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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회 천강문학상 소설부문 우수상>
손
이수연
차는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선 시가지 동쪽 끝자락을 달리고 있다. 여자의 이마 위로 새들이 갈라놓은 하늘이 지나간다. 여자는 앞 유리창을 낮게 스치는 작은 새를 바라본다. 새의 날개는 얇고 투명하다.
여자가 앞 유리창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나직하게 묻는다.
“어디로 갈 거야?”
여자는 조수석을 돌아본다. 통 못 알아들은 걸까? 커다란 머리통에 헐겁게 달라붙은 노란색 곱슬머리, 창백한 얼굴, 어색할 만치 우뚝한 코, 벌어진 입술, 살찐 목. 남자는 창밖만을 바라보고 있다. 여자는 대답 없는 남자의 팔뚝을 툭 친다. 그제야 남자가 돌아본다. 여자는 다시 묻는다.
“어디로 가야 해?”
남자가 잠깐 생각하는 듯하다가 곧 어깨를 으쓱해버리곤 의자 깊숙이 몸을 묻어버린다. 여자가 엑셀레이터에 올린 발을 지그시 누른다. 차는 외곽도로로 빠르게 빠져나간다.
일단 조사는 이것으로 끝내죠. 더 하실 얘기 없죠? 자, 여기 날인 좀. 여태껏 날선 목소리로 질문을 쏟아내던 형사가 피곤이 들러붙은 얼굴을 두꺼운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여자는 가늘게 떨리는 어깨를 애써 누른 채 형사가 내민 종이에 사인을 했다. 붉어진 눈을 들키지 않으려 황급히 돌아서려는데 형사가 말했다. 우리도 참, 조사하라고 하니 어쩔 도리가 없어서....... 여자는 멋쩍게 뒷머리를 긁어대는 형사의 두툼한 손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등을 곧게 세운 여자가 육중한 유리문을 밀어젖혔다.
여자가 경찰서를 나선 것은 6시쯤. 남자가 풀려난 건 그보다 훨씬 전이었다. 주차장에서 차를 몰고 나오던 여자는 사거리에서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횡단보도 중간쯤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깜빡거리는 녹색 신호등을 노려보기만 할 뿐, 남자는 횡단보도를 마저 건너가지도, 그렇다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바삐 지나가던 사람들이 멈춰 서서 남자를 힐끗거렸다. 여자가 차를 세우고 운전석 창을 내렸다. 뒤로 차들이 길게 꼬리를 물었다. 요란한 클락션 소리에 놀라 차안을 살피던 남자가, 여자를 알아보았는지 어기적거리며 조수석으로 걸어왔다.
속도를 내던 여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운전대를 잡고 버틴 여자는 괜찮았지만 무심히 앉아있던 남자의 몸은 크게 출렁인다. 남자의 흰 얼굴이 붉어진다. 남자가 손잡이를 꽉 움켜쥔다. 여자는 남자의 새된 목소리를 떠올린다. 죽어버릴거야, 혹은 죽여버릴거야. 너는 아직 그 무엇도 할 수 없겠구나, 여자는 생각한다. 왕복 이차선 도로를 유유히 횡단하는 개 두 마리. 흙 묻은 털을 흔들며 앞서가는 누런 개의 꽁무니를, 흰 개가 털을 꼿꼿이 세운 채 따라간다. 개들은, 양쪽 차선에 차들이 줄을 지어 기다리고 선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무심하게 도로를 건너간다.
창밖으로 성긴 눈발이 보인다. 잘못 보았나, 했지만 틀림없는 눈이다. 삼월에 눈이라니. 여자는 운전석 창을 조금 내린다. 공기가 차갑다. 무거운 구름이 쌓여 있었다면 비보다는 눈이 되기 쉬웠을 것이다. 눈이 살짝 덮이기 시작한 도로는 미끄러울 테니까. 여자의 입 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간다.
강씨 할머니는 언제나 개를 판매대 위에 올려두었다. 어릴 때 개에게 물린 적이 있는 여자는 개를 싫어했다. 할머니는 매일이다시피 여자의 약국을 들렀다. 강씨 할머니가 죽은 것은 일주일 전이다. 여자가 병원 세 군데를 다녀온 할머니의 약을 조제해서 구별하기 쉽게 표시해준 날 밤, 공교롭게도 할머니는 깨어나지 못했다.
강씨 할머니는 말이 많았다. 욕도 걸게 했고 투정도 많았다. 할머니가 먹는 약은 여자가 하루 동안 먹는 식사량 보다 더 많아 보였다. 할머니는 날마다 돌아가며 동네 병원을 순례했다. 오래전부터 앓아온 고혈압, 당뇨, 관절염, 고지혈증, 골다공증, 최근에 생긴 협심증까지, 할머니는 여자의 약국에서 집계한 개인 처방전 순위 1위였다. 매일 먹어야 하는 노바스크, 아마릴, 조코, 일주일마다 먹는 포사맥스, 독극약장에서 엄밀히 관리해야하는 디곡신, 잠 안 올 때 먹는 바리움까지. 어쩌다 감기라도 걸리면 할머니가 한 번에 복용해야 할 약은 한 줌 가득이었다.
할머니는 병원에서 받아온 처방전을 매번 카운터에 던지듯 내놓고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에이구, 왜 이렇게 아픈 데가 많은지. 얼른 죽어야지. 에구구 지겨워, 지겨워. 여자가 약을 조제하는 동안 욕을 섞어가며 질긴 목숨을 저주하고 고함을 질러댔지만, 여자가 내어준 약을 꼼꼼히 살피면서 약이 담긴 투명 분포지를 차곡차곡 챙기는 할머니의 누런 얼굴에는 결코 죽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약국 보조 김양은 얼른 비타민 음료 한 병을 약 봉투 속으로 밀어 넣으며 할머니를 부축해 일으켰다. 지난 이년간 함께 일해 온 김양은 눈치가 빠르고 손이 재발랐다.
약물 과다 복용이라니, 엉터리들. 약을 중복되게 처방해 놓고, 단 한 가지 약도 뺄 수 없다고 버티는 자들이 누구인데, 복약지도 소홀이라니. 여자가 잡고 있는 운전대를 거칠게 움켜쥔다. 문득 가슴 밑바닥에서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포르르 일어난다. 이제 더는 판매대에 더러운 털을 문질러대는 개를 참지 않아도 된다. 죽고 싶다고 아니, 죽고 싶지 않다고 아우성치는 할머니의 동굴 같은 입을 보지 않아도 된다.
“약국에 매일 출근하는 할머니가 있어.”
여자가 남자 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말한다. 대체 이 남자는 우리말을 어느 정도나 알아들을까. 여자는 피식 웃고 만다. 어차피 누구도 타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다고 여자는 생각한다.
“꼭 내가 쉬거나 밥을 먹으려고 앉으면 와. 끔찍하게 더러운 개를 데리고. 술이 먹고 싶어서 조제실 구석에 감춰둔 술을 컵에 붓고 있을 때나 그럴 때 말야.”
“......”
“나는 늘 조금씩 술을 마셔야 해. 반주도 꼭 마셔. 밥이 안 넘어가거든.”
남자가 여자의 옆얼굴을 쳐다본다. 반주, 라는 말을 모르는 모양이군.
“이건 술이야.”
여자가 운전석 옆의 컵홀더에 꽂힌 빅 사이즈의 스테인레스 컵을 가리켜보인다.
“alcohol"
남자가 멍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언제나 똑같아. 지난밤 자기가 얼마나 아팠었는지, 견디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잠을 왜 못 잤는지, 심지어 아침에 보고나온 똥 색깔과 모양까지 늘어놓곤 매번 이렇게 묻지. 왜 이럴까? 어? 혹시 나쁜 병인가? 어? 뭘까? 어? 죽는 병인가? 어?”
남자는 여전히 말이 없다. 여자가 남자를 보면서 말한다.
“이렇게 하는 거야. 육효점. 알아? 그런 거? 젓가락이 알려주는 운명. 우리 약국 보조 아가씨가 보러가는 점집에선 그런대. 산통에 꽂힌 젓가락 중에서 여섯 개를 골라서 운명을 점치는 거래. 나무젓가락을 많이 사서 거기 끝에 적는 거야. 그리곤 할머니가 이건 왜 이럴까? 어? 하는 순간 젓가락이 담긴 원통을 쑥 내밀고 여섯 개를 뽑아보라고 하는 거야. 젓가락마다 적어두겠어. 어떤 건 죽는다, 어떤 건 뒈진다. 또 어떤 건 축 사망, 어떤 건 you will die."
die는 확실히 알아들은 모양이군. 여자는 갑자기 몸을 휙 돌린 남자의 동그래진 눈을 본다. 여자가 화들짝 웃음을 터뜨린다. 너무 크게 웃어서 여자의 큰 눈에 가득 눈물이 고인다. 하긴 죽음만큼 확실한 것도 없으니까. 여자는 간신히 웃음을 그친다.
“what?”
“아니, 그래보지도 못했어. 그 할머니가 죽어버렸거든. 정말 그러고 싶었는데. 얼굴에 핏기가 싹 가신 할머니를 보면서 술을 한 모금 쭉 들이키는 거 말야. 못할 게 뭐야?”
여자는 우리말로 지껄여대고, 남자는 건성건성 영어로 대답하는 대화는 자주 싱거워지고 모호해진다. 말들은 둘 사이의 공간 속에 함부로 흩어질 뿐이다.
여자가 형사 앞에 앉아 조사를 받기 시작한지 오 분쯤 지났을까. 여자의 귀로 빠르고 절박한 영어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여자가 뒤를 돌아보니 수갑을 찬 외국인 남자가 소리를 질러댔다. 긴장한 탓일까. 여자는 들어올 때 남자를 미처 보지 못했다. 아내를 부를 수 있게 해 달라. 내 핸드폰을 돌려 줘. 나는 싸우지 않았다. 때리지 않았다. 남자는 울부짖었다.
남자 앞에 앉아 있던 형사가 내리찍듯 말했다. 조용히 안 해? 이 새끼야. 너 또 철창 속에서 무릎 꿇고 싶어? 뭐라는 거야, 이 자식. 어디 와서 설치긴 설쳐. 여기가 니네 집 안방이냐? 택시기사 이빨이 다 나갔던데 안 때리긴. 어디 남의 나라 와서 행패를 부려, 부리긴. 이 양놈새끼. 여자를 조사하고 있던 덩치 큰 형사가 거들고 나섰다. 아, 시끄러워서 정말. 일이 안 되네. 니네 대사관에서 합의하러 온대잖아, 이 새끼야. 그때까지 입 닥치고 좀 조용히 있어, 소란 피우지 말고. 저 새끼 뭐래는지 통 알 수가 있어야지.
약사 선생님은 어떻게, 영어를 좀 하시나? 형사가 여자를 힐끗 보며 능글거렸다. 여자는 학창시절부터 영어를 잘했다. 방학 때면 어학연수도 가고 세계로 배낭여행을 갈 정도로 영어에 거부감이 없었다. 여자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험악한 얼굴로 남자를 노려보던 형사가 어딘가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으며 구석 자리로 가버리고, 여자 앞에서 독수리타법으로 자판을 두들기던 형사도 잠시 화장실을 다니러 간 사이, 여자는 똑똑히 들었다. 남자가 하는 말을. 죽어버릴거야. 미란, 죽어버릴거야. 분명한 한국말이었다. 여자는 고개를 돌려 남자를 보았다. 분노로 일그러진 남자의 얼굴과 모멸감으로 탁해진 잿빛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여자는 남자의 말을 중얼거려보았다. 어쩌면 여자가 들은 말이 죽여버릴거야. 미란, 죽여버릴거야, 가 아니었을까?
눈발은 더욱 굵어지고 짙은 어둠이 내린다. 도시 외곽을 벗어나 동쪽 어딘가로 가는 국도변인 것 같긴 한데 여자는 여기가 어디쯤인지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다. 창밖은 싸늘한 봄. 힘겹게 움트는 싹도, 폴폴거리는 햇살의 몽롱함도 다 어둠에 묻혀버린 시간, 삼월이 봄이라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경사가 완만한 오르막길. 언뜻 길 아래로 언 호수가 내려다보인다. 겨울 내내 얼었던 호수 물은 날씨가 풀리면서 사르르 녹았다가 밤이면 다시 얼어붙기를 반복한 탓에 한구석도 빠짐없이 골고루 자글거린다. 여자는 차 불빛을 받아 일렁이는 호수 표면을 자주 내려다본다.
“나는 때리지 않았어. 나는 그런 사람 아니다. 어젯밤에 그들이 나를 묶고 무릎을 꿇렸다. 철창 속에 가두었다. 전화도 뺏어갔다. 너희 나라는 그러니? 어떻게 그럴 수 있니?”
남자가 절박하게 여자를 쳐다본다. 여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말이 없자 남자는 손을 들어 붉어진 이마를 문질러댄다. 여자는 털로 뒤덮인 남자의 손등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여자가 엑셀레이터에서 갑자기 발을 떼자 차가 스르륵 뒤로 미끄러진다. 남자가 화들짝 놀라 손을 머리 옆에 붙은 손잡이로 옮긴다. 여자는 남자를 싸늘한 눈으로 일별하며 자주자주 발을 떼고 커브를 돌아가는 길에선 감아쥔 핸들을 살짝 놓아보기도 한다. 나는 네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 당연하잖니? 우리는 더한 것도 하고 살아가. 너희 나라 사람들은 안 그런가봐? 여자는 남자가 씹어 뱉듯 했던 말을 떠올린다. 미란, 죽어버릴거야 혹은 미란, 죽여버릴거야. 여자는 손잡이를 꽉 거머쥔 남자의 투박한 손을 노려보며 생각한다. 기회는 그리 자주 오는 게 아니야.
“아내 이름이 미란?”
남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근데 왜 한국말 전혀 못하는 척했지?”
“여기선 오히려 그게 더 유리하다고 친구가 말했어.”
어쩌면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게 좋을 때란 여자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을지도 모른다.
“아내에게 안 가?”
남자가 힘없이 고개를 흔든다.
“싸웠어?”
“헤어졌어, 두 달 전.”
“왜? 이혼했다는 말이야? 아님 그냥 떨어져 지낸단 거야?”
“나 안 떨어졌어.”
“아니, 네 아내 미란은 어디로 가 버렸니?”
“난 에든버러에서 왔어.”
여자의 말과 남자의 말은 뒤죽박죽으로 엉켜버린다.
에든버러. 여자는 입속으로 가만히 중얼거려본다. 여자는 대학시절 떠났던 배낭여행을 떠올린다. 젊고 여리고 싱그러웠던 여자가 두 발로 착착 누비고 다녔던 아름다운 고성들과 박물관. 거기 어디쯤, 근처 어딘가, 에든버러. 여자는 가슴께가 뻐근해진다.
여자가 갑자기 폭소를 터뜨린다. 남자가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었을 때다. 남자는 얼굴을 붉힌다. 순진한 개구쟁이처럼 머리도 긁적인다. 남자의 곱슬머리가 더 헝클어진다. 남자의 이름은 조나단 무어 맥도널 빅 버거. 철자를 알 수 없었지만 여자가 해석한 대로라면 남자는, 에든버러에서 잘못 배달된 맥도널드표 큰 햄버거. 여자가 간신히 웃음을 그치자 남자가 말한다.
“그냥 쟈니, 라고 불러.”
“우리가 서로 이름을 부를 일은 없지 않겠어?”
“넌 이름이 뭐니?”
“순.”
남자는 수-운, 한다. 여자는 짧게 순, 해야지 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와 내 이름 사이, 너와 네 이름 사이, 내 이름과 네 이름 사이. 안개가 자욱한 호수처럼 아득한 거리. 여자는 입을 다져 물고 눈을 가늘게 뜬다. 여자의 이름은 외순. 아버지는 첫아이를 낳으러 친정에 간 아내의 기별을 듣고 눈이 내린 산길을 걸어 점쟁이를 먼저 찾아갔다. 딸은 좋은 사주팔자를 타고났다고 했다. 외가에서 태어났다고 외순. 외순이라는 이름이 복을 준다고 아버지는 굳게 믿었다.
“몇 살이니?”
남자는 여자보다 여섯 살 아래. 그것도 그쪽 나이인지, 우리식대로 말한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무러면 무슨 상관이람, 여자는 생각한다.
여기는 어디일까?
거기, 어디야? 여자가 손을 더듬어 자명종 시계를 보며 물었다. 새벽 한 시 삼십분. 남편은 대답이 없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남편이었지만 여자는 자신이 혼잣말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안 와? 어디쯤이야? 남편은 먼 도시로 문상을 가야한다며 일찍 집을 나섰다. 긴 침묵을 건너 남편이 말했다.
갈게, 잘 자.
여자는 평소 잠이 많았다. 다시 잠을 청해보았지만 정신은 도로 말짱해지기만 했다. 알 수 없는 불안이 발바닥 가득 스멀거리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날 밤, 남편은 영원히 가버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뜬 눈으로 새벽을 맞았을 때 머리맡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남편의 사망추정시간은 새벽 두 시. 보험사는 끝까지 자살 가능성을 제기했다. 보험사로부터 소송이 들어왔고 여자는 변호사를 찾아갔다. 한 사람이 죽고 나자 그의 사생활들, 이를테면 가족사, 경제상태, 애정관계, 대인관계 등 많은 것들이 함부로 들춰졌다. 남편이 살았던 사십 년 인생은 몇 조각이 분실된 퍼즐 판처럼 엉성하게 끼워 맞춰졌다. 남편에게는 여자가 모르는 빚이 있었다. 정기적으로 만나온 여자도 있었다. 유품을 정리하다가 나온 사진 한 장을 여자는 태우지 않고 남겨두었다. 잠이 오지 않는 깊은 밤, 사진을 꺼내보곤 했다. 다른 여자의 목을 감고 선 남편의 얼굴을, 여자는 오래 바라보았다. 남편이 이렇게 환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던가. 여자는 남편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사건은 교통사고로 종결지어졌다. 급하게 꺾어지는 커브길, 짙은 안개 속에서 중앙선을 넘어온 유조차와 부딪혀 불붙어버린 남편의 차에서 유일하게 남은 것은 남편이 굳게 거머쥔 핸들뿐이었다. 핸들이 돌아간 각도가 결정적 증거라고 했다. 팔목 위로는 다 타버린 남편의 손은 끝까지 핸들을 놓치지 않았다. 보험금은 빚을 모두 갚고도 조금 남았다. 여자는 아들을 낳고 그만두었던 약국을 다시 열었다.
“미란과 어떻게 만났어?”
“나는 대학 졸업하고 유엔군에 자원했어. 아프리카에도 가고 남아메리카에도 가 고. 군에서 나와 한국에 오게 됐어. 어학원 강사였던 친구가 메일을 보냈어. 미란 은 간호사야. 난 손을 다쳐서 병원에 갔어.”
여자가 한 가지를 물으면 남자는 여러 가지를 말한다. 그 중 몇 가지는 여자에게 조금 필요한 것이고 나머지는 진공관 속을 떠도는 소리처럼 공허한 것이다.
“미란이 내 손에 붕대를 감아줬어. 아프진 않았는데 자꾸 눈물이 났어.”
남자는 미란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여자는 다른 생각에 빠져든다. 이를테면 남편을 처음 만난 날 보았던 환한 빛의 테두리라던가, 함께 갔던 바닷가, 남편의 두툼했던 손 같은 것에.
여자를 깨운 건 옆자리에 앉아있던 친구였다. 여자가 가입한 동아리 회원들이 여름방학 봉사활동을 마치고 동해안 바닷가에 도착한 건 동이 틀 무렵이었다. 부스스한 몰골로 기차에서 막 내려선 여자 앞으로 해가 불쑥 밀려왔다. 일행이 터뜨리는 환호성으로 주위는 막 떠오른 해를 업은 붉은 물결처럼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바닷가 모래사장으로 우르르 달려가는 무리의 꽁무니를 따라가면서 여자도 눈부신 해를 향해 살짝 윙크를 했다.
드넓은 모래사장 여기저기로 일행들이 흩어졌다. 여자는 한기로 오소소 몸을 떨었다. 한여름인데도 반팔 티셔츠 속으로 스며드는 새벽 바다 바람은 찼다. 뒤에서 누군가 여자의 어깨에 스웨터를 걸쳐주었다. 남편이 마음을 표현한 건 그날 그 바닷가가 처음이었다. 여자의 기억으로는 그랬다. 앞쪽으로 돌아 걸어온 남편은 지퍼를 올려서 스웨터를 여며주었다. 크고 두꺼운 남편의 손이 여자의 가슴께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처음 여자의 블라우스를 벗길 때 남편은 몹시 허둥거렸다. 작고 매끄러운 단추는 남편의 뭉툭한 손끝을 한없이 맴돌 뿐이었다. 여자의 턱 밑까지 고개를 들이민 남자의 콧잔등엔 땀이 송글송글 배어나왔다.
여자는 남편이 해주는 팔베개를 좋아했다. 키가 훌쩍 컸던 남편의 손은 크고 두툼했다. 여자는 자신의 목을 감은 남편의 손을 활짝 펼쳐 손가락 끝으로 손금의 골을 가만히 따라갔다. 여자는 자신이 남편을 잘 알고 있다고, 이해한다고 믿었다. 손바닥에 깊게 패인 손금처럼, 뚜렷하고 환하게. 그녀가 남편의 손을 잡고 있었을 때 그는 거기에 분명 있었지만, 그는 어디에 있었던가. 여자는 흐려지는 눈을 들어 검은 밤길을 내다본다.
여자가 갈림길에서 이정표를 지나친다. 고개를 빼서 다시 백미러를 살펴보지만, 눈과 어둠에 묻혀 버린 이정표는 해독이 불가능한 기호판일 뿐이다. 차는 가파르고 굽어진 길을 오르고 있다. 눈은 천지를 덮어버릴 듯 맹렬한 기세로 쏟아진다. 헤트라이트 불빛을 따라 깜빡거리는 노란색 화살표를 따라 여자가 천천히 커브를 돈다.
아들은 밤새 쌓인 눈을 보고 강아지처럼 좋아할 것이다. 내일은 학부모총회의가 있는 날. 새 학년이 시작되고 처음 담임과 엄마들이 만나 인사를 나누는 날이다. 작년, 보건소 정기 감사가 겹쳐 여자는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식에 가지 못했다. 아이는, 대신 따라나서는 제 할머니의 가슴을 작은 실내화 가방으로 툭 밀쳐냈다. 시어머니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약국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여자는 약국에 딸린 뒷방으로 아이를 끌고 가, 종아리가 새빨개지도록 때렸다. 시어머니는 차마 들어오지 못한 채 문 뒤에서 눈물을 훔쳤다. 에미야, 살살 친 거야. 걔가 무슨 힘이나 있을라구. 다 내 잘못이다. 요샌 자꾸만 넘어지는구나. 늙어서 다리에 힘이 빠진 게지. 여자는 어금니를 다져 물었다.
여자가 잠든 아들의 얼굴을 손으로 덮는다. 여자의 손은 작다. 아들의 얼굴은 여자의 손으로 다 덮을 수 없다. 아들의 코가, 한 쪽 뺨이 삐어져 나온다. 여자는 아들의 이마에 성호를 긋는다. 그리고 기도한다. 빨리 빨리 자라기를,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나길, 어서어서. 여자는 아들의 팔짱을 끼고 나가 영화를 보고, 눈 오는 밤 아들이 내미는 손을 잡고 걸어가는 자신을 상상해본다. 여자는 이불을 들추고 아들의 잠옷바지를 끌어내려 덜 자란 고추를 만져본다. 여자의 움켜쥔 손 안에서 작은 고추가 조금 부풀어 오른다. 아들이 몸을 돌려 누우며 뒤척인다. 여자는 이불을 끌어당겨 여며주며 자장가를 부른다.
여자는 창을 열고 검은 공기 속으로 핸드폰을 내던진다. 눈은, 여자의 핸드폰을 묻고 바퀴가 굴러온 흔적을 덮어줄 것이다. 남자가 고개를 돌린다. 여자의 얼굴 가득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남자가 갑자기 어쩔 줄 몰라 하며 큰소리로 말한다.
“울지 마. 미란도 울었어. 많이많이. 대사관 가서 결혼식 할 때. 미란은 자주색 드레스 입었어. 내가 쓴 편지를 소리 내어 읽어주었어. 내가 한국말로 울지 마세요, 하자 미란이 더 크게 울었어. 나랑 결혼하는 거 싫어해서 미란 가족 아무도 오지 않았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지 못한 채 여자는 앞만 줄기차게 바라보며 운전대를 바투 잡는다. 남편을 처음 집으로 데려갔을 때 여자의 아버지는 등을 돌렸다. 청상과부가 홀로 키운 외아들에겐 딸을 시집보낼 수 없다며 아버지는 끝내 남편의 절을 받지 않았다. 예의가 깍듯했던 남편은 아버지에게 절을 할 수 없어서 몹시 당황해했다. 여자가 결혼식 내내 운 것은 아버지가 오지 않은 것이 슬퍼서가 아니었다. 여자는 자신이 지켜낸 사랑 때문에 울었다.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서야 가지게 되는 행복. 여자는 자꾸만 목이 메었다. 일상으로 들어온 사랑은 여자가 생각한 것만큼 대단하지 않았다. 여자는 자주 남편의 손을 끌어다 목을 감쌌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이 어디로 떠내려 가 버릴지 알 수 없었다.
남편은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여자는 알 수가 없다. 나는 당신을 알아, 당신을 이해해, 란 말 따위 하지 말 것을. 대신 이렇게 말했어야 한다. 나는 당신이 하는 말을 내 마음대로 알아들었어. 그러니 더 이상 말하지 말고 그 더럽고 불결한 입을 다물기 바래.
남자는 어느새 잠이 들었는가. 옆자리에선 규칙적인 숨소리만 건너온다. 여자는 거칠게 핸들을 틀어쥔다. 남자를 흔들어 깨우고 싶다. 일어나, 일어나서 내 말을 들어. 내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잘 봐. 조제실 뒤에 숨겨둔 술을 따가운 목구멍에 흘려 넣다가 약국 유리문을 넘어온 무료한 햇살을 바라볼 때.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천연덕스럽게 평화로운 밤거리를 향해 내가 무얼 하고 싶은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너 알아? 말해지지 않는 거, 차마 말할 수 없는 거, 말이 되지 못하고 너무도 가벼이 흩어져 버리는 거, 그게 나인지도 모르지. 그걸 죄다 모으면 내가 될 수 있을지도. 자, 이제 말해. 네가 누군지, 말해봐. 칼로 상처를 다시 길게 베어 빨갛고 미끌미끌한 살점을 헤집어 그 속에서 펄떡거리고 있는 연하고 물컹한 것을 내게 보여줘. 피를 흘리지 마. 그렇게 감추지 마. 상처가 굳기 전에, 섣부른 새살이 돋아나기 전에, 어서 내게 보여줘.
여자가 차를 갓길에 세운다. 운전석 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훅 밀려든다. 남자는 깜빡 졸았던 잠에서 퍼뜩 깨어난다. 함박눈이 차에서 내려선 여자의 머리와 어깨에 어지럽게 내린다. 여자는 트렁크를 열고 작은 아이스박스를 뒤적여 술을 꺼낸다. 찬 맥주가 뜨거운 목을 적시며 흘러내린다. 여자는 가만히 눈을 감고 서서 순식간에 몸이 노곤해지고 아늑해지는 것을 느낀다. 차에서 내린 남자가 다가와 손을 내민다. 여자는 남자에게 새로 꺼낸 캔 맥주를 건넨다. 남자는 여자의 길고 풍성한 속눈썹에 매달린 눈을 바라보면서 술을 마신다. 여자가 캔 하나를 더 꺼내와 딴다. 캔 뚜껑에 얹힌 눈을 후루룩 마시며 여자는 생각한다. 오늘밤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좋을 만큼 조용한 밤이다.
여자가 차에 오르고 한참이 지나서야 남자가 차에 오른다. 남자의 손엔 마지막 남은 맥주 캔이 들려져 있다. 남자가 급하게 술을 들이키며 말한다.
“순, 난 생각해야 해. 미란이 왜 나를 떠났는지. 천천히 다시 생각해보겠어.”
여자는 와이퍼를 빠르게 작동시켜 앞 유리를 가득 덮은 눈을 털어낸다. 남자는 술로 인해 활기를 찾았는지 말이 많다. 여자는 천천히 차를 출발시키며 생각한다. 그래, 그렇게 해. 그것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부르는 사랑이란 게 도대체 다 무엇이겠니? 열심히 기억해봐. 근데 말야, 난 네가 어차피 알 수 없을 거란 데에 이 밤을 통째로 걸겠어. 어쩌면 미란도 마찬가지 아닐까? 생각보다 우린 자신이 누구인지, 뭘 원하는지 잘 모를 때가 많거든. 그러니 제발 생각만 하고 그 시끄러운 입은 닥쳐. 고요하고 거룩한 밤이잖아.
가로등 하나, 이정표 하나, 화살표 하나 없는 외길. 헤트라이트 불빛만으로는 너무 어두워 여자는 전조등을 켠다. 전조등 파란 불빛을 받아 눈이 푸르러진다. 겨우내 메마르고 앙상했던 나뭇가지가 푸른 눈의 싹을 틔운다.
얘야, 아무래도 내가 뭘 놓쳐버린 것 같다. 손이 이리 허전할 수가. 왜 이리 손에서 바람소리가 나는지. 시어머니는 여기저기 멍이 번져 검푸른 검버섯이 돋아난 얼굴을 바짝 들이댄다. 여자가 시어머니를 바라본다. 자주 넘어지고 아무데서나 잠이 드는 시어머니의 몸에는 언제나 퍼런 멍이 가득하다. 이웃집 누군가가 묻는다. 할머니, 왜 이렇게 얼굴에 멍이 들었어요? 시어머니는 연분홍 틀니를 드러내며 말한다. 그 년이 날 자꾸 때려. 누구, 며느리요? 시어머니는 눈을 끔뻑거린다. 모른 척 하시우.
시어머니는 어린 남편의 손을 찾아 헤맨다. 시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았다던 그 밤, 바스라지게 감아쥐었던 어린 아들의 손을 영영 놓쳐버리고 나서 시어머니는 자주 울었다. 한밤중에 여자의 방문 앞을 서성이던 시어머니가 여자를 흔들어 깨운다. 얘야, 손이 왜 이리 허전하누? 시어머니는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손을 들어 검은 허공에다 대고 마구 흔들어댄다.
선생님, 어제 우리 엄마가 또 점을 보고 왔는데요, 지금 만나는 남자랑은 헤어져야 할까 봐요. 김양은 통통한 뺨을 부러 찌푸리며 말했다. 걘 부모 복도 완전 없고 돈복도 지지리 없대요. 엄마가 걔랑 빨리 헤어지고 딴 사람 알아보래요. 점 봐주는 할아버지가 나이가 아주 많거든요. 젊어서 신기가 내리고는 그렇게 용했다데요. 엄마는 그 할아버지 말이라면 끔찍하게 따르거든요. 그 할아버지 죽기 전에 나, 시집갈 사람 골라 궁합 봐야 한다면서 난리예요. 웃기죠, 선생님? 그 할아버지가 그렇게 용하니? 여자가 물었다.
김양이 갑자기 고개를 숙이면서 바투 다가왔다. 김양의 목소리는 은밀한 거래라도 하는 듯 낮고 축축했다. 글쎄 우리 외할머니가요, 노망이 들어서는 십년이 넘게 누워있었대요. 똥칠을 해가며 구십이 다 되도록 목숨이 끊어지지도 않구요. 그래서 우리 엄마가 큰 이모랑 거길 갔대요. 비방을 받아오려고요. 외삼촌 네가 날마다 싸우고 난리도 아니었거든요. 우리 외숙모가 하다하다 지쳐 집을 몇 번이나 뛰쳐나가고 외삼촌은 술에 취해 펑펑 울고. 근데 그 점쟁이가 눈처럼 하얀 가루약을 내주면서 그랬대요. 흰 밥에 조금씩 섞어 먹이라고. 여자의 손이 몹시도 흔들리는 것을 김양은 보지 못했다. 김양은 아무도 없는 조제실 바깥을 불안스레 흘끔거렸다. 그리곤 우리 외할머니, 이 주 만에 돌아가셨대요. 우리 엄마가 큰이모랑 붙들고 엉엉 울었대요, 외숙모 안 볼 때. 그럼 어쩌겠냐고, 모진 숨이 끊어지지도 않는데, 자식들이 도로 죽게 생겼는데......, 그러면서.
여자는 독극약과 향정신성 의약품을 모아두는 약장을 열어 잔량을 꼼꼼히 확인했다. 조제량을 반드시 기재해야 하는 독극약과 향정신성 의약품을 관리하는 일은 언제나 여자 혼자 도맡아 했다. 일 처리가 빠르고 손끝이 야무진 김양에게도 독극약장의 열쇠만은 내어주지 않았다. 여자는 바리움, 디아제팜, 씬지로이드, 디곡신이 담긴 약병을 열고 희고 반지르르 윤기가 흐르는 알약들을 한참동안 들여다보곤 했다. 독극약의 잔량은 장부의 수량과 언제나 정확하게 일치했다. 보건소 감사에서 맨 먼저 점점 받는 것도 바로 독극약장이다.
눈발이 다시 거세진다. 여자가 라디오를 켠다. 전국에 대설주의보가 내려졌다는 DJ 멘트. 삼월에 대설주의보라니.
“대설주의보야.”
“?”
“눈을 조심하래.”
“snowball.”
“그래, 공은 조심해야 해. 아무데서나 날아오거든.”
“snowangel.”
“천사는 더 조심해야지. 아무데나 함부로 날아다니거든.”
여자가 라디오를 꺼버린다.
“너, 택시기사 진짜 안 때렸어?”
“no.”
“때린 거 맞지?”
“no."
"때렸어, 안 때렸어? 뭐래는 거야, 어?”
“no."
여자는 no만 연발하는 남자의 얇은 입술을 째려본다. 여자는 고등학교 영어시간에 부정의문문으로 물었을 때 우리말과 정반대로 대답해야 하는 영어 문법을 떠올린다. 여자가 다시 묻는다.
“네가 때렸지?”
“no."
“왜 때린 거야?”
여자는 남자의 손이 캔을 납작하게 우그러뜨리는 것을 보지 못한다. 여자의 머리에 섬광이 번쩍이더니 오른쪽 귀가 멍멍하고 뺨이 텅 비어버린 것처럼 얼얼하다. 여자는 남자의 주먹이 다시 한 번 자신의 뺨으로 다가오는 것을 얼핏 본다. 여자의 입술에서 피가 배어난다. 통증은 강렬하고 둔중하다.
넌 택시를 타고 미란을 찾아간 거야. 미란은 널 만나주지 않았겠지. 그래서 넌 택시기사의 이빨이 부러지도록 때린 거야. 그 육중한 몸을 날려 떨고 있는 택시기사를 맥주 캔보다 더 납작하게 찌그러뜨리고 싶었겠지. 여자는 피가 번진 입으로 가만히 중얼거린다.
“그러고도 넌 미란이 왜 떠났는지 몰라, 그렇지?”
여자는 지난 이 년 동안 남편의 죽음에 대해 자주 외면했고 가끔 생각했다. 어떻게 죽었을까? 왜 죽었을까? 여자가 참을 수 없는 건 남편이 죽었다는 현실이 아니라 남편이 왜, 어떻게, 무엇 때문에, 어떤 식으로 죽었는지조차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여자는 타다 남은 남편의 시신을 묻어야 할지, 마저 태워야 할지, 바다나 강에 가서 뿌려주어야 할지, 항아리에 고이 담아 납골당에 둘지 따위 문제로 싸워대는 친척들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여자가 궁금한 것은 남편이 죽던 그 날 그 밤, 그 순간의 바람과 기온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습도나 안개의 농밀함, 달의 모양이나 별의 밝기 같은. 그런 것이라도, 그런 하찮은 것이라도 알 수 있다면 여자는 어쩌면 남편을 조금 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남편이 누구였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제 잊어도 되는지, 무엇을 기억해야 할지. 여자는 때때로 남편이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여자가 브레이크에서 발을 뗀다. 언덕길에 서 있던 차가 조금씩 뒤로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뒤로 밀리면서 차에 차츰 가속이 붙는다. 여자의 오른쪽 뺨에 다시 남자의 거친 손이 뿌려진다.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린다. 여자는 눈을 감고 핸들을 잡고 있던 손을 스르륵 놓아버린다.
강씨 할머니는 그날따라 더욱 밉살스럽게 굴었다. 김양도 퇴근해버리고 여자가 서둘러 가운을 벗었을 때 강씨 할머니가 반쯤 셔터가 내려진 약국 문을 밀고 들어왔다. 할머니는 심하게 야윈 개를 턱하니 판매대 위에 올렸다. 할머니가 늘어놓는 푸념을 들으며 여자는 자주 약국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집안일을 도와주던 아줌마가 돌아갈 시간이 훨씬 지났다. 아무 때나 머리채를 휘어잡는 시어머니 때문에 그만둔다는 아줌마를 달래느라, 여자는 며칠 전 월급을 더 올려주었다.
여자가 강씨 할머니가 내던진 처방전을 펼쳐든 순간, 판매대에 몸을 비벼대던 개가 안쪽에 놓인 여자의 책상으로 풀쩍 뛰어내렸다. 여자가 마시던 커피 잔이 넘어지면서 남아있던 액이 비죽이 흘러나왔다. 할머니는 달려와 개를 낚아채가며 팩 소리를 질렀다. 이게 그래도 꼴에 여자라고 암내를 피워대고, 아이구, 어디 데려가서 접이라도 붙여줘야지, 원. 아무데서나 비벼대고 풀썩거리고. 흘끔거리는 할머니의 눈길을 피해 여자는 술 냄새가 밴 책상을 황급히 닦아냈다.
여자는 그날 밤, 독극약장을 열었다. 약병을 열고 눈처럼 하얀 알약을 한 움큼 거머쥐었다. 차가 격렬한 속도로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여자의 기억은 거기까지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못할 일도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피범벅 된 여자의 입이 비죽이 일그러진다.
여자가 눈을 뜬다. 섬뜩할 만큼 차가운 눈이 얼굴에 와 닿는다. 여자의 몸은 비탈이 완만해지는 난간에 반듯하게 뉘어져 있다. 여자가 힘겹게 머리를 돌린다. 차는 운전석과 조수석 문이 활짝 열린 채 앞부분이 높이 들려올라가고 뒷부분은 눈에 쿡 박혀 마치 하늘을 향해 날아갈 태세다.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여자가 억 신음을 문다. 늘씬한 통증이 목과 어깨를 훑고 지나간다. 남자는 언덕 아래에 있는 논두렁에 고꾸라진 채 미동도 없다. 소리를 내어보려 입을 달싹거려보지만 여자의 입에서는 거친 숨만 새어나온다.
여자는 눈을 가늘게 떠서 시선을 모아본다. 남자가 처박혀 있는 논의 한쪽 모퉁이. 엉덩이를 맞댄 두 마리의 개가 낑낑대고 있다. 바람에 날리는 검은 비닐봉지처럼 무연히 길을 건너가던 그 개들이 아닐까. 누런 개가 붉은 엉덩이를 들어 흰 개를 찍어 누르는 것을 바라보다가 여자가 고개를 돌린다. 차가운 공기 중에 뿌려지는 들척지근한 숨소리를 듣는다.
여자는 자꾸 웃음이 난다. 자, 이제 젓가락을 뽑을 때야. 육효점. 달리 무슨 방법이 있겠니. 맞잡을 수 없다면 젓가락이라도 잡아야지. 그렇게 아무렇게나 하면 안 돼. 네 운명이 결정되는 거잖아. 산통을 들어 하늘에 정중히 고하고 신중하게 뽑아야 한다구. 뽑은 젓가락을 손아귀에 움켜쥐고 그렇게 숨기면 안 돼. 자, 손을 벌려 봐. 여섯 개를 한데로 모아봐. 그럼 네가 누구인지 말해 줄게.
이건 어때? 삼월 꽃샘추위보다 더 새치름하고 암상스럽다. 눈보다도 차갑고 시리다. 들판을 뒹구는 똥개보다 더럽고 비루하다. 소름끼치도록 빤한 얼굴 좀 치워버려. 그래, 제발 강씨 할머니보다 더 뻔뻔하고 교활한 그 얼굴 좀 닦아내. 아니, 피가 나도록 빡빡 닦아야지. 다시 봐. 이건 어때? 언젠가는 아들의 손을 놓쳐버리고 허공을 향해 앙상한 손을 흔들어댈 것이니 흉물스럽다. 후훗, 아닐 수 있겠어? 오호라, 드디어 나왔군. 딱 맞는 괘야. 죽는다, 뒈진다, 혹은 축 사망, 아니면 you will die. 어느 것이라도.
여자는 가까스로 손을 들어 얼굴을 덮는다. 눈꺼풀 속을 파닥거리는 어린 새를 이제 그만 잠재우고 싶다. 여자의 가녀린 몸 위로 안개처럼 자욱한 눈이 쌓여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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