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이슈로 본 논술] 영어·한자 조기 교육과 한글 교육의 위기

[미스터빈]

노벨상 휩쓴 日 뒤엔 자국어 사랑 있었다

[시사 이슈로 본 논술] 영어·한자 조기 교육과 한글 교육의 위기

강방식 동북고 교사 EBS 사고와 논술 강사

■한글교육의 위기 현상

올해는 주시경 선생이 국어연구회를 통해 말글운동을 펼친 지 10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올초 정부 인수위원회의 영어몰입교육 정책으로 한글교육의 위기 논란이 촉발됐다. 15조원의 영어 사교육비를 공교육에서 책임지겠다는 정책은 언어학자를 넘어서 교육단체들 간의 분쟁으로까지 번졌다. 올 10월부터 강남교육청이 초등학교에서 한자교육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조기 한자교육을 통해서 어휘력과 독해력을 신장시킨다는 목표를 세웠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900자 이상의 한자를 숙지하기 위해 각종 한자능력인증시험 및 한자경시대회를 일상화한다고 했다. 반면, 562돌 한글날 행사와 한글학회 100주년 기념사업을 위해 협찬을 해주는 기업은 거의 없고, 정부의 보조금도 초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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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조기교육의 효과 논쟁

전 세계가 영어를 의사소통수단으로 네크워크화된 환경에서 모국어를 달리하는 사람들이 수시로 만나 상호이해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영어가 기본이다. 전 분야에서 미국식 기준이 표준이 됐다. 돈줄이 되는 금융계 골목마다 영어를 모르고서는 집안의 금고 안으로 들어가기가 벅찬 상황이다. 로마시대 이후에 라틴어가 자기 발전과 부 획득에 필수적이어서 보편언어가 됐던 것과 비슷하다. 영어교육을 일상화한 북유럽의 국가들이 최고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애국심이라는 명목으로 한글교육 운동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배타적 민족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반면, 일각에서는 지나치게 어린 나이에 국어교육도 제대로 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조기 영어교육은 아이들의 문화정체성 형성을 방해한다고 주장한다. 다양성이 중요해지는 시대에는 자신의 문화와 역사를 제대로 구현하고 있는 모국어 습득이 경쟁력의 기초다. 올해에 노벨물리학상을 일본이 휩쓸었고, 지금까지 자연과학 분야에서 13개의 노벨상을 거머쥔 일본의 저력은 영어보다 일본어에 의한 전문교육을 철저하게 했기 때문이다. 토박이말을 잘 써야 고유의 정서와 문화를 제대로 계승할 수 있고, 창의력도 생길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한자 조기교육의 효과 논쟁

우리나라 언어는 70% 이상의 한자어로 구성돼 있고, 초등학교 국어책은 55% 이상의 한자어로 이뤄졌다. 교과내용의 핵심개념은 대부분 한자어이고, 한자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수업내용을 완벽하게 소화할 수 없다. '지양과 지향', '서술과 논술'등 시험 문제에서 자주 나오는 개념의 차이점을 알지도 못한 상황에서 문제를 풀거나 독해를 하면 엉뚱한 곳에서 헤매는 경우가 많다. 한자는 삼국시대부터 수입돼 지금까지 우리 역사와 같이 호흡한 언어로 모국어와 같은 존재다. 경제력이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에 집중되는 시대에 국한문 혼용을 고려해볼 만하다.

반면에, 단순한 한자교육은 교과학습에 도움이 안 된다는 주장이 있다. 영어단어를 많이 암기한다고 독해력이 향상되지 않는 이치와 비슷하다. 문맥 속에서 해당되는 한자가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급수시험을 목표로 단기적으로 한자의 음과 훈만을 배우면 어린이들이 쉽게 흥미를 잃는다. 국어실력은 한자어를 통해 어휘력을 향상시킨다고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학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다양한 배경지식의 습득, 논리적인 사고력과 풍부한 감성 능력 등 다차원의 언어환경이 조성돼야 한다. 영어 열풍에 이어 한자열풍도 사교육만을 부추기고, 아이들을 입시경쟁에 몰아넣을 뿐이다.


■한글 파괴를 주도하는 또 다른 요인과 언어의 세계화

'하이 서울 페스티벌'에서 보듯이 지방자치단체들은 자기들의 행정 사업명칭을 영어식으로 채택하고 있다. 한글을 보급해야 할 공공기관이 한글파괴에 앞장서는 꼴이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들이 영어사업에 투자하는 금액이 한글사업에 투자하는 금액의 24배라는 보고서는 경제적 차원에서 한글교육의 위기 상황을 대변해준다. 공영방송에서 연예인들은 비속어와 욕설은 물론 문법에 맞지 않는 한글을 사용, 표준말 학습을 위태롭게 한다. 인터넷의 통신언어는 해독이 불가능해 세대 간의 대화 단절상태를 초래할 정도로 한글을 오염시킨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세상을 본다. 새로운 생각과 개념을 담아내고 있는 다양한 언어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지혜가 살아 있다는 뜻이다. 언어 다양성의 훼손은 언어로 표현되는 정신과 문화의 위기다.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과 일제시대의 한글말살 정책은 언어와 민족 정체성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획일화의 특성을 보여주는 세계화는 소수 언어들의 종말을 촉진하지만, 창의성을 요구하는 세계화는 다양한 언어들의 자기발전 및 상호교류를 절실히 원한다.

조선일보 2008.1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