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교리 강해 시리즈 1권 성부하나님 성자 하나님 출처: http://www.cyworld.com/chocalvin/263341
제 1 장 나의 목적과 방법
말씀은 모든 것의 배경이 되고 내가 하고자 하는 바를 설명해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교리에 대해 많이 듣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교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것은 매우 애처롭고 슬픈 일입니다. 성경 중 사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특정한 진리들을 나타내는데 관심이 있다. 요한은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0-31> 그리고 요한은 그 예수님의 행하신 일들에 대해서 "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 :21:25> 성경은 구속의 웅대한 역사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속의 메시지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고 볼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방법으로 나타내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교리로 성경 교리 연구를 시작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존재증명에 대해서 그런 것들이 쓸모없는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성경에서는 그런 증거들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거들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선포합니다. 성경은 단지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해 말 할 뿐입니다.
왜 우리가 이러한 일 (성경에서 교리를 만나는 일)을 해야 하는가?
첫째로 성경이 이 일을 하니까 우리는 이 일을 할 의무가 있습니다. 상경은 특정하고 특별한 진리들을 제시하는 것에 관심이 잇고 그 진리들이 교리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바르게 읽는 것은 교리를 상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만일 내가 성경의 교리를 깨닫는 중요성을 분명히 파악하지 못한다면 나의 성경 자식은 나에게 전혀 무익합니다.
사도들의 설교방법은 교리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메시지가 있었고 그들은 그 메시지를 제시하며 교리들을 선포했습니다. 교리는 설교의 목적과 기능을 합니다. 또한 진리를 회중에게 전하는 역활도 합니다.
둘째로 교리를 공부하지 않고 성경을 연구하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나무는 보고 숲을 보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시대에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실제적인 문제는 그들이 문자에 멈춰서 영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바로 그들에게는 교리에 대한 이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교회가 언제나 성경의 교리를 강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조를 학습함에 있어서 이단들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교회 안과 밖으로 사람들을 오도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씁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교리들을 정비하여 완벽하게 명료하고 명확한 방식으로 정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모든 신앙고백들과 이에 수반하는 요리문답들은 다름아닌 교회 내의 사람들이 무엇을 믿고 무엇을 믿지 않아야 하는지 그리고 그 믿음의 도리들을 정확하게 알 수 있게 하기 위한 성경 교리들의 진술입니다. 또한 그릇된 교리들과 사상들을 발견할 수 있게 합니다. 모든 셩경 연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이 일을 하게 하시고 이 교리들을 허락하심으로 우리 모두가 유일하게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게 하시고 그 결과로 우리 모두를 소생시켜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2장 계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 가능한 길에 직면합니다. 첫 번째 길 즉 우리의 타락한 상태 때문에 본능적으로 우리에게 떠오르는 길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노력과 탐구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신비주의자들과 그 밖의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길이 바로 이 길입니다. 또 한 가지 길은 이성과 지혜와 명찰에 기초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말에도불구하고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고전 1:21)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찾기 위해 인간의 사상들과 이성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방법들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를 수 없습니다. 첫째 이유는 하나님 자신의 본성입니다. 즉 하나님의 무한하심 하나님의 완전무결한 인격과 특성들 그리고 하나님의 완전한 거룩하심 이 모든 하나님의 본성은 본질적으로 당연히 이성의 추리나 직관에 의해 하난미을 아는 지식에 이르는 것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또한 이 두 가지가 합해지면 하나님의 지식에 이르는 것은 두 배로 불가능하게 됩니다.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깨서 은혜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 하는 것을 기뻐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계씨는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한 즉 자신의 본성 행위 뜻과 목적에 대한 진리들을 전달하시는 행동입니다. 이러한 계시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나뉘는데 먼저 일반계시란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 것이니라" 곧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계씨입니다. 이것이 일반계시의 첫 번째 정의입니다. 또한 섭리를 통하여 이 세상에 있는 만물의 질서 만물의 보존 만물을 유지시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러나 그 증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특별하고 한정된 목적을 가지고 있는 특별계시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격 본성 특별히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가운데 계씨되는 하나님의 성격과 본성을 우리에게 계시하는 것입니다. 즉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을 아는 특별한 지식을 우리에게 준다는 주장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일관성있는 한 가지 중대한 목적과 의도가 하나님의 자기 계시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러한 의도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눈 높이와 수준에 맞추신 신인동형동론이 나타나게 됩니다. 즉 영원하신 영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간적인 용어로 말씀하시기 위해 인간적인 방식으로 행동하기 위해 인간의 수준에 맞추셔야 했다는 것입니다. 즉 위대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자신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 자신을 힐끗 보는 것을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기적과 표적과 기사로 하나님을 계시 하시기를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홍해가 갈라진 것 또한 엘리야와 엘리사같이 하나님의 특정한 종들이 행한 기적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고 따라서 하나님 자신을 나타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자신들이 복음을 전하였고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간혹 하나님께서는 꿈과 환상으로 자신을 계시하시기를 기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제 3장 성경의 권위
기독교 신앙의 관심의 목적과 목표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의 기록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께 영감을 받았습니다. 영감을 받았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의 활동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는 특별히 성경 자체가 축자 영감을 주장한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이 말들은 단지 생각들만 영감받은 것이 아니고 또한 사상들만 영감받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기록 특별한 단어들에까지 영감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영감은 성경의 기자가 기록을 함에 있어 과실을 저지를 수 없도록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감독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이 점을 어떻게 주장할까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가라사대"라는 표현들이 구약에만 3808회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18:18에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ㅈ즉 나와 여러분은 이 위에 세우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신약성경 정경이 이루어진 후에 말해진 것은 어느 것도 권위 있는 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초는 여기 성경에 있기 때문에 어떤 교회의 가르침이나 신령하게 영감받은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성경이 기초이며 교회는 성경의 유일무이한 권위의 가르침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두번째 중요한 구절은 베드로후서 1:20-21입니다.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 이니라." 성경의 어떤 예언도 개인의 사적인 이해나 해석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폐끼할 수 없으며 반대될 수도 없고 부정될 수도 없습니다.
제 4장 성경의 교리를 발견하는 방법
오늘날 세상에서 유명한 대부분의 교회들은 자신들이 성경에 기초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물론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모든 것을 믿습니다. 우리의 가르침은 성경에 기초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말들 가운데 사람들이 마땅히 믿어야 하는 바를 믿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초대 교회에서 바로 이런 일을 봅니다. 초대 교회의 진리를 믿고 있다고 주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들 중의 일부가 떠났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무엇인가에 있어 오류와 이단의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에도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여전히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무엇을 믿고 또한 왜 그것을 믿는지 알 의무가 있는데 오늘날처럼 그 의무가 절실할 때는 없습니다. (부흥의 초반과 흡사한 말들을 발견하게 된다. 알려고 하지 않고 일하려고 하지 않는 현대 그리스도인들) 그러면 우리는 이 책 안에 있는교리를 어떻게 발견해야 할까요?
첫번째 명제는 이 문제에 있어 이성과 오성과 지성이 차지하는 자리입니다. 이 문제는 극히 중요하며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우리의 입장이 어떠해야 하는지 명확한 생각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생각해 온 모든 점을 고려하여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계씨의 모든 문제에 있어 성경을 우리의 완전하고 궁극적인 권위라고 동의하는 것입니다. 나는 (로이드 존스) 나를 성경에 완전히 복종시켜야 합니다. 성경과 성경의 교리들을 읽을때 나의 깨달음의 범위를 넘는 영역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으로 출발합니다. 이 말은 단순히 이성에 한계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두번째 논점은 우리가 진리들을 이해할 수 없고 완전하게 설명할 수 없는 자리에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이란 인간이 오직 셩경에서 얻는 것으로만 만족하겠다고 신중하게 결단하고 의심을 그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관점에 연관하여 로이드존스는 철학을 계시와 혼합하려고 하는 유혹은 우리가 힘써 피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을 넘어서는 데까지 우리의 논리와 우리의 책략을 밀어붙이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것은 교리에 도달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가 관심을 두는 것은 성경 본문들을 모으고 주제에 대해 찾을 수 있는 모든 말씀들을 찾습니다. 그 다음에 그 말씀들을 함께 모으고 대조하여 기초에 존재하는 교리를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관심을 두는 일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 일을 할 때 극히 주의깊게 준수되어야 하는 일정한 규칙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으로 믿는다고 주장하는 모든 교리는 언제나 성경에서 명확하게 발견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우리의 교리는 오직 성경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명백하게 성경 외에서 나온 모든 교리들을 거부해야 할 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다른 교리까지도 거부해야 합니다. 세번째는 교리는 성경에서 명료하고 명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 교리의 명료성이라는 말로 참된 성경 교리는 항상 명료하고 명백하다는 의미를 나타냈습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에게 명료하고 정확한 성경 번역이 있기만 한다면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 특별한 철학이나 언어학적 이해 똔느 어떤 다른 언어에 대한 지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생각도 완전히 거부합니다. 또 한 가지 규칙은 성경에서 말하는 어떤 점과 모순된 결론을 성경으로 내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성경을 성경과 대조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권고입니다.
5장 하나님의 존재
우리가 첫 번째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교리는 성경에더 첫 번째로 위치하는 교리로서 곧 하나님에 대한 교리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으로 시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응 모든 다른 교리의 개요입니다.
그래서 첫 주제는 하나님의 조내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서 논증하고 있지 않고 (증명) 선언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20에서 바울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학문은 우주론 존재론적 등의 논증으로 하나님을 말하고 있으나 성경은 이런 논증들이 절대로 믿음을 이루지 못한다고 가르칩니다. 성경에 의하면 믿음이 없으면 믿음으로 인도하는 성령의 내적 역사가 없으면 아무도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자하는 소망을 올바르게 간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 전문용어 극히 중요한 단어를 소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불가해성 이라고 칭하는 바를 가르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이런 저런 교리를 읽고 우리의 생각으로 파악하려고 애쓰지만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해할 수 없는 무한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궁극적이고 결정적이고 완전한 의미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불가해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 수 있는 분이시라고 알고 있씁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것응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지식을 주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신인동형동성론이라는 또 하나의 전문용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마치 사람처럼 이야기하는 성경의 가르침에 나오는 말씀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종들과 선지자들에게 보이셨던 환상들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자신의 종들이 자신의 초월적인 영광을 어렴풋이 또는 힐끗 보고 절대 잊지 않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의 무한한 은혜와 지비와 겸손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질문으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 주셔야 알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역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축약)
우리는 우리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땅에서 신을 벗은 그 옛날의 모세와 같이 겸손하고 경건하게 또 정결하고도 거룩하게 하나님앞에서 그를 예배할 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십니다. 이것이 곧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무한성입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는 말씀을 보아서 알겠지만 하나님의 무한성은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것의 원인이시라고 시사합니다. 모든 존재 모든 생존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무한성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제한 모든 한계로부터 자유로우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6장 하나님의 속성들
하나님의 인격적 속성에 속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주목하는 첫 번째 속성은 하나님의 영원성입니다. 그리고 함께 불변성에도 주목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불변성을 조금 더 고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으로 변하시 않으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점에 있어 어떤 때에 있어서 달라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인 완전성에 있어서 항상 동일하십니다.
창세기 6장에서 "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그 마음에 근심하시고" 라는 구절과 아울러 요나서에서 하나님께서 니느웨 성을 멸망시키지 않으셨을 때 자신의 이전의 결심을 후회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변하지 않으시지만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변하십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회개하는가 회개하지 않는가에 따라 절차를 바꾸십니다.
하나님의 다음 속성은 하나님의 편재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어디에나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이 어디든지 하나님은 항상 함께 하시며 계시지 아니하는 곳이 없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를 그 다음의 하나님의 중대한 속성 하나님의 전지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이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며 하나님의 지식은 언제나 절대적인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단 한마리의 참새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이 일은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별들 모두를 아시고 각각의 이름을 부르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친밀하고 인격적인 의미로 알지 못하는 것이 피조물 중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7장 하나님의 인격적인 속성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생각해야 합니다. 거룩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완전히 죄와 격리되시고 무관하신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정의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1:5) 성경이 다음으로 강조하는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은 하나님의 의 또는 공의입니다. 의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과 관계할 때 나타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공의는 하나님께서 항상 의로운 일을 행하시는 것으로 나타나는 특성이며 그릇된 일을 행하실 수 없게 하는 특성입니다.
이 개념을 분석할 수 있는 많은 방법들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의가 하나님의 입법적 거룩하심의 증명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율법을 주시는 목적은 우리에게 자신의 의로운 요구들을 부과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공의는 하나님의 사법적 거룩하심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 사법적 거룩하심으로 율법을 위반한 자들과 죄를 범한 자들에게 처벌을 내리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공의와 의를 나타내시는 또 한 가지 방법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자신의 말씀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에게 상을 주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재판장이시므로 약속하신 면류관을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은혜는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 일을 이루고 계신다.
그 다음에 우리는 로마서 3:25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와 절대적인 공의를 선포하시는 것을 봅니다.
8장. 하나님의 이름들과 성 삼위일체
첫째로 엘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힘과 권능 창대함의 사상을 전달하는 이름입니다. 복수형인 엘로힘은 하나님이 강하신 분일 뿐만 아니라 두려워 해야할 존재라는 사상을 전달합니다. 그 다음에 높고 고귀한 분이시라는 엘룐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 이름들은 가각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사항을 말해 줍니다.
그 다음에 아도나이라는 중요한 이름이 있습니다. 이 이름은 전능의 주님 그에게 모든 것이 종속하고 그에게 사람들이 종종 되는 통치자라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이 모든 이름들은 하나님을 위대하고 높고 강하고 높은 영광을 받으시는 초월적인 하나님으로 묘사합니다. 예를 들어 샤다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이 용어는 하나님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소유하신 분으로 묘사하며 또한 특별히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복종시키시고 이들을 자신의 은혜의 역사에 공헌하게 만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심오하게 다가오는 이름은 야웨 (여호와) 입니다. 이 이름은 하나님의 불변성 특별히 자기 백성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불변성을 묘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하나님의 중대한 언약의 이름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이레 : 여호와께서 준비하심 여호와 로페 : 치료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닛시 : 나의 깃발되신 하나님 여호와 샬롬 : 평강을 보내시는 하나님 여호와 로에 : 나의 목자되신 하나님 여호와 치드케누 : 여호와 우리의 의 여호와 삼마 : 여호와께서 존재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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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위일체의 교리입니다. 이 교리에 직면하지 않고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성삼위일체의 교리는 의문의 여지없이 모든 성경 교리들 중에 가장 신비하고 가장 어려운 교리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 함축적으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도처에 그리고 가장 있음직하지 않고 예상치 못한 곳들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9. 하나님의 영원한 결정
이 항목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 활동,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해 상고할 것입니다. 창조의 교리를 상고하기 앞서 우리가 먼저 상고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정확하게 상고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역사를 행하시는 방법을 먼저 상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의 기초가 되고 특징이 되는 몇 가지 중대한 원칙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과 인간의 창조를 시작하기 전에 특정한 일들을 생각하셨고, 의도하셨고 결정하셨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방식 또는 방법은 보통 하나님의 영원한 결정들은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시기에 앞서 결정하고 규정하신 일들입니다. 이 교리에서 여러분의 주의를 요구하는 나의 첫 번째 이유는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이 교리가 성경에 계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명히 우리는 이 교리를 상고하고 연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이유는 우리가 이 항목을 마칠 때 여러분은 나와 일치할 것입니다. 이 교리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새로운 면을 보여 줄 것이라는 겁니다. 우리는ㄴ 주관적인 경험과 주관적인 구원에 너무 흥미가 많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에 대한 이 중대한 교리를 망각합니다. 그리고 이 점이 우리의 많은 불행과 문제들의 원인입니다. 우리가 무한하신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더 경배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 교리를 상고해야 하는 또 한가지 이유는 이 교리가 우리를 많은 오류로부터 지켜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이유는 이 특별한 교리가 더 큰 위로를 주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특별한 교리를 상고하는 이유를 설명하였으니까 이제 이 교리를 어떻게 상고하려 하는지 말하겠습니다. 이 교리를 상고할 때 우리가 첫번째 해야 하는 일은 여러분의 편견들을과 모든 종류의 파벌 정신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부정ㅇ적인 명제는 우리가 철학적으로 이 주제에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계속 이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정의에 의하면 철학은 항상 모든 것을 전체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정적으로 이 주제에 겸손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또한 경외함을 가지고 접근해야 합니다. 우리는 열린 망므을 가지고 접근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찾고 탐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이와 같은 심령을 가지고 나아가서 우리에게 계시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의 유한한 정신과 서로 조화할 수 없는 특정한 사항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첫 번째 원칙은 하나님께서는 영원부터 자신의 피조물들에게 대한 불변의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에 대해 인간들에 대해 구원에 대해 이 세상의 전체 생활에 대해 이 세상의 종말에 대해 전체 생활에 대해 명확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고 성취하신 모든 일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의한 것입니다. 두번째 원칙은 하나님의 계획은 일어나는 모든 일과 모든 종류의 사건들을 포함하고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전체 체계에 대해 매우 명백하게 말합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엡 1:10-11)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이 통일을 이런 방법을 통해 취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우리는 신약에서 우리 주님께서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하럭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느니라!" 고 말씀하신 것을 우리는 봅니다. 여러분은 아마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에 이어 우리 주님께서는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으니(마 10:30) 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심지어 죄악된 행동들도 하나님의 지배 안에 있다고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해 명명백백하여야 합니다.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해 일치한 바를 고려할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의미에 있어서도 그리고 절대로 악의 원인이 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한 행위자들이 악을 행하는 것을 허용하시고 그 다음에 자신의 지혜롭고 거룩한 목적을 위해 그 악을 압도하십니다. 나의 세 번째 명제는 하나님의 모든 결정들은 무조건적이고 주권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결정들은 하나님 자신의 뜻과 하나님 자신의 거룩하심 외에는 어떤 것도 의존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사실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겟습니다. 다니엘의 예언을 봅시다. 다니엘 4:35절을 보면 아무도 하나님의 손을 멈추게 하거나 심지어 이의 를 달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물론 이교리가 로마서 중에서도 심원하고 중대한 9장에 가장 명확하게 진술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바울의 논증은 하나님께서 형이 동생을 섬기도록 결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중에 아무도 아직 태어나기 저전에 하나님께서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네번째 원칙은 하나님의 결정들은 효과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권적인 주님이시고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목적들은 절대로 실패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결심하시고 결정하신 일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결정들은 모든 일들에서 하나님의 가장 지혜로우시고 인자하시고 거룩하신 본성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나의 마지막 명제는 인간들과 천사들의 구원 그리고 특별히 인간과 천사들 중 일부의 구원이 창세 이전에 하나님의 뜻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6:37에서 의 말씀을 봅니다. |
출처: 생명나무 쉼터 원문보기 글쓴이: 생명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