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총무원 소임 맡으면서도 일요일 어린이법회 직접 진행 합주부 합창단 밴드 등 인기 ,학부모 모임 청량다회도 결성 1984년 청량사 주지로 부임, 마을주민들과 함께 불사 완성 찾아가는 마을회관 법회 진행, 세상에 기여하는 불교 만들고자 2001년 청량사 산사음악회 시작 1만 관중 모이는 지역 최고 축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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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현 스님은 … 1971년 법종 스님을 은사로 범어사에서 출가했다. 조계종 사회복지재단 이사, 문화사업단장과 총무부장, 12대~15대 중앙종회의원을 역임했으며 2000년 조계종 포교대상 대상을 수상했다. 좋은벗 풍경소리 총재, 이웃을 돕는 사람들 대표이사, 경불련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현재 조계종 총본산 성역화사업 총 도감을 맡고 있다.사진=박재완 기자 wanihollo@hyunb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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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오는 일요일 오전 어린이법회를 준비하는 주지스님은 산 아래를 내려다본다. ‘아이들이 과연 눈길을 걸어 올 수는 있을까? 오늘은 안 되겠지? 그냥 혼자서 법당을 지켜야 할 거야’ 스님은 마음을 내려놓는다. 그렇게 스님이 발길을 돌리려고 할 즈음 산길을 걸어올라 오고 있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온다. 내를 건너고 산길을 타고 1시간 거리의 눈길을 헤치고 어린이법회에 온 아이들은 어느새 성큼 스님 앞에 다가와 안기며 반가움을 표한다. 스님은 눈길을 헤치고 여기까지 온 아이들의 정성에 감동해 눈물이 날 지경이다.
청량사 주지 지현 스님의 이야기다. 스님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연신 미소를 머금는다. 조계종총무원 총무부장과 한국불교문화사업단장 소임을 맡으면서도 매주 한번도 빠지지 않고 어린이 법회를 위해 청량사로 향할 만큼 어린이법회에 대한 애정은 남달랐다. 성인이 올라가기에도 가파른 산길의 경북 봉화 청량사에 50여 명의 어린이들이 찾아와 북적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어린이 포교가 곧 불교의 미래라고 말하는 지현 스님의 큰 원력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논산 관촉사, 영화사 등의 어린이법회를 맡던 중 1984년 청량사 주지로 부임해 주민들과 함께 이룬 불사의 기적에서 시작해 스님은 불교계 산사음악회의 포문을 연 장본인이며 어린이법회를 통해 지역사찰 포교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었다.
산골 절에 어린이들이 북적
청량사 어린이 법회에 참여하는 대부분이 안동 영주에서 모인 아이들이다. 먼 길이지만 아이들은 일요일 법회만 기다릴 정도로 청량사에 오는 날이 신난다. “안동에 있는 아이들이 버스를 타고 여기까지 법회를 오려면 아침 8시 30분 차를 타야해요. 1시간 버스를 타고 내를 건너고 산을 타는 시간이 또 1시간이에요. 그런데도 아이들이 절에 오는 것을 너무 즐거워해요.”
그렇다면 청량사 어린이법회에 가장 큰 매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법문은 짧게 하고 어린이 합창단 합주부 등 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취미거리는 물론 스님과 함께 고무줄 놀이 공기놀이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스님이 고민까지 들어주며 상담해주니 아이들은 절에 오는 일이 신나지 않을 수 없다.
“아이들이 법문을 길게 하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 3분 내지 5분만에 법문을 마치려고 노력해요. 그리고 아이들이 좋아할 수 있는 놀이거리를 제공해주니 모두 즐거워하죠. 또 아이들의 이름을 빨리 외워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죠. 신상카드도 기록해 처음 절에 올 때 입었던 옷이며 얼굴 표정도 기록해요. 그리고 아이들이 몇 달 후에 어떻게 달라졌는지 비교해보죠. 처음에 얼굴이 어두웠던 아이들도 법회에 나오면서 많이 밝아지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경우를 많이 봐요. 결국 어린이법회는 아이들의 마음을 잘 읽고 그들의 눈높이를 맞춰주는 동시에 그들과 함께 하겠다는 의지를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님이 어린이법회를 청량사 안에서 활성화시킨 것은 불과 3년 전이다. 그전까지 영주의 불교회관으로 스님이 직접 찾아가 어린이법회를 열었다. 하지만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사찰내 일요어린이 법회를 만들었는데 의외로 인근 주변의 아이들이 오기 시작했고 친구들까지 데려오면서 일요일 어린이법회는 청량사 최고의 인기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절에 아이들이 오기 시작하니 학부모들도 아이들 따라 절에 오기 시작했고 그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필요했다. 이에 스님은 학부모들을 위해서 청량다회를 만들어 아이들이 법회를 보는 동안 학부모들은 교양수업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되니 대부분의 농촌지역 사찰이 노보살님으로 가득찬 것과는 비교되게 청량사의 일요일은 활기가 넘친다. 이런 분위기에 발맞추어 최근에는 밴드까지 결성되면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지난해 11월 학부모들로 이루어진 성인 7인조 밴드 둥근소리와 어린이 4인조 밴드 꼬마풍경을 창단해 안동 청소년문화센터에서 첫 데뷔무대를 선보인 바 있다.
스님은 결국 어린이포교는 20년 후를 내다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20여년 전부터 영주의 불교회관에서 출장 법회를 시작했어요. 절이 산에 있어 아이들이 오기 힘들겠다 싶어 영주까지 어린이 법회를 보러 다녔죠. 그때 애들이 지금은 장년이 되어 대학 졸업하고 결혼도 하면서 현재는 우리 어린이법회 후원자가 됐어요. 장학금도 주고 나들이 비용도 챙겨주는 등 열심이죠. 어린이법회를 나온 아이들이 자라서 대학에 가고 성인이 되어 취업해 불전함에 보시하기까지는 20년이 걸린다고 보면 돼요. 시간이 걸리지만 그 아이들이 불교발전에 이바지하고 미래의 불교를 이끌어 가는 밑거름이 되는 거죠. 결국 어린이 포교는 우리 불교의 미래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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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현 스님은 어린이 포교가 불교의 미래라고 강조한다. 1994년 영주불교회관 어린이 법회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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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과 함께 이룬 청량사 중건
스님은 1984년 청량사 주지로 부임했다. 조선시대 청량사는 정선 겸재의 그림에도 등장할 만큼 경관이 수려한 유서 깊은 절이었다. 하지만 스님이 부임할 즈음 청량사는 초라했다. 비가 새는 법당에 슬라브 지붕 덮인 요사체가 전부였다. 스님은 험난한 산길을 이불 한 채, 쌀 한 말을 지고 올라갔다.
하지만 어떻게 불사를 해야할지 또 신도들에게 포교를 해야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일단 스님은 마을로 내려가 고추도 함께 따고 풀베기도 거들었다. 또 어떤날은 아이들을 경운기로 실어와 함께 놀고 해지면 데려다 주기도 했다. 마을로 내려가 마을회관에서 출장 법회를 열기도 했다. 스무 명이 산으로 올라오는 것보다 스님 혼자 내려가면 좋을 거라는 생각에서 스님은 정기법회 때마다 마을로 내려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신도들이 농사일 마치고 저녁 먹고 씻고 나오면 밤 9시였다. 스님이 법회를 마치고 2시간 거리를 걸어서 절에 들어가면 밤 12시가 넘었다.
이렇게 스님은 마을주민들과 함께하며 포교에 전력을 기울였지만 산 중턱에 있는 절의 불사는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이런 스님의 마음을 움직인 이는 다름아닌 다리가 불편했던 노보살이었다. 그녀는 너무 절에 오고 싶었던 나머지 손자의 등에 업혀서 10년만에 절에 온 것이다. 절에 오자마자 2시간 염불을 하며 법당에 앉아 기도를 하더니 고쟁이 속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지폐를 꺼내기 시작했다. 자식들이 준 용돈을 모아 넣어두었던 것을 한 장 한 장 꺼내니 모두가 13만원이었다. 스님은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10억보다 더 큰 돈이었어요. 얼마나 절에 오고 싶었으면 그 돈을 그렇게 꼬깃꼬깃 모아 놓았을까 너무 감동을 했죠. 그 길로 사두었던 목재와 기와를 산으로 올리는 일부터 시작했죠.”
그간 불사를 해야겠다는 마음에 산 아래서 헌집이 헐리면서 나온 기와와 나무를 사놓았지만 절까지 올릴 수가 없었다. 스님은 노보살의 보시금으로 주민들에게 500원을 줄테니 옮겨달라고 부타했다. 그렇게 오전 오후에 두 번씩 기와와 목재를 나르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마을 주민들이 돈을 받고 불사를 시작했지만 그것이 마을 사업이 되자 주민들 모두가 합심해서 자재들을 나르니 보시가 되어 버렸어요.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공헌을 한 특공대 부대 5명 보살님들이 있어요. 정말 열심히 불사를 도왔죠. 지금은 70, 80대인 보살님들인데 현재 세 분만 남으셨어요. 그분들에게는 얼마전에 수계를 해드렸죠.”
화제의 산사 음악회를 열다
이렇게 불사도 포교도 자리를 잡아갈 무렵 스님은 또다른 사업 하나를 구상하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청량사 산사음악회였다. 2001년 ‘천년의 속삭임-바람이 소리를 만나면’을 시작으로 현재는 지역의 대표적인 문화축제로 자리 잡은 행사가 청량사 산사음악회다. 지금은 산사음악회라는 말이 흔하게 쓰였지만 당시만 해도 절에서 대규모 음악회를 연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이었다. 도심사찰에서도 열기 힘든 음악회인데 봉화 산중턱의 절 청량사에서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 하지만 지현 스님에게는 가능했다.
“그동안 불교가 너무 받기만 했잖아요. 산중불교에서 대중불교로 거듭나기 위해 불교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생각 하다가 산사음악회를 기획하게 되었어요. 대중과 호흡하는 사찰 그리고 산사를 지역의 문화공간으로 만들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었어요. 물론 반대하는 이들이 다수였죠. 하지만 시작을 하니 또 도와주는 이들이 생기더라고요.”
평소 알고 지내던 소리꾼 장사익 씨와 이종만 풍경소리 기획실장 등의 도움을 받아 음악회를 기획했다. ‘청량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만들어 공연 전반에 대한 구성은 이종만 실장에게 도움을 청하고 홍보팀을 꾸려 언론사에 보도자료도 뿌렸다. 이렇게 무대를 펼치니 3000명이 모였다. 첫 해 초대가수는 장사익, 한영애, 안치환이었다.
“정말 반응이 대단했어요. 당시는 처음 있는 일이라 언론에서도 큰 관심을 보였죠. 이후 공연팀 홍보팀 음향팀 등을 만들어 행사를 기획하고 공연이 끝나면 음향 홍보 조명 가수 등 항목을 정해 그해 음악회를 철저히 평가해 다음 공연에 반영을 합니다. 아무리 유명한 가수도 관중들과 호흡하지 못하면 다시는 부르지 않을 만큼 평가는 냉정해요. 매년마다 주제를 정해 새로운 공연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도 청량사 산사음악회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현재는 해마다 1만여명의 인파가 몰리면서 청량사 산사음악회는 지역 최고의 축제가 되었다. 인근 봉성면 축제 때보다 산사음악회 때 주변 음식점이나 숙박업소가 더 성황을 이룬다고 하니 청량사산사음악회는 이제 지역 최고의 축제가 된 것이다. 또한 사찰에서 시작한 행사가 다른 지자체에서도 벤치마킹해가고 있는 것은 물론, 모 대학 교수는 축제 성공 사례의 예로 청량사 산사음악회를 논문에 실을 만큼 지역축제의 새로운 모델이 되었다. “저희 축제에 오신 분이 청량사가 아름답다고만 생각하고 가도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큰 것을 얻었다고 생각을 해요. 대중들에게 늘 새로운 기쁨을 전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청량사 음악회 또한 대중들의 요구를 충실히 반영한 결과이며 불교 포교를 위한 또다른 방편이라고 스님은 말한다. “불교의 이미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3~40년전에는 촛불 하나 들고 마을을 돌아다녀도 축제가 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사람들의 수준이 많이 높아졌죠. 불교도 이런 시대적 흐름에 발맞추어 변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시도가 필요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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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시작된 청량사 산사음악회는 매년 1만여 명이 참여하는 지역 최대의 축제다. 사진 은 산사음악회 전경. 오른쪽은 음악회 준비중인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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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조계종 총본산 성역화사업 총 도감을 맡아 1주일에 한번씩 서울의 조계종총무원으로 출근을 하고 있는 지현 스님. 이렇게 종단의 소임을 맡고 있는 가운데에도 스님은 늘 새로운 포교를 구상한다. 대중의 고통과 번뇌를 해결해주는 것이 불교의 가장 큰 역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스님은 우리 불교가 앞으로 10년 후를 내다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10년 후에 불교의 모습을 물으면 답이 없습니다. 불교가 사회흐름에 뒤쳐지고 토속신앙으로 전락했기 때문이죠. 우리는 현재 10년 20년 30년 후의 모습을 고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절에 특히 농촌 사찰에는 올 신도가 없어요. 앞으로 사찰 중심의 농촌살리기 운동을 연구해보고자 합니다.”
이처럼 스님은 늘 세상에서 불교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고민한다. 그리고 스님은 연구한다. 대중들의 고민을 또 어려움을 어떻게 해결해주어야 할지를 말이다. 그래서 스님은 산골 오지 마을에서도 대중들과 호흡할 수 있는 새로운 포교를 통해 대중들 속에 함께 숨 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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