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이드 존스의 생애와 사상
정근두/울산교회 담임목사
집중연구/설교자 로이드 존스
해마다 새로운 제자훈련 방법이나 여러 가지 성경연구 프로그램들이 쏟아져 나오는 상황 속에서 "아직도 설교가 교회 부흥의 대안이 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하지만, 설교가 목회자의 관심 영역 밖을 벗어난 경우는 없다. 오히려 설교에 대한, 특히 강해설교에 대한 관심이 지속적으로 고조되고 있는 우리 상황은 퍽 고무적으로 여겨진다. 굳이 데니스 레인의 강해설교 세미나가 계속 성황을 이루고 있는 현실을 들지 않더라도, 뜻 있는 목회자들이나 젊은 신학생들 사이에 강해설교에 대한 관심이 계속 고조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다. 교회가 교회 되기를 중단하지 않는 한 설교는 교회에서 없어질 수 없다. 루터가 말한 대로 교회는 설교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존속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불가결한 임무를 어떻게 완수하느냐에 있다.
오늘 한국강단이 나아갈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는 데 있어 도움을 줄 수 있는 설교자상과 설교이론이 시급히 필요하다. 필자는 여기에 서슴지 않고 그 사역 당시 "영어 세계에서 최대의 강해설교가"라는 평가와 "개혁주의 설교의 극치"라고 찬사를 받은 바 있는 로이드 존스(D. M. Lloyd Jones)와 그의 설교를 들고 싶다. 그 이유는 그의 설교가 우리의 완벽한 표준이라는 입장에서가 아니라 그 표준에 가까운 하나의 좋은 예가 될 수 있다는 입장에서이다. 뿐만 아니라, 로이드 존스를 연구하는 것이 객관적 타당성을 지니는 것은 이미 30여권이 넘어선 그의 설교가 번역되어 읽혀지고 있는 현실을 들 수 있다. 아마 필자가 알기로는 해외설교자로서 로이드 존스를 능가하는 설교집이 번역 출판된 사람은 드물 것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오늘 한국강단에서 강해설교의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는 설교자들을 살펴보면 모두 로이드 존스의 영향을 받은 분들인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설교자 로이드 존스를 깊이 있게 연구할 이유와 필요를 발견한다.
의사에서 설교자로
데이빗 마틴 로이드 존스는 1899년 12월 20일 남웨일즈 카디프에서 출생했다. 81년의 순례자의 길을 걸은 후 1981년 3월 1일, 옛부터 성 다윗의 날로 지켜지는 주일날 "활짝 열린 문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의 영원한 나라로 들어갔다"(벧후 1:11 의역).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처럼 그는 심장 전문의가 아니라 본래 내과의사로서 수업을 받았고, 당시 영국왕실 내과 담당주치의로 유명했던 호오더 경의 조수로서 미래가 보장된 의사였다. 그러나 1927년, 직업을 포기한 후 신학교육을 받지 않은 채 그는 같은 내과의사였던 아내 베탄과 함께 그의 고향 남웨일즈 탈보트 항구의 아베라본에 있는 한 장로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1938년 그는 버킹험 게이트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채플에 캠벨 몰간 박사와 동사(同事) 목사로서 초청을 받았다. 1743년 그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어 1968년 8월 은퇴하기까지 거기에서 목회를 계속했다. 그 다음 그는 순회 설교자로서, 저술가로서 남은 생을 주를 위해 섬겼다.
샌드필즈의 특이한 설교자
로이드 존스가 목회를 시작한 곳은 아베라본 샌드필즈의 가난한 지역이었다. 당시는 경제 공황기였고 샌드필즈의 많은 가난한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실직상태에 있었다. 샌드필즈 주민 약 90%는 당시 아무런 예배 처소에도 참석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가 목회를 시작했던1920년대 중반의 웨일즈 지역 목회자들 사이의 신학적인 기류는 더이상 역사적인 칼빈주의가 아니라 옛 낙천주의적 자유주의였다. 그리하여 로이드 존스는 때를 잘못 타고 태어난 사람으로 불리워야만 했다. 그러나 그가 부임한 즉시 웨일즈의 그 장로교회는 끊임없는 회심을 통해서 성장해갔다. 동네에 악명높은 사람들이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교회에 다니기만 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그의 아내도 포함된다. 그의 사역 맨 처음부터 성령의 예외적인 기름부음이 있었다. 그의 설교의 영향은 이내 아베라본 동네에만 한정될 수 없었다. 1930년 초부터 웨일즈지역 순회설교는 정규적인 그의 사역의 일부가 되었다. 이 당시 그의 전도 설교를「전도설교」라는 책에서 읽어볼 수 있다. 11년 반 동안의 그의 사역을 통해서 교회는 93명의 등록교인에서부터 530명의 등록교인으로 성장했고 평균예배 출석은 850명 정도였다. 물론 이러한 통계는 한국 상황에서는 별로 놀라운 것이 못된다고 할지 모르지만 해마다 기독교의 세력이 눈에 띄게 감소되는 영국 상황에서는 놀라운 일임에 틀림없다. 이 시기의 사역에 대한 충분한 평가는 영원에 속한 문제이지만, 로이드 존스는 1930년대 공산주의로부터 남웨일즈를 지킨 두 사람 중 한사람으로 인정되고있다. 그의 전기작가 이얀 머레이에 의하면, 이 시기에 로이드 존스 자신이 얻은 가장 분명한 교훈은 성령의 능력은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미친다는 평생불변한 확신이었다. 로이드 존스 부부가 아베라본을 떠날 때 그들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영적 유대의 긴밀함을 다시는 경험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예감을 가졌다. 그들이 아베라본을 떠나기 직전에 성도 중 한사람이 왜 로이드 존스가 떠나기로 결심했는지에 대해서 신문기자로부터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잘 모릅니다. 오직 내가 아는 것은 조금도 그 자신의 생애를 위해서 결단하지 않았을 것이고 많은 기도 끝에 내린 결정이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가 위대한 설교자인 비결을 이런 데서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교인들이 목사의 삶과 인격에 대해서 신뢰한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설교는 말로 하는 것인데 교인들이 설교자의 인격을 신뢰하지 않으면 그가 하는 어떤 이야기도 설득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연설은 훈련으로 닦여질 수 있는 기술인 반면 설교는 삶의 표현"이라는 말을 기억해야 한다. 설교는 삶에서부터 맺히는 열매이지 훈련으로 얻을 수 있는 기술은 아니다.
런던의 탁월한 설교자
그의 제2차 목회사역은 1938년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시작되어 30년간 계속되었다. 2차대전이 발발한 후 얼마 안되어 폭탄이 예배당에 투하되었고, 많은 사람이 모이던 교회는 약 150명 정도까지 줄어들었다. 로이드 존스는 런던이 어려운 시기에 있을 때에 그 교회를 담임하는 새로운 책임을 맡게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약 500명의 성도들로서 실질적으로 새로운 교회를 시작한 셈이다. 1951년 웨스트민스터채플은 주일 예배에 약 2,500명이 참석하는 런던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되었다. 런던에서 사역하는 동안 줄곧 주일에는 45분 정도의 설교 두 번과 금요일 밤에 또 한번 같은 길이의 설교를 했다. 하지만 그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그 설교들이 너무 짧다고 느꼈다. 여기서도 그의 설교 사역은 런던에만 한정될 수 없었다. 주간에는 대영제국 각곳에 다니면서 설교를 했다. 그리하여 그는 런던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잘 알려진 복음주의자 가운데 한사람이 되었다. 로이드 존스는 런던 웨스트민스터채플에서 캠벨 몰간의 역사적인 계승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강해설교의 왕자"라는 그의 칭호의 계승자가 되었다." 하지만 로이드 존스는 그의 독특한 설교방식을 발전시켰다. 성경의 한 책에 대한 연속설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베드로후서 강해설교"이다. 그리고 21년 동안 계속해서 그와 같은 연속 설교를 했다. 그 중에서 유명한 것은 "산상수훈 강해설교"와 5년에 걸친 "에베소서 강해설교", 12년에 걸친 "로마서 강해설교"인데, 이 설교들은 대부분 책으로 나와 쉽게 구할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에 관한 연속 강해설교를 했는데, 이들 중 일부는 책으로(예컨대 요한복음 17장 등), 나머지는 카세트 테이프로 구할 수 있다. 이 모든 설교들은 이 신실한 하나님의 종을 통해 나타난 기념비적인 작품으로서 우리 시대뿐 아니라 오는 세대까지 그를 보내 주신 은혜로운 하늘 아버지를 찬양토록 할 것이다. 그는 사역 초기인 1935년 경부터 IVF와 관계를 맺었고 후에는 그 총재가 되었다. 그는 또한 국제복음주의학생 연맹 (IFES)의 의장이 되었다. 그가 탁월하게 의장 직무를 수행하는 동안 IVF는 그 세력이 확산되었고, 경건주의와 복음주의적 단체로 알려진 IVF에 건전한 교리적인 뼈대를 제공했다.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그의 탁월한 설교사역의 결과로서 그는 웨스트민스터목회자 모임(The Westminster Fellowship)을 창설해서 일단의 목회자들과 함께 신학적인, 목회적인 문제들을 토의했다." 그리고 그의 강력한 지도력을 통해서 일단의 젊은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은 청교도 및 개혁주의대회(The Puritan and Reformed Conference)를 통해 정규적인 토의장을 창출해서 매년 12월 초에 한차례씩 모였다. 1967년 이후에 이 모임은 웨스트민스터대회(The Westminster Conference)로 이름을 바꾸어 모이고 있다. 로이드 존스는 그 외에도 상당한기구들이 시작되는 데 실제적이고도 영향력 있는 역할을 감당해서 진리의 깃발(The Banner of Truth Trust)이라는 출판사와 런던복음주의 도서관과 런던신학교가 만들어지는 데도 커다란 기여를 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고향인 웨일즈를 위해서도 공헌을 했는데 웨일즈 복음주의운동과 연합해서 목회자 모임과 그 연례 회합이 생겨나는 데도 기여했다. 로이드 존스의 웨스트민스터 강단의 영향은 전 국가적일 뿐 아니라 전 세계적이며 이 영향은 다음 세대에도 지속될 것이다.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히 11:4).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그는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설교자 중의 한사람이었다.
밝아져온 진리
그리스도인이 되는 기본적인 소명은 설교자가 되는 특수한 소명에 앞서 필수적이다. 이것은 토론할 여지가 없는 문제이다. 그러나 오늘 강단사역의 실태는 우리로 하여금 로이드 존스의 회심을 설교자로서의 부름에 앞서 생각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그 자신의 신념이기도 하다. "명백히 설교자는 다른 모든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신자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근본적이고도 필수적인 문제입니다. 로이드 존스는 경건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성장했다. 그는 웨일즈장로교회에 정규적으로 출석했다. 18세 때 일년 동안주일학교부장으로 봉사했다. 그때는 이미 입교문답을 했고 정식 교회 회원이 되었다. 누구든지 그를 그리스도인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20대 초반에 이르러서야 그는 모든 것을 새롭게 보게되었다. "수년 동안 나는 실제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그는 뒤에 고백했다. 그의 경우는 회심이 점진적이었다. 그가 기독교 신앙으로 인도되는 데는 여러 가지 거역할 수 없는 영향들이 있었다. 그 중의 하나는 이 세상의 불확실성과 무상성이었다.
그는 열살 때에 자기의 집이 불타서 사그러져 내리는 것을 보았는데 그 집은 그의 세 번째 집이었다. 그 다음에 살게 된 새로운 집에서도 안정을 얻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 자체가 영구한 도성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점차 의식하게 되었다. 아주 친했던 형 헤롤드의 갑작스런 죽음 후에 동일한 상황에서 에드먼드 버어크(Edmund Burke)가 했던 것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림자에 불과하며 우리가 추구하는 것도 그림자에 불과하구나." 4년 후 무척 사랑했던 아버지의 죽음이 동일한 진리를 다시 한번 인식시켰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 이것은 그에게 큰 인상을 심어 주었다. 이 진리는 그에게 경험적인 지식이 되었고 그는 그것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았다. 정말로 그의 설교에는 자주 이 주제가 반복되고 있다." 그 유동성과 불확실성보다 더 큰 이세상의 특성은 없습니다." "세상은 쉼이 없으며 세상에 속한 남녀들은 쉼을 얻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정한 만족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이 가변적이고 지나가는 것이며 예비적인 학교와 같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그러나 당신은 오직 올 것을 찾나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의 삶에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강력한 요인이 있었다. 십대 초기에 그는 호웰 해리스의 사역에 대한 책을 읽다가 사건들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과 작정하심을 보기 시작했다." 이 진리는 17세 때에 성경을 읽음으로써 다시금 확인된다. 그가 스무살이 되었을 때에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휴톤의 설교를 통해서 사람의 삶을 바꾸는 하나님의 능력에 감명을 받았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활동하시며 인간사에 개입하신다는 것을 점차 인식하케 된다.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놓은 모든 영향 가운데 가장 강렬했던 것은 죄의 실재에 대한 인식이었다. 죄는 사람이 근본적으로 무언가 잘못된 것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 자신의 죄악됨을 점차 인식하게 되었다. 인간의욕구 속에 내재된 잘못된 것을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보게 되었다. 더 나아가서 성경으로부터 그가 하나님께 대해죽어 있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자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자기 중심성과 자기 관심이라는 지배적인 원리는 그의 타락된 본성과 잘못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후에 그는 이렇게 설교했다.
"성경에 따르면 인간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도록 의도된 존재입니다. 인간은 주 하나님을 온힘을 다해서 사랑하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의도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어떠한 욕망이나 자기의 이익을 수호하려는 어떠한 소원도 필연적인 죄입니다. 나는 내 자신을 바라보는 대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의 영광과 존귀를 구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
서서히 이 진리를 확신하고 로이드 존스는 회심했다. 그의 나이 스물세 살에 그의 모든 삶은 변화되었다.
개인적인 소명의 확인
자신의 경험으로 로이드 존스는, 목회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만이 목회를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결코 아무에게도 강단사역을 해보도록 권하지 않았다. 그는 그러한 결정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개인적인 부름이어야 한다고 확실히 믿었다. 그의 경우에는 회심하기 전부터 이러한 부름을 느끼곤 했다. 소년 시절에 때때로, 특히 18∼19세 때 그러한 전조를 느꼈다.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난 후에 이 하나님의 부름에 대한 인식은 훨씬 강렬하게 다가왔다. 1925년이 시작되면서 그는 매우 극심한 투쟁을 하게 된다. "의학계에 종사한 마지막 18개월 동안 투쟁은 지속되었습니다. 나는 문자 그대로 20파운드나 체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의 전기 한 장을 읽어보면 몇 가지 요인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부름을 받아들이는 데 그가 주저했던 요인 중 하나는 이 세상에 대한 매력 때문이었다. 이 세상의 끌어당김을 의학계에서 가장 예민하게 느꼈다. 스물여섯 살의 젊은 사람에게 그보다 더이상 약속된 미래는 없었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하여 호오더 경은 의도하지 않게 그를 도와주었다. 소위 정상급사람들이 참석하는 의료인 만찬에 때때로 그를 데리고 갔기 때문이다. "그들의 쑥덕거림과 비양거림과 질투의 말들을 듣곤 했습니다. 그것은 나를 못견디게 했습니다." 그래서 의료계에서 정상인이 되고자 했던 그의 야망은 그 모든 매력을 상실했다. 동시에 그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느꼈다. 그의 상사인 호오더 경의 진료 기록이나 자신의 진찰실로부터 그는 많은 사람들이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은 일상적인 의약품이 아니고 자신을 위해서 발견했던 복음이라는 것을 인식했다. 그들의 참된 문제는 의학적이나 지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 공허감과 영적 공백감이었다. 그것은 동료 인생에 대한 그의 관심을 고조시켰다. 그의 말을 빌면 "나는 사람의 신체적 질병보다 사람 자체에 대해서 궁극적으로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대부분의 내 환자들이 신체 적인 질병 때문이 아니라 사람답게 살아가지 못하는 문제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부각되어져 왔습니다." 약 40년간의 목회를 한 후에도 계속해서 그는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에게 이와같이 도전을 할 수 있었다. "왜 내가 이 일을 하기를 원합니까? 왜 내가 이 일에 대해서 관심을 가집니까? 만약 타인에 대한 진정한 관심, 그들의 상태와 형편에 대한 관심, 그들을 돕고 싶은 욕망을 발견치 못한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동기를 의심해보아야 마땅합니다." 그가 목회자가 되는 데 있어서 마지막 장애물은 하나님 앞에서 그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느낌이었다. 그는 이 생각을 떨쳐버림으로 극복한 것이 아니라 그의 무가치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셨다는 확신으로 극복했다." "누구든지 자기야말로 목사가 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두려움과 떨림없이 강단에 올라설 수 있는 사람은 '설교자로 부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폭로해주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 진리를 그의 생애마지막까지 선포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인이 아닙니다. 그는 소위 사랑의 압제 아래 있는 자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나를 강권하는도다"라고 말하는 자입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나에게 화가 있도다!" 그는 예수그리스도의 노예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랑의 노예입니다. "
그는 그것을 경험했고 믿었기 때문에 설교했다. 80세가 된 후에도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다른 일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입니다 ." 1926년 6월, 목사로서의 소명에 대한 투쟁은 끝났다. 즉시 그는 그의 장래를 담임목사와 의논했다. 칼빈주의적 감리교에 속한 런던노회가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중에 아베라본의 베들레헴 전진운동 교회로부터 청빙이 왔다. 12월 22일 마침내 로이드 존스는 그 교회가 속한 서부 클라모건노회에 공식적인 수락서를 보냄으로써 아베라본의 사역자가 되기로 결단했다. 그의 내적 부름은 교회에 의해서 확인되었다." 그리하여 세기적 설교자 로이드 존스의 목회가 시작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