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쌍화점
감독 : 유하
배우 : 조인성(홍림), 주진모(왕), 송지효(왕후)
개봉연도 : 2008년 12월
제작비 : 76억원
쌍화점을 보고 난 관객들의 평은 두 가지로 갈라진 것 같았다. 재미있었다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야하기만 했고 별 내용이 없다는 사람도 있었다. 토요일 오후 스터디 회원들과 조조 로 쌍화점을 봤는데 나는 이 영화가 세 사람의 애정 씬이 야하거나 외설이라는 관점을 떠나서 상당히 치밀하고 제대로 된 구도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하다는 느낌은 성의 씬이 줄거리에 제대로 녹아들지 못했다는 평일 수도 있는데 이 영화에는 세 사람의 정사 씬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는 했다. 단지 홍림과 왕후의 정사 씬이 그렇게 까지 적나라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을 까 하는 의문이 들기는 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주인공이 누구일까 하고 갸우뚱 해질 때가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분명 홍림일텐데 오랫동안 내 뇌리에 남은 캐릭터는 왕의 역할을 맡은 주진모의 눈동자였다. 감독이 아무리 누구를 주인공으로 삼아 영화를 만들었다고 할지라도 보는 자의 관점에서 그가 더 강렬하게 와 닿았다면 바로 강렬한 인상의 영상이 주인공이 아니겠는가?
왕은 상당히 고독하다. 그가 고독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성애자가 아닌 동성애자 이며 그는 반드시 후사를 이어야할 절대 절명의 사명이 있으며 신하들에게 완전한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왕후도 고독한다. 왕후는 물 설고 풍속이 설은 낯선 땅에 시집온 이방인일 뿐 아니라 남편의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
나는 줄거리에 맞는 배우의 외모도 중요하지만 그의 목소리 또한 영화의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데 굉장한 역할을 한다고 믿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캐릭터에 맞는 완벽한 배우를 선택한 것 같다. 왕의 목소리는 중후하여 듣는 순간 내면의 갈등을 표현함에 있어 목소리가 한몫 할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을 안정시킨다. 그런 역할에 맞는 풍부하면서도 고독한 목소리의 전형이다. 왕후 송지효의 목소리도 분위기를 제압하는데 적합해 보인다. 당당하고 강한 목소리를 갖고 있어 영화에 재미를 보태준다. 가장 나약하게 들린 목소리가 홍림의 목소리였는데 하긴 그의 역할이 권력자의 총애에 기대는 약관의 청년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그는 게이의 역할까지 해야 했으므로 중후한 목소리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영화는 야하다는 항간에 떠도는 평을 떠나서 우선 잘 짜여진 시나리오의 힘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아름답다. 간혹 나오는 자연의 풍경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답고 의상도 아름답고 또 춤추고 노래하는 장면이 많아 단순한 눈요기도 된다.
줄거리로 들어가 보면
원의 억압을 받고 있던 고려의 왕은 원의 통제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원나라 공주 출신으로 고려에 시집와 있는 왕후는 왕의 그런 마음을 잘 알고 있으며 이제는 원나라의 공주라기보다는 고려의 왕후라는 신분에 걸맞은 마음가짐을 갖고 있다. 그녀는 왕을 진정으로 이해하며 또 사랑하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간절히 원하는 아이가 없다. 그들이 단순한 필부라면 아이 문제가 그들만의 고통이 되겠지만 한 나라의 왕이다 보니 후사가 없다는 것은 가장 시급하고 불안한 요소가 되어있다. 원의 억압과 신하들의 은근한 압력, 그리고 자신이 여자를 품을 수 없는 몸이라는 고통에 시달리던 왕은 가장 총애하는 자제위 총관 홍림에게 왕후와 동침할 것을 명한다. 그러기 전에 왕과 홍림은 동성애 사이이다. 우리사회에서 동성애가 양성화 된 적은 얼마 안 돼지만 사실 오래전부터 동성애는 있어왔다. 고려의 공민 왕이 모델이 되어 야사로 내려오고 있기는 하지만 그런 일이 당시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동성애자 중에는 이성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는 부류와 양성애자가 있다고 한다. 왕은 전자에 해당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처음에 홍림과 왕후는 동침하지 못한다. 두 사람의 관계가 군신관계이기에 감히 홍림은 왕후의 몸을 만지지도 못하고 돌아서 간다. 왕후 또한 왕의 처지와 자신의 처지 그리고 홍림의 난처한 입장 등 여러 복잡한 상황을 눈빛으로 투영하고 있다. 침대에 누운 그녀가 온몸으로 울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왕은 새삼 후손의 필요를 역설하고 이 명령을 거역할 수 없는 홍림은 두 번째 왕후의 침소에 들게 되고 어색한 동침을 한다. 세 번째부터는 왕의 부탁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왕후의 의지에 따라 동침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 두 사람 사이에 금지된 사랑이 싹트기 시작한다. 줄거리를 쓰다 보니 영화가 조금 야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있을 때는 배우의 내면연기에 흠뻑 빠져 있었기에 머리에 잔영으로 남는 영상은 야한 정사 장면이 아니라 왕의 고독한 눈빛이었던 것 같다. 영화의 구도가 탄탄하다는 것은 여기에서도 나타난다. 육체적인 합일이후에 사랑이 싹트는 역 순차적인 수순을 밟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왜 절실할 수밖에 없는 가를 그들이 처한 상황에 의지해서 잘 보여 주고 있다. 홍림에게는 왕후가 첫 여자였고 왕후의 힘겨운 입장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었기도 하지만 왕후의 적극적인 태도에 연모의 정이 싹트기가 쉬었을 것이다. 왕후 또한 금지된 감정이란 점에서 더욱 절실하게 빠져들어 갔을 것이다.
왕은 왕후와 홍림에게 육체적인 합일만을 허락했지 정신적인 교감까지 허락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여전히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사실 왕이니까 당연한 요구이기도 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고 만다. 왕은 두 사람을 의심하게 되고 홍림의 마음을 몇 번이나 시험하지만 항상 정직하던 홍림이 왕후를 비호하기 위해서 거짓말까지 하게 된다. 왕은 홍림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왕후마저도 홍림을 감싸고돌며 자신을 속이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도 왕은 항상 홍림을 원하고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며 왕후도 늘 자신의 곁에 있어주기를 원한다.
원의 비호를 받는 기씨 성을 가진 귀족이 주체가 되어 반란을 도모하게 되고 연판장을 만드는 과정에서 왕후의 오빠까지 개입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도 왜 왕후의 오빠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었다. 왕후가 원의 공주라면 오빠는 원의 왕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오빠가 나중에 왕과 홍림의 갈등에 중요한 인물로 들어나면서 역시 구성이 탄탄하다는 감탄이 들었다. 연판장에 이름을 올린 오빠를 왕은 반드시 홍림에게 처단하게 하지만 홍림은 차마 왕후의 오빠를 죽이지 못하고 살려 보내는 것이다. 왕은 그 사실을 보고 받을 때도 눈동자를 떤다. 홍림의 변화에 화가 난 왕이 홍림과 무술대결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도 상당히 잘 만들어진 장면이었다. 칼부림은 너무나 진지해서 왕이 얼마나 많이 분노했나를 잘 보여 준다. 왕은 그의 거짓을 다 알고 있지만 용서한다는 것을 빗대어 말한다.
왕은 가장 가까운 측근이었던 홍림과 왕후를 둘 다 잃었다. 그는 여타 남자들과 다른 사람이기에 홍림을 잃었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대단히 힘들었을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홍림을 용서하며 그가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원하지만 홍림의 마음은 돌아오지 않는다. 차라리 죽는 것이 더 쉬울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군신 관계이기에 홍림도 마음을 다잡고 다시 현실로 돌아가려고 한다. 하나 마지막이라는 왕후의 부름을 받고 또 드디어 왕후가 회임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왕후가 기다리고 있는 서고를 찾았을 때 그는 왕후의 손을 끝내 거절하지 못하고 만다. 둘이서 뒤엉켜 있는 장면을 왕이 홍림을 찾아다니다가 보아 버린 것이다. 아무리 용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려도 홍림은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 왕은 분노한다.
나는 서고를 찾아가는 장면에서 왜 왕이 옆의 내시와 호위를 내치지 않는지 궁금했었다. 당연히 지금까지 왕의 태도라면 두 사람의 그런 모습을 제3자가 보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관록 있는 감독은 이 장면을 적절하게 써 먹었다. 당시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다 죽였고 그 죽이는 역할을 했던 부 총관이 적절하게 자신의 역할을 하기 위해 그 장소로 같이 가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둘이서 뒤엉켜 있는 장면을 보고서도 왕은 홍림을 죽이지 않는다. 단지 거세할 뿐이다. 여기서도 왕의 홍림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가 있다. 그는 진정으로 홍림을 사랑하고 있다. 내리사랑과 같이. 아니면 윗사람의 사랑은 진실하지만 아랫사람은 그저 처세술의 하나인 경우가 많았던 여타 왕처럼.
홍림을 따르는 자제위에 의해 홍림은 감옥에서 빠져 나간다. 왕은 거의 미친것처럼 그와 관련된 사람들을 죽여 나간다. 그 자신도 제어가 안 되는 것 같다. 자제위 소속으로 홍림의 탈출을 도왔던 청년들을 효수해서 성 밖에 목까지 걸어 놓는다. 그것은 자신을 배신한 홍림에 되한 복수이기도 하고 또한 자신에게 돌아오라는 무언의 압력이기도 하다. 왕후와 비슷한 목과 홍림이 왕후에게 선물했던 목걸이까지 걸어 놈으로써 왕이 왕후마저 죽였다는 오해를 홍림이 하게 한다.
그러나 왕은 왕후를 죽이지 않았다. 그를 그리워하며 그를 그림으로 그리기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드디어 홍림은 왕에게 복수하기로 하고 왕을 찾아간다. 어렵게 도착한 왕의 처소에는 왕이 혼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왜 이제야 오느냐”고 까지 한다. 홍림은 왕에게 칼을 겨눈다. 왕도 그런 대결을 거절한 사람이 아니다. 둘을 다시 목숨을 걸고 싸운다. 이 싸움은 살아나고자 싸우는 싸움이 아니다. 서로 같이 죽고자 하는 싸움이다. 왕의 칼에 홍림은 찔리고 왕도 홍림에게 찔렸다. 왕은 홍림에게 묻는다. “나를 정인으로 생각한 적은 없었냐?”고. 혼림은 잔인하게도 한번도 없었다고 강조하여 말한다. 순간 왕은 절망하고 만다. 자신이 그토록 아끼고 사랑했던 자신에게 있어서 정인이었던 혼림은 자신을 사랑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왕후만을 연모했을 뿐이다. 그렇게 연모하도록 만든 사람이 왕이었으니 그 점은 감사드린다고 한다. 왕은 허무하여 혼림의 칼에 찔려 죽고 만다. 바로 그때 아수라장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으니 바로 왕후의 목소리가 아닌가. 홍림은 왕이 왕후를 죽이지 않았음을 그때야 알아차리지만 이미 늦었다. 왕도 죽고 자신도 곧 죽을 것이다. 왕의 칼에 치명상을 입은 데다 부총관이 왕의 시해범으로 몰아 배를 깊숙이 찔렸기 때문이다. 홍림은 왕의 말대로 우매했다. 그는 왕의 마음을 다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겨우 왕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겨우 고개를 돌려 왕을 한번 바라다보는 것뿐이었다.
야한 장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왕의 눈빛 연기에 몰입하여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내용상 그런 장면이 반드시 필요했고 전제가 되어야 영화를 이해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장면은 없어도 이해하는데 큰 무리는 없어 보였다. 왕과 홍림의 노골적인 장면이라든가 왕후와 홍림의 69자세는 좀 아니다 싶었다.
첫댓글 야하다 아니다를 떠난 관점을 떠나면 이글을 보면 수작의 영화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네요, 줄거리를 너무 자세히 소개해 마치 영화를 한 편 본 것 같네요, 그래서 정곡을 찌른 글이 자
속도가 줄어드는 약점을 보입니다, 오랫만이네요, 새해 멋진일만 자꾸 생기시기를 기원합니다,
어, 소후님이 언제 글을 올리셨나. 나 언제 이글 읽지. 서울을 가야 한느데 ^^ 소후님 분석글은 돈주고 못보는 수준 있는 글인데...
쌍화점 영화를 보지 못했는데, 감상문을 너무 잘 써주셔서 영화를 본듯한 착각이 듭니다...감사히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