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주몽(BC58~BC19, 재위 BC37~BC19)은 B.C. 37년 고구려를 세웠습니다.
천제 해모수와 하백의 딸 유화를 부모로 두고 태어나 부여의 금와왕에게 붙어
살았지만, 주몽은 자신이 천제의 아들임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부여를 떠나 고구려를 세울 때에도, 주변 나라를 하나하나 복속하며 국력을 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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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때에도, 이 자긍심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는 그 후손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고구려는 전성기에 한반도 북부에서 만주 일대를 다스리는 대국으로 컸습니다.
비록 40세의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대국의 주춧돌을 놓은 주몽의 일생은 결코
짧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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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따님을 어머니로 모신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가 무리 짓게 하여라.”고구려의 건국왕, 동명성왕 고주몽에
대해 기록을 남긴 첫 자리가 뜻밖에도 광개토대왕비라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5세기에 세워진 이 비석의 비문이 주몽의 탄생 담으로부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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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 시조 추모왕(주몽)이 나라를 세웠는데, 왕은 부여에서 태어났으며, 천제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태어나면서
부터 (신령스러운 기운이) 있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서)
역사에 발자취를 남긴 제왕 가운데 광개토대왕은 특히 뚜렷이 빛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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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적만큼이나 그 생애를 적은 비문의 글도 웅혼합니다. 바로 지금 중국 땅 집안에
서 있는 광개토대왕비입니다. 오늘날 연구자들은 아마도 고구려 당대의 최고 문장가가
온갖 심혈을 기울여 지은 문장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배경에는 고구려의 국력이
최고조에 달한 5세기 초, 자신감으로 가득 찬 사회분위기와 고양된 역사의식이 깔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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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았을까? 우리는 여기서 비문을 지은 이가 주몽을 ‘천제의 아들’이라 부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부여에서 탈출하여 남쪽으로 내려가다 강물을 만나고, 그 자리에서
이렇게 외치는 대목도 생생히 적었습니다.“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따님을 어머니로
모신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가 무리 짓게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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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 비문'에서)오늘날 12세기 초에 나온 삼국사기나, 13세기 말에 나온 삼국유사
에서 확인하는 천제의 아들 주몽의 건국신화는, 이렇듯 이미 5세기 고구려의 문장가에
의해 기록으로 정착되었습니다. 건국의 아버지 주몽과 견주어,최고의 영웅 광개토대왕을
내세우고 싶었을 것입니다.그로부터 150년쯤 지났습니다. 그러니까 6세기 중반, 중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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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위서"에 주몽의 이야기가 실립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천제’가 슬그머니 ‘일자
(日子)’라는 말로 한 계단 내려와 있습니다. 천제가 아니라, 왕을 상징하는 해 정도로
낮춘 것입니다. 천제와 해 사이는큰 차이가 있지요. 정치적인 의미에서 천제는 속국이
아닌 종주국의 지위를 나타내고, 왕이라면 천제에게서 땅을 받아 대리통치 하며 공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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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치는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몽의 존재를 지극히 높이 두면서 종주국 고구려의
위상을 한껏 과시한 고구려가 아마도 중국은 못내 못마땅했던가 봅니다.
주몽은 동부여에서 B.C.58년에 태어났습니다. 혁거세가 신라를 세운 바로 한 해 전입니다.
그의 탄생에 대해 자세히 적은 기록은 삼국사기입니다. 이 책의 제13권 "고구려본기 제1"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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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의 왕 해부루 가 아들 금와를 얻는 장면부터 시작합니다. 늙도록 아들이 없었던
해부루는 산천에 제사를 지내며 정성을 다하는데, 그가 탄 말이 곤연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리자, 이를 이상히 여겨 돌을 굴려보니 금빛 개구리 모양을 한 어린 아이가
있었습니다. 하늘이 자신에게 준 자식이라 여긴 해부루는 아이를 거두어 키우고 드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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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왕의 재상 아란불이 꿈을 꾼 바, 천제가 내려와 여기에 자신의
아들로 나라를 세우려 하니 동쪽 바닷가 가섭원으로 옮기라고 명령했다 해서, 이에 따라
도읍을 옮기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 했습니다. 본디 도읍이 있던 자리에는 스스로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는 이가 왔습니다. 세월이 흘러 해부루가 죽고 아들이 왕위를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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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금와왕입니다. 어느 날 왕은 우발수 가에서 하백의 딸 유화를 만납니다.
이때 유화는 자신이 해모수를 만나 사귀었으며, 이 때문에 화가 난 부모가 자신을 이곳으로
귀양살이 보냈다는 사정을 말합니다. 금와는 유화를 거두어 궁실에서 살게 하였습니다.
이때 햇빛이 방안의 유화에게 비추면서 따라왔습니다. 유화가 아무리 피하려 해도 햇빛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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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요하게 쫓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태기가 있더니, 유화는 닷 되 정도 크기의
알을 낳았습니다. 괴이한 일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금와왕은 알을 길거리에 버리는데,
짐승들이 먹지도 않고 밟지도 않았으며, 새들은 날아와 날개로 덮어주었습니다.
심지어 왕이 쪼개려 해도 되지 않자 그제야 유화에게 다시 돌려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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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어미 곁으로 돌아와 알을 깨고 태어난 아이가 주몽입니다.
주몽의 이 탄생담은 알을 매개로 한 점에서 혁거세의 그것과 닮았습니다. 다만,
여기서는 부모의 존재가 분명히 밝혀져 있다는 점이 다릅니다. 신화이면서도 보다
인간적이라고나 할까. 주몽이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는 과정 또한 혁거세에 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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훨씬 구체적입니다. 금와의 아들들이 뛰어난 재주를 지닌 주몽을 시기하고 모함하는
이야기, 주몽이 꾀를 써서 금와왕의 좋은 말을 제 것으로 차지한 이야기, 어머니의
충고에 따라 오이ㆍ마리ㆍ협보와 함께 동부여를 떠나는 이야기, 물고기와 자라가
만들어준 다리를 통해 엄시수를 건너는 이야기, 모둔곡에서 재사ㆍ무골ㆍ묵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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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 각각 극씨(克氏)ㆍ중실씨(仲室氏)ㆍ소실씨(小室氏)라 이름 지어주고, 그들을
신하로 삼아 마침내 나라를 연 이야기 등.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비류수 가에
초막을 엮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했다는 것까지도 이야기는 세세하기만 합니다.
이때가 B.C. 37년, 주몽의 나이 22세였습니다.그러나 삼국사기가 정리한 이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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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와 조금씩 다른 기록들이 있습니다. 이는 특히 부여와 동부여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따라 달라지는 점들입니다. 한편,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성을 고(高)로
삼았다고 하였는데, 뒤에 보이는 왕들의 이름이 해(解)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
이 둘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도 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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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국가의 면모를 보이는 고구려, 주변 여러 왕국을 복속시켜 주몽은 왕위에 즉위하자
마자 인접 국가인 말갈을 쳤습니다. 침략할까 염려하여 선수를 친 것입니다.
고구려는 이처럼 처음부터 개척국가의 면모가 강하게 드러냅니다. 물론 이는 주몽의
캐릭터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이어 비류국을 찾아 올라가 송양왕과 만나 담판을 짓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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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은 더 적극적입니다. 송양은 ‘일찍이 군자를 만나보지 못하였는데, 오늘 뜻밖에도
서로 만나게 되니 다행스러운 일’이라며 주몽을 치켜세우나, 주몽은 자신이 천제의
아들이라며 송양의 말을 무시해 버립니다. 더불어 자신의 속국이 되라는 송양의
제의에 분개합니다. 결국, 이듬해 송양은 주몽에게 항복해 왔습니다. 주몽이 왕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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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 지 6년째 되던 해에는,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을 쳤고, 10년에는 북옥저를 쳐
없앴는데 승승장구하던 주몽에게도 슬픈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아직 동부여에 남아
있었던 어머니 유화가 죽은 것입니다. 삼국사기는 이를 주몽 왕 14년 8월의 일로 적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들이 나라를 세워 왕이 되었으나 어머니는 이전에 살던 나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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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머물러 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금와왕은 태후의 예를 갖추어 유화의 장례를
치르고 신묘를 세웠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주몽은 10월에 부여로 사신을 보냈습니다.
금와왕의 은덕에 보답하려는 뜻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5년 후, 곧 왕 19년
4월에 부여에서 부인과 아들 유리가 도망쳐 왔습니다. 주몽은 기뻐하며 유리를 태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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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우는데, 불과 다섯 달 뒤인 9월, 파란만장한 생애의 마침표를 찍고 말았습니다.
누린 나이 겨우 40세였습니다. 유리가 부여에서 도망 나와 아버지 주몽을 만나는
자세한 이야기는 뒤이어 나옵니다. 주몽이 아직 부여에 있을 때 예씨와 결혼하였는데,
황망히 부여를 빠져나가야 했을 때 아이는 아직 뱃속에 있었습니다. 이 아이가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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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입니다. ‘아비 없는 자식’의 수모를 받던 유리가, 아버지가 남긴 ‘일곱 모가 난
돌 위의 소나무 아래’라는 문제를 풀고, 거기서 부러진 칼을 꺼내 고구려로 찾아왔던
것입니다. 이때는 주몽이 재혼하며 얻은 아들 비류ㆍ온조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이복형의 곁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 거기서 백제를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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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중기의 문인 이규보가 영웅 서사시 ‘동명왕편’을 쓴 것은 1193년, 그의 나이
25세 때의 일이었습니다. 고주몽의 생애를 그린 이 ‘동명왕편’에 대해서는 오늘날
학계의 평가가 풍성합니다. 고구려가 다름 아닌 우리 민족사의 줄기에 오롯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그려낸 데다, 역경을 이겨내는 슬기로운 왕의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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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해 후손에게 자긍심을 심어주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뿐인가. 이로부터 80여
년쯤 뒤에 일연의 삼국유사가 나오는데, 민족사의 자랑으로 여기는 이 책도 집필의
동기가 이와 비슷합니다. 이야말로 젊은 시인의 시 한 편이 고구려의 역사를 우리의
것으로 자리 매김하고 웅변한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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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3년이라면 명종 23년이려니와 이는 곧 고려 무인정권이 시작한 지 23년째임을
말합니다. 이 무렵 무인정권의 두 번째 실권자 이의민이 10년째 그 권세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의민이 누구인가? 아버지는 소금과 체를 파는 장사꾼이요, 어머니는
절에서 일하는 노비였습니다. 오직 힘만으로 권력을 잡고 전횡을 부리던 시절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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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벌한 세월, 왕이 있으나 허울뿐이고, 같은 무인들끼리도 더 힘 있는 자가 약한 자를
죽이는 사이, 나라는 풍전등화와 같은 신세였습니다. 고려인이 그토록 사모해 마지않던
송나라는 북쪽 오랑캐에게 쫓겨 남쪽으로 옮겨간 지 오래되었습니다. 비극적인 시대에
태어난 이규보는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옛 영웅을 떠올렸습니다. 앞선 시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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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이 버렸던 자료 무더기 속에서 그는 먼저 동명성왕 주몽을 만납니다.
그의 고백은 이렇게 시작합니다."처음에는 믿을 수 없어서 귀신이고 환상이라 생각했는데,
세 번 거푸 탐독하고 음미하니 점차 그 근원에 이르게 되어, 환상이 아니고 성스러움이며,
귀신이 아니고 신(神)이었다." ('동명왕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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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와 민족이 어려움에 부닥칠수록 성스럽고 신이한 이야기는 힘을 발휘합니다.
환상이며 귀신으로 보이던 이야기가 국난의 시기에 살았던 이규보에게 힘을 주었듯이,
오늘날 우리 또한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이 땅에 나라를 세우고 민족의 정체를 만들어 간,
성스럽고 신이한 이야기를 가슴에 새길 일이 아니겠는가?
2015.7.15.wed.헤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