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변소미는 초등학교 3학년 예쁜 여자아이랍니다. 쿡쿡, 내가 날 보고 예쁘다고 말해놓고 나니까 조금 쑥스럽긴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반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겁니다. 백설공주 이야기에 나오는 요술거울이 와도 얼마든지 자신이 있답니다. 이렇게 예쁜 내가 오늘은 매우 쓸쓸하고도 슬프답니다.
“소미야, 오늘 엄마 친구가 오거든. 그러니까 예쁘게 하고 얌전해야 된다, 알았지?”
일요일인데도 꼭두새벽부터 일어나서 분 바르고, 없는 눈썹 억지로 그려내고, 립스틱 짙게 바르고 생난리를 치던 엄마가 내 연약한 두 어깰 빠갤 듯이 부여잡고 당부한 말 때문이지요. 나에 비하면 한참이나 처지는 외모를 가진 울 엄마지만, 화장발 하나는 끝내주게 받는 편이라, 서른 중반의 다른 아줌마들에 비해선 주위에 남자들이 꽤 꼬이는 편이지요. 예쁜 만큼 영특하기도 한 나는 오늘 올 손님이 남자란 걸 직감했죠. 하긴 울 엄마와 살아온 세월이 10년인데, 천성이 게으른 엄마가 난데없이 부지런을 떠는 걸 보면 왜 모르겠습니까?
나는 엄마 몰래 내 방으로 들어와서 책상 밑에 깊숙이 감추어뒀던 하트모양의 상자를 꺼냅니다. 보기엔 평범한 초콜릿 상자지만,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물건이랍니다. 나는 상자를 열고, 그 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냅니다. 아주 잘생긴 한 젊은 남자가 보석처럼 환한 미소를 머금고 있습니다. 사진 속의 잘생긴 남자는 4년 전에 하늘나라로 출장을 떠난 아빠랍니다.
“아빠, 걱정 마세요. 엄마는 내가 지킬게요.”
나는 사진 속의 남자에게 진한 키스를 하고 나서 거실로 나갑니다. 초인종이 울렸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코맹맹이 소릴 내면서 나비처럼 날아갑니다. 여자란… 혀가 저절로 차집니다.
“소미야, 뭐하고 있니? 인사 드려야지. 엄마 친구야.”
엄마의 친구는 구두를 벗고 실내화를 신자마자 갑자기 무릎을 꺾으면서 외마디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 남자는 새파래진 얼굴로 실내화 속에서 앙증맞게 생긴 압정 하나를 꺼내 들고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괜찮아,를 연발했습니다.
그런 대로 밉상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엄마에게 교육받은 대로 생쥐처럼 쪼르르 달려가서 명랑한 인사를 선사해주었죠. 내 예쁘고 앙증맞은 인사에 남자의 찡그렸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답니다. 엄마는 남자로부터 건네받은 압정을 한번 째려보고는 휴지통에 던져버렸습니다.
“커피 끓이는 동안, 우리 소미하고 얘기나 하고 있어.”
나는 당연히 여기 앉으세요, 하며 제법 예의바르게 손님을 접대했고요. 예쁘고 똑똑한데다 예의까지 바른 나는 정녕 신의 걸작품이란 말입니까?
나와 그는 마주 보고 앉아서 참으로 지루하고도 상식적인 대화를 나눌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엄마의 등장으로 우리의 쓸데없는 대화는 막을 내렸습니다. 요조숙녀인 나는 할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유감스럽지만 내 방으로 가도 되겠느냐고, 정중히 묻고 퇴장을 했습니다. 엿듣기야말로 최고의 정탐이며, 탁월한 감시망을 구축할 수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해서 나는 몇 가지 정보를 획득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남자는 최근에 우연히 만난 엄마의 대학동창이며, 3년 전에 이혼을 했답니다. 이혼사유는 뻔하지 않나요? 뻑 하면 그 놈의 성격차이 운운하는데, 성격이 얼마나 못 돼 먹었음 생사람이 헤어지기까지 했겠습니까? 나는 두 사람의 노는 꼴이 하도 닭살스러워서 손톱만큼 열어두었던 문마저도 닫아버렸습니다.
“아이, 이거 어째? 누가 의자에다 껌을 붙여놓은 거야! 미안해서 어쩌지.”
엄마의 호들갑스런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남자는 괜찮다는 말 밖에 배우지 못한 사람 같았어요. 나는 남자의 꼴이 궁금해서 나가봤죠. 껌이 다른 곳으로 옮겨 붙을까봐 화장실로 엉거주춤 가는 모습은 정말 가관이더군요. 그것까진 그래도 괜찮았는데, 쿡쿡! 화장실 안에서 쾅 소리가 나더니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집이 흔들리더군요, 글쎄.
“응, 괜찮아. 슬리퍼 밑에 이게 끼어 있었나봐. 난 괜찮아.”
울상이 되어 욕실 문을 연 엄마를 나자빠진 채로 올려다보는 그의 손에는 작은 비누 하나가 달랑 들려있었습니다. 물을 뒤집어 쓴 생쥐 꼴을 하고서 말입니다. 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으며 고양이 걸음으로 방으로 돌아왔죠.
똑똑!
노크소리 후에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더니, 엄마의 작은 추리닝 속에 겨우 몸을 쑤셔 넣은 그가 마치 쏘시지 같은 모습으로 들어왔습니다. 모습이 약간 처량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난 자업자득으로 풀이하기로 했습니다.
“소미라고 했니?”
“네.”
“아저씬 엄마하고 친구야. 대학 때부터 알고 지내던… 소미도 학교에 남자 친구 있지? 그거랑 마찬가지야.”
난 고개를 끄덕이면서, 속으로는 사기 치지 마, 했습니다.
“앞으로 우리 사이좋게 지내자, 소미야.”
그러면서 내게 손을 쑥 내미는 게 아니겠어요. 난 잠시 당황했죠. 하늘나라에 출장 중인 아빠 외에 다른 외간 남자의 손을 덥석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알다시피 나는 엄마와는 달리 정절을 아는 여자거든요.
그런데, 그런데, 말이죠. 추리닝 속에 억지로 몸을 쑤셔 넣고 있는 커다란 몸집의 남자는 참 슬프고 외로운 눈동자를 갖고 있지 뭡니까? 남자는 가늘고 긴 손가락을 가진 손을 내민 채 바르르 떨고 있었어요. 내 맘도 따라서 바르르 흔들리지 뭐예요. 나는 하는 수 없이 그의 손을 잡아주었어요. 쏘시지 같은 모양을 한 그 남자는 내 손을 보물처럼 감싸며 웃었죠.
“엄만 외로운 사람이야. 내가 외로운 엄마의 친구가 되면 안 될까? 실은 나도 좀 외롭거든.”
나는 저절로 흘러나오는 눈물을 억제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답니다. 눈에 뭐가 씌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나는 책상 밑에 있는 상자 속의 남자와 눈이 무척 닮은 추리닝 속의 남자를 그만 받아들이고 말았답니다.
아빠, 미안!
남자는 나와 포옹을 하기 위해 무릎걸음으로 다가왔습니다. 난 아예 눈을 감아버렸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찌이익!
남자는 터져 버린 민망한 부분을 손으로 가리고 겸연쩍은 붉은 미소만 흘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의 미소가 너무 붉어서 그만 내 맘도 같은 색깔로 채색되고 말았습니다.
“주세요. 제가 꿰매드릴 게요. 엄마 아시면 난리 날 거예요. 젤 아끼는 추리닝이거든요.”
“그러니? 알았다. 엄마가 알기 전에 꼭 해결해줘야 한다.”
남자는 사각팬티 차림으로 방안을 왔다 갔다 하며 나의 작업을 신기한 듯이 쳐다봤습니다. 난데없는 바느질을 하면서 난 하늘나라에 출장 중인 아빠에게 마음속으로 전보를 쳤죠.
‘게으르고 성깔 사나운 화장마녀인 울 엄마의 맨 얼굴을 보고도 놀라지 않을 것 같은 남잘 찾았어요, 아빠. 아빤 소미의 통찰력을 믿죠? 이제 아빠도 하늘나라에서 엄마보다 훨씬 예쁜 선녀 아줌마 만나서 행복하게 사세요, 네?’
나는 개비된 추리닝을 남자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고마워했습니다. 내가 봐도 초등학교 3학년짜리의 실력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완벽한 수선이었죠.
“어서들 나와요! 점심 먹게.”
엄마의 부르는 소리에 나와 아저씨는 한 묶음이 되어서 나갔습니다. 맛있는 볶음밥 냄새가 진동을 했어요. 내가 정중한 동작으로 손님에게 자릴 권한 것까지는 참 좋았는데, 방석 밑에 깔아둔 바늘을 챙기지 못한 건 정말 고의가 아니었다고요! 제발 믿어주세요.
첫댓글 매번 감탄! 연발입니다.^^