종무열왕)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내는 것이 아니니 내가 양국을 평정하면 평양 이남과 백제의 토지를 모두 너희 신라에 주어 길이 안일케 하고자 한다」고>
 
문무왕은 백제를 멸망시키고 부흥운동을 토벌할 때 신라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음을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先王(무열왕)이 늙고 약해서 행군하기 어려웠으나 힘써 국경에까지 나아가 나를 보내어 唐의 대군을 응접하게 하였던 것이오. 唐의 수군이 겨우 강어귀에 들어올 때 육군은 이미 대적을 깨뜨리고 나라를 평정하였습니다. 그 뒤 漢兵(唐兵을 의미함) 1만 명과 신라병 7000명을 두어 지키게 하였는데 적신(賊臣) 복신(福信)이 난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이 군수품을 탈취하고 다시 부성(府城)을 포위하니 거의 함락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내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적의 포위를 뚫고 사면의 적성(敵城)을 모두 쳐부수어 먼저 그 위급을 구하고 다시 군량을 운반하여 드디어 1만 명의 漢兵으로 하여금 호구(虎口)의 위난을 면케 하였고, 머물러 지키는 굶주린 군사로서 자식을 서로 바꾸어 먹는 일이 없게 하였던 것이오.

  웅진의 漢兵 1000명이 적을 치다가 패배하여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하였으니 웅진으로부터 군사를 보내달라는 청이 밤낮을 계속하였소. 신라에서는 괴질이 유행하여서 병마를 징발할 수 없었어도 쓰라린 청을 거역하기 어려워 드디어 많은 군사를 일으켜서 주류성을 포위하였으나 적은 아군의 병마가 적은 것을 알고 곧 나와 쳤으므로 병마만 크게 상하고 이득없이 돌아오니 남방의 여러 성이 일시에 배반하여 복신에게로 가고 복신은 승세를 타고 다시 부성을 포위하였소. 이로 인하여 곧 웅진의 길이 끊기어 소금․된장이 다 떨어졌으니 곧 건아를 모집하여 길을 엿보아 소금을 보내어 그 곤경을 구하였소>
 
  「당신네의 혈육은 우리 것이오」
 
  671년 문무왕의 答薛仁貴書는 계속된다.
 
  그는, 신라가 백제 지방에 주둔한 唐兵과 고구려 원정 唐軍에 대한 군량미 수송의 2중 임무를 어떻게 수행하였는가를 사실적으로 적고 있다.
 
  <6월에 先王이 돌아가서 장례가 겨우 끝나고 상복을 벗지 못하여 부름에 응하지 못하였는데, (황제의) 칙지(勅旨)에 신라로 하여금 평양에 군량을 공급하라고 하였소. 이때 웅진에서 사람이 와서 부성의 위급함을 알리니, 유덕민(劉德敏) 총관은 나와 더불어 상의하여 말하기를, 『만역 먼저 평양에 군량을 보낸다면 곧 웅진의 길이 끊어질 염려가 있고, 웅진의 길이 끊어지면 머물러 지키는 漢兵이 적의 수중에 들어갈 것입니다』라고 하였소.
 
  12월에 이르러 웅진에 군량이 다하였으나 웅진으로 군량을 운송한다면 칙지를 어길까 두려웠고, 평양으로 운송한다면 웅진의 양식이 떨어질까 염려되었으므로 노약자를 보내어 웅진으로 운송하고, 강건한 정병은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으나 웅진에 군량을 보낼 때 노상에서 눈을 만나 인마가 다 죽어 100에 하나도 돌아오지 못하였소.
 
  劉총관은 김유신과 함께 군량을 운송하는데 당시에 달을 이어 비가 내리고 풍설로 극히 추워 사람과 말이 얼어죽으니 가지고 가던 군량을 능히 전달할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평양의 대군이 또 돌아가려 하므로 신라의 병마도 양식이 다하여 역시 회군하던 중에, 병사들은 굶주리고 추워 수족이 얼어터지고 노상에서 죽는 자도 이루 헤아릴 수 없었소. 이 군사가 집에 도착하고 한 달도 못 되어 웅진 부성에서 곡식 종사를 자주 요청하므로 전후에 보낸 것이 수만 가마였소.
 
  남으로 웅진에 보내고 北으로 평양에 바쳐 조그마한 신라가 양쪽으로 이바지함에, 인력이 극히 피곤하고 우마가 거의 다 죽었으며, 농사의 시기를 잃어서 곡식이 익지 못하고, 곳간에 저장된 양곡은 다 수송되었으니 신라 백성은 풀뿌리도 오히려 부족하였으나, 웅진의 漢兵은 오히려 여유가 있었소. 머물러 지키는 漢兵은 집을 떠나온 지 오래이므로 의복이 해져 온전한 것이 없었으니 신라는 백성들에게 권과하여 철에 맞는 옷을 보내었소. 도호 유인원이 멀리 와서 지키자니 사면이 모두 적이라 항상 백제의 침위가 있었으므로 신라의 구원을 받았으며, 1만 명의 漢兵이 4년을 신라에게 의식하였으니, 인원 이하 병사 이상이 가죽과 뼈는 비록 漢나라 땅에서 태어났으나 피와 살은 신라의 육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오>
 
  「당신들 唐軍의 피골은 당나라 것이지만 당신들의 혈육은 신라 것이오」라고 부르짖듯이 말한 문무왕의 이 대목이야말로 신라가 온갖 고통과 수모를 견디면서 남북국 발해-신라시대의 대업을 위해 희생했던 심정을 직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문장이 答薛仁貴書의 한 클라이맥스이다.
 
  신라가 백제지역 주둔 唐軍과 고구려 원정 唐軍에게 동시에 군량미를 공급하기 위하여 노약자까지 동원하여야 했던 상황에 대한 묘사는 르포 기사를 읽는 것처럼 생생하다. 이런 고통을 지배층과 백성들이 장기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신라 사회의 내부 단결이 잘 유지되었다는 것이 증명된다. 唐은 신라 지배층 내부의 분열을 기다렸으나 일어나지 않았다.
 
  신라가 對唐 결전을 통해서 남북국 발해-신라시대를 열 수 있었던 데는 내부 단합과 이에 근거한 동원체제의 유지가 결정적 요인이었다. 신라의 승리는 정치의 승리인 것이다. 지도층의 솔선수범과 명예심, 다양한 구성원의 통합, 특히 군관민의 일체감이 장기간의 한반도점령전 중에서도 신라의 체제를 지켜냈다.

 

움직이는 국가 - 기마민족의 생리


동쪽은 만주로부터 서쪽은 중앙아시아와 남러시아를 넘어 헝가리까지 뻗어 있는 유라시아 대초원의 유목민들은 양·소·말 등 목축에 종사하면서 평화롭게 살았다. 이들이 기원 전 1000년경부터 기마전사로 바뀐 것은 그 뒤 세계사의 전개에 크나 큰 영향을 끼쳤다. 기마전술은 그 뒤 약 3000년 동안 통용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전투기와 전차가 등장하면서 기마전술의 효능이 종식되었으니 말이다.

 

소총이 보급되기 시작한 16~18세기까지 유라시아의 유목 기마민족은 농경도시국가에 대해서 항상 전술적으로 우위에 서 있었다.

평화롭게 살던 유목민들이 기마전사로 바뀌게 되는 동기를 준 것은 농업도시문명의 발달과 자극이었다. 5000년 전~4000년 전에 걸쳐 유라시아 대초원 남쪽 지방, 즉 지중해 연안·인도·중앙아시아·北중국에 걸쳐서 농업경제가 발전하고 도시문명이 성립되면서 청동제 무기를 중심으로 한 군사력이 증강되고, 금·은 보화가 축적되었다. 이런 재보(財寶)를 입수하기 위한 무역과 식민지 개척이 활발해졌다. 이런 변화는 평화롭게 무욕의 상태에서 살던 유목민들의 눈을 뜨게 하여 그들이 물질적인 호기심과 욕망을 갖도록 만들었다. 유목민들은 도시문명의 물질문화 가운데, 특히 금은주옥(金銀珠玉)과 청동(靑銅) 무기 및 차마구(車馬具)를 탐내게 되었다.

유목민들은 물질적 욕망이 생겼지만 당장은 이런 물건들을 손에 넣을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인구도, 경제력도 압도적인 농경민족 국가에 비해 조직도, 무기도, 전술도 시원찮은 유목민들이 대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 농경민족 국가에서는 차전(車戰)이 유행했다. 말이 이끄는 수레 모양의 전차를 타고 창과 활을 사용하는 차전은 4000~5000년 전에는 보병을 압도했다. 서기 전 1000년 무렵 지금의 南러시아, 카스피해 연안에서 말 재갈과 고삐가 발견되었다. 재갈을 물리고 고삐를 잡으면 말에 사람이 직접 탈 수 있고 말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기마전술이 등장하는 것이다. 기마전사는 길이 없는 산야를 달릴 수 있어 보병이나 말이 끄는 전차보다도 유리했다. 기원 전 700년 무렵 남러시아 스키타이 유목민 사이에서 등자-발걸이-가 발명되어 전사가 말을 타고 활을 쏠 수 있게 된다. 기동성과 원거리 공격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 기마전술의 출현이야말로 유목민족의 기마민족화, 그 국가의 형성, 흉노-투르크-몽골계통 대제국의 출현, 아랍 이슬람 세력의 대팽창, 유럽민족의 아메리카 대륙 정복, 몽골계 기마군단의 인도 정복(무갈제국), 북방 기마민족의 중국 정복, 만주-연해주-동몽골-한반도의 삼국시대 정립, 일본의 고대국가 형성 등에 기본 동력과 계기가 되는 것이다. 기마전술의 발명은 핵무기 발견과 소유가 국제정세에 끼친 영향과 비슷하지만 핵무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넓고 깊고 오랜 일대변화를 인류사에 미친 것이다.

 

이 기마전술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한 것은 유목민이었다. 그들은 초원에 말을 맡겨 기르고 悠悠自適(유유자적)하는 생활을 보내게 되어 있어 생산에 신경 쓰지 않고 종일 말을 달리면서 기마전술을 익히고 원정을 떠날 수 있었다. 그들은 초야를 따라서 가축을 이끌고 이동하는 생활에 젖어 있었으므로 고향이나 주거지에 대한 미련 없이 언제라도 작전상 유리한 지역을 확보하기 위한 신속 기동을 가능하게 했다. 유목민들은 또 「걸어다니는 통조림」인 가축을 이끌고 천막을 우차(牛車)에 싣고 다니면서 작전하기 좋은 곳에 배치하는 등 언제라도 진격과 퇴각이 가능한 사회구조를 갖고 있었다. 그들의 복장과 음식도 기동에 편리하게 되어 있어 바로 군장(軍裝)으로 쓰일 수 있었다. 동물과 자연을 벗삼아 혹한과 혹서 속에서 살아온 강건한 육체는 더할 수 없는 병기였다. 기마전술과 유목사회의 결합은 최고의 전사집단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조건의 완비였다. 요컨대 기마전술은 유목민의 생리에 맞는 것이었다. 이런 유목민이 농경민족화돼 살게 되면 기마전술은 잊혀지거나 쇠퇴해 버린다.

기마민족이 목축과 농사를 병행하면 우선 그 많은 말들을 기를 초원으로 이동할 수 없게 된다. 기마민족들의 정복왕조인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시대 때는 기마전술이 활발했으나 근세조선조에 들어오면 기마군대는 거의 사라지고마는 이유도 기마와 농경은 생리가 잘 맞지 않은 탓이었다.

기마민족이 군대와 국가를 만들어 힘을 쓰려면 우선 인간을 모으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했다. 농경민족 군대는 영원불멸의 땅과 인간을 결합시키는 일이지만, 일정한 주거가 없이 항상 떠돌아다니는 유목 기마전사들의 경우엔 사람을 모으는 것이 군대조직의 급선무였다.

유목사회는 사람을 모아 조직을 만드는 데는 불리했다. 사람들은 가축을 몰고 다니면서 광대한 초원에 흩어져 가족단위로 독자적인 생활을 한다. 이런 사람들을 한데 모아 군대와 국가를 만든다는 것은 유목민들의 생리에는 맞지 않았다. 유목민들을 모아 군대와 국가를 건설하는 데는 두 가지가 필요했다.

하나는 경제적 이득. 유목생활을 포기하고 전사로서 싸우는 것이 득이 된다는 계산이 있어야 했다. 다른 하나는 조직의 주체가 무력이든 권력이든 강제력을 행사하여 유목민들을 모으고 조직하는 것이었다. 군대와 국가는 유목민의 생리에 맞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만든 군대와 국가는 극히 인위적으로 운영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유목민의 군대가 농경민을 상대로 벌인 약탈 전쟁의 성과가 목축 생산물을 능가한다면 군대는 유지되지만 밑돌 때는 기마전사들이 군대 또는 국가라는 조직에서 탈퇴하여 유목민의 상태로 복귀한다. 애국심보다는 타산으로 뭉친 조직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이렇게 되면 기마민족 국가는 갑자기 붕괴하여 사라진다. 기마민족 국가는 영토 개념이 약하고 집단개념이 강하다.

 

흉노의 경우 기마민족 집단이 몽골고원에 있을 때는 중국사람들에 의해 흉노라고 불렸고, 유럽으로 이동하여 게르만족을 칠 때는 서양사람들에 의해 훈(Hun)이라 호칭되었다. 이처럼 기마민족 국가는 행동반경이 큰 「움직이는 국가」였다.

서기 3~6세기 세계 지도를 바꾼 주체세력은 몽골고원에 살던 유목민이었다. 이들은 서기 전 2세기부터 세계적인 대제국을 잇따라 만들어 낸 산파였다. 지배층이 바뀌는 데 따라 비록 제국의 이름은 달랐지만 몸통은 항상 몽골고원에 살던 여러 부족의 유목기마민족이었다. 흉노-선비-북위-돌궐-위구르-거란-금-몽골세계제국(중국에선 元)-청(반농반목(半農半牧)의 여진족이 몽골족의 협조를 받아 세움) 제국의 중핵은 유목민이었다.

이들의 힘은 생활이 바로 전쟁준비이고, 비상시엔 전원이 전사가 될 수 있는 유목생활의 생리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이들이 나중에 유목생활을 버리고 농경화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유목을 버린 만큼 군사적으로는 약화되었다. 유목생활에서 자연스럽게 터득하는 기마전술과 동원체제와 정신력이 유목을 떠나면 변질되거나 약해지기 때문이다.

 

 

◆ 일본 무사와 신라 도래인(渡來人) 이야기


스키타이 황금미술전시회 도록(圖錄)에는 완전무장한 스키타이 군사의 사진이 실려 있다. 발굴된 유물을 근거로 하여 재현한 것이다. 이 모습은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에 나온 19세기 일본 무사들의 무장(武裝)과 너무나 흡사하다. 몇 년 전에 내몽골에서 찍은 칭기즈칸 영화에 나오는 기마군단의 중장(重裝) 기병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 삼국시대의 장수 모습과도 비슷하다. 복원된 이란계 스키타이 군사의 무장은 신라 화랑도와 일본 무사들과 거의 같다.

우선 투구가 꼭 같다. 머리를 감싸는 쇠모자 양쪽에 가죽으로 보호막을 붙여 놓은 식이다.

갑옷도 두꺼운 가죽판에다가 쇠판을 여러 개 붙인 기마용 찰갑(札甲)이다. 바지, 즉 호복(胡服)을 입고 있는 점도 그렇다. 칼도 신라고분에서 많이 나오는 환두대도형(環頭大刀型)이다.

스키타이족은 기원 전 7세기경부터 지금의 이란, 러시아,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를 누볐던 유목기마 군사 집단이었다. 

기마(騎馬)문화는 동쪽으로 확산되어 흉노, 선비(鮮卑), 투르크, 위구르, 거란, 몽골로 이어지는 북방기마문화의 원류(源流)가 되었다. 그 흐름 속에 북방기마민족 집단이 고대국가를 세웠던, 한국과 일본의 군사문화가 존재한다. 스키타이 군사의 군장(軍裝)을 보면 일본과 한국의 군사문화, 그 뿌리는 북방초원의 주인공인 기마민족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스키타이와 「마지막 사무라이」 사이엔 2700년의 세월이 존재하지만 군사들의 무장이 근본적으로 같은 이유가 바로 이런 기마문화의 공유에 있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군사문화도 13세기 몽골의 침입 이전에는 일맥상통했던 것 같다. 일본 무사집단이 정권을 잡아 막부(幕府)를 운영하면서 교토의 천황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국정을 전횡한 것은 12세기 가마쿠라 막부가 처음이었다. 이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무사집단은 원씨(源氏)인데, 이들은 신라에서 건너온 도래인 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신라 도래인들이 지금의 도쿄 지방, 즉 관동 지방에 웅거하여 무사집단으로 컸다고 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源氏라고 하여 신라계의 무사집안이란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니토베가 쓴 「무사도(武士道)」에는 재미있는 대목이 있다. 요지를 정리하면 이렇다.

<무사도 정신에는 불교, 유교, 신도(神道)의 영향이 들어 있다. 불교는 무사도에 어떤 성격을 심었나. 운명에 임하는 평정(平靜)한 감각, 피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조용한 복종, 위험에 직면했을 때의 금욕적인 침착, 생명을 가볍게 보고 죽음을 가까이하는 마음이다.

신도는 불교가 줄 수 없는 것을 무사도에 심었다. 조상에 대한 존경심, 부모에 대한 효성, 주군에 대한 충성심이다. 애국심과 충의의 마음은 신도에서 나온 것이다.

공자와 맹자를 중심으로 한 유교적 교의 또한 군신, 부자, 부부, 장유, 붕우 간의 예절과 의리에 대해서 무사들을 교육했다. 공자는 정치인들의 도덕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이는 지배층인 무사계급에 들어맞았다. 맹자는 평민들을 위하여 이야기를 많이 남겼다. 이는 정의감이 강한 무사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무사도는 유교로부터 인의를 배웠던 것이다>

 

신라 말의 대학자 최치원은 화랑도 정신을 유불선(儒佛仙)의 합작품이라고 말했다. 유교, 불교, 선도(仙道,이는 북방유목민족 고유의 샤머니즘적 종교로서 일본에서 말하는 신도와 같다)의 정신이 화랑도에 녹아들었다는 뜻의 말을 한 것이다.

불교의 초연한 명상, 유교의 인의, 선도의 충의가 합쳐진 것이 풍류(風流)라고도 불린 현묘지도(玄妙之道)로서의 화랑도(花郞道)였던 것이다. 전선을 누비는 장교집단에게 「꽃 신랑」이란 의미의 화랑이란 이름을 붙여준 여유와 멋!

화랑도는 6세기 동아시아에 나타난 최초의 장교 양성 기관이었다. 7세기, 그들은 남북국 발해-신라시대를 연 원동력이 되었다.

무사도와 화랑도는, 북방기마민족의 군사문화를 지녔던 일단의 세력이 몽골, 만주, 연해주, 한반도와 일본열도로 건너가 농경문화와 융합하면서 만들어낸 가치관이자 습관일 것이다. 즉, 유목민족의 샤머니즘에서 유래한 신도(선도)와 불교, 유교가 혼합된사상이다. 신라와 일본의 군사문화는 기마민족 고유의 요소들과 대륙의 요소들을 종합하여 한 차원 발전시킨 것이다.

신라 사람들이 일본에 건너가서 사무라이 집단을 열었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다. 경주에서 신라 군사문화를 연구하고 있는 이종학씨이다. 그는 신라와 일본 무사 계통을 이렇게 연결시키고 있다.

 

1. 일본인들이 모시는 하치만신(八幡神)은 신라 도래인과 관련이 있는 바다의 신이다.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源氏 집안에선 하치만신을 氏神, 즉 씨족의 신으로 모셨는데 하치만신은 신라계통일 뿐 아니라 무신이라고 한다.

 

2. 신라 도래인들은 주로 도쿄 근방 관동 지방에 살았다. 집단 거주지는 신라군(新羅郡)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런 지역 중의 하나인 甲斐의 源氏 후손이 16세기 일본 전국 시대의 맹장 다케다신켄(武田信玄)이었다. 甲斐源氏인 다케다신켄은 스스로 조상을 「신라삼랑의광(新羅三郞義光)」이라고 자칭하면서 자랑스럽게 여겼다.

 

3. 일본 무사집단의 본류는 관동 무사이다. 이 관동 무사들은 신라후손들인 源氏를 중심으로 하여 무사집단을 형성하여 그 뒤 일본 역사상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본 무사의 源流는 두 갈래라고 한다. 귀족을 지키는 경호병 출신과 새로운 농토를 개척한 재지무사(在地武士)가 그들이다. 이 무사집단의 핵심이 신라에서 건너온 도래인들이었다면 이들이 화랑도 정신을 가져왔을 가능성이 크다. 화랑도는 동아시아 최초의 장교(그리고 국가 엘리트) 양성기관이었다. 이 화랑도는 무술만 연마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에도 정진하고 국토순례도 했다. 화랑도의 애국심은 경직된 명령체계나 탁상공론이 아니라 국토순례와 풍류에서 나온 부드럽고 포용성이 큰 생동하는 애국심이었다.

김춘추, 김유신, 김흠순(김유신의 동생) 등 반도점령의 주역들은 화랑도의 대표, 즉 풍월주(風月主) 출신들이었다. 화랑도는 그러나 남북국 시대 개창을 성공시킨 이후에는 쇠락하여 슬며시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지고 만다. 이 화랑도의 실종은 남북국시대 신라가 급속도로 당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자기의 고유한 풍습과 가치관을 잃어가는 과정과 겹쳐진다. 화랑도의 뿌리는 신라지배층인 흉노족 등 북방기마민족의 샤머니즘과 닿아 있는 것인데, 유교적인 사상체계가 이 화랑도의 원래 마음밭을 변질시키니 그 토양에서 꽃핀 화랑도는 서서히 고사(枯死)되어 간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국인들이 북방기마민족의 혼을 잃어 간 과정이기도 하다.

이 화랑도의 전통이 신라 도래인을 통해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들의 사회체계와 사상적 기반 위에서 새롭게 뿌리를 내린 것이 무사도란 것이다. 일본은 바다로 대륙과 (격)隔해 있는 관계로 해서 유교와 불교의 영향을 덜 받았고, 고유의 샤머니즘을 신도(神道)라는 하나의 종교의식에 담아 보존해 갈 수 있었기에 이 토양에서 샤머니즘을 모태로 한 화랑도 정신을 살려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북방기마민족의 군사문화를 농경적으로 발전시켜 계승한 화랑도가 일본에 건너가서 무사도로 꽃피었다는 해석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 에가미의 기마민족 일본정복설


일본 동경대학의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교수가 쓴 「기마민족국가(騎馬民族國家)-일본고대사에의 어프로치」(중공신서(中公新書). 1967년)는 한국, 일본, 중국, 북방초원지대 등 동북아시아의 전체적인 시각에서 일본의 고대 건국과정을 다룬 명저(名著)이다. 이 책에서 에가미 교수는 4~5세기 일본의 고대국가를 세운 세력은 부여, 고구려와도 관련이 있는 북방유목문화 출신의 기마민족으로서 이들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 西岸(또는 규슈)에 상륙하여 지금의 나라(奈良), 오사카 지방으로 진출, 소위 야마토(大和) 정권을 세운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이 학설은 일본인들이 천황을 중심으로 한 단일민족으로서 일본 열도에서 자생했다는 통설을 뒤엎는 것이었다.

 

에가미 교수의 관점은 북방유목민족의 시각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는, 동아시아의 역사를 중국 중심으로 보아온 기존의 관점을 깨고 중앙아시아-몽골-만주로 이어지는 북방 대초원의 유목기마민족 출신을 주어로 삼는 고대사 연구법이다. 농경민족적 역사관이 아닌 기마민족 중심의 역사관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 서 있는 에가미 교수의 학설은 비단 일본 역사를 보는 시각을 바꾸었을 뿐 아니라 한국의 고대사, 특히 삼국(馬韓·弁韓·辰韓), 가야, 신라의 성립과정에 대한 시각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의 학설은 역사적 상상력이 동원될 여지가 많은 동북아시아의 고대에 대한 거대한 재해석이기도 하다. 유물 중심의 고고학적 해석이나 사서 중심의 경직된 해석을 뛰어넘어 언어학, 신화를 포괄하는 종합적인 시각에다가 학자로서는 하기 힘든 대담한 추리를 보탠 그의 기마민족국가설은 생동하는 느낌을 준다.

그의 핵심적 주장은 「기마민족국가」란 책의 한 항목 「동북아시아계 기마민족의 일본정복설」에서 요약되어 있다.

 

그는 고대 일본은 몽골, 만주, 연해주, 한반도, 중원 등 동아시아 대륙을 통해서 들어온 기마민족인 천손족(天孫族)이 농경민족인 야요이 문화의 왜족(倭族)을 정복해서 세운 정권이라고 말한다. 에가미 교수는 이 천손족은 부여, 고구려와도 관련이 있는 동북아시아계의 민족으로서 일본 진출 직전에는 한반도 남부의 任那(가야) 방면에 근거를 두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런 추정은 고분을 중심으로 한 고고학적인 접근으로부터 얻은 결론과도 일치한다는 것이다. 즉 동북아시아 계열의 기마민족이 신식 무기와 말을 몰고 한반도를 경유하여 북규슈나 혼슈의 서단부(西端部)에 침입하여 4세기 말에는 畿內(나라 부근) 지방에 진출, 강대한 세력을 가진 야마토(大和) 정권을 수립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웅략(雄略)천황 이전의, 천황이라고 불리기 전의 왜국왕(倭國王)은 중국의 남조(南朝)로 사신을 보내어 이렇게 자칭한 기록이 5세기 「송서 왜국전(宋書 倭國傳)」 등에 남아 있다.

「사지절도독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 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
 使持節都督, 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 六國諸軍事, 安東大將軍, 倭國王」

가라(加羅)를 포함시켜 「칠국제군사(七國諸軍事)」라고 쓴 기록도 보인다. 에가미 교수는 위의 자칭 왜국왕이 자신의 영토라고 선언한 6, 7개 지역에 의문을 던진다. 5세기에는 이미 한반도에서 진한(秦韓(辰韓))과 모한(慕韓(馬韓))은 없어지고 그 땅에 신라와 백제가 서 있었는데도 왜국왕은 없어진 고토(故土)를 영토개념에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에가미 교수는 5세기 당시 왜왕이 마치 한반도 남쪽 전부를 관할하고 있는 것처럼 쓴 것은 「과거 마한·변한·진한의 삼한시대에 그 지배권을 남한 전체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이든지 아니면 그런 유력한 전승(傳承)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왜왕은 자신의 그런 입장을 더욱 명확히 하기 위하여 현재의 백제, 신라뿐 아니라 그 전 단계의 마한, 진한까지 영토개념에 포함시킴으로써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과거로 소급시켜 송(宋)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려 했으리라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왜왕은 마한, 진한은 영토개념에 포함시키면서도 변한(弁韓)은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5세기에 왜왕(注-기마민족이 일본을 침공하여 왜족을 점령하고 자칭한 명칭)은 아직 임나를 왜의 일부로서 점유하고 있었으므로 왜라고만 하면 되었지 굳이 왜의 모태인 변한(弁韓)을 영토에 포함시킬 필요성이 없었다는 것이다.

 

에가미 교수는 이런 의문을 던진다. 삼한 시대에 한반도 남부를 넓게 지배한 왕은 과연 있었던가. 그는 3세기에 쓰인 진수(陳壽)의 삼국지 위지 동이전 (三國志 魏志 東夷傳)에 나오는 진왕(辰王)에 주목한다. 진왕은 마한(馬韓)을 구성하는 여러 소국 중 하나인 월씨국(月氏國)을 다스리는데, 여기서 진한과 변한의 여러 부족국가들을 관할한다.

진왕은 마한의 사람이 되며 왕위는 세습이지만 자기 스스로 왕이 될 수는 없다고 적혀 있다. 에가미 교수는 이 진왕은 북방으로부터 들어온 기마민족 출신이라고 해석한다. 외래족이었으므로 마한의 여러 나라로부터 승인을 받지 않으면 스스로 왕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에가미 교수는, 북방기마민족 집단 출신인 진왕은 삼한을 다 지배한 것은 아니고 마한의 월씨국에 본부를 두고 당시 한반도 남부의 변한 지역을 다스린 가장 유력한 지배자였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에가미 교수는 위지동이전에 나오는 진한(뒤에 이곳에서 신라가 성립한다)에 관한 기술에 주목했다. 동이전에 따르면 진한의 노인들 이야기라면서 옛날에 중국의 진(秦)나라 사람들이 노역(勞役) 등을 피해서 한반도 남부에 들어왔는데 마한이 동쪽의 진한 땅을 떼 주어 살게 하였다는 것이다. 진한은 마한과는 말이 다르고 사람들은 진나라 사람과 닮았다고 한다. 여기서 말한 진나라 사람은 중국의 한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중국문화를 흡수한 북방 유목기마민족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 기술로 보아 진한, 변한 지역에 중국문화를 흡수한 북방초원 출신 외래인들이 들어와 3세기 무렵엔 진왕의 지배형식으로 한반도 남부를 다스렸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에가미 교수의 이야기이다.

 

4세기 전반에 들어서면 부여계통의 북방민족이 마한 지역으로 내려와 백제를 세우고, 후반에는 진한 지역에 기마집단이 등장하여 신라가 일어난다. 이처럼 부족국가들이 뭉쳐서 고대국가로 성장하는 가운데서도 변한 지역(지금의 경상남도)만은 소국의 연합체 형식에서 탈피하지 못한 것은 이 지역에 진왕의 지배권이 계속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에가미 교수는 여기서 학자로서는 하기 힘든 대담한 추리를 계속한다.

그는 한때 한반도 남부 지방을 지배하고 있던 진왕 세력이 백제, 신라의 등장으로 그 지배권이 변한 지역으로 축소된 상황에서 일본으로의 진출을 꾀하게 되었다고 했다. 에가미 교수는 변한 지역에 왜라고 불리는 부족이 살고 있었다고 본다. 이 왜라는 부족은 한반도 남부와 일본에 걸쳐서 존재했다는 것이다.

 

기마민족 출신인 진왕 세력은 한반도 남부 왜의 협조를 받아, 가라를 발진기지로 삼고는 왜의 본거지가 있는 일본열도에 침입한다. 상륙지는 북규슈나 혼슈의 서쪽일 것이다. 왜는 야요이 시대의 주인공으로서 동남아시아 계통이고 농경에 종사하면서 살았다. 이들은 신무기로 무장하고 기마전술을 쓰는 진왕 세력에 정복당한다. 진왕 세력은 한반도 남부와 일본 서해안에 걸친 왜한연합국을 성립시킨 다음 지금의 나라 지방으로 진격을 개시한다. 에가미 교수는 한반도와 일본에 걸친 기마민족 정복국가가 나라-교토-오사카 지방으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세 방면의 전투를 하게 되었다고 썼다.

진왕 세력은, 일본 서해안의 미정복지에 대한 작전을 계속하는 한편, 한반도 남부에 남은 왜를 근거로 하여 대(對)고구려 작전을 전개하면서 나라에 있는 왜의 사령부를 정복하였다는 것이다.

 

에가미 교수의, 기마민족 국가에 의한 일본정복설을 요약하면 이렇다.

중국 동북지방의 기마민족 세력이 중국과 접촉하여 농경 도시문명을 받아들인 상태에서 한반도 남부로 들어와 辰王 세력이 된 후 진한과 변한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에가미 교수는 이 기마민족이 선비족 계통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듯하다. 흉노의 지배下에 있던 북방기마민족인 선비족은 서기 4세기경에 중국으로 내려와 여러 나라를 만든다. 그 일파가 한반도로 들어와 진왕 세력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진왕 세력은 4세기에 들어서 부여계열의 부족이 마한으로 내려와 백제를 세우고, 진한 지역에서도 적석목곽분을 쓰는 기마민족이 나타나 신라를 세우자 지금의 경상남도 지역에 고립되었다.

 

진왕 세력은 경남지역과 일본에 걸쳐서 살고 있던 왜족 중 경남지역에 진출한 왜족과 손잡고 일본 본토 침공을 개시하여 일본의 농경 왜족을 정복해 가면서 나라에 진출, 야마토(大和) 정권를 세우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일본 정복을 가능케 하였던 것은 기마민족의 신무기와 특히 기마전술이었다고 본다.

에가미 교수는 3세기 말부터 시작된 중국과 북방의 대동란으로 북방민족이 여러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흐름의 하나가 기마민족의 한반도 진출과 일본 침공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4세기를 전후하여 흉노, 선비 등 북방의 유목민족들이 화북지방, 만주의 고구려, 한반도의 삼한지방, 일본 열도 쪽으로 대이동을 하였다는 점을 비슷한 시기의 게르만족 대이동과 비교하여 설명하기도 했다.

 

에가미 교수는 게르만족이 서유럽에 했던 역할을 북방기마민족이 동아시아에서 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셈이다. 즉, 오늘의 일본, 오늘의 한국, 오늘의 중국은 4세기에 기마민족들이 세운 고대국가를 모태로 하여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사진 © encyber.com   

 

황남대총(皇南大塚)의 주인공은 내물왕 부부


지금 경기도 박물관장으로 일하고 있는 고고학자 이종선씨는 「고신라왕릉연구(古新羅王陵 硏究)」(학연문화사)란 책에서 경주 황남대총(옛 98호 고분)의 주인공을 신라 내물왕 부부로 추정했다. 이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형식의 고분은 지름 80m, 높이 23m의 고분 둘을 연결시킨 쌍분(雙墳)이다. 이원장은 남분(南墳)은 내물왕, 북분(北墳)은 내물왕의 부인인 보반(保反)의 묘라고 주장했다.

이원장은 1974년에 이 고분의 발굴에 참여한 사람이다. 그는 신라 사람들이 먼저 남분을 만들고 나중에 그 고분의 일부를 파내고 북분을 연결한 사실에 흥미를 갖고 연구를 해왔다고 한다. 남분에서는 금관은 나오지 않았고 갑옷은 나왔다. 북분에서는 금관이 나왔고 「夫人帶」라고 쓰인 허리띠 장식이 나왔으며 갑옷은 발견되지 않았다.

발굴팀은 남분이 왕의 무덤이고, 북분은 왕보다 뒤에 죽은 왕비의 무덤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부장품으로 미뤄 남분이 약하고 북분이 화려하다. 왜 이런 차별인가. 이종선 관장은 무덤의 주인공을 추적하기 위해 우선 무덤의 연대를 추정했다. 부장품과 이 적석목곽분의 형식을 살펴서 그가 내린 결론은 남분은 4세기 후반~5세기 초반, 북분은 5세기 전반 중엽 이전에 속한다는 것이었다.

 

 

황남대총 금관. 국보 제 191호.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이 시기의 신라 왕 부부는 제16대 흘해이사금(訖解尼師今, 재위 310~356) 부부와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재위 356~402) 부부 네 사람밖에 없다. 흘해이사금은 석(昔)씨 왕계의 마지막 왕으로서 후사가 없이 죽었다. 그는 다소 허약한 왕이었다. 그런 흘해를 위하여 경주에서 가장 큰 왕릉을 만들었을 것 같지 않다. 흘해이사금은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죽자 신라 지배층은 대를 이을 왕을 석씨 성골(聖骨)중에서 고르려고 했으나 성골이 소진되어 왕이 될 만한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흘해이사금은 김씨계(金氏系) 최초의 왕인 미추이사금 집안에서 데려온 두 사위-내물과 실성(實聖)을 두었었다. 왕위(마립간이라 불렸다)는 나이 많은 내물에게 돌아갔다.

내물왕은 재위 46년간 신라의 기틀을 확립한 왕이었다. 그는 신라가 망할 때까지 계속되는 김씨(金氏) 왕족 시대를 열었다. 이종선 원장은 이 김씨 왕족이 흉노-알타이계 유목민 출신이라고 생각한다. 402년 내물왕이 죽자 왕위는 내물왕의 아들 눌지한테 가지 않고 손아래 동서인 실성에게 돌아갔다. 실성왕은 눌지를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다.

417년 눌지가 고구려에서 돌아와 왕이 되는 과정이 삼국사기에 이렇게 쓰여 있다.


<눌지마립간의 부인은 실성왕의 딸이다. 내물왕 37년에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는데, 실성이 귀환하여 왕이 되자 내물왕이 자기를 볼모로 보낸 것을 원망하여 내물왕의 아들에게 보복하려고 사람을 시켜 고구려에 있을 때 알았던 사람을 초청하여 비밀히 알리기를 『눌지를 보면 죽여라!』 하였다.
고구려 사람은 마중 나온 눌지의 외양과 풍신이 상냥하고 단아하여 군자의 풍도가 있음을 보고 말하기를, 『귀국 왕이 나에게 그대를 죽이라고 하였으나 지금 그대를 보니 차마 죽이지 못하겠다』하고 이내 돌아갔다. 눌지는 원망하여 도리어 왕을 죽이고 스스로 위에 올랐다>

서기 417년에 아마도 내물왕의 부인이자 자신의 어머니인 보반부인이 죽었을 것이다. 눌지는 자신의 후원자이던 어머니가 죽자 자신이 실성마립간의 보복을 당할 것이라고 걱정하여 재빨리 쿠데타를 결행했을 것이다.


황남대총 은관. 보물 제631.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사진 © encyber.com)

왕이 된 눌지는 이미 만들어진 내물왕의 남분에 어머니의 무덤을 북분으로 이어 놓으면서 여기에 화려한 부장품을 넣었다. 눌지마립간은 쿠데타를 일으킨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서 어머니를 위한 무덤을 초대형으로 만들고, 초호화판의 부장품으로 채웠다는 것이다.

 

 

 

 

 

#허구의 종족 짱골라  

 

中교수 “순수한 漢族은 없다”… 多민족 섞여 혈통 불분명
2007년 02월 16일 | 글 | 베 이징=하종대 동아일보 특파원ㆍorionha@donga.com |
 
일개 민족이 전 세계 인구의 19%인 13억 명이나 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진 학자가 있었다. 중국 란저우(蘭州)대 생명과학학원의 셰샤오둥(謝小東) 교수. 회족(回族)인 그는 한족(漢族)과 서북지역 소수민족의 유전자(DNA)를 몇 년에 걸쳐 조사했다. 중국 서북지역 소수민족의 기원과 이동 경위를 파악하기 위한 연구였다.

조사 결과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다는 한족은 실제로 1개의 민족이 아니었다. 한족이라고 부를 만한 순수한 혈통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중국 언론은 13일 셰 교수의 연구 결과를 자세히 보도했다.

셰 교수는 “오래 전부터 한족은 중원(中原)에 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는 어느 한 시기에 한족을 주변 국가 또는 민족과 구별하기 위해 지역적으로 획정한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일반적으로 ‘염제와 황제의 자손(炎黃子孫)’으로 생각돼 온 한족이지만 연구 결과 염제와 황제의 발원지는 중원이 아닌 ‘북적(北狄·북쪽 오랑캐)’지역으로 드러났다는 점이다.

황제(黃帝)의 발원지는 현재의 간쑤(甘肅) 성 친양(沁陽)에서 톈수이(天水)에 이르는 지역이고 염제(炎帝)의 발원지는 간쑤 성 동부에서 산시(陝西) 성 서부에 걸쳐 있는 황토고원으로 이들 지역은 원래 ‘북적’ 지역이었다.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중원의 범위는 산시(山西) 성 남부와 장쑤(江蘇) 성 서부 및 안후이(安徽) 성 서북부를 포함한 허난(河南) 성 일대. 따라서 이 지역에 사는 사람이 바로 중원 사람이라고 생각돼 왔지만 이 역시 사실과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셰 교수는 “연구 결과 현재 소수민족이 된 객가족(客家族)이 오히려 고대 중원인의 문화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드러났다”며 “순수한 한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 주변의 소수민족이나 주변 국가가 한족과 융합한 결과”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셰 교수의 연구결과에 중국의 일부 누리꾼은 셰 교수가 한족의 ‘동포감정’을 훼손했다며 사죄할 것을 요구했다.

한족의 비율은 중국 대륙이 92%, 대만이 98%, 홍콩과 마카오가 각각 95%와 97%이다.

 

 

 

“漢族, 단일민족 아니다 해!”
중국 유전연구소 충격 발표 … “지배민족 편입된 ‘가짜 한족’ 수천 년간 묵인”

중국을 여행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중국의 남쪽과 북쪽 사람의 생김새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문외한이 보더라도 광둥(廣東) 지방 사람과 베이징 사람과는 겉모양이 뚜렷이 구분된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자신들을 같은 한족(漢族)이라며, 한족과 닮지 않았다는 말에 상당한 불쾌감을 표하곤 한다. 그러나 최근 중국에서는 이들을 몹시 불쾌하게 할 만한 발표가 있었다. 54개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임에도 13억 인구의 92%가 한족이라는 중국 정부의 공식 인구 통계를 부정하는 연구결과를 발표했기 때문. 거대 순수 혈통으로 인정받던 중국 한족이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는 이번 연구 결과는 중국 사회를 뒤흔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번 발표가 중국 한족에게 더욱 충격적인 것은 중국 한족의 ‘순수혈통론’에 반기를 들고 나선 주체가 바로 중국 국영 연구소라는 점이었다. 중국 과학원 소속 유전연구소 인류유전자연구센터가 지난 5월 26일 15년 동안 진행한 중국인의 성씨와 유전자 관계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한족이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고 전격 선언하고 나선 것. 분석자료를 통해 연구팀이 내린 결론은 중국 남부 지역인 푸젠성(福建省)과 장시성(江西省)에 걸쳐 있는 우이산(武夷山)과 난링산맥(南嶺山脈)을 경계로 남쪽과 북쪽에 거주하는 ‘한족’이 혈연상으로 확연하게 구분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연구팀은 두 개의 ‘한족’이 한족과 소수 민족 간 유전적 차이보다 더욱 큰 차이점을 보였다고 발표해 파장을 더했다.

 

 

난링 산맥 경계 두 개의 ‘별개 집단’

 

이 연구팀의 한 관계자는 “한족이 통치하던 송나라와 명나라 시기,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등 모두 세 차례의 인구조사 내용을 분석하고 500여 편에 이르는 고문헌과 족보를 참조했다”며 “동시에 수백만 명의 중국인 혈액을 검사해 분석한 결과 이와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유전학자들의 이런 연구 결과는 일부 소장 역사학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중국의 역사는 황허(黃河) 유역 한족세력의 남방 침략과 정복의 역사였고, 이 과정에서 남방의 토착민이 자신의 출신을 속이고 한족 행세를 하면서 이같은 결과가 빚어졌다는 게 학자들의 주장이다. 북경의 한 역사학자는 “한족만이 중국 사회에서 정치적 파워를 가질 수 있는 상황에서 토착민들이 우월한 중화문화권에 편입하기 위해 한족임을 자처했다”며 “중앙 정부도 소수민족 복속정책의 일환으로 그것을 묵인하고 장려해 왔다”고 말했다. 한편 이들 ‘가짜 한족’ 외에도 한족과 소수민족 간의 결혼으로 인해 태어난 후손 중 절대 다수가 소수민족을 포기하고 사회생활에 유리한 한족을 택한 것도 한족 양산의 주요인으로 꼽힌다. 현재 중국에서 부모의 출신 민족이 서로 다르면 자녀에게 선택 권한이 주어지지만, 소수민족을 택하는 자녀는 거의 없는 실정.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이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것이다.

 

결국 한족은 ‘가짜 한족’에 대한 묵인과 ‘민족 선택제’라는 소수민족 통치 기술로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이는 거꾸로 지배민족으로서 한족의 위치를 수천 년 동안 보전하는 힘이 되었다. 역사학자들은 소수민족을 한족의 수로 압도하려는 중국 정부의 ‘인해전술식’ 인구정책의 결과물이 바로 92%라는 통계수치라고 비웃는다.

 

어쨌든 ‘중화주의’라는 민족적 개념을 통치 이념의 전면에 내세우는 중국 당국에게 ‘한족이 사실상 두 개의 별개 집단’이라는 사실은 커다란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인류유전자연구센터의 이번 발표는 국영 연구소의 발표임에도 중국 언론매체에 거의 소개하지 않고 있다. 한족의 이익이 중국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였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단면이다.

 

< 소준섭/ 상하이 통신원 > youngji@81890.net
발행일 : 2001 년 06 월 14 일 (288 호)
쪽수 : 62 ~ 62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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