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 함안 방어산등산과 악양을 한바퀴
(2010 06 20)
어제 6월20일 오랜만에 고향바람쐬러 방어산과 악양을
초여름 향수에젖고 산림욕도 겸해서리....
방어산은 경남 진주시와 함안군의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방어산 정상에는 이 산의 유래에 대한 안내문이 있다. 고려 우왕 5년 (1379년) 왜구가 이 산에 올라 진을 치고 있는 것을 상원수 우인열이 박경수, 오언등과 왜구를 공격하여 산을 되찾았다고 한다.
왜구로 부터 나라를 방어하였다는 뜻으로 이 산 이름이 방어산이 되었다고한다. 방어산 중턱에는 마애사란 절이 있고, 절 뒷편으로 한 500m 가파른 길을 올라 가면
1200 년된 마애불(보물159호)이 있는 데, 이 곳은 고통받는 가정을 구제하고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고쳐주며 또 자식이 귀한 집에는 자식을 낳게 해 준다하여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고 한다.
마애사와 마애불을 갈려면, 남해 고속도로 의령,군북 나들목을 나와서 군북 방향으로 달리면가는 길 몫마다 방어산 마애불의 안내 표지판이 보인다.
산행코스
마애사주차장- 마애삼종불-능선갈림길-방어산- 뒤돌아 와서 능선 갈림길-관음사사거리-방어산고개-마애사주차장
와이리도 열도나고 숨질이 가푼지??? 쌀좀빼야겠다는 생각이....
엉컹귀라고하는지? 씀바귀라 하는지 모르지만 여튼 예쁘서 접사로 찰칵...
문화유적을 찾아가는 길 가운데 그 바로 앞까지 길이 나 있어 쉽게 닿을 수 있는 곳이 있는가 하면, 어떤 곳은 산비탈을 한참이나 올라가야만 하는 곳도 있습니다. 방어산 마애불을 찾아가는 길 또한 그다지 녹록지가 않습니다.
방어산 마애불은 해발 530m의 방어산 8부 능선에 있으니, 이곳에 닿으려면 한참을 제법 가파른 산비탈을 올라가야 합니다. 이곳을 찾아간 날, 날씨는 무더워 온몸에 연방 땀이 흐르고, 오르고 올라도 여전히 오르막이 계속되는데
아뿔싸, 이 마애불이 있는 곳으로 오르기 전에 산 아래에 있는 절에서 들은 '조금만 올라가면 된다.'라는 말을 너무 곧이곧대로 이해한 것을 후회하기 시작...
하지만 어쩌겠나? 이때껏 힘들게 올라왔는데, 중도에 포기하긴 너무 억울한 일이죠. 그러니 그곳에 닿을 때까지 계속 올라가는 수밖에 없는 일.... 이렇게 몇십 분 동안 산비탈을 오른 후에야 간신히 방어산 마애불에 닿을 수 있었다. 어쩌다 한번 오르는 데도 이렇게 힘든 데, 이처럼 높은 산 위에 이런 마애불을 새긴 사람은 무슨 마음으로 이런 공을 들였을까 하고 생각하니.....
방어산 마애불은 그 예술성을 떠나 마애불의 편년을 연구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월광보살의 팔꿈치 부분에 이 마애불을 조성한 사람의 이름과 시기, 발원 등을 적은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 명문으로 마애불의
조성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겨져 있는 명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成人?刀秦/貞元十七/年辛巳/三月十六日/鴻巖?/ 成記願旨/▨父▨不▨/▨▨日?/二▨母?叉/一切衆生▨
정원 17년 신사 3월 16일 홍암에 부처를 조성하고 기록한다. 바라건대 … 아버지 … 어머니 … 또 일체중생을 ….
즉, 미도태라는 사람이 정원(貞元) 17년 신사년(辛巳年) 3월 16일, 곧 신라 애장왕 2년(801년)에 큰바위 부처님을 조성하고 이 사실을 기록하고, 부모님과 일체중생을 위해 발원한다는 내용입니다.
방어산 마애불은 함안군의 서쪽인 군북면에서도 가장 서편에 우뚝 솟은 '방어산'에 있습니다.
이 산은 본래는 '개방산', '웅립산'으로 불렀는데, 고려 말 또는 임진왜란 때 정상부에 산성을 쌓고부터는 방어산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산성의 둘레는 500m 정도이며, 지금은 남쪽 일부 성벽만 남아 있을 뿐 곳곳이 허물어져 있다고 합니다.
이 방어산의 8부 능선쯤에 둘레가 커다란 밥공기를 엎어놓은 것 같은 모양의 평평한 절벽에 음각된 마애불이 방어산 마애불입니다.
마애불은 널찍한 바위에 선으로 음각을 한 데다가 오랜 세월이 지난 탓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 모습을 제대로 알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약 5m 높이 절벽의 가장 넓은 아래쪽 폭은 7m 정도가 되고, 마애불이 새겨진 면은 일부러 다듬지는 않아 면이 고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곳곳에 금이 가고 깨어진 부분도 적지 않습니다. 다행히 마애불 앞에는 상당히 넓은 평지가 있어 보는 데는 불편함이 없습니다.
여기에 세 분의 마애불이 새겨져 있습니다. 가운데 새겨진 본존불은 왼손 위에 뚜껑까지 그려진 약합을 들고 서 있는 약사여래불로 높이는 2.85m입니다.
본존불의 좌우에 살짝 마주 보고 서 있는 협시보살은
월광보살과 일광보살입니다. 오른쪽 협시보살은 여성적인 모습의 월광보살이고, 왼쪽의 협시보살은 남성적인 모습의 일광보살입니다.
-무씩한 넘이 웹상에서 이리저리 뒤져보고 훔쳐온글-
마른뼈에 절하신 까닭은(부모은중경 에서)
여기까지가 방어산과 마애사에서
등산을 마치고 약 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오곡 얼음굴을 찾았습니다.
옛 광산으로 길이가 상당히 긴( 그곳에 근무하는 총각 왈 십몇킬로, 이십몇키로)
굴이라 합니다.
보이는 건물 좌측 군북 얼음굴 현수막 아래도
건물속으로 들어가니 시원한 바람이 에어컨처럼 나옵니다.
청송 해월봉 아래 얼음굴도 이렇게 시원하지는 않던데.........
에어콘을 설치해 두었나 갈때마다 신기해요...
여기는 춥워서 아예 한여름 아니면 얼씬도 못해유 ~
동굴 내부모습입니다.
이 동굴은 동굴쪽으로 보았을때 왼쪽 굴이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 나오는 곳은 오른쪽에 있으며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접시꽃당신
이 토종닭 백숙을 40분기다려 푹~삶아 나온것을 둘이서~쇠주는 1/2병만
악양경비행장 2인승 경비행기 착륙연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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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마약 양귀비.....관상용이라 재배 상관 없네요.
06 22저녁 식사하러오신 함안에서 공직 마감한
퇴직하신 모부군수님께
이내용을 보여주었더니 이건 개양귀비로
부군수님이 심혈을 기울어 심었다는군요.
예사로 생각하지마라는군요.
여기가 바로 처녀뱃사공 의 노랫말의
나룻배가 있었던곳으로 추정되는곳입니다.(악양교 위에서 촬영)
좌측 조금보이는 둑방이 소시절에 친구들과 소몰고
참외 수박 써리도하구 밀도 구워 먹어며
놀았던곳입니다.
노래비 위치:
함안군가야읍-법수면 -대산면 북촌리 함안천 악양교를 건너면 30m 전방
우측에 노래비가 보인다.
여타 노래비처럼 스위치를 누르면 음악이 흘러나오는 그런 장치 도 없고
다만 노래비 전면에 가사와 뒷면에 유래와 사연이 있을 뿐 다소 초라한 느낌이다. 20m 전방에 함안천 변에 2층 식당이 있고 이집벽면으로 따라 들어가면 암반이 둘로 갈라진 그 사이로 겨우 들어가면 함안 천과 남강이 합류하는 곳 절벽 아래 악양루가 세워져 있다. 다른 위치에서는 볼 수가 없다.
악양루에서....(최근 약2개월간 7k감량)
제가 앉아있는 악양루는
절벽을 깍아 터를 만들고 세운 듯 한데, 이 정자를 세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들어갔을까 생각해봅니다.
이 정자가 조선 철종 8년(1857)에 세워졌으니, 당시 이 정자를
양반들이 손수 세웠을리는 없고 양반들 땅을 소작하던 농민들이 부역을 하여 세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양반들은 자신들의 논밭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경치 좋은 이 곳에서
농민들의 노동을 감시하기도 하고, 기생을 옆에 끼고 술판을 벌이기도 했겠지요.
물론 흥이 올라 시를 지어 주거니 받거니 하기도 했을테구요...
사진을 찍어서 보니 공포의 뱃살이....그러니 방어산 올라가면서 .....???
저두 이제부터 10K는
뺀다.
처녀 뱃사공 ♪나훈아
1)
낙동강 강 바람이 치마폭을 스치면
군인간 오라버니 소식이 오네
큰 애기 사공 이면 누가 뭐라나
늙으신 부모님을 내가 모시고
에헤야~ 데헤야 ~ 노를 저어라
삿대를 저어라
2))
낙동강 강 바람이 앞가슴을 헤치면
고요한 처녀가슴 물결이 이네
오라비 제대하면 시집 보내마
어머님 그 말씀이 수줍어 질 때
에헤야~ 데헤야 ~ 노를 저어라
삿대를 저어라
바로 발밑에는 진주남강 지류이온데 진주남강댐을 만들면서
수량이줄어 들었어며 수량이 많았을땐 경관이 너무좋았었는데.
앞에 멀리서 흘러오는 강이 낙동강으로
좌측이 함안군 우측이 의령군으로 악양루에서 촬영.
노래비 사연
처녀뱃사공 박말순(23세) 동생 박정숙(18세) 형제인 두 처녀가 군에간 오라버니 박기중씨(6.25때 전사) 를 대신 길손을 건네주며 오라버니를 애절하게 기다리는 사연을 알고 유랑극단 윤부길(윤항기 윤복히 부친) 작사. 한복남 작곡. 황정자 노래로 (세분 모두 고인) 만들어져 크게 히트 되어 그때 그 노래 가 지금도 애절하게 불리고 있다.
2010 06 22
소림사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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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방장님!
너무 멋져요
감상 잘하고 휘리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