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安重根義士 | 안중근 | 安重根 | 참판공파 | 30세 | 重根중근己卯生一九○九年己酉十月二十六日(陽) | ||
父 | 泰勳태훈 | 叅判公派 | 朝鮮侵略元兇伊藤博文哈爾賓射殺倭憲兵遠捕旅順監獄苦조선침략원흉이등박문합이빈사살왜헌병원포려순감옥고 | ||||
一九一○年庚戌三月二十六日絞首刑一九六一年辛丑三月一日建國功勞大韓民國章退敍 | |||||||
配安陵金氏父鴻燮夫沒廬墓三年仍居兆下3805 | |||||||
8 | 瑗원 | ||||||
장남(長男) | 차남(次男) | 5남(五男) | 3남(三男) | 4남(四男) | 6남(六男) | ||
9 | 從約종약 | 從禮종례 | 從信종신 | 從義종의 | 從廉종렴 | 從儉종검 | |
判書公(판서공) | 監察公(감찰공) | 叅判公(참판공) | 僉樞公(첨추공) | 都正公(도정공) | 叅議公(참의공) | ||
10 | 進진 | ||||||
11 | 掄륜 | ||||||
12 | 世良세량 | ||||||
13 | 懿의 | 慮려 | 孟孫맹손 | 仲孫중손 | 季孫계손 | ||
14 | 純福순복 | 永源영원 | 永根영근 | ||||
15 | 孝信효신 | ||||||
16 | 淑覲숙근 | ||||||
17 | 瑠류 | ||||||
18 | 得春득춘 | 三春삼춘 | |||||
19 | 義吉의길 | ||||||
20 | 信貞신정 | ||||||
21 | 震望진망 | ||||||
22 | 益暹익섬 | ||||||
23 | 聖大성대 | 聖宅성택 | |||||
24 | 光得광득 | ||||||
25 | 起玉기옥 | 潤玉윤옥 | |||||
26 | 知豊지풍 | ||||||
27 | 定祿정록 | 良祿양록 | |||||
28 | 仁壽인수 | ||||||
29 | 泰鎭태진 | 泰鉉태현 | 泰勳태훈 | 泰建태건 | 泰敏태민 | 泰純태순 | |
30 | 重根중근 | 定根정근 | 恭根공근 | ||||
安重根義士 |
안중근(安重根)
안중근(安重根) 순흥인 참판공파
義 士 탄 생
의사는 1879년 7월 16일(양력 9월 2일)에 황해도 해주 동부동에서
순흥안씨 28世인 진해현감 안인수의 손자로 태어났다.
29世 성균관 진사 안태훈의 세아들 중 장남으로 참판공파의 후손이다.
등에 북두칠성과 같은 점 일곱개가 있어 이름을 應七이라 불렀다.
응칠은 字이고(경신보 7권 54쪽) 譜名은 중근이다.
어 린 시 절
의사께서 여섯살 때,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봉산 밑 청계동이란 곳으로 이사를 간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즐기고 또 7살때부터 말타기 와 활쏘기에도 천부적이었다.
승마와 사냥, 사격술 및 무술을 연마하고 한학을 공부하였다.
학 문 연 구
근엄한 부친의 교육방침에 따라 사서삼경은 無不通知이고 한역 만국사와 조선사 등으로 역사를 연구했다.
김홍섭공의 따님 亞羅와 결혼 한 후 서구문물을 배우고져 천주교에 입문한다.
프랑스 신부 윌헤름에게 불란서 언어와 신학문을 배우며 인격수양 과 지식을 배양하게 된다.
항일운동의 첫걸음
1905년, 의사가 27세되던 해 치욕적인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는 비보를 접하고 중국 상해로 건너가 구국항일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일본의 불법 무도한 만행을 세계만방에 알리고 일제의 침략 근성을 목숨을 바쳐서라도 응징하겠다는 각오와 실천의 첫 발이다.
학교 설립
식민통치 일본을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하려면 무지하고 몽매한 국민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하고
남포에 돈의학교와 삼흥학교를 설립한다.(1907년).
학교설립때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몽땅 처분하여 쏟아 부었다.
구국의 애국자를 양성하고 독립투쟁에 헌신할 인재를 발굴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대한의병 참모중장
끓어오르는 애국심과 일본에 대한 증오심으로 더 이상 국내에서 교육사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1908년 의사는 만주를 거쳐 러시아의 불라디보스톡으로 또 다시 망명했다.
대한의병 참모중장, 特派獨立大將및 아령지구 군사령관으로 수 많은 의병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경흥,
회령지방까지 진격하여 일본군을 섬멸하고 본진으로 귀환했다.
단 지 동 맹
31세때 러시아의 카리에서 대한독립을 쟁취하는데 목숨걸기로 맹세한 11명의 동지들과 결사동지회를 결성했다.
이 때 손가락을 잘라 태극기에 대한독립이란 네 글자를 혈서하였다.
의사께서 남긴 친필 유묵을 살펴보면 掌決(손바닥 싸인)에도 의사의 무명지는 그 때 혈서하기 위해서 손가락을 잘랐음이 선명하게 보인다.
이것을 단지동맹이라 한다. 동맹회원 (강두찬, 김기용, 김백춘, 김춘화, 김태훈, 박봉석, 백락금, 엄인섭, 유치자, 황길병)
일본 추밀원 의장 이등박문 암살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 받음
안중근(安重根)
정의(正義)를 위한 쾌남아(快男兒)
그는 1879년에 황해도 해주 동문 밖에서 출생하였는데 나이 열두살이던 1890년에
부친 태훈(泰勳) 또는 진해(鎭海)와 같이 신천군 두라면(信川郡 斗羅面)에 이주하여 그의 일가인 숙부 태현(泰賢). 태건(泰健). 태민(泰敏)과 함께 한 동리에서 살았다.
원래 안중근의 조부 안인수(安仁壽)는 진해군수를 지냈으며 또 부친도 진사의 벼슬을 하였으나 일체 관직에는 봉직하지 않았다.
그런데 안중근의 나이 16세 되던 1894년에 전라도에서 학정의 쇄신을 부르짖는 동학농민의 의거가 발생하여 탐관오리를 살육하고
관아의 군고(軍庫) 및 양반부호의 집들을 파괴하여 외세의 배격을 부르짖자 잠시 동안에 그 세력은 전라도는 물론 경상도,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에 까지 파급되었다.
또한 그 여세가 북으로 번져 황해도 신천에까지 이르게 됨에 지방에서 수천석의 부호로 지내던 안중근의 부친은 자기 토지의 소작인을 중심으로
천여명의 동학진무군(東學鎭撫軍)을 편성하여 험준한 청계동 일대에 진을치고 난의 평정에 나서서 관군에 가담 협조함으로써 많은 토지와 재산을 지켰다.
이때 소년 안중근은 부친을 따라서 다년간 단련된 그의 용맹성과 놀라운 총술로 동학군을 해산하게 하여 인근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리하여 간악한 일본의 정치적 침략행동에 대해서 수시로 듣고 그 때마다 소년 안중근은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고
의협심이 남달리 강하여 불의에 대하여는 추호의 관용도 베풀지 않았다.
안중근의 생애는 한말의 주체적 역량의 부족으로 국정이 극도로 혼란해져 국운을 겨우 부지하고 있던 시기로부터 시작되어
1910년의 실국(失國)의 비극을 보게 된 것과 함께 그치고 말았던 것이다.
1875년 9월 운양호(雲揚號)사건이라는 교묘한 사건을 만들어 이것을 구실로 일찍부터 집요하게 침략근성을 내포한 수교를 요구하여 오던 일본은
그 다음해(1876) 2월에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이래 꾸준히 잠식적으로 침략과 약탈을 계속하여 오다가 동학란으로 인하여
1894년 7월에 청일전쟁이 일어나 일본이 승리하자 그들은 전면적으로 한국 침식의 준비를 갖추었었다.
그리하여 8월 20일에 일본공사 <오오도리. 大鳥圭介>와 외부 대신 김윤식(金允植) 사이에 잠정합동조관(暫定合同條款) 7개조가 조인되었는데,
이것은 일본의 단순한 상품시장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정치적, 군사적 지배의 야망이었던 것이다.
구국전선(救國戰線)의 선두(先頭)에 나서서
안중근은 26세 되던 해에 집안이 평남 삼화군 진남포(三和郡 鎭南浦)로 이사하게 되자 가까운 평양으로부터 전해지는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보와
샌프란시스코의 공립신보 및 블라디보스톡의 대동공보 등에 의하여 정치사상을 함양하였으며 또 평양에 가서 항일지사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크게 고무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한탄하고 외세의 터전이 된 비극의 풍토에서 일제를 비롯한 침략세력에 대항하기로 결심하고 주먹을 불끈 쥐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은 그동안에도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1905년 11월 10일에는 침략의 원흉 <이토오>가 다시 특파대사로 파견되어 제2차 한일협약(을사보호조약)의 조인을 강요하였다.
그리하여 일본 군대의 삼엄한 경계와 포위 속에 덕수궁에서 어전회의가 개최되고 국중내부의 친일주구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을 주동으로 하는
을사오적(乙巳五賊)의 기묘한 협조로 그 달 17일에 조인을 하게 되니 이로써 우리나라는 외교권마저 박탈당하고 그 대신 일제의 통치기관이 자리를 잡게 됨으로써,
나라의 주권은 완전히 상실되고 만 것이다.
따라서 이때에 이미 우리나라는 실질적으로 멸망된 것이며 그 후 1910년에 체결된 합병조약은 다만 형식적인 의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침략(侵略)의 원흉(元兇)을 쓰러뜨리고
1909년 10월 26일, 이 날은 소위 일본 제국의 추밀원 의장이며 공작인 <이토오>가 일찍이 한국에서 발휘하던 그의 솜씨를 구사하여
노일간의 여러 문제와 만몽(滿蒙)의 이권을 담판하여 청국침략의 길을 공고히 하려는 속셈으로 하르빈에 이르러 노국 대장대신(大藏大臣) <코코프체프>와 회견하는 날이다.
<이토오>가 통과하는 동청철도(東淸鐵道)의 각 역은 삼엄한 경계에 휩싸였고 더구나 하르빈의 경비상태는 철통 같았다.
이날의 환영 준비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장관이어서 수천의 러시아 군대와 의장대, 외국사절단 및 일본 거류민단의 도열과 장중한 국악과 경축화포의 터지는 소리는 정신을 못차릴 정도였다.
그러나 잠시 후에는 이 환영식의 환희가 <이토오>의 장례식이 되고 경쾌하던 음률이 장송곡으로 변할 줄은 안중근과 우덕순, 조도선 외에는 지구상에 아무도 이를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드디어 9시 10분 <이토오>를 태운 러시아 철도국의 총독 특별 열차가 플래트홈에 미끌어져 들어와 가벼운 반동과 함께 멈추자 채가구(蔡家溝)를 무사히 지나
<이토오>의 운명은 이제 불가피 안중근 자신의 손으로 결정짓게 되었다.
<이토오>는 기차가 정거해도 차에서 내리지 않고 <코코프체프>와 차안에서 약 25분간 회담한 후 그와 나란히 러시아 북경 주차공사(駐箚公使) <코로스도에프>,
일본총영사 <가와카미.用上俊彦>. 만철이사<다나카.田中淸次郞>,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森泰二郞> 등에 호위되어 만족한 표정으로 차에서 내렸다.
그는 의장대 앞을 지나 각국 영사관 직원들이 도열한 앞으로 가서 의례적인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러시아 장교단의 앞으로 서서히 발을 옮겼다.
이때 장교단의 뒤에서 초조히 기회를 엿보고 있던 안중근은 전광석화와 같이 뛰어 나가서 브라우닝 권총을 발사하여 3발을 <이토오>에게 명중시켰다.
이리하여 일본제국주의의 원로, 백발의 정객은 욕심 많은 흉계를 가슴에 간직한 채 <다 틀렸다(시맛다)>라는 한 마디를 최후로
차가운 바람이 부는 이역만리 하르빈역에서 힘없이 거꾸러졌다.
계속하여 <가와카미>총영사와 <다나카> 만철이사, <모리>비서관이 총탄에 맞아 쓰러지니 환영장은 일순에 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 간신히 정신을 차린 러시아 병정이 안중근에게 달려들어 붙잡으니 그는 순순히 권총을 내어주고 <코리아 후라. 大韓萬歲>를 3창하면서 포박당하였다.
이때의 안중근의 눈에서는 눈물이 어리었으니 그것은 기쁨에 넘친 환희의 눈물이었다.
이윽고 한민족의 원수 <이토오>는 불의(不義)의 피를 흘리다가 약 25분후 완전히 지옥으로 사라진 것이다.
안중근(安重根)
11世 祖 안휘(安犧) 여기에서 참고로 부기(附記)할 것은 이 할아버님의 아우이신 서령공(署令公 = 諱 ?)의 19대손이 바로 안중근(安重根) 의사(義士)이시다.
안의사는 이조말(李朝末) 한국침략(韓國侵略)의 원흉(元兇)인 일본통감(日本統監)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사살(射殺)하여 동양평화(東洋平和)의 교란자(攪亂者),
야만(野蠻) 일본(日本)을 규탄응징(糾彈膺懲)하므로써 조국수호(祖國守護)와 동양평화(東洋平和)에 거대(巨大)한 공훈(功勳)을 떨치셨다.
안의사는 1910년 3월26일 여순감옥(旅順監獄)에서 향년(享年) 32세에 조용히 순국(殉國)하셨다. 슬하에 준생(俊生), 현생(賢生) 남매를 두었으며
손자(孫子) 웅호(雄浩)가 있는데 미국(美國)에 거주(居住)한다.
그리고 현재(現在) 우리 순흥안씨 종친회장이며 대한민국(大韓民國) 독립(獨立)기념관장인 안춘생(安椿生)씨가 바로 안의사의 당질(堂姪)이시다.
안중근(安重根) 의사(義士) 계보(系譜)=시조(始祖) 安子美*中略*4世 文成公 珦*中略*9世 ?
參判公 從信(派祖)* 中略*28世 祖 仁奎(一名仁洙)=鎭海縣監,
29世 父 泰勳=成均進士, 30世 重根=安義士,
31世 子 俊生, 32世 孫 雄浩=在美博士 (直系)
註:4世 文成公(諱 珦)의 26代孫, 9世 參判公(諱 從信)의 21代孫임.
1. 안중근安重根)
1급: 대한민국장
강우규(姜宇奎) 김구(金九) 김규식(金奎植) 김좌진(金佐鎭) 김창숙(金昌淑)
민영환(閔泳煥) 서재필(徐載弼) 손문(孫文)(중국인)
손병희(孫秉熙) 송미령(宋美齡)(중국여인)////
안중근安重根) 안창호(安昌浩) 오동진(吳東振) 윤봉길(尹奉吉) 이강년(李康秊) 이승만(李承晩)
이승훈(李昇薰) 이시영(李始榮) 이준(李儁) 임병직(林炳稷)////
장개석(蔣介石)*중국인 조만식(曺晩植) 조병세(趙秉世) 조소앙(趙素昻) 진과부(陳果夫)*중국인
진기미(陳其美)*중국인 최익현(崔益鉉) 한용운(韓龍雲) 허위(許蔿)
====================계=29명
2. [벌열(閥閱)]
●절의(節義): 안중근(安重根) 한말구국운동(韓末救國運動) 및 순절제인(殉節諸人)
안중근(安重根)의 친인척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유력한 인물이 등장하게 되면 그와 관련된 친인척의 존재가 함께 부각되기도 한다.
유럽의 교회사에서는 역대 교황 중에 친인척 관리를 잘못하여 지탄을 받는 인물도 나타난 바 있었다.
살아있는 권력자가 친인척에게 권력을 나누어 주는 일은 혈연을 중시하던 전근대 사회의 한 유물로 평가된다.
그러나 친인척 관리는 오늘날에 있어서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닌 듯하다.
오늘의 우리까지도 친인척 관리를 잘못하여 곤욕을 치룬 인물들과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이들과는 달리 안중근은 죽어서도 친인척 관리에 남다른 역할을 발휘하고 있었다.
‘애국선열’이며 ‘신앙인’이었던 안중근의 모범은 그의 친인척을 채근하여 민족 독립을 위한 바른 길로 내닫게 했다.
안명근(安明根)의 독립운동
안중근의 친인척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 할아버지 대까지는 소급해 올라가야 한다.
안중근의 조부는 아들 여섯 명을 낳았다. 이 가운데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그 세 번째 아들이었다.
남자 형제가 많은 만큼 안태훈은 매우 번성한 집안 출신이었다. 안중근에게 두 명의 백부와 세 명의 숙부가 있었다.
그리고 근자(根字) 항렬의 4촌 형제들이 열한 명이었고, 이들이 소생인 생자(生字) 항렬의 6촌 조카들이 적어도 스물 두 명은 되었다.
안중근의 친인척 가운데 독립운동을 위해 노력했던 주요한 인물로는 안명근(安明根, 1879-1927)을 들 수 있다.
그는 안중근의 중부(仲父)인 안태현의 맏아들이었다. 안명근은 1910년 말에 발생한 ‘안악사건’ 혹은 ‘안명근 강도사건’의 주모자로 등장하고 있다.
안악사건은 독립군 기지 건설을 위해 황해도 일대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금하던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안명근은 이 사건으로 인해서 체포되어 1911년 7월 22일 강도급강도미수죄(强盜及强盜未遂罪)로 종신징역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그가 체포되던 과정에서는 당시 서울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가 개입되어 있었다.
뮈텔 주교는 황해도 신천 청계동에서 선교하던 빌렘 신부를 통해서 안명근이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식민지 조선의 치안을 책임지고 있던 사람은 조선총독부의 정무총감이었던 아카시 장군이었다.
아카시는 일찍이 파리주재 일본공사관의 무관으로 근무한 바 있었고, 아마도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듯하다.
그는 프랑스인 선교사 뮈텔 주교와 가깝게 지냈다. 거기에는 물론 조선에 나와 있는 선교사들을 회유하려던 식민당국의 복선이 깔려 있었다.
그런데 뮈텔은 안명근이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카시에게 직접 찾아가 알려주었다.
물론 뮈텔의 제보가 있기 전에 총독부 헌병경찰에서도 이미 이 사건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뮈텔의 행동에 대해 총독부에서는 특별한 감사를 표시했다.
뮈텔(Mutel 민덕효) 주교
뮈텔 주교의 이와 같은 행동은 안중근 사건으로 인해서 조선천주교회가 일본 식민지 당국자들에게 실추당한 체면을 회복해야 한다는
교회행정가의 입장에서 내린 판단의 결과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서 안명근의 체포는 당겨졌고,
안명근의 독립운동 사건은 이른바 ‘데라우찌 총독 암살미수사건’ 혹은 ‘105인 사건’으로 확대 조작되어 많은 애국지사들이 죽음과 고통을 강요당했다.
그런데 오늘날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일부 인사들은 이 사건을 가지고 뮈텔 주교가 고해비밀을 누설하여 안명근을 고발했고,
총독부로부터 고발의 반대급부를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해비밀 누설이라는 주장은 결코 사실이 아니며,
이는 고해비밀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의 잘못된 주장일 뿐이다. 물론 뮈텔 주교는 안명근의 형(刑)이 확정된 다음 그의 석방을 위해서도 노력한 바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사건과 관련해서 나타난 뮈텔 주교의 단견은 한국교회사의 어두운 부분으로 두고두고 기억될 것이다.
안명근은 1926년 가출옥으로 석방되어 신천 청계동에서 천주교 관계의 일을 거들다가 나중에 만주 길림성 의란현 팔호력(八虎力) 원가둔(袁家屯)으로 이주했다.
그는 이곳에서도 천주교 전교에 종사했다. 그러던 중 어떤 신자의 종부성사에 배석하고 나서, 이질에 이환되어 일주일 동안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안명근 사건의 생존인사들과 함께] 백범은 환국후 안명근사건에 연루되어 심한 고초를 겪었던 옛동지들과 함께 서대문감옥을 방문했다.
백범 왼쪽의 김홍량은 도산과 함께 신민회 주도인물 중의 하나로 백범이 양기탁 주도의 비밀회의에 참석,
황해도 대표를 맡아 신민회 무장투쟁 자금 15만원 모금에 나서자 선뜻 토지와 가산을 내놓은 바 있다.
사진 앞줄 왼쪽부터 김홍량, 백범, 도인권, 둘째줄 왼쪽부터 감익용, 최익형, 한사람 건너 우덕순(1946년 1 월23일 서대문감옥에서)
그 밖의 친인척들
안중근에게 마지막 성사를 집전하기 위해 주교의 명령을 어기고 여순 감옥에 갔던 빌렘 신부는 그 후 동료 선교사들에게 왕따를 당했고,
결국은 조선선교지에서 쫓겨나 프랑스로 추방되었다. 이때 그는 안중근의 사촌인 안봉근(安奉根)의 독일유학을 주선해서 함께 동행하여 조선을 떠났다.
그후 안봉근은 베를린에서 거주하다가 나치스에게 추방되어 이탈리아로 갔다. 이는 안중근의 친인척 중 일부가 이탈리아와 인연을 맺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30년대 초 상해에는 안중근의 사촌인 안경근(安敬根)이 있었다. 그는 안중근의 숙부인 안태민(安泰敏)의 맏아들이었다.
안경근은 1918년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항일운동을 전개한 바 있고, 1925년에는 중국 운남군관학교 졸업하고 나서,
만주에 세워진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에서 활동했다. 그러다가 1930년 상해로 와서 백범 김구를 보좌하며 항일 운동을 계속했고,
독립운동가인 이회영(李會榮)의 밀고자를 수색하던 작업에도 참여하고 있었다. 그는 “자상하고, 재치 있고 인정이 넘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도 자신의 사촌형 안중근처럼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운동의 선봉에 서 있었다.
한편, 해방 이후에도 안중근의 가문과 연결되는 인물들에 관한 기록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 예로써 우선 안악인 최익형(崔益馨)을 들 수 있다.
그의 아내는 안명근의 누이였던 안익근(安益根)이었다. 그는 처남인 안홍근(安洪根)과 함께 해방 이후 옹진으로 이사하여
옹진중학 서무주임을 하면서 적산 과수원 1만여 평을 매입하여 이를 함께 경작했다. 이들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미처 후퇴하지 못했던
국군 5인을 자신의 과수원에 숨겨주었다가 1950년 10월에 발각되어 공산군에 체포되었다. 이들은 그해 10월 15일 경 후퇴하던 공산군에게 총살당했다.
안홍근의 셋째 아들은 안무생(安武生)이었다. 안무생은 일제말엽 간도지방의 교우촌 가운데 하나였던 해북촌(海北村)에 살던 중 강도에게 피살되었다.
그의 아내 차로길(車路吉, 루시아)은 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라 아예 안로길로 개명할 만큼 안씨 가문의 아내됨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안 루시아는 남편이 죽자 하르빈으로 이주해서 살았다. 중국에 인민정권이 들어선 1949년 이후 안로길(루시아)은 중국천주교 애국회에 참여를 반대하던 김선영 신부와
임복만 신부를 도와 일하다가 이들이 투옥되자 그 옥바라지를 감당해 갔다.
그러다가 자신도 애국회의 미사 거행을 방해한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안로길은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다음에도 내몽고지방으로 끌려가 20년간 ‘노동개조농장’에서 강제노동을 했다.
무의탁 노인이었던 그는 겨우 1999년에 이르러서야 그 농장을 떠나 하르빈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이제 안로길은 90년을 지탱해준 늙은 몸을 누일 방 한 칸을 겨우 마련해서 남편과 시숙 안중근이 기다리는 천국으로의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안중근과 그 일가들이 다녔던 천주교 청계동 본당과 교우
안중근의 친인척에게 있어서 안중근은 평생 우러러야 할 사표(師表)였고, 옳은 길을 걷도록 이끌어 주던 길잡이였다.
훌륭한 인물을 배출한 집안의 사람들은 때로는 그 어른 때문에 자신의 행동거지에 제약을 받게 되는 부담을 감내해야 할 때도 있었을 법하다.
그러나 안중근의 친인척들은 대부분 안중근과의 관계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그의 삶을 본받고자 했다.
안중근의 조카 중 하나로는 현재 서울에서 살고 있는 독립유공자 안춘생(安椿生)도 있다.
그를 비롯하여 안중근의 가계에 속하는 많은 사람들은 북풍한설을 마다하지 않고 민족의 광복을 위해 투신했다.
그들은 신고로운 삶을 살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일제의 추적을 당했다.
민족이 해방된 이후에도 그들은 남한정권의 이승만에게 배척당하거나, 북한의 인민군에게 피살되기도 했다.
이들의 삶은 탄압받고 찢겨져 있던 우리 현대사의 축소판이었다. 그러나 이들을 하나로 엮어 준 것은 안중근이 믿던 천주교 신앙이었고,
안중근이 가지고 있던 민족애였다. 우리에게 안중근과 그 친인척들이 있었음에서 우리나라 근현대사와 교회사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조광/ 이냐시오, 고려대 사학과 교수
입력 2008.7.21. 조광http://cafe.daum.net/cchereandnow가톨릭인터넷언론 지금여기
학계는 일제시대 독립에 뛰어든 안의사 일가는 40여명으로 추산한다.
이중 서훈자는 안의사를 비롯,
안의사의 동생 정근·공근, 사촌 명근·경근, 조카 춘생·봉생·원생·낙생, 안명근의 매제 최익형, 안춘생의 부인 조순옥 등 11명.
오영섭 연세대 연구교수는 “안의사 집안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천주교에 개종한 것도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요인이 된 것 같다”고 밝혔다.
◇해방 후 통일운동으로 이어져=해방 후 귀국한 안의사의 일가는 대부분 김구의 임정조직과 한국독립당에서 활동을 계속했다.
안중근 가계도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음 7월 16일)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 광석동에서 부 안태훈과 모 배천조씨의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가슴과 배에 북두칠성 모양의 7개의 흑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이 감응하였다 하여 아명을 ‘응칠’이라 하였다. 이 아명은 1907년 망명 후에 사용하던 이름이기도 하다. 본관이 순흥으로 고려조 명현 안향의 26대손이 되고, 해주부에서 10여대를 내려오면서 세거한 향반의 자제였다.
조부 안인수는 진해현감을 지냈으며 가산이 유족한 부호로 관후한 성품을 지닌 자선가로 알려졌다. 그는 슬하에 태진, 태현, 태훈, 태건, 태민, 태순의 6남과 딸 셋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셋째 아들 태훈이 안중근의 부친이다.
이들 6형제는 모두 문한(文翰)이 넉넉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안중근의 부친인 태훈은 특히 재주와 학문이 뛰어나 성균진사에 급제하였고, 일찍 개화 사조를 받아들여 개화파 박영효 등의 주도로 일본에 파견하려 했던 70여명의 유학생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이들까지 탄압의 대상이 되자, 태훈은 고향으로 내려와 일가권속 70여 명을 이끌고 세거지 해주를 떠나 신천군 두라면 천봉산 밑의 벽지인 청계동으로 이사, 은거 하였다.
안중근은 어릴 때부터 조부의 사랑을 각별히 받으며 성장하였다. 집안 서당에 초빙된 스승으로부터 사서삼경의 유교경전과 ‘통감’등을 수학하였고, 조선사와 만국역사 등을 두루 섭렵하였다. 안중근은 학문 외에도 활쏘기와 말타기를 즐겨 숙부와 포수꾼을 따라 산을 타고 호연지기를 기르며 단총을 메고 수렵에 나서 사격술을 익혀 발군의 명사수가 되었다.
안중근의 나이 16세 때인 1894년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자 황해도 일대에도 소요가 크게 번졌다. 이 틈을 타 안중근의 고향인 신천지역일대는 동학당을 빙자한 원용일의 난군이 향리를 횡행하면서 외국인을 배척한다는 핑계로 관리를 잡아 죽일 뿐만 아니라 인명을 살상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폭행을 자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관군은 이들의 기세에 눌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패퇴하면서도 외국의 원병이나 기다리는 판이었다. 이 때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은 이 위기를 견디기 어려워 동지들을 단결하게 하고 격문을 돌려 의거를 일으켰다. 포수들을 불러모아 정병을 삼고 처자들까지 행오에 편입시켜 신천의려군을 편성, 이들 난군을 진압하는 의려장이 되었다.
특히 안중근은 어린 나이로 선봉장을 자원, 용전하여 2만을 호칭하는 난군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전투시에 안중근은 붉은 옷을 입고 연전승첩하였으므로 동학소요군이 패퇴하면서 ‘천강홍의장군’(하늘에서 내려온 붉은 옷의 장군’이라고도 하였다. 이 해에 안중근은 이웃 김홍섭의 딸 김아려 규수와 결혼하였고, 슬하에 요절한 분도와 준생 두 아들과 딸 현생을 두었다. 동기로는 정근 공근 등 두 동생과 누이 성녀가 있다.
권씨는 "독립운동가였던 선친(권헌·1980년 사망)께서 생전에 '대가를 바라고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다. 독립운동가 집안이라고 세상 사람들에게 떠들지 마라'고 유언을 남기셨기 때문에 지금까지 할머니의 묘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안 여사의 며느리 오씨는 "시어머니는 안 의사 여동생이라는 이유로 일제의 감시와 갖은 탄압을 받으면서도 독립군을 몰래 도왔다"며 "한번은 9일 동안 감금돼 있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셨다"고 전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