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정) 12/10
22:00 신도림 출발
12/11 02:40 복성이재 도착
04:10 산행 시작
05:35 다리재 (5분 휴식)
05:55
봉화산 (5분 휴식)
4.11km
07:15 944봉
08:00
광대치 (30분 아침식사)
08:30 식사후 출발
09:10
월경산
09;50 중치
(10분 휴식) 7.73km
10:30
중고개재
1.8km
12:00 백운산 (30분
휴식) 2.55km
12:30
휴식후
출발
13:50
영취산
3.45km
14:00
무령고개
0.4km
9시간
50분
20.04km
(12/10 22:00) 금년들어 제대로 추운 겨울맛을 느끼는
주말이다. 오후 내내 헬스에서
땀흘리고 며칠 전부터 시작된 감기 기침을 멎게하려 애썼으나 별로 신통치
않다.
감기약을 2알 먹으니 왠지 몸이 나른한게 오히려 컨디션을 망친
기분이다.
15개월의 긴 여정 동안에 부디 큰 탈없이 개근할 수 있어야 할텐데... 이까짓
감기정도야..
아무튼 겨울 배낭을 꺼내 자꾸 챙기는 방한장구들 탓에 무게가 꽤
나간다.
다소 무거운 감이 들지만 혹시나 하는 기분으로 하나씩 줏어 넣고 보니
가득이다.
서산 팔봉산으로 송년 산행을 떠나는 26산케들과 함께 못하는 아쉬움을
김대장과 통화로
나누고, 일요일 새벽에 약한 눈발이 서해안에 내린다니 미끄럽지 않길 기대해
본다.
바람은 다소 누그러지고 날씨는 맑은 밤이다. 늘 그렇듯이 신도림 집결지로
나서는 나는,
다소 흥분된 기분으로 2-3일전 부터 쌓인 설산 산행에 겨울 산행의 화려함을
꿈꾸며
흥얼 거리는데, 역까지 배웅을 나서는 물푸레는 아무래도 걱정스런
표정이다.
찬 기운을 느끼며 반가이 만나는 대간주자들의 손길에는 따스한 자신감이
묻어난다.
차가운 주말 저녁에 무엇이 이들을 긴 고통의 시간들로 이어질 바깥으로 끌어내는
것일까.
산행의 고통을 기꺼이 즐기는 중독성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길고 지루한
밤인데...
아무튼 오늘 또 용기를 내고 자신감으로 오르는 그 곳에 우리가 원하는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다. 진정한
自由人으로 살아가기 위한 그 무엇이.....
(동틀 무렵 944봉에서)
(12/11 04:00) 경부 시흥 휴게소에서 버릇처럼
맛들인 떡라면을 가볍게 한 그릇 해치우니
감기로 막혔던 코가 다소 뚫리는 기분이다. 평소 잘 찾지 않던 라면 맛이 대간
야간 산행길
이후로 익숙해져, 학창 시절 밤 공부 핑계로 한 그릇 비우고 포만감에 잠
들든 기분이다.
잠시 눈을 붙였는가 싶더니 어느새 산행버스는 지리산 톨게이트를 벗어 나와
아영면으로
향하고 있다. 이제 대간 일정상 지리산 자락은 마지막이다. 비록 3개월 여지만
이렇게
이지역을 반복해 찾다보니 주변이 고향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이 땅의
대부분인 산골 농촌
에서는 다 이렇게 한결
같이 조용하고 말 없이 역사를 이어 가는데..서울에서 와는 달리 ..
잠들은 산꾼들을 뒤에 실은 채 홀로 GPS를 벗삼아 밤길을 달려 조용히
고갯 길에 버스를
정차시키는 기사님과도 이젠 제법 정이
들었다.(02:40)
도착 후 구간에 쌓인 적설량과 날씨를 점검한 후 진행방향을 원래 계획대로
북상으로
결정한다. 적설량이 많으면 아무래도 내리막 경사인 남향 산행이 다소 수월하긴
하나
큰 무리가 없다는 판단하에 수정없이 진행 하기로 한다. 잠시 눈을 더 붙인후
20여분간
추위와 눈길에 대비한 복장 챙기기에 열심이다.복성이재를 뒤로하고 이제 정든 지리산
구간을 벗어나는 발길이 미끄러운 출발 만큼이나
느린 행보다(04:10)
예상보다 남쪽 오르막에는 적설량이 많지않고 잘 다져진 대간
길이라서 아이젠을 착용치
않고도 그런대로 완만한 경사를 오르내린다. 오른쪽 아영면 성리에는 잠든 흥부
놀부네
식구들을 보살피는 불빛이 파리하고, 왼쪽 노단리 번암마을 불빛들만 계속 따라
붙는다.
겹겹이 입은 등산복 안쪽에서 땀이 묻어 나오기 시작하나, 감히 외투 벗을
엄두는 내지
못하고, 차갑게 얼굴을 향해 다가오는 억새 깃털이 그래도
부드럽다.
오늘 따라 선두조는 휴식도 없이
작은 봉우리를 두어개 넘으면서 치재와 꼬부랑재를
단숨에 지나고 1시간 여만에 다다른 다리재 안부에서(05:35) 잠시 헤드랜턴을 끄고 별을
맞이한다. 제법 봉우리를 형성한
이곳으로 넘어다녔다는 뜻인지 고개 이름치고는 꽤
높아 보인다.
(뒤돌아본 월경, 봉화,....지리산)
(06:00)다리재에서 20여분 된오름을 맛본 후에야 어둠속의 봉화산 정상에
올라선다.
이젠 제법 900고지 답게 새벽의 찬기운이 스며들어 오래 지체하며 휴식을 즐길
엄두도
내질 못한다. 땀이 식기전에 계속 걸음을 걸어야한다. 삭막하게 정상을 지키던
스테인리스
표지 대신에 최근에 제법 훌륭한 표지석이 세워져 한결 우아하고 멋스런 고스락으로
자릴 잡았다. 역시 정상엔 자연스런 표지석이 제격이다. 미끄러운 내리막 북사면에
대비하여 아이젠을 착용한다.
깊은 어둠 속에서 차갑게 비추이는 상현달만이 완만한 북사면 눈길에 동행하고,
다행히
바람 한 점 없는 쾌청한 새벽을 예감하는 매서운 겨울 한파를
느낀다. 비포장 임도를
지나고 비교적 경사가 심하지
않은 마루금을 지나 944봉을 지날 즈음 동쪽 산마루가
분홍빛 해오름을 비추이고, 좌우로 펼쳐진 산허리가 눈속에 덮힌 채
고요하다.
이 한겨울을, 잎
떨군 숲과 바위들은 침묵하며 또 다른 화려함을 내내 간직하리라....
이렇게 밝아오는 새벽에 자유롭고 화려하게 열린 대지를 찾아서 힘든
발걸음을 쉬지 않는
자유인들은 또한 위대한 영혼으로 살아 가리라.....
광대치로 향하는 내림길에서 북으로 시선을 돌려 나아갈길을 향해 보지만 백운산
정상은
월경산에 가려 보이질 않고, 어디선가 까마귀 한마리가 찬 허공에서 짧은
비행을 하며
사라진다.
까마귀들 울며
요란한 날갯소리를 내며 도시로
날아간다
곧 눈이 내릴 것이다
아직도 고향이 있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하랴
이젠 너는 굳은
몸으로
뒤를 돌아본다
아
벌써 얼마나 오래 되었나.....(니체
'고독')
(눈꽃으로 피어난 억새)
(08:00) 봉화산 정상을 지난지 2시간 여만에 광대치에 다다라 허기지고 일찍
지쳐오는
피로를 아침식사로 달래고저 하나, 잠시 장갑을 벗은 손이 아리도록 추워 도시락
뚜껑을
열기가 힘겹다.영하 15도는 충분히 내려간 것 같다. 평소와 달리 짧은
시간에 식사를
마치고 준비한 보온통의 커피와 차를 나누어 마시니 다소 훈훈한 정겨움이 함께 하여
새로운 힘이 솟는다. 그래도 이나마 바람이 불지 않아 다행이다. 이번 겨울 동안에 과연
몇끼나 제대로 챙길 수 있을까 걱정이다.
30분 남짓 식사와 휴식을 취한 후 서둘러 월경산으로 오른다. 식사
후인지라 오르막
경사가 꽤 된오름으로 다가오고, 잠시 만에 얼었던 손끝이 녹질 않아 차례대로 한
손씩
주머니에 넣어 녹이자니 양 손 스틱이 거추장스럽다. 힘겹게
오라선 안부 오른쪽에는
약초 재배단지로 지정되어 높다란 철조망이 대간길을 함께한다. 무슨
산삼이라도
심어 놓은 것일까...어울리지도 않고 어차피 완벽한 울타리가
되지도 아닐 것 같은
이러한 시설물을
구태여 이렇게 높은 900 고지에 설치한 관계인들이 한탄스럽다.
자연보호를 부르짖으며 대간 길 막아놓고 이렇게 체계적인 훼손을 계획할
것인가...
월경산 오른쪽 허리를 감아도니 중치로 향하는 왼쪽 급경사 내리막길이 발길을
조심스레
내딛게 한다.선두조와는 이미 거리가 많이 멀어진 탓에 후미에 처진 채로 홀로
산행을
즐긴다(?) 간간이 끊어지는 내리막 등산로가 눈길 발자욱 탓으로 그리 길잃을
염려는
없으나 좌우로 번갈아 나타나는 장안산(호남정맥)과 백운산을 마주하며 지그재그
내리막이 한동안 계속된다. 지도를 꺼내기도 귀찮을 정도로 나른한
감기약 기운이
몸에 번진다. 중치에서 탈출을 시도할
것인가....
(중치에서 바라본 백운산)
(09:50)중치로 내려서는 심한 내리막을 30여분 지나서야 오른쪽 운산리 마을이
정겹게
보이는 안부에 다다른다. 이제 한고비를 넘긴 기분으로 잠시 길섶에 서서 숨을
고른다.
문득 하얀 눈위에 양팔을 벌리고 누워 저리 시리도록 파란 하늘을 벗하고
싶다.
1945년 해방의 기쁨 속에서 젊은 지식인으로서의 K노인은 잠시나마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국가와 민족과
식민지배에 대하여 늦게나마. 일본
유학생활의 뼈아픈 설움 속에서 조금씩 눈떠가는 상황 속에서, 언젠가
이 땅의 내 민족을 위하여 큰
보람을 설계하면서도, 자신이 어렵사리
이루어 놓은 이 작은 엘리트로서의 지위와 가능성을 쉽게 놓아 버리지
못한 채 맞은
광복이었다. 더구나, 개혁이니 혁명 따위를 부르짖을 만큼
용기있는 젊은이와는 더구나 거리가 멀었다.
해방 1년전 귀국하여 국책 조선화약에 자릴 잡자마자 갓 결혼한 탓에
그해 여름엔 첫 딸을 낳고 그런대로
안정된 행복을 맛 보려나 하던 때에
그에게 닥쳐온 엄청난 변화는, 이성적인 차분함으로 그냥 지켜보기에는
그가 위치한 자리가 그리
단순한 곳이 아니었다.
그해 혼돈스러운 가을을 보내며, 서둘러 철수한 일본인 직원이 넘겨준
창경원 옆 적산가옥을 인수하고, 화약고
열쇠만 잘 보관하고 있던 중에,
대학을 설립하자는 이시영 박사(부통령)의 뜻을 좇아 신흥전문(훗날
경희대) 설립을 위하여 뛰어
다니게 되고, 중요한 화약고 열쇠를
인계받은 유일한 조선인 직원이며, 경비를 맡고 있던 또 다른 K씨는
미 군정청과 잘
연결되어 훗날 한국화약을 설립한다.
그런대로 지식인의 앞날을 설계하고, 식민역사에서 일구어 놓은 작은
배움을 기초로 삼아서라도 훗날
부끄럽지 않은 삶으로 이 땅에서 누릴
행복을 위하여 참 열심히 뛰어 다닌 20대 젊은 시절이었다.
‘민족과 역사를 위하여’라는 거창한
명제를 내세울 필요도 없었다.
단지, 변혁의 세월 속에서 눈치 빠르게 적응해 나가는 소위 가진 자들과,
개혁이나 혁명을 통해 사회적
위치의 변신이라도 도모해 보려는,가지지
못한 자들의 필생의 악다구니 틈 속에서, 지나치지 않는 모습과 배운자의
양식으로 조용히
역사의 바다로 실려가고 싶을 뿐이었다.
어린 시절, 가져보지 못했던 가족이라는 단란함과 작은 행복에 생을 다
바쳐도 좋을 만큼, 그리움과 한이
가져다 준 소시민적 바램이었는지도...
중치에 다다르니 이미 선두조는 독도 교육을 마치고
구간 최고봉인 백운산을 향한다.
다행히 감기 기운이 좀 나아지고, 찬 기온 탓으로 오히려 발바닥이 열을 내지
않아
편안하고 시리던 손이 내리막 안간힘에 어느새 온기를 되찾았다. 탈출조를 뒤로하고
아무런 생각없이 발길을 오른쪽 백운산을 향하여 내딛는다.
(백운봉 눈길 된오름)
(10:30)중치에서 나즈막한 언덕을 올라선 후 정자나무를 지나고 작은
봉우리(695m봉,
755m봉)들을 지나는 동안은 오른쪽 중재 마을 목장을 내려보며 ,한가롭고 평안한
천수답에 쌓인 하얀 눈이 골골이 멋을 더한다. 잠시 휴대폰을 꺼내 서산으로 향하는
26산케들과 통화하니 팔봉산에 오를 채비를 하고 있다는 김대장의 반가운
목소리다.
금년 한해도 주말 등산을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이어가는 벗들이 오늘은
부부동반으로
대거 참석하여 마지막 송년 산행을 훌륭하게 치르고 있다. 부디 변함없는
건강으로,
오늘 맑은 하늘 처럼 몸과 맘이 함께 청명한 노년으로
살아가기를....
30여분만에 중고개재에 내려서니, 이젠 본격적으로 백운산 정상을 향한
길고도 가파른
된오름을 준비하며 후미대장이 걱정스레 내 다리를 쳐다본다.
뒤처져 오는 모습에서, 지난 남덕유에서의 안타까움을 염려하는 모양이나, 약간
지치는
것 외에는 다행히 오늘은
무릎이나 발이 매우 편하다. 두세시간 정도는 충분히
버틸만
하다. 쉬엄쉬엄 오르다 보니 중재에서 시작하여 육십령으로 향하는 다른
팀에게 길을
비켜준다. 게속되는 오름길에 남사면임에도 눈이 녹질 않은채 꽤 많이 쌓인 것으로
보아
이젠 1000m 고지는 훨씬 넘은 것 같다.
용기를 내자..더 높은 곳으로 올라 더 많은 것을 아우르고 아래를
굽어보기위해....
웃으면서 오르자... 저 높은 곳에서 무엇을 찾고 무엇을 원하는가...어차피
인간이란
외롭게 태어나 외롭게 간다지만, 여기 함께하는 백색의
자연처럼 이 고요한 산자락에서
작은 바람에 소소히 휘날리듯이, 고귀한 인생을 즐기는 고독한
自由를 느낀다면....
(백운산 정상에서)
(12:00)1시간 반동안의 길고도 지루한 된오름 끝에 마침내
백운산 정상에 서니 북으로
남덕유의 웅장함이 다가오고, 맑은 날씨 탓에 남으로 지리산 마루금을 똑똑히 새길
수
있으니 이번 대간 팀들의 복이라고 저마다 자축한다. 항상 고맙고 친절한
산우가
따라주는 오가피주 한잔에 감기와 피로가 몽땅 사라진
기분이다. 당일 등산으로 무령재
쪽에서 올라온 몇몇 등산 팀들이 그런대로 누그러진 추위 속에서 행복한(?)
점심식사를
즐기는 모습이 몇 시간 전의 아침식사와 비교하니 부럽다. 빨리 내려가서 따뜻한
국물을..
30분 정도 휴식과 멋스런 사진 촬영을 하면서 지덕구간의 최고봉인 백운산에서 신선
놀음을 즐긴다. 비록 구름으로 가려지진 않았어도...저 아래 사방에 펼쳐진 눈
덮힌
속세를 향하며 뭐라고 크게 외치고 있으리라...산자락들이 흰색 파도로 굽이쳐
밀려오는
이곳 산정에서 ,무한한 자유의 바다 내음이라도 들이키고
있을까...
영취산으로 향하는 긴 산죽 길은 어릴 적 옥수수밭에서 키를 숨기고 걷던
기분이다.
여늬 산죽 밭과는 달리 꽤 무성하고 키가 높아 작은 내 몸을 가릴
지경이다.
1948년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고 새로운 질서가 생겨나는 매일의 역사가 일상의
시골 농민들에게야 한 철 부는
바람보다, 내리는 비보다 , 무슨 큰 의미가
있을 수 있으랴마는, 말로써 먹고사는, 서울이라는 곳에서, 소위 배운
자들의
마당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혁명과 전쟁 속에서 한치라도 밀리면 내일은
없다는 식으로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자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계속되었다.
좌익이 뭔지 우익이 뭔지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구호 속에서 K노인은 흔들리지
말아야 된다는 일념으로, 지난 일본 유학시절의 힘들고 서럽던 시절을 돌이키며,
후배들을 가르치는 선생의 길을 택하고, 민족을 생각하는 지식인으로 살고 싶었다.
그의 뜻대로 정신없는 정치마당만 벗어나면 이 혼돈의 세상을 피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중간을 지킨다면....적어도 이시영 부통령이 건강을 잃지않고 그런대로
재정적인 후원을 끌어만 주었더라도 그의 꿈은 그런대로 학교라는 울타리 속에서
조용히 머물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1950년의 여름, 미아리 고개를 지나 돈암동과 혜화동 쪽에서
들려오는 탱크 소리에 단란했던
가정도, 미래의 꿈도 그렇게 서서히
상처를 받으며 멍들고 있었을 줄이야.....
창경원 언덕을 넘어오는 북한군 탱크 위에서, 문득
사범학교 시절 일본
군복을 입고 학병 훈련을 받던 조선인 소년을 기억해 내고는, 무섭고
두려운 마음 보다는 인공기와 일장기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 채
뒤엉켜 흔들리고 있었다.
(영취산 산죽길)
(14:00)백운산 정상에서 1시간 반정도 부드럽게
오르내리는 산죽길을 헤친 후 영취산
정상에서 북으로 향하는 깃대봉, 육십령길을 다음차로 미루고 아쉬운 하산길을
택해
왼쪽 무령재 가파른 내림길을 썰매 타듯 내딛는다. 왼쪽 금남, 호남 정맥으로
분기하는
이곳 영취산, 무령재는 산꾼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더구나
10분 남짓의 하산길은
참 편하고 반갑다. 다음 차에 다시 오를 접속구간이기에 더더욱
그러하다.매우 험난 했을
고갯길을 뚫어 꼬불거리며 연결된 장수-장계를 잇는 지방도는 눈속에 덮힌 채
차량통행도
거의 없다.
그러나 장수군에서 새로 만든 주차장 화장실은 88올림픽 이전의 상태다. 아무리
춥고
통행량이 적지만....
미리 준비한 쇠고기 무국을 바닥이 보일 때까지 여러그릇을 비우니 허기진 몸이
녹는다.
상경길에 6km 정도 올라오다 논개사당에 들려 잠시 거룩한 분노를
숨쉰다.
姓은 주씨요, 고향인 장계면
대곡리 주촌 마을은 대곡호에 잠겼고, 일제시대 탄압으로
주씨대가 끊겼다는 얘기다. 열손가락 반지끼고 왜장을 감싼 채 뛰어내린 진주
남강에는
해마다 개천 예술제가 열리고....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은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물결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변영로)
2005.12.12 배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